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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자괴감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두들겨 맞고 난 다음에는, 왠지모를 기시감이 든다.

0.  

이 리뷰는 두서가 없을 예정이다. 

1. 

로쟈(의 '책을 읽을 자유') 리뷰에서도 잠깐 밝힌바가 있지만, 쨌든 메타비평만큼이나 '감히' 손가락을 놀리기 힘든 글쓰기도 없다. 그리고 비교적 '쉽게 쉽게' 다가섰던 로쟈의 '저공' 비행과는 좀 다르게, 최정우의 비행은 확연히 '고공'을 날아오르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엘리트주의라던가 나르시시즘이라던가 하고는 거리가 약간 있는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쓰기가 하나의 '귀감'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필자로 하여금 이 새벽의 타자놀이를 '타자적'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글쓰기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또한 로쟈 리뷰에서도 밝힌 바가 있듯이(이쯤 되면 로쟈 리뷰가 뭐 대단한 거나 되는줄 알지도 모르지만, 사실 별거 없다. 흐흐.) 리뷰 혹은 비평이란 게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어야만 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면, 이건 확실히 리뷰도 비평도 아닌, (항상 아름답고 규칙적이며 부드러운 선율과 함께 흘러가는 사회에 대한)하나의 불협화음이자, 분절되고 재조립되어 버린 필자 자신의 현실에 대한, 그리고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두드려대는 키보드라는 타악기를 위한, 하나의 진혼곡이다. 아, '알흠다운' 취업준비생(=대학 4년)의 '현실'이여. 

2. 

책 내용을 전반적으로 다루기에는 필자의 한계가 명확하다. 그래서 잠깐 잡설 하나를 해보고자 한다. 들뢰즈 이야기인데, <시네마>라는 두통유발 S급 도서를 읽고 있다가 만난 <사유의 악보>의 글쓰기, 사유 등등은 약간 '연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최정우의 '서곡'을 보자. 

"... 오히려 이 글들은 어쩌면 그 '새로움'이라는 자신만만하고 희망찬 환상에 도전하기 위해, 혹은 저 '시대' 또는 '세대'라고 하는 어떤 구성된 집단적 주체와 인위적 시공간에 대해 (오히려) 어떤 도발적 도박과 내재적 내기를 걸기 위해, 반대로 어떤 낡음으로부터, 어떤 폐허로부터, 어떤 잔해와 잔재로부터 출발한다. 이 글들은 탈근대로의 여정을 위해 근대성의 유적과 지층을 파헤치고, 이론 이후로의 이행을 위해 이론의 잔여와 여백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들을 '사유의' 조각들이 아니라, 사유의 '조각들'로 명명하는 이유이다. 이 글들은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육체들이다." p.8 

그리고 <시네마2 시간-이미지>의 7장, '사유와 영화'에서 나오는 들뢰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우리는 아직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자신에 대한 사유의 불가능성만큼 전체에 대한 사유의 불가능성, 끈임없이 화석화되고 무너져 내리는 사유, 그것에 대해서만 사유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이렇게 병치해놓고 보면 그가 말하는 사유의 '조각들'이란, 이렇게 마치 우리가 사유하고 있다는 행위-사실에 대한 '불가능성'의 발견이자, 결국 사유가 만들어내는 조각성에 대한 '사유'인 것처럼 들린다. 내친 김에 하이데거의 얘기까지 들어보자. 

"사유하게-하는 것 대부분은 우리가 아직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 세계의 상태가 끊임없이 사유하게-하는 상태로 변해가더라도 아직까지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략) 사유하게-하는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하는 것 대부분은 우리가 아직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하이데거, <무엇이 사유함을 요청하는가> 

그렇다. 사실 우리는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을 사유할 수(사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최정우가 들려주는 '사유'에 대한 '조각난 사유', 기형과 잡종의 '신체(육체)'들이야말로 들뢰즈의 '그것'과 연결될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처럼 우리에겐 "사유해야만 한다!"는 당위, 혹은 강박적 선언의 필요성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우리는 '사유-행위' 자체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사유는 '누구'로부터 '흘러' 들어와서는, '어디로' 조용히(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게 되는가, 하는 것 말이다. 결국 이것은 사유의 '조각화'를 통하여 진정한 사유-행위 자체의 즉자/대자적인 '조각組閣화(조직화)'를 이루려는 시도로 판단된다.  

3. 

책 리뷰에 대해 최정우님(람혼)이 답변을 달아주시는 저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부진아같은 리뷰보다, 몇 가지 책 내용에 대한 질문들을 남겨놓고자 한다.  

- 이른바 '라캉으로의 복귀'(그러니까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이라는)는, 마치 라캉에 대해 지젝이 가지고 있는(그리고 우리들 독자가 '호명'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환기'시켜주는 작업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건 말하신대로 '순수한 라캉주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일 텐데, 과연 이러한 '청년 라캉'으로의 복귀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나갔던 '(라캉없는) 라캉주의'들이 어떻게 변화해나갈지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네요. (관련내용 485-491쪽) 

- 개인적으로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를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 같습니다. 읽다가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뮈(까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확히 말하면 <시지프 신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랑시에르의 번역을 둘러싸고' 편을 읽으면서, 로쟈의 번역비평도 생각나고, 제가 힘겹게 읽어내려갔던 랑시에르의 몇몇 책들이 떠올랐는데요, 직접 번역을 좀 (자주, 많이)해주시는게 어떨지요? 흐흐.  

4. 

각주에 대한 각주.  

"... 나는 밤 앞에 서있다, 잠이 오지 않는다, 그대로 새벽을 맞이한다, 내가 어디에 있다가 왔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어딘가로 튕겨졌다가, 다시 다른 어딘가로 튕겨져 왔다는 기억만이, 깨질 듯한 두통 속에서, 버젓이 살아 있을 뿐이었다,,,(중략) 그 이후로 나는 잠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벌건 대낮을 송두리째 흙 뿌리 같은 어둠으로 죄다 포장해버렸던 듯도 하다,그래, 여기는 캄캄하다, 여기는, 말도, 안되게, 캄캄하다,,,(중략) " p.517-518 1)

1) 밤이 듣는다 - 에레나
 밤의 곁에 나는 이끼처럼 머문다
(내 몸 타고 미끄러져 가는 옛 노래)
내 하늘을 가득 소음으로 채운다
(새들만이 주소를 알아본 섬나라)
이런 밤은 다른 세계란 걸 믿는다
(빌딩보다 구름이 낮은 밤)

흔적 없이 길은 노래 뒤로 숨었다
(베개 속에 꺼져 있던 길의 숨소리)
잠을 깨워 술을 불러 함께 걷는다
(느릿하게 물러나는 밤의 눈동자)
너무 커서 못 보는 얼굴이 그립다
(빈 액자가 발끝에 치인 밤)

골목마다 다른 불빛들이 환하다
(누구 하나 듣고 있지 않은 노래들
비도 없이 멜로디는 젖어 무겁다
(섬나라의 시민들이 적은 손 글씨)
이런 밤은 색이 바랠 만큼 걷는다
(익숙해진 노래를 망치는 비-밀)
사람들은 어딜 떠나려고 바쁘다
(밤 열차는 여기에 소리로 남는다)

밤이 듣는다(누가 떨면서 있다)
다정함을 지키던 마음 속
괄호가 새들 틈으로 날아갈 때 온 밤이 듣는다
밤이 듣는다(꼭 붙어서 있다)
바위 속에 한 번쯤 닿고픈
이끼가 새벽쪽으로 커갈 때 온 밤이 듣는다

밤의 곁에 나는 이끼처럼 머문다
(내 몸 타고 미끄러져 가는 소리들)
이런 밤은 다른 세계란 걸 믿는다
(내 하늘은 가득 소음 속에 갇힌다)


music by ELENA
word by BANG YOUNG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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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5-2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jk7228님의 소중한 리뷰 너무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나 2절에서 제가 사용하고 의미한 '사유'의 개념을 들뢰즈와 하이데거의 언급과 비교하시는 지점에선 무릎을 치며 탄복했습니다. 제 '사유' 개념의 전사(前史)와 맥락을 이렇게 적확하게 짚어 주신 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우 예리한 지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말 바로 그 사유의 사유 불가능성을 함께 사유하고 싶은 마음이고, 이 책 또한 바로 그러한 욕망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유 불가능성을 함께 사유할 가능성, 곧 그 (불)가능성을 공유해주심에 더욱 감사드리는 이유입니다.

던져주신 질문들에 대한 답변:

1) 저는 제가 말했던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에 대한 강조가 특정 라캉주의자들(지젝-라캉-헤겔주의자들)에게 어떤 특별한 변화를 이끌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 말씀하신 대로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이데올로기 또는 우리의 어떤 특정한 이해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러한 '환기' 자체가 그 이데올로기 자체의 소멸로 바로 이어지지도 않고 또 제가 그것을 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현재 라캉을 이해하고 향유하는 지반이 어떤 지평 위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가를 우리 스스로가 예민하게 인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비유하자면, 그 이해 지평이라는 '상징계'가 '후기성' 혹은 '파국'이라고 하는 어떤 이론적 '실재' 위에 있음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그 극단까지 추적해야 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일단은 이러한 지평(에 대한 지평)에 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2)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에 대해서는 독자들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현상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카뮈와 그의 책이 대단히 '반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가 서곡에서도 밝혔듯이, 저는 그의 반동적인 실존철학의 문제 틀('자살')을 더 확장된 형태의 다른 틀('절멸)로 - 하지만 그와 같은 강도(强度)의 어떤 절실함을 갖고 - 대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의 지점은 어쩌면 저 '반복(repetition)'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사유하고 재전유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3) 저도 번역을 많이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제약들의 내용을 자세히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만큼 번역이라는 형태와 지점에 대해서 (과도할 정도로) 예민한 성격이라, 제 자신이 번역에 임할 때 스스로에게 (역시나 과도할 만큼의) 엄격성을 부과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점이 때때로 제 자신을 매우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각주에 대한 각주 형식도 매우 소중하고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의 '종곡'은, 아마도 섬세하게 느끼셨을 테지만, 본문이라는 공간의 부재를 통해 그 본문이 '본래'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곧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존재라고 하는 것이 어떤 부재 위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형식이었는데, 그 점을 또 다른 변주로 연주해주신 것 같아 너무 반갑고 감사했답니다.^^ 노래는, 계속되어야 한다기보다, 아마도 계속될 것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 가정용 곤충에 관한 은밀한 에세이 1881 함께 읽는 교양 9
조슈아 아바바넬.제프 스위머 지음, 유자화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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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습겠지만 이것은 벌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가 이 책의 존재를 '생물학'이라는 분야의 서가로부터 격리시켰을 때, '벌레'라는 것은 결코 그 즉물적인 형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상상물'로 우리에게 '개입'한다. 가정용 곤충이라는 '은밀한' 에세이의 형식으로. 

1.  

군 생활을 철원에서 한 필자는, 이 책의 내용이 '다정다감'하게 들려오기도 한다. 그 곳에서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아마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막사 밖 구석탱이에서 한창 고참들에게 갈굼을 당하면서 바라보았던 '집게벌레의 비행'이다. 그 '풍경'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나와 곤충에 대해 이야기할 권리가 없다.(ㅋㅋ) 주황색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1~2미터 가량을 비행하는 녀석들의 징그러움이란.(흐뭇) 게다가 녀석들은 내 머리 속이나 은밀한 부위까지 침투하며, 간혹 아침에 침낭 속에서 일어나다가 필자가 온몸으로 애무한 녀석들의 '잔해'를 발견하기도 했다. 여튼 필자가 이야기하고픈 것은 하나이다. 그들(곤충 혹은 해충)이 우리들 '곁'에 있지 않다는 믿음이란, 마치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즉 벌레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생존욕구, 그것의 발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대같은 곳에선 그 욕구의 발현이라는게 좀 '무디게' 나타나는데, 확실히 그 곳에선 벌레와 해충 말고도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하건 이 책에는, 당신이 '별로 알고싶어하지 않는' 진실들(곤충들)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주석들이 실려 있다. 다만, 한국적 생활양식과는 좀 동떨어진 관계로, 빈대나 흡혈진드기 같은 '서양식' 식사습관을 가진 녀석들도 나오니 참조할 것.(물론 이건 필자의 사견이다. 서울 바닥에 빈대로 넘쳐나는 집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2. 

다만 이 책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필자는 약간의 의문점이 드는데, 대체 저자가 이토록 친절하게 이들에 대한 정보 - 그들의 삶부터, 좋아하는(싫어하는) 음식, 생식, (약간 애매한)퇴치법에 이르기까지 - 를 이야기해주는 것은 어떤 '의도'를 가지는 걸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요컨대 저자는 우리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혼자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을 '피하는' 방법 또한 알려주며, 단순히 '공존'이라는 지루한 모티브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적당히 피하면서 살아라,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 또한 '종교적인' 색체를 떠나 '지혜'를 가지라는 오묘한 말로 마무리된다.  

여하건 우리들은 곤충들을 '확대'해서 바라보면서, 저자의 말처럼 그들을 하나의 '에어리언' 처럼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꽤 중요한 문제이다. SF영화를 비롯한 모든 '상상적' 생산에서 우리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취하고 있는 '어떤 것'이란, 결국 이러한 존재(혹은 주체)의 절대적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뻔한 얘기로 설명하자면, 우리 또한 '외계인'일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생명 에세이', 혹은 우리들이 가진 외계인이라는 외적 존재를 인식함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하나의 '코드'란,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우주적'인 생명의 관점이다. 

3. 

이 책이 필자의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아직 두고 봐야겠다. 실제로 '개미군단'을 방으로 맞이한 작년 여름의 '전투'에서, 필자의 전략은 육탄공격(!)이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필자의 '시간'을 공략했다. 게다가 체격이 큰 인간은 동시에 에너지소모가 크고, 그들은 수적 우위까지 점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필자의 전략은 모든 공격으로 그들을 초토화하여 '단시간'에 전투를 끝내는 것이었다. 책에서 설명하는 그들의 '성질' - 몇몇을 살해해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  을 깡그리 무시한 필자의 무대포 공격은, 단 두시간 만에 무릎을 꿇었고, 개미군단이 점점 더 밀려오는 좌중을 바라보며 결국 한숨짓고 말았다. 

어쨋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인간과 '함께'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저능하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터전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다만 그래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이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온 세상을 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4. 

또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벌레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인간이라는 벌레'에 관한 책이다. 카프카의 변신으로도 느끼기에 부족했던, 그리하여 아직도 부조리로 남아있는 인간의 '복수적 현실'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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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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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억 하나.   

어쨋든 나는 그의 평전을 추천하면서, 지난 군시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그 시절 내가 <죄와 벌>에 대한 '독서'를 경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 - 도스또예프스키를 '읽는다는 것' - 은 내게 세계가 가지는 어떤 초월적 감정들을 분해하고, 해체시켜, 나의 과거 속에서 재조립하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더불어 그것은 그를 생각하는 것이, 나 자신의 어떤 '고착상태',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한 돌파구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철학', 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굉장히 생소하게 들려온다. 만약 이 단어가 우리에게 풍기는 향기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꽤 다양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안락함과 젖과 꿀이 흐르는 그런 풍요로움을 상징하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재미있게도, 나는 군생활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일련의 독서를 통해서 이 '불편한 이름'을 획득했다. 아니, 그것은 반대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 시간을 빌어 또한 고백하건데, 그 이전에 나는 결코 철학을 '한다'라는, 불편하고 동시에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의 문장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비교적 장황한 설명이 뒤이어져야만 하나, 그것은 어쩌면 너무 편협한 개인의 일대기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다만 내가 지금 이렇게 뜬금없이 '철학' 운운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죄와 벌>이 가져다준 무한한 충격, 그리고 그의 작품들에게서 받은 어떤 지난한 영감, 또한 그를 추억하면서 얻게 되는 모종의 '분석적 함의'로 인해 내가 비로소 철학이라는 의미를 '실천praxis'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어쨋든 그는 결코 철학자가 아니다.(저자인 카 또한 왠일인지 이 사실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요지는, 그가 철학자가 아니라는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해 여름, 한창 유행하던 신종플루로 '격리'된 채 천막에서 소일하며 <죄와 벌>을 집어든 것은 결코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동시에 결코 타인을 '향해'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오롯이 내 자신의 내부에서, 그 언저리의 작은 모퉁이에서 조용히, 그리고 그 자폐된 공간을 맘껏 향유하면서 (마치 내가 로쟈가 되어버린 듯이)그 책을 읽어내려갔다. 이후 나는 한 편의 글을 적었다.(그 글을 적은 '공간'은 지금 사라졌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 글이 내 최초의 '실천'이었다고 생각한다. 내부에서 이루어진 독서는, 반대로 글쓰기를 통해 외부로의 '확장'을 (내부로부터)이루어낸다. 나는 과거의 자신, 그리고 현재의 자신을 맘껏 조롱하며, 비웃으며, 또한 그러한 자신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폭로'를 통해 비로소 철학적 '시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건 꽤 시원섭섭한 경험이었다. <죄와 벌>이 가져다준 하나의 (관념적)쓰나미가 나라는 매개를 통해 타자에게 '흘러 들어갈 수' 있었던 최초의 경험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하이데거와 마르크스를 동시에 읽으며 느꼈던 모종의 '이물감', 그리고 이후 니체를 읽으며 느꼈던 '모호함', 칸트와 헤겔의 겉핥기를 통해 느낀 '견고함', 마르쿠제를 신봉하면서 생각했던 '나태함', 벤야민을 통해 느낀 자신의 '비겁함', 프로이트를 즐기면서 느꼈던 '억압감', 그리고 이후에 알게 된 수많은 현대 (정치)철학자들과 그들이 보여주(었)던 '충격들'을, 나는 결코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순간을 통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러므로 나 자신이 처음으로 '인식'했던, 그 이전에는 경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하나의 '이론적 실천'이었다. 

 

비범, 혹은 평범. 그리고 이중성 혹은 결여

그의 인생을 비범하다 말할 수 있을까.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니, 대신 비범하다고 해두자. 대체로 '평전'이라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그의 평전을 새로이 읽게되는 것은 그의 작품을 통해 느꼈던 감정들을 그의 삶 속에 투영시켜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선, 저자의 생각에 따라(때로는 반대하며) 흘러가는 그의 여정이,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하나의 시처럼 다가왔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마치 그것은, 하나의 '결실'을 맺어가는 과일나무의 형상을 보는 것처럼 우리들로 하여금 '고난과 역경', - 러시아가(혹은 러시안이) 가진 어떤 근원적 아픔을 포함한 - 그것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형성시킨다. 그의 작품이, 다만 현재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의 '해석틀'이 되는 이유는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그의 '세계관'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비범한(위대한)' 누군가의 실천이란, 그래서 결코 특별하지는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건 우리들이 생각하는 '평범함' 속에서 비로소 잉태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도스또예프스키의(이제야 느꼈지만 '그'라고 줄여쓰고 있었구나..) '정체성'이란, 그 모든 이력 속에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용광로에서 나온 하나의 '철재(작품)', 그리고 그 철재가 다양하게 사용될(해석될), 여러 분야의(예컨대 철로라던지, 건축물의 철골이라던지) '타자성' 속에서 비로소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처럼 다양한 분석과 비평의 잣대를 가진 작품이 이전에 존재했던가?

"옴스끄 감옥에서의 4년간 도스또예프스키는 인간 사회의 보통의 인습과 규약에서 벗어난, 거의 인간 이하의 생존에 다다른 사람들과 생활했다. 그는 지리멸렬한 인간 열정의 있는 그대로의 요소들이 끓어오르는 심연을 응시했고, 그 심연은 그의 영혼 속으로 들어왔다." p.83 

니체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선악의 저편(선악을 넘어서)>이 <죄와 벌>과 갖는 연관성이란, 마치 프로이트가 라캉에게 갖는 그것만큼이나 주요한 '누빔점'을 갖는다. 사실 '동시대인'으로서, 그들이 얼마만큼의 정서적 교류를 경험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 속에는 어떤 '심연'이 있고,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우리들은, 그 '응시'속에서 그 이외의 단 한사람, 바로 '니체'라는 하나의 '철학적 토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의 문제, 더불어 이러한 윤리적 작인으로부터 파생되는 '죄의식'의 문제는 결코 현대인의 '권리'의 문제와도 동떨어져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더 확대-재생산되어, 그리고 라캉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의 '영역'에 귀속되어 우리들에게 한층 더 가속화된 죄의식을 경험하게 해준다. 물론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은 이러한 '억압'을 부정한다.(그들은 오히려 이러한 모든 억압된 죄의식들에 대해 분자화된 '혁명'을 추구한다.) 이렇게 로쟈로부터 파생되는 일련의 윤리적 '문제제기'는, <백치>를 통해 형이상학적 구체성을 향해 나아가며 <악령>을 통해 정치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포획한다.  

".. 모든 현상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연역되야 한다면, 또한 모든 현실이 에고로부터 추출되는 것이라면 행위의 외적 기준 혹은 제재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최상의 의무는 자기 자아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 그리고 최상의 사명은 자기 개성의 발전과 성취가 아닐까? 라스꼴리니꼬프의 동기는 스스로가 초인임을 입증하고 도덕적 관습을 뛰어넘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p.232 

결국 이러한 '권리', 즉 주체가 가진 윤리적 '이율배반'의 관점에서 우리는 그의 '이후' 작품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테제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단지 헤겔을 참조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온전히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판단한다. 예컨대 그가 내비치고 있는 죄의식의 '주체'는 확실히 유물론적이다.  

"... 그것은 아마도 죄에 있어서의 공산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인바, 이것은 <악령>의 마지막 부분의 한 줄에 처음 나타나 그의 후기 작 전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는 자기 임종에 앞선 확각의 순간에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죄를 졌다"고 말한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조시마는 죽어 가는 형으로부터 "모두가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일에 죄를 졌다."는 말을 인용한다. 그것은 어쩌면 속죄의 신학적 이론을 수학할 수 있게끔 하는 유일한 이론일 것이다.." p.351 

그는 단호하고 선언적인 태도로, '모든 죄의식의 주체'가 다름 아닌, '모두'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확실히 신학적인 언표로 들린다. 하지만 더불어 그것은 하나의 토대, 그러니까 죄의식이 가지는 일종의 하부구조를 담지한다. <이>로서 살아갈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침묵할 수 없는' 하나의 물음이다. 단순히 이러한 죄의식의 '주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죄의식 자체의 '전全책임성'을 인정하고 하나의 '권리'를 재-탄생시킬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모든 것'에 대한 '모든' 죄의식을 '모두' 해체하고만 있을 것인가? 

나의 경우엔, 모든 '해체의 작업'은 해체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필연성의 구조 내부에 잠식하는, '우연성'이라 불릴 만하다. 죄의식이 가지는 모종의 '권리'의 해체에 대한 모든 시도는 어떤 필연적 우연에 의해 해체되는 것일지도. 다만 그러한 작업이 잉태하는, 나머지로서의 '이중성'이 존재한다. <미성년>에서 그가 보여주는 비형식성, 그리고 주인공의 심리적 혼돈과 분열의 제 과정이야말로, 그러한 후기 작품에서 그가 주요 쟁점으로 생각하는 이중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저자인 카는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미성년>을 하나의 '위대한 실패'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어쨋든 또다시 모든 귀결은 이것이다. "인간 본연의 윤리, 그 무의식의 심연을 오롯이 장식하고 있는 바로 그 테제의 분열과 안티테제의 도전을 허용하는 모든 '죄의식'의 권리가 만들어내는 복합물로서의 '해체'의 잔여물이란, 과연 어떤 경로로서 이러한 '결여'의 공백을 대체하는 '이중적 욕구'를 만들어내는가?" 

그러므로 내게 만약 그의 평전을 읽고난 뒤에 남은 단 하나의 물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이여, '무엇' 때문에 당신은 <범인凡人>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소?"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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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대칭 - 자연의 패턴 속으로 떠나는 여행 승산의 대칭 시리즈 4
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안기연 옮김 / 승산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우선 이 책을 읽고난 후의 작은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책을 직접적으로 '수학'이라는 과목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적극 권하고자 한다. 게다가 - 이건 확실히 수능세대의 폐해라고 생각되지만 - 이 책의 몇몇 부분은 수능 수학에도 충분히 '응용' 가능한 내용들이므로(실제로 수능을 본지 까마득한 필자는 '경우의 수' 부분으로 몇몇 문제를 생각해보기까지 했다! "이 도형의 (모든 종류의)대칭의 개수는 몇 개인지 답하시오?!") 참고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획일적인 '응용 문제'를 줄줄 풀어야만 하는 '수능 수학'에서 이러한 '대칭'과 군론, 새로운 수학적 '공식'들이 어떤 실용성을 가질 지는 좀 의문이 들기는 한다. 다만, 이 책이 한 수학자의 집념어린 '대칭적 삶'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또한 '알기 쉬운 000' 시리즈처럼 수학 자체에 대한 부드러운 입문서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수학이라는 학문을 다루는 우리들의 '자세'와도 관련되어 있다. 어떤 '학문'적 접근이 그러하지 않겠는가만은, 사토이의 '수학적 삶'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신앙적인 자세가 엿보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수학적 '신'이란, 오직 '자연' 속에서 존재한다. 그것도 '다의적'으로 말이다. 이건, 왠지 스피노자가 생각날 법도 한데, 여튼 굳이 철학적 난센스가 아니더라도, 그의 학문적 태도는 충분히 본받을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삶 자체가 '학문'이며, '자연' 속에서 수많은 학문적 아이디어를 소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부럽기까지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약간 여담이지만, 책에서 나오는 '몬스터 대칭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존 콘웨이'를 비롯한 <유한군의 아틀라스> 저자들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나선, 꽤 흥미로운 하나의 '게임'을 발견했는데, 콘웨이가 만들었다는 '인생 게임(혹은 생존게임. The game of life)'이 그것이다.   

 

(다음 사이트에 가면 설명과 함께 플레이가 가능하다. http://math.com/students/wonders/life/life.html

이 저서의 내용처럼, 이 게임에는 몇 가지의 '법칙'이 존재한다.(자연에 존재하는 (유한한)대칭물의 그것처럼!) 하나의 '세포'는 좌우 혹은 상하의 세포 존재의 영향을 받으며, 그에 따라 삶 혹은 죽음을 부여받는다. 그들은 여러 법칙들에 따라 '변화'하며, 각각이 가지는 '패턴'을 만들어낸다. 자신만의 '패턴'을 만들고 싶은 이라면, 한번쯤 플레이 해보시길- (그런데, 정작 콘웨이의 저서가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약간 유감이다. <몬스터 대칭군을 찾아서>라는 저서가 유사한 내용인 것 같지만.)

더불어, 초등학교 시절 '아이큐 검사'랍시고, 이런 '대칭'에 관한 문제들이나 도형의 (예측가능한) 변화의 모습을 푸는 문제들을 경험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나에겐, 이런 문제들이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졌었다.(그래서 아이큐가 낮게 나온걸까?) 사칙연산과 공식 외우기에 급급했던, 그리고 '눈높은(?) 수학' 숙제에 파묻혀 매일 매일 자신을 '주산기'로 만들어가던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더불어 초등학교에서 잠시 보조교사 활동을 하는 지금도, 필자는 아이들이 푸는 '계산기' 문제들을 보며 과연 한국의 '수학교육'이란, 그들을 모두 계산기가 필요없는 공돌이로 만드려는(정작 공대에선 계산기만 쓰지만) 누군가의 술책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밀려오는 것이다. 동시에 아들에게, (비록 그 아들은 부담스러워 하는 듯 하지만) 다정하게 세계 속에 파묻혀진 수학적 알레고리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사토이의 모습이 새삼 바람직하게 느껴진다.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자면, 필자가 새롭게 깨닫게 된 사실은 '보르헤스 문학'의 수학성이다. '광폭한, 그리고 셀 수 없는(동물)'이라는 챕터를 통해, 어쩌면 필자는 보르헤스를 다시금 재-독해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바디우가 수학의 집합론을 철학에 들이대면서, 필자로 하여금 일종의 '아나키'한 혼돈의 상태를 경험하게 만들었다면, 보르헤스는 문학의 형식을 통해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이라는 장르를 결합시킨 장본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건축에 나타난 수학적 양식들을 고려하며,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역사적 고찰도 하시금 재고할 수 있었던 것은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전공자가 아닌 입장이라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자주' 느꼈던 것은 '아젠다 설정'의 문제(즉 세계에 대한 급진적 '문제제기'의 자기-설정),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그러니까 '현존에 대한 희구'에 관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학자의 '1년'이란, 사실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간의 연장선상 속에서는, 언제나 세계의 하부구조(물질적 '현상')의 근본-이해에 관한 무의식적 욕망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비단 수학자의 모습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 우리들 자신이 진정으로 '세계'라는 '대타자'를 이해하는 상징적 행위의 연결고리 속에서는, 다분히 그러한 욕망의 행위가 내포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세계와 개인의 분절적 대칭에 관한)'196,886차원의 욕망'이라 할 것인가? 필자는 잘 모르겠다.(4차원 이상 생각하면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다만, '진리'를 향한 모든 실천의 길에는, 단 하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 삶 전체를 연소시키는 수학자들의 '시간(이라는 차원)'도 '존재'한다는 것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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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3-2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의합니다. 이 책이 어렵다...는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수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읽혀도 꽤나 재미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적어도 고등학교 수학교과서보다는 재밌어 할 겁니다.^^) 소개해주신 게임도 재밌어 보이는데요. 자신만의 패턴을 만들기라..한 때 유행했던 '스포어'같은 게임인 것도 같구요..해보고 싶지만, 방금 <대칭>을 다 읽은 지금보다는, 조금 있다가 하는 것이 좋겠지요.;;

rainmaker_1201 2011-04-01 01:32   좋아요 0 | URL
게임은 한 번 해보시길 추천합니다. 왠지 굳은 머리가 팽팽 도는 느낌이 들어서요.ㅋㅋ 이 책을 보고 나면 한가지 의문이 드는데, 과연 이 책이 어려운 건가, 아니면 저 자신이 '수학'을 못하는 건가 하는 것이 그거죠.ㅋㅋ 국가적 교육의 변화란게, 참 힘든 건가 봅니다.
 
<반자본발전사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는, 그리고 다른 면에서 조금 '특별하게는', 필자에게 꽤 유용한 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비록 이런저런 개인사로 인해 허겁지겁 읽어내려 가느라 오독하거나 놓친 부분들도 상당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저자들의 생각은 단순히 '자본주의'와 '발전'에 대해 필자가 생각했던 일부의 생각들이, 그저 단순한 '현상인식'에서 비롯된, 모자란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곤 했으니 말이다.  

어쨋든 '발전=변화(혹은 진보)'라는 공식에 있어, 우리는 이 동치된 관계 속에서 '='라는 기호에 대해 다시한 번, 우리들의 생각을 '빗금치는' 작업이 필요한 때는 아닌가?  

"발전은 현실을 담아내는 인식이고, 사회를 달래는 신화이고, 욕망을 풀어놓는 환상이"(p.24)라는 작스의 말처럼, 그것은 결국 우리들 사회를 바라보는 모든 '기능주의적' 관점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부풀어오른 자의식처럼 '눈에 띄는' 현상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깃털처럼, 천천히 '부유하고', 또 '가라앉는다.'  또한 그것은 발전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삐딱하게' 재구성하는 것과 관련된다. 왜냐고? 이미 그 대상(발전이라는 관념)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외상적 (관념을 바라보는)왜상'과 관련된다. 지난한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발전이라는 하나의 '증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은 이미 '외상적'이며, 따라서 그것이 어떤 '실재적 형상'을 띄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색안경'을 거두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것은 '발전'이라는 제목의 3D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우리들의 얼굴에서 '3D용 안경'을 제거하라는 의미다. 그럼 스크린에선, 하나의 '왜상'이 펼쳐지지 않는가? 실재를 마주하는 것, 지젝(라캉)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사막을 마주하는 일'이나 다름없는지도.

"생태 관료주의가 떠오르면 사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고 소비해야 하는가 같은, 사회 윤리를 둘러싼 근본적 논의가 묻힌다. 그리고 서구인의 욕망이 서구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암묵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며 생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고 낮은 수준의 상품 거래를 일부러 선호하는 사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p.93 

이러한 문구들은, 마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경험하게되는 순간과 겹쳐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쨋든 이러한 말은 자본주의 내부의 '맑스적 유령'을 확실히 현시하는 듯한데, '생태 관료주의'라는 저 오만한 개념에 대항한 '근본적 논의'란 결국 마르크스의 유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빈곤층의 가난은 부유층의 풍요를 만들고, 빈곤층의 굴욕은 자부심을 낳고, 빈곤층의 의존성은 부유층의 자립성을 낳는다. 따라잡기를 통한 평등은 현실의 불평등을 조직하고 합리화하는 신화에 불과하다." p.121 

'선험적' 불평등(세계경제구조는 불평등을 만들어내며, 그러한 불평등을 동력으로 구조화된다는 것)이란, 결국 이러한 세계적 '이율배반'과 관련된다. 물론 그것은 경제적 모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서도 인용했듯, 하나의 '신화'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분석과도 겹쳐지듯, 이것은 '세계사회'를 움직이는 하나의 집단-무의식적 연료이다. 트루먼이 남/북반구를 하나의 '기준'으로 나누는 연설을 내뱉고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잡게 된 순간, 소위 '저개발 국가'들은 '미국'이라는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산 증인은 바로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과 박정희는 아닌가? 또한 결국 트루먼이 말한 '낡은 제국주의'를 대신할 대체물이란, 하나의 새로운 '문화-경제적 파시즘'에 가까웠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계획이라는 개념은 마음먹은 대로 사회 변화를 설계하고 주도하고 생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구현한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는 계획수립을 통해 진보의 길을 따라 그런대로 순탄하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언제나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로 여겨졌다. 그것은 굳이 발전 전문가가 나서서 애써 설득할 필요조차 없는 공리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p.283

여기서 저자는 푸코의 '생태 정치'를 언급하며 권력이 모든 복지를 장악하고 자료화하는 동시에 사회 자체를 '제어하는' 모습을 통해 현실적 사례를 비판하고 있다. 결국 개발도상국이 하나의 '계획'을 통해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하나의 공리로 인식되며, 따라서 어떤 '비판의 대상'도 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이러한 공리적 인식, 즉 선험된 '계획'이야말로 국가권력이 잘 유지,보수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좀비PC와 같은 것은 아닌지.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적 설계를 거부한 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에 새로운 대서사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의중을 드러내지만, 사회적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구체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해서 말한 것은 마르크스의 유산에 근본적 약점을 남겼다." p.506 

저자는 이러한 인식을 통해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계속 사용하거나, '사회주의식 발전'에 대한 '변종적 추구'를 할 경우, 일종의 마르크스에 대한 '오독'을 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역사적 오해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결국 이것은 현대의 탈근대적 이론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적 비판'이라 할 만한데(혹은 기표의 용법에 대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 결국 소련식 사회주의의 한계나 자본주의적 기만에 대항하는 것은 이러한 '오해'의 가능성을 절멸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명확성과 더불어, 일종의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결론과도 관련된다. 

제법 허덕거리면서 읽긴 했지만, 어쨋든 19개의 다양한 주제를 관통하는 저자들의 목소리는 공통성을 갖고 있는듯 보인다. 그것은 앞서도 설명했듯 '발전'이라는 개념에 대한 주체의 외상적 왜상을 '발견'해내는 일이며, 동시에 발전이라는 개념 그 자체의 즉자적인 발전, 즉 '발전적'인 발전이 필요한 시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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