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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파드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8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평점 :
우선 사전 독자모니터의 기회를 주신 비채에 머리 숙여 감사말씀을 드리고 싶구요. 다른 분들보다 다소 늦게 교정지를 받았던 터라 뒤늦게나마 감상의 글을 올려볼까 합니다. 독자모니터들에게 주어진 특명 중 가장 막중한 임무라면 오·탈자를 찾아내는 것일 텐데, 먼저 읽으신 분들께서 이미 이 잡 듯 속속들이 찾아내셨으니 지금에 와서는 뒷북치는 일 밖에 되지 않겠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포기하고 읽고 느낀 점으로 바로 넘어 가겠습니다.
전작 <스노우맨>에 이은 후속작 <레오파드>는 전작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 한데요. 스노우맨 사건으로 유명세를 얻게 된 우리의 해리 홀레는 스노우맨 사건의 여파로 손가락을 잃고 라켈과 올레그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두 사람을 그리움에 못 견뎌 만나보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그 사건의 후유증으로 실의에 빠져 홍콩으로 도피하듯 떠난 상태입니다. 때마침 고국인 노르웨이에서는 스노우맨을 연상시키는 연쇄살인이 일어나게 되고 강력반 군나르 하겐 경정은 카야 솔네스를 보내 해리를 찾아 데려오게 합니다. 카야라는 이 여경이 해리를 찾아냈을 때 이 남자는 기존의 알콜 중독에다 아편 중독까지 더해 심신이 더욱 피폐해진 상태이네요, 그런 상태에서 처음엔 수사참여를 거부하던 해리는 카야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수사에 다시 참여하게 됩니다. 경찰이라는 이 조직에서 그는 야망 대신 단지 세상의 악을 잠시나마 몰아내고픈 본능에 다시 충실하고 싶을 따름인 것이죠. 이 남자는요.
연쇄살인마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해리와 동료들은 범인의 살인동기부터 밝혀내고자 하지만 또 다른 악재 두 가지가 발목을 잡습니다. 하나는 강력반과 크리포스란 양대 경찰조직이 강력범죄를 담당할 우월적 치안조직으로써 법무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경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바로 그 경쟁에서 강력반은 패퇴해 연쇄살인 사건 수사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이에 해리는 강력반발 하지만 결국 크리포스의 수장 미카엘 벨만의 휘하에 들어가 수사를 재개하게 됩니다. 한 편 연쇄살인마는 "백마 탄 왕자님"이란 닉네임으로 불리며 경찰의 수사망을 비웃듯 요령 있게 피해가는데 "레오폴드의 사과"라는 무시무시한 살인도구를 이용한 살인이 특징입니다. 계속된 단서 수집과 추리를 거쳐 희생자들의 연관성을 발견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 살인도구의 최초 구입처를 찾아 아프리카 콩고에까지 수사범위를 넓혀 갑니다. 콩고에서의 여정은 <제노사이드>를 부분 연상시키기도 하죠.
<레오파드>는 영문 모를 살인으로 시작되는 도입부부터 남다릅니다. 정말 재밌습니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기나긴 여정동안 단 한 번도 지루할 틈이 없더군요. 한 번 잡으면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흡입력에 압도당했습니다. 그 많은 분량이 순식간에 휙휙 지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요 네스뵈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탈고 전에 자신이 쓴 원고를 재차 꼼꼼히 확인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균형 있게 이야기를 분배해야 독자들이 즐겁게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갈까 라며 심사숙고한 끝에 탄생한 역작이 아닌가 싶네요. 인간의 희노애락이 제목처럼 날렵하고 군살 없는 미학적 성취 속에 풍부한 감수성과 센스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마치 인생이란 것은 바로 이런 것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기에 읽는 동안 해리 홀레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끊임없이 감정의 굴곡을 겪게 한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감정이입이란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균형 있는 이야기의 배치라고 한다면 살인마 “백마 탄 왕자님"을 잡기 위한 추리와 수사과정, 치안조직으로서 절대적, 우월적 권력을 선점하기 위한 양대 조직의 파벌싸움, 바람 앞에 등불처럼 꺼져가는 아버지의 여생 앞에서 자식 된 도리를 다하려는 해리의 인간적인 고뇌라는 3가지 축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뼈대를 이루며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상생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은 실로 대단합니다. 물론 범인 검거가 가장 중요한 선결과제이겠지만 나머지 과제들도 결코 팔짱 끼고 관망해도 될 정도의 수월한 고민들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찰 본연의 임무보다는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크리포스의 수장 벨만의 야심은 비단 정치권이 아니더라도 세상이라는 거대한 군집사회에서 해리 같은 아웃사이더와는 결코 융화되기 어려운 배타적 이질감만 낳을 뿐이라 씁쓸함을 남기게 됩니다. 무엇보다 자식의 손으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나는 아버지와 그런 소원을 들어드릴 수없는 해리의 선택이 부모와 자식 간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혈연이라는 숙명적 아픔이어서 절절한 슬픔과 눈물 한 방울을 선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백마 탄 왕자님"이 저지른 이 참극도 시작은 가족에서 비롯되었고 이 혈연은 저주받은 피로 씻지 못할 악행을 초래하고 마는데요, 이렇게까지 살인극이 크게 확대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어떤 계기로 광기에 한 번 눈이 멀게 되면 인간은 이성적 해결 대신에 파도에 휩쓸리듯 살인이라는 행위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정당화하고픈 마음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백마 탄 왕자님"은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로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습니다. 성장과정에서 억압과 폭력에 시달렸고 그것은 뒤틀린 분노로 이어지면서 살인에 대한 딜레마대신 점차 쾌감마저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스노우맨"과 마찬가지로 증오와 악의는 탐욕과 질투라는 근원적인 원인에서 다시 출발하기에 어쩌면 두 살인마는 동일한 연장선상에 놓여있는지도 도릅니다.
그 이유때문이지 병원에 수감 상태인 "스노우맨"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던 것도 단순히 범죄 심리에 대한 조언이 아니라 닮은꼴에 대한 큰 그림을 보기 위한 홀레의 판단이었습니다. 멘토는 해리의 의도를 간파하고 미로를 탈출할 실마리를 제공할 수가 있었던 것 같네요. 그렇지만 거래의 조건으로 제시했던 부탁은 해리가 당사자로부터 거절당하고 이에 상심하는 “스노우맨”을 보며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도 가여울 수밖에 없어서 그도 그 순간만은 동정받을 만 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요? “스노우맨”은 경피증 때문에 시한부 삶이라는 것은 전작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아실 테고 마지막 소원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간파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암튼 가슴 먹먹합니다.
800페이지에 가까운 대장정은 지뢰처럼 복선이 도처에 숨어있고 보물찾기 놀이처럼 찾는 즐거움도 있지만 못 찾아내도 끝까지 달려가다 보면 몇 차례 반전 끝에 포만감 있는 결말로 만날 수가 있는 것이 이번 <레오파드>여서 정말 만족스러습니다. 개인적으로 전작 <스노우맨>을 뛰어넘는 스케일과 깊이 있는 스타일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 하반기를 확실히 석권할 대표 스릴러가 아닐까요?
그래서 내년 2월경에 해리 홀레 시리즈의 다른 편이 출간된다는 반가운 소식에 벌써 마음은 그 때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타임머신이라도 있다면 시간이동을 해서 미리 구입하고 싶을 정도로 몸이 달아올라 있습니다. 또 한 편으로는 10월에나 구입 가능한 <레오파드>를 먼저 읽게 된 것은 행운이자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해리 홀레라는 이 남자의 치명적 매력에 즉시 중독되면 해독약은 달리 없습니다. 금단현상이 생겨 숨넘어가기 전에 속히 다음 편을 읽는 것만이 심장박동을 계속 뛰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내년에 신작 출간 전에 이번처럼 독자 모니터를 하실 것으로 예상하면서 미리 1등으로 사전 예약신청해 봅니다.
미국에는 마이클 코넬리, 데니스 루헤인, 제프리 디버가 있다면 유럽에는 요 네스뵈가 독보적 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