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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시민은 자유롭게, 국가는 정의롭게" 

이책 표지를 들추면 보이는 유시민의 말이다. 말 그대로 "자유로운 시민들과 정의로운 국가"라는 개념은 사실 고대로부터 이어져내려 왔다. 인류의 역사는 곧 '정치로서의 역사'라고 할 만큼, 그 과정에서 자유와 정의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책에서 유시민이 들려주는 국가 이야기는 멀게는 홉스로부터 가까이는 MB정부의 '은총(?!)'까지 이어진다. 결국 이것은 유시민 자신의 '국가론' - 까지는 아니겠지만, 이것을 단순히 정치가로서의 자기보론이라 하기도 뭣하니 그냥 넘어가자 - 비슷한 것이라 할 만한데, 국가는 '왜'(혹은 어떻게) 이러(해야) 하는지, 혹은 왜 이러는지(?)에 대한 이야기들과 맞물려 한국사회의 청사진들이 골고루 담겨 버무려진다.

 문제는 다음과 같은 '참'의 명제("시민이 자유로우면 국가는 정의롭다" or "국가가 정의로우면 시민은 자유롭다")가 역사 속에서 거의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판단 주체의 몫이긴 하지만, 어떤 '국가'에서도 자유롭지 않은 '시민'이란 존재했다.(그러므로 여기서 시민사회 이전의 역사는 모두 폐기된다.) 더불어 혹여나 좀 자유로운 시민들로 구성된 국가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의'라는 이름을 공공연히 획득하지는 못했다.(그것은 대부분 자유로운 시민들로부터 '혁명적으로' 폐기되었다.) 그러므로 유시민이 말하는 저 올바른 명제는 아무래도 그의 이상향, 혹은 대부분 '시민들의' 이상향으로 머무는 듯싶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역 혹은 대우명제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시민이 먼저냐 국가가 먼저냐 하는 근본적인radical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고 유시민이 고민하는 문제도 이와 밀접하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여러 사상가들과 국내 인물들의 사유를 좇아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고 믿는다. ..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엽합정치이다. ...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대중의 존경과 믿음을 받는 길이 바로 연합정치에 있다.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 

 
   

아마도 여기서 그가 자유주의 진영으로 지칭하는 것은 민주당일터, 이와 같은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한지 벌써 수개월이 흘렀다. 아직도 연합정치의 '플랜'이나 로드맵은 구체적으로 짜여지지 않은 채, 오갈데 없는 한량처럼 정치권의 '유령'으로 변모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마지막에 언급하듯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 연합정치라는 점이다. 연합정치를 통해 대선에서 시민들의 '자유로운 투표권'을 획득하여 집권세력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그의 목표라면, 결국 이것은 진정 시민의 자유에서 출발하는 정의로운 국가이기보다는, (자유+진보세력의 '섞임'을 통한) '정의로운' 정치권력으로부터 도출되는 '자유시민'에의 약속이다. 그래, 뭐 국가(정치권력)이 시민보다 우선시되어야 마땅하다는 날선 논리를 차치하고라도, 그리고 진보대연합, 연합정치 운운하는 세력들의 (전략적) 정당성을 일부 인정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형상'이 그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는 낙담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고진이 맑스의 재-독해를 통해 언급했듯 '자본=네이션=국가'라는 '보로매오의 매듭'에 대해 총체적인, 그리고 근본적인 분석을 통해 사유하지 않고서는, "진보는 사회주의다" 라는 (김상봉의) 말을 조금 더 변주하여 사유해보지 않고서는, 어떤 공동체의 구성이 정의로운 국가의 탄생을 예고하리라는 그의 아름다운 바람이 실현되기는 좀 힘들어 보인다. 

어쨌든 약간 김빠지는 결론과 조금은 주관적인 보론격의 이야기들을 제외하자면, 국가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유시민의(유시민이 바라보는) '(한국이라는)국가'에 대해 생각해보고싶은 이들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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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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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흔히 진실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점잖은 격언에 좌우된다.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꽤 자주 드는 격언이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을 이르는지 따져보지 않고서는 이 격언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그 격언은 분명히 그릇된 것이다. A라는 남성이 근엄하고도 단호한 지혜를 가진 척하면서 이 격언을 들먹일 때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디를 가든 항상 자기 고향에서와 똑같이 행동하라는 점이다...(중략)" p.32 

 이 늦은 리뷰를, 아니 어쩌면 더이상 누군가가 다시(re-)들춰 보지도(view) 않을 이 글을 이 문구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경제적 고려'에 의해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충분히 '무시'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당최 이 엉뚱한 이야기를 왜 갑자기 꺼내는가 하면, 바로 내가 그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태하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본성'이란, 한국사회의 경제적 고려에 의해 충분히 '무시'된다. 아니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러한 경제적 고려는 나태라는 본성을 철저히 분석하고, 비판하며, 파괴한다. 나는 남성 A가 되기를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태를 지키기 위한 정치다. 그리고 인류학적 상대성을 부정하는 정치다. 나는 이러한 정치의 가장자리에서 빈곤한 사유의 배설물 같은 것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기위로다. 

"스탈린은 처칠이 총선 결과에 승복하고 조용히 물러난 것을 이해하지도, 존중하지도 못했다. 나는 대의민주제 정부의 가치를 확신한다. 대의민주제 정부는 정부의 활동에 반드시 요구되는 도량과 자제심을 지닌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한 정부 형태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대의민주제 정부의 필요조건인 타협과 양보를 전혀 훈련받지 않은 나라들에 당장 이런 정부 형태가 도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p.44 

재미있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대의제의 도입이 가지는 의미가 러셀이 '우려하는' 바로 저 지점, '타협과 양보를 전혀 훈련받지 않은' 곳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점들은 점점 확장되고 있다. 이젠 날라차기에 주먹질은 기본이잖나? 더불어 또 한가지는, (물론 나는 러셀처럼 대의제의 가치를 전혀 확신하지는 않지만) 한국사회에서 '시민'에게 대의제란, 결국 '타협과 양보'라는 침묵하는 가치 속에서가 아니라, 투쟁과 혁명 속에서 비로소 꽃피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대의제의 필요조건이 타협과 양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충분조건은 분명 투쟁과 혁명이며, 이것은 결코 대의제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정치형태일 수 없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좌절된 도덕성의 관점에서 볼 때 형법의 미덕은 도덕성으로 위장한 소심함 때문에 자연스러운 형태로 표출되지 못하는 공격적인 충동을 발산할 통로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전쟁 역시 똑같은 미덕을 가진다. 형법은 아무리 증오심이 끓어올라도 이웃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한다. 하지만 약간의 선전 활동만으로도 이런 증오심을 다른 민족에게 돌릴 수 있다. 다른 민족에 대한 살해 충동은 애국적인 용맹성이 된다." p.77 

만약에 러셀이 지금-여기에서 가장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휴머니즘의 영역, 그러니까 이라크 파병과 미국중심의 세계화와 비정규직과 청년백수로 점철된 한국사회 내부로 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휴머니즘이란 사상의 영역을 벗어나 현실에의 '개입'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가 '너무도 효율적으로' 그것을 가로막고 있으며, '먹고사니즘'은 결국 그 정치와 경제의 합작품으로 우리에게 非휴머니즘적 사회체계의 구조화를 돕도록 내몰고 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본능적으로' 꿈틀거리는 위장과 내 '나와바리' 지키기일뿐, 휴머니즘을 들먹이는 먹고사니즘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런 우리는 김연아와 박태환을 보면서 눈물을 쏟고, 해병대 사건사고를 관찰하며 불안에 휩싸인다. 이것은 러셀이 언급한 것처럼 하나의 '형법'이다. 바로 그 형법적 미덕이야말로, 먹고사니즘이라는 '공격성'을 은폐하며 동시에 자신을 자폐의 길로 인도하는 '인도주의적 환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피히테는 교육은 자유의지를 없애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하며, 학교를 마친 사람들이 교수들이 원하는 바에서 벗어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살던 시대에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이상이었다. 그가 최상이라고 여겼던 제도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출현했다. 앞으로는 독재 체제하에서 이런 실패작이 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규정된 식사와 주입식 수업, 훈계조의 명령이 결합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권위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성격과 신념이 형성되어 기성 권력을 비판하는 정신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할 것이다. 설령 모든 사람이 불행하게 살더라도 정부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p.145 

교육파트에서 러셀이 한 말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토막이다. 맑스와 같은 인물의 출현은 이제 불가능한 것일까? 권위에의 복종 혹은 신봉은 이제 '좌파'라는 개념의 '자리이동'을 촉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좌파 혹은 '좌빨'은, 우리가 알던 '왼쪽'에 위치하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 지구의 맨틀이 조금씩 움직이듯, 교육은 좌파의 지점을 옮겨놓고 있다. 보수집단에서는 교과서의 내용이 지나치게 좌빨이라고 몰아세우고, 그에 맞물려 대안교과서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런 사이에도 학생들은 '공부'를 했고, 모 선생에게 훈계와 주입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좌파의 위치란 이제 386세대들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일종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 이제 좌파의 위치는 어디일까. 더 오른쪽으로 가버렷냐고? 글쎄. 내 생각에 그 위치는 약간 3차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어느 극점에서 다른 극점까지라는 하나의 선분 위에 고정적으로(그리고 절대적으로)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처럼, 3차원 위에서 부유하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 이리저리 돌려지는 지구본처럼, 좌파의 위치는 시시때때로 변한다. 다들 알겠지만 그 지구본(구)의 이름은 '교육정책'이며, 그것을 굴리는 '보이는 손'은 정책 입안자들이다. 

-- 

러셀에 대해서, 그의 사상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잠언이 비로소 그 효용을 담보하게 되는 순간은, 언어의 확장이 일어나게 되면서 비로소 발생한다. 하나의 언어가 하나의 실천으로 변모하게되는 순간 말이다. 물론 한 마디의 말로써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미 언어의 무의식은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열되어 있는 것은 인간 주체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러셀과 그의 삶, 그리고 사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순서상 가장 '마지막'에 위치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대표작을 비롯한 원서의 착실한 번역이 더 요구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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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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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읽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몰입한다는 것을 느꼈다. 글쎄, 한국이라는 국가적 틀 내에서 '사유'한다는 것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절실하게 와 닿았던 것은 그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자리이동', 즉 모든 개념의 '경계화'에 있었다. 이것은 생각보다 그리 이해하기 쉽지 않다. 특히 '한국'이라는 내셔널리즘의 '총체'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더더욱. 

글의 제목에서부터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이들도 있겠지만, <언어의 감옥에서>라는 제목(그리고 내용)이 '환기'하는 바를 필자는 스피노자-니체-...-라캉-데리다 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미 제목 자체에서부터 라캉의 '상징계', 그리고 기표/기의의 관계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라캉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줄리아 크리스테바', 그녀는 '서경식'이라는 인물의 도플갱어와도 같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불가리아 태생의 여인만큼 '경계인'의 표본이 되는 것은 없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녀의 '언어'와 서경식의 언어가 겹쳐지고 조립되고 서로 융화되는 어떤 지점들이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 여기서 경계라는 것은 단순히 지리상의 국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 국민국가가 '모어', '모국어', '국민'을 등식으로 연결하려는 국어 내셔널리즘과 불가분의 관계인 이상, 주변화된 사람들은 언어 간의 경계를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들의 내면에까지 모든 언어의 균열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p.44  

더불어 그가 '이양지'라는 또다른 디아스포라의 글을 읽어내려가는 '시선'은, 100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그녀의 <유희>를 읽어내려가며 '치밀함'으로 필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여기에는 모어와 모국어가 어긋나버린 현실 속에서 디아스포라들이 직면하고 있는 거대한 어려움과, 그 희미한 가능성이 모두 암시되어 있다"는 그의 말처럼, 이양지의 작품은 한/일 양국에서 '어떻게' 읽혀졌는지, 그리고 읽혀져야만 하는지를 성토하고 있다. 

그는 억압과 속박, 단절과 고립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일종의 '과정적 물음'을 제시한다. 사실 그것은 국가라는 틀 속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에게 '이미' 내재된, 하나의 존재로 태어나자마자 우리 내부에 잉태된 하나의 필연적 물음이다. 모어라는 '폭력', 그리고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더불어 일본이라는 '기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물음들은, 그 자체로 '과정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쉽게 정의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정의 자체를 거부하는 '주변인'의 습성을 가진다. 흔히 우리는 그들을 '마이너리티'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마이너'라는 (자기-)인식에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외재적인 저항의 물결, 혹은 표면적인(단순한) 저항의 모습이 아니다. 내부로부터 조용히 흘러나오는 '내재적 저항', 그리고 결코 고정되기를 거부하는 기표의 연쇄, 혹은 '유동적'(혹은 유목적)인 주체와 관련된다.

또한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박유하-서경식 간의 비판-보론 부분이다. 박유하 교수에 관해서는 약간 실망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서경식은 그녀를 '열심히'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공감하는 바이다. 그냥 든 생각인데, 서경식의 비판은 '뒷문을 열어두는' 형식인 것 같다. 비판의 '여지'를 약간 남겨두는 듯 한데, 상대가 그걸 '무는' 순간, 그는 그 먹이의 '견고함'을 새삼 인식하게 만들고, 상대는 '이빨빠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뭐 그런 형식.(우스갯소리다.) 

 여하건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것은 특히 젊은 세대에게 꽤 필요한 경험이다. 흔하디 흔한, 'DDD 필수 교양도서 100권'등에 꼭 포함되었으면, (혹은 포함 안되었으면) 하는 양가적인 바람이 있다. 후자의 이유는, 그런 필수 교양도서에 '엉망인' 책들이 간혹 끼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사회'라는 '큰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디로부터' 배우는가. 나아가, 국가 혹은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그것을 마침내 자신의 '가치관'이라고 자신감있게 표현할만한 '근거'를 어디로부터 배우고 학습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학습의 대상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선험성'이라는 것과 '폭력성'을 동시에 관계짓는 것에 약간 흥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과연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는 토익, 어학연수의 '필연성'이라는게 얼마만큼의 폭력을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느끼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감옥'을 살아가고 있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상처받은 육체를 이끌어 자신의 주체를 비로소 경계에 세운 이들은 그렇게 고함친다. "당신들의, 당신들이 세운, 당신들을 위한" 감옥에서 한발자국, 움직여보라고. 그럼, 아마도, 그 공허한 감옥에서 울려퍼지는 발자국의 파편화된 '이명'이, 당신을 조금 흔들어 깨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나의) 시선'은 폭력이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도 폭력이다. 그는 확실히 '시선들의 연대'를 말하고 있다. 시선은 교차되고, 때로는 엇나가기도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화해'의 이름이다. 혹은 진정한 '주체'의 이름이다. 

p.s. 앞에서 필자는 계속해서 '우리는(우리들은)'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이러한 '범주화'에 대해서 좀 심사숙고 해볼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오용' 혹은 '단순사용'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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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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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자괴감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두들겨 맞고 난 다음에는, 왠지모를 기시감이 든다.

0.  

이 리뷰는 두서가 없을 예정이다. 

1. 

로쟈(의 '책을 읽을 자유') 리뷰에서도 잠깐 밝힌바가 있지만, 쨌든 메타비평만큼이나 '감히' 손가락을 놀리기 힘든 글쓰기도 없다. 그리고 비교적 '쉽게 쉽게' 다가섰던 로쟈의 '저공' 비행과는 좀 다르게, 최정우의 비행은 확연히 '고공'을 날아오르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엘리트주의라던가 나르시시즘이라던가 하고는 거리가 약간 있는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쓰기가 하나의 '귀감'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필자로 하여금 이 새벽의 타자놀이를 '타자적'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글쓰기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또한 로쟈 리뷰에서도 밝힌 바가 있듯이(이쯤 되면 로쟈 리뷰가 뭐 대단한 거나 되는줄 알지도 모르지만, 사실 별거 없다. 흐흐.) 리뷰 혹은 비평이란 게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어야만 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면, 이건 확실히 리뷰도 비평도 아닌, (항상 아름답고 규칙적이며 부드러운 선율과 함께 흘러가는 사회에 대한)하나의 불협화음이자, 분절되고 재조립되어 버린 필자 자신의 현실에 대한, 그리고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두드려대는 키보드라는 타악기를 위한, 하나의 진혼곡이다. 아, '알흠다운' 취업준비생(=대학 4년)의 '현실'이여. 

2. 

책 내용을 전반적으로 다루기에는 필자의 한계가 명확하다. 그래서 잠깐 잡설 하나를 해보고자 한다. 들뢰즈 이야기인데, <시네마>라는 두통유발 S급 도서를 읽고 있다가 만난 <사유의 악보>의 글쓰기, 사유 등등은 약간 '연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최정우의 '서곡'을 보자. 

"... 오히려 이 글들은 어쩌면 그 '새로움'이라는 자신만만하고 희망찬 환상에 도전하기 위해, 혹은 저 '시대' 또는 '세대'라고 하는 어떤 구성된 집단적 주체와 인위적 시공간에 대해 (오히려) 어떤 도발적 도박과 내재적 내기를 걸기 위해, 반대로 어떤 낡음으로부터, 어떤 폐허로부터, 어떤 잔해와 잔재로부터 출발한다. 이 글들은 탈근대로의 여정을 위해 근대성의 유적과 지층을 파헤치고, 이론 이후로의 이행을 위해 이론의 잔여와 여백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들을 '사유의' 조각들이 아니라, 사유의 '조각들'로 명명하는 이유이다. 이 글들은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육체들이다." p.8 

그리고 <시네마2 시간-이미지>의 7장, '사유와 영화'에서 나오는 들뢰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우리는 아직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자신에 대한 사유의 불가능성만큼 전체에 대한 사유의 불가능성, 끈임없이 화석화되고 무너져 내리는 사유, 그것에 대해서만 사유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이렇게 병치해놓고 보면 그가 말하는 사유의 '조각들'이란, 이렇게 마치 우리가 사유하고 있다는 행위-사실에 대한 '불가능성'의 발견이자, 결국 사유가 만들어내는 조각성에 대한 '사유'인 것처럼 들린다. 내친 김에 하이데거의 얘기까지 들어보자. 

"사유하게-하는 것 대부분은 우리가 아직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 세계의 상태가 끊임없이 사유하게-하는 상태로 변해가더라도 아직까지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략) 사유하게-하는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하는 것 대부분은 우리가 아직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하이데거, <무엇이 사유함을 요청하는가> 

그렇다. 사실 우리는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을 사유할 수(사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최정우가 들려주는 '사유'에 대한 '조각난 사유', 기형과 잡종의 '신체(육체)'들이야말로 들뢰즈의 '그것'과 연결될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처럼 우리에겐 "사유해야만 한다!"는 당위, 혹은 강박적 선언의 필요성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우리는 '사유-행위' 자체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사유는 '누구'로부터 '흘러' 들어와서는, '어디로' 조용히(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게 되는가, 하는 것 말이다. 결국 이것은 사유의 '조각화'를 통하여 진정한 사유-행위 자체의 즉자/대자적인 '조각組閣화(조직화)'를 이루려는 시도로 판단된다.  

3. 

책 리뷰에 대해 최정우님(람혼)이 답변을 달아주시는 저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부진아같은 리뷰보다, 몇 가지 책 내용에 대한 질문들을 남겨놓고자 한다.  

- 이른바 '라캉으로의 복귀'(그러니까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이라는)는, 마치 라캉에 대해 지젝이 가지고 있는(그리고 우리들 독자가 '호명'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환기'시켜주는 작업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건 말하신대로 '순수한 라캉주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일 텐데, 과연 이러한 '청년 라캉'으로의 복귀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나갔던 '(라캉없는) 라캉주의'들이 어떻게 변화해나갈지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네요. (관련내용 485-491쪽) 

- 개인적으로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를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 같습니다. 읽다가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뮈(까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확히 말하면 <시지프 신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랑시에르의 번역을 둘러싸고' 편을 읽으면서, 로쟈의 번역비평도 생각나고, 제가 힘겹게 읽어내려갔던 랑시에르의 몇몇 책들이 떠올랐는데요, 직접 번역을 좀 (자주, 많이)해주시는게 어떨지요? 흐흐.  

4. 

각주에 대한 각주.  

"... 나는 밤 앞에 서있다, 잠이 오지 않는다, 그대로 새벽을 맞이한다, 내가 어디에 있다가 왔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어딘가로 튕겨졌다가, 다시 다른 어딘가로 튕겨져 왔다는 기억만이, 깨질 듯한 두통 속에서, 버젓이 살아 있을 뿐이었다,,,(중략) 그 이후로 나는 잠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벌건 대낮을 송두리째 흙 뿌리 같은 어둠으로 죄다 포장해버렸던 듯도 하다,그래, 여기는 캄캄하다, 여기는, 말도, 안되게, 캄캄하다,,,(중략) " p.517-518 1)

1) 밤이 듣는다 - 에레나
 밤의 곁에 나는 이끼처럼 머문다
(내 몸 타고 미끄러져 가는 옛 노래)
내 하늘을 가득 소음으로 채운다
(새들만이 주소를 알아본 섬나라)
이런 밤은 다른 세계란 걸 믿는다
(빌딩보다 구름이 낮은 밤)

흔적 없이 길은 노래 뒤로 숨었다
(베개 속에 꺼져 있던 길의 숨소리)
잠을 깨워 술을 불러 함께 걷는다
(느릿하게 물러나는 밤의 눈동자)
너무 커서 못 보는 얼굴이 그립다
(빈 액자가 발끝에 치인 밤)

골목마다 다른 불빛들이 환하다
(누구 하나 듣고 있지 않은 노래들
비도 없이 멜로디는 젖어 무겁다
(섬나라의 시민들이 적은 손 글씨)
이런 밤은 색이 바랠 만큼 걷는다
(익숙해진 노래를 망치는 비-밀)
사람들은 어딜 떠나려고 바쁘다
(밤 열차는 여기에 소리로 남는다)

밤이 듣는다(누가 떨면서 있다)
다정함을 지키던 마음 속
괄호가 새들 틈으로 날아갈 때 온 밤이 듣는다
밤이 듣는다(꼭 붙어서 있다)
바위 속에 한 번쯤 닿고픈
이끼가 새벽쪽으로 커갈 때 온 밤이 듣는다

밤의 곁에 나는 이끼처럼 머문다
(내 몸 타고 미끄러져 가는 소리들)
이런 밤은 다른 세계란 걸 믿는다
(내 하늘은 가득 소음 속에 갇힌다)


music by ELENA
word by BANG YOUNG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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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5-2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jk7228님의 소중한 리뷰 너무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나 2절에서 제가 사용하고 의미한 '사유'의 개념을 들뢰즈와 하이데거의 언급과 비교하시는 지점에선 무릎을 치며 탄복했습니다. 제 '사유' 개념의 전사(前史)와 맥락을 이렇게 적확하게 짚어 주신 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우 예리한 지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말 바로 그 사유의 사유 불가능성을 함께 사유하고 싶은 마음이고, 이 책 또한 바로 그러한 욕망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유 불가능성을 함께 사유할 가능성, 곧 그 (불)가능성을 공유해주심에 더욱 감사드리는 이유입니다.

던져주신 질문들에 대한 답변:

1) 저는 제가 말했던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에 대한 강조가 특정 라캉주의자들(지젝-라캉-헤겔주의자들)에게 어떤 특별한 변화를 이끌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 말씀하신 대로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이데올로기 또는 우리의 어떤 특정한 이해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러한 '환기' 자체가 그 이데올로기 자체의 소멸로 바로 이어지지도 않고 또 제가 그것을 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현재 라캉을 이해하고 향유하는 지반이 어떤 지평 위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가를 우리 스스로가 예민하게 인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비유하자면, 그 이해 지평이라는 '상징계'가 '후기성' 혹은 '파국'이라고 하는 어떤 이론적 '실재' 위에 있음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그 극단까지 추적해야 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일단은 이러한 지평(에 대한 지평)에 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2)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에 대해서는 독자들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현상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카뮈와 그의 책이 대단히 '반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가 서곡에서도 밝혔듯이, 저는 그의 반동적인 실존철학의 문제 틀('자살')을 더 확장된 형태의 다른 틀('절멸)로 - 하지만 그와 같은 강도(强度)의 어떤 절실함을 갖고 - 대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의 지점은 어쩌면 저 '반복(repetition)'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사유하고 재전유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3) 저도 번역을 많이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제약들의 내용을 자세히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만큼 번역이라는 형태와 지점에 대해서 (과도할 정도로) 예민한 성격이라, 제 자신이 번역에 임할 때 스스로에게 (역시나 과도할 만큼의) 엄격성을 부과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점이 때때로 제 자신을 매우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각주에 대한 각주 형식도 매우 소중하고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의 '종곡'은, 아마도 섬세하게 느끼셨을 테지만, 본문이라는 공간의 부재를 통해 그 본문이 '본래'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곧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존재라고 하는 것이 어떤 부재 위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형식이었는데, 그 점을 또 다른 변주로 연주해주신 것 같아 너무 반갑고 감사했답니다.^^ 노래는, 계속되어야 한다기보다, 아마도 계속될 것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 가정용 곤충에 관한 은밀한 에세이 1881 함께 읽는 교양 9
조슈아 아바바넬.제프 스위머 지음, 유자화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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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습겠지만 이것은 벌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가 이 책의 존재를 '생물학'이라는 분야의 서가로부터 격리시켰을 때, '벌레'라는 것은 결코 그 즉물적인 형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상상물'로 우리에게 '개입'한다. 가정용 곤충이라는 '은밀한' 에세이의 형식으로. 

1.  

군 생활을 철원에서 한 필자는, 이 책의 내용이 '다정다감'하게 들려오기도 한다. 그 곳에서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아마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막사 밖 구석탱이에서 한창 고참들에게 갈굼을 당하면서 바라보았던 '집게벌레의 비행'이다. 그 '풍경'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나와 곤충에 대해 이야기할 권리가 없다.(ㅋㅋ) 주황색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1~2미터 가량을 비행하는 녀석들의 징그러움이란.(흐뭇) 게다가 녀석들은 내 머리 속이나 은밀한 부위까지 침투하며, 간혹 아침에 침낭 속에서 일어나다가 필자가 온몸으로 애무한 녀석들의 '잔해'를 발견하기도 했다. 여튼 필자가 이야기하고픈 것은 하나이다. 그들(곤충 혹은 해충)이 우리들 '곁'에 있지 않다는 믿음이란, 마치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즉 벌레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생존욕구, 그것의 발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대같은 곳에선 그 욕구의 발현이라는게 좀 '무디게' 나타나는데, 확실히 그 곳에선 벌레와 해충 말고도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하건 이 책에는, 당신이 '별로 알고싶어하지 않는' 진실들(곤충들)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주석들이 실려 있다. 다만, 한국적 생활양식과는 좀 동떨어진 관계로, 빈대나 흡혈진드기 같은 '서양식' 식사습관을 가진 녀석들도 나오니 참조할 것.(물론 이건 필자의 사견이다. 서울 바닥에 빈대로 넘쳐나는 집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2. 

다만 이 책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필자는 약간의 의문점이 드는데, 대체 저자가 이토록 친절하게 이들에 대한 정보 - 그들의 삶부터, 좋아하는(싫어하는) 음식, 생식, (약간 애매한)퇴치법에 이르기까지 - 를 이야기해주는 것은 어떤 '의도'를 가지는 걸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요컨대 저자는 우리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혼자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을 '피하는' 방법 또한 알려주며, 단순히 '공존'이라는 지루한 모티브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적당히 피하면서 살아라,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 또한 '종교적인' 색체를 떠나 '지혜'를 가지라는 오묘한 말로 마무리된다.  

여하건 우리들은 곤충들을 '확대'해서 바라보면서, 저자의 말처럼 그들을 하나의 '에어리언' 처럼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꽤 중요한 문제이다. SF영화를 비롯한 모든 '상상적' 생산에서 우리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취하고 있는 '어떤 것'이란, 결국 이러한 존재(혹은 주체)의 절대적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뻔한 얘기로 설명하자면, 우리 또한 '외계인'일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생명 에세이', 혹은 우리들이 가진 외계인이라는 외적 존재를 인식함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하나의 '코드'란,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우주적'인 생명의 관점이다. 

3. 

이 책이 필자의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아직 두고 봐야겠다. 실제로 '개미군단'을 방으로 맞이한 작년 여름의 '전투'에서, 필자의 전략은 육탄공격(!)이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필자의 '시간'을 공략했다. 게다가 체격이 큰 인간은 동시에 에너지소모가 크고, 그들은 수적 우위까지 점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필자의 전략은 모든 공격으로 그들을 초토화하여 '단시간'에 전투를 끝내는 것이었다. 책에서 설명하는 그들의 '성질' - 몇몇을 살해해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  을 깡그리 무시한 필자의 무대포 공격은, 단 두시간 만에 무릎을 꿇었고, 개미군단이 점점 더 밀려오는 좌중을 바라보며 결국 한숨짓고 말았다. 

어쨋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인간과 '함께'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저능하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터전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다만 그래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이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온 세상을 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4. 

또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벌레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인간이라는 벌레'에 관한 책이다. 카프카의 변신으로도 느끼기에 부족했던, 그리하여 아직도 부조리로 남아있는 인간의 '복수적 현실'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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