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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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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은 정상에 이르는 길이 여러개라는 뜻도 되고, 산을 오르는 방법이 여러가지라는 뜻도 된다. 혹은, 그것은 산을 오르는 '이유'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대개는 건강과 행복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산을 오를테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복'을 위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사색을 위해서 산을 오르기도 한다. 거칠게 보자면, 등산은 대개 무언가를 잔뜩 '채우는' 활동이 되거나, 혹은 무언가를 모두 '비우기' 위한 활동이 된다.

촘스키와 푸코라는 유명한 두 사상가의 대담은, 언뜻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로 판명되기도 하나, - 물론 공통점도 있다. 동시대의 두 인물에게는 푸코의 말마따나 어떤 정의된 '정의'가 있는 것이다 - 단순히 그 이분법이라는 것이 어떤 활동 그 자체의 즉물적인 목적을 위한 것은 아니다. 즉 다시 말해 두 사상가의 이분법적 구도는, 오히려 그 자신들의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회용' 대담에서는, 그러한 사상적 내밀함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히려 이 이분법적 구도에서 펼쳐지는 두 사상가의 '입심대결'에서 알아보아야만 할 것은, 그들의 내부가 아닌 우리들 자신의 내부 - 그 사이의 분절된 간극과 그 간극만큼이나 즉자적으로 '분열된' 우리의 사유-체계이다. 

둘의 대담에서의 디페랑스적 요소 - 촘스키에 의해 정의되는 푸코적 텍스트와, 푸코에 의해 조명되는 촘스키적 텍스트에 관해, 그리고 필연적으로 지연되는 그 '해석'에 관해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예컨대 인간성을 구성하고 있는 스키마를 기본 요소로 판명하는 촘스키의 언어관에 대하여, 푸코에게는 그 '인간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지표, 그러니까 기타 담론에 대한 하나의 '인식론적 지표'의 역할만을 할 뿐이며, 과학적인 개념으로서 작용하지도 않는다.  데카르트가 촘스키적 '창조성'에 하나의 기준이 된다면, 푸코는 그러한 일반적 '기준'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스피노자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촘스키가 주장하고 있는 '아나코 생디칼리즘'에 대해 푸코가 이렇다 할 반문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인데, "사회-정치적 권력과 신체들을 통제, 억압하는 감춰진 관계들의 폭로"를 위하여 과연 자유론적 사회주의가 올바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좀 더 끌고나갔으면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다만 뒤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에 관해 사유하는 모습에서는, 역시 필자 자신이 푸코의 생각에 가깝다는(혹은 가깝고자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촘스키의 '보편문법'이 틀렸다거나, 비본질적인 내용이라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러한 '내면적' 사상에 잠식한 '내면'을 까발리고자 했던 것이 푸코의 목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정의라는 개념은 특정 정치/경제 권력의 지배수단으로서 혹은 그러한 권력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여러 다른유형의 사회에서 발명, 유통된 개념입니다" 

이러한 푸코의 발언은, 일종의 '유토피아적' 구상에 대한 사변적 논쟁과도 일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의 말마따나, 과연 "계급 없는 사회에서의 '정의 논쟁'혹은 '정의의 정초'는 가능한가?"하는 것. 이것은 다만 인간성을 어떤 '보편-절대적 기반'으로 간주하는 촘스키의 '권위'보다 훨씬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과연 계급과 계층과 억압과 공포가 사라진, 진정한 '민주주의'의 재건 속에서, - 그러니까 그러한 유토피아적 건설 속에서 - 우리가 느끼는 '정의'라는 개념과 '인간성' 내부의, 혹은 '주체'라는 '충분히' 분열된 개념은 어떠한 것일까, 하는 것. 더불어 그것은 촘스키와 같은 비교-중도적 탈중심화에서는 결코 발견되어질 수 없는어떤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조를 중시하여 사건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처럼, 반대로 사건을 중시하여 구조를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유형의 사건들이 다양한 층위를 형성한다는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탈구조주의자적' 면모를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한 만하다. 구조에 편입될 수 없는 '사건'들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론적 경로들을 가지며, 그러한 의미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어떤 투쟁과 전략 - 상징주의적 분석이나 기호론적 분석, 그러니까 헤겔적 회피와 기호론적 안일함을 배재한 - 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투쟁' 자체의 '현실'적 면면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면서' 사건의 탈구조화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이후에 나오는 권력과 '억압'에 대한 그의 의견은 꽤 유명한 것이라 생각된다. 

"억압이라는 개념은 권력의 효과를 규정하는 데 권력의 사법적 측면에 너무 치중하는 것입니다. 권력이 순전히 억압적인 것, '안 돼'라고 말하는 것뿐이라면 사람들이 그것에 순순히 복종하리라고 보십니까?" 

이러한 그의 의견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대안은, 권력 관계에 대한 분석이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부 구조'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진정한 분석과 대안도출이 어렵다는 것.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 그래서 그의 이러한 사상이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 국가의 범위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현실적 '혁명'이란 불가능하다. 그것이 어떤 '국지적' 혁명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대의'는 언제나 국가라는 틀이 아니라, 구조적 관계를 넘어선 탈구조적 '공동체'와 연대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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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임명하지 않은", 그래서 "그 누군가로부터도 임명되지 않은" 보편적 '개인'으로서의 우리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본질적' 분석에 대하여 그는 하나의 '관계망'을 남겨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관계망에 대한 분석틀, 상징계적 현실에 관한 비판적 분석틀을 위한 '보편적 개인'의 '투쟁'은 지금-여기에도 충분히 유효하다. 푸코를 읽는 것이 개인에게 언제나 '현실'을 읽어나가는 것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투쟁의 굴레, 그러한 '전체적이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우리의 사유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앞당길 수 있는 개인적 '주체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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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 주세요.

 

 

'장 뤽 낭시'라는 프랑스 '공산주의-철학자(!)'의 책. 바디우의 '찬사' 만큼이나, 그의 '공동체'에 관한 사유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듯하다. '무위의 공간'에 대한 그의 사유는 왠지 아감벤을 떠올릴 만도 하고,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사유는 지난 달 선정된 저자인 샌델의 사상과도 비교해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고진과 연결될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최근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의 '영향력 있는' 주제(정치철학?) 이니, 한번 쯤 살펴보면 좋을듯. 

  

12월에는, 요상하게도 인문/철학 저서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온것 같다. 그래서 사실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반대로 한꺼번에 이해하기 버거운 내용들이 많아져서 당황스럽기도 한 것이 사실. 낭시가 나왔으니, '데리다'의 명저 또한 결코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이 저서에 대한 필자의 조악한 설명은 그닥 필요없을 듯 하고, 책 소개를 간단히 덧붙인다. 

" ...실제로 <그라마톨로지>는 책 제목이 독자에게 암시할 수 있는 주제 내용과 달리, 결코 하나의 문자학 이론이나 문자 철학 또는 언어철학 등의 단일 주제로 표상될 수 없으며, 생명과 죽음, 자연과 문화, 여성과 남성, 문명과 야만, 기억과 망각, 외면과 내면, 선과 악, 목소리와 그래피즘, 의식과 무의식, 현존과 부재, 충만과 소외, 고유와 은유, 욕망과 쾌락, 성욕과 자기 관능성, 역사의 기원과 과학의 성립 조건, 관음과 자위, 언어와 정치, 음악과 정치, 화성과 선율 등 인문학의 거의 모든 주제를 아우르고 있는 서양 인문학의 대서사라고 보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 <책 소개> 

 

그린비에서 출간중인 '모리스 블랑쇼' 선집의 세 번째이다. 이 저서에서는 특히 카프카, 릴케, 횔덜린 등의 작품에 대한 그의 본질적인 분석이 행해지고 있다. <무한한 대화> 편도 보고싶지만, <문학의 공간> 또한 그의 중심 저작으로서 그의 사유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니, 한 번쯤 탐독해보면 좋을듯! 

 

지난 달에도 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을 추천한 바 있는데, 사실 '유아(년)기의 역사' 같은 그의 대표작이야 말로, 그에 대한 이해를 위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는 점에서 정말 반가운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저자들, ㅡ 벤야민과 마르크스, 하이데거를 '재사유'하고 있는 이 책의 근본적인 '논점'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이나, 현재 일시 품절상태다.(14일 경 재입고되므로, '혹여' 선택된다면 문제는 없으리라 보지만.) 어쨋든 재미있는 일인데, 물론 초판을 너무 적게 찍었을 수도 있지만, 그리고 최근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 중의 한명인 '알랭 바디우'의 손꼽아 기다리던(국내에 제대로 번역-소개되지 못했으므로) 명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놀라운 사실인 듯.  수학의 '집합론'을 존재론과 결합함으로서, '철학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거대 서사'와의 대립을 보여주는 반-포스트모더니즘적 도전이며, 따라서 그것은 '플라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고 하겠다.

정말 12월에는 읽고 싶은 책들이 '넘쳐나도록' 나온 것 같다. 바디우의 '사랑 예찬'과 같은 책들도 추천하고 싶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도 재도전해보고 싶었다. 아무쪼록 좋은 책이 선택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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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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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단히 명료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칸트의 저서를 읽을 때 오는 그 '싸늘함'과는 별개로, 그의 저서에는 어떤 종류의 '따듯한 친절함'이 뭍어나오는 것이다. 더불어 이것은 대단치 못한 리뷰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게다가 평소에 그닥 관심이 없었던 그의 '공동체주의'이지만, 졸렬하고 단편적인 독서를 통해 필자가 과연 샌델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담보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과연 '도덕'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이해'되어야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모든 오해와 오독을 무릅쓰고 짧은 리뷰를 남겨보고자 한다. 

물론 이 저서 전체의 구체적 리뷰는 필자에게 불가능하다. 그것은 칸트와 롤즈에 대한 독서가 끝난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그가 펼치는 일정 부분의 논리적 사고는 非아시권의 현실을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교육'에 관한 부분을 다룰 때 거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내용에 대한 '주석달기'를 감행해보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좀 '불완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도덕법의 근거는 실천이성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 즉 자율 의지를 가진 주체에서 찾을 수 있다. 경험적 목적이 아니라 "목적의 주체, 즉 그 자체로 이성적인 존재가 모든 행동 원리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오직 칸트가 말하는 "가능한 모든 목적의 주체"만이 권리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이 주체만이 자율 의지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이 주체만이 감각적 존재를 보다 더 높은 존재로 격상시켜주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히 독립적이고 이상적인 영역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처럼 철저한 독립성만이 상황의 변화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초연함을 부여한다." (p.180-181) 

예컨대 고진은 <윤리 21>의 서문에서 이런말을 했다. 

"나는 이 책에서 도덕과 윤리라는 말을 구별하려고 했다. 칸트는 일관되게 도덕적=실천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가 도덕적이라든가 실천적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통상의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것을 윤리라고 부르고, 도덕이라는 말은 통상의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즉 도덕이라는 말을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윤리를 '자유'라는 의무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한다." 

오히려 더 헷갈릴 수도 있지만, 고진은 샌델을 읽는 데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또한 '칸트'를 통해 그의 '윤리'에 대한 생각을 펴 나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독서가 선행/후행 한다면 더욱 좋을듯 싶다.)생각해보니, 이 주제로 세미나 같은게 열리면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고진과 샌델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고 보는 필자이지만, 인용한 두 내용은, 롤즈를 넘어서기 위한 샌델의 '분석'이며, 또한 칸트를 재해석하기 위한 고진의 '재구성'이라는 점에서 참고해볼만 할 듯 싶다.  

아까 잠시 언급했지만, 인문학적 사유의 '주변부'라고 인식되는 우리, 여기, 한국에서, 이렇게 고진만큼 샌델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 게다가 이렇게 '물밀듯' 저서가 쏟아져나오고 있으니 - 어떤 의미에서 썩 달갑지만은 않은 부분이다. '정의'와 '하버드'가 세트로 묶여 '시너지'를 만들어냈다면, 사실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왔던 샌델의 '공동체주의'가 이제서야 '제대로' 번역된다는 것은 아니러니하다. 게다가 이제 그는 그러한 공동체주의의 한계와 수정을 가하고 있는 입장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서는 '도덕'과 '정의', 혹은 '윤리'에 대한 '정초'가 이루어지지 못하는가?  

칸트 전공자는 무수히 많으며, 롤즈, 밀, 듀이, 게다가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이들도 무수히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 또한 이에 대한 관심이 많으며(물론 어려워서 던져놓기 일쑤지만) 아둥바둥 거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는 어떤 '기시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철학과가 사라지고 있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것이며, 인문학도로(특히 철학도로) 자신의 미래를 전유함으로 얻을 수 있는 초라한 경제적 지표를 상상해볼 때이며, 혹은 그러한 현실을 박차고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게 지금 이 순간도 어떤 '목적'을 향해 투쟁하고 있는 홍대 인근이며, 국회 의사당 앞이며 하는 곳의 '운동'의 모습이 바로 그에 대한 '이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도덕'(혹은 윤리)의 '이름들'을 읽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의 동어반복적 '실천'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책에 대한 독서는, 바로 '도덕=실천'이라는 비공식적 공식에 대한 우리의 '움직임'을 촉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쨋든, '신호등의 빛'은 그 자체로 '도덕률'이 아니다. 칸트에 대한 답보가 의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빛은 그 자체로 도덕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도덕에 대한 관념의 '형이상'이다. 여기서 신호등의 빛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그 빛이 아니며, 바로 우리 머릿속에서 어슴프레 빛나고 있는 그것, 우리가 '자율의지'를 가진 '주체'라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어떤 '공백'에서 삐져나오는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도덕률이란 바로 의식적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적 차원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에 가깝다. 그것은 무의식과 의식을 함께 '꿰뚫고' 삐져나오는 것이며, 샌델의 말처럼 어떤 '자아상'과 관련되는 것이라 할 만하다. 이상주의적 견해라기보다, 이것은 확실히 '법(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가운 점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대한 샌델의 이 엄격한 '공격'들이, 충분히 정당하다는 데에 있다. 정치(철학) 담론에 대해 그가 말하는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넘어서기'는,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공동체'가 단지, 개인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했던 '공백의 영역들'을 채우는 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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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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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다에서 자랐고, 바다에서의 기억이 많다. 하지만 동시에 내게 바다의 기억은 분열되어 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다다, 라고 내가 당당히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그런 분열된 기억들 때문이다. 대부분의 바닷가 태생과 같이, 나는 바닷내음이라는 걸 모르면서 지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의 냄새는 나의 냄새이므로, 나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나 보다. 그런 것이다. 대부분의 삶이란, 그렇게 '정작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은 모르고' 지나쳐가게 되는 것이므로. 하지만, 바다를 떠나 서울에 와 두 평 남짓한 원룸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가장 그리웠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냄새이자, 바다의 냄새였던 것 같다. 글쎄, 믿으련가 모르겠지만, 나는 서울에 올라와서야 바다내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유년시절의 나를 휘감았던 추억의 냄새라는 것도.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이란, 의외로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런 풍경일 경우가 가장 많다. 특히 겨울의 바다를 거닐어 본 이라면, 그것이 가져다주는 을씨년스러움과 부피만 큰 고독, 혹은 끝없이 침잠하는 외로움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슐레가 바라본 바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는 매우 '생물학적'으로, 혹은 '인류학적'으로, 때로는 '사회학적'으로 분석해내어 우리에게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백사장을 거닐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수평선의 풍경과 나는 얼마만큼의 '시차'를 가지고 있을까?" 하는 것. 옆에서 보든, 위에서 보든, 때로 물속에서 보든, 바다는 바다다. 그것은 그저 '흘러 넘치고' 있다. 그것은 때로 인간을 보듬고, 인간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며, 간혹 인간을 그 누구보다 무섭게 위협하기도 하며, 그러다가는 다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끝없이 침묵하기도 한다.  

"그래 괴물아, 뭘 원하는 거냐? 사방에 보이는 난파에 취했구나. 뭘 더 바라느냐? - "너와 세계의 죽음을, 지구의 멸망을, 카오스로의 회귀를." (p.84) 

우리의 시각이 어떤 면에서 '아웃 포커싱'과 같은 기능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시각을 가장 집중시키는 것 또한 바다의 한 특징이다. 태풍이 오는 바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방파제를 뚫고 올라오는 파도를 보노라면, 저 수평선 너머의 세상은 한없이 멀어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춤추는 바다의 앞에 선 인간은, 결국 한없는 존재의 나약함과 부질없음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미슐레의 물음에 대한 바다의 답변처럼, 바다는 어쩌면 태초의 카오스, 그 자신이 약동하던 시대의 카오스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바다를 정복할 수 없다. 아무리 큰 배와, 육지매립과, 4대강 사업을 넘은 4대양 사업을 통해서도, 심지어 '조니 뎁'이 100명쯤 있어도 결코 바다를 정복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바다가 가진 '광범위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본능' 때문이다.

"본능은 한동안 잠이 든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다. 그렇지만 잠들었는 붙잡힌 채 갇혀 있든, 마술에 취했든, 이런 상태가 곧 죽음은 아니다. 본능은 살아있다. 규석으로 짠 거친 해면 상태로. 움직이지도 숨쉬지도 않고, 순환기도 없이, 아무런 감각 기관도 없이 살아있다. 그것을 어떻게 알까?" (p.125)

땅거미는 바닷가에도 찾아온다. 한동안 횟집들이 켜놓은 울긋불긋한 불빛들이 하나 둘씩 일렁이기 시작하면, 비로소 황량한 바닷가 마을에도 저녁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때 문득 바다에는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백열전구가 빛나고, 어슴프레하게 달빛이 얼굴을 내민다. 바다의 저녁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온다. 그리곤 바람이 분다. 언제나.  

"바다의 생명에 꿈이요 소망이자 복잡한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정착이다."(p.208) 

그렇게 해질 무렵의 바닷바람은, 우리를 한동안 머물게 한다.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혼'은, 대게 그 광경 앞에 잠시 그 바닷가의 풍경속에 무겁게 가라앉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바다는 거울일까? 미슐레의 말처럼 바다가 가진 하나의 '욕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닷바람이 만드는 '주체로의 회귀'인 듯 보인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정착이며, 반대로 떠나갈 수밖에 없는 바다와 인간의 운명이다. 운명의 굴레는 그렇게 바닷바람과 함께 오는 듯하다. 

늦은 저녁, 백사장에 앉아 한동안 말이 없는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같이 등대를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등대가 비추는 바다 위의 동심원을 바라보는 일이다. 인간은 그렇게 바다를 보며 다름 아닌, 자신에게 덧씌워진 운명의 굴레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눌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루해가 저물었다. 바닷새는 늦게 날아와 파도를 부추기다가 다시 땅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절벽과 어둑한 정원 너머로 날카롭고 섬뜩한 밤새의 첫 울음이 들려온다. 그러나 새장은 벌써 닫혔다. 새들은 날개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잠들었다. 그녀도 안심하고 안도한다. 이윽고 깊은 숨을 토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를 품에 끌어안는다."(p.330) 

바다가 잠들면, 인간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향해 떠난다. 하지만 '텅 빈' 집의 문은 닫혔다. 그것은 주체의 공간이다. 공허함을 가득 안고, 인간은 그렇게 바다를 떠난다. 하지만 영원히 떠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바다에서 태어난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기어들어가 죽음을 맞이하고픈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남은 것은 자신과 바다를 끝없이 '포옹'하는 일이다. 그것이 깊이 잠들 수 있도록. 혹여 밤새가 날아와 울거나, 아득한 심연의 악몽을 꾸게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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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본어능력시험에 꼭 나오는 최우선 필수단어장 N4.N5
유선희 지음 / 시사일본어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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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단어장' 하면 마치 학창시절에 '달달' 외우던 영어단어장이 생각나서 왠지 부담스러운 경우가 있다. 게다가 필자처럼 JLPT 시험을 '한 번도' 쳐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더욱 더 그런 암기가 힘겹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의 구성은, 단어 암기에 대한 내 부담을 많이 줄여주었다~ ^_^

먼저, N4,N5는 가장 쉬운 난이도의 시험이다. 이에 걸맞게 단어 또한 비교적 쉬운 것부터 시작하여, 중급 단어들까지 아우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그리고 각 단원 사이사이에 있는 '어휘력 체크'와 '확인 문제'들을 통해서 자신의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그리고 학습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평가할 수 있는 부분도 마련되어 더욱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1+1 단어' 학습이다.  

예를 들어, '백화점'이란 단어 옆에, '세일' 이란 단어를 같이 제시해서 유사, 대조, 관련 단어를 '함께' 외우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하나의 단어를 외우면, 같이 관련된 단어도 같이 생각나게 된다는 점에서 정말 효과적이라고 본다. 더불어 관련 단어 뿐만 아니라 '비슷하지만 다른' 단어, 예컨대 '빌딩ビル'과 '맥주ビㅡル' 는 발음이 유사하여 착각하기 쉬운 단어이므로 1+1 단어 학습을 통해 확실하게 구별하여 공부할 수 있다! 

또한 MP3 무료 다운로드를 통해 모든 표제어와 예문을 '일본어능력시험 전문 성우'의 목소리로 생생히 들으며 학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청해실력까지 잡는 혜택도 누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 

점점 어려워지는 일본어능력시험에 대비하고, 시험에 첫발을 내딛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더불어 이 책을 통해 일본어 단어암기를 어려워하는 모든 이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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