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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정서의 연금술, 천의무봉의 서술, 칼날 같은 통찰력!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다소 뜬금없지만 피천득 선생의 <인연>에 나오는 이 글귀는 어쩌면 <기나긴 하루>를 대하는 나의 심정이기도 하고, 박완서 선생이 걸어오신 삶을 대변하는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생전에 그분의 소설을 한 번쯤은 읽어줘야지 하면서도 정작 발길을 돌려 다른 책꽂이를 연신 기웃거리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내내 마음 한 구석에 선생의 존함 석 자를 담아두며 그리워했었다. 그리고 2011년 1월 22일 선생은 영면하셨다. 세월이 흘러, 타계 1주기에 맞춰 마지막 소설집이 출간되었으니 이름하여 <기나긴 하루>라고 한다.
이 작품집은 고인이 작고하기 전까지 발표한 세 편의 소설과 신경숙 외 2명의 작가들이 추천한 세 편의 소설을 합쳐 총 여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마지막 작품집이다.<기나긴 하루>에는 일제 치하와 6.25 전쟁과 분단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팔십 인생을 사시며, 한국사회에서 겪은 개인의 아픔들을 때론 묵묵히, 때론 오열하며 보낸 감정들을 사실에 허구를 보탠 수기 같은 형식으로 그려낸다.
“6.25 때 오빠하고, 끝내 자기 자식을 두지 못해 나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삼촌이 비참하게 죽었다. 남들이 다 남쪽으로 피난 가 있는 동안 남아 있던 우리 식구들은 강제로 찢기고 일부는 북으로 끌려가야 하는 고난을 겪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인들 안 당했겠는가.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 본문 중에서 -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병석에서도 젊은 후배작가들의 단편들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는 한결같은 의연함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깨뜨리지 않으셨으니 마지막 작품집은 그래서 모든 수록작들이 예사롭지 않으며 읽고 나면 가슴이 진정 먹먹해진다. 그 중에서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아들을 먼저 보낸 어미의 고통을 압도적인 슬픔으로 치환시켜 가슴을 찢어발기는데 모성애를 이토록 극대화시킨 작품을 한국문학에서 이제껏 접해볼 수 있었는지 감히 가늠키 어렵다. 사실에 기반을 둔 수기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소설이며, 고통을 치유하는 기록을 넘어서 위로받고자 하지만 되려 대성통곡을 하고 만다.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소멸했어요. 그 바람에 전 졸지에 장한 어머니가 됐구요.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어찌 그리 독한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중략) 형님 절더러는 어찌 살라고 세상에 형님이 우신대요? (중략) 형님은 저에게 통곡의 벽이었으니까요. 울음을 참고 살 때도 통곡의 벽은 있어야만 했어요.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대요.
- 본문 중에서 -
친구가 ‘나’를 뺑소니 사고로 하반신 불구에 치매까지 걸린 아들을 돌보느라 일상이 지옥이 되어버린 어느 여인의 집으로 데려간다. 그렇게 함으로서 타인의 고통으로 자신의 고통을 희석시키고자 한 배려로 풀이되지만 ‘나’는 그래도 살아있는 아들을 둔 그 여자에게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껴 대성통곡을 하고 만다는 이야기에서 아들을 완전히 가슴에 묻지 못한 모친의 처절한 고통을 너무나도 뼛속 깊이 전달한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데 감당키 어려운 처절함이다.
이렇듯 선생은 한 사람의 손녀로, 딸로, 아내로, 며느리로서 한국사회의 시대적 변혁과 이데올로기의 혼돈을 몸으로 부딪쳐 온 생생함을 가슴 저미는 글의 힘을 빌어 잘 그려내셨다. 그래서일까 신형철 평론가는 해설에서 소설의 가치를 정서적, 미학적, 인식적 가치로 분류하여 좋은 소설이란 이 셋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경우라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서의 연금술, 천의무봉의 서술, 칼날 같은 통찰력!”이라는 글귀는 홍보를 위한 포장이 아니라 한국 소설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물의 가치가 여기에 담겨 있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찬사이리라.
아름다운 작가 박완서!!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