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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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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어떤 동음이의어  

 대부분의 필자 세대(20대)가 그렇듯이, 우리는 대부분 '그들'을 잊고 지낸다. 책을 읽으며 그들의 이름을 듣고서는, 새삼 끓어오르는 피를 느끼고,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대신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사실 '그들' 이라는 대명사에는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의 의미만을 가진 단어의 껍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필자의 분노를 끓어오르게 하고, 새삼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대신해 비난과 조소, 그리고 무엇보다 '증오'를 표출하고 싶게끔 만드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상한 '그들'에 대한 감상은, 필자로 하여금 다시금 '지금-여기'에 대한 반추, 그리고 현-존재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현시적 물음을 다시금 담지하게 만든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그들'은, '독립' 혹은 '투쟁' 그리고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위해 스러져 간 모든 이들을 뜻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이 파란만장한 역사의 순간에서 단순한 '욕동' 만을 좆은 비루한 인간군상들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러한 동음이의적 연결고리 뿐만 아니라, 어떤 모종의 '기시감'이 존재한다. '그들'에 대한 사유는, 동시에 우리들에 대한 사유이며, 따라서 그것은 현실 정치에 대한 '재해석'과 관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것은 끝없이 '반복-재생'되는 우리들의 지난한 정치적 혹은 존재적 '무력감'을 다시금 깊숙한 역사의 현장에서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리영희라는 하나의 '기표'를 읽어내려가는, 혹은 사유해나가는 작업은, 다름 아닌 바로 그 기표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 우리들이 단순히 리영희라는 '사상의 은사'를 박제시킨 사상적 '유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유물이란, 사실 결코 '평전'이라는 바이오그래피 안에 박제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기 이곳, 한국의 정치적 현실이라는 하나의 구체적 '투쟁'의 장소 속에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사상-현실적 '표본'들은, 결국 우리들의 정치적 투쟁, 혹은 갈등의 첨예화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존재해야만 한다. 물론 그것은 그의 업적에 대한 수단화나 찬양 따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2. 리영희의 재구성 

그의 평전에는 수많은 이들이 나오고, 사라(스러)진다. 그것은 그의 생애가 다름 아닌 한국의 생애와 함께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의 투쟁이, 그 속에서 하나의 진정성을 만들어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의 투쟁은, '지식인'이라는 탈을 쓴 사회적 동물의 '책임'을 도외시하지 않은 데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에서 후배를 양성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해서 그들이 다 지식인이 되고 교수가 되어 지적/사상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나가는 것으로 사회가 변화하는 양과 속도에 비해서 신문에 논평하나 쓰면 훨씬 더 효과가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p.264 

그리고 바로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의 태도 혹은 위치(stance)가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물론, 바리케이트 옆에 서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언론'이라는 '비상구'를 통한 그의 활동이, 다름 아닌 '지식인'이라는 사회적, 도의적 책임을 위한 하나의 도구였고, 동시에 현실의 기만적 통치(이승만 ~ 박정희 ~ 로 이어지는)에 대해 그가 가진 유일한 '정치적 무기'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정치적 투사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고 소회하고 있고, 필자가 보기에도 그렇지만, 이른바 '현실참여' 혹은 '영향력'에 있어서 그가 이룬 작업들에 대해서는 그 '정치성'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다만 그가 언론사와 대학 교수를 넘나들며(그리고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글쓰기'라는 노동을 통해 사회적 현실를 재구성하려 노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 즉 한 명의 '저자'로서의 우리들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정초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교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만, 그의 말 속에서 지식인의 '생산'과 글쓰기의 '생산', 그 영향력 사이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이며 시차적인 간극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2011년의 정치적 현실 - 민주주의는 개나 줘버려, 하고 살아가는 - 에 '끼여있는' 세대론의 '주인공'이자, 실존적 '엑스트라'인 우리들 자신의 글쓰기를, 사회적 영향력의 도구, 그리고 무엇보다 '생산력'을 통한 '저자'로서의 글쓰기로 바꾸어 나가자는 고민으로 치환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리영희 자신에 대한 '음미', 혹은 미학적인 '감상'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칼날 서린' 비평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논조'는 지나치게 찬양에 가깝다.) 그러한 비평을 통해서만이, 그에 대한 현재적 '재구성'의 작업이란 가능하게 작용할 것이다.

더불어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주체적 의미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요컨대 리영희라는 기표에게 있어, 혹은 그것을 사유함에 있어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현재적 필요성은, 들뢰즈가 말한 '탈영토화', 그리고 '재영토화'와 관련된다고 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리영희라는 비판적 글쓰기의 노동-기계를, 그의 역사적 스탠스 혹은 점유 상태로부터 '탈영토화' 하여, 우리의 '기만적' 현실에 대한 일종의 유토피아적 '지식인상'으로 '재영토화'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우스갯소리지만, 동시에 단순히 그것으로만 끝나지는 않는 음험함을 지니지 않을까, 싶다. 

3.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나? 

글쎄. 필자는 잘 모르겠다. 새는 물론 생물학적으로 날개가 두 개(그러니까 좌우에) 있어야 날 수 있다. 하지만, 새들은 동시에 날기에 적합한 '물리학적, 생물학적 환경'이 존재해야 날 수 있다. 새를 달나라에 순간이동 시켜보자. 날 수 있나? 아마 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부유'할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요지는, 좌우파를 나누는 어떤 경계,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수많은 헛소리와 궤변, 그리고 정당정치와 대의제를 위한 일종의 '기만'을 위한 좌우의 '양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러운 숨을 내뱉는 바로 그 공간의 '공기'와 '중력', 그러니까 바로 정치적 현실을 위한 '환경'의 필요성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새에게 좌/우의 날개는 조물주에게 맡겨진 하나의 (정당정치적) 숙명이다. 진정한 우파도, 진정한 좌파도 존재하지 않는 지금에서야, 우리는 그것의 '존재적 필연성'에 대해 재차 반복, 숙달할 필요가 없는 게다. 그것 보다는, 바로 그러한 정치현실적 환경의 개선, - 그 환경이란, 바로 '민주주의'가 가능케 되는 하나의 '물적 토대'를 일컬을 수도 있겠지만 - 그리고 그것을 위한 '중력' 혹은 '산소'가 필요한 시점이라 할 만하다. 

결국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실현 불가능한' 선택의 기로와 관련된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한 '선택'이란 가능한가? 그것은 오히려 '정치적 선택에 대한 선택 불가능성'이라는 우리들의 주체적 아니러니와 관련되지 않는가? 예컨대, 우리들은 현실주의자로서의 우리를 상정하지 않고는 일종의 '탈주' 혹은 '유토피아'의 구상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냐는 (체게바라의 '명언'에 대한) 지젝의 사르카즘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가령 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세. 안에는 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야.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네. 이때 자네가 큰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세. 그러면 불행한 이 몇사람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지 않은가?" p. 265

리영희가 많은 감응을 받았다는 루쉰의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 이 평전에서 가장 의미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어쨋든 이 일화에서 '자네'는 선험적으로 어떤 '지식인'을 상정하고 있다. 이미 깨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필자는 이 일화에 지나친 엘리트주의가 숨어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네'가 해야만 하는 어떤 '선택의 강요'에 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이란 가능한가? 오히려 그것은 리영희에게는 '선택 불가능한' 문제였다.

리영희는 루쉰의 이 일화를 통해 그의 '목표'를, 즉 '소리지르는 사람'으로서의 미래를 지속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고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자네'의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에는, 리영희와 같은 '저자'의 목소리와, 그를 대변할 '언론'의 존재가 선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새가 날기 위한 환경적 조건'이리라. 다만, 우리는 리영희의 현실과는 별개로 '반공주의'와 '독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현상황에 대한 '인식'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이러한 인식 속에서, '자네'가 소리지르는 행동은 그저 하나의 '소음'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소리지른 자네는 우리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강철'로 된 방 안에 갖혀 있으며, 살아가고자 하는 '욕동'을 진정한 '희망'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는 하나의 '메세지'가 선험되어야만 한다. 즉, 우리에게는 '반공주의'와 '독재'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인식과, 진정한 (유토피아적이긴 하지만) '민주주의'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반동적 '제스쳐'가 필요한 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선택 불가능한' 문제이다. 요컨대, 우리는 다만 '내부의 확장'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외부'로 이행하는 과정, 그리고 그 정치현실적 '외부'로부터 다시금 '내부'로 향하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으로서 진정한 혁명적 사고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에겐 2.0 버전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필요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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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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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이라는 사람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이 정도면 필자의 '무지'가 얼마나 충분한지 알 수 있을게다.) 오늘의 기사였던 동아일보 홍찬식 논설위원의 칼럼을 통해 그의 '위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 것도 포함시켜야겠다.(http://news.donga.com/3/all/20110126/34385678/1)   

그다지 '반박할' 가치도 없는 글이긴 하지만, 조국 교수의 반박(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10126184640)은 꽤 통쾌한 편이다, 아니 뭐 특별할 것 없는 글에 대한 반박치고는 좀 너무 '열심히' 인 편이다. 어쨋든 '폴리페서'라는 무식한 주장은, '범주'를 벗어난 논의라는 생각이 든다.(근데, 폴리페서이자 '강남좌파'이면 또 어떤가? 필자는 그런 '척'을 하는 교수도 흔히 보지 못한다. '정치적 중립성'은, 소수의 공간을 제외하면, 그다지 '필요없는' 개념이 아닐까. 차라리 수구/보수와 개혁/진보의 양 쪽의 사상을 모두 적극적으로 '표현해주는' 편이 모두에게 이로울지도.) '정치교수-비판적 지식인' 중의 택일이라니?! 그렇다면 관악구에 거주하는 비판적 지식인은 정치적/당파적 자율성을 표현할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을 '선택'을 강요당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이것은 '교수'라는 그의 직업적 특성 때문이기는 하지만, 교수 또한 시민권을 가지고,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 오히려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장점' 또한 가지고 있는 - 위치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가 무슨 '공산주의-사회주의' 사상을 법학수업시간에나 퍼뜨리는 '빨갱이'인 마냥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정치'로부터 대체 어떤 분야가,직업이,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이번에 같이 읽은 '촘스키와 푸코' 대담집에서의 푸코의 말처럼, "대체 왜 '정치'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단 말인가?!" 

서두가 길었지만, 여하건 이 책, <진보집권플랜>과 오늘 몇 줄의 기사를 통해 내가 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건, 꽤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가 필자의 마음에 '쏙 드는' 인간형이라기보다는 - 분명 그의 정치성과 필자의 그것은 다르며, 추구하는 가치 또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 그만한 '인물'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인 우리 사회의 '현실'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몇 가지 부분에서 그의 생각을 살펴보고자 한다. 플랜의 순서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겠으며, 필자의 무지 덕택에 오독한 부분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책은 '대중'을 위한 두 사람의 노력이 충분히 고려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촘스키와 푸코~>도 그러한 것 같고.) 

1. 교육, 그리고 20대와의 '연대'

'김예슬' '사건'과 관련하여, 그들이 풀어내는 한국 교육에 대한 대화는 비교적 그 맥락을 잘 짚어내고 있는 듯 보인다. 특히 한국 교육의 맹점들 - 조기교육을 비롯, 사교육 문제(공교육의 약화), 서울대 폐지-분할론, 20대의 요구에 대한 '응답'에 대한 내용까지 - 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젯거리'가 되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봉착하는 지점들이, 바로 우리, '20대'의 주체성, 그 짓눌린 주체의 자국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특히 김예슬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들은, 필자를 비롯하여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진지하게(사실 굳이 너무 진지할 필요는 없을 듯도 하다. 오히려 이것은 약간의 '진지하지 않음'이 필요한 작업같기도.) 고민해보았으면 하는 부분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가, 아니 왜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가' 하는 것들. 

더불어 서울대 폐지론에 대한 조교수의 '분할론'은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첨가된 듯 보인다. 서울대가 가지는 모종의 '권위'를 해체하자는 듯이 보이는데, 과연 얼마나 '효과성'이 담보될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와 같은 현상적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무조건 "서울대를 없애자!"는 일종의 강박적 히스테리보다는 좀 나아 보인다.) 

하지만 사교육 문제에 대한 그들의 대화는 좀 밀도가 떨어진다. 단순히 '공교육의 강화'를 위해 조교수가 대안으로 내놓고자 하는 것들은, 물론 충분히 고개를 끄덕거릴 수는 있겠지만,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과연 'EBS와 강남구청 수능강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그게 최선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물론 필자는 생각이 좀 다르며, 더불어 단순히 그의 논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식이 아니지만, 그 구체적 '형상'에 대한 의문점이 든다. 

또한 20대와의 연대,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정치활동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자기규정' 속에 빠져있는 세대론적 갈등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생각들도 비교적 구체적이지 않은 듯 보인다. '청년유니온'이나 '백수연대'같은 집단적 움직임들이 '어떻게' 그들과 '손잡을 수' 있을까.(아니, 20대는 그들과 '손잡아야만' 어떤 움직임에 대한 '정치적 의미'혹은 효과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인가.) 단순히 20대의 움직임을, 그 미세한 흔들림을 감지하고 손뻗을 만한 '진보'의 모습을 만들수 있다는 것일까? 그리고 물론 그것은 그의 화두가 아니라 20대 그 자신들의 화두이자, '범주'이기는 하지만, 20대가 펼쳐나가야만 하는 현실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조금 더 고민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석훈류의 '침묵'으로 남고 말 가능성이 커 보인다.

 2. 매력적인 진보, 밥 먹여주는 진보 

'개혁/진보'라는 말이 계급론적인 '좌파'보다 쓰기 알맞은 말이라고 하니, 그렇게 해보자. 서두에서 그들은, 단호하게, 그리고 절대적인 '진보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인사들에 대한 충분한 쓴소리가 첨가된, 비교적 '통쾌한' 발언들이다.  

사실 '정치'와 '현실' 그 사이에는 필자같은 사람들에겐 충분한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혹여 정치라는 학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에는 그만큼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수많은 이들(필자를 포함한)의 외상적인 정치적 스탠스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의 말처럼, 진보라는 이름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의 말처럼 '밥벌이'와 '생계'에 매몰된 학계에서는 아무것도 잉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다루는 건, 결국 이 밥벌이와 진보라는 어울리지 않는, 무엇인가를 '통합'시키고자 하는 노력에 다름아니다. 무상급식 논쟁까지의 진보는 과연 우리에게 진보라는 이름에 대한 '이미지', 혹은 좌표를 올바르게 인식시킬 수 있었을까? 

물론, 진보는 변화해야 한다. 하지만 진보가 아무리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심지어 진보가 공짜로 급식까지 먹여준다 하더라도, 탈정치화된 대중과 20대라는 세대론적 공간에는 미개척된 '영토'가 존재한다. 그것은 이미 대중의 현실에서 괴리된 '정치적 현실'이 단순히 '밥벌이'와만 관계되어 있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칼 슈미트의 말처럼, 대의제에서의 '대표자'란 결코 대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장치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입장'(결국 우리의 현실에서는 '정당'의 입장)을 선언하는 장치로서 존재한다. 그들의 논의에서처럼, 이러한 대의정치의 한계를 고려할 때, 과연 매력적인 '정당'이란, '우리'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정당정치'에 대한 막연한 '희망'에서부터 진보의 변화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보라는 것이 단순히 '진보정당'으로 병치되는 것은 다만 그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진보진영을 향한 변화,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는,(적어도 한국식 정당정치에 대한 그다지 긍정적인 희망을 가지지 않는 필자로서는) 가장 근본적인 '민주주의', 그 자체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과연 민주주의는 '살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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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비교적 '까놓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MB정권의 무지함과, 수구/보수, 그리고 그 누구보다 개혁/진보 진영의 인사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거대자본과 삼성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으며, 검찰개혁에 대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다. 만약 우리세대 중, 정치와 자신의 현실, 미래 그 무엇때문에라도 이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된 이라면,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만 한 책인것 같다. 물론 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모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가끔은 조금 편향적이며, 어쨋든 '진보'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재집권', 권력의지를 어떻게 향유해나갈 수 있을 것인지가 이 책의 '이름'이니까. 다만, 이 책의 가장 주요한 '필요성'은, 탈정치화된 현실을 살아가는, 그래서 무의식적 정치편향을 농축시키고 있는 우리들 자신, 그 '슬픈 현실'에 대한 자신만의 '사유'를 진행해 나갈 수 있는 초석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초석이다. '잔치'를 시작하려면, 세대론을 넘어선 '주체적 사유', 단순히 지식자본과 소유된 가치들을 넘어선 주체성의 사유가 우리에겐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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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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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은 정상에 이르는 길이 여러개라는 뜻도 되고, 산을 오르는 방법이 여러가지라는 뜻도 된다. 혹은, 그것은 산을 오르는 '이유'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대개는 건강과 행복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산을 오를테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복'을 위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사색을 위해서 산을 오르기도 한다. 거칠게 보자면, 등산은 대개 무언가를 잔뜩 '채우는' 활동이 되거나, 혹은 무언가를 모두 '비우기' 위한 활동이 된다.

촘스키와 푸코라는 유명한 두 사상가의 대담은, 언뜻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로 판명되기도 하나, - 물론 공통점도 있다. 동시대의 두 인물에게는 푸코의 말마따나 어떤 정의된 '정의'가 있는 것이다 - 단순히 그 이분법이라는 것이 어떤 활동 그 자체의 즉물적인 목적을 위한 것은 아니다. 즉 다시 말해 두 사상가의 이분법적 구도는, 오히려 그 자신들의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회용' 대담에서는, 그러한 사상적 내밀함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히려 이 이분법적 구도에서 펼쳐지는 두 사상가의 '입심대결'에서 알아보아야만 할 것은, 그들의 내부가 아닌 우리들 자신의 내부 - 그 사이의 분절된 간극과 그 간극만큼이나 즉자적으로 '분열된' 우리의 사유-체계이다. 

둘의 대담에서의 디페랑스적 요소 - 촘스키에 의해 정의되는 푸코적 텍스트와, 푸코에 의해 조명되는 촘스키적 텍스트에 관해, 그리고 필연적으로 지연되는 그 '해석'에 관해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예컨대 인간성을 구성하고 있는 스키마를 기본 요소로 판명하는 촘스키의 언어관에 대하여, 푸코에게는 그 '인간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지표, 그러니까 기타 담론에 대한 하나의 '인식론적 지표'의 역할만을 할 뿐이며, 과학적인 개념으로서 작용하지도 않는다.  데카르트가 촘스키적 '창조성'에 하나의 기준이 된다면, 푸코는 그러한 일반적 '기준'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스피노자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촘스키가 주장하고 있는 '아나코 생디칼리즘'에 대해 푸코가 이렇다 할 반문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인데, "사회-정치적 권력과 신체들을 통제, 억압하는 감춰진 관계들의 폭로"를 위하여 과연 자유론적 사회주의가 올바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좀 더 끌고나갔으면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다만 뒤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에 관해 사유하는 모습에서는, 역시 필자 자신이 푸코의 생각에 가깝다는(혹은 가깝고자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촘스키의 '보편문법'이 틀렸다거나, 비본질적인 내용이라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러한 '내면적' 사상에 잠식한 '내면'을 까발리고자 했던 것이 푸코의 목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정의라는 개념은 특정 정치/경제 권력의 지배수단으로서 혹은 그러한 권력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여러 다른유형의 사회에서 발명, 유통된 개념입니다" 

이러한 푸코의 발언은, 일종의 '유토피아적' 구상에 대한 사변적 논쟁과도 일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의 말마따나, 과연 "계급 없는 사회에서의 '정의 논쟁'혹은 '정의의 정초'는 가능한가?"하는 것. 이것은 다만 인간성을 어떤 '보편-절대적 기반'으로 간주하는 촘스키의 '권위'보다 훨씬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과연 계급과 계층과 억압과 공포가 사라진, 진정한 '민주주의'의 재건 속에서, - 그러니까 그러한 유토피아적 건설 속에서 - 우리가 느끼는 '정의'라는 개념과 '인간성' 내부의, 혹은 '주체'라는 '충분히' 분열된 개념은 어떠한 것일까, 하는 것. 더불어 그것은 촘스키와 같은 비교-중도적 탈중심화에서는 결코 발견되어질 수 없는어떤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조를 중시하여 사건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처럼, 반대로 사건을 중시하여 구조를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유형의 사건들이 다양한 층위를 형성한다는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탈구조주의자적' 면모를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한 만하다. 구조에 편입될 수 없는 '사건'들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론적 경로들을 가지며, 그러한 의미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어떤 투쟁과 전략 - 상징주의적 분석이나 기호론적 분석, 그러니까 헤겔적 회피와 기호론적 안일함을 배재한 - 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투쟁' 자체의 '현실'적 면면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면서' 사건의 탈구조화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이후에 나오는 권력과 '억압'에 대한 그의 의견은 꽤 유명한 것이라 생각된다. 

"억압이라는 개념은 권력의 효과를 규정하는 데 권력의 사법적 측면에 너무 치중하는 것입니다. 권력이 순전히 억압적인 것, '안 돼'라고 말하는 것뿐이라면 사람들이 그것에 순순히 복종하리라고 보십니까?" 

이러한 그의 의견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대안은, 권력 관계에 대한 분석이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부 구조'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진정한 분석과 대안도출이 어렵다는 것.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 그래서 그의 이러한 사상이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 국가의 범위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현실적 '혁명'이란 불가능하다. 그것이 어떤 '국지적' 혁명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대의'는 언제나 국가라는 틀이 아니라, 구조적 관계를 넘어선 탈구조적 '공동체'와 연대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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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임명하지 않은", 그래서 "그 누군가로부터도 임명되지 않은" 보편적 '개인'으로서의 우리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본질적' 분석에 대하여 그는 하나의 '관계망'을 남겨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관계망에 대한 분석틀, 상징계적 현실에 관한 비판적 분석틀을 위한 '보편적 개인'의 '투쟁'은 지금-여기에도 충분히 유효하다. 푸코를 읽는 것이 개인에게 언제나 '현실'을 읽어나가는 것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투쟁의 굴레, 그러한 '전체적이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우리의 사유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앞당길 수 있는 개인적 '주체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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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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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단히 명료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칸트의 저서를 읽을 때 오는 그 '싸늘함'과는 별개로, 그의 저서에는 어떤 종류의 '따듯한 친절함'이 뭍어나오는 것이다. 더불어 이것은 대단치 못한 리뷰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게다가 평소에 그닥 관심이 없었던 그의 '공동체주의'이지만, 졸렬하고 단편적인 독서를 통해 필자가 과연 샌델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담보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과연 '도덕'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이해'되어야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모든 오해와 오독을 무릅쓰고 짧은 리뷰를 남겨보고자 한다. 

물론 이 저서 전체의 구체적 리뷰는 필자에게 불가능하다. 그것은 칸트와 롤즈에 대한 독서가 끝난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그가 펼치는 일정 부분의 논리적 사고는 非아시권의 현실을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교육'에 관한 부분을 다룰 때 거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내용에 대한 '주석달기'를 감행해보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좀 '불완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도덕법의 근거는 실천이성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 즉 자율 의지를 가진 주체에서 찾을 수 있다. 경험적 목적이 아니라 "목적의 주체, 즉 그 자체로 이성적인 존재가 모든 행동 원리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오직 칸트가 말하는 "가능한 모든 목적의 주체"만이 권리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이 주체만이 자율 의지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이 주체만이 감각적 존재를 보다 더 높은 존재로 격상시켜주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히 독립적이고 이상적인 영역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처럼 철저한 독립성만이 상황의 변화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초연함을 부여한다." (p.180-181) 

예컨대 고진은 <윤리 21>의 서문에서 이런말을 했다. 

"나는 이 책에서 도덕과 윤리라는 말을 구별하려고 했다. 칸트는 일관되게 도덕적=실천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가 도덕적이라든가 실천적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통상의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것을 윤리라고 부르고, 도덕이라는 말은 통상의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즉 도덕이라는 말을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윤리를 '자유'라는 의무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한다." 

오히려 더 헷갈릴 수도 있지만, 고진은 샌델을 읽는 데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또한 '칸트'를 통해 그의 '윤리'에 대한 생각을 펴 나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독서가 선행/후행 한다면 더욱 좋을듯 싶다.)생각해보니, 이 주제로 세미나 같은게 열리면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고진과 샌델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고 보는 필자이지만, 인용한 두 내용은, 롤즈를 넘어서기 위한 샌델의 '분석'이며, 또한 칸트를 재해석하기 위한 고진의 '재구성'이라는 점에서 참고해볼만 할 듯 싶다.  

아까 잠시 언급했지만, 인문학적 사유의 '주변부'라고 인식되는 우리, 여기, 한국에서, 이렇게 고진만큼 샌델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 게다가 이렇게 '물밀듯' 저서가 쏟아져나오고 있으니 - 어떤 의미에서 썩 달갑지만은 않은 부분이다. '정의'와 '하버드'가 세트로 묶여 '시너지'를 만들어냈다면, 사실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왔던 샌델의 '공동체주의'가 이제서야 '제대로' 번역된다는 것은 아니러니하다. 게다가 이제 그는 그러한 공동체주의의 한계와 수정을 가하고 있는 입장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서는 '도덕'과 '정의', 혹은 '윤리'에 대한 '정초'가 이루어지지 못하는가?  

칸트 전공자는 무수히 많으며, 롤즈, 밀, 듀이, 게다가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이들도 무수히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 또한 이에 대한 관심이 많으며(물론 어려워서 던져놓기 일쑤지만) 아둥바둥 거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는 어떤 '기시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철학과가 사라지고 있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것이며, 인문학도로(특히 철학도로) 자신의 미래를 전유함으로 얻을 수 있는 초라한 경제적 지표를 상상해볼 때이며, 혹은 그러한 현실을 박차고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게 지금 이 순간도 어떤 '목적'을 향해 투쟁하고 있는 홍대 인근이며, 국회 의사당 앞이며 하는 곳의 '운동'의 모습이 바로 그에 대한 '이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도덕'(혹은 윤리)의 '이름들'을 읽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의 동어반복적 '실천'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책에 대한 독서는, 바로 '도덕=실천'이라는 비공식적 공식에 대한 우리의 '움직임'을 촉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쨋든, '신호등의 빛'은 그 자체로 '도덕률'이 아니다. 칸트에 대한 답보가 의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빛은 그 자체로 도덕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도덕에 대한 관념의 '형이상'이다. 여기서 신호등의 빛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그 빛이 아니며, 바로 우리 머릿속에서 어슴프레 빛나고 있는 그것, 우리가 '자율의지'를 가진 '주체'라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어떤 '공백'에서 삐져나오는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도덕률이란 바로 의식적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적 차원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에 가깝다. 그것은 무의식과 의식을 함께 '꿰뚫고' 삐져나오는 것이며, 샌델의 말처럼 어떤 '자아상'과 관련되는 것이라 할 만하다. 이상주의적 견해라기보다, 이것은 확실히 '법(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가운 점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대한 샌델의 이 엄격한 '공격'들이, 충분히 정당하다는 데에 있다. 정치(철학) 담론에 대해 그가 말하는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넘어서기'는,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공동체'가 단지, 개인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했던 '공백의 영역들'을 채우는 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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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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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바다에서 자랐고, 바다에서의 기억이 많다. 하지만 동시에 내게 바다의 기억은 분열되어 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다다, 라고 내가 당당히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그런 분열된 기억들 때문이다. 대부분의 바닷가 태생과 같이, 나는 바닷내음이라는 걸 모르면서 지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의 냄새는 나의 냄새이므로, 나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나 보다. 그런 것이다. 대부분의 삶이란, 그렇게 '정작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은 모르고' 지나쳐가게 되는 것이므로. 하지만, 바다를 떠나 서울에 와 두 평 남짓한 원룸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가장 그리웠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냄새이자, 바다의 냄새였던 것 같다. 글쎄, 믿으련가 모르겠지만, 나는 서울에 올라와서야 바다내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유년시절의 나를 휘감았던 추억의 냄새라는 것도.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이란, 의외로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런 풍경일 경우가 가장 많다. 특히 겨울의 바다를 거닐어 본 이라면, 그것이 가져다주는 을씨년스러움과 부피만 큰 고독, 혹은 끝없이 침잠하는 외로움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슐레가 바라본 바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는 매우 '생물학적'으로, 혹은 '인류학적'으로, 때로는 '사회학적'으로 분석해내어 우리에게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백사장을 거닐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수평선의 풍경과 나는 얼마만큼의 '시차'를 가지고 있을까?" 하는 것. 옆에서 보든, 위에서 보든, 때로 물속에서 보든, 바다는 바다다. 그것은 그저 '흘러 넘치고' 있다. 그것은 때로 인간을 보듬고, 인간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며, 간혹 인간을 그 누구보다 무섭게 위협하기도 하며, 그러다가는 다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끝없이 침묵하기도 한다.  

"그래 괴물아, 뭘 원하는 거냐? 사방에 보이는 난파에 취했구나. 뭘 더 바라느냐? - "너와 세계의 죽음을, 지구의 멸망을, 카오스로의 회귀를." (p.84) 

우리의 시각이 어떤 면에서 '아웃 포커싱'과 같은 기능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시각을 가장 집중시키는 것 또한 바다의 한 특징이다. 태풍이 오는 바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방파제를 뚫고 올라오는 파도를 보노라면, 저 수평선 너머의 세상은 한없이 멀어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춤추는 바다의 앞에 선 인간은, 결국 한없는 존재의 나약함과 부질없음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미슐레의 물음에 대한 바다의 답변처럼, 바다는 어쩌면 태초의 카오스, 그 자신이 약동하던 시대의 카오스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바다를 정복할 수 없다. 아무리 큰 배와, 육지매립과, 4대강 사업을 넘은 4대양 사업을 통해서도, 심지어 '조니 뎁'이 100명쯤 있어도 결코 바다를 정복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바다가 가진 '광범위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본능' 때문이다.

"본능은 한동안 잠이 든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다. 그렇지만 잠들었는 붙잡힌 채 갇혀 있든, 마술에 취했든, 이런 상태가 곧 죽음은 아니다. 본능은 살아있다. 규석으로 짠 거친 해면 상태로. 움직이지도 숨쉬지도 않고, 순환기도 없이, 아무런 감각 기관도 없이 살아있다. 그것을 어떻게 알까?" (p.125)

땅거미는 바닷가에도 찾아온다. 한동안 횟집들이 켜놓은 울긋불긋한 불빛들이 하나 둘씩 일렁이기 시작하면, 비로소 황량한 바닷가 마을에도 저녁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때 문득 바다에는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백열전구가 빛나고, 어슴프레하게 달빛이 얼굴을 내민다. 바다의 저녁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온다. 그리곤 바람이 분다. 언제나.  

"바다의 생명에 꿈이요 소망이자 복잡한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정착이다."(p.208) 

그렇게 해질 무렵의 바닷바람은, 우리를 한동안 머물게 한다.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혼'은, 대게 그 광경 앞에 잠시 그 바닷가의 풍경속에 무겁게 가라앉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바다는 거울일까? 미슐레의 말처럼 바다가 가진 하나의 '욕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닷바람이 만드는 '주체로의 회귀'인 듯 보인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정착이며, 반대로 떠나갈 수밖에 없는 바다와 인간의 운명이다. 운명의 굴레는 그렇게 바닷바람과 함께 오는 듯하다. 

늦은 저녁, 백사장에 앉아 한동안 말이 없는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같이 등대를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등대가 비추는 바다 위의 동심원을 바라보는 일이다. 인간은 그렇게 바다를 보며 다름 아닌, 자신에게 덧씌워진 운명의 굴레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눌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루해가 저물었다. 바닷새는 늦게 날아와 파도를 부추기다가 다시 땅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절벽과 어둑한 정원 너머로 날카롭고 섬뜩한 밤새의 첫 울음이 들려온다. 그러나 새장은 벌써 닫혔다. 새들은 날개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잠들었다. 그녀도 안심하고 안도한다. 이윽고 깊은 숨을 토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를 품에 끌어안는다."(p.330) 

바다가 잠들면, 인간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향해 떠난다. 하지만 '텅 빈' 집의 문은 닫혔다. 그것은 주체의 공간이다. 공허함을 가득 안고, 인간은 그렇게 바다를 떠난다. 하지만 영원히 떠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바다에서 태어난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기어들어가 죽음을 맞이하고픈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남은 것은 자신과 바다를 끝없이 '포옹'하는 일이다. 그것이 깊이 잠들 수 있도록. 혹여 밤새가 날아와 울거나, 아득한 심연의 악몽을 꾸게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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