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어느덧 마지막 추천도서 페이퍼를 작성하고 있네요. 그동안 잘 해나갔는지는 의문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과 생각을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점은 좀 아쉬움으로 남네요. 혹시 다시 활동하게 된다면, 좀 더 많은 생각의 공유와 토론, 그리고 무엇보다 갈등의 장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 다들 수고하셨어요.

   

 1.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이 책을 아직 직,간접적으로 접해보지 않은 분들이 있을까 만은, 그래도 필자처럼  '아직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추천한다. 인디언들이 어떻게 그들의 터전을 잃었는지, 그리고 서구인들의 '수탈'이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가장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책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개정판이라는 장점은 보너쓰!

 

 

  

 

 

2. 콘크리트 유토피아 

 : 이 책의 저자는 '디자인 연구자'이다. 단순히 '디자이너'와의 차이점이라면, 디자인이라는 대상에 대해 '인문학적' 혹은 다양한 '영역'을 통한 분석의 틀을 조형시키는 작업을 한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저자가 주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가장 보편적 주거형태인 '아파트'이다. 다만 이것은 일종의 '다각적 사회연구 보고서'이되, 문학적 옷을 입는다. 전세 대란과 부동산 침체의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주거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나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왜 사유해야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될 지도 모르겠다. 추천!

 

 

  

  

3.  혼종문화

  

: 현재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담론'들을 헤집어보면, 그 내부는 대부분을 '서구 사상가'에게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 과연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담론을 '형성'해나가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 더불어 우리는 '근대(modern)'라는 개념을 설명함에 있어, 라틴아메리카라는 '주변부'를 생각하는것을 너무나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순히 문화연구의 의미를 벗어나, 이 책이 우리에게 '자각'하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내부의 '식민성'일 것이다.

 

 

 

4. 신화와 현실 

 

: 저자인 '마르치아 일리아데'는 사실 <성과 속>이나 융 연구가로도 유명하다. 종교학자로서의 그의 작업은 아마도 수많은 사회학자, 심리학자 등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저서에서 주요할 점은, 결국 우리들이 자신의 현실 속 '환상의 내부', 그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일종의 주체론과도 연결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는 결코 하나의 환상(신화)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라는 (초월적)선언이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들린다. 

 

 

 

  

5. 전중과 전후 사이 : 1936-1957 

 :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인데, 필자는 아직 그의 '멋진' 글들을 거의 읽어본 적이 없다. 국내에서 영향력 있는 일본 사상가들은 아마도 '가라타니 고진', '아즈마 히로키', '마쓰모토 하지메(?!)' 등이겠지만, 조금 눈을 돌려본다면 그의 이름이 일본 사회에서 꽤 '묵직한'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책은 일본이 패망을 겪은 그 '지점' 바로 이전과 이후, 그 시기에 쓰여진 그의 글을 담고 있다. 한 명의 '젊은 정치학자'로서의 그의 글을 마음껏 엿볼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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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3-1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루야마 마사오의 <전중과 전후사이 1936-1957>이라는 책은 저도 추천할까 말까 하는 책입니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책을 찾아보다가, <현대 일본 사상>, <근대 일본의 비평 1868-1989> 같은 책을 토막토막 보며 일본 사상가들의 글에 관심이 조금 생겼는데요.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 기간에, 그리고 패망을 바라보는 일본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흥미롭기도 하고, (식민지를 겪었던 우리의 시각에서는) 조금 새롭기도 하더군요('천황'이라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구요). 어려워보여서 좀 걱정은 되지만요.^^;

rainmaker_1201 2011-03-13 22:18   좋아요 0 | URL
아, <근대 일본의 비평 1868-1989> 같은 경우는 저도 어서 읽어보고픈 책입니다. '비평'이라는 이름을 단 대부분의 산문이 그러하듯, 물론 어느 정도의 개념을 요구하는 글이라는 생각은 들어요.ㅎ 개인적으로는 가라타니와 아사다(아키라)에 대한 관심 때문에 보고싶은 것이긴 합니다만, '하스미 시게히코'가 푸코와 들뢰즈를 일본에 소개한 대표인물이라는건 처음 알게 되어서, 저도 관심이 가네요.^^

굿바이 2011-03-15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콘크리트 유토피아> 와 <혼종문화> 모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책들인데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요.
<전중과 전후 사이>는 저도 추천할까 고민을 했었는데,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사전지식이 너무 없다보니 덜컥 겁이 났습니다 --;

rainmaker_1201 2011-03-16 19:01   좋아요 0 | URL
저도 사전지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지만,ㅎ 그래도 언제나 '지르는' 입장에서 대부분의 책들을 추천하고는 하지요. 근데 의외로 <혼종문화>를 추천하시는 분이 제법 있어서 약간 놀라고 있습니다 ㅋㅋ
 
<반자본발전사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는, 그리고 다른 면에서 조금 '특별하게는', 필자에게 꽤 유용한 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비록 이런저런 개인사로 인해 허겁지겁 읽어내려 가느라 오독하거나 놓친 부분들도 상당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저자들의 생각은 단순히 '자본주의'와 '발전'에 대해 필자가 생각했던 일부의 생각들이, 그저 단순한 '현상인식'에서 비롯된, 모자란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곤 했으니 말이다.  

어쨋든 '발전=변화(혹은 진보)'라는 공식에 있어, 우리는 이 동치된 관계 속에서 '='라는 기호에 대해 다시한 번, 우리들의 생각을 '빗금치는' 작업이 필요한 때는 아닌가?  

"발전은 현실을 담아내는 인식이고, 사회를 달래는 신화이고, 욕망을 풀어놓는 환상이"(p.24)라는 작스의 말처럼, 그것은 결국 우리들 사회를 바라보는 모든 '기능주의적' 관점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부풀어오른 자의식처럼 '눈에 띄는' 현상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깃털처럼, 천천히 '부유하고', 또 '가라앉는다.'  또한 그것은 발전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삐딱하게' 재구성하는 것과 관련된다. 왜냐고? 이미 그 대상(발전이라는 관념)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외상적 (관념을 바라보는)왜상'과 관련된다. 지난한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발전이라는 하나의 '증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은 이미 '외상적'이며, 따라서 그것이 어떤 '실재적 형상'을 띄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색안경'을 거두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것은 '발전'이라는 제목의 3D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우리들의 얼굴에서 '3D용 안경'을 제거하라는 의미다. 그럼 스크린에선, 하나의 '왜상'이 펼쳐지지 않는가? 실재를 마주하는 것, 지젝(라캉)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사막을 마주하는 일'이나 다름없는지도.

"생태 관료주의가 떠오르면 사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고 소비해야 하는가 같은, 사회 윤리를 둘러싼 근본적 논의가 묻힌다. 그리고 서구인의 욕망이 서구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암묵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며 생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고 낮은 수준의 상품 거래를 일부러 선호하는 사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p.93 

이러한 문구들은, 마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경험하게되는 순간과 겹쳐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쨋든 이러한 말은 자본주의 내부의 '맑스적 유령'을 확실히 현시하는 듯한데, '생태 관료주의'라는 저 오만한 개념에 대항한 '근본적 논의'란 결국 마르크스의 유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빈곤층의 가난은 부유층의 풍요를 만들고, 빈곤층의 굴욕은 자부심을 낳고, 빈곤층의 의존성은 부유층의 자립성을 낳는다. 따라잡기를 통한 평등은 현실의 불평등을 조직하고 합리화하는 신화에 불과하다." p.121 

'선험적' 불평등(세계경제구조는 불평등을 만들어내며, 그러한 불평등을 동력으로 구조화된다는 것)이란, 결국 이러한 세계적 '이율배반'과 관련된다. 물론 그것은 경제적 모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서도 인용했듯, 하나의 '신화'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분석과도 겹쳐지듯, 이것은 '세계사회'를 움직이는 하나의 집단-무의식적 연료이다. 트루먼이 남/북반구를 하나의 '기준'으로 나누는 연설을 내뱉고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잡게 된 순간, 소위 '저개발 국가'들은 '미국'이라는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산 증인은 바로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과 박정희는 아닌가? 또한 결국 트루먼이 말한 '낡은 제국주의'를 대신할 대체물이란, 하나의 새로운 '문화-경제적 파시즘'에 가까웠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계획이라는 개념은 마음먹은 대로 사회 변화를 설계하고 주도하고 생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구현한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는 계획수립을 통해 진보의 길을 따라 그런대로 순탄하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언제나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로 여겨졌다. 그것은 굳이 발전 전문가가 나서서 애써 설득할 필요조차 없는 공리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p.283

여기서 저자는 푸코의 '생태 정치'를 언급하며 권력이 모든 복지를 장악하고 자료화하는 동시에 사회 자체를 '제어하는' 모습을 통해 현실적 사례를 비판하고 있다. 결국 개발도상국이 하나의 '계획'을 통해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하나의 공리로 인식되며, 따라서 어떤 '비판의 대상'도 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이러한 공리적 인식, 즉 선험된 '계획'이야말로 국가권력이 잘 유지,보수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좀비PC와 같은 것은 아닌지.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적 설계를 거부한 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에 새로운 대서사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의중을 드러내지만, 사회적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구체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해서 말한 것은 마르크스의 유산에 근본적 약점을 남겼다." p.506 

저자는 이러한 인식을 통해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계속 사용하거나, '사회주의식 발전'에 대한 '변종적 추구'를 할 경우, 일종의 마르크스에 대한 '오독'을 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역사적 오해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결국 이것은 현대의 탈근대적 이론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적 비판'이라 할 만한데(혹은 기표의 용법에 대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 결국 소련식 사회주의의 한계나 자본주의적 기만에 대항하는 것은 이러한 '오해'의 가능성을 절멸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명확성과 더불어, 일종의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결론과도 관련된다. 

제법 허덕거리면서 읽긴 했지만, 어쨋든 19개의 다양한 주제를 관통하는 저자들의 목소리는 공통성을 갖고 있는듯 보인다. 그것은 앞서도 설명했듯 '발전'이라는 개념에 대한 주체의 외상적 왜상을 '발견'해내는 일이며, 동시에 발전이라는 개념 그 자체의 즉자적인 발전, 즉 '발전적'인 발전이 필요한 시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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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1. 어떤 동음이의어  

 대부분의 필자 세대(20대)가 그렇듯이, 우리는 대부분 '그들'을 잊고 지낸다. 책을 읽으며 그들의 이름을 듣고서는, 새삼 끓어오르는 피를 느끼고,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대신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사실 '그들' 이라는 대명사에는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의 의미만을 가진 단어의 껍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필자의 분노를 끓어오르게 하고, 새삼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대신해 비난과 조소, 그리고 무엇보다 '증오'를 표출하고 싶게끔 만드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상한 '그들'에 대한 감상은, 필자로 하여금 다시금 '지금-여기'에 대한 반추, 그리고 현-존재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현시적 물음을 다시금 담지하게 만든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그들'은, '독립' 혹은 '투쟁' 그리고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위해 스러져 간 모든 이들을 뜻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이 파란만장한 역사의 순간에서 단순한 '욕동' 만을 좆은 비루한 인간군상들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러한 동음이의적 연결고리 뿐만 아니라, 어떤 모종의 '기시감'이 존재한다. '그들'에 대한 사유는, 동시에 우리들에 대한 사유이며, 따라서 그것은 현실 정치에 대한 '재해석'과 관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것은 끝없이 '반복-재생'되는 우리들의 지난한 정치적 혹은 존재적 '무력감'을 다시금 깊숙한 역사의 현장에서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리영희라는 하나의 '기표'를 읽어내려가는, 혹은 사유해나가는 작업은, 다름 아닌 바로 그 기표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 우리들이 단순히 리영희라는 '사상의 은사'를 박제시킨 사상적 '유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유물이란, 사실 결코 '평전'이라는 바이오그래피 안에 박제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기 이곳, 한국의 정치적 현실이라는 하나의 구체적 '투쟁'의 장소 속에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사상-현실적 '표본'들은, 결국 우리들의 정치적 투쟁, 혹은 갈등의 첨예화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존재해야만 한다. 물론 그것은 그의 업적에 대한 수단화나 찬양 따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2. 리영희의 재구성 

그의 평전에는 수많은 이들이 나오고, 사라(스러)진다. 그것은 그의 생애가 다름 아닌 한국의 생애와 함께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의 투쟁이, 그 속에서 하나의 진정성을 만들어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의 투쟁은, '지식인'이라는 탈을 쓴 사회적 동물의 '책임'을 도외시하지 않은 데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에서 후배를 양성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해서 그들이 다 지식인이 되고 교수가 되어 지적/사상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나가는 것으로 사회가 변화하는 양과 속도에 비해서 신문에 논평하나 쓰면 훨씬 더 효과가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p.264 

그리고 바로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의 태도 혹은 위치(stance)가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물론, 바리케이트 옆에 서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언론'이라는 '비상구'를 통한 그의 활동이, 다름 아닌 '지식인'이라는 사회적, 도의적 책임을 위한 하나의 도구였고, 동시에 현실의 기만적 통치(이승만 ~ 박정희 ~ 로 이어지는)에 대해 그가 가진 유일한 '정치적 무기'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정치적 투사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고 소회하고 있고, 필자가 보기에도 그렇지만, 이른바 '현실참여' 혹은 '영향력'에 있어서 그가 이룬 작업들에 대해서는 그 '정치성'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다만 그가 언론사와 대학 교수를 넘나들며(그리고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글쓰기'라는 노동을 통해 사회적 현실를 재구성하려 노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 즉 한 명의 '저자'로서의 우리들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정초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교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만, 그의 말 속에서 지식인의 '생산'과 글쓰기의 '생산', 그 영향력 사이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이며 시차적인 간극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2011년의 정치적 현실 - 민주주의는 개나 줘버려, 하고 살아가는 - 에 '끼여있는' 세대론의 '주인공'이자, 실존적 '엑스트라'인 우리들 자신의 글쓰기를, 사회적 영향력의 도구, 그리고 무엇보다 '생산력'을 통한 '저자'로서의 글쓰기로 바꾸어 나가자는 고민으로 치환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리영희 자신에 대한 '음미', 혹은 미학적인 '감상'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칼날 서린' 비평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논조'는 지나치게 찬양에 가깝다.) 그러한 비평을 통해서만이, 그에 대한 현재적 '재구성'의 작업이란 가능하게 작용할 것이다.

더불어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주체적 의미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요컨대 리영희라는 기표에게 있어, 혹은 그것을 사유함에 있어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현재적 필요성은, 들뢰즈가 말한 '탈영토화', 그리고 '재영토화'와 관련된다고 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리영희라는 비판적 글쓰기의 노동-기계를, 그의 역사적 스탠스 혹은 점유 상태로부터 '탈영토화' 하여, 우리의 '기만적' 현실에 대한 일종의 유토피아적 '지식인상'으로 '재영토화'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우스갯소리지만, 동시에 단순히 그것으로만 끝나지는 않는 음험함을 지니지 않을까, 싶다. 

3.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나? 

글쎄. 필자는 잘 모르겠다. 새는 물론 생물학적으로 날개가 두 개(그러니까 좌우에) 있어야 날 수 있다. 하지만, 새들은 동시에 날기에 적합한 '물리학적, 생물학적 환경'이 존재해야 날 수 있다. 새를 달나라에 순간이동 시켜보자. 날 수 있나? 아마 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부유'할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요지는, 좌우파를 나누는 어떤 경계,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수많은 헛소리와 궤변, 그리고 정당정치와 대의제를 위한 일종의 '기만'을 위한 좌우의 '양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러운 숨을 내뱉는 바로 그 공간의 '공기'와 '중력', 그러니까 바로 정치적 현실을 위한 '환경'의 필요성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새에게 좌/우의 날개는 조물주에게 맡겨진 하나의 (정당정치적) 숙명이다. 진정한 우파도, 진정한 좌파도 존재하지 않는 지금에서야, 우리는 그것의 '존재적 필연성'에 대해 재차 반복, 숙달할 필요가 없는 게다. 그것 보다는, 바로 그러한 정치현실적 환경의 개선, - 그 환경이란, 바로 '민주주의'가 가능케 되는 하나의 '물적 토대'를 일컬을 수도 있겠지만 - 그리고 그것을 위한 '중력' 혹은 '산소'가 필요한 시점이라 할 만하다. 

결국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실현 불가능한' 선택의 기로와 관련된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한 '선택'이란 가능한가? 그것은 오히려 '정치적 선택에 대한 선택 불가능성'이라는 우리들의 주체적 아니러니와 관련되지 않는가? 예컨대, 우리들은 현실주의자로서의 우리를 상정하지 않고는 일종의 '탈주' 혹은 '유토피아'의 구상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냐는 (체게바라의 '명언'에 대한) 지젝의 사르카즘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가령 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세. 안에는 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야.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네. 이때 자네가 큰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세. 그러면 불행한 이 몇사람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지 않은가?" p. 265

리영희가 많은 감응을 받았다는 루쉰의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 이 평전에서 가장 의미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어쨋든 이 일화에서 '자네'는 선험적으로 어떤 '지식인'을 상정하고 있다. 이미 깨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필자는 이 일화에 지나친 엘리트주의가 숨어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네'가 해야만 하는 어떤 '선택의 강요'에 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이란 가능한가? 오히려 그것은 리영희에게는 '선택 불가능한' 문제였다.

리영희는 루쉰의 이 일화를 통해 그의 '목표'를, 즉 '소리지르는 사람'으로서의 미래를 지속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고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자네'의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에는, 리영희와 같은 '저자'의 목소리와, 그를 대변할 '언론'의 존재가 선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새가 날기 위한 환경적 조건'이리라. 다만, 우리는 리영희의 현실과는 별개로 '반공주의'와 '독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현상황에 대한 '인식'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이러한 인식 속에서, '자네'가 소리지르는 행동은 그저 하나의 '소음'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소리지른 자네는 우리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강철'로 된 방 안에 갖혀 있으며, 살아가고자 하는 '욕동'을 진정한 '희망'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는 하나의 '메세지'가 선험되어야만 한다. 즉, 우리에게는 '반공주의'와 '독재'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인식과, 진정한 (유토피아적이긴 하지만) '민주주의'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반동적 '제스쳐'가 필요한 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선택 불가능한' 문제이다. 요컨대, 우리는 다만 '내부의 확장'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외부'로 이행하는 과정, 그리고 그 정치현실적 '외부'로부터 다시금 '내부'로 향하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으로서 진정한 혁명적 사고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에겐 2.0 버전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필요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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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 주세요.

 

다소, 샌델의 저서 제목의(정의란 무엇인가) 여운이 짙게 느껴지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그래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간단히 말해보자면, 눈에 보이는 '주먹'보다 '보이지 않는 주먹(손?)'이 더 무섭다는 걸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서평들에 의하면 지젝의 주저에 비해서 비교적 쉽게 쓰여졌다고들 하니, 지젝에게 거부감을 느꼈던 많은 분들도 한번 쯤 도전해봄직 하다는 생각이다.(물론 이것도 상대적 감상이며, 지젝읽기는 사실 라캉-헤겔을 경유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더불어 단순히 제목에서의 '폭력'에 대한 사유를 넘어서서, 이 책은 '리버럴'한 사유에 대한 굉장히 '쿨한' (비판적)제스쳐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추천! 

 

인문학 신간을 찾다, 인도에 대한 저서를 오랜만에 발견했다. 개인적 상황과 관련된 것이기도 한데,(인도행 여정(..)의 기회가 두 번이나 날아갔으니)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인도에 대한 우리들의 '환상'을 걷어내기 위해서라도 필독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말해 인도라는 나라가 가진 사회,정치,경제적 상황과 의미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라 할 만한데, "화장을 지운다"는 비유가  비슷하게 들어맞을 듯 하다. 간디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던가, 달리트 운동과 마오이즘적 좌파의 움직임에 대한 대안적 고찰도 담겨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을 순순히 선택하신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추천사가 '후덜덜'한 책도 오랜만이다. "우주는 어떤 계획아래 세워졌으며, 그 계획의 심오한 대칭은 어떻게든 우리 지성의 내적 구조에서 나타난다"는 폴 발레리의 문구로부터 시작되는 이 오묘한 저서는, 한 여름의 시나이 사막을 헤매는 수학자의 사유에서부터 출발한다. 수학이라면 치를 떠는 필자임에도, '수학자'들의 수학놀이에는 흥미가 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으니, 과연 이것은 한국교육의 현실을 탓해야 할 것인가, 필자의 무지함을 탓해야 할 것인가. 여하건, 이 책이 가져다주는 수학에 대한 '호기심'과 기하학적 충격에 대비해야만 하지 않을까.

 

사랑해 마지않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이 재출간되었다. 지은이가 E.H.Carr 라는 사실은 약간 새삼스러울지도 모르는데, 그는 확실히 단순한 역사가의 위치를 점유하지많은 않았다. <볼셰비키 혁명>이나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를 남긴 그의 '러시아'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역사가의 그것을 뛰어넘는지도. 저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성장기로부터, 상뜨 빼쩨르부르그에서의 젊은 시절, 유형과 결혼, 외국에서의 거주생활, 그리고 다시 러시아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잘 그려내며, 그 사이에서 작품들에 관한 의미 또한 찾아내고 있다.  

 

그의 평전을 추천했으므로 다른 책을 추천할까 했으나, 이왕 도스또예프스끼를 고른 김에 그의 책을 하나 더 추천해본다. '마르끄 슬로님'의 저서인 <도스또예프스끼와 여성> 또한 로쟈의 글을 보고 흥미가 갔으나,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비평'을 신선하게 보았던 일본의 비평가 '시미즈 마사시'의 글에 더욱 흥미가 간다. 목차를 보니, 주로 <죄와 벌>에 대한 비평적 독해가 주를 이루는 듯 보인다. 어쨋든 그의 작품은 확실히 '다각적'이며, '다층적'으로 독해되어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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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2-13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대칭>을 추천하신 분들이 꽤 있네요. 이참에 과학도서 한 권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도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을 추천했는데,, 내심 선정되기를 바랄뿐입니다. ^^;;

yjk7228 2011-02-14 15:4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네 이번엔 저도 과학분야 도서가 한 권쯤 선정되었으면 하네요 ㅎㅎ
저도 위에 다섯 권중 한권이라도 선택되면 좋겠지만, 제가 여태 추천한 책들 중 한 권도 선택되지 않은 불우한 이력을 지니고 있어서.. ㅋㅋㅋ
 
<진보집권플랜>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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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이라는 사람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이 정도면 필자의 '무지'가 얼마나 충분한지 알 수 있을게다.) 오늘의 기사였던 동아일보 홍찬식 논설위원의 칼럼을 통해 그의 '위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 것도 포함시켜야겠다.(http://news.donga.com/3/all/20110126/34385678/1)   

그다지 '반박할' 가치도 없는 글이긴 하지만, 조국 교수의 반박(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10126184640)은 꽤 통쾌한 편이다, 아니 뭐 특별할 것 없는 글에 대한 반박치고는 좀 너무 '열심히' 인 편이다. 어쨋든 '폴리페서'라는 무식한 주장은, '범주'를 벗어난 논의라는 생각이 든다.(근데, 폴리페서이자 '강남좌파'이면 또 어떤가? 필자는 그런 '척'을 하는 교수도 흔히 보지 못한다. '정치적 중립성'은, 소수의 공간을 제외하면, 그다지 '필요없는' 개념이 아닐까. 차라리 수구/보수와 개혁/진보의 양 쪽의 사상을 모두 적극적으로 '표현해주는' 편이 모두에게 이로울지도.) '정치교수-비판적 지식인' 중의 택일이라니?! 그렇다면 관악구에 거주하는 비판적 지식인은 정치적/당파적 자율성을 표현할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을 '선택'을 강요당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이것은 '교수'라는 그의 직업적 특성 때문이기는 하지만, 교수 또한 시민권을 가지고,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 오히려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장점' 또한 가지고 있는 - 위치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가 무슨 '공산주의-사회주의' 사상을 법학수업시간에나 퍼뜨리는 '빨갱이'인 마냥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정치'로부터 대체 어떤 분야가,직업이,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이번에 같이 읽은 '촘스키와 푸코' 대담집에서의 푸코의 말처럼, "대체 왜 '정치'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단 말인가?!" 

서두가 길었지만, 여하건 이 책, <진보집권플랜>과 오늘 몇 줄의 기사를 통해 내가 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건, 꽤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가 필자의 마음에 '쏙 드는' 인간형이라기보다는 - 분명 그의 정치성과 필자의 그것은 다르며, 추구하는 가치 또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 그만한 '인물'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인 우리 사회의 '현실'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몇 가지 부분에서 그의 생각을 살펴보고자 한다. 플랜의 순서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겠으며, 필자의 무지 덕택에 오독한 부분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책은 '대중'을 위한 두 사람의 노력이 충분히 고려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촘스키와 푸코~>도 그러한 것 같고.) 

1. 교육, 그리고 20대와의 '연대'

'김예슬' '사건'과 관련하여, 그들이 풀어내는 한국 교육에 대한 대화는 비교적 그 맥락을 잘 짚어내고 있는 듯 보인다. 특히 한국 교육의 맹점들 - 조기교육을 비롯, 사교육 문제(공교육의 약화), 서울대 폐지-분할론, 20대의 요구에 대한 '응답'에 대한 내용까지 - 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젯거리'가 되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봉착하는 지점들이, 바로 우리, '20대'의 주체성, 그 짓눌린 주체의 자국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특히 김예슬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들은, 필자를 비롯하여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진지하게(사실 굳이 너무 진지할 필요는 없을 듯도 하다. 오히려 이것은 약간의 '진지하지 않음'이 필요한 작업같기도.) 고민해보았으면 하는 부분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가, 아니 왜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가' 하는 것들. 

더불어 서울대 폐지론에 대한 조교수의 '분할론'은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첨가된 듯 보인다. 서울대가 가지는 모종의 '권위'를 해체하자는 듯이 보이는데, 과연 얼마나 '효과성'이 담보될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와 같은 현상적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무조건 "서울대를 없애자!"는 일종의 강박적 히스테리보다는 좀 나아 보인다.) 

하지만 사교육 문제에 대한 그들의 대화는 좀 밀도가 떨어진다. 단순히 '공교육의 강화'를 위해 조교수가 대안으로 내놓고자 하는 것들은, 물론 충분히 고개를 끄덕거릴 수는 있겠지만,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과연 'EBS와 강남구청 수능강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그게 최선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물론 필자는 생각이 좀 다르며, 더불어 단순히 그의 논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식이 아니지만, 그 구체적 '형상'에 대한 의문점이 든다. 

또한 20대와의 연대,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정치활동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자기규정' 속에 빠져있는 세대론적 갈등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생각들도 비교적 구체적이지 않은 듯 보인다. '청년유니온'이나 '백수연대'같은 집단적 움직임들이 '어떻게' 그들과 '손잡을 수' 있을까.(아니, 20대는 그들과 '손잡아야만' 어떤 움직임에 대한 '정치적 의미'혹은 효과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인가.) 단순히 20대의 움직임을, 그 미세한 흔들림을 감지하고 손뻗을 만한 '진보'의 모습을 만들수 있다는 것일까? 그리고 물론 그것은 그의 화두가 아니라 20대 그 자신들의 화두이자, '범주'이기는 하지만, 20대가 펼쳐나가야만 하는 현실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조금 더 고민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석훈류의 '침묵'으로 남고 말 가능성이 커 보인다.

 2. 매력적인 진보, 밥 먹여주는 진보 

'개혁/진보'라는 말이 계급론적인 '좌파'보다 쓰기 알맞은 말이라고 하니, 그렇게 해보자. 서두에서 그들은, 단호하게, 그리고 절대적인 '진보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인사들에 대한 충분한 쓴소리가 첨가된, 비교적 '통쾌한' 발언들이다.  

사실 '정치'와 '현실' 그 사이에는 필자같은 사람들에겐 충분한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혹여 정치라는 학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에는 그만큼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수많은 이들(필자를 포함한)의 외상적인 정치적 스탠스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의 말처럼, 진보라는 이름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의 말처럼 '밥벌이'와 '생계'에 매몰된 학계에서는 아무것도 잉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다루는 건, 결국 이 밥벌이와 진보라는 어울리지 않는, 무엇인가를 '통합'시키고자 하는 노력에 다름아니다. 무상급식 논쟁까지의 진보는 과연 우리에게 진보라는 이름에 대한 '이미지', 혹은 좌표를 올바르게 인식시킬 수 있었을까? 

물론, 진보는 변화해야 한다. 하지만 진보가 아무리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심지어 진보가 공짜로 급식까지 먹여준다 하더라도, 탈정치화된 대중과 20대라는 세대론적 공간에는 미개척된 '영토'가 존재한다. 그것은 이미 대중의 현실에서 괴리된 '정치적 현실'이 단순히 '밥벌이'와만 관계되어 있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칼 슈미트의 말처럼, 대의제에서의 '대표자'란 결코 대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장치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입장'(결국 우리의 현실에서는 '정당'의 입장)을 선언하는 장치로서 존재한다. 그들의 논의에서처럼, 이러한 대의정치의 한계를 고려할 때, 과연 매력적인 '정당'이란, '우리'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정당정치'에 대한 막연한 '희망'에서부터 진보의 변화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보라는 것이 단순히 '진보정당'으로 병치되는 것은 다만 그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진보진영을 향한 변화,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는,(적어도 한국식 정당정치에 대한 그다지 긍정적인 희망을 가지지 않는 필자로서는) 가장 근본적인 '민주주의', 그 자체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과연 민주주의는 '살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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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비교적 '까놓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MB정권의 무지함과, 수구/보수, 그리고 그 누구보다 개혁/진보 진영의 인사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거대자본과 삼성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으며, 검찰개혁에 대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다. 만약 우리세대 중, 정치와 자신의 현실, 미래 그 무엇때문에라도 이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된 이라면,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만 한 책인것 같다. 물론 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모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가끔은 조금 편향적이며, 어쨋든 '진보'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재집권', 권력의지를 어떻게 향유해나갈 수 있을 것인지가 이 책의 '이름'이니까. 다만, 이 책의 가장 주요한 '필요성'은, 탈정치화된 현실을 살아가는, 그래서 무의식적 정치편향을 농축시키고 있는 우리들 자신, 그 '슬픈 현실'에 대한 자신만의 '사유'를 진행해 나갈 수 있는 초석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초석이다. '잔치'를 시작하려면, 세대론을 넘어선 '주체적 사유', 단순히 지식자본과 소유된 가치들을 넘어선 주체성의 사유가 우리에겐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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