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 감독 작품 <보리 밭을 흔드는 바람>을 누군가에게 소개 받은 후, 나는 한국에서 개봉되는 켄 로치 감독의 작품을 보고자 했다. 그래서 <, 다니엘 블레이크>를 관람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미안해요, 리키>를 관람하게 되었다. 켄 로치 감독이 상당히 시대정신이 강하고, 진보성향이고,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자주 영화로 표현하는 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관람한 <미안해요, 리키><, 다니엘 블레이크>보다 더 현실적이고 비참한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 있었다.

 

<미안해요, 리키>의 영어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 미안한 사람이 결코 리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영어제목이 영화마지막 부분에 등장할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 “Sorry We Missed You”는 리키가 일하던 회사에서 고객에게 메모로 전달할 때 사용하는 종이에 적혀진 문구였다. “당신을 놓쳐서 미안해요.” 우리는 항상 일을 할 때 누군가에게 미안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가끔 나도 택배를 주문할 때 너무 늦지 않을 경우 대부분 택배를 그냥 그대로 기다린다. 가끔 쿠팡 총알배송이 온다고 해도 너무 재촉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서 택배의 세계는 전쟁 그 자체였다.

 

어느 특정택배가 주문되면 배송주문 1시간 만에 고객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리키가 새로 맡은 노선의 예전 담당자가 3번 늦은 것만으로 영업사장에게 큰 지적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그가 맡은 트럭이 자의가 아닌 누군가 의해 파손되고, 그 시점도 새벽인 점에서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책임은 회사가 관리하는 게 아니다. 모두 택배를 해야 하는 사장 아닌 사장들이 처리해야할 문제였다.

 

<미안해요, 리키>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의 모순이 가득하다. 가령 회사가 있다면 오너가 있고, 관리자가 있을 것이다. 회사의 오너는 주주였고, 그들은 경영은 하지 않으나 멀레이라는 경영관리자에게 일을 맡긴다. 멀레이는 택배기사들의 불만을 들어도 그냥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오로지 회사의 규정만 강조한다. 분명 업무만 잘 하면 제법 돈을 벌 수 있으나, 택배기사가 처한 현실적 문제는 받아주지 않는다. 업무공간과 사적 공간 즉 가정환경은 별개의 세계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발상은 가정환경에도 큰 문제를 일으킨다.

 

가족이 아프거나 자녀가 학업에 문제가 있어도 회사는 오로지 업무만 강조한다. 심지어 택배기사가 다쳐도 대체기사를 구하지 않으면 과태료와 벌점만 부과한다. 그 어떤 문제가 발생되면 모든 책임을 택배기사에게 부과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면 운영진은 무엇을 하는가? 그냥 작은 기계를 주고 배송안내만 한다. 2분만 정체되면 바로 알림이 온다. 택배기사는 사장이란 개인사업자로 시작하나, 모든 책임을 면책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택배기사의 수당은 올라가겠지만, 그 이상으로 회사 주주에게 돌아가는 금액도 크다. 택배기사를 강제로 일하게 만들어 다른 회사와 경쟁하여 승리하는 체계, 이것이 현실이다. 일을 한만큼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일이 정리된 만큼 가져가는 것이다. 노동기준이 8시간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성과품을 내어야 수당이 지급된다. 리키의 아내인 터너는 마음이 아주 곱고 다정한 여성이다. 더 해 줄 필요도 없는 업무내용이나 자신이 맡은 노인들의 신변에 문제가 있으면 토요일이라도 가주는 사람이다.

 

돈인가? 인간성인가? 늙은 한 할머니가 몸조차 가누지 못해 화장실도 못 간다. 소변을 누지 못해 소파 위에 앉아 그대로 옷이 젖고 말았다. 그런데 할머니의 가족은 그녀를 돌보기는커녕 그녀의 집이 얼마나 팔릴 수 있을까? 하는 이익에만 집착한다. 인간의 정도 결국 돈 앞에서 무너지는 슬픈 현실이다. 영화는 인간이 기계보다 못한 현실에 살아가며, 여기에서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이다. 리키가 갱에게 폭행당해 병원의 치료가 필요해도 결국 그는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회사에서 퇴출되지 않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간다. 회사는 그에게 안정을 취하기보단 손해 보는 부분을 메워주기를 바란다.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대장 내 세균성 질환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병원 응급실에 누워 피검사와 CT검사를 할 때 상당히 지쳐있었다. 회사에 출근하기 힘들게 되어 나를 대신하여 부서장에게 연락 해달라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부서장은 내가 아픈 게 걱정하기보단 그냥 병이 뭔지 물어보고 더 이상 통화가 귀찮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고 한다. 퇴원 후, 사실 안정이 필요하지만, 단지 내가 퇴근한다는 것만으로 나와 별 다른 이야기 없이 사무실 다른 사람에게 퇴원 다음날 출근한다는 식으로 전했다.

 

다음날 출근해서 톡이 와서 몸이 괜찮은가? 라고 묻기보단 출근여부만 물었다. 사람이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 사람의 안위부터 묻는 게 상식인지 아니면 회사 또는 부서의 일이 먼저인지는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일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다른 회사에서 현재보다 더 좋은 대우와 환경이 된다면 옮기면 되기 때문이다. 뒤에 나는 여러 마찰로 인해 회사를 옮겼다.

 

영화에서 리키는 나처럼 옮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건축회사에 근무했으나, 회사가 망했고, 이후 각종 건설현장에 갔지만, 상사와의 갈등, 극한 작업환경, 기타 문제 등으로 인해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성실하게 일하고 싶기에 선택한 개인사업자, 하지만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한 허상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일해도 삶은 나아지는 게 없다. 아내 애비는 식사조차 거른다. 이른 불안한 환경에 아이들조차 힘들어한다. 딸은 아직 어리지만 어른 못지않게 생각이 깊다. 하지만 때로는 아이같이 행동한다. 부모가 옆에 없으니 항상 불안해하고 잠조차 잘 이루지 못한다.

 

아들은 공부도 잘하고 영리한 학생이었으나, 아버지의 현실을 보고 낙담한다. 그리고 비행을 저지르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다. 그가 길가에 스프레이로 남기는 그림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누군가 외치고 있으나 서로 그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대화가 되지 않고 공허한 메아리만 외치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다. 아들의 친구들을 보면 리키와 같이 힘든 상황에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들의 여자 친구 하나는 가정불화로 집을 떠나 친구의 친구 집에 떠난다. 다른 친구는 흑인으로 등장한다.

 

리키가 택배를 배송할 때 택배를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 여러모로 넉넉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우리가 처해진 현실은 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발생되나, 막상 그 문제에서 트러블로 마주치는 존재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가진 것도 없고, 항상 외면된 존재, 길가에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개의 다리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온다. 개가 아픈데도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한 채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리키와 리키가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늘 빈곤과 시간이랑 싸웠다. 먹고 살아야하기에 그 모든 것을 버려야 했던 리키, 그렇게도 다치고 운전대를 잡은 리키, 온 가족이 모두 말려도 나가는 리키의 모습에서 현실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 느꼈다.

 

영화 시나리오에서 리키에게 갈등의 대상이 되는 것은 크게 2가지 축이다. 하나는 회사의 운영방침, 다른 하나는 아들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어떻게든 리키가 해결했지만, 아들은 그러지 못했다. 서로 엇갈리고, 크게 다친 리키를 보고 아들과 화해하는 것으로 새롭게 끝날 것이란 모습은 너무 기만적이었다. 아들과 화해하고, 딸의 행동을 보고 다시 옛날처럼 되고 싶어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생계는 이어가야 하고, 누군가 그 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게 우리의 현재 모습이다.

 

내일을 배달되고, 희망을 배달할 수 있는 누구인가? 리키의 마지막은 모습은 참으로 암담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암담하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는 그 암담한 상황에서 눌러앉는 게 아니라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 내기 위해 운전대를 잡는다. 우리의 내일과 희망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100분이지만 순식간에 흘러갔다.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어서 그럴까? 심각한 분위기에 종종 등장하는 축구 만담이 기인하였기 때문일까?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우리 삶을 그대로 비추어준다. 물론 100% 우리 삶이라고 볼 수 없지만, 예술은 삶을 굴절로 통해 본다고 하듯이, <미안해요, 리키>에서 보여준 예술성은 인생은 비극으로 보여도 그래도 희망이 작게나마 있다고 말해주는 희극적 요소를 살짝 곁들여 주며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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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인생 38년! 물론 아버지의 고향은 다산선생의 슬픔이 담긴 강진 도암면이고, 그곳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태어나시고, 증조부가 터전을 잡았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영도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결혼 전까지 영도에서 자랐다. 영도인생 38년, 그동안 영도에서 살면서 느낀 점은 영도는 가난한 동네이다. 피난민들이 많이 모이고, 전남과 제주 각 지방의 가난한 시골사람들이 정착하던 곳이다. 물론 내가 살던 영도 동삼동 일원은 어촌이었다.


지금이야 매립과 개발로 많이 발전했으나 초등학교 시절 통통배가 다니고, 갯벌이 있었고 숲으로 덮힌 곳이 더 많은 곳이다. 가난한 분들이 많아 도개공 아파트도 많고, 태풍불면 휘청거리며, 하수처리장도 생긴지도 얼마 되지 않은 곳이다.


도로도 좁았고 병원도 많이 없었으며, 아버지란 불리는 이들은 육지보단 바다에 나가 거친 삶을 살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북에서 월남하여 거제를 거쳐 평생 영도에서 살고 머물렀다. 나는 가지 않으나 신선성당에서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살았고, 나는 가톨릭신자는 아니나 부산가톨릭대학교를 졸업했다!


아니 부산천주교 교구의 수장이 손삼석 신부님이다. 내가 대학시절 총장님이시다! 기억이 나는 것이 있다. 문재인 국회의원 후보시절 나는 사상캠프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당선 후 우리형이 KTX를 타고 가는 와중에 문재인 국회위원을 우연히 만났다. 같이 사진찍다가 우리형이 영도에서 자라고 학교를 다녔다고 하니 문재인 국회위원이 매우 반가워했다. 


그리고 우리형님은 한국해양대학교를 나왔다. 해사대학 출신이 아니나, 문재인 대통령 형제분이 해사대 출신이다! 우리 작은아버지도 역시 해사대 출신이다. 삼춘과 문재인 대통령 동생이 해양대 다닐 때 같은 해사대 선후배였다! 직접적으로 관계는 없지만 많은 접점이 스치는 것 같았다. 이번에 강한옥 여사님이 영면할 때 깜짝 놀랐다. 형이 갑자기 톡이 와서 강한옥 여사님의 소천소식을 나에게 보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에 왔다. 중구에 있는 병원이라 하여 가톨릭신자이니 분명 메리놀병원이라 여겼다. 어머니와 전화하며 오늘 KBS노래교실에 갔는데 KBS 옆에 남천성당이 있다는 것을 이제 제대로 알았다. 거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오셨고, 강한옥 여사님의 마지막 육신이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나는 가톨릭신자는 아니나, 초기 한국천주교회사 쪽으로 보통 가톨릭신자보다 많이 공부한 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아닌가? 정약용 선생의 바로 위의 형님이신 정약종선생과 정약종 선생의 따님 2분은 천주교에서 위인이 아닌가? 정약용 선생의 이종사촌형님인 윤지충은 한국 최초 가톨릭순교자가 아닌가?


정약용선생의 친구와 그리고 친구 아들은 사위가 되었다. 정약용 선생의 아버지의 친구가 정약용 선생 친구 아버지였다. 그분은 당시 내 할아버지의 친척이었다. 지금도 다산 선생의 사위의 후손과 우리 집안문장과의 왕래는 계속되고 있다(파시조 세사를 시골에서 계속 지내고 있으니).  


어째든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나, 이런 우연의 산물 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연결고리가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버지에 의해 삶의 가치를 많이 받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진짜 못먹고 못살고 못배워 무시당하고 억압당한 하층민의 원한을 고스란히 나에게 넘겨주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자식은 부모라는 존재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려운가보다. 


운명이란 서적을 봤을 때, 강한옥 여사님의 이야기를 보았고, 종종 뉴스에서 영도에서 그저 소탈한 영도할머니로 살아가는 강한옥 여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를 넘어 증조할머니, 외증조할머니인 강한옥 여사님, 나이가 90이 넘어도 자식에게 손자들에게 슬픈 것은 슬프게 다가온다. 영도츨신 사람으로서 영도에서 할머니로 살다 세상을 떠나신 강한옥 여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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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리커버 특별판)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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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았다. 언더그라운더들의 인생. 우리가 모르는 세상, 르포르타주적인 영화
따듯한 눈으로 차가운 이 세상에서 살만하다고 말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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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고>란 영화감상평을 보니 이런 글이 있었다. 천우희씨가 혼자 거의 진행하고 다 끝낸 것 같다고 말이다. 솔직히 천우희씨가 이 영화의 모든 키를 잡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천우희씨가 그 정도의 역량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버티고>보다는 <한공주>라는 영화를 보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거기서의 천우희씨의 연기는 영화 그 자체를 응집하고 있는 여고생 캐릭터로 나온다. 내가 천우희씨의 영화팬이 된 이유도 바로 <한공주>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력이다. 천우희씨의 연기 특징은 깊은 아픔과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응축하여 그 부분이 결국 폭발할 때의 비극성이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면 밀양여학생 성폭행 사전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주인공 한공주는 낯선 학교에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오나, 결국 미디어에 의해 노출되고, 새로 전학 간 친구와 학급 학생들도 외면한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최악의 선택은 자살이었다. 수영을 배운 이유가 물에 빠져도 50m 정도 헤엄치면 살 수 있는데, 그녀는 결국 수영하지 못한 채 수면위에 둥둥 부유한 채 맥없이 흘러간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면서 상당히 무겁고 답답한 영상미에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영화는 허구의 이야기지만, 사실의 이야기를 재편집하여 새로운 하나의 현실성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한공주> 특성상 집단성폭행을 당한 여학생은 그렇게 흔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고(절대 흔해서는 안 될 이야기다), 매우 독특한 상황에 놓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관객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보편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면 <버티고>는 어떤가? 어떤 극단적 상황이라도 영화에서는 개연적 상황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우연히 마주친 게 단순히 발전하는 게 아니라 우연의 산물이 연속적 조우로 인해 큰 결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버티고> 주인공 서영은 매우 흔하고 흔한 인물이다. 지방에서 태어나 수도권에 왔으나,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사원이고, 재계약이 다가오지만, 다시 재고용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앞선다. 게다가 사내연애 대상인 진수는 서영을 사랑하기 보단 그저 자신의 욕정에 채우는 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만일 은밀한 성행위와 혹은 돌출적 성행위를 하려면, 선팅이 잘 된 차 안에서 하거나 혹은 행사가 끝난 후 따로 모텔에 가면 될 사항이다. 하지만 진수는 서영과의 성행위를 회사 휴게실에서 하고, 또는 산행장소 인근 건물에서 한다.

 

단순히 자신의 쾌락적 상황에 만족하기 위해서이다. 산행의 경우 화장실에서 남성 동성애자들의 애정행각을 보고 충동적으로 성행위를 한다. 그리고 진수는 자신의 직업적 위치에 대한 역할과 성공을 위해 일에 몰두하고, 서영은 자신의 삶의 중심이 아니라 그저 주변조건처럼 대한다. 서영이 진수에게 매달리는 이유는 그가 능력도 있고 인물도 좋지만, 유일하게 회사에서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직장 내 계약직은 항상 불안하고, 입사동기인 예담은 다음 재계약에서 누락된다.

 

서영이 집에 오면, 집이란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어머니의 참견이 시작되는 장소이다. 회사에서는 업무가 있어 간섭하지 못하나, 집에 오면 괜히 전화해서 하소연을 풀거나 또는 용돈이 필요한 것을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새벽에 강아지가 태어난 이유로 전화할 이유는 없다. 돈을 빨리 붙이지 않아 그녀를 귀찮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남편과 이혼 후 다른 남자와 재혼하여 살아도 잘 지내지 못해 수도권에서 자취하는 딸의 집까지 찾아온다. 서영은 직장과 집 모두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사람이 어딘가 편안하게 있지 못하면 매우 불안하다.

 



<버티고>는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있어도 그 장소가 자신에게 불편하거나 또는 외부인처럼 만드는 감옥 같은 곳이다. 게다가 서영은 어릴 적 아버지에 맞은 후유증으로 한쪽 귀가 불편하다. 고막이 손상을 입어 청각능력에 큰 문제점으로 다가왔고, 게다가 귀에 있는 진정신경의 불안함은 구토와 어지러움, 공간적 장애까지 일으킨다. 재계약 문제로 보청기착용도 망설이는 서영의 모습에서 비정규직, 장애, 고독, 독신여성 등 다양한 아픔이 겹친다. 그녀가 버틸 수 있는 이유가 현실에 없다. 자신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가 오늘 하루도 몹시 흔들렸지만 잘 견뎌냈다. 거리는 튼튼하니 이제 안심이다라는 것은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그런 서영의 삶에 들어온 자가 관우이다. 그의 집은 가난한 편이고, 늙은 아버지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불편하다. 로프에 몸은 의지하여 창문을 닦아내는 모습은 위태로우며, 집에 와서 강아지를 안고 여성 유튜버 방송을 열심히 본다. 서영의 상실감은 버틸 수 있을 곳이 없다면, 관우는 버틸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누군가를 버티게 하지 못했다는 미련이 있는 남자이다. 그가 왜 서영에게 이끌렸을까? 창문을 닦는데 자치 위험한 상황을 보자 서영은 매우 놀란다. 그저 창문을 닦는 노동자에게 어느 누가 관심을 보이는가? 자신에게 그런 관심을 갖은 서영에게 관우는 호기심을 느끼고, 우연히 회의실에서 마주친 그들은 서로에게 눈을 뗄 수 없다.

 

특히 서영은 단지 로프 하나로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관우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자신은 안에 있으면서 의지할 곳이 없다고 봤으나, 관우는 의지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로프에 관우 그 자체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대비적이다. 관우는 창문닦이 아르바이트 이외에 서점 입구에서 피에로 분장을 하고 난간위에 앉아있다. 난간 위에서 서영의 모습을 지켜보고, 창문을 닦으면서 서영을 바라본다. 관우는 왜 서영을 그렇게 지켜보고 싶은 것일까?



 

관우는 하사시절 우연히 휴가를 나온다. 누나가 생일이라 누나가 자취하는 집에 가서 케이크를 들고 간다. 누나가 인터넷 방송을 하려고 한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누나는 죽어 납골당에 모셔져있다. 누나 왜 죽었는지 모르나, 적어도 그녀가 병으로 죽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여자 유튜버 방송을 보는 관우를 보면서, 옆에 와이프가 관우의 누나가 죽은 것은 악플러의 악플이 아닌가 라는 말을 했다. 생각하니 관우가 보던 유튜버 방송에 여자BJ가 덧글창에 이상한 말들이 나온 것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납골당에 관우가 아버지를 모시고 가고, 아버지가 누나의 납골함을 보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한다.

 

관우가 유튜버 방송을 볼 때 안고 있던 강아지는 사실 누나가 키우던 강아지였다. 누나가 이루지 못한 그 꿈은 다른 유튜버로 통해 일시적으로 위로하고, 누나의 강아지를 만지면서 누나와의 기억을 공유한다. 그런 그에게 서영이 나타난 것이다. 위태로운 서영, 그런 모습을 보면서 관우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을 새롭게 채울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서점서 책을 나두고 간 서영의 책을 찾아주거나, 눈물 흘린 서영을 보며 손수건을 책상에 나눈다. 서영이 술에 심하게 취해 자신을 거의 포기한 상황에 처하자 어떤 낯선 남자가 서영에게 손대려 할 때, 관우는 서영을 지켜준다.

 

그가 서영을 지켜주고 싶은 이유는 남성이 여성에 대한 사랑도 있지만, 서영에 무너지는 모습에 자신이 그저 가만히 주저앉기 싫었던 것이다. 서영은 버틸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나, 관우는 자신이 누군가가 버티게 해줄 수 있는 게 자신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히 로맨스적인 요소보단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감정의 영역이다. 작은 존재로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따듯한 눈으로 연민의 정을 건네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서영이 위기에 처해질 때도 그렇다. 이차장은 CCTV에서 자신이 한 행동으로 사직을 당한다. 단순히 서영만 성행위를 했다면 사내연애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지만, 남자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서영은 무엇이 되겠는가? 이미 사내에 소문이 퍼져 서영은 아무도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은 채 고립된다. 그런 서영에게 관우는 창문에 힘내요라는 세 글자를 적는다. 서영은 그것을 보자말자 눈물이 넘치는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천우희씨의 연기는 여기서 빛을 발한다. 매우 우울한 모습, 홀로 괴로워하는 모습, 열정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에서 <버티고>의 명장면이 드러난다. “힘내요라는 글자는 서영에게 매우 드라마틱한 요소이다. 창문을 닦던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한다. 그 사망자가 관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한 서영이 힘내요라는 글을 보는 순간 자신이 혼자가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자신을 재계약하는 조건으로 성폭행하려던 권차장의 위험에 빠지자 관우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관우가 자신을 계속 지켜본 것을 알고 있던 서영은 관우에게 찾아가 관우가 일하고 있는 세상을 보려 한다. 해가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빌딩 안에 갇혀 발버둥을 치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빌딩 밖에서 로프를 매달린 채 세상을 보는 게 더 행복해 하던 서영이다. 서영은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도 모진 말을 했다. 서영은 자살을 하려고 했으나, 안전로프에 의해 공중에 매달려 있었고, 관우는 그런 서영을 끌어올리며, “괜찮아요. 당신은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서영은 관우에게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며, “이제는, 올라가고 싶다.”라고 독백한다. 그녀가 관우가 일하는 빌딩의 창문은 죽음을 택하려 했다. 내려가고 싶은 것은 결국 땅에 떨어져 죽은 청소노동자처럼 죽음을 선택한 것이고, 키스를 하고 올라가고 싶은 것은 다시 살기 위해 삶의 목적성을 찾을 것이다. 영화는 보는 내내 서영의 관점에서 카메라가 돌아간다. 어지럽고, 낯설고, 외롭고, 내몰린 그녀에게 석양이 지는 저녁노을은 아직까지 이 힘든 세상이라도 살아갈 수 있는 동아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서영이 같은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서영이 처한 현실에 대해 크게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없다면 어떤가? 외로움과 슬픔, 괴로움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자신을 알아주고 봐주며,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아직까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처한 불행은 자신의 문제일 수 있지만, 나의 의지와 다르게 닥치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자신에게 있어도 남의 문제로 돌리는 경우도 많다. “나 때문이야!” 또는 너 때문이야!”에 매몰되기보다 때로는 괜찮아요?”라고 물어보며 작은 위로를 전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우리의 삶은 작은 위로조차 받을 수 없는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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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이란 영화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에 나온 영화로 기억난다. 나이가 어려 보지는 못했으나 배트맨이라는 이슈는 개그프로그램 맹구 역할을 맡은 분이 흉내 내던 장면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배트맨이란 영웅이 있으면, 그 영웅성을 만들게 하는 요인이나 존재가 필요하다. 그 인물이 바로 조커이다. 배트맨 시리즈를 잘 모르던 나에게 이번 <조커>라는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 점은 마블과 DC출판사의 특성이 다른 점을 알아도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딱히 마블이나 DC영화 또는 만화에 관심이 없지만, 마블계통인 <스파이더 맨>을 보면 이분법적인 관계성이 명확하나, DC는 뭔가 미묘한 점이다.

 

가령 <X-man>의 악당 보스라고 해도 그는 나름 철학을 가지고 있고, X-man을 총괄하는 박사와도 친분이 있던 자이다. 단순히 이분법을 나누기보단 더 기묘하고 복잡한 세상만사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 DC만화의 특성이라 종종 들었다. 과연 <조커>를 보면서 확연히 느꼈다. 영화의 특성이나 혹은 배트맨 시리즈에 대한 정보를 제외한 영화 그 자체를 보면 영화 속의 배경은 20세기 중반 전후인 듯하다. 자동차 디자인과 건축물 구조, 그리고 지하철이 있다는 점에서 20세기 초반은 아니다. 영화를 보면 고담시는 전형적인 공황경제 상황에 놓인 시기인 것 같았다.

 

우선 일자리가 많이 없다는 점, 돈이 잘 벌리지 않은 점, 처음 아서가 일하는 장면이 폐업하던 점포 앞에서 홍보하는 모습이다. 가게가 접는다는 것은 경기의 불황이고, 물건을 다 정리하는 것은 시장의 여건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장의 불경기는 뒤로 가면 지방정부의 예산도 연계된다. 영화 초반에 고담시는 미화원의 파업 18일째로 거리가 온통 쓰레기로 차 있고, 쥐와 같은 비위생적 동물이 거리를 활보한다. 쥐가 시궁창을 돌아다니면 흔히 페스트라는 질병을 옮기는 감염원이 된다.

 

병든 도시에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세계는 엄격하다. 영화 <조커>에서 바로 고담시란 존재는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란 사회의 암울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처음 의아한 점을 느꼈다. 아서가 동네 깡패 청소년집단에게 구타당할 때 가해자들은 흑인이고, 자신이 일하던 곳의 오너는 흑인이었다. 영화에서 아서는 전형적 백인이나, 그는 백인의 세계가 아닌 흑인의 세계와 가까이 있었다. 영화에서 백인을 억압하는 흑인? 그건 영화의 전개상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가 살던 집에 가니 엘리베이터 앞에 어느 젊은 기혼흑인여성과 아이가 있었다.

 

아파트는 오래 되어 낡았으며, 방음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중에도 전원공급이 불안해서 잠시 멈추기도 한다. 본래 백인이 사는 구역이 아니라 흑인이 사는 구역이다. 아서는 흑인에게 당하는 자가 아니라 흑인들이 살아가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백인이다. 겉은 하야도 사회적 지위는 검은 색이다. 그가 검은 색으로 살아야 한 이유는 가난도 있었지만, 사회적 권력이 만들어낸 도덕의 모순이다. 어머니 페니는 몸이 불편한 노인이다. 그녀도 정신적 질환으로 입원기록이 있고, 병원에서 어머니의 기록을 보면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세상의 말과 그녀의 말, 누가 진실인가? 어머니는 자신이 30년 전 근무했던 토마스 웨인의 가정부로 일했다.

 

그녀의 편지를 읽지 않은 아서였으나, 그녀의 편지를 읽을 아서는 진실과 거짓, 윤리와 도덕의 의문을 가진다. 약을 끊어 환각에 시달리나, 적어도 그는 인간이란 윤리적 감정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뒤에 가면 어머니의 젊은 사진이 보인다. 아름다운 금발의 미소 지은 그 사진 뒤에 어떤 메시지와 2글자의 알파넷이 있다. 알파펫은 이름의 이니셜이고, 그것은 토마스 웨인을 뜻하는 것이다. 가정부란 사회적 약자 또는 노동자, 토마스 웨인이란 은행지점장이란 거부는 엄청난 계급차이가 존재했다.

 

가정부와 사랑보단 가정부에게 향한 불장난이 조커가 만든 계기였다. 영화에서 조커는 살인을 저지르고, 무질서를 만들며, 군중을 선동하지 않았지만 선동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글과 그림을 보며, 아서의 입장을 관찰한 게 있었다. 아서는 프롤레타리아, 그녀의 어머니도 프롤레타리아였다. 가난에 의한 문제도 있지만, 가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회적 시스템이었다. 아서가 다닌 상담소의 상담원은 그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그저 귀찮은 존재로 여기며, 아서는 자신 안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우울을 견디기 위해 우울증 처방만을 요구한다.

 

정부예산이 삭감되며, 상담프로그램과 의약지원까지 없어지고, 아서에게 남은 것은 점점 사라진다. 그가 정신병을 가진 이유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직장 내에서 그의 입지는 무척 어려우며, 진실을 말해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는 결국 해고된다. 그가 분노를 느낀 것은 흑인 갱에게 폭행당하는 것보다 그 사실을 믿어주지 않은 사회였다.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진실은 분명해도 사실을 다른 식으로 전달된다. 사실을 판단하는 것은 그 사건의 진실성보단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편한 방식만 취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본다면 국가의 안전망에서 축출되고, 직장이란 공간에서 경제적으로 축출되었으며, 자기가 도전한 발언묘기조차도 조롱거리 수준으로 떨어진다. 머레이쇼에서 머레이는 아서의 노력을 그저 조롱거리로 만들었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그가 조커로 변한 이유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어머니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환상이다. 아서는 고급영화관에 찾아가 토마스 웨인에게 아버지라고 말하며,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 한 번 아들로 인정하여 안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토마스 웨인은 주먹을 그에게 날린다.

 

아서가 어머니를 죽인 이유는 국가와 직장 그리고 미디어란 공간에서 버림받았는데, 이제 가족까지 버림을 받았다. 자신의 존재성 자체가 모조리 부정당한 것이다. 조커의 탄생은 그렇게 시작했다. 아서는 정신병은 있으나 그 누구에게나 나쁜 짓을 하거나 악의를 가질만한 사람이 아니다. 원래 흑인여성 소피에게 성적인 관심은 있었으나, 그보단 사랑이 원했다. 단지 사람으로 봐주길 바란 것이다. 영화에서 그렇고 누군가 글을 쓴 것도 그러하나,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는 아서는 현실의 세계를 버티며 자신을 억누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커 분장으로 내려올 때 아주 신난 얼굴로 춤을 추며 내려온다.

 

갈비뼈가 심하게 보일 정도로 말라 기력이 없어보였지만, 약물의 과다복용으로 인해 조커가 된 아서의 모습을 활력이 넘쳐 폭발한다. 그의 폭발은 단순히 아서가 조커가 되기로 했기 때문일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대규모 시위현장이 나온다. 그 시위는 아서가 은행직원 3명을 죽인 이후의 현실을 보여준다. 아서가 그들을 살해했지만, 은행원은 부르주아 세계에서 경제적 지배계급에 속했다. 임금의 불평등, 경제적 불평등, 게다가 시장에 나온다는 토마스 웨인의 정책발언은 현실성을 고려한 게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권력자들의 헤게모니에 알맞은 이데올로기만 고집한다. 조커는 단지 그런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인생패배자들 중 전환을 일으킬 발화점에 불과했다. 조커는 개인적으로 인간을 살해했지만, 조커의 행위에 열광하던 사람은 그 사회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조커가 바라보는 아버지란 공간, 즉 지배세계란 질서를 말하고 있으나 질서란 명분 아래 하부계층은 무질서한 혼돈만 빠진다. 하부의 혼돈의 과밀화는 상부로 이어진다. 방화와 약탈,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도시를 보며, 조커는 신이 난다. 체포과정 중 다른 폭도에 의해 탈출한 조커가 자신의 피로 피에로의 입술을 그린다. 붉은 피에로의 입술은 물감으로 그리나, 그의 입술은 피로 그려진다. 피에로는 누군가 웃기기 위해 붉게 칠하나, 아서는 자신이 웃기 위해 붉게 칠한다.

 

흔히 DramaComedy는 비극과 희극이라 한다. 드라마 천국의 한국에서 드라마는 전혀 드라마가 같지 않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넘친다. 망상 속의 이야기는 드라마가 아니라 코메디에 가까울 때가 많다. 본래 드라마란 비극은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과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코미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과 기쁨을 만들어낸다. 이와 다르게 실제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관객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희열감에 빠져든다. 희극인 코메디는 관객이 웃으며 자신도 웃을 수 있겠지만, 관객이 웃지 않으면 그는 울어야 한다.

 

웃기지도 않을 코메디를 비웃음거리가 되었기에 아서는 우울증의 웃음과 분노를 둘 다 자아낸다. 영화 <조커>에서 아서는 분명 악당이 되었고, 그가 한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서에서 조커까지 되는 과정은 그 사회가 만들었다. 범죄를 잡는 것보다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 현재 우리 상식이다. 하지만 그 상식의 범주까지 자리를 잡기가 쉬운 게 아니다. 범죄는 당장 눈에 띄나, 예방은 바로 성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범죄자가 자라온 환경을 보면 대부분 불우한 생활이 있었고, 그의 입장을 동정 받을 일들이 있다. 그가 저지른 범죄를 보는 게 아니라 그가 지금의 그로써 존재케 한 그 본질을 봐야 한다.

 

세상의 모순은 본질을 찾는 게 아니다. 본질을 찾게 되면 그 규명자체 어렵고, 비용소모가 많이 들며, 때로는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많기에 대부분 외면한다. 낙오자를 외면하는 일만큼 쉬운 게 없다. 그들은 어떻게든 항변할 수 있는 위치나 입장도 되지 않으며, 설사 한다고 해도 묵살하면 그 순간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이나 소재는 이미 충분히 세상에 널려 있다고 한다. 단지 <조커>는 그렇게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상당히 긴장감 넘치게 보여준다는 게 묘미이다.

 

처음에 아서가 상담하는 과정에서 병원 안과 병원 밖에서 어디가 좋은지를 듣는다. 아서는 감시와 창살이 없는 밖의 세상보다, 병원 내부에 갇혀있는 게 더 좋다고 한다. 정신병자 환자들이 답답한 안의 공간보다 밖이 좋을 것인데 왜 안을 택하는가? 광인에게 세상은 친절하지 못하다. 병원은 광인을 위한 공간이나, 밖은 그렇지 못하다. 아서는 질문을 받는다. 은행원 3인을 살해할 때 죄책감이 없냐고? 머레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가 살인이 범죄라는 점을 몰라서가 아니다. 애초부터 은행원 3인이 한 행동이 잘못되었고, 거기에 억압당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지하철 장면이 가장 핵심이다.

 

강한 자들의 행동과 발언이 하나의 법칙이고, 정당성을 부여 받는다면, 거기에 억눌리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밟히거나(어머니 페니), 아니면 저항보단 반항(조커)을 하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게 아니다. 반항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위가 무질서한 것이다. 저항을 한다면 무질서가 아니라 절도가 있어야 한다. 반항적 행위와 시위는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감과 정책성의 문제이다. 삶 그 자체의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과 그 안에 처해진 입장에서 비롯한 문제이다.

 

페니가 죽은 후 전 직장동료가 아서의 집으로 찾아온다. 이때 아서는 랜들을 살해해도 옆에 있던 난쟁이 게리는 그냥 보내준다. 살인자들은 증인들의 입막음을 위해 같이 살해하나 아서는 그렇지 않았다. 게리가 아서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이다. 랜들은 법적으로 아서에게 큰 죄를 짓지 않았다. 물론 머레이도 그러하다. 하지만 아서는 예의가 없는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칼과 총을 겨눈다. 물론 은행원 3인도 그렇다. 영화는 도덕적 가치 즉 법적인 사회질서보단 인간의 윤리적 가치를 중시한다. 도덕이 존재하는 세계에 윤리는 존재하나, 윤리가 붕괴된 세계의 도덕은 이미 파멸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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