지지 않는 하루 - 두려움이라는 병을 이겨내면 선명해지는 것들
이화열 지음 / 앤의서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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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첫번째 화살이다. 그 고통을 자책, 원망, 과장하거나 스스로 연민이 지나쳐 두 번째 화살을 스스로 쏘고 산다. 두번째 화살을 마음으로 잡은 듯한 글, 담담하고 아름답다. 하루 만에 다 읽어버렸다. 건강과 평온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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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0 1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혜덕화님 정말 오랫만에 인사드려요. 저 기억하시죠? 오랫만에 혜덕화님 잠언같은 글 보니 좋네요. 건강과 평온이 함께하길 저도 기원합니다

혜덕화 2021-02-10 19:27   좋아요 0 | URL
예, 바람돌이님도 잘 계시죠? 코로나 시대, 이런 책이 있어 감사하고 이렇게 인사 해 주는 이웃이 있어 감사해요. 오랫만에 서재 마실 나왔는데 딱 마주쳤군요. ^^
 

  p.44-46

당신은 당신의 슬픔에 대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까? 무척 사랑했던 사람이나 물건을 잃으면 슬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완전한 최후의 소멸이기에 그것으로 인한 슬픔도 엄청나게 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커다란 슬픔 조차도 그것을 침착하게 살펴보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정확히 무엇에 대해 슬퍼합니까?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당신과 당신의 부인은 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특정 운명을 지니고 태어날 것으로 누군가와 어떤 협약이라도 맺은 적이 있나요? 그 아이를 임신한 것 자체도 우연이 아니었던가요? 태아가 자궁에서 여러 위험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것도 또 다른 우연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사내아이였다는 것도 우연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당신의 아들을 만난 것이 우연의 연속이었으며, 단 한 번이라도 이러한 우연이 당신의 뜻대로 일어난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우연이 막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정확히 무엇에 대해 슬퍼합니까? 당신의 아들이 미래에 겪게 될 약간의 기쁜 경험과 많은 슬픔 경험을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슬퍼합니까? 아니면 그가 당신에게 줄 기쁨과 편안함을 잃게 된 것을 슬퍼합니까? 이 모든 것은 관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십시오.

방문자: 정말 놀라운 말씀을 들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관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마하라지: , 이제야 진실에 도달할 수 있겠군요. 당신이 개체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개체는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자아는 이러한 착각의 희생물입니다. 개체가 존재하며 그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고 믿고 착각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식입니다. 당신의 관점을 바꾸십시오. 이 세상을 당신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보지 마십시오. 당신이 당신 자신이라고 상상하고 있는 사람을 당신 의식 속에 나타나는 어떤 것으로, 곧 꿈의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한 부분으로 바로 알고 그냥 지켜만 보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현상 전체를 이 세상 밖에서 바라보십시오. 참된 당신은 의식의 내용물에 지나지 않는 몸-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자신을 몸-마음이라고 여기는 한, 당신은 슬픔과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의식 너머에 아버지나 아들, 이것 또는 저것이 아닌, 그냥 존재하는 참 나가 있습니다.

참된 당신은 어떤 경험으로부터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슬픔조차도 그냥 받아들이세요. 이 세상에 당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거나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당신은 이 세상을 밖에서 바라보게 될 것이며, 무대에 올려진 연극이나 스크린에 비춰진 영화를 보면서 찬탄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슬퍼도 하겠지만 깊은 내면에서는 어떤 동요도 없을 것입니다.

 

 

질문이 너무 냉정해서 깜짝 놀랐다.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기쁠 때, 그 감정을 알아차리는 내가 있음을 보면, 감정은 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를 관찰하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은 알 듯하지만 세상 밖에서 나를 보고 동요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글이 마음으로 쑥 들어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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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 툴레로 시작해서 마이클 싱어, 아디야산티, 데이비드호킨스까지 그들의 대표작을 하나씩 읽었다.

에크하르트 툴레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는 아마 5번은 읽었을 테고, 유투브로 오프라윈프리와 툴레의 북토크까지 찾아서 봤다.

이들의 공통점은 수행을 삶의 목표로 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갑자기 엄청난 깨달음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호킨스는 정신과 의사이니 사람의 마음과 몸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는 직업이었겠지만, 그도 또한 어린 시절의 갑작스런 체험이 그의 삶에 대한 탐색과 깨달음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그들의 서술은 일관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본성, 자아, 혹은 의식, 참 나 무엇으로 부르건 그들이 체험한 것은 나라고 할 개체는 없고 세상과 연결된 나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티비에서 김홍근 교수의 마음치유 강의 내용을 인용하면, <우리가 라고 할 때는 이 작은 몸에 한정되어 몸의 경계, 이 체구가 자신이라고 믿지만 마음의 경계는 어디인가? 내가 마음으로 서울에 있는 친구를 생각하면 내 마음의 경계가 서울인가? 멀리 산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의 경계는 저 산까지인가? 이런 탐구를 하다보면 마음은 경계가 없음을 알게 된다.> 고 한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다 보니 예전에 이해하지 못하고 읽었던 다른 책과도 연결이 되었다. 십년 전에 사놓고 이해하지 못했던 담배가게 성자를 무심코 펼쳤는데 어떤 분이 죽음에 대해 질문하는 부분이 나왔다. 예전엔 피상적으로 이해만 했던 부분이 완전히 마음으로 들어왔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내 삶을 내가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데이비스 호킨스의 말처럼 음악을 듣듯이, 사라지는 한 순간, 지금 이 순간이 있을 뿐이다.

1초 전으로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지금 이 1초가 얼마나 소중한 영원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내 딴엔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도 돌아보면 그때 내가 이것을 알았더라면하는 후회와 자책의 시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서툰 삶을 살았던 나를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더 깨어서 잘 보고 살아야겠다. ‘조고각하

 오늘 내가 행하는 업이 내일이 될지, 다음 생이 될지 알수 없지만 결국 내가 받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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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굿따라 니까야 3 - 다섯의 모음, 숫자별로 모은 경
대림 엮음 / 초기불전연구원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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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는 것에 탐닉하여 여자나 남자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이 사람은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는 것에 탐닉하여 마을이나 숲에서 주지 않은 것을 도둑질했습니다.
이 사람은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는 것에 탐닉하여 남의 여인들과 남의 처녀들을 범했습니다.
이 사람은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는 것에 탐닉하여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손해를 끼쳤습니다.’라고 그가 행한 사악한 짓을 일러주면 왕들은 그를 잡아가서 그가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섭취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거나 사슬로 묶거나 추방을 하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대들은 이러한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보기도 했고 듣기도 했으며 앞으로도 듣게 될 것입니다."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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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 공부방에서 영어 니까야를 함께 읽는다.

쉬는 시간에 어느 노처사님이 말씀하셨다.

나이가 들어가니, 우리도 어떻게 죽을 건지 연습을 좀 해야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옆에 계시던 처사님이 "죽어야 죽는거지 죽는 연습을 어떻게 하노?"해서 웃고 넘어간 적이 있다.

 

불교대학에서 청화스님의 마지막을 들었다.

자기 몸을 혼자 건사 못하게 되자 서서히 드시는 것을 반으로 줄이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또 반으로 줄이고, 또 줄이고 하셨다고.

그 마지막 모습을 뵈러 갔는데, 너무 슬펐다고.

 

그 말을 들으니 문득, 동물도 죽을 때나 아플 때가 되면 음식을 끊고 혼자 동굴 속에 있다고 들었는데 사람이 코로 튜브를 연결해서 단지 숨만 쉬게 해서 5년 10년 더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헬렌 니어링과 스콧니어링의 책을 읽으며 이렇게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요즘 주변에 보면 요양 병원에서 의식도 없이 5년, 10년 계시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듣고 보면, 정신이 좋을 때 연명치료에 대한 의견을 자식에게 분명히 하는 것, 배우자에게도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것도 본인의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아닌가 싶다.

우리 부부는 서로 연명치료를 하지 않기를 아이들 앞에서도 이야기하고 우리도 그러자고 약속했지만, 과연 청화스님처럼 스스로 음식을 줄이고 줄여서 죽음을 고요히 맞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보면 평소에 연명치료 하지 마라. 죽을 때 되면 그냥 갈란다 하시던 친정아버지가 생각난다. 말씀처럼 가셨지만 가끔은 너무 그립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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