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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연인은 서로의 광기를 일면 참아주고 있어. - P89

하지만 스물일곱의 어느 날 나는 어떤 애한테 심하게 반해버렸다. 걔도 나한테 반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반했다고 해도 나만큼 심하게 반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짝사랑인의 심정을체감했다.
코가 깨진 기분으로 서점에 갔다. 짝사랑인은 가만히 있으면 자신의 서러운 사랑 얘기에 매몰되어버리므로, 재빨리 세상의 다른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의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 마음을다스릴 줄 아는 나의 지혜에 거듭 감탄하며 신중히 책을 골랐다.
막 구매한 좋은 책 한 권을 들고 서점 구석 의자에 앉았다. 좋아하는 소설가의 신작이었다. 호기롭게 읽기 시작했다.
한 쪽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5분도 안 돼서 나는 책을 덮었다.
좆됐다고 생각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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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검열‘에는 ‘검열의 언어‘를 따로 쓸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듣는 순간 바로 ‘이건 검열이다!‘라고 눈치챌 수 있을 만한 언어 말이다. 나는 내가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열의 언어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 P44

검열을 당한다는 것은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것은 대단히 생산적이거나 발전적인 무엇이 아니라, 나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속의 장기와 세포 하나하나까지를 양말 까뒤집듯이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검열은 잔인하다. 검열하는 쪽은 간편하되 당하는 쪽에서는 정말로 내가 당당한 피해자인지를, 내 쪽에 정말로 한 점의 원인 제공도 없었는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잔인함의 핵심이다. 검열은 저쪽에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그걸 지속하는 것은 이쪽, 나 자신이 된다는 것 말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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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나를 낳고 키운 어른들의 기질은 대체로 결핍보다는 과잉에 가까웠다. 식탐이든 성욕이든 표정이든 정서든 말이든 간에 모자라기보다는 넘쳤다.
자주 듬뿍듬뿍 말하는 어른들 속에서 자랐다. 그리고 지금은 빈말을 줄이는 연습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야 나와 나를 둘러싼이들에 대해서 제대로 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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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작은 가능성에도 성실해진다. - P38

왜 좋아하는 사람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조금 슬퍼지는 걸까. 과거로 가서 걔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없는 과거도 감히 사랑하고 싶어진다. 시간 앞에서는 누구나 무방비상태니까. 성장은 대부분 타의로 이루어지니까. 누구에게나 있을 유년기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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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가 내 앞을 혹은 내 뒤를 안고 있는 동안엔 내가 뭘 얼마나 잘 하는지는 잠시 아무 상관 없어지는 느낌이다. 동시에 나는 내가 나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런 희귀한 순간은 남을 통해서만 아주 가끔 가능해진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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