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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왼손 ㅣ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서정록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은 독자에게 '사고 실험'을 요구한다. 행성 게센과 게센인들, 그들의 문명은 분명히 하나의 '가정'이다. 에커먼의 엔보이 겐리 아이와 그의 사명 또한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들은 작가의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물학적 차이를 보이는 서로 다른 문명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서로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주인공은 양성인류인 겐리 아이와 단성인류인 게센인 에스트라벤이다. 둘은 서로에게 외계인이다. 겐리 아이는 에스트라벤을 이해할 수 없고 에스트라벤은 겐리 아이를 이해할 수 없다. 그 둘을 갈라놓는 것은 게센인들의 생물학적 특성이다.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 없어진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작가의 생각은 이렇다. 전쟁이라는 개념이 없어진다. 공격성이 감소한다. 성적 '평준화'를 통해 성적 착취와 욕구 불만이 해소된다. 성의 구분으로부터 생기는 여러가지 고정관념들, 성에 따른 역할에 대한 강박관념, 오이디푸스 신화, 이원론적 생각들이 없어지거나 약화된다.
그럴 수도 있겠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과연 성의 구분이 없어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저 머리속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그럴싸하다고 생각해볼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겐리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게센인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몇년간을 그들의 세계에서 살아보았지만 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었다. 마찬가지로 게센인들도 겐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성과 여성, 고정된 성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인류를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그저 외계인일 따름이었다.
서로에 대한 몰이해의 벽은 겐리와 에스트라벤의 빙하 여행을 통해서 무너진다. 양성인류와 단성인류의 대표격이랄 수 있는 둘은 세 달 가까운 고통스런 여정을 통해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생물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모두 인류라는 사실을. 인류의 공통적 특질을 소유하고 있음을. 작가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를 인류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작품을 휴머니즘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작가는 단순히 '성에 대한 가정과 휴머니즘에 의한 극복'이라는 식으로 주제를 한정하고 있지 않다. 그는 그보다 더 나아간다. 카르하이드 왕국의 한다라교에 대한 묘사에서 나는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한다라교는 그 교리나 이론이 불분명한 종교이다. 이 종교에서 확실한 생각은 살아있는 생명은 생명계 전체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