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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기대선 여자 빙허각
곽미경 지음 / 자연경실 / 2019년 1월
평점 :
조선 여성 실학자,
빙허각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
소설의 주인공 빙허각은 『규합총서』라는 실학사에 남을 탁월한 가정 백과사전을 쓴 사람으로, 국어 시간 혹은 국사 시간에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규합총서』는 언문으로 쓴 '규방문학' 혹은 '실학 서적'으로 소개된다. 『규합총서』에는 음식, 요리법, 옷 짓는 법, 세탁, 태교, 육아 등 가정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내용이 상세하고, 유익하며 인용한 부분은 분명히 밝혀 당시에도 널리 읽혔다고 한다.
이 소설은 빙허각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이다. 역사소설이지만 문장과 내용이 어렵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잘 읽힌다. 군데군데 순수 우리 말 표현이 있어 반갑다. 저자가 사료를 많이 참고했는지 그 당시 묘사가 생생하다. 다만, 빙허각이 세손 이산을 똑바로 쳐다보는 장면이나, 연행단을 따라 청에 갔다가 건륭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1:1로 대화하는 장면들은 사실 믿기 힘들다. 궁 정원에서 만난 궁녀들의 시선이 모두 이산에게 향하며 미소 짓는 장면도 마찬가지. 이 부분은 작가의 상상으로 본다.
빙허각은 1759년에 태어나 1824년에 죽었다. 영조 시대에 태어나 정조 시대를 거쳐 순조 대에 죽은 것이다. 빙허각이 살던 시기가 서구 문물이 물밀듯 들어오던 때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정기적으로 연행단을 꾸려 청의 북경에 갔는데, 이 연행단이 그 당시엔 무척 놀랍고 신기하며, 신묘하도록 일상에 도움 되는 서양 문물과 학문을 들고 조선에 돌아온다. 그리고 청에서 싹튼 변화의 바람을 조선에도 가져와 흩뿌렸다.
따라서 조선에도 새로운 큰 바람이 불었다. 소위 깨인 가풍을 지닌 가문이 생겨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나라가 뒤집어진 전쟁으로 급격하게 보수화로 돌아섰던 조선이 다시 새롭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 빙허각이 태어났다.
빙허각의 아버지는 영조 말에 예조판서와 수어사를 지냈다. 이름은 이창수,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 들을 만큼 똑똑했고 과거도 장원 급제하였다. 무도 뛰어나 말도 잘 타고, 사냥도 잘했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를 꼭 빼닮고 태어난 자식이 빙허각 이선정이다.
이창수는 선정을 무척 좋아하고 아꼈다고 한다. 선정이 어머니를 꼭 닮은 수려한 외모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강해 가르치는 재미가 극히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재치 있는 말을 잘해, 아버지나 친척 어르신, 혹은 아버지의 지인들을 기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 이창수는 바쁜 나랏일에도 불구하고, 짬을 내 어린 선정이를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선 땅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지만, 똑똑한 여자아이를 곱게 보기만 할 시대는 아니었다. 소설 『허공에 기대선 여자』는 이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여자로서는(?!) 당시 너무 똑똑했던 빙허각. 주위 사람들의 걱정이 많았다. 걱정보다도 헐뜯고, 있는 말 없는 말을 붙어 깎아내는 소문이 많았다. 하지만 빙허각은 개의치 않았고, 누가 뭐라 하든 본인이 하고자 한 바와 하고자 한 공부는 손에서 놓지 않고 열심히 한다.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든, 어디에 살든, 스스로 찾아가 스승으로 삼고 배웠다. 그때만 해도 여성의 몸, 이름 있는 가문의 막내딸이 어디론가 배우러 다니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기어코 본인의 뜻을 이룬다. 본인 스스로가 지은 이름, '빙허각'도 이런 데서 나왔다.
"기댈 빙, 빌 허, 집 각 빙허각이온데 '허공에 기대어 선다'라는 뜻으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담은 이름입니다." (-107쪽)
곽미경, 『허공에 기대선 여자 빙허각』, 자연경실, 2019
본인에 대해 어떤 소문이 돌든, 가까운 친척이 오랜만에 놀러와 칭찬하는 척 심술궂은 마음을 내비쳐도 빙허각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빙허각이 기죽지 않고 살았던 건, 본인 스스로도 본인이 똑똑한 걸 잘 알았고, 또 그런 자신을 전적으로 사랑해 주는 부모가 뒤에 든든히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이 소설에는 빙허각의 오빠도 나오는데 이 사람도 실존 인물이다. 이름 이병정. 소설 속에는 오빠가 빙허각을 질투하고, 애써 무시하는 듯 나오는데(경쟁해야 하는 남자 동생이 아나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어떤 글에는 오빠 이병정과 빙허각이 무척 친했다고 한다(어느 사실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허빙각이 오빠에게도 사랑을 받고 귀여움 받았다 하면 그 외의 다른 사람에게 어떤 소리를 듣든 쉽게 흔들리지 않을 자존심, 자존감을 가졌을 거라 생각한다.
또 운도 있었다. 소설 초반에 빙허각의 언니, 숙정이가 나오는데 숙정이는 자유로운 가풍 속에 살다가 고지식하고 남존여비에 대한 믿음이 강한 가문에 시집갔다가 그만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빙허각도 어쩌면 숙정이가 시집간 집안처럼 보수적인 가문에 시집갔다면 그녀의 재능이나 능력을 수이 펴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은 빙허각의 어린 시절(어리다곤 해도 시집갈 나이 대부터 시작한다)과 자기 소원 대로 연행단을 따라 청의 북경에 간 이야기, 팔자가 드세다고 쉽게 혼처를 찾지 못하다가 수에 정조가 될 이산과 혼인할 뻔한 이야기, 후에 남편이 되는 서유본과의 첫 만남 이야기가 펼쳐지고 서씨 가문에 시집가 살림을 잘 해내고 남편과 함께 공부하며 때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건을 발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나 서씨 가문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 서씨 가문 사람들도 다 실존 인물들로 후에 실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다.
소설에도 나오지만, 남편 서유본의 바로 아랫동생 서준평은 빙허각이 직접 공부를 봐주고 함께 공부하기도 하는데 이 서준평은 『임원경제지』를 쓴 서유구다. 실제로 서유구가 어렸을 때 빙허각이 직접 가르쳤다는데, 서씨 가문에서도 그만큼 빙허각의 실력을 인정한 것이다.
빙허각은 삶에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지만 대체로 평탄하게 산다. 정당의 흐름이 바뀌어 서씨 가문에 위기도 찾아오지만, 그렇게 힘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한 배우자가 있었기 때문일 듯. 행복한 삶, 행복한 결혼이지 않았나 싶다. 당시 조선시대에 흔치 않은 일이었다고 본다.
빙허각은 어릴 때, 남편이 죽어 남편 뒤를 이어 죽는 소위 열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으스스 오싹해 하며 질색한다. 자긴 그렇게 살기 싫다고. 하지만 빙허각은 남편 서유본이 죽자 두 번의 자살 시도를 하고 결국 아무것도 안 먹고, 씻지도 않은 채 그냥 누워만 있다가 몇 개월 후 남편을 따라 죽는다. 아마도 그녀는 죽을 때 '이 죽음은 사회의 압박이나 시댁의 압박이 아닌 오로지 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랑과 신뢰, 배움으로 충만했던 삶
빙허각은 한중일 세 나라 통틀어 99명을 꼽은 실학자 중 유일하게 여성 실학자라고 한다. 허공에 기대어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본인의 삶에 주인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컸기 때문에 『규합총서』로 대표되는 <빙허각전서>를 썼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과연 그녀가 허공에 선 여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아해진다.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사랑해 주는 아버지와 어머니, 서로 공부에 뜻이 맞아 한평생 함께 배우고 익히며 기뻐하는 남편, 스승으로 모시며 잘 따라준 시동생, 언제나 신뢰로 며느리를 대한 시댁 어르신, 시댁 친척들. 이 책을 덮으며 정말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도 의지지만 가정환경과 본인이 누구와 인연을 맺고 살아가느냐이다.
빙허각의 이름 뜻은, 허공에 기대선다는 뜻이지만 그녀의 삶은 사랑으로 충만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는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와 사랑을 나눌 것인지. 그래서 그 흘러넘치는 사랑을 다시 누구에게 줄 수 있을지. 나는 또 누구를 신뢰하고, 누구와 믿음을 나눌 것인지. 그래서 그 흘러넘치는 믿음으로 다시 누구를 신뢰할지.' 이런 생각 했다. 결국은 사랑과 신뢰, 믿음임을...
이 책은 아마도 여성의 사회적 위치, 페미니즘 시각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성', '남성', '성 역할', '조선시대 보수적 분위기' 등등 이런 걸 다 떠나서 '사랑과 믿음'만 생각이 났다. 진정 좋은 건 단지 성 역할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걸 떠나, 그걸 뛰어넘어 사랑과 신뢰를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빙허각이 '여성'으로서 부각 받기 보다 좋은 인연들(부모님, 남매, 남편, 시댁, 스승 등)을 만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다간 '인간'으로서 부각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