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한걸레라고 하고, 한경오의 큰형인 한겨레에서 기사를 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43734.html?_ns=t0


워마드 회원이 바로 홍익대학교 회화학과 누드수업에서 남자모델의 알몸을 촬영해서 인터넷에 유포한 것이다. 만일 그 남자가 포르노 배우나 성인비디오 전문배우라면 어느 정도 감안할 수 있지만, 그런 직업과 무관한 사람이다. 

예전에 내가 계속 메갈리아 워마드에 대해 이건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거론했지만, 나에게 돌아온 덧글을 보면 참 무례하고, 비판적이지 못한 글이 많았다. 

남녀문제를 두고 아직 여성에 대해 사회적 부조리가 많은 것을 알지만, 그것을 빌미로 이런 행위를 정당화한 것에 대해 반성이 없다면 더 나은 사회는 없다.

한겨레에서 지적한 내용은 이미 내가 그전에 블로그에 올린 내용들이다. 꼬리자르기 식의 기사를 보면서 이제사 우려먹기를 다른식으로 전환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연세대학교에서 남학생들이 단체 카톡으로 음란행위를 일삼아 퇴학조치를 당했는데, 이건 어떻게 정리될지 모르겠다. 이런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고 눈을 돌린 지식인과 페미니스트 학자들, 그들이 예전에 워마드를 지지발언을 한 점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하다.


어떤 사람은 그 누드모델의 몸이 빈약해서 그런 것을 보여준 게 오히려 여학생에게 실례라고 하니 정신건강이 참 의심스럽다. 누드모델의 기준은 모르나, 현대미술에서 미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른 가변성과 다양성 그리고 추의 미학도 존재한다. 미의 가치와 인간의 가치의 차이를 밟는 자들이 설치니 스스로 진보의 길을 몰락시키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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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5-09 09:49   좋아요 1 | URL
혐오에 대해서는 조롱으로 회극화 해야지.
저런 혐오로 누군가를 비극으로 만드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찍는 것도 그렇고, 올린 것도 그렇고, 거기에 조롱도 그렇고...

전에 20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병과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나는데
거기에 조롱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자기 안의 악마를 보지 않는
인간의 무서움이 두렵습니다.


cyrus 2018-05-09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무조건 메갈리아와 워마드를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홍대누드 사건’을 미러링으로 보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미투 운동의 관심이 떨어지고 있는데, 이 사건 때문에 페미니즘과 미투 운동에 대한 비뚤어진 인식이 확산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5-09 12:45   좋아요 3 | URL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분명히 메갈리즘과 페미니즘은 다르다고 했고, 정희진 교수같은 분들이 정말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페미니즘 관련하여 메갈리아 사태를 두고 펼쳐온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들 스스로가 반성하고 이 문제를 두고 어떤 반응을 보여주느냐가 제 관심사입니다.

예전에 그렇게 정리해도 그런 점을 보고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역정내는 분들도 있었죠. 페미니스트라고 다 메갈리아를 지지하는 게 아니나, 주류 내지 진보언론사들이 저기에 편승해여 계속 방치하다 이제 등 돌리며 마치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뻔뻔함에 그저 한심하게 여길 뿐입니다.

메갈리아 워마드가 미러링으로 계속 대응한다고 했지만, 이미 미러링의 차원을 넘어선지는 옛날이라 봅니다.
 

최근 헌법이 개정을 준비하려 한다하지만 헌법이 정말 개정될지 얼마나 그 취지에 맞게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른다헌법전문에 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민중항쟁을 상기시키려 한다대한민국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로 시작하여 419혁명만 아니라 518의 아픔까지 담으려 한 점이다최근 43사건에 대한 재판단이 이루어지려 한다. 43사건 당시 수많은 제주주민들이 학살당하기 때문이다한국의 역사는 민중에게 거의 학살과 착취 그리고 모욕의 역사에 가깝다가진 자와 권력만 추구하는 자에게 한국 그리고 조선은 철저하게 유린 당해온 것이다.

 

최근에 읽은 <호남의 한>과 <지워진 이름 정여립>에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기축옥사는 조선시대의 광주사태다광주사태란 결국 518민주화 항쟁을 의미한다광주민주화운동을 군부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광주시민은 군인들의 총칼에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지금도 그 가해자들은 어둠속에서 당시 피해자를 모욕하고최초 발포명령자는 나오지 않아 유족들은 그 원한에 사무쳐 매년 5월만 되면 그 고통의 눈물에 이기지 못한다나이가 60이 되어도 80이 넘어도 눈가에 투명한 피가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20세기 광주의 비극은 그때만이 아니라 이미 16세기 조선에도 있었다이 일은 모르는 이들에게 상관없지만그 땅에 살아온 자이나혹은 그 땅에서 살아온 후손에게 여전히 내려오는 하나의 역사이며 신화이다무의식적 속에 내려온 울분과 억울함에 현세에 나타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2018년 제주 43사건에 대한 추모영결식 기사를 보았다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서북청년단과 군경의 총칼에 잃은 분의 사연이 나왔다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아버지와 함께 죽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비극은 나이 60 중반의 할머니의 가슴을 찌르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한이란 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본인만 아니라 후손까지 이어진다한이란 그런 것이다가족들과 후손은 평생 불순분자 내지 역적그리고 빨갱이란 이름을 받고 살아가야 한다기축옥사 역시 그렇다돌아가신 아버지는 송강 정철에 대해 무척 나쁘게 생각했다그리고 윤한봉이란 인물이 무척 독한 놈이라 했다송강 정철은 선조시대 활약한 정승이고윤한봉은 518 운동의 수괴로 지목된 인물이다송강 정철은 조선시대 서인의 영수이고윤한봉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시절 괴수로 지목된 인물이다.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기축옥사나 518 모두 전남지역에 큰 상처를 주었고조선시대에는 역적이 나오는 곳이 호남이고, 20세기에는 반국가세력이 출몰하는 곳이 호남이다호남의 한은 쉽지 않은 모양이다우연히 어머니 친가인 장흥을 방문할 때 어느 산이 큰 공사를 단행하고 있었다그 공사가 끝나서 알고 보니 동학운동을 하던 농민을 기념하던 곳이었다호남은 농민의 착취와 눈물이 어린 곳이고정약용 선생이 강진 만덕산에서 유배할 적에 불쌍한 백성을 보고 그 안타까움을 잊을 수 없어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를 남긴 곳이다.

 

애절양이란 시는 이미 죽은 시아버지갓 태어난 사내아이가 군적에 올라 세금을 바치라는 관아에 횡포를 고발하는 시조이다군납을 납부하지 못해 농민의 소를 끌고 가는 바람에 사내는 그 울분을 참지 못해 자신의 성기를 칼로 도려내고아낙네는 자신의 남편의 성기를 잡고 관아에 가서 제발 군납을 제대로 해달라고 했지만돌아오는 것은 사나운 관졸의 목소리였다갈밭의 아낙네는 피가 철철 흐르는 남편의 성기를 잡고 그저 눈물을 흐르며 집에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불과 200년 전의 사연이나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그 정도로 착취가 심한 곳이 호남이다호남의 곡창지대는 탐관오리에게 재물을 늘릴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다산이 처음 강진에 올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고 천주학쟁이라 하여 두려워했다하지만 점차 마을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고다산의 자신의 친구와 외가의 먼 친척의 도움으로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다다산초당산장의 주인은 윤구로의 아버지 윤단이었다윤단은 관찰사와 안동도호부사를 지낸 행당공 윤복의 후손이었다윤단의 손자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였고윤단의 선조인 윤복은 귤정공 윤구의 동생이었다윤구의 후손 중에 고산 윤선도고산 윤선도의 후손 공재 윤두서공재 윤두서의 손녀는 다산 선생의 어머니다다산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를 해도 그나마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그리고 다산의 오랜 친구이며 사돈인 윤서유는 다산의 외가 조상 윤구의 아버지 어초은 윤효정의 형님인 윤효례의 후손이었다지금도 재미있는 일화지만다산 정약용 선생의 업적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나주정씨의 영광이기도 하지만한편으로 해남윤씨의 영광이기도 하다다산 선생이 친구이며 사돈인 윤서유의 묘비명을 작성했다그 묘비명에서 윤서유는 남인이기 때문에 박해를 당했다는 말이 나온다즉 정약용 선생과 윤서유그리고 다산초당의 주인은 모두 남인의 세력인 것이 나온다남인이 왜 중요한가?

 

다산 선생은 호남에 유배할 때 사류의 기운이 모조리 죽었다고 한다남도를 대표하는 사대부 가문은 3~4 정도이고그 나머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했다남도의 사류들이 몰락한 배경은 어디에 있는가그것은 기축옥사로부터 시작된 점이다다산초당의 주인인 윤단의 10대조 윤복은 안동도호부사를 역임할 때 퇴계 이황 선생과 교유를 나누었다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퇴계 선생 문하로 보냈다퇴계 선생 문하에 이름난 인물로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 선생이 있다이들은 모두 퇴계의 수제자이기도 하나한편으로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와 초유사로 활약했다.

 

그리고 윤복의 아들인 윤단중과 그 후예들은 임지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했다윤단중은 이순신 장군과 교분을 가지고 있었고그의 8~10촌 숙부 내지 형제들도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거나 의병으로 활동했다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적은 왜군만 아니라 조정의 당쟁이었다최근 읽은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읽으면 원균과 서인세력의 견제가 결국 이순신으로 하여금 경질되게 했던 원인으로 나온다그리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활약한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은 학봉 김성일 문하생이란 점도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주변 무관도 서인 내지 동인의 여력이 미치겠지만대부분 동인 특히 남인에 가까운 인물이 많은 점을 알 수 있다임진왜란 당시 의병도 역시 서인과 남인 그리고 북인으로 갈려 활약했다서인으로 조헌과 고경명최경회 같은 창의사들이 있었고북인으로 곽재우와 정인홍 같은 사류도 있었다당쟁은 의병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서인과 동인으로 갈려져 지휘체계가 구성되었다이 모든 원인은 기축옥사의 영향이었다기축옥사 당시 가장 활약한 의병으로 곽재우가 있다곽재우는 남명 조식 선생의 마지막 제자였고그의 아내는 남명 선생의 외손녀였다게다가 남명 선생의 제자인 최영경과 정인홍 그리고 김면과 김우옹과 친분을 나누었다기축옥사 이후 최영경이 죽고정인홍이 파면되고남명학파 모두가 화를 입자 의령에 은거하다 정암진에서 왜군을 소탕했다.

 

최영경은 학문의 수준이 높았고언제나 고고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그가 화를 입은 송강 정철이 자신과 만나기 원했지만송강이 주색이 강하고 성품이 너무 급하므로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가난하지만학문에 깊은 뜻을 둔 최영경은 기축옥사 당시 옥사를 치르다 죽고 만다그것도 농사만 짓던 동생이 먼저 억울하게 죽어 병을 얻게 되면서다기축옥사의 억울함은 동인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특히 남명학파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다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이유도 역시 정인홍을 비롯한 조식 문하생들이 서인에 대한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다.

 

남인 역시 원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최영경은 조식 선생만 아니라 퇴계 선생에게 학문을 연결되고퇴계의 문하생 조대중 역시 기축옥사 당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 중에 하나이다더 심각한 이유는 동암 이발과 그의 동생 이길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고문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기축옥사는 1589년에 일어났고이미 7갑자(420)이 지났지만그 한은 호남에서 사라지지 않았다아버지가 왜 정철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을까?

 

오항녕 교수는 나름 설득력이 있는 말을 했지만그 말 자체가 설득이 없다기축옥사에 대한 기록에서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의 사료를 언급했다고산 윤선도의 고모할머니는 동암 이발의 어머니다자신의 집안에 화를 당해 그 원한으로 기축옥사를 추측했다는 말 자체가 논리모순이다자신의 책에 기축옥사 때 화를 당한 동암 이발의 가문 광산이씨의 족보 관련도서에 고산의 후손 윤영선 전 광주시장이 서문을 적었다는 내용을 언급한다중요한 사실 중에 하나가 동알 이발이 태어난 곳은 윤선도의 고향인 해남 연동마을이기 때문이다윤선도 본인은 서울 명례방(명동성당인근에 태어났지만동암 이발은 해남윤씨 득관조 어초은 윤효정이 살아있을 때 태어난 분이다.

 

21세기가 도래해도 광산이씨 문중이 해남윤씨 문중과 서로 교유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다강진 도암면 강정리에 있는 해남윤씨 추원당은 고산 윤선도가 만든 제각이다그곳은 고산의 현조부(5대조)와 그 선대(6대조)를 위해 만든 곳이다여기에는 해남윤시 목각족보가 보존되어 있다강진에는 수암서원이라 하여 동암 이발을 모시는 서원이 있다강진은 동암 이발을 모시는 서원이 있지만이발의 외가 식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이발의 어머니의 남동생인 윤의중은 귀양가던 중 사망했고그는 윤선도의 할아버지다그리고 윤의중의 사촌형제는 윤단중이다윤단중은 퇴계의 문하생이다조선시대 친인척들은 가까운 고을에 모여 살았고설사 조금 떨어져도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서 정철에 대한 원한이 깊이 남은 이유도 그렇다기축옥사 일어나던 시절 고산윤선도는 이제 어린아이지만내 직계 할아버지는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고고산 선생과 10촌 형제다지금의 10촌은 멀겠지만조선시대 10촌은 무시할 수 없다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연루된 인물 중에 병조업무에 밝은 정언신이 있었다그는 정여립의 9촌 숙부란 이유로 고문당한 후 귀양 가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정언신이 없었다면 이순신의 앞길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족보를 읽으면 기축옥사 이후로 벼슬에 나가는 사람이 많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다.

 

기축옥사 당시 이발의 외가인 점에서 이미 큰 화를 당했고그 원한은 현세까지 이어진 온 셈이다오항녕 교수의 책에서 간과하는 점은 지금도 후손이 정철이 원망하나그것을 너무 작은 것으로 다루는 점이다추국과정에서 팔순 넘은 노모와 이제 10살 채 되지 않은 아이가 고문 중에 죽은 것은 조선시대 미증유의 사건이다원래 조선의 형별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특히 나이가 많은 여성은 고문을 함부로 가하지 않았다기록에서 이발의 어머니와 아들이 고문을 당하자 옥졸이 너무 슬퍼서 울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이가 팔순이 할머니가 압슬형을 당하자 너무 고문이 심하다는 말을 하고이제 10살 밖에 안 되는 아이는 자신은 역적이 아니며아버지는 오로지 충효에 충실히 하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이발의 아들을 말을 들은 선조는 그 아이가 괘씸하다며 머리를 터지게 해 죽였다그래서 기축옥사는 서인에게 승리의 역사이기도 하나모멸의 역사이다아무리 역모라고 해도 정여립과 관계는 된 인물은 이발로 충분하지굳이 그의 노모와 어린 아들에게 죽음을 강요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은 북인(이이첨)과 서인(노론)의 대립관계에 있는 기록이다.

 

기축옥사를 두도 한쪽은 서인 특히 정철을한쪽은 선조의 무자비함으로 이루어진 피비린내라고 말한다하지만 둘 다 틀렸다모두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서로 음모를 짠 잔인한 사건일 뿐이다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 한다주자 성리학에서 공맹의 수사학과 다르게 절대왕조를 위해 성리학은 왕조의 권력과 거기에 기생하는 권신들의 권력을 중시한다하지만 정작 공맹의 사상은 군주가 틀리면 백성은 자신의 군주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왕도주의는 어디까지나 민본주의에 의거한 것이지권력자만을 위한 사상이 아닌 것이다.

 

정여립이 역적인지 아닌지는 어느 책에 따라 다르지만,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올라오면 어는 누구는 영국 크롬웰보다 더 이른 시기에 조선에서는 공화주의자가 있었다고 말한다정여립이 말한 대동사상은 당시 왕조시대 역모일 수 있지만백성에게 달랐다남녀노소를 떠나신분이 양반이건 노비이건 모두 공평히 글을 배우고 같이 술을 마실 수 있었다. 21세기 남녀노소 그 누구 어느 자이건 신분의 제재를 받지 않지만조선시대는 달랐다거기에서 벗어난 인간이 살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 있었고정여립은 거기에 모든 것을 받친 사람이다역적이든 아니든 문제가 아니라 분명 그 마음을 가진 점이다.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장이라 한다면 정여립은 분명 조선 최초의 공화주의자이며 민주주의를 꿈꾼 사람이다그의 꿈이 침몰하고그와 조금이라도 관계있는 자라면 모조리 도륙이 나는 비극에서 우린 어떻게 보는 게 옳은 것인가임진왜란으로 기축옥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문서가 유실되고실록과 그 외 당시 상황을 기록또한 기축옥사와 관련된 인물의 행장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오항녕 교수는 기축옥사의 기억을 두고 정철이냐 유성룡이냐는 말과 함께 당시 추국하던 시스템이라 하나그것은 억지논리이다.

 

집안 족보를 뒤져보며 찾은 것은 기축옥사 당시 억울하게 죽은 이발의 어머니는 퇴계의 제자 윤단중의 사촌누나라는 점이고서애 유성룡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고유성룡에 의해 천거된 수군 통제사 이순신에게 윤단중이 친분을 계속 유지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다시 족보를 찾아보면 이발의 어머니는 윤구의 따님이고윤구는 기묘사화 당시 훈구세력에 의해 화를 당한다나의 직계 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로 정암 조광조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으나기묘사화를 당한 후 향촌으로 내려온다윤구는 내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할아버지의 사촌이다그 당시 할아버지의 작은 할아버지는 윤구 선생이 기묘사화를 당하자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오항녕 선생은 해남윤씨 집안이 광산이씨 집안과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이발의 가족이 참극을 당한 것을 추측이라 하는 표현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다른 서적에서 호남에서 모르는 물고기가 잡히며아낙네는 그 생선의 머리를 몽둥이로 때리면서 증철아증철아!”라고 외친다송강 정철에 대한 원한이 민간에서 계속 내려온 점을 두고 온 점을 본다면 기축옥사의 폐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송강 정철은 나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믿고 살았지만문제는 주색이 너무 심했다그의 부정적 평가가 심한 책은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다선조가 평양으로 파천할 때 평양유지들이 송강 정철을 불러 위기를 타파하라 한다.

 

그가 왕명을 받고 전쟁의 위기를 해결해야 할 때 빨리 이동하지 않고중간에 기생을 품에 안고 자신이 처한 신세를 한탄하며 시를 읊조렸다백성들은 왜군의 칼에 도륙 나고배고픔에 허덕일 때기생을 품에 안고 술을 마시며 풍류나 외던 그 모습을 보자니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다팔은 안으로 굽는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오항녕 교수가 갑인예송을 두고 갑인사화라고 말하며그 원인을 윤선도라 말하는 것조차 오류이다기축옥사 피해자(할아버지가 귀양 가는 길에 죽으니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게 당연하다)가 어느새 갑인예송의 가해자로 둔갑되었으니 말이다.

 

윤선도는 할아버지 윤의중의 죽음이 신원되고거기에 정개청의 죽음을 다시 신원하여 자산서원을 유지하는 게 목표였다하지만 자산서원은 남인과 서인이 교차하면서 언제나 분쟁거리로 되었다하지만 기축옥사 그 자체를 동서 양당의 갈등도 중요하지만그 당사자들과 주변인들이 당시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어떤 업적을 했는지 역시 중요하다백성을 위해 자신의 재력을 나눠주고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권력자에게 목숨을 걸고 대항했는지 말이다광해군을 두고 혼군이라 하고과거제도 엉망이라 했지만이미 선조시대부터 과거장은 엉망이고백성들은 배고픔에 허덕이고군역관리는 엉망이었다.

 

기축옥사로 천명에 가까운 선비가 화를 당했지만정작 중요한 것은 그 선비와 같이 살아가던 조선의 민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는 가이다. <기축옥사 재조명>에서 흥미로운 내용 중에 하나가 나주를 중심으로 동인과 서인의 서원장의 자를 두고 갈등한 내용이 있다조선은 향교가 향촌의 중심이 되어 농민을 관리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부패한 시절 향교는 백성을 고혈을 짜는 곳이고청렴한 선비가 있으며백성의 생활을 어루 만져주고 다독여주던 곳이었을 것이다. 21세기 한국을 두고 헬조선이라 한다헬조선의 시작점은 역시 임진왜란이지만그 임진왜란 당시 유망한 사류는 기축옥사에서 대거 희생되고임진왜란 당시 상당수가 순국했다.

 

병자호란 당시 의병은 전국에서 일어나지 않았고관군조차 눈치만 보고 출진하지 않았다선비의 정신이 완전히 소멸한 시기는 결국 16세기이고, 17세기에 선비가 살 곳은 산속이었다만일 세상에 잘못 나오면 장형을 받고 죽거나 멀리 귀양 가서 고역만 치룰 뿐이다기축옥사는 당쟁론적인 상황에 놓여있지만그것을 당쟁론적인 것으로 치부한 결과 조선은 전쟁의 병화에서 큰 상처를 입었다그 역사의 상처를 반성하고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무고를 풀어주고다시 시대에 부합된 정신을 찾는 것이 먼 후예들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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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08 22: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 시대에 많은 사화가 있었기에 역사를 배우는 이들은 ‘그 사건이 그 사건‘이라는 인식을 하기 쉽지만, 만화애니비평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당사자들과 후손들에게는 사건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구원을 풀자는 목적이 아니라,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도 과거 사건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어야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해석의 기반 위에서 헌법 개정과 같은 현재의 변화도 이루어질 때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4-09 13:24   좋아요 1 | URL
4월 2주 토요일 제가 집안 제사로 시골(강진)에 내려가는데, 거기가 합수 윤한봉 선생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 제 위로 11대조 할아버지를 모시는데, 그분 역시 기축옥사가 일어날 때, 살아있던 분입니다.

강진이란 곳이 지금이야 경치 좋은 곳이나, 과거 조선시대 머나먼 벽지이고, 유배오는 사람에게 한양에서 멀면 멀수록 그 죄가 깊다고 하니,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지요. 게다가 왜구들의 침입도 계속 와서 많은 피해를 보던 곳입니다. 그래도 이런 곳에서 터를 내린 것은 세상을 등지고 은거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세상이었나 봅니다.
 

최근 일본의 행태가 심심치 않은 양상을 보여준다.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사과하고 풀어나가기 보다는 오히려 은폐하고 부정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전번 정권에서 가장 치욕적인 외교전략 중에 하나가 일본군성노예로 학대받은 그분들에 대한 처우이다. 100억에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팔아먹는 현실에서 많은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그런 처우를 하던 인간들만 모이다보니 과거에 일어난 비참한 역사를 드러내기보단 오히려 감추려고 노력했다. 일본군이 과거 촬영한 사진 중에 위안부에 끌려간 여성의 사진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그녀들을 유린하고 밟는 것도 모자라 끔찍하게 살해한 기록이 사진으로 나온 기사를 보았다.

 

예전에 그런 사진을 찾았지만, 국가에서 예산을 반영해주지 않고 그런 사진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아 수면 아래 감추었지만, 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람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그 시신을 땅에 매장하는 사진이 세상에 나오자 UN에 간 일본 외교성 직원은 그것은 자신들의 과거가 저지른 죄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최근 일본에서 이런 관점을 정치권과 언론, 심지어 교육계까지 침투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일본 유치원 교육방식을 보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독도를 자기들 것이란 점, 중국과 한국이 일본을 왜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 게다가 일본 천황의 신위에 계속 참배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일본에서 최근 법안개정 중에서 정부의 정치적 색과 맞지 않거나 그런 기미가 보일 경우 그 일본국민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악법을 준비한다는 기사를 봤다. 이미 아베 총리의 조상이 일본전범 A급이란 점, 그가 전형적 극우성향 정치인이란 점에서 일본의 형태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다시 회귀하는 무리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조류에서 역사는 아주 중요한 전략이다. 역사는 교육이기도 하나, 역사 그 자체가 그 나라의 국민을 대변하는 하나의 이야기들이다. 역사라는 이야기 거리는 교육만이 아니라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쏟아 나오는 것이다.

 

일본 청소년이나 청년들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그 중에 좋아하는 장르는 당연히 전쟁이나 전투 장르이고, 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국시대를 좋아한다.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아케치 미츠히데, 다케다 신켄 등 같은 영주 군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인물로 보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쓰 같은 인물이다. 임진왜란 전후와 일본 내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역사에서 에도시대를 열게 된 관문이었다. 문제는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존재성이다. 히데요시 일족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로 모조리 섬멸시켰다.

 

그가 일본 전국을 통일한 점에서 대단한 인물이나, 그의 모습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상당히 미화되어 있다. 특히나 전국무쌍에서 보여준 히데요시는 천하인(天下人)로 묘사고, 그의 정부인 네네는 상당히 포용성이 높은 여성으로 보여준다. 역사적 사료에서는 전혀 다르나 게임과 애니메이션이란 콘텐츠는 그러하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사회를 두고 말하자면 칭호는 참으로 많다. 하지만 이것만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로 드라마천국이다. 한국사회에서 드라마는 모든 대중들의 공통관심사이고, 월화 내지 수목, 주말드라마의 흥행은 한국사회에 늘 새로운 신드롬을 안겨준다.

 

드라마 장르에서 한국역사를 소재로 한 사극 역시 많이 등장한다. 예전에 인상 깊게 본 드라마 중에 <불멸의 이순신>이란 작품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사실적 역사자료를 토대로 이야기를 붙인 것이다. 그러나 막상 보면 조금 다른 내용들이 종종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과 원균을 어린 시절 만난 적이 없고, 또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원균이 보여준 모습은 상당히 무인 그자체로 묘사한다. 남자답고 거칠게 없는 자로 말이다. 원균을 바라본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가 실제로 선조 후기 임진왜란 공신목록에서 선무원종공신록권(武原從功臣錄券)에서 이순신과 권율과 함께 1위로 책정되어 있다.

 

원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그를 나름 훌륭한 무관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사료를 다시 정리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드라마와 역사적 사료는 기본적인 배경은 유사할 수 있지만,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관점은 올바를 수 없다. 역사는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실제 행위에 대한 기록에서 진실에 대한 관계성을 두고 사실에 대한 관점은 보는 이만 아니라 정치적 권력과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새롭게 조우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가진다면 당연히 전쟁관련인물에 대한 평가를 어떤 식으로 내릴 것이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두고, 영웅시하는 문화콘텐츠를 비롯하여 그가 조선을 침공할 때 침략자의 이름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업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변질시킨다. 도쿠가와 정권은 조선침략에 대한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조선 앞바다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관리하고, 히데요시 일족과 그의 수뇌부를 모조리 숙청한다. 게다가 조선과의 외교와 교역을 재개하는 방식을 택한다. 임진왜란 당시 히데요시의 권력을 일본 천황보다 더 우위에 있었다. 히데요시 발언에 수많은 일본인들의 생명이 오고가는 시대였다.

 

임진왜란의 사료를 찾아보면 왜군들은 처음에 승기를 몰아 점령해 나갔지만, 일본 열도는 기본적으로 조선보다 온도가 높았고, 이에 따른 의복이나 음식문화가 많이 틀렸다. 일본과 한국의 음식을 뭔가 유사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엄연히 존재한다. 임진왜란이 4월에 일어난 일이나, 조선시대 4월은 음력으로 계산했기에 지금으로 따지자면 5월 중후반 정도이고, 왜군이 충주의 신립부대를 섬멸하고 한양과 평양에 간 시점이 여름이다. 그 말은 곧 일본기후가 습하고 더운 점에서 일본보다 덜 습하고 더운 조선의 여름이 그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토 마사요시를 비롯한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늦가을이 옥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조선의 겨울은 일본에서 느끼지 못한 추위였고, 그들이 침공 시기에 가지고 온 옷은 겨울용이 없었다. 남측 부산과 거제 일원은 그나마 따뜻한 지역이나, 한양 위로 올라갈수록 추위는 무서운 적이었다. 왜군이 조선과 접전하면서 사망하게 된 이유가 전투 중 교전보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병에 의해서였다. 풍토가 맞지 않은 점, 겨울에 추위에 의한 동사(凍死)와 감기 등은 치명적인 고통이었다. 가토 마사요시가 함경도로 가면서 정문부의 전술에 걸렸을 때 가장 큰 고역이 함경도의 차가운 겨울바람과 눈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아도 많은 병사가 죽었고, 숫자가 수백에 지나지 않은 의병에게 쫓김을 당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에 끌려나온 왜군 내에서 동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임진왜란 사료를 보면 왜군 일반병사들은 어서 전쟁을 끝내고 집에 가고 싶어 한다. 전쟁에 나온 대부분의 장정은 영주의 명령에 의해 오거나, 조선에 가서 공을 세워 가계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온 것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각종 질병, 바다의 이순신이 가로막고 있었다. 전쟁을 계속 하는 한 그들은 조선에 남아 생명을 잃을 각오로 총과 칼을 잡고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이니 그들은 자신의 군주인 관백 히데요시에게 원망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의 임금 선조 역시 조선의 민중에게 원망을 받았지만, 왜군의 군주 히데요시 역시 일본의 민중에게 원망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전쟁에 나가면 자신의 아버지, 아들, 남편, 형제를 보내야했다. 먼 길을 떠나 시체조차 돌아오지 않으면 남은 가족의 마음은 어떨까? 수 십 만에 이르는 병사를 위한 군수물자 조달로 생필품이 부족해지니 더더욱 원망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 전체가 배를 스스로 가르고 할복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무라이들이 아니다. 히데요시의 존재가 박멸될 때 일본은 에도를 지나 메이지를 맞이했다. 그리고 조선을 침략하게 되었다. 조선침략이 제대로 된 것은 임진왜란 밖에 없었다. 을묘왜변에서 전남지역의 왜구는 도순찰사 이준경에게 패배를 당했다. 임진왜란을 임금이 한양에서 몽진하여 의주까지 가고, 7년 동안 치룬 거대한 전쟁이다.

 

하지만 그 일이 일에게 하나의 역()에 불과했다. 그래서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이란 책이 나온 것이고, 일본 역사교과서에 임진왜란을 두고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이란 하는 것이다. 다행히 왜군은 조선의 수군과 의병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지만, 그 때가 잠시였지 을사늑약 이후 합일병합 그리고 해방 후 역사와 외교문제를 보듯이 우리는 결코 임진왜란이 끝난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의 승리를 거둔 전쟁이나 정말 승리한 전쟁인 것일까? 조선 인구 반 정도가 죽었고, 밭과 논을 황폐화되고, 성리학의 도리조차 사라졌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만든 주인공은 1위를 당연히 이순신이다. 그리고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 권율과 곽재우, 이항복과 이덕형 같은 문무 관료와 의병이 없었다면 우리의 국어는 훈민정음 한글이 아닌 가타가나의 일어였을 것이다. 이순신은 6갑자가 도래한 420년 전 사람이다. 그가 서가한지 400년이 넘어도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해주게 한다. 전쟁이란 참 끔찍한 일이고, 전쟁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힘이 없는 일반 민중, 지금으로 보면 국민이다. 일제에 밟힌 그 어둠의 36년도 점점 잊어져 가는데, 임진왜란은 오죽할까?

 

하지만 이순신의 전쟁사는 세계 4대 해전에서 한산도 해전이 있었고, 그보다 더한 것이 명량해전이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이순신이 대단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최근에 읽은 <이순신과 임진왜란>과 그리고 <난중일기>, 더 나아가 비봉출판사에서 제작한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서 더 많은 것을 알았다. 비봉출판사 사장이면 창립자가 직접 책을 출판했는데, <난중일기><징비록>을 비롯하여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각종 장계와 사료들을 정리하여 이순신의 7년 전쟁을 찾아 떠났다.

 

그 내용 하나하나를 일일이 나열할 수 없지만, 진정한 적은 외적이기도 하나,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현자 곽재우>가 있었다. 곽재우 장군은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인물이나, 그가 최초로 의병을 거사한 인물인 점을 잘 모를 것이다. 곽재우 장군이 없었으면 이순신 장군의 전술이 성공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 유일하게 무사한 곳이 전남지역이었다. 전남의 길목을 진주성과 의령 정암진에서 잡아두었기 때문이다. 곽재우 장군이 경상남도에서 전라남도로 진출하는 왜군을 막았기 때문에 전라좌수영이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곽재우를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우후죽순으로 창궐하고, 산속에서 수행하던 승려들도 의승군으로 참전하여 조선의 민중을 구원하려 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살생은 금지하고, 더구나 인간의 목숨을 헤치는 것을 최악으로 여겼지만, 조선의 백성들이 왜군의 칼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는 게 더 큰 죄였다. 악귀의 칼날에서 조선의 민중을 구하는 게 진정한 불도였다. 문제는 이런 의병들이 너무 활약한 점이다. 곽재우는 조선선비 남명 조식의 마지막 제자이고, 조식 선생의 외손녀의 남편은 곽재우였다. 조식 선생이 차고 있던 방울과 칼은 수제자 김우옹과 정인홍에게 주었다. 정인홍을 비롯하여 김면 등 조식 선생의 문하생들은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다.

 

곽재우가 공을 세우자, 임금 선조는 시기했고, 게다가 관료들도 동서로 분당되어 서인의 관리들은 동인계열 관료 내지 의병을 모함하거나 서로 갈등을 빚었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의 일화도 그렇고, 동인계열에서 남인과 북인 역시 갈등을 빚었다. 선조가 의주행재소로 호종할 때 많은 신하들이 외면하다 행재소가 안정되자 여기저기서 찾아와 전쟁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망치고 있었다. 이순신의 승전에 좋게 여겼지만, 백성들이 이순신과 곽재우를 더 공경하자 선조는 질투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잘못된 소식이나 소문 그리고 주변 간신배의 말을 듣고 충신들을 헤치려 했다.

 

김덕령 장군은 아무 죄도 없는데, 반란군과 억지로 엮여 장살당해 죽게 되고, 그 계기로 수많은 의병들이 산으로 숨어들어갔다. 이순신 장군이 모함에 의해 백의종군하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발탁되는 과정에서 김덕령의 동생 집에 간 일화가 있다. 김덕령의 동생 역시 의병활동을 했으나 임금 선조와 간신배의 계략으로 형과 친우들을 잃었다. 평생 세상에 드러나지 않으려한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만 더해간다. 이순신이 모함에 걸린 이유는 그의 인기도 있었지만, 그가 남인의 영수 류성룡의 비호를 받는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류성룡의 정치적 정적인 윤두수는 어느 정도 보면 영리한 신하지만, <충무공 이순신 전서>를 보면 정말 역적 간신배가 따로 없다. 원균을 기용한 점에서 선조와 똑같은 발상을 했지만, 막상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배 후 조선수군이 몰살하자 그 문제를 오히려 윤두수 같은 서인계열 신하에게 몰았다. 그리고 이순신이 명량에서 극적으로 승리하여 명나라 장수들이 이순신의 공을 치하하자, 선조는 오히려 이순신의 업적을 일개 무관이 해야할 일로 표현했다. 명나라 장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고 아부를 떨던 선조, 백성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정치적 입지만 신경 쓰고, 그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왕좌를 전위한다는 교서를 내리고, 정치적 이권에 눈이 밝은 신하는 전위 양도를 반대하기 위한 사죄 모드로 돌입한다.

 

전쟁에서 각종 병권과 인사 업무, 그 외에도 처리할 공사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조정은 마비된 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책을 읽으면 이순신 직접 만든 <난중일기>와 장계만 아니라 7년 전쟁동안 <선조수정실록>을 토대로 시기적으로 차례를 구성했기에 당연히 조정의 일들이 이순신 장군이 행하던 업적을 어떻게 풀어 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은 모함을 당하고, 정작 전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은 시문놀이 빠져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급했다. 이런 자들을 몰아내지 않고 계속 조선을 지배했으니 히데요시의 원한은 뒤에 가서 풀린 셈이다.

 

일본은 그런 히데요시의 흔적을 지우려 하다 이제는 다시 국가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역사를 인지하는 방식이 곧 그 나라의 민족성이고, 그들이 원하는 이념이다. 일본이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군사 경영은 군비만 충당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의 생계를 구원하고, 행재소의 임금에게 공물을 보내 조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정치경제학이란 학문은 없어도 정치경제학적인 자세, 게다가 목민관의 자세도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은 권력에 의해 내몰리고, 그 이후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면사(免死)라는 교지를 받는데, 그 면사첩은 선조가 내린 것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가 이순신에게 내린 것이다. 이순신은 당색을 갖추진 않으나, 당색은 당연히 친구 류성룡에 의해 남인에 가깝다. 원균을 중용한 선조와 간신배 일원을 보면 대부분 서인계통이었다. 윤두수는 원균의 아내와 가까운 친척이었고, 서인의 조력을 받았던 원균은 통제사 자리를 이순신에게 빼앗을 수 있었다. 이순신은 평생 변방의 무관으로 고생했으나, 원균은 중앙정계와 연줄이 있었다. 전쟁 와중에 윤두수의 집에 뇌물이 갔다는 기록에서 조선의 백성은 배고 고파 굶주려 죽고, 저잣거리에 시체가 널려 있으며, 아비와 자식이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이 되었다.

 

모함을 받고 죽음의 위기에서 백성을 위해 몸을 던진 이순신의 삶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군사정권 시기 이순신의 이름은 군인이란 신분을 우상화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다 어느새 묻어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다시 이순신은 영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영웅은 영웅주의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보통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늙은 노모를 두고 소식을 늘 기다리던 아들 이순신, 아들들이 아픈 것을 두고 고민하던 아버지, 비가 많이 와서 농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목민관 이순신, 군졸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덕장 이순신, 그는 강철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마음이 아주 섬세하고, 생각이 치밀한 사람이었다. 늘 위장이 좋지 않아 약을 입에 달고 다녔고, 몸살로 며칠이나 방에 앓아눕기도 했다. 그래도 늘 송사를 처분했고, 전장에서 부하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다. 원균은 술이나 마시고, 기생을 불려 음탕한 일에 재미만 보았다. 최후에 조선수군을 모조리 수장시켰으니 그 죄가 얼마나 깊은가? 이 책에서 이순신에 대한 행장록만 아니라 원균의 행장록을 수록했다. 이 책을 저술한 작가의 눈에 보이는 원균과 선조의 처사는 참으로 한심했다.

 

곽재우에 대한 기록을 봐도 그가 과거에 2위를 했는데도, 임금이 보기에 거슬린 문구가 있어 과거합격을 취소시켰다. 의병장을 탄압했고,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가 침공한 정묘호란 때 의병의 창궐이 거의 없었다. 나라를 구하는 자는 백성이고 나라를 만드는 자 역시 백성이니, 그 간단한 진리를 잊으니 그저 하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조금 재미난 기록이 나오는데, 선조는 원균이 실패해도 이순신에 대한 정치적 대항마로 이용했고, 원균이 전사한 뒤 원균의 부인에게 나라의 녹을 내려주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집권하자 말자 바로 원균의 처에게 나라의 녹을 내리지 않게 되었다. 이후 인조반정 이후 다시 서인들이 집권하자 원균의 아내에게 국가의 녹이 다시 내렸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알고 있었다. 이순신이 얼마나 분투했고, 원균이 얼마나 한심한지 말이다. 서인들과 선조의 전교양위 사건을 두고 가장 큰 피해자는 광해군이고, 그때 중간에 중재해 준 자는 류성룡과 일부 충신이었다. 나머지는 선조와 더불어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변방의 장수는 군수물자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한 채 고생만 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말고도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무의공 이순신이 생각보다 많이 시련을 겪는데, 그가 종친인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 학봉 김성일의 문인인 점, 학봉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제자이고, 류성룡과 같은 남인이기에 당색에 따른 견제가 있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자들은 외면 받고, 중앙에서 나라에 좀만 내는 자들이 승승장구하는 과거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사태를 보자니 역사란 반드시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하나의 가치이다. 지나간 역사의 기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어떻게 가야할지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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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은 영광의 날보다 어둠에 가려진 날이 더 많았다. 조선이란 국호를 지닌 국가는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잃었고, 조선의 인민(국가 이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함)들은 나라를 잃은 채 일제의 총칼에 억압을 당했다. 해방의 광복이 오는가 하더니 이제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전쟁이 끝난 후 가난과 독재로 다시 어둠 속에 방황했다. 역사란 단절된 시간이 아니다. 역사란 바로 지금 현세대를 구축한 하나의 과정들이다. 그래서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항상 과거와 현재가 계속 대화하며 이어져 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2017년 큰 방향을 보여준 한 해였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된 이후 헌법재판과정에서 탄핵되었다. 민중이 보여준 촛불혁명은 그 이전의 1987년의 혁명 이후 다시 찾아온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과였다. 하지만 1987년과 2017년은 조금 유사하면서도 달랐다. 유사한 점은 헌법정치를 기본으로 하는 법치주의국가에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민의 주권을 보여주었지만, 1987년의 주권은 거의 박탈된 상태에서 일어난 혁명이고, 2017년 국민의 주권이 가진 상태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그 차이는 바로 국민의 선택점은 과거는 없었으나, 현재는 있었다는 반증이다. 권력의 주권행사에서 독재정부에서 비밀투표를 하거나 선거인단을 권력의 입맛에 맞춘 자들로 포섭했다. 북한에서 선거하면 거의 100%에 가까운 찬성이 나온다. 투표자는 선택할 후보자가 1명이니 무슨 의미인가? 그런 비슷한 인들이 한국에서도 있었다. 하다못해 과거 군부대에서 부재자투표를 하면, 병사들의 투표용지를 검색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재투표하게 만든다. 물론 덤으로 온갖 구타와 욕설은 매우 후하게 대해준다.

 

지금 21세기 한국에서 독재자의 후예들이 살고 있지만, 과거처럼 그렇게까지 하지 못한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군화발로 국민을 밟은 자들이 이래저래 설치고 다녔다. 꾸준한 노력과 온갖 희생들이 지금의 현실로 만들었다. 예전에 386세대란 단어가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나이가 30, 80년대 학번, 60년대 태어난 이들을 두고 지칭한 말이다. 이제는 586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내가 어린 시절 286XT가 있었고, 도스를 디스켓에 넣고 부팅하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386 컴퓨터는 모니터도 컬러이고, 286과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게임과 소프트웨어를 실행할 수 있었다.


지금 80년대들은 도스와 윈도우 초기버전을 알고 있을 것이다. 21세기에 386은 고물이지만, 이제 그들은 586 펜티엄으로 돌아왔고, 조금 더 지나면 초특급 PC버전과 맞먹는 숫자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80년대 대학가 청년들은 20대 시절을 독재와 싸웠고, 이제는 또 다른 현실하고 싸운다. 영화 <1987>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30년 전의 암울한 한국사회는 다시 돌아와서는 안 되고, 돌아온 것까지는 

아니나, 그 당시 권력의 자리에서 국민들을 억압하던 이들과 그에 동조하던 세력이 아직도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아주 급박한 느낌이 많이 든다. 국가는 온간 권력의 힘을 동원하여 민주투사들을 체포하고, 시위현장이나 학생운동을 하던 청년들은 무참히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영화는 암울한 시대를 보여주기 때문에 고문 장면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변호인>이나 영화 <1987> 역시 고문이 그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찰이란 자들이 국민치안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나 국민을 상대로 불심검문하거나 불법으로 체포구금하거나 더구나 가족과의 연락을 차단한 채 어두운 방에서 고문을 자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문과 관련하여 가장 끔찍한 영화는 <남영동 1985>이다. 영화 <1987>보다 2년 전의 배경을 토대로 제작한 영화는 민주주의운동의 대부인 김근태 선생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김근태 선생의 수기록 <남영동>을 읽으면 그분이 받으신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영화와 소설에서 고문은 인간의 육체도 파괴하지만, 정신 역시 파괴하여 영혼까지 고통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고문에 의한 정신적 고통은 비단 당하는 자만 아니라 가해자 역시 깊은 상처를 받는다.

 

<남영동 1985>에서 고문을 계속 당하는 민주주의운동가가 계속 포기하지 않자, 고문을 가하는 형사들조차 그에게 제발 포기해달라고 애원을 한다. 고문을 가하는 형사들도 집에 가면 가족이 있고, 아이들도 있다. 민주주의 운동을 하던 이들은 나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더 나아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들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희생하는 분이다. 고문을 가하는 자 역시 자녀가 있다면 그런 암울한 세계에서 폭력과 감시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물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은 제외이다. 그들은 그런 폭력과 감시를 토대로 특권을 누리기 때문이다.

 

김근태 선생은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을 듣는 것이 제일 고통스러웠다. 비참한 현실 속에 들려오는 라디오의 이야기는 일그러진 환상세계의 잔인한 농담이기 때문이다. <1987>에서 라디오는 등장한다. 라디오에서 DJ의 목소리도 나오고, 테이프 카세트에서 음악이 들려온다. 이때 등장하는 유명한 가수와 노래가 등장한다. 김현식 3집은 대한민국 대중음반 역사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명반이다. 그 노래들은 지금도 리메이크 되거나 음악방송 프로그램에서 도전곡목으로 등장한다. 3집 앨범에서 가리워진 길이란 노래가 있다. 본래 김현식과 친한 유재하의 곡이나, 그 역시 천재의 운명인지 일찍 요절한다. “가리워진 길이란 가사는 상당히 시적이나, 당시 상황과 정말 잘 어울리는 곡이다. 가사를 보면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듯 멀어져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길 없네. 그대여 힘이 되 주오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 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내고,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되 주오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어떻게 보면 독재와 싸우던 지난날의 그들은 민주투사도 있으나, 억압과 횡포 속에서 힘들게 숨을 죽이면 살아간 이들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암울한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최루가스가 바람을 따라 거리를 메우고, 군중의 신발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곤봉을 들고 있는 백골단이 무참히도 시민들의 머리를 내리친다. 영화에서 주인공 이한열은 연세대학교 만화동아리 회장으로 나온다. 그가 신입생을 모집할 때 보여준 영상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한 광주 518의 비극이었다. 사람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고, 피를 흘리는 광주시민들 사이로 아직 시대는 암흑기란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국의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사격하던 그들, 독재의 칼날은 국민들을 사육장 안에 가두는 짐승과 같이 다루었다. 영화를 보면 썬데이서울 같은 잡지가 많이 나온다. 전두환 정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프로파간다 방법으로 3S(Sports, Sex, Screen)이었다. 덕분에 한국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명곡이 가장 많았다. 연예인들의 활동이 활발하고, TV가 흑백에서 칼라로 보급되던 시기였다. 스포츠는 야구가 최고였고, 성적인 이미지를 활용하여 썬데이서울 같은 잡지도 많이 나왔다. 잡지의 특징은 미모의 여성이 수영복을 입은 화보가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기사에는 각종 연예계의 가십거리로 넘쳐나고 있었다. 국민들에게 정치적, 사회적인 관심보다 오락과 재미를 더욱 치중하게 했다. 그런 시기였으니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을 두고 아직도 북한의 소행이라 말하던 정신병자가 계속 나타나는 것이다. 독재에서 벗어나 그 무지개를 향하는 이들에게 과연 무지개는 발견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연희는 이한열에게 자신의 심정을 말한다. 연희는 자신의 아버지가 민주주의 운동을 하다가 변을 당했고, 외삼촌 역시 그런 사람하고 엮여 있는 것이 두려웠다.

 

이들은 왜 힘든 선택을 하였는가? 영화에서 고문하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다. 물론 연기와 설정상의 연출이라 하지만, 그 행위를 한다는 자체는 매우 끔찍한 일이다. 영화는 3가지 세력이 대조적으로 흘러간다. 한 세력은 경찰과 국가, 다른 한 세력은 몰래 숨어 민주주의 운동을 하던 이들, 마지막은 이들 중간에서 방황하던 사람이다. 연희는 3번째에 속하는 인물이다. 국가권력이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이들에게 가족과 친구들이 변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외삼촌이 고문경찰에 끌려가자 결심을 한다.

 

어째 보면 혁명의 시작은 원대한 이데올로기만으로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 혁명의 시작에서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이상적 가치가 있어야 구심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루소는 루이왕정 세력과 파리시민에게 조롱거리 대상만 되었을 뿐이다.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가 되었고, 19세기에는 마르크스와 혁명가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20세기에는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혁명의 정신은 루소가 되었더라도 혁명의 주체는 시민들이 되었다. 보통 시민들이란 길거리에서 담배 피는 아저씨, 커피를 마시며 거리를 걷는 여성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젊은 대학생들, 군것질 하며 집에 돌아가는 학생까지도 포함되고, 노상에서 생선을 파는 아줌마나 트럭을 몰며 짐을 나르는 운전사들도 그렇다.

 

어디에나 있을법한 사람들이 모두 거리를 나와 독재의 부당함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이 불만을 가지고 반항한 이유는 자신들이 봐도 부조리한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희의 외삼촌은 교도소에 근무하는 교도관이다. 그가 근무하고 있는 교도소의 교도소장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에 혁명을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다. 폭력과 억압을 자행하던 그들의 행실에서 진정한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부하도 내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부하가 반항하면 부하의 가족까지 섬멸한다고 협박한다.

 

실제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시체마저 유기하고 은폐하였으니 당연히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끄는 주체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장악하고 있는 박처장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지역에 살다 피난 온 그는 자신의 부모님이 주워온 아이가 어느날 자신의 가족 모두를 살해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지주계층에 대해 공사주의자들은 각종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마르크스의 <자본>이나 <공산당선언> 같은 이념적 토대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만 부여했다. 그런 만행에서 가족을 잃은 박처장은 한국정부에 반항하는 세력을 모두 반국가행위자로 본 것이다.

 

그게 남영동의 고문실에서 박종철이 사망했고, 박종철의 시신은 부검된 후 바로 화장되어 강물에 뿌려진다. 박종철의 부모가 부검에 참관하지 못하고, 그의 삼촌만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오열한다. 사람이 죽어도 쥐도 새도 모르게 그냥 병사 되거나 의문사 처리된다. 자신의 가족을 병으로 잃은 것도 한이 맺히는데, 젊은 청년이 고문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은 얼마나 한이 맺히는 일인가? 그것도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그 절망은 그들이 살아간 인생의 길에서 가리워진 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외롭고 괴로우며,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갈 곳을 찾을 수가 없다. 영화 <1987>는 그런 그들에게 길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개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위해 서울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 억울한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처음에 집에서 숨거나 길거리에서 움츠리며 살아간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어 가면 된다. 하지만 그 길을 만들어줄 사람들을 찾는 것은 너무 어렵다. 하지만 같이 그 길을 가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

 

영화 <1987>과 더불어 6월 항쟁을 보여준 책으로 최규석 작가의 <100>란 만화책이 있다. 물이 100가 되면 액체에서 기체로 되고, 수증기의 힘은 매우 강력하여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전환점이 된다. 그 책에서 권력 아래 순종적인 사람들이 스스로 그 권력 앞에서 저항한다. 대신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희생과 눈물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고문에 의해 죽거나 크게 다쳤으며,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일상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지금 정치권에 다시 대두된 이들은 그 당시 그들과 같이 광장에 서고,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투쟁하던 이들이다. 그동안 10년 동안 시간은 과거로 간 듯 했다. 그러나 그 10년은 멈추고 다시 시계는 미래를 향하여 가고 있다. 촛불혁명이 한참이던 작년 늦가을,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이 나와 같이 시위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당시 탄핵당한 대통령에 대해 욕을 했다. 가령 XX년 같은 것들을 말이다. 약간의 다른 사상적인 부분에서 옆에서 나무라던 분들이 있지만(이 사람들은 정말 그 어르신들이 왜 그렇게 욕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분들이 욕하던 이유는 독재군부 시절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잡혀갈 수 있다는 공포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가 이제 스스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모임에서 그냥 나라에 대한 불만을 조금이라도 발성하면 주변사람 모르게 남영동 지하고문실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히던 세상이다. 당시 대통령은 그런 일들을 벌이는 자의 딸이었으니, 얼마나 오랜 시간을 두고 국가라는 이름을 지닌 공권력에 두려움을 지니고 살았을까? 2017년 혁명은 독재의 청산이 정치권력이란 시스템을 넘어 사람들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망령으로부터 벗어난 셈이다. 그러면 1987년의 혁명은 어떤가?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망령을 모든 시민들이 도전한 시기다. 가리워진 길은 내 눈앞에 펼쳐진 안개 속만이 아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영혼의 상흔조차도 가리워진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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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2-24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건 좋아요 한 200개는 눌러야 되는 글인데 말이지요.....

만화애니비평 2018-02-24 13:15   좋아요 0 | URL
아쿠쿠 감사합니다용~
 

아버지의 유품은 거의 없다. 옷가지 몇 벌과 노트, 그리고 거의 쓸모없던 노트북 하나와 외장하드 디스크 하나 정도이다. 옷이야 반 이상 처분했고, 몇 벌 양복이 큰 방의 장에 있다. 키가 나보다 크고, 다리도 나보다 길어서 내가 입을 수 없었다. 나도 다리가 내 키와 유사한 사람과 비교하여 긴 편(대신 목이 짧다)이나 아버지의 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만일 조카가 장성하거나 뒤에 결혼하여 내 자녀가 아들이라면 1번이라도 그 옷을 입혀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 아버지의 물품을 정리하면서 최근 외장하드 내용을 찾아보았다. 아버지는 배를 타고 다닌 외항선원이기에 항상 남는 시간에 뭔가 했어야 했다. 지나간 드라마나 영화들이 안에 있었다.

 

그리고 조카들의 사진과 아버지가 일에 사용한 업무자료와 아버지가 작성한 문건이 있었다. 참으로 슬픈 유언이 있었다. 아주 예전부터 정리한 글이다. 배를 타고 멀리 나가면 언제 어디서 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배를 타며 먼 나라에 가면 몇 개월 심지어 1년 넘게 해외에서 고생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는 한국이란 사회에 회의감이란 절망에 벗어날 수 없었다. 보수라고 말하는 존재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지나가는 개만도 못하게 보고, 진보라는 말하는 입들은 밑바닥의 세상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입만 두둥실 떠다니는 현실에서 과거의 비참한 일들은 아직도 계속 되는가?

 

언제 일을 하면서 해양과 관련된 종사사와 대화한 적이 있다. 한국이 발전한 이유는 국가가 제대로 도와준 것이 아니다. 이런 형태를 갖춘 것은 선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름 1방울도 나지 않는다. 자동차는 수천만대이나 기름 하나 나오지 않고 있으니 그 모든 원유가 배를 타고 태평양과 인도양, 대서양을 지나 우리 영해로 들어온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만 한국은 반도지형의 국가이고,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바다에 얼마나 많은 원혼들이 슬피 울고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성을 상실한 적이 있었다.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이 오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집에 가고 싶다고 외쳤다. 내가 물었다. 집은 어디냐고? 영도에 있는 집이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시골 쪽을 이야기했다. 배고프고 가난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그곳, 아버지가 자라고 태어난 곳은 전남 강진군이다. 겨레의 역사 조선의 마지막 등불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살이를 한 곳이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이다. 아버지는 귤동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강진에 오고갔기 때문에 매년 집안제사로 찾아간다.

 

언제 부모님을 모시고, 작은아버지와 고모부 내외, 그리고 고모댁 사촌누나와 같이 가우도 옆의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강진군의 슬픈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우도 인근에 접안시설이 있는데, 일제시대 일본들이 전남지역의 쌀을 약탈하기 위해 만든 부두라고 이야기했다. 강진은 생각보다 아픔이 많은 곳이다. 다산의 유배 오는 것도 있지만, 다산이 바라본 농민들이 겪은 고난도 지켜본 곳이다. 그 이전에 가면 조선의 최고위기인 임진왜란의 여파가 있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전후로 침공할 때, 왜적들은 조선인에게 공격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해남군 주변 민가를 약탈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칼을 베고, 그들의 귀와 코를 베어 일본으로 들고 갔다. 해남에 수군우수영이 있고, 해남 옆의 강진군은 그런 곳이다. 강진군 병영면(兵營面)이란 지역명이 있을 정도로 수군과 깊은 관계성이 있고, 이순신을 지원하던 고을 중에 강진군과 해남군이 있었다. 게다가 의병과 근왕병 중에서 해남과 강진 출신들이 많았다. 정유재란 당시 전남지역의 많은 의병과 근왕병들은 이순신 장군을 위해 군을 일으키다 수없이 전사했다. 마침 오늘 인터넷으로 진도에서는 매년 임진왜란 전몰자를 위한 굿판이 열린다고 한다.

 

해남군 우수영관광지는 대한민국에서는 국민관광지이나, 그 마을 주민입장에서 본다면 400년이나 더 지난 과거의 슬픔을 아직도 후손들이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는다. 생각하면 아버지가 태어난 곳도 바다 앞의 마을이고, 바다를 돌아다니며,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곳도 대마도가 보이는 절영도 앞바다에 위치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올해 2018년은 임진왜란이 끝이 난지 7갑자(420) 되는 해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지 같은 해이다. 임진왜란이 시작하여 정유재란이 시작된 해를 기념해서 계속 한국 조선역사와 관련된 학계에서 많은 발표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이래저래 보다보니 서애 유성룡 선생이 저술한 <징비록>을 읽고, 거기에 더해 <소설 징비록>을 읽었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이순신역사연구회에서 저술한 <이순신과 임진왜란> 4권을 읽었다. <징비록>을 읽어도 1가지만 읽은 것이 아니라 4가지 정도 읽었다. 작가의 상상력도 필요하나, <난중일기><선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사료들을 모은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이야기하자면 이순신 장군을 벗어날 수 없으나, 그것은 일본 수군과 해전에 대해서이지 그 이상의 전쟁을 보자면 서애 유성룡을 볼 수 밖에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순신 장군의 대사에서 늘 무서운 적은 나에게 덤벼드는 적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의 두려움이라고 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느껴야 할 대상이 분명 내 안의 두려움이 아니라 내 앞의 인간일 경우가 많다. 다행히 내가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란 책을 읽어서인지 <징비록>과 관련된 도서는 잘 읽혀갔다. <징비록>은 이미 전에 1번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은 이유는 현대사회 한국이 처한 현실과 역사적 맥락이다. <징비록>과 그리고 소설로 만들어진 징비록의 이야기들의 차이점을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어느 도서출판사가 뛰어난지 어느 번역가가 탁월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류성룡과 임진왜란>이란 도서를 읽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와 인문학자가 나와 논문을 소개하고, 담화로 통해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탐독할 수 있었다. 우선적으로 율곡 이이의 10만 대군 양병설이다. 율곡의 학문은 뛰어나나, 조선 최고의 영의정 중에 하나인 이준경은 이이에 대해 경계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명유대신(名儒大臣)들도 이이의 강직함에 비판을 했다. 이이가 보여준 학문의 깊이와 도량은 뛰어나지만, 그가 말하는 바는 현실의 상황을 다소 간파하지 못한채 이상적인 길만 제시했다.

 

동고 이준경은 임진왜란 이전에 을묘왜변을 토벌한 인재이고, 훈구대신을 몰아내고 사림세력을 조정으로 부른 신료였다. 그 역시 청렴하고 강직하나, 기본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영의정으로 정치적 조율을 제시하던 입장이었다. 율곡의 제자들은 후에 율곡 사후 그의 호를 다시 만들어진 후 율곡이 10만 대군양병설을 기입했다. 쉽게 생각하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다산(茶山)이란 호를 사용한 것은 1808년 다산초당에 들어가면서이다. 그 전에 삼미(三眉), 내지 사암(俟菴)이란 호를 사용했다. 다산 정약용이 1800년 이전에 다산이란 명칭을 사용할 수 없으며, 정약용 선생 사후 그런 명칭이 나왔다면 후대가 붙인 내용이다.

 

<류성룡과 임진왜란>에서 그런 내용이 나온다. 10만 대군일까? 물론 이이의 국방정책은 좋았지만, 임진왜란 당시 대부분 분전했던 세력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동인은 기축옥사를 계기로 송강 정철에 대한 복수심에 따라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었다. 북인으로 정인홍, 곽재우, 김면, 김우옹 같은 남면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고, 남인은 류성룡, 김성일 같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었다.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는 동인으로 처음 류성룡과 친분이 있었지만 기축옥사 이후 정철의 처분, 임진왜란의 과정에 따라 결국 류성룡을 파직하게 만든다. 그때 등장한 인물로 이이첨과 남이공 같은 세력이다.

 

사실 동인의 적인 서인이나. 북인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북인은 광해군 집권 전후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고, 대북은 인조반정과 함께 몰락하고, 소북계열도 이괄의 난에서 억울하게 사라진다. 동인의 후예가 몰락하니 이제 남은 것은 서인들의 세계이다. 서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광해군을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모는 것이고, 그가 한 업적을 되돌리는 일이다. 정조시대로 가면 <호남절의록>이 간행되는데, 이책은 매우 재미있는 형국을 남긴다. 이름하며 혼군이삼(昏君李三)이란 단어가 나온다. 여기서 혼군은 광해군을 말하고, 이삼은 이원익, 이덕형, 이항목을 말한다.

 

이원익은 선조가 매우 아끼던 신하였다. 인척으로 말할 정도로 이원익을 아꼈고, 광해군 역시 이원익을 집권 초기 영의정으로 모셨다. 이덕형은 일본과 통상수교를 재개할 때 책임자고, 이항복은 이덕형의 친구로서 병조업무에 매우 밝았다. 전시업무를 수행하면서 재조산하를 이끈 재목이었다. 하지만 붕당의 갈등과 내정 및 외교적 파란이 결국 파국으로 이어졌다. 광해군이 가장 탁월한 업적은 임진왜란의 분조와 무군사, 그리고 명청교체시기의 외교전략과 군사보강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에 대한 충성과 청나라에 대한 배척은 인조반정으로 이어지고, 광해군의 전략을 인조가 계속 유지했다고 하나, 막상 광해군이 펼친 외교를 부정해서 일으킨 반정이다.

 

광해군에게 문제가 없는 아니나, 그때나 지금의 역사학자의 논변에 참 모순이 많았다. 광해군이 성을 재건축에 많은 재물을 소비했다고 하나, 인조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들어간 재정이 30% 이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두고 보자면 어디가 문제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이런 광해군을 두고 <호남절의록>에서 2가지 측면이 나온다.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그리고 이인좌의 반란까지 이어진다. 광해군을 두고 병자호란 시기에 혼군이라 칭하지만, 임진왜란에서 동군 내지 분조라고 칭한다. 의병들이 광해군의 교지와 명령서를 받들고 전장을 나가 공을 세운 이야기를 한다.

 

임진왜란과 병조호란을 두고 이래 차이가 난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임진왜란 최고 공신은 이순신과 류성룡이고, 의병장으로 김덕령과 곽재우가 있다. 이책에서 곽재우보다 김덕령을 더 많이 기록했다. 정인홍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을 정도이다. 당쟁의 효과가 임진왜란 역사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서거하고, 선조는 충무공이란 명칭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뒤에 삭탈관직을 해버렸다. 나중에 좌의정으로 추증했으나, 그의 사당을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순신의 사당은 백성에 손에 이루어지고, 그의 시신은 광해군이 돼서야 고향인 아산으로 이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순신의 사당이 만들어진 시기도 광해군 시기였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외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있었다. 이순신이 노환으로 죽자 광해군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전쟁의 상흔을 잃은 것은 과연 누구이고? 전쟁에서 고통 받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징비록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일본 왜구가 참으로 나쁘나, 소서행장을 비롯한 종의지, 평조신 같은 부류는 계속 전쟁을 막으려 했던 것, 대마도란 곳이 아픔이 진하게 스며든 곳을 말이다. 대마도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중간에 끼여 곤혹을 당한 것을 보고 그들도 많이 힘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풍신수길이 죽고, 가등청정이 덕천가강에게 협력하여 풍신수길 세력을 모조리 제거하자, 소서행장 역시 죽었다.

 

소서행장의 딸은 대마도 도주 종의지의 아내였다. 대마도주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패권이 덕천가강에게 가자, 자신의 아내와 이혼하고, 조선에 대한 외교를 다시 추진했다. 전쟁은 침공당한 자에게도 침공한 자에게도 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살기위해 침략자가 될 수밖에 없던 운명을 보면서 참으로 기구했다. 대마도주는 순수 일본인이 아니라 선조 중에 조선인이 있었다. 전쟁은 막을 수 있었고,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기회는 여러 차례 있어도 활용하지 못했다.

 

전쟁이 나자 왕과 대신은 도망가고, 목숨을 건 의병들은 지원도 못 받고 사라져갔다. 그나마

왜적은 총에 쓰러진다면 덜 억울하다. 선조의 질투는 조선의 운명을 계속 어둠으로 몰고 갔다. 한양에 돌아오자 피난갈 때 없던 자들이 이제 변방의 의병과 군관들을 모함했다. 김덕령 장군은 고문으로 죽고, 진주성을 버려지고, 이순신은 백의종군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 과거의 아픔을 잊었다. 선조가 전쟁보고를 받아야할 때 그는 아침이 지나도록 정무를 보지 않고 공빈 김씨의 처소에 있었다. 의주에 가서도 공빈 김씨의 치마 바람에 쌓이니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소설에서 내시들은 전쟁상황을 보고하러온 당상관에게 임금은 씨름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 남자와 남자가 씨름이라면 운동이나, 남자와 여자가 씨름을 하면 무엇이랴? 게다가 의주나 한양에 오니 대신들은 전략과 전투의 방식도 모르고, 입만 살아있다.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참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린 아이가 배가 고파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데, 이상하게 젖이 나오지 않았다. 어미는 전쟁에서 죽었고, 아이는 그것도 모른 채 계속 젖을 빨고 있었던 것이다. <징비록>에서 가장 슬픈 대목 중에 하나였다. 먹을 것이 없어 고통 받은 백성들이 밤새 울부짖다 아침에 일어나 나가니 모두 죽고 말았다.

 

류성룡은 백성을 하늘로 보았고, 류성룡과 이순신을 모함하던 이들은 권력을 하늘로 보았다. 천출이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막자 류성룡이 그를 관군으로 승격한 후 전쟁이 끝나자 그를 다시 천출로 만들어버렸다. 너나 할 것 조선의 백성인데 누구는 자기 살길과 재물만 챙기고, 백성들에게 목숨과 양식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백성이 없는 국가는 의미가 없지만, 그들의 존재는 들판에 널린 돌멩이처럼 이리 차이가 저리 차이는 신세였다. 토끼를 잡으면 개를 잡는다고 했던가? 전지재상 류성룡은 전쟁이 끝나자 파직되었다. 그가 나라를 일으키는데 제일 필요한 것은 개혁이다. 개혁에서 늘 난관은 기득권과의 대립이다. 기득권의 눈에는 류성룡은 제일 미운 대상이다.

 

대동법의 전신인 수미법은 양반지주가 반대하고, 이것을 먼저 주장한 정암 조광조 선생은 기묘사화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조선의 군왕과 권력가는 이렇게 무능하고 한심한데, 그래도 지조 있는 선비와 이 땅의 백성들은 적이 나와도 죽음이 두려워도 가장 먼저 맞서 싸우고 순국한다. 집안에도 조카와 5촌 당숙이 기묘사화를 당해 뜻을 버리고 낙향하고, 심지어 그렇게 만든 이들이 정국을 장악해도 을묘사변이 일어나자 왜적과 싸운 사람도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생각하면 이들의 미련함은 기축옥사에서 엿보인다. 동인들이 남인으로 관군으로 활동하고, 북인으로 의병으로 활동한다.

 

기축옥사에서 정여립과 관계되었다고 남명 조식 문하의 제자들이 크게 다쳤다. 명망 있는 선비 최영경과 정개청은 아무 죄도 없이 죽었고, 정여립을 동인으로 입당하게 한 이발과 이길 형제는 살점이 사라질 정도로 고문을 당했고, 이발의 노모는 압슬형에 어린 아들은 장을 맞아 머리가 터져 죽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괴롭히던 세력이 서인이다. 장군은 당쟁과 관계없으나 남인의 영수 류성룡의 지지가 있었고, 류성룡을 견제하던 서인의 세력에 늘 정치적 죽음을 당해야 했다. 원균이 서인 영수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인척에서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당익을 노리던 자를 보면서 한숨이 나올 수가 없었다.

 

기축옥사로 선조와 권력가에 대한 분노가 있어도 기축옥사 희생자의 인척들은 전쟁에 나와 왜적과 싸워 전사했다. 소설 징비록이나 혹은 여러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처럼 왜적과 싸우는 이유는 군왕이 아니라 이 나라 백성을 구원한다는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국가가 토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병기와 군수를 제대로 관리하여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하고, 병사들은 날래고 용맹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되려면 먼저 부정부패가 없어지고 지휘관들은 청렴하고 자신에게 엄정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군대 생활을 하나, 막상 <징비록>을 읽어도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승리하면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소설에서 인상 깊다. 가장 먼저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 격군들이었다. 선창 아래 노를 저는 그들은 천민들이었다. 조선에서 천민은 양반이 시켜 때려죽여도 아무런 대응조차 할 수 없는 약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찾아와 고맙다고 말해주는 상관이 있으면, 세상 어디라도 따라갈 것 같다. 군에서 말단 병사들은 언제나 곤궁한 처지에서 2년 정도 시간을 빼앗긴 채 군복무를 한다. 집에도 가고 싶고, 친구들도 보고 싶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군율은 엄하지만 백성들과 격군에게 매우 친절한 목민관이기도 했다. 조선은 이순신을 영웅인 것을 알아도 권력들은 눈에 가시였다.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으면 마지막은 이순신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건천동 친구인 2사람은 민족의 구원자로 태어나 오명의 이름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날의 기록에서 다시 태어나 한국의 인물을 넘어 세계의 인물과 문화재로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은 국가의 국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국보라는 문화재로 남아서 안 될 것이다. 늘 우리가 기억하고 새기야 할 숙제이고 과제이다. 징비록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인구는 반으로 줄었다.

 

그리고 그런 슬픔은 병자호란에서 일어나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역사의 이야기는 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나갈 시초에 불과하니 어찌 슬프지 않을까? 돌아가신 아버지와 주변 친척어른이 나에게 말했다. 나의 할아버지 형제들은 일제 징용에 끌려가고, 한 분은 돌아오신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한국전쟁 당시 할아버지는 인민군과 한국군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밤에 시골집 근처 저수지 갈대밭에서 숨어 지냈다고 말이다. 만일 잡혔다면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징비록>의 계속 새겨야 하는 것이다. 430년 전 기축옥사의 슬픔이 집안에 새겨져 있는데, 하물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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