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이라는 책
알렉산다르 헤몬 지음, 이동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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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내전의 한복판에 들어가 직접적으로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고향인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내전을 바라보며


느낀 저자의 삶에 대한 통찰, 그리고 저자 자신의 삶의 지나온 기록을


<나의 삶이라는 책> 에 담아 은행나무에서 출간되었어요.


"내전" 이라는 말 자체가 전하는 슬픔에 언젠가부터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국가 아래 살아가던 사람들인데


생각이 다르고 인종, 종교 등등 다르다는 이유로 구분짓고 차이가 발생하면서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타자화를 심하게 할 때면 증오와 혐오로 가득해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이 되는 말이거든요.


알렉산다르 헤몬의 에세이 <나의 삶이라는 책> 에는


보스니아 내전이라는 그림자가 드러워진 상태에서 저자가 남긴 회고록이라는 문구에


관심이 동하여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저자의 회고록이지만 시간순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지 않고


짧은 에세이 한 편 한 편이 하나로 묶여져서 마치 플롯 장치가 들어있는 소설집처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어요.


 인간의 삶과 통찰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면 저도 모르게 경건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나의 삶이라는 책> 에서는 인간의 삶을 파괴시키기에 충분한 보스니아 내전을 통해


나와 타자의 관계속에서 다름이라는 것, 타인들의 삶에 대한 공감,


나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저자의 고향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라는 나라가 어디쯤 붙어있는지


아주 말초적인 호기심에 초록창으로 검색해 봅니다.


지도를 보니 작년 늦가을에 동유럽 여행 다녀왔던 그 6개 나라중

 

 

크로아티아아 인접해 있던 나라였더라구요.


이 책을 읽고 나니 보스니아 근처까지 다녀갔었다는것도 모르고 지냈던게 재밌고

 

한편 못 가봐서 아쉽고 여러 생각이 교차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끔찍한 민족 분쟁들 중에 하나로 꼽히는 보스니아 내전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계 이슬람교도와

 

 

세르비아계 세르비아정교도, 크로아티아계 가톨릭교로 

 

오랫동안 민족적, 종교적으로 이어온 거친 반목의 역사가


유고 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1990년대초에 촉발된 것이었더군요.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라고 표현할 정도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뒤섞인 지형도로 인해 분쟁의 역사가 존재하는 곳인데요.


특히 1914년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곳으로도 유명하지요.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유고슬라비아도 여러 나라로 갈라지는 역사가 있었고


그 과정 속에서 세르비아 내전으로까지 그 분쟁이 번지게 됩니다.

 

​1991년 주변국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역시 독립하려 했지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했던 인구 집단 3곳중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독립을 희망했고,


 세르비아계만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 남기를 희망하면서


1992년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를 공격하고 사라예보를 포위하는 등 내전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과 세르비아계가 각각 자신들과 노선과 종교가 달랐던


보스니아계 이슬람교도들과 크로아티아계를 무참히 학살하며 전쟁을 이어갔던 기간이 3년 8개월.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유엔이 개입하게 되지만 세르비아계는 인종청소를 저지르면서까지


전쟁으로 맞서게 되면서 평범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희생되고

 

 

난민으로 전락하게 되는 슬픔을 맞게 됩니다.


내가 속한 곳과 민족 집단이 다르다고, 종교와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수십만명의 희생자와 난민들이 발생했던 보스니아 내전은

 

알렉산다르 헤몬의 <내 삶이라는 책> 을 관통하는 구분짓기와 차이의 얄팍함을

 

 한층 더 이해하게 하는 역사적 사실을 마주하게 합니다.

 

<내 삶이라는 책> 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사라예보를 고향으로 둔 저자가 써내려간


회고록을 통해 보스니아 내전의 역사도 좀 더 들여다 보고 싶었어요.


역사적 사실을 알고 보니 역시 이 책을 쓴 저자의 심경이나 메시지들이 훨씬 더 와닿습니다.

"다름에 대한 신보수주의적 접근이란........"


​다른 이들이 불법적으로 우리에게 합류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말함이다.


만약 그들이 이미 여기에 왔고 그 과정이 적법하다면


그들은 이제 우리 삶의 방식, 이미 오래전에 확립된 성공적인 우리 기준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


다른 이들은 항상 우리가 진정 누구인가를 일깨운다.

종교가 다르고 내가 속한 집단을 해한다고 할 때 오염된 타자화로 인해


아무 잘못없는 선량한 희생자들만 낳았고 나아가 자신까지 해치는 일이었던


2001년 9월 11일 뉴욕 테러 사태를 통해


저자는 너와 나를 구분짓는 일들의 폐해와 무용함을 직면하게 합니다. 



 

 


 

 

 

전기공학자 아버지와 이하 가족들과 함께 사라예보에서 평생 살고 싶었던 저자


알렉산다르 헤몬은 잡지사의 영화평론 글을 올리고 스물일곱의 나이에 편집일을 맡았고 기자활동을 합니다.


보스니아 조국의 전쟁 직전의 잔혹행위들을 보며 지내다가 우연히 미국 시카고에 갈 기회가 닿았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려 할 때는 보스니아 내전으로 발이 묶여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하게 되지요.


실제로 저자의 삶에 일어났던 영화같은 일이었습니다.


미국으로 가기 전 1992년 저자의 고향 사라예보와


미국을 다녀온 후 새로이 마주하게 된 사라예보는 모든 것이 기가 막힐만큼 같았고


또한 저자가 알던 것과 기가 막힐 정도로 달라졌음을 경험합니다.


익숙하면서 동시에 너무나 낯설고 멀게만 느껴져서


미국 시카고에서의 생활 이후에 다시 돌아간 고향에서 "실향"을 느꼈다는 문장이 인상깊기도 했지요. 

 

 

축구와 체스를 좋아하고 허영과 조심성이 많은 무신론자이며


한 번의 이혼후 현재 아내를 만나며 두 딸을 둔 아빠 알렉산다르 헤몬.


그런데 차례가 나오기 전 페이지에 적힌


'영원히 내 품에서 숨 쉬는 이사벨에게' 라는 문구가 읽기 전에는 무엇인가 갸우뚱 했습니다.


에세이의 끝으로 갈수록 알겠더라구요.


둘째딸 이사벨이 병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난 것.


저자의 슬픈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때로는 절절한 슬픔으로


전달하는 부분에서는 오롯이 저자의 삶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저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 부모님 그리고 이혼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들과


그에 관한 상념들을 들려주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해 바뀌어진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구체적으로 세르비아인들이 보스니아를 공격하면서 주축이 되었던


맹렬한 민족주의 단체인 세르비아 민주당의 라도반 카라지치.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졌고 반전 평화시위자들을 향해 총성이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사라예보를


묘사하고 상징하는 문장들이 독자를 저자의 인생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몰입하게 만들었어요.


라도반 카라지치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은 배척하고 파괴시킴으로써


자기 사람들만을 향해 목소리만 높일 뿐,


희생과 살육, 인종청소를 서슴치 않았던 인물이었어요.


카라지치의 행위를 보면서 현재 대한민국에도 소위 정치적 지도라라는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려는 움직임 보다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서만 선전하고 사실을 호도하는 정치인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힘만 키우려는 지도자들이 과연 모두를 포용해야 하는 지도자라 할 수 있는지.....


공동체에 이로운 공공선과 번영을 추구하는 지도자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 카라지치 옆에서 엄청난 범죄 모의에 가담했던 가장 존경하는 콜제비치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는


무엇이 정의이고 개개인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무게감을 느끼게 하기도 했구요.






다행스럽게도 보스니아 내전 중에 저자의 가족들은 모두 캐나다로 이민오게 되었지만


안전함은 보장받았을지라도 이민자라는 상황은


내전에서의 차이와 구분짓기로 인한 아픔 만큼이나


이민자 당사자들로서는 난민들이 느낄만한 존재론적 위기도 전해졌어요.


열등감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야 했고


우리 자아를 구성하는 조건들을 절충하도록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이민으로 인한 자아의 변형"


이 한 마디가 저자가 느끼는 상실감을 대변해주는 표현이 아닐까 싶어요.



 


 

 

 


"삶은 너무나 연속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강렬한 현재처럼 보였다."


감히 한 권의 책으로 사람의 인생을 말하긴 어렵지만


알렉산다르 헤몬은 자신이 직접 겪은 삶 속에서


차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없는가에 대해 꼬집습니다.

 

 

독자가 되어 읽은 <나의 삶이라는 책> 은 제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 그리고 저자가 곳곳에서 보여주는 탁월한 문장력이


에세이지만 깊이있고 무게감있게 다가왔어요.^^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저마다의 삶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르고 있고

 

'다름'으로 인해 결코 그 각각의 소중하고 이렇듯 찬란한 삶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모든 인간의 바램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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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방문을 열기 전에 - 10대의 마음을 여는 부모의 대화법
이임숙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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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석 연휴가 전에는 없던 휴일이 되어 대학로 나들이를 갔었어요.


엄마 아빠 따라서 함께 중학생 이상 관람가능한 연극도 보러 갈 수 있을만큼 커서요.^^


귀찮아 해서 갈까 말까 망설이는 시니에게


맛있는 간식 사준다고 했더니 냉큼 따라 나섭니다.


무엇이든 강요하지 않는지라 모든 결정을 너무 쿨할 정도로 아이에게 늘 맡겼었어요.


심지어 이렇게 연극을 함께 보러 갈 일이 있을때 조차도


귀찮아 하면 그럼 말고.... 바로 상황을 종료시켰던 것 같은데


조금은 저도 바뀌어 가는듯 합니다.


제가 먼저 아이에게 손을 내밀게 되더라구요.


엄마도 사람이고 감정의 동물이라 예민한 사춘기 자녀의 말과 행동에


때로는 속상하고 상처받는 기분까지 들지만


그래도 부모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지요..... 그러라는 법은 물론 없지만 부모기에

먼저 내 아이의 기분을 살피면서 행복했으면 하는 그 소망으로 노력하게 되는 거 같아요.

​맛있는 간식 사주겠다는 그 한마디에 고민하던 때가 무색할만큼

바로 따라 나서주는 시니가 저는 또 고맙고 좋았죠.

이렇게 가끔은 공연을 보면서 전철타고 오며 가는 시간에 나누는 대화들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편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집에서 하는 이야기와는 또 다른 화제들이 오고 가는 게 좋거든요.

때로는 이런 분위기 전환이 사춘기 자녀와의 대화를 유도하는데 큰 도움이 되죠.


 

 

 

편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도 시작되어야지


엄마의 속도와 타이밍 만으로 아이에게 대화를 강요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저자가 지적하는 부분 깊이 공감이 갔습니다.


저도 부모이지만 부모 자신만의 기분과 타이밍으로 대화를 하자고 다가오는데


정작 아이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만한 불협화음이 또 어딨겠어요.....


<아이의 방문을 열기 전에> 이임숙 저자는 10세 이전의 대화와 청소년기의 대화는


접근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이의 방문을 열기 전에> 책 제목처럼 대화를 시도하려고 해도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순간 순간 아이와 대화할 꺼리가 끊이지 않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 생각은 하지 않고 부모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오는건 대화가 아닌거잖아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임숙 쌤이 책에 적어둔 내용들이 다 납득이 가는데


막상 그 상황에 닥치면 왜 멋대로, 독단적으로 행동하게 되는지 참 미스터리입니다....^^;;


심지어는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내 아이인데 아이의 행동을 오히려 부모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일도 생기게 되죠.


가장 믿어줘야 할 내 아이를 오히려 부모가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고착화 되어버린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내 아이의 내면까지 속속들이 읽지 못하는 아쉬움....


부모가 신이 아니고 내 자녀라도 그 속을 알 길이 없기에 오류를 범할 수는 있어요 얼마든지.


하지만 아이와 다시 좋은 관계로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노력을 한다면


충분히 사랑의 끈끈함으로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럴거라는 희망을 <아이의 방문을 열기 전에> 읽고 나니 품게 됩니다.








불편한 관계에 사로잡혀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그 마음만 앞서다 보면 아무래도 급해지는 경향이 있죠.....


마음과 다르게 아이와의 관계가 꼬이게 되면 자칫 악화될 수 있어서


 타인을 대할 때 조심하듯이 아이를 대할 때도 신중하게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급해진다 싶고, 오히려 일이 꼬인다 싶어지면서


아이와 더욱더 충돌이 격해 질 때는 잠시 멈추는 것도 지혜인 것이죠.



 

 

 

 

 

<아이의 방문을 열기 전에> 책을 읽고 있는데 시니랑 나란히 누워 있다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아이의 가치관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저는


가끔씩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얘기하곤 합니다.


지금 이 사회가 너무나 치열한 경쟁사회이고 경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타인과의 경쟁에 매몰되면 여유로운 생각과 삶을 영위하기가 어려워져요.


내 아이들은 여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모든 부모의 마음으로


타인과의 경쟁보다 나 자신과의 경쟁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해주고 있던 차에


읽고 있다가 이 페이지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ㅎㅎㅎ


저도 시니도 너무 신기해 했죠.


1년 전의 나, 6개월 전의 나, 어제의 나보다 오늘은 좀 더 발전하고 행복한 나이길~~!!


그렇게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해주고 있는데


이임숙 쌤도 이렇게 77페이지에 제 생각과 비슷한 맥락의 내용을 남겨주셨더라구요.



 

 

 

<아이의 방문을 열기 전에> 이임숙 쌤이 전하는 10대의 마음을 여는 부모의 대화법에 대해서


특별한 5단계 대화법 중에 첫 번째가 바로 멈추기 입니다.


부모의 욕심을 잠시 멈추기만 해도 아이가 스스로 깨닫고 관계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례들은


정말 신기하고 부모로써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빠른 아이들은 초등고학년부터 예민함이 두드러지게 되면


표정과 말투같은 말초적인 것으로 사람을 언짢게 하는 일들이 반복되거든요.


이건 정말 악순환이 아닐 수 없어서 태세를 바꾸고 싶어도 참 쉽지 않구요.....


아이도 노력하고자 해도 그 타이밍이 또한 부모와 맞지 않아서


노력하려는 마음을 접어버리게 되고 어긋나기만 합니다.


내 아이에게 부모가 원하는 것만 일방적으로 전달할 것이 아니라


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멈추기만 해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해도 꼭 시도해 보심 좋겠어요.


늘 하던대로 사람은 관성에 이끌려 안하면 큰일 나는줄 알지만


몇번 안한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거든요.


작은 것에 연연해서 자녀와의 소중한 관계를 깨는 것이 더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면


멈추기 시도가 두렵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도 나름 참다 참다 터트리는 거라고 합리화를 해보지만


터트리고 나면 아이에게 화가 풀릴 때까지 쏘아붙이는 것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죠.


그러면 또 마음이 좋지 않고 이런 악순환도 없는 거 같아요.


아이 입장에서도 쏘아 붙이는 부모 만큼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을텐데 하지도 못하면 아이도 속상해지고....


정말 좋지 않을 때는 그래서 부모가 먼저 멈추기를 해보자구요.


아이가 원하는 대로 왠만해서는 다 멈추고 기다려주는 것.


아이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요....!



 

 

​그리고 타인에게는 고맙다는 말이 어렵지 않게 나오는데


왜 내 가족, 내 아이들에게는 고맙다는 말이 왜그리 비싼 말이 되었나 싶기도 하죠....


그냥 너무나 당연한 거니까 알겠거니 표현을 안 하기도 하고


가족끼리 쑥스럽게 뭘 그런걸 얘기하냐 할지 모르겠지만


가족이니까, 소중한 사람이니까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래서 아이들에게 실수를 인정할 때는 미안하다고도 하고


엄마가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에 대해서 수용해 줄때는


고맙다는 표현도 늘 하거든요.


고맙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로도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고


듣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당연히 기분 좋을 거니까요.


그냥 마음 속에 있는 그대로, 진심으로 표현한다면 아이들도 기꺼이 그 마음 받아주리라 믿습니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아이 자신의 마음보다


더 간절할 거라는 오해.




이 문장에 뒷통수를 얻어 맞은듯한 느낌 저만 그런가요??


 내가 가장 특별할 거라는 사춘기 아이들의 생각처럼


부모들 역시 착각을 하고 있을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문장이었습니다.


부모가 바라는 것처럼 아이들도 공부 잘 하고 싶은 마음 누구보다 간절하다는 것을요.


부모가 믿어줄 때 아이들은 좌절과 절망을 경험할 필요가 없게 되겠죠.


내 아이를 믿어주지 않을 때 아이들은 좌절에서 절망으로 나아가는 것이구요.


과연 이것이 부모가 원하는 그림일까...... 결코 아니라는 것에 모두가 동의할거라고 생각해요.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말을 하는 것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상승시켜 주기도 하고


내게 신뢰를 보이는 부모에게 당연히 잘 하고 싶은 마음 또한 당연한 것이죠.


사춘기 자녀들에게 부모는 "현실 속의 바람직한 관중" 이 되어주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이 부분 참 인상적이었어요.


부모가 성숙한 관중이 되어 자녀에게 지지와 격려를 보내는 일.


그러면 아이는 자기 안의 성숙함을 끌어내고 보려주려는 노력을 하게 되구요.


청소년기에 존경할만한 "중요하고 의미있는 타인" 이 주변에 한 명쯤 존재한다면


그 아이의 미래는 가히 긍정적으로 변화할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공공의 인물이 될 수도 있고, 아이 주변에 편안한 멘토가 될 수도 있겠죠.


저는 부모이지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현실 속의 바람직한 관중이 되어


아이들에게 중요하고 의미있는 타인의 존재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공감, 수용, 진심을 가지고 아이에게 상담자 역할이 되어줄 때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바람직한 사이가 될 거예요.


아이의 긍정적 의도를 알아주면 아이의 행동도 변하는 것이 바로


공감, 수용, 진심 키워드와 맞닿아 있는 것이겠지요.







내 말에 진심으로 관심 가져 주기를,


부족한 건 많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노력하고 잘하는 것을 인정해 주기를,


혹시 위험하거나 자신을 망치는 일에 끌리면


단단하게 나를 지켜 주기를.



내 아이의 마음이라 생각하며 늘 새기고 싶은 문장입니다!!!



잊을만 하면 다시 초심과 진심을 소환하기 위해


<아이의 방문을 열기 전에> 펼쳐 보고 또 펼쳐 봐도 좋을,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는 보물같은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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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라는 적 - 인생의 전환점에서 버려야 할 한 가지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이경식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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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라는 말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서 언급했던 자아, 이드, 초자아 중에서


자아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에고라는 적> 의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가 말하는 "에고" 는


이보다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일전에 정여울 작가가 설명하는 "에고와 셀프" 에 대한 윌라 강의가 생각나네요.


에고는 사회적 자아, 셀프는 자기 내면을 말한다고 비교해서 얘기했었거든요.


라이언 홀리데이가 말하는 에고와 정여울 작가가 말하는 사회적 자아라고 표현한 에고는


타인의 인정, 바깥의 기준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일맥 상통한듯 합니다.



"자기 자신은 속여먹기 가장 쉬운 상대이다."




개인의 마음 속에서 도사리고 있으면서 언제든지 올바른 판단을 흐트러 뜨릴 수 있는 에고.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는 에고라는 적이라고 표현하면서


지나친 자의식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해요.


<에고라는 적> 에서는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가 살아가면서 경험했던 단계들,


열망과 성공, 그리고 실패의 순간들마다 저자를 뒤흔들었던 에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19세에 대학교를 자퇴하고 작가로서 글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고


유수의 기업들에 자문을 제공하기도 하는 등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기도 했었죠.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상승과 하강곡선이 널을 뛰는 것이고.....


저자 역시 성공과 실패의 삶을 모두 직접 경험해 본 후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때마다


자신처럼 수많은 사람들의이 성공과 실패의 사이클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이 각자 갖고 있는 "에고"에 집중하게 됩니다.


​저자의 표현으로는 개인의 내면 안에 "도사리고 있다" 고 표현하고 있는데 제대로 와닿는 표현이예요.

 

우리가 냉철하고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할 순간마다

 

지혜가 부족하면 어김없이 도사리고 있던 에고가 적이 되어 돌아옵니다.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이 책, 라이언 홀리데이의 <에고라는 적> 을 보면서


평소에 바깥에서 적을 찾고 남 탓을 하며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나 돌아보게 됩니다.


평소에 늘 경계하고 있었지만 한번 더 다지게 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이런 지혜를 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인생을 돌아보게 해주는 책이었어요!!


우리는 늘 절제와 겸손함을 유지하고 현실 감각을 일깨워 에고를 경계해야 한다.


​어제 서양 고전의 탄생 강좌에서 듣고 왔던 플라톤 철학에서도

 

소크라테스가 강조했던 메시지와 닿아 있는 문장이어서 한번 더 새깁니다.

 

아마도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가 스토아 철학과 고대 그리스 로마 사상가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다고 하더니

 

제가 접한 경험과 맞닿아 있으니 정말 그런가 싶네요.^^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중국 철학자 노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보물은 말을 아끼는 혀이다."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



노자와 헤시오도스가 남긴 메시지를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는


말은 사람을 고갈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의미없는 잠담과 선전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말이 내포하는 음흉함을 경계해야 해요.


우리에게 참 많이 결핍되어 있는 침묵에 대해서


남들의 인정 없이도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능력이라고도 말합니다.


침묵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과 강인한 사람에게 휴식을 줍니다.


어제 들었던 플라톤의 철학과 비교해서 생각하게 되는 내용들이


지금 보니 <에고라는 적> 에 많이 담겨져 있군요.


소크라테스와 고르기아스의 대화를 책에 실었던 플라톤.


당시 고대 아테네에서는 출세를 위해 수사술이 중요했고


고르기아스는 수사술이 중요하다는 것을 소크라테스 앞에서 강변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수사술이 정말 중요한 기술인지 의문을 품고


고르기아스와 끝없는 논박을 이어가지요.


지혜를 사랑하는 애지자 소크라테스에게 수사술은 말로써 설득하는 능력일뿐,


 진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올바른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부와 명예, 총체적인 인생의 성공을 간절히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어요.


타인들에게 확신을 주며 자신의 생각으로 설득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호도하는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현재 정치적인 상황을 봐서도 그런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되구요.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가 말하듯 인간의 보물로서 말을 아끼는 혀가 아닌


말이 칼이 되어 타인에게 돌아가는 혀는


에고가 적이 되어 자신에게도 돌아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공을 위해 모든 열정과 노력을 다해서 성취한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 성공과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야 해요.


이 또한 플라톤 철학이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 언급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성공 뒤에 몰락이 뒤따르는 경우 저자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잘난 존재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그런 잘못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내 안에 있는 에고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때 에고는 적이 되어 돌아옵니다.




자신감, 자존감 좋은 말 같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걸 잊으면 안 될거 같죠.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에고가 끼어들어 냉철하고 올바른 판단을 흐리지 않도록


지나친 자의식을 경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나친 열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냉철하게 깨어 있음으로써


 에고의 통제를 받는 죽은 시간을 떨쳐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독일의 메르켈 총리의 이야기가 흥미로우면서도 설득력있게 다가왔어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에고는 자기의 현실 속에 허상을 만들어내어


내가 사랑하는 것, 나아가서는 나 자신을 죽일수도 있습니다.


에고를 경계해야 함에 있어서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요......

 

 

 


세상은 모든 사람을 깨부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부서졌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한층 더 강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깨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죽고 만다.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만족할 줄 알며 균형 감각을 중요시한다면


에고라는 덫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열망하지만 겸손하다.


성공을 해도 자비롭다.


실패를 해도 끈기가 있다.



 

죽은 시간은 사람이 수동적으로 무엇인가를 기다리기만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고,


살아 있는 시간은 무엇이든 배우고 행동하며 1분 1초라도 활용하려고 노력하면서 보내는 시간이다.


당신이라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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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재일 수 있다 - 당신의 재능을 10퍼센트 높이는 신경과학의 기술
데이비드 애덤 지음, 김광수 옮김 / 와이즈베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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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적인 방향으로 끊임없이 진화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걸


또 한번 느끼게 해준 와이즈베리 신간 <나는 천재일 수 있다> 를 만났습니다.


발전적인 기술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당연히 남지만


저자는 인간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인정하고


모든 가능성과 위험, 기회를 우리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사회 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책을 마무리했죠.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정신 능력에 있어서 점점


 신경과학 혁명이 진행되고 있음에 주목하게 합니다.


세계적인 과학 저널 <네이처> 의 편집자이자 <가디언> 과학 전문 기자로 7년간 일했던


저자 데이비드 애덤은 과학, 의학, 환경을 주제로 집필활동을 하고 있고


실제로 20년간 정신적인 장애를 겪음으로써


뇌의 숨은 능력, 인간의 잠재력에 관심을 가져왔어요.


그 결과물로 "똑똑한 뇌로 성형이 가능한 시대" 라고 말하며


인간의 지능을 10퍼센트 높이는 신경과학의 기술을


<나는 천재일 수 있다> 에 소개합니다.


 

 

인간은 각자 가지고 있는 뇌의 일부만 사용되고 있어서


활성화되지 않은 뇌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뇌 활동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 뇌의 작동 방식을 인위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뇌의 기능을 개선하려는 움직임,


지능을 강화하는 과학기술이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어요.


이 책은 뇌의 신경강화를 통한 "신경과학 혁명" 이 점점 두드러 지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과 근거들을


과학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짚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뇌 혁명" 이라는 첫 장에서 저자는 토마스 에디슨의 에피소드에서부터


시작해서 신경과학 혁명을 받쳐주는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전구를 발명한 토마스 에디슨이 신경과학 분야에 왜 나와???


토마스 에디슨은 순수하게 자신의 전문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행보가 아닌,


부와 명예를 위해 경쟁자를 공격함으로써 전기의자를 발명하기에 이릅니다.


1880년대 후반 미국은 교수형이 야만적이라는 비판이 있었고


이에 대안으로 에디슨은 경쟁자 웨스팅하우스의 교류 전류 방식을 제안하게 되죠.


에디슨이 주장한 대로 사형 집행에 사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실행되어지고


 결국은 전기의자가 만들어지면서 실제로 사형 집행에 쓰이게 됩니다.  


인간은 전기의자를 통해 죽음의 원인을 밝히려 했고 뇌를 살펴보니


타서 재가 된 것이 아니라 체액이 모두 증발하게 되고


뇌 세포조직이 누더기처럼 찢어지는 것을 확인합니다.


압권은 저자 본인이 신경과학 혁명을 몸소 보여주는 지점이었어요.


잠들어 있는 뇌의 90%를 깨우기 위해 전기를 활용해서


신경강화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도 해보지만


실제로 인간의 몸은 전기를 흘려보낼 도관치고는 썩 믿을만한 구조가 아니었어요.


뼈, 피부, 근육, 머리카락 등 신체의 모든 부분이


어느 정도 전기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기는 스스로 가장 빠르게 흘러 돌아나갈 길을 찾기 때문에


전류의 대부분은 인간의 뇌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기억력과 추론 능력, 문제 해결 능력 및 다양한 정신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신경과학 혁명이

 

 

이미 전 세계의 많은 국가들 사이에서 영유권 경쟁중이예요.

 

 

860억개의 세포들이 뒤엉켜있는 인간의 뇌, 뉴런의 작동 방식을 바꾸는 연구에

 

 

수십 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고

 

 

고령 인구의 치매, 세계 인구의 1/4 이상이 겪고 있는 정신질환의 치료법 개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범세계적인 뇌 혁명을 실현시키기 위한 과정을 안고


저자가 자신을 피실험자로 하여 뇌의 신경강화를 시도했다는 점이


사실 너무 놀라웠습니다.


 

 

지능을 과연 향상시킬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죠.....


물론 위험한 전기충격은 아니구요......


하지만 전기요법이 역사상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영국의 과학자들에 의해


정점을 이뤘던 역사도 있었죠.


전류로 뇌를 수선하는 일.


 

 

 

 

 

 

 

 

 

 

 

 

 

 

 

 

 

 

 

 

 

 

 

 

 

 

 

 

 

 

 

 

 

 

 

 

 

지능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지능을 높이는 약물을 개발하는데 이르게 되고


그렇게 나온 것이 모다피닐, 스마트 약물입니다.


바로 저자 데이비드 애덤이 직접 복용했던 것이기도 해요.


약물이나 그 기능에 대한 역사적 사례들을 소개하는 부분은 꽤나 흥미로웠어요.


극단주의자들의 자살폭탄 테러 하면 떠오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가미카제 조종사들 이야기는 정말 최고.


미국 해군들이 공포를 느낄 정도로 가미카제 조종사들의 희생은


삶에 대한 애착보다 적을 향한 분노가 더 컸던 것이었고


일왕에게 헌신하며 항복을 수치로 여기는 일본 특유의 문화도 영향을 미칩니다.


가미카제 조종사들이 순수하게 자신의 충성심만으로 표적에 돌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정말 충격이면서도 어쩌면 당연한 걸수도.....!!!


일본은 정말 무서울 정도의 극단을 보여주는 나라인거 같아요.


가미카제 조종사들이 그 목표를 위해서 마약류로 분류되는


중추신경 흥분제 메스암페타민 이라는 약물을 먹고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각성상태를 유지하며 임무에 충실하려고 했던 것이죠.


이 약은 실제로는 무기력증과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1919년에 처음 개발했던건데 1940년의 일본은 메스암페타민에 취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이 약물을 사용하게 되고 이후로 알약으로 만든 것이 그 유명한 히로폰.


나중에는 대학입시생들까지 이 약물을 복용했었다고 하니


중독성이 인간 사회에 주는 파괴력이 있기에 복용 금지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흘러 스마트 약물이라는 이름으로 역시 존재감은 이어집니다.


스마트 약물이라는 이름 하에 인지강화 기법들과 마찬가지로


모다피닐을 치료제로 사용하게 되죠.

 

 

 

 

 

 

인간은 왜 더 똑똑해지려고 하는가?


이 책을 읽다 보면 "IQ 높은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번다" 는 꼭지에서


상식적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IQ와 성취의 연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IQ는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로 개발된 것이 아니라


능력 차이를 비교하는 방법이예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능은 상대적인 것.


그래서 IQ가 높은 사람이 세상의 다양한 분야에서 "더 높은 성취" 를 보이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성공으로 간주되는 좋은 성적, 높은 급여, 명예 등등


높은 지능이 인간에게는 경쟁력 있는 무기가 되니까요.

 

 

그래서 누구나 뇌를 개선하고 지능을 강화할 수 있는


인지강화 기법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겠죠.


그래서 실제로 정신질환을 겪었던 저자는 더 적극적으로


뇌의 신경강화에 대해 확인해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직접 뇌의 신경강화를 위해 1년 남짓 스마트 약물과 뇌 자극을 조합해서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경험을 하고자 우선 멘사 시험을 보게 되는데요.

 

 

예상치 못하게 바로 멘사에 가입할 수 있는 IQ가 나와버린 것....^^;;

 

 

인지 강화로 멘사에 들어가겠다는 구상이 틀어지는 듯 했지만

 

 

1년 만에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멘사 시험을 다시 보게 됩니다.

 

 

동생의 신분으로 바꿔서 한 결과.....

 

 

언어 영역, 문화공평성 영역, 기호 영역 등등 모두 2점부터 10점에 이르기까지 높은 점수를 받았어요.

 

 

저자의 이런 경험을 통해 IQ 를 측정한 것으로 신경강화의 정확한 원인파악은 어렵다는 약점이 있지만


 

저자는 인지강화의 영향과 감독,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 사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 뇌 혁명이 실제로 인간 사회에 가장 바람직한 방법으로

 

 

영향을 미칠 것에 대해서도 기대하게 하죠.


지금보다 똑똑해 질 수 있다는 뇌의 숨은 능력을 깨우겠다는 상상과 도전정신으로 시작했지만

 

 

인간 사회에 신경과학 혁명이 일어나고 있음을 실제로 마주하고 있는 지금,

 

 

그 사실들을 여러 갈래로 보여주고 있는

 

 

<나는 천재일 수 있다> the genius within 이었습니다.

 


"내 안에 숨겨진 천재성 찾기" 인간이라면 누구나 호기심이 당기는 지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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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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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 에 이어서 만나게 된 아디치에 깊이 읽기 두번째로 만난 소설은


<아메리카나 1,2> 입니다.


민음사에서 이 책은 원래 모던클래식 시리즈에 속해서 출간되었던건데


이번에 새롭게 단행본으로 표지도 트렌디하게 바뀌어서 나왔어요.


제3세계, 나이지리아 출신의 아디치에는 미국에서 영어로 소설을 써서


 차세대 젊은 소설가, 영향력 있는 인물, 세계를 이끄는 사상가 등 다양한 타이틀을 얻고 있습니다.


2013년 민음사에서 출간된 <아메리카나 1,2> 가 아디치에가 쓴 소설로는 가장 최근 작품인듯 합니다.


원래 두 권이상 되는 책은 잘 안 보는 편인데


요건 가독성이 좋아서 재밌게 읽었어요.^^

​아디치에의 소설을 이미 두 가지를 읽고 나니


당연히 비교가 되면서 <보라색 히비스커스> 를 다시 떠올려보기도 했는데요.


소설 <아메리카나 1,2> 가 상대적으로 더 스토리도 풍부하고


플롯이 잘 짜여진 거 같아요.


스토리 면에 있어서 두 개의 축이 씨실과 날씰처럼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소설이었어요.


하나의 축은 나이지리아 소녀 이페멜루가 어린 시절에 오빈제를 만나 사랑과 이별을 경험했고,


10대를 지나 20대 성인이 되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겪게 되는 생활들이 보여집니다.


미국에서 만난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남자들을 통해


나이지리아 여성은 정신적으로 성장해 가는데요.


성장하는 과정이 장미빛으로만 물든 건 아니었어요.


심지어는 매춘부의 생활까지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지만


다행스러운건 주인공 이페멜루의 자의식이 그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주체적이라는 점입니다.


늪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되면서 한 단계 성장하고 사회적으로도 진화하게 되죠.


그리고 또 하나의 축은 다양한 인종이 혼재되어 살아가는 미국 사회로 주인공이 이민을 가게 되면서


곳곳에서 미국 인종주의와 차별의 민낯이 드러납니다.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더 내밀히 들여다보면 인종, 이민자, 여성, 종교, 계층 등 차별의 그림자가 진하게 묻어나는 미국.


특히 그 속에서 비미국인 흑인과 미국인 흑인을 대립적 구도로 놓고


같은 흑인안에서도 이민자에 대한 멸시가 은근하고도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미국사회를


시종일관 조망하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간 나이지리아 여성의 시각으로 미국사회를 바라보면서 느낄 수 있는 차별과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겪게 되는 일들로 인해 정신적인 성장까지 보여주는


풍부한 스토리와 탄탄한 플롯이 있습니다.


소설이 어렵지 않으면서 사회소설로서의 깊이도 있어요.


실제로  <보라색 히비스커스> 보다 10년 후에 <아메리카나 1,2> 가 출간되었는데


제가 봐도 아디치에 작가 역시 주인공처럼 작가로서 성장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페멜루를 다른 사람도 이렇게 생각해요.

 무얼하든 하고 싶어서 하고 남들이 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따라하지는 않는 사람.

참으로 주체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이 할 얘기는 하는 사람.

그래서 그럴까요?

이페멜루는 소설 속에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사람으로 부와 명예까지 얻게 되기도 하는데요.

"인종 단상 혹은 미국인 흑인들에 대한 비미국인 흑인의 여러가지 생각" 이라는 블로그에

​사회 비판적인 글을 명쾌하게 올리면서 자신의 생각을 똑부러지게 사회에 전달합니다.


인종이 다른 사람과 사랑하는데 문제가 없었다는 사람의 말에 이렇게 항변하죠.


​당신이 인종이 문제가 안 됐다고 말하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그랬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 바라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저는 인종이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 왔어요.


한번도 스스로 흑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미국에 와서 흑인이 됐죠.


흑인이 미국에 살면서 백인과 사랑에 빠지면 단둘이 있을 때는 인종이 문제 되지 않아요.

나와 연인, 둘뿐이니까. 하지만 밖에 나가는 순간, 인종은 문제가 돼요.

하지만 우리는 얘기하지 않죠.

우리의 백인 연인에게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소한 것들,

 그들이 더 이해해 줬으면 하는 문제에 대해 얘기하지 않아요.

​그들이 우리가 과잉 반응 하는 거라고, 우리가 지나치게 예민한 거라고 말할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세상이 얼마나 변했나 봐, 사십 년 전만 해도 우리가 사귀는 것조차


불법이었을 텐데 어쩌고저쩌고하길 바라지 않아요.



​담담하게 말하는 거 같아도 제게는 거역할 수 없는 차별의 시선으로

상처입은 여성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흑인들은 유대인들만큼 고통받지 않았잖소."


"에이, 이게 무슨 탄압올림픽이라도 됩니까?"​

공감하지 못하는,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무심코 던지는 한 마디는


차별을 겪는 이들에게는 말이 칼이 되어 돌아오지요.


실제로 미국 내에서 탄압올림픽 너무 뿌리깊이 박혀 있는 미국의 민낯이었더군요.

 

 

 


​인종이라는 장벽에 막혀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인종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문장, 당하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가슴 아픈 말인거 같아요.


 

<아메리카나 1,2> 소설 속에서 흑인이고, 여성이고, 이민자였던 이페멜루는 

 곧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였습니다.

 

그녀와 비슷한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는 인플루언서이자 페미니스트 작가로서


아디치에의 다음 소설이 기대되요!!


<아메리카나> 는 2017년에는 매년 뉴욕 시에서 주관하는 "원 북, 원 뉴욕" 행사의 수상작으로 뽑혔다고 합니다.


모든 뉴욕 시민이 동시에 같은 책을 읽자는 운동으로서


일반인 투표로 수상작이 결정된다고 하는군요.


나이지리아 출신 아디치에가 미국 사회에서 여성과 흑인, 이민자의 목소리를 대변함으로써


미국에 조금씩 인종주의로 인한 차별에 문제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는 방증이겠죠.


견고했던 미국 인종주의에 균열이 오기를.


나아가서 전 세계에 어떤 특정 민족과 집단을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차별이 사라지기를.


아디치에의 소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음을 보면서 희망을 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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