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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잠 재의 꿈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0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미로 시리즈’를 논외로 일본 하드보일드를 논하지 말라!
‘무라노 젠조’가 없었다면 미로 시리즈는 결코 전설이
될 수 없었다.
빛나는 존재감의 무라젠, 이번에는 그가 주연이다!
4권째 읽은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
라는 카피문구가 강렬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카피 말고 커피라고 해야 하나. 프림을 뺀 진한 커피 같은 맛. 실제 1962년에서 1963년에 걸쳐 일본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는 ‘소카 지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현재까지도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 나는 이 폭탄범이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에 놀랐고, 특히 오쿠다 히데오의 <올림픽의 몸값>에서 나왔던 사건과도 동일하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뒤늦게 알고 나니까 왜 결말이 그래야 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거다.
앞서 있었던 무라노 미로 시리즈 중 <다크>에서 있었던 미로와 의부 무라노 젠조, 통칭 ‘무라젠’으로 불리는 남자 사이의 비극적인 관계에 솜털이 곤두섰던 경험이 떠올라 무라젠의 젊은 시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확인하고 싶어졌다. 도쿄 올림픽 개최를 1년 여 전을 배경으로 시작하는데... 주간담론이란 잡지사에서 특종꾼이란 생경한 일을 하고 있던 무라젠은 우연히 지하철을 타고 가다 소카 지로의 폭탄테러를 겪는다. 자칫 죽을 뻔 했는데다가 현장에서 스쳐지나간 남자에게서 감지한 진범이란 직감에 경찰수사와는 별개로 소카 지로에 대한 정보를 캐기 시작한다.
어느 날 가출한 고교생 조카를 찾아 나섰다가 사카이데 도시히코라는 디자이너가 주최하는 클럽에서 조카와 약에 찌든 또래의 다키라는 소녀를 함께 데려 나오게 된다, 그때만 해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그날의 일들. 하지만 무라젠의 집에서 나온 다키가 살해된 채 발견되자 그는 용의자로 몰려 고초를 겪는다. 모든 정황들이 지극히 불리한 가운데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 애쓰는 무라젠은 그 와중에 10대 소녀들만을 대상으로 한 인형놀이라는 변태서비스에 주목하게 되면서 다키 이전에 살해된 또 다른 소녀가 있었음을 밝혀낸다. 그 추악한 배후에는 어떤 사정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우선 소카 지로 사건을 둘러싼 특종 전쟁에서의 특종꾼이란 직업 자체가 넘 생소하고 특이하더라. 경찰한테는 보도협정을 깨는 비신사적인 행위로 간주되어 위협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결코 물러섬이 없는 이 남자가 뛰어난 직감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로부터 원하는 정보를 캐내기 위하여 벌이는 심리전을 지켜보자니 나중에 탐정 사무소를 차릴 명분과 적성이 충분했구나 싶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살인 용의자로 내몰리면서 까지 야쿠자도 마다 않는 조사 능력을 십분 발휘할 때 참 강단 있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를 돈으로 매매하는 시도도 무척 흥미롭다.
그런데 인간이란 본성 자체가 자신의 이익과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타인과 공감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개념 자체를 망각해 버린 게 가장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화두로 떠오른 미투 운동 기사를 접하면서 예전에 송강호가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무슨 강간공화국이냐고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소통의 부재가 갑질의 궁극을 낳고 잘못을 저질러도 파렴치하게 은폐하고 모면하려고 하는 것에서 대중들의 공분이 끓어오르는 게 아닐까? 소녀의 죽음에 얽힌 도덕적 해이는 그냥 화가 치밀어 오르는 차원을 넘어 참 가슴 아프다는, 피해자와는 별개로 가해자를 둘러싼 모종의 흑막들이 말이다.
무라젠의 활약을 따라가다 미로의 친부에 관한 이야기, 어린 미로와의 첫 만남 그리고 미로의 의부가 된 시초 등이 곁들여 지면서 정작 소카 지로 사건의 행방 보다는 그런 쪽에 더 많은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패전 이후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하던 전후 일본의 어두운 그림자와 무관하지 않았던 시절에서 말이다. 그 당시를 온 몸으로 헤쳐 나갔던 이 남자의 매력 속에서 진정한 하드보일드를 만끽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물의 잠, 재의 꿈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씩 잡힐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