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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자유>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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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책을 읽을 자유>
   

로쟈,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순전히 ‘입소문’에 의한 것이었다. 군 시절, 모 커뮤니티에서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고, 이후 그가 운영하는 알라딘 서재에 자주 출입하곤 했다. 특히, 그의 ‘지젝 읽기’는 필자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음을 밝히는 바이다. 물론 지젝을 제외하고도 그는 정말 ‘인문학 서평꾼’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으며, 지금도 더욱 그러하니, 그의 명성에 대한 얘길랑 이쯤에서 접어도 무방할 듯싶다. 올해 여름에는 그의 첫 번째 저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읽어본 바, 과연 그가 ‘곁다리’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의 책벌레로서의 ‘열정’만큼은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그가 말했던 에세이스트로서의 김훈에 대한 사랑이나, 데리다주의자(?)로서의 면모, 국내 번역의 문제점들을 꼬집는 비판적/계몽적 시선에서 나아가, 이번의 저서 <책을 읽을 자유>에서는 그러한 ‘논점’들이 좀 더 ‘확장’되고, 현실과의 절합을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내고 있다고 정의내리고 싶다. 물론, 필자는 그에게 ‘조금 더’의 ‘이론적 실천’을 요구하고는 싶지만, 그는 확실히 ‘혁명적 투사’의 역할보다는 끈질긴 책벌레의 역할이 어울린다는 생각은 든다. 그가 단순히 ‘좌파 지식인’ 등의 탈을 쉬이 쓰기보다는, 진지한 분석가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 그의 글에 대해 무언가 ‘리뷰’를 쓴다는 것은, 필자에겐 꽤 어려운 일이다. 어떤 리뷰(비평)가 그러하지 않겠느냐만, 그의 글은 이미 하나의 정돈된 ‘리뷰’이므로, 그에 대한 ‘메타비평’은 그보다 더 나은 하나의 ‘창작물’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비평도 하나의 창작이라면.) 하지만 필자에게는 로쟈를 뛰어넘을 만한 지적 능력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비평을 할 자유’ 따위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하하. 하여간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을 한번 ‘훑어’보자. 다만 훑어보기에도 너무 방대하므로, 필자가 마음에 들었던 몇몇 키워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로쟈와 한국(문단)문학

재미있는 것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어왔던 ‘문학의 종언’ 담론에 대해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가 굉장히 ‘시차적’이라는 점이다. 해서, 그가 문두에 제시하고 있는 ‘어느 환자의 이야기’를 통해(자신이 낱알이라고 생각했던 환자) 한국문단문학에 대한 과잉이나 결핍된 사변에 대한 ‘동일성’을 피력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되는데, “하지만 닭이 그걸 알까요?”라는 황당한 물음은, 한국문단문학의 ‘대타자’로서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진 ‘믿음’의 ‘숭고성’을 환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문학의 무능과 부덕에 대해서, 불륜에 대해서, 몰락에 대해서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다시금,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나가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학에 대한 ‘가장된 순진한 믿음’, 곧 ‘참된 위선’의 회복처럼 보인다. 우리는 문학을 좀 더 진지하게 믿는 척할 필요가 있다.”(p.218)

더불어, 이와 함께 그가 제시한 인물은 당연하게도 가라타니의 ‘종언 테제’를 수용한 ‘조영일’이다. “한국 문단문학은 창비, 문사, 문동이 장악하고 또 관리하고 있는 하나의 ‘생산관리 시스템’이다”라는 게 조영일의 분석 첫머리를 장식한다. 다만 로쟈의 분석에 따르면, 이것(<한국문학과 그 적들>)은 논쟁적이며 유익하지만, 가라타니의 종언테제와는 차별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영구혁명’이라는 사회적 의무, 도덕적 과제를 떠맡지 않게 된 문학의 시대적 현실을 말했다면, 조영일은 그러한 가라타니의 현실의식을 발판삼아 국내문단(학)의 ‘시스템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조영일의 ‘쓴소리’는 개인적으로도 동감하는 바이다. 더불어 무엇보다 “문학은 끝났다!”라는 선언이 모종의 ‘결핍감’을 상징한다면, 우리에겐 그 결핍된 감정만큼이나 문학에 대한 ‘열정’이 표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것은 ‘문학’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반추된 비평정신’이 요구됨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문학은 언제나 과도기를 살아가는 분야이며, 또한 그래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문에서 (비평계의 슈퍼스타 K ?!) 신형철이 말한 것과 같이 필자도 그의 ‘길고 이기적인’ 글 중의 하나, <기형도의 보편문법>은 정말 집중해서 읽은 글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로쟈만큼의 ‘기형도 매트릭스’가 존재한다면 참 기쁠 일이겠다.(물론, 백석이 먼저다.) 그리고 로쟈가 유년 시절의 ‘훌쩍거림’으로『엄마 걱정』을 꼽았다면, 필자는 ‘훌쩍거림 이후의 단잠’으로 『꽃』을 꼽아보고자 한다. 어쨌든 울고 난 뒤엔 잠이 오는 법이다. 게다가 그것이 기형도처럼 ‘영혼이 타오르는 날’, ‘영원한 잠’을 자게 된 사람이라면 더더욱.

꽃 / 기형도


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 앓는 그대 정원에서
그대의
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2. 로쟈와 ‘정치적인 것’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즉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p.443)

“······슈미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이다. 즉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가를 판별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이 어째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가? 어떤 수준이든 간에 자기 정체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나’와 대립되는 ‘타자’가 먼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p.446)

주로 뒷부분의 글들 - 정치나 철학 부분을 다룬 - 은 개인적으로는 좀 ‘길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물론, 원고 제한을 맞추느라 ‘노력한’ 로쟈의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필자의 글처럼) 재미도 없이 긴 글을 좋아하는 변태적 취미를 가진 건 아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무페, 라클라우, 랑시에르에다 아감벤까지 죽죽 이어지는 ‘정치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2%의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 정치철학에 대한 입문적 내용의 부족함이라기 보단, 마술쇼를 보고 난 후의 ‘좀 더!’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하건, 그는 ‘정치철학’에 있어서도 필자가 본받아야 할 책벌레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서문에서 ‘책을 읽을 자유’라는 제목을 지은 이유를 설명하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의 한마디, “사랑스러운 여러분”을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을 고스란히 그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적인 것’과 관련하여 가장 뜨겁게(?) 읽은 글은 ‘샹탈 무페’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설명하는 <타는 목마름으로>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무페의 사상적 근원이 된 ‘칼 슈미트’에 대한 글을 한편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더불어 최근작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와의 접점도 존재하는 부분이라, 현재 ‘민주주의’가 처한 근본적 고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상탈 무페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협은 적대감이 아니라 합리성과 중립성을 가장한 합의”라는 말에 따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정치, 즉 분열하는 H당과, 갈길 잃은 M당 등에 대한 ‘치 떨리는 노여움’이며, 진정한 의미로서의 ‘정치적 갈등’을 위한 ‘타는 목마름’일 것이다.

더불어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소개는, 유명한 ‘시라크와 미테랑의 대선’ 일화를 언급하고 있는데, 랑시에르는 이 일화를 통해 ‘정치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통치과정과 평등과정의 마주침으로 일어나는 사건-현장)과 비교하여 로쟈는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을 언급한다. 또한 “정치절학의 전통적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단언하는 아감벤의 사유를 따라간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민주주이이며, 행복한 (정치적)삶인가?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번에 함께 읽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떠올리게 되는데, 아감벤에 의하면 오웰의 예술-정치적인 작가로서의 사상은 오늘날 정치-현실적으로는 ‘맞으면서 동시에 틀린’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글쓰기’라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정치성을 내포한다는 점을 아감벤은 긍정할 것이며, 반대로 “(정치 권력적)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을 바란다는 점에서 단순히 오웰의 ‘정치적 목적’이라는 ‘고루한’ 용어의 ‘무비판적 수용’을 부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

이외에도, 그의 ‘가라타니 고진’론(<가라타니 고진은 이렇게 말했다>)은 거의 고진의 저서와 사상에 대한 ‘입문’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쉽게 쓰여 있다. 뭐, 로쟈의 말처럼 고진 자체가 이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간결하지만 핵심적인 저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데리다에 대해서는 지난 저작에서도 어느 정도 피력되었지만, 그가 데리다를 얼마나 ‘중요한’ 저자이자 철학자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필자도 로쟈 덕분에 최근 데리다의 <법의 힘>을 읽고 있으니, 왠지 물들어가는 기분이다.) 다만, 라캉에 대한 설명은 비교적 너무 ‘궁핍한’ 편이다. 라캉(만)에 대한 그의 글이 별로 없었는지, 아니면 지면상 데리다에 밀려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캉주의자의 발뒤꿈치를 따라가 보려는 필자에겐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어째, 계속 그에게 모종의 ‘원고청탁’만 하는 꼴인 것 같다.)
더불어,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 또한 벤야민을 잘 모르는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무엇보다 <“너 책이야? 나 장정일이야!”>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김훈’ 못지않은 장정일에 대한 애정도 느낄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렇다. 어쨌든 그의 글을 ‘훔쳐보고’난 후의 느낌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뭔가 ‘빚진 듯한’ 감정이 밀려오는 것이다. 게다가 훔쳐보았다는 관음증의 죄책감도 더불어.

그는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는다”고 재인용하여 (그리고 힘주어)말한다. 공감되는 말이다. 다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책벌레의 아포리아’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것은 다른 용어로 ‘책벌레와 자유’의 관계를 의미한다. 책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책벌레와 먹이로서의 ‘책’의 관계망 말이다. 그렇다면 책벌레는 과연 ‘책을 읽을(먹을) 자유’가 있는 것일까? 책벌레는 책의 존재로부터 그 자신의 존재성을 부여받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책을 읽을(먹을) 의무’로 보이기도 한다. 즉 여기에는 ‘책’과 ‘책벌레’사이의 묘한 긴장, 그리고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관계 역전, 즉 헤겔이 말한 ‘주-노의 변증법’이 숨어있는 것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반대로 “책은 한 인간의 인생 한 순간 따위에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병치된다. 즉 하나의 ‘텍스트’의 해석 대한 ‘시차적 다원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예컨대 누군가에겐, 한 권의 책이 인생의 여러 순간에 걸쳐 각각 다양한 ‘경험’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책벌레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절반의 자유지만, 비로소 ‘완벽한’ 자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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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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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어쨌든 글쓰기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우리는 쓰기위해 ‘읽어야’하며, 글을 쓴 후에 그에 맞게 ‘실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의 ‘괴로움’을 성토하는 일은, 존재의 변증법을 빗겨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조지 오웰’이라는 존재가 남긴 흔적들을 살펴보는 일은, 글쓰기 자체의 괴로움을 분석해내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른바 그의 ‘정치적 글쓰기’란, 결국 글쓰기라는 수행-노동이 내재하는 근원적인 ‘흔들림’을 감지하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일상 속에서 우리들이 흔히 지나치는 사물의 원자적 굴곡들을, 탁본하여 대중들에게 ‘제시’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우리 시대 같은 때에 그런 주제를 피해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보기엔 난센스다.”(p.297)  
   

 

그리고 이것은 결국 우리세대(20대)가 가진 ‘탈정치성’과도 연루되는 문제다. 20대라는 ‘주체’가 가지는 정치와의 누빔점이 사라지고, 그들의 글쓰기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선언이 침묵하는 지금, 우리는 오웰의 글쓰기에서 다름 아닌 ‘우리의 글쓰기’를 발견해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른바 ‘저자’로서의 글쓰기는 사라지고, 우리에겐 엘리트주의와 ‘2차 저자’로서의 삶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상황은 우리들로 하여금 ‘기표들’의 재구성을 통한 1차 저자로서의 ‘주체성’을 도입하자는 논의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레닌이 말한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s)'가 되거나, 아니면 오웰의 말처럼 “자기 임무를 수행할 뿐”(<영국, 당신의 영국>)인 현실을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여기에의 의미로서도 충분히 유효하다. 또한 이에 말미암아, 우리들은 자신이 가진 ‘당파성’에도 대항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정치적 색깔을 선택하는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은 자신의 내부에 잠식한 ‘탈정치적 정치성’에 대한 반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우리의 당파성이란, 결국 ‘비당파적 당파성’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비미학적 사유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감성의 분할’과 관련되는 것이라 하겠다.

단순히 ‘파시즘’이나 ‘제국주의’의 대항마로서 오웰 자신의 정치적 주체성이 결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시대가 내포한 ‘내셔널리즘(민족주의)’적 요소에 대한 분석(<민족주의 비망록>)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이다. 그는 “민족주의적 심리”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그것이 가진 특징을 나열하는데, 내집단의 우월성을 ‘강박적’으로 강조하는 모습들, 민족주의적충심의 불안정성, 행위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주체에 따라 판가름되는 사실-무시의 태도들을 통해 “어떤 민족주의자는 정신분열증 환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말로 일단락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바라본 우리사회의 ‘분열적 주체’의 모습들은, 그가 말하는 ‘반복강박’적인 민족주의자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확연하게 정치적 행위자로서 분열된 현실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만큼이나 정치적 언어들과도 분절되어 있다. 예컨대 ‘진보적 지식인’들이 가지는 자폐적인 모습이나 보수정당이 가지는 사실-무시의 태도들은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그가 말하는 정치적 언어의 메스꺼움을 감지할 수 있다.(<정치와 영어>)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니체적 사유(선악의 저편)를 떠올리게 만들며, “생각을 숨기거나 막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언어에 대해서”분석한 그의 수행은 라캉의 ‘언표된 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의 관계망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우리에겐,(그리고 오웰에겐) 글쓰기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주체적 양태에 있어서도 “정치적 목적”(<나는 왜 쓰는가>)이 향유되어야 하는 것(했던 것)이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라는 그의 말처럼, 우리는 이른바 세대론의 탈정치성을 다룰 때만큼이나, 그 탈정치성에 대한 ‘사유’가 이미 정치적이라는 지점을 간파해내야만 한다. 그래서 사실, ‘정치적 글쓰기’라는 말은 사실 동어반복이다. 그것은 (정치적) 글쓰기로 수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글쓰기라는 수행-노동이, 그의 말처럼 이미 충분한 ‘정치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글쓰기의 괴로움으로 돌아와 보자. 어쨌든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며,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이 자신을 ‘지우는’(작가의 죽음, 글쓰기의 영도?)것임에는 틀림없다. 이 고독하고 힘겨운 ‘중간자적’ 노동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사유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와 관련한 20대라는 주체의 글쓰기와 ‘목소리’는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할 것인가? 다만 그것은, 오웰의 말처럼 “절반이지만 온전한 자신”(<작가와 리바이어던>)에게서 표출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즉, 작가(1차 저자)로서의 사회적 ‘요구’를, 우리는 나름의 ‘정치적 스탠스’의 정초를 통해서만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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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시간이 굴러가는 속도는 확실히 내 사유의 속도보다는 빠른 것 같다.(어쩌면 반비례?)   

벌써 지나간 가을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11월의 추천도서들을 골라본다. (어서 10월 리뷰도 써야 할텐데..허허) 

 

1.  나눌 수 없는 잔여(슬라보예 지젝) 

 

아니, 이 책에 대한 추천이 왜 없는지 모르겠다..(다들 셸링이나 지젝에 대한 관심이 없으신 것일까. ㅠㅠ)

 어쨋든 "셸링을 유물론자로 읽는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헤겔과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주체가 다시 등장하고, 라캉과 양자역학(?!)을 연결짓는걸 보면, 어쨋든 지젝은 계속 뭔가 '실천'하려고 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2.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우치다 타츠루)

 

 : 어쨋든 무려 로쟈씨의 선택이기도 하고,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책인듯.  얼마만큼의 '입문서'로서의 기능을 기대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내용을 잠시 살펴보니, 비교적 쉽게 설명하려고 애쓴 흔적이 많이 보였다. 어쨋든 나같은 구조주의의 '수박핥기' 에게는 좀 필요한 책이 아닌가 한다. 다만, 레비스트로스/라캉까지 다룰 거라면, '데리다'까지 좀 다뤄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어차피 '구조주의자'의 분류는 좀 애매하기 때문이다. 라캉도 자신을 '구조주의자'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니까. 

3. 궁극의 리스트(움베르트 에코)

  

: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추천하신 것 같다. 어쨋든 에코는 '미/추의 역사'를 기점으로 책값을 올리려고 작정을 했음이(??!!) 틀림없다. -_-a 내용을 보면, "개인이 축적하는 '목록'으로서의 '욕망'을 파헤치고자 하는 미학적 시도" 정도로 요약해볼 수 있겠다. 흥미가 간다.  

4. 수다에 관하여(플루타르코스)
  

 

 : 고전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필자로서는, 이런 책이 정말 반갑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본보기가 된 플루타르코스의 에세이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윤리적/철학적  개념들에 대한 '고전적' 정의들을 탐독할 수 있는 기회라 하겠다. 추천!  

5. 괴델의 증명(더글라스 호프스테터) 

 

: '완전함'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불완전성'을 추구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괴델,에셔,바흐> 라는 '무시무시한' 책을 학창시절 읽다가 집어던진 기억은 있지만, 다시 한번 '괴델'에게 도전해보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게다가 호프스테터라는 '저자'가 개정했다는 점에서 더욱 더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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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0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이 없는 것도 있지만 몇 몇 분들이 셸링과 지젝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답니다.^^;;
그러니 실망하시지 마시기를,,, 저도 이번에 로쟈님이 연재하고 있는 지젝에 대한 글을 읽어봤는데,,
제가 기본 지식이 부족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저의 집에도 지젝이 쓴
<삐딱하게 보기>도 100페이지 이상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정말 <궁극의 리스트>를 추천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만약 이 책이 선정된다면
후회 안 할겁니다. 내용이 재미있거든요.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yjk7228 2010-11-09 01:2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런가요 ㅎㅎ 물론 저도 지젝이 이해하기 쉽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는 더더욱.) 게다가 지젝을 이해하기 위해선 헤겔/라캉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다만 인문/사회 분야 서평단 분들이 저와 같이 '욕망'하기를 바라는 욕심이었을수도.. 그리고 아무래도 철학서는 선정되기가 좀 힘들지 않겠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궁극의 리스트>는 저도 어떤 책일지 기대가 되네요. cyrus님은 벌써 읽으신듯.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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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가을임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득거리는 느낌들은 무엇인가. 드문거리는 발자욱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이렇게 의뭉스러운 느낌과 함께 발자욱 소리를 들으며 가을을 맞고 있자니 왠지 대뇌의 한 부분이 시려오는 듯하다. 

- 언제부턴가, 나의 대뇌엔 가을은 없고, 고요한 추위만이 가득하다.  

(이게 뭔 소리..)

어쨋든 알라딘 신간평가단이 되었고(추카추카), 10월의 추천도서에 대한 짤막한 토막을 남겨본다. 

1. B급 좌파 : 세 번째 이야기(김규항) 

 김규항의 'B급 좌파'를 읽은 사람이라면, 아니 그의 우직함과 '좌파스러운' 입담에 매료되고 최근의 '진중권-김규항'의 논쟁까지 바라보면서 "그는 과연 '좌파 바바리맨'인가?" 라는 의문을 소신있게 재단해 본 인물들이라면,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 만 할 것 같다. 물론 필자는 김규항에 대하여 그렇게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자신을 'B급' 이라고 '칭하는(이름붙이는)' 것에 어느 정도의 동의를 표한다. 언제나,항상,어디에서든 'A급-좌파'라는 것이 존재했는가? 아니, 그것이 존재할 수나 있는가? 혹은 자신에 의해 그렇게 이름붙여진 'A급-좌파'라는 것은, 레닌이 말한 '쓸모 있는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니었던가? 

 여하건, 여러 의미에서 '진중권-김규항'의 논쟁은, 그 원론적 '유치함'을 접어두자면,- 진중권은 무려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까지 언급했다! -  사실 '좌파사회'에게는 크나큰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좌파'라 칭하는 자들이여, 당신은 진정 자유주의자가 아닌 '좌파'가 확실한가?" 라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표지만 보고 너무 떠들어댄 것 같다. 탐독해보자. 

  

2. 팬티 인문학(요네하라 마리) 

 추천도서로 제안할 도서들을 살펴보다, "아니, 이건 뭥미?" 하는 책을 하나 발견했다. '요네하라 마리' 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지만 유명한 에세이스트란다. 대략적인 책 소개와 글귀들을 살펴보고 난 뒤, 왠지 필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였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슬라보예 지젝'이 동시에 떠올랐다. 글쎄, 마르쿠제가 말했듯, 어쩌면 사회적 금기와 '음란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사회의 '보편성' 속에 존재할 지도 모른다. 더불어 지젝이 수행하고 있는 분석-비평의 범위들을 고려해볼 때, 요네하라 마리라는 저자와의 접합점이 존재할 것 같지 않은가? (아닌가?;)

의미있는 비평적 맥락이 숨어있을지는 모르겠다. 가볍지만 동시에 가볍지않은 책이었으면 좋겠다. 

3. 위대한 설계(스티븐 호킹) 

(이 책의 발매일은 10월 6일로 되어있다. 추천페이퍼 작성기간이 10일까지이므로, 이 책도 포함했다.)

 갑자기 왠 천문학/물리학 책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쨋든 필자의 생각엔 최근 나온 이 분야의 책들 중엔 가장 인기있는(혹은 인기있을) 책이 아닌가 한다. 물론, 천문학적 지식이라곤 '눈꼽만큼' 정도 밖엔 없지만, 그리고 물리학과 두통유발의 관련성에 대한 고찰에 대해 의미있는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1인이지만, 그래도 '호킹'의 '우주론'이라는 점에서만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4. 도덕, 정치를 말하다(조지 레이코프)

 

(마찬가지로 10월 8일 발매작. 추천기간을 고려해 선정했다.) 

 크게 할 말이 없다. 레이코프에 대해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에 대한 '호의적인' 평을 주위로부터 많이 들었기에,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 신청하게 되는듯. 하지만 플라톤, 홉스 등등의 도덕-정치론의 재해석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면, 약간은 기대해볼 만 한 것 같다. 다만, 무슨 홍보문구처럼, '우리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에 의해 투표를 한다'라는 말이 영 맘에 들지는 않는다.

5. 군중과 권력(엘리아스 카네티) 

 

유명한 책이다, 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추천을 한다.(게다가 개정판이지 않은가.) 단순히 '파시즘'과 '군중'에 대한 고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 책으로 우리들 자신이 '지금-여기'에서 새로이 느낄 수 있는 함의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맑스-프로이트를 다시-경유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다만, 얼마나 '개정'되었느냐가 문제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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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5권을 10월의 추천도서로 제안하고자 한다.(사실, 마음같아선 맑스의 <자본> 세트(5권, 세트로 9월 출시)를 꼽고 싶었지만... 돌을 맞을 것 같았다. 아니, 귀도 간지러울 것 같았다..) 

부디 인문/사회분야 평가단 분들과 '누빔점'이 생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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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5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20분의 인문사회 신간평가단원 분들의 페이퍼를 다 읽지 못했지만.. 대체로 마리 여사와 조지 레이코프의 신간이 눈에 띄네요. 저도 그 두 권을 추천도서 후보로 올렸답니다^^;; 엘리아스 카네티의 명저가 개정판으로 나온 것에 대해 저도 기쁘네요ㅎㅎ 페이퍼 잘 봤습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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