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에디터스 컬렉션 10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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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언가가 내게 일어났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어떤 통상적인 확신이라든지, 어떤 명백한 사실로서가 아닌, 어떤 병처럼 찾아왔다. 이것은 음험하게 조금씩 자리를 잡았고, 나는 조금 이상하고, 약간 거북한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그것은 한번 자리를 잡고 나자 더이상 움직이지 않고 아주 조용히 있어서, 나는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것은 공연한 걱정일 뿐이다, 라고 스스로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게 만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기_1932년 1월 25일 월요일

물체들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것을 만질 수 없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하고, 사용한 후에는 제자리에 두고, 그것들 가운데에서 살아간다. 그것들은 유용한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게는 다르다. 그것들은 나를 만지는데, 이게 견딜 수 없이 느껴진다. 난 마치 살아 있는 짐승들과 접촉하듯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이제 알겠다.내가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히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자, 이제 가야하는데, 마음이 분명치가 않다.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내게 재능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하지만 난 한 번도, 한 번도 이런 종류의 글을 써본 적이 없다.

...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러면 그 소설을 읽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앙투안 로캉탱이 이 책을 썼어. 카페에서 빈둥대던 빨간 머리 친구지." 그리고 내가 이 흑인 여자의 삶을 생각하듯 내 삶을 생각할 것이다. 귀중하면서도 반쯤은 전설적인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말이다. 한 권의 책. 물론 그것은 우선은 지루하고도 피곤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이 완성되고, 내 뒤에 놓일 때가 올 테고, 그것이 발하는 약간의 빛이 내 과거 위에 떨어지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그 책을 통해 나의 삶을 혐오감 없이 떠올릴 수 있으리라. 어쩌면 어느 날, 나는 바로 이 시간을, 내가 웅크리고 앉아 열차에 오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이 우울한 시간을 생각하면서,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을 느끼며 "모드 게 시작된 것은 바로 그날, 그 시간이었어"라고 중얼거릴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나는 마침내 자신을 -과거 안에서, 오직 과거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리라.

 

 

 

 

살면서 한번씩 느끼는 구토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천재적인 철학가의 놀라운 소설 <구토>를 읽으면서 사르트르의 또 다른 매력에 반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명언과 실존주의 대명사로 잘 알려진 사르트가 소설가로서의 작품성과 인지도도 있었다니 아직 배우고 읽어야할 것이

<구토>의 화자 '로캉탱'은 어느날 문득 "그 무언가가내게 일어났다"는 서스펜스 주인공같은 말로 글을 시작한다.

마치 사르트르 본인의 이야기인가 싶을 정도로 자전적인 느낌이 물씬나는데 이것, 저것, 그것 등 추상적인 표현과 꽤나 어려운 말들로 사유를 가지고 노는 사르트르의 글은 읽는 재미와 '구토'의 재미를 동시에 주었다. 나만 이렇게 난해한 것인가? 생각이 들 때면 '사르트르 소설'을 검색해보라.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공감하며 난해한 글 속에서 많은 의미들을 찾아주었다.

근데 난해해서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는글이 있는가하면, 난해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하며 계속 읽게되는 글이 있는데 사르트의 <구토>도 그런 책인 것 같다.

마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속 '뫼르소'처럼 어느날 문득 드는 생각과 감정은 <구토>의 '로캉탱'에게 어쩌면 삶을 바꾸는 놀라운 하루였을 수도 있다. 그저 그런 평소와 같은 하루겠지만 그 '무언가가' 로캉탱 안에서 자리잡았다.

처음 <구토>의 제목을 봤을 때 부정적인 느낌이 강했다. 삶의 막막함이나 부조리함으로 생기는 어지러움증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르트르의 '구토'는 일상에서 당연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안에 아이러니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현상이라고 느껴진다.

물론 하루종일 구토를 느끼면 문제가 있고 그래서도 안되는 것이지만, 소설 속 구토의 느낌은 어느 벤치나 카페에 앉아 거리를 보면서, 자신이 글을 쓸 수 있음에 행복함을 느끼며 소설을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마음처럼 아이러니함 속의 행복과 다짐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서를 접하면서도 어렵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지만, 이번 <구토> 를 읽으면서도 다시 읽고, 또 다시 읽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게 읽은 이 작지만 강한 힘이 있는 <구토>는 내 이해와는 별개로 사르트르의 사유와 철학을 함께 느끼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주인공이 느끼는 불완전함을 함께하고, 만나는 인물들과의 관계와 마지막을 나누면서 '구토'라는 단어와 감정을 이렇게 오래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딘가 사르트르의 다른 글에서 본 것인데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그를 통하여 만족스럽지는 못하나마 내 삶의 본질을 표현했다."라고 했다는데

사르트르의 실존과 존재의 치열한 생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고 사르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말>,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함께 <구토>라는 작품도 소중하게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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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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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모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기를 펴고 싶었고,

성장도 하고 싶었다."

올케와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기분이 고약했다. 죄책감 같기도 하고 소외감 같기도 했다. 차라리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드러내게 될까 봐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래도 희망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남아 있지만 우리 식구에겐 그게 없었다. 엄마도 남아서 그들처럼 하려고 나만 피난을 보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미처 그렇게 하기 전에 엄마의 아들은 효자답게 살아서 돌아와 지금 엄마의 품 안에 있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 저들보다 행복할까. 엄마가 행복하건 말건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에게 중요한 건 내가 여기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게 참을 수 없이 분하고 억울했다.

꿈꿨네, 다시는 꿈꾸지 않기를

"욕먹을 소리지만 이런저런 세상 다 겪어 보고 나니 차라리 일제시대가 나았다 싶을 적이 다 있다니까요. 아무리 압박과 무시를 당했다지만 그래도 그때는 우리 민족, 내 식구끼리는 얼마나 잘 뭉치고 감쌌어요. 그러던 우리끼리 지금 이게 뭡니까. 이런 놈의 전쟁이 세상에 어딨겠어요. 같은 민족끼리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형제간에 총질하고, 부부간에 이별하고, 모자간에 웬수지고, 이웃끼리 고발하고, 한 핏줄을 산산이 흩트려 척을 지게 만들어 놓았으니......"

나는 강씨가 그 정도로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게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몰랐다. 전혀 예상을 못했던 일이었다. 오랜만에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난 기분까지 들었다. 잘났다는 뜻이 아니라 적당히 못나서 좋았다. 사람의 생각 속에는 좌우의 이념보다는 거기 속할 수 없는 생각들이 훨씬 더 많은데, 누굴 만나면 우선 저 사람 속이 흴까 붉을까부터 분간해야 하는 관습화된 심보가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임진강만은 넘지마

그날을 앞두고 식구들은 잠을이루지 못했다. 벌떡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가슴을 쥐어뜯곤 하는 엄마를 올케가 천사 같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곧 만나게 될 거예요. 임진강만 안 건넌다면요."

"오냐, 오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든지 임진강만은 건너지 말거라."

올케하고 엄마가 입을 맞추는 임진강 소리가 나에겐 암호처럼 들렸다. 내 마음속에는 삼팔선이, 그들의 마음속엔 임진강이 각각 넘어서는 안될 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임진강만은 넘지마

차차 나도 식구들과 같아졌다. 최소한도로 말했고 최소한도로 움직였다. 무언가 먹긴 먹었겠지만 다음에 무얼 먹을까 걱정하지 않았고, 무슨 맛인지 모르고 먹었기 때문에 먹지 않음과 같았다.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니던 먹는 문제에서 놓여났는데도 여전히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살아 있다는 감각도 없었다.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그림자였다. 우리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동안이지 생각도 안 나게 오랫동안 비곤, 악운, 질병 등 인간의 그늘만 독차지하다보니 드디어 표정을 포기한 그림자가 돼 버린 것이다. 마침내 편안해진 것이다.

한 여름의 죽음

나는 혼자 다니는 데 더 익숙했다. ... 구속되기 싫었다. 남을 의식한다는 게 나에게는 일종의 구속감이었다. 남한테 신경 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지독한 이기주의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로는 유년기에 이미 형성된 버릇이었다. 일학년 때부터 산을 넘어야 하는 긴 등굣길을 친구 없이 혼자서 다니다 보니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위안이 필요했고, 그건 자신 속에 침잠해 공상을 일삼는 거였다. 그렇다고 내내 외톨이로만 지낸 건 아니다. 엎드러지는 친구도 생겼지만 한때였고 오래 우정을 유지한 친구는 한눈팔거나 딴생각하고 나도그냥 거기 있는 친구였다. 정말 좋은 친구는 화제가 끟긴 동안이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가장 내밀하 소통의 시간이 되는 친구였다.

나는 마모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기를 펴고 싶었고, 성장도 하고 싶었다.

문밖의 남자들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온몸을 내던진 울음은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통과의례, 자신에게 가하는 무두질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하고 나하고 만날 수만 있었다면 둘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로따로니까,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이었다.

그날 엄마가 정릉으로 빨래를 간 건, 참 잘한 일이었다.

에필로그

 

 

 

많은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작가, 박완서 선생님.

이번에는 박완서 선생님의 멋진 책들이 타계 10주기 기념 아름다운 표지로 웅진출판사에서 다시 태어났다.

타계 10주년이라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다시 나타나셔서 그동안에 책들을 엮고, 신간도 내고, 시대에 대한 한탄도 같이 하면서 그래도 삶은 살아가는 것이리라 말씀해주실 것만 같은데 말이다.

박완서 선생님을 처음 알게된 건, 아마도 학교 수업시간.

<엄마의 말뚝>이라는 작품이 짤막하게 실려있는데 시험에도 꼭 출제되니 잘 읽어야하는 부분이었다. 대부분 교과서에 실리는 작품이 그러하듯 그저 문제를 위한 문제, 작가의 의도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는데 <엄마의 말뚝>을 읽는 순간 몇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슬픔도 슬픔이려니와 그동안 내가 읽은 우울한 한국문학 작품과는 결이 다른, 우울함 속에도 살아야겠다는 희망이 있는 그런 작품이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그래도 몰랐다. 박완서 선생님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몰랐고, 읽으면 읽을수록 빛이 나는 작품인지도 몰랐다.

더 커서도 몰랐다. 40살 이후 등단하신 기적같은 분이라는 것과 한국문학의 정수라는 말들을.

이제는 그때보다 책을 아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잘 모르지만,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세대라는 사실에 무한히 감사함을 느낀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책 소개를 읽어보자면,

"미완으로 끝났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후속작이며, 작가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작품이다" 라고 말한다.

미완으로 끝났던 작품의 후속작...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작품...

워낙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풀어서 이야기를 담아내는 박완서 선생님 답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도 처절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각기다른 주인공들의 삶이 펼쳐진다.

주인공 '나'가 스무살이 되던 1951년부터 1953년 결혼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장편소설은 박완서 선생님의 실제 연작 자전소설로도 유명하다.

어떻게 그렇게 살지요? 라는 물음이 절로 나오는데 아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질문하면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만 같기도 하고.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우."

주인공 '나'는 1951~1953년이라는 한국전쟁 전후의 한참 힘들었을 시기가 배경이다보니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우여곡절들을 겪는다. 이것이 인생인가, 이것이 사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들만큼 살아가는 것보다 죽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런 '나'에게도 많은 인물들의 만남이 있다. 모두가 피난을 간 서울 한복판. 자기네 식구만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우연히 알게 된 '강씨' 아주머니와 아이들. 그리고 그로 인해 알게된 인민위원회 사람들. 가족들을 두고 홀로 피난을 가면서 함께한 '근숙이 언니'. 그리고 그 언니를 통해 취직한 한국물산 '파마자부'와 피엑스 생활. 무엇보다 이제 반평생을 함께할 반려자 남편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 일들까지. 그리고 남보다 못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피는 불보다 진한 '나'의 일가친척 가족들까지. 주인공 '나' 한 사람의 인생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다.

'그래도 '엄마'와 '오빠'인데'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무심하고 철없어 보이는 그 둘의 대화를 보면 마음이 아린다. 사람이 힘들면 어려진다고 했던가. 다리에 총상을 맞아 종아리에 총구멍이 뚫린 '오빠'는 박완서 선생님의 다른 많은 작품들 속 '오빠'처럼 1인분의 몫, 제 구실을 못한다. 걷지 못해 피난도 가지 못한다. 훗날에도 올케와 '나'의 노력을 인정해주기는 커녕, 자기 힘든 속만 말하니 원.

주인공 '나'에게 '엄마' 또한 마음껏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애증의 관계이다. 워낙 시대적 배경이 남자, 남자를 외치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박혀 있어서 그렇겠지만 사실 지금도 남아있는 그 풍토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설움이다. 더구나 어렸을 때 무방비상태로 당하는 남녀차별의 한방이란. 지금도 한번씩 트라우마처럼 떠오르는 기억들은 아마 어른이 되어도 평생 가겠지만 그 아픔을 '나'가 조금 달래준다.

"할머니는 그럼, 작은아버지 지게 지는 것만 속상하고 작은 어머니 광주리 이고 다니는 건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어쩜 그러실 수가 있어요."

"우리 근본이 뭔데요. 작은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면서기 하신 거? 그건 할머니, 일본놈의 아전 같은 거예요. 창피해요, 창피해. 그것 때문에 해방되고 나서 친일파라고 동네 청년들이 우리집 깨부수고 난리 친 생각도 안나세요?"

참다 참도 보다못한 '나'가 이번에는'할머니'에게 가하는 따발총이다. 자기 자식(남자) 힘든 것만 알지 남의 자식(며느리)과 식구들(딸, 손녀) 힘든 건 눈가리고 아웅하는 모습이 다 화가난다. 결국 서울대학까지 갔었던 이 시대 인텔리, '나'는 참을 수 없다. 아마 박완서 선생님 본인의 투영이리라.

어렸을 때는 일상 생활에서나 책과 영화 속에 이런 장면들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시대에 화가 나는 분노를 느꼈다. 왜 악습을 계속하는 것일까를 고민하던 찰나에 이제는 어느정도 양보하게 된다. 그래 그 시대는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보고 자라며 배우지 못해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배경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주인공 '나'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이 거친 세상을 살아남은 패기를 응원하게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인물들의 인생이 참 기구하고 연민이 든다. 불쌍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말로는 십분의 일도 표현할 수 없을만큼 일반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을 시련이 닥쳐온다.

수많은 전쟁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의 배경이된 한국전쟁이 가져온 피해와 상처는 개인을 이렇게 파괴할 수 있구나. 서적과 자료로만 보던 상처를 소설 속 '나'와 인물들에 투영해서 아주 조금이나마 함께 느껴봤다. 전쟁의 아픔을 없앨 수는 있지만 이후 세대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은 최소한의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박완서 선생님의 너무 좋은 글들은 그래도 어찌됐든 살아갈 수 있다는, 살아가게 된다는 희망이 있다. 그래, 죽으란 법은 없을거야. 하는 희망이.

힘들어도 무너지지 않고 악다구니 받쳐서 외치는 말들도, 내 안에 참고 참았던 설움의 울음이 터지는 순간도 모두 소중하다.

박완서 선생님은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같은 작품들은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시대를 함께 나누는 순간들의 기록은 박완서 선생님의 글처럼 아름답다.

*이 글은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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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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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박완서 선생님, 아름다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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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양장) 새움 세계문학
조지 오웰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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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평화다

자유는 예속이다

무지는 힘이다"

1984_당의 3대 강령

4월의 화창하고 추운 날, 시게들은 13시를 쳐서 알리고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지독한 바람을 피해 보려 애쓰며 턱을 가슴께에 파묻고, 승리맨션의 유리문을 통해 빠르게 미끄러져들어갔다. 그럼에도 함께 따라 들어오는 모래 먼지의 소용돌이를 막을 만큼 충분히 빠르지는 못했다.

윈스턴은 확실히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오늘 아침의 눈길이 마주친 이우에도 오브라이언이 친구였는지 또는 적이었는지를 확신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또한 그것은 심지어 크게 중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애착이나 당파심보다 더 중요한 이해의 고리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둠이 없는 곳에서 만나게 될 걸세." 그는 말했었다. 윈스턴은 그것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실현될 것이었다.

사람들이 인류 유산을 이어가는 것은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제정신을 지켜가는 것으로서였다. 그는 탁자로 돌아가, 펜을 담갔다가, 썼다.

미래 혹은 과거에게, 생각이 자유로운 시대에게, 사람이 각자 다르면서 혼자 살지 않는 시대에게- 진실이 존재하고 일어났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없는 시대에게. 획일성의 시대, 고독의 시대, 빅 브라더의 시대, 이중사고의 시대로부터 인사 드립니다!

자신은 이미 죽었다, 라고 그는 되새겨 보았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되기 시작한 바로 지금,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 여겨졌다. 모든 행동의 결과는 그 행동 자체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썼다.

사고범죄가 죽음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다. 사고범죄가 곧 죽음이다.

"당신들은 방금 묘사한 것 같은 그런 세상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그건 꿈이에요. 불가능합니다."

"왜지?"

"문명사회를 공포와 혐오와 잔인함 위에 세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건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왜 그렇지?"

"거기엔 생명력이 없을 테니까요. 그건 붕괴될 겁니다. 자멸하고 말 겁니다."

 

 

 

우리에겐 너무 친숙한 조지 오웰.

영국의 소설가로 <동물농장>, <위건 부두로 가는길> 등 마치 자전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밑바닥 생활과 인생에 대한 고뇌로, 탄생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유쾌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우울하지만도 않다.

사실 <동물농장>을 어렸을적 읽었을 때는 이게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고 동물들마다 무엇을 뜻하는지 비유적 표현을 알아맞추는 문제적 문제를 위한 작품으로 접했었는데, 크고 나서 읽어본 <동물농장>은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는 그의 멋진 필체로 얇은 책의 두께보다 배로 두꺼운 생각을 지니게 됐다.

그리고 오랫동안 다른 고전 작품을 읽는다는 핑계로 잊고 살았는데, 이번에 새움 출판사의 이정서 번역가를 통해 조지 오웰의 <1984>가 재탠상했다. 나는 아직까지 <1984>의 유명세는 알았지만 읽어보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드디어 읽어봤다.

(누가 그러지 않았는가. 고전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역시 오래도록 사랑을 받는 작품은 모두 이유가 있다. <The Kiss>라는 그림 작품의 멋진 표지만큼 이번 <1984> 고전도 소장각이다.

<1984>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건, 한참 광고 공부를 할 때다.

광고인의 영원한 워너비, 스티브 잡스를 파헤치다보면 그의 놀라운 광고역작들을 만나게 된다.

때는 1983년 봄, 매킨토시 광고를 출시하기 위해 가히 놀라운 작품을 선보인다.

바로 미국 역사상 최고의 광고라는 평을 듣는, 소설 속 1984가 왜 실제 1984와 다른지 도끼로 깨부시는 그 멋진 장면이 담긴 광고!

광고 속에서도 빅브라더와 세뇌 당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에어팟을 낀) 여자가 나타나 화면을 부숴버린다.

얼마나 끔찍했으면 책 속 <1984>가 아닌 희망이 있는 <1984>를 강조하는걸까.

단순히 디스토피아라는 작품을 넘어, 조지 오웰의 <1984>는 인생의 쓴맛이 아주 가득하다.

주인공 윈스턴은 부스스한 몸을 일으켜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 하루는 역시,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는 빅브라더와 함께다.

그런 그에게 스멀스멀 반발심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일기도 쓰면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느낀다. 이상한 강령은 또 뭐고 전쟁과 예속과 무지를 찬양하다니! 당의 3대 강령이 <1984> 속에서도 여러번 등장하는데 마음이 답답해지면서 화가 난다.

이런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상한 신어를 만들고 사상경찰, 텔레스크린, 헬리콥터, 마이크로폰 등을 통해 철처히 감시하는 자유 없는 삶이 이어진다. 그런 윈스턴에게 용감한 변화가 찾아오나 싶은데 과연 <1984>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까?

암울함으로 유명한 이 책의 명성만큼이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만나기도 하고 체포되기도 하고 무기력한 그저그런 인간1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슬프지만 이게 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소설 속 <1984>가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오늘 날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일들이 너무 많고 국제사회를 봐도 독재정치와 암살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 작품이 1948년 (눈치 챘겠지만 1984를 살짝 뒤집은 숫자다) 에 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70년이 넘어도 이 말도 안됨은 계속되고 공감하는 슬픈 역사인 것 같다.

더욱 놀라운건 <1984> 속 예견된 일들이 2020년대에도 지속된다는 것! 조지 오웰의 미래를 내다보는 탁월함에 놀라고 아직도 변하지 않는 빅브라더 시대에 한번더 놀란다.

<1984> 속 사람들이 빼앗긴 건 천천히 죽어가는 자유다. 주인공 윈스턴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생명력이 없는 힘은 붕괴되고 생각이 자유롭지 못한 자유 없는 삶은 곧 죽음이다.

<1984> 보다 자유로운 삶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을 넘어 <1984> 속 윈스턴과 그의 동료들의 삶으로 투영되어 책 속에 뛰어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구 던져보게 된다.

오래도록 사랑받은 <1984>와 책 속에 나온 놀라운 신어들, 그리고 깜짝 놀랄 결말만큼 우리는 더 놀라운 삶을 자유롭게 투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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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 불황을 이기는 커리어 전략 - 세계 1위 미래학자의 코로나 위기 대응책
제이슨 솅커 지음, 박성현 옮김 / 미디어숲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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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있는 곳에 기회가 있고, 기회가 있는 곳에 위험도 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둘은 함께 한다."

나이팅게일

앞선 경고는 앞선 준비다

-이 책을 통해 불황이 어떻게 다가오든 살아남는 것을 넘어 더 크게 번영하도록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책에 담긴 조언이 코로나19 패네믹 이후 환경을 염두에 두었지만 그 전략은 훗날 또 다른 경기 침체를 지나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경제의 역동성을 두고 경기 순환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는 성장과 침체가 패턴을 이루며 반복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또 다른 도전 과제와 마주할지도 모른다. 앞서 경고를 받는 것은 앞서 무장되는 것이다. 심지어 경기 침체기에도 생존과 번영의 기회는 있다. 내리막길에도 올라갈 기회가 있다.

꾸준히 자신에게 투자하라

-경기 침체의 위험에 대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교육에 집중하는 것이다. 교육은 학교 교육이 끝난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평생 교육 수업을 듣길 바란다. 만일 기업에서 사내 교육이나 여타 연수에 예산을 쓴다면 꼭 참여하라. 언어를 배워라. 도자기 레슨을 받아라.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취업 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에 '아 내가 X를 배웠거나 온라인 강좌 Y를 들었거나 전문직 타이틀 Z를 달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면서 빈 시간을 채워가라. 호황기에 꾸준히 축적하고 성장하며 자신에게 투자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 돈으 ㄹ따로 확보해 둘 필요가 있다.

나를 성장시켜라

-불황이 닥치면 선택지가 사라진다. 무언가를 쌓으면 선택지는 다시 나타난다. 현명하고 올바르게 쌓아 올리면 현재 직장에서 견뎌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른 선택지를 갖기 때문이다.

학교에 숨을 이유도 없다. 경기가 안 좋을 때도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도망칠 필요도 없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쌓아 올리거나 자기 밖의 무언가를 쌓아 올릴 수 있다.

-스스로를 쌓아 올린다는 것은 자신의 기술과 신용,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것을 말한다. '나'라는 기업을 성장시켜 새로운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브랜드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렇게할 때 자신이 가진 선택지들을 열린 선택지로 둘 수 있다. 실업의 가능성을 줄이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실업의 기간도 줄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실업 흉터를 최소화하고 장기적인 수입에 미치는 끔찍한 영향 역시 줄어든다.

1. 게으른 백수가 되어선 안 된다

2. 자기 계발의 비용을 아껴라

3. 평범함에서 벗어나라

4. 미친 듯이 네트워크하라

5. 다른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조언 (비즈니스 클래스에 올라타라!)

 

2020년은 코로나의 해다. 코로나로 시작해서 코로나로 끝났고, 심지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너무다 당연했던 일상이 이젠 소중한 사진 속으로 남아있고 언제 끝나길 기다리기보다 언제 잠잠해는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많은 변화와 동시에 커리어의 위험도 함께 왔다.

취업 시장이 얼어붙은지 꽤 되고, 매년 청년실업을 갱신하던 차에 코로나의 악재로 기 기세는 박차를 가했다. 아무리 평생직장은 없다지만 무서운 속도로 인원감축, 희망퇴직, 공채 폐지 등 한달, 한달이 위험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세계 1위 미래학자 전문가인 '제이슨 솅커'는 이러한 불황을 이기는 전략과 비밀들을 적어주었다.

이미 <코로나 이후의 세계>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코로나 이후 불황을 이기는 커리어 전략>으로 다시 만났다.

어찌됐든 삶은 계속되고, 업은 계속되기에 <코로나 이후 불황을 이기는 커리어 전략>은 더욱 소중하다.

모두가 힘든 와중에 그래도 버텨내고 살아가야 갈 때,

<코로나 이후 불황을 이기는 커리어 전략> 에서는 계속 외치는 말이 있다. 바로 위험과 불확실성 속에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너지기엔 인생은 길고, 인생은 값지고, 삶은 유한하다. 비록 힘은 들겠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 행동하고 뭐라고 시작해보는 게 한 달 후, 일 년 후의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제이슨 솅커'가 말하는 '코로나 이후 불황을 이기는 커리어 전략'을 바로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준비하라

2. 견뎌라

3. 숨어라

4. 도망쳐라

5. 쌓아 올려라

6. 돈이 돈을 벌게 하라

6가지 전략을 보면 아마 더 알고 싶은 충동이 들 것 같다. 이렇게만 적혀 있다니! 그럼 뭘 준비하라는거지? 그리고 견디라고 해놓고 도망치라니?

아마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아니면 중간중간 원하는 챕쳐만 골라서 발췌독 해도 괜찮다)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준비하는 것은 진정한 '나'에 대한 준비다. 내 생각에 최고의 인풋과 아웃풋의 효율성은 '나'에 대한 투자다. 교육과 공부와 자기계발을 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나를 위한 아낌없는 투자는 훗날 더 큰 성취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도망치는 것도 그저 힘든 불황을 도망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코로나 이후 불황을 이기는 커리어 전략>에서는 '똑똑하게 숨기'라는 의미다!

자신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학교나 코로나를 이길 수 있는 불황에 강한 업종을 선택하여 그 곳으로 뛰어들라는 전략이다.

코로나와 코로나 이후를 대비하여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우리는 모두 코로나가 처음이기 때문에 어찌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코로나는 처음이지만 그 패턴을 읽는 미래학자들의 조언은 많은 도움이 된다.

"불황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저자의 마지막 질문처럼, 코로나에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계속 묻는 것부터 커리어 전략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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