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국립묘지를 지난 주말을 이용해 다녀왔다. 나에게 광주는 세 번째 방문이다. 3번을 찾아간 광주 속에 첫 번째 방문 때 518국립묘지를 찾아갔고, 두 번째는 광주비엔날레 행사를 갔을 때 녹두서점 재현을 관람했을 때이다. 이번 광주의 방문은 의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나 혼자 방문했고, 두 번째는 여자친구(현재의 아내)와 같이 갔으며, 이번에는 엄마와 아내까지 3명이 함께 찾아갔다. 어머니는 518에 대한 기억이 있다. 시골에서 인천으로 가려고 하는데, 광주에서 비극의 살육이 자행되고 있었다. 이때 광주를 중심으로 담양과 나주 등 주변 지역까지 교통이 통제되어 이동할 수 없었다.

 

당시 나를 뱃속에 임신 중이던 엄마는 버스를 타고 가던 중 그때 도로가 막혀 도로 다시 시골로 돌아갔다. 군인들이 통제했고, 그 군인들은 모든 민간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19805, 늦은 봄의 따스한 햇살은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축복을 내리는 빛이 아니라, 햇빛 아래 짙은 그림자를 보여주는 기나긴 어둠이 되어버렸다. 이번에 광주에 찾아간 일은 여러 가지 해야 할 것이 있었다. 광주에 계시는 엄마의 친구에게 엄마를 모시고 가는 일이다. 엄마와 같은 마을에 담벼락 건너 동갑내기 소녀들은 이제 명절 때 손자를 맞이하는 할머니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 대부분 어른들은 몸이 불편하다.

 

엄마의 친구도 건강이 그래 좋지 않았고, 시골에서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 서로 결혼하여 떨어지면서 지내게 되었다. 엄마와 친구이나 엄마에게 집안 고모뻘이 되던 분이기에 엄마는 그 집을 방문하면서 엄마 친구의 어머니가 계신 노인요양원까지 방문했다. 물론 여수에 있던 노인요양원에도 엄마의 시골집 옆에 살던 분도 만나고 오셨다. 나이가 들면 건강이 불편해서 이제 걷는 것조차 힘들고, 치매에 걸려 기억도 흐릿해지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분들이니 조금이라도 시간이 될 때, 여유가 될 때 찾아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광주로 갔다. 광주로 가면서 처음 들린 곳이 망월518민주공원 묘역이었다. 나는 2번째이나, 엄마와 아내는 처음이었다. 518관련 도서를 보면 참으로 슬프고 끔찍한 일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치고, 사진으로 본 시신의 얼굴은 그 당시의 참혹함이 그대로 녹아있다. 어떻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사람을 저 지경까지 헤칠 수 있을까? 그냥 지나가는 버스에도 기관소총으로 사격하고, 마을저수지에서 물놀이하는 어린 학생에게 총을 겨누는 그들을 보며 더 이상 이런 비극은 되풀이 돼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518기념관을 방문하면서 당시의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가장 슬픈 것은 암매장된 시신을 발굴했을 때이다. 시신 유해 한 구가 2층 기념관에 놓여있다. 머리 한쪽이 약간 구멍이 뚫려있다. 총으로 머리를 맞은 것인지 아니면 곤봉으로 머리를 맞은 것인지 잘 알 수 없지만, 머리를 가격당하여 사망하여 그 시체조차 암매장되었으니 얼마나 비통한가. 시신 옆에 또 다른 뼈가 놓여있다. 우리 일행 말고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몇 분이 관람하고 있는데, 1분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유해를 보자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518유족들의 증언으로 만들어진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에서 잊을 수 없는 영혼이 있었다. 뱃속에 8개월 된 태아가 있던 어느 여성이 길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계엄군의 조준사격에 머리를 크게 다쳐 결국 숨이 끊겨져 버렸다. 뱃속의 아이도 결국 살리지 못한 채 어머니와 같이 한줌의 흙이 되어버렸다. 저수지에서 멱을 감던 아이도 머리에 총을 맞아 머리 반쪽이 날아간 채 죽어버렸다. 이미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크게 확대한 사진 아래 그들의 사연을 보자니 가슴이 막막했다.

 

계엄군의 총은 시민군이든지 광주시민이든지 그냥 길 가던 어린 학생이든지 그 누구도 상관없었다. 보이는 사람이나 움직이는 그 모든 것에 사격을 가할 뿐이다. 지나가는 버스에도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니, 만일 그런 장소에 우리 엄마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광주에 사는 부모님의 친구와 친지들이 그 철저한 시간에서 고통 받은 것을 생각하니 참 기가 차기도 했다. 전시관을 둘러본 후 나는 518묘역에 올라갔다. 작은 비석에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옆에 희생자의 사진이 있었다.

 

전에는 묘역안을 그렇게 둘러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둘러봤다. 1번 찾아봐야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6-12묘역의 주인, 합수(合水) 윤한봉, 이분을 부를 때 합수라고 하는데, 합수를 물이 합쳐지는 게 아니라 똥과 오줌 그 밖의 오물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모든 더러운 것이 모여도 결국 땅에 흘러가면 거름이 되어 다시 윤택한 삶으로 이어지자는 의미로 불린 것이다. 합수 선생의 친지들과 우리 가족의 친지들은 대대로 계속 알고 지낸 사이였다.

 


엄마에게 윤한봉을 아냐고 물어볼 때 어디 TV에서 봤다고 할 정도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아주 독한 놈이다, 골병들어 죽은 놈 아니냐.”라고 말했다. 시골에 집안제사를 지내려 갈 때 내 친가쪽 식솔들은 모두 벽송마을에 찾아간다. 벽송마을 입구와 마을회관 인근에 윤한봉 선생의 집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었다. 벽송마을 집안제각에 가면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그 비문을 보면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이름을 어느 노인분이 찾아주었다. 윤한봉 선생의 친척이었을 것이다.

 

윤한봉 선생은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노동과 인권, 남북대화, 더 나아가 세계평화에 대해 고민하던 분이었다. 당시 많은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하고 같이 활동하던 분이었다. 그런데 막상 생각하니 이번 노회찬 의원이 자살을 하여 그 생을 마감했다. 노회찬 의원도 젊은 시절부터 계속 노동운동을 하셨고, 사회문제에 많은 참여를 통해 국민들에게 큰 호감을 가진 분이다. 그런 노회찬 의원도 윤한봉 선생을 찾아간 적이 있다고 한다. 왠지 노회찬 의원이 지금 다시 윤한봉 선생에게 찾아간 일은 너무 이른 것 같다.

 

지난 6월 노회찬 의원이 합수 윤한봉선생의 11주기를 맞이하여 광주를 방문했는데, 이제 1달 되었을 뿐인데, 정말 아까울 뿐이다. 5월의 슬픔은 아직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게다가 그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군부세력은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는데, 그렇게 세상일 등지니 허무한 느낌이 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보다 덜 슬프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만큼 안타까운 일이다. KTX 여승무원도 다시 직장으로 복귀하고, 삼성백혈병 환자의 문제도 조금씩 해결가고 있었다. 노회찬 의원이 노동문제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사람이 살만한 바람이 불어오는가 하더니 그 바람 속으로 노회찬 의원이 사라졌다.

 

아직 광주의 5월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하고, 그들을 학살한 이들에게 단죄가 내려야 한다. 그리고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 국민을 적으로 간주한 군부쿠데타 세력도 들추어내야 한다. 빈곤에 허덕이는 가난한 서민과 희망을 버린 청년취업준비생에게도 희망을 넣어줘야 한다. 노회찬 의원이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그렇게 가니 하늘이 무심한 것 같다. 기득권에게 저항한 그의 삶을 기억하며, 더 이상 이런 슬픈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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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님에 대해 다들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신영복 교수가 어떤 분인지 무슨 업적을 남겼는지, 그리고 어떤 책을 남겼는지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 네 글자만 들어보면 누구나 !’하고 탄성을 낼 것이다. 소주이름 처음처럼이다. 소주 처음처럼은 이미 대중들이 자주 마시고 있는 메이커 중에 하나이다. 그 글귀 원본이 신영복 교수님이 적은 글이다. 신영복 교수님은 사상적으로 어마어마한 사유를 지닌 분이기도 하나, 서예가로서 또한 서예와 같이 그림을 그려 넣는 예술가의 혼을 느낄 수 있다.

 

한국과 세계를 돌아봐도 이렇게 뛰어난 학식과 이성, 그리고 인품과 근성, 더 나아가 예술적 감성과 감수성을 지닌 분은 흔치 않다. 신영복 교수님의 책 몇 권이 시중에 나온 것을 알아도 이때까지 읽어보지 않았다. 단지 신영복 교수의 책보다 매년 나오는 달력을 구매하여 다른 사람에게 선물한 적은 있다. 달력에서 날짜와 더불어 그 달에 대한 그림도 역시 중요하다. 겨울이면 눈과 눈사람이 나오고, 가을이면 맑은 하늘과 과실이 달린 나무가 우리 정서를 풍부하게 한다. 신영복 교수님의 글은 마치 맑은 가을하늘 아래 감나무에 맺힌 맛있는 단감 같은 느낌이다.

 

나무가 씨앗을 뿌려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우려면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을 교대로 하여 수 년 이상을 보내야 한다. 태풍에 잎사귀가 떨어지고, 가뭄에 가지가 말라간다. 그러나 가을이 오면 단감은 배고픈 이들에게 좋은 간식거리가 된다. 내가 단감을 떠올린 이유는 결혼 전 내가 살던 집 마당에 감나무 2그루가 있다. 도심지 내 감나무라 맛은 없지만, 그래도 감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부모님은 농촌출신이고, 다들 배고픈 시기를 보냈다. 배고픈 배를 뒤로 하고 집 마당에 감나무가 열리면 나무를 타고 감을 딴다.

 

단감 몇 개를 먹으면 주린 배도 채우고, 단감 과실에서 상큼하고 단맛이 올라온다. 신영복 교수님은 마치 단감나무와 같은 분이다. 비닐하우스에서 폭풍과 홍수, 가뭄도 겪지 않은 현재 엘리트 지식인들과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게다가 동서양 고전을 모두 읽었고, 최근 프랑스철학자이던 질 들뢰즈와 펠리스 가타리의 서적도 거론한다. 그의 지평은 동서양이란 공간적 영역에서 현재와 과거 그리고 더 나아가 미래까지 넓히는 시간적 영역을 통찰하는 지식인이다. 최근 진보성향 지식인 내지 정치인에게 실망한 적이 많았다.

 

그 이유는 시대적 흐름, 산업적 환경, 경제적 조건, 세계화 흐름이 있을 것이다. 엘리트들의 대학은 언제나 좋은 대학교이다. 진보정치인 내지 엘리트들은 주류대학교 출신이 많다. 그들은 진보의 이름을 내걸지만, 한편으로 엘리트주의가 보여주는 지식의 폭력성을 반성하지 않는다. 성리학을 만든 주자의 저서 중에 <대학(大學)>이 있다. 젊은 지식인 엘리트들의 대학은 상위학력을 지닌 대학교지만, 신영복 교수에게 대학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감옥이었다. 2020, 그 기나긴 시간 속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군부독재가 자리 잡은 암울한 60년대 후반, 사관학교 교관으로 경제학을 가르치던 교수님은 반정부 세력으로 몰려 자유를 빼앗겨야 했다.

 

단지 청구회 활동이 권력의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자기가 처음 간 수감방에 사형수와 무기수가 머물던 방이다. 실제 같은 방에 있던 감방 수감자가 사형을 당했다. 죽음과 마주한 곳, 자유를 박탈한 곳, 세상과 단절된 곳, 더 나아가 암울한 시대를 반영해주던 차가운 교도소는 신영복 교수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신영복 교수님이 저술한 <감옥으로부터 사색>이란 글은 엄청난 내용이었다. 물론 교도소에서 서신을 확인하기 때문에 신영복 교수님 자신이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의 글은 매우 깔끔하고 청조하며, 맑은 정신에서 드러난 인품 그 자체였다.

 

학자로서 아버지와 대화하는 지식인, 가족과 친지를 위해 따스한 글을 남기는 삼촌, 옆에 수감되어 있는 일반 교도소 수형자를 바라보는 인간적 시선, 이 모든 게 인상적이었다. 신영복 교수님은 이 세상의 어둠을 없애는 것이 옳다고 봤지만, 그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해 거만하게 보는 것을 무척 경계했다. 교도소에 처음 온 어느 청년은 너무 가난해서 치약도 없고, 죄수복 안에 속옷도 없었다. 치약과 속옷을 다른 이들이 주자 그 청년은 화를 내며 거부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 청년은 교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사유를 물어봤다.

 

마치 자기가 그대로 타인의 호의를 받는 순간, 자신의 자존심, 자신에 대한 삶의 정체성이 부정당할 것 같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다른 이에 대한 시선이 늘 그들보다 위에 있다는 오만함을 깨닫지 못한다. 자신들의 기준, 보편성의 기준에서 물론 대상자는 틀리거나 전혀 좋은 방향이라 볼 수 없다. 하지만 막상 그들의 입장에서 그렇게 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거나, 타인의 간섭이 아닌 자신의 의지가 아니고선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아마 지금 진보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이런 신영복 교수님의 경험과 깨달음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세상은 관계성에서 시작한다. 관계성에 대한 부분에서 더불어 나가는 길은 자신의 선에 맞추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관점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길 가끔 못난 사람들이 오기를 부린다고 하지만, 오기는 불친절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단이란 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신영복 교수님이 바라본 교도소는 완벽한 인간학의 공간이었다. 교도소에 오는 범죄자 중에서 죄질과 심성이 나쁜 사람은 있지만, 대부분 보통 사람과 비슷한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사회적 시스템이란 인클로저 앞에서 더 이상 몰릴 곳이 없어 교도소로 온 사람도 많았다. 고의성보단 우발성, 그 우발성을 만들어낸 사회의 차가움, 우리 사회는 너무 차갑게 변하여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저 물건 내지 상품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돈은 최고의 가치이다. 돈은 모든 가치를 화폐라는 단위로써 나타내는 수단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우리 현대인들의 삶이다. 그 삶이 시간으로 제단 되어 지불수단의 척도로 변모된다. 시간을 규정함은 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그 시간 안에 우리는 노동을 제공하여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는다.

 

돈은 화폐지만, 돈을 위해 노동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의 노동력을 돈으로 산다 해서 그 인간의 인간성 내지 존엄성까지 구매한 것은 아니다. 전에 집에 에어콘을 설치한 적이 있었다. 에어콘 설치 시 다행히 휴일이라, 작업할 때 나도 같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어에컨 설치는 9시 반 ~11시 반 사이였다. 날이 그래 무덥지 않으면 부산하게 몸을 움직이는 에어콘 설치 설비기술자들이 작업할 때, 아침을 먹지 않은 나와 와이프는 지켜보고 있었고, 와이프는 아침을 먹지 않아 배고파 10시 정도 라면을 먹고 싶다 했다.

 

나는 지금 에어컨 설치작업 중이니 먼지가 날릴 수 있고, 그리고 작업 중인데 우리가 라면을 먹고 있는 게 조금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내 집에서 그냥 라면 먹는 게 어떠냐는 말을 와이프는 했지만, 내가 다소 말렸고, 나중에 작은방에 가서 조금 쉬어달라고 했다. 나는 음료수 2개를 미리 사왔고, 그분들에게 드렸다. 물론 에어컨 설치기사들이 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옆에 없어도, 라면을 먹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나는 그들을 그저 돈만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 볼 뿐이지, 그들의 입장과 마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그들은 우리 집의 손님은 아니나, 방문자들이다. 우리 집에서 에어컨을 설치하여 거기에 대한 대가로 돈을 지불해도 그들은 사람이다. 신영복 교수님의 글이나 혹은 <자본론>과 같이 노동을 하는 있는 노동자의 노동력이 그저 돈으로만 따지게 된다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다. 인생에 대한 글을 적으면서 신영복 교수님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야하고, 가슴에서 발로 움직여야 한다 했다. 본인 자신도 편한 곳에 있기보다 보통 수형자들과 같이 지내고, 작업반에서 직접 기술을 배우고 일도 한다.

 

손바닥에 고생을 하지 않은 채 펜대만 돌리는 글은 세상을 제대로 들어다 본 글이 아니다. 지금 진보정치인과 엘리트들의 문제점이 뭔지 잘 알 수 있는 글이다. 시대적으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군사독재시기에 활발히 일어났다. 많은 이들이 산업재해로 죽거나 다치고, 이들을 대변하는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여 죽거나 다쳤다. 이때 산업구조는 농업에서 공업으로 바뀌고, 대부분 산업구조가 공업으로 바뀌었다. 당시 노동운동을 하던 분들은 많았지만, 현재 노동운동이 진보정치의 중심 틀에서 보기에 많은 우려감이 들었다.

 

현재 산업구조는 공업이 아니라 서비스 위주이다. 서비스이기에 농업과 공업은 극대화된 기계화로 생산력을 증가했다. 하지만 농업인구는 감소하고, 공장에는 젊은 사람들이 가지 않으려 한다. 그래도 우리는 사회적 재화를 누리기 위해 늘 생산된 물품에 대해 노동력을 더하여 또 다른 상품으로 전환된다. 상품의 전환에서 죽은 노동이란 불리는 재료는 그 재료로 변모하기 위해 인간의 노동력이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들어간 죽음노동의 탄생을 위한 노동력은 주시하지 않는다.

 

옷을 하나 입을 때, 옷감이 폴리에틸렌 계열이고, 폴리에틸렌은 석유에서 나온다. 석유는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으니, 석유를 반입하려면 선박이 직접 산유국에 가서 구매한다. 석유를 화물로 적재할 때 투입되던 선원들의 노동력, 그리고 배를 움직일 때 노동력, 한국 부두에 도착해서 석유를 이송할 때의 노동력, 공장에서 가공할 때의 노동력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폴리에틸렌으로 만들어진 최신의상일 뿐이다. 우리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 모든 것은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노동들의 의미가 단순히 돈의 논리로 모조리 해명된다면 그동안 상품으로 시장에 나올 때까지 일하는 노동자의 의미는 없어진다. 물론 생계를 위한 활동으로 노동을 하지만, 그들의 입장은 너무 처량하다. 비정규직이 정규직 인원 비율을 넘어서고, 임금상승비율보다 물가상승비율이 오를 때 우리의 삶은 피폐해져 간다. 이럴 때 가끔 내가 아주 어릴 적 시골집에 갈 때가 생각난다. 아직 어린 나와 형이 엄마 뒤를 따라 종종 걸음으로 따라 시골집에 간다. 늦은 저녁 가로등도 보이지 않은 시골길에 오래된 무덤들을 지나간다. 그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골집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반겨주고, 할머니가 부엌 가마솥에서 장작불로 만든 밥과 누룽지를 먹으면 매우 좋았다. 이제 전통농촌사회를 기대할 수 없고, 여성에게 모든 가사를 요구하는 것도 안 되는 것은 알지만, 어린 시절 느끼던 그런 추억과 따뜻함은 내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시간이다. 차가운 공간에서 차갑게 시간으로 제단 되어버린 인간 속에서 우리의 삶에 오아시스는 있는가? 신영복 교수님은 인간학을 중시했다. 인간이 중심 되는 그 세상에 인간은 오히려 외부로 소외되고 있다.

 

삶의 경쟁에서 모든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나마 내 삶의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 삶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나 우리의 지난 것도 버리지 않은 것도 중요하다. 지난 것들에서 잘못된 점이 많다면 새로운 것 역시 잘못된 게 많다. 그래서 넓게 스펙트럼을 보고, 그 안에서 다양한 것들을 보는 것이 우리 삶에서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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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9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9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8-06-19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교수님이 계시던 감옥은 몸을 구속했지만, 정신을 구속할 수 없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반면, 감옥 밖의 세상은 몸 대신 정신을 구속당했던 것을 보면, 지난 시절은 참 어두웠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도 그리 밝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만, 세상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만화애니비평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중심의 세상이 되어야 겠지요. 그리고, 인간 중심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 개혁 이전에 먼저 우리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개인적인 성찰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6-19 15:46   좋아요 1 | URL
요새 보면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기사가
아파트 경비실 직원이 마음에 조금 안든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욕하고 때리고 억압하는 태도를 보면 참으로 답답합니다.
그들은 돈을 받고 자기 업무에 대해 일하는 분이지, 주민 시중들기 위해 계시는 분들이
아닌데 말이죠. 인간(타인에 대한 관계성)중심이 아닌 개인중심으로 치중된 세상에서
잠시 친절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게 시작인듯합니다.
 
진보의 미래 (특별 보급판) -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쓴 시민을 위한 대중 교양서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
노무현 지음 / 동녘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읽은 도서이다. 나는 진보적인 사상이 강한 분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고백하기에 노동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고 한다.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 문재인 정부에 불만을 느낄 진보 내지 노동운동가분들이 많을 것이라 본다. 그런분들에게 이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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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5-24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무현, 문재인이 오른편 자유한국당보단 진보지만 진정한 왼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어려운 여건에서도 잘 하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8-05-24 22:35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금전적으로 안정적일 때 노무현 재단에 후원했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을 읽는 처지에 노동자의 슬픔을 어찌 모를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 이순간을 하나의 전환기라고 봅니다. 자본론을 읽어도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로 이향되는 것은 자본주의가 완벽한 조건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비에트 러시아의 실패는 그런 자본주의적 조건 즉 물질적 토대가 되지 않아 실패했습니다. 노무현이란 존재는 즉 전과정적인 존재라고 봅니다. 다들 목적지를 원하지만 그 과정을 싫어합니다.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2018-05-24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4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5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5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5월은 참으로 여러 가지 바쁜 시기이다. 55일 어린이날을 시작하여 58일 어버이날, 515일 스승의 날, 성년의 날과 부부의 날, 하다못해 음력을 기준으로 부처님 오시는 날 역시 5월이다. 5월의 푸르고 더운 봄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여유와 더불어 의무감을 부여하는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5월은 그렇게 아름다운 일만 존재하는 달은 아니다. 5월은 언제나 슬픈 일도 있다. 523일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한 날이 다가오고, 그 이전 518일은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이 떠오르는 날이다.

 

최근 지만원 씨가 지목한 광수73호가 사실은 광주시민군이었고, 그는 평생 조용히 아픔을 숨긴 채 살아가고 싶으나, 그분의 따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전혀 상관없는 북한 특수부대란 오명을 지만원 씨에게 받자, 그 가족들은 과거의 아픔을 알리기 시작했다. 5월의 즐거움과 감사함이 따르는 이상으로 슬픔은 크다. 실제 광주518 망월묘역에 가면 유가족들이 한약 한복을 입고 묘비를 닦아주고, 기념전시관을 들여다보면 피가 묻은 옷들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다. 5월이란 그런 시기이다. 모든 생명이 움을 트는 시기라면 어느 생명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꺼져가는 것을 말이다.

 

5월의 시작은 May-day, 즉 노동절이다. 한국에서 근로자의 날이나, 외국에서 노동절로 통하고, 노동절이 되면 유럽의 선진 국가들은 국경일로 휴무를 취하고, 각종 노동운동 관련 행사가 길거리에서 일어난다. 노동이란 단어를 들으면 한국에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본인 자신도 임금을 받고, 5일에 8시간 근무하기 바라면서 왜 그런 것인가? 사회적 통념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자신은 힘든 공사장과 공장 같은 곳이 아니라 돈도 많이 받고 쾌적한 곳에만 일하기를 바라는 심리일 것이다.

 

어린 시절, 대부분 어른들은 공장에 가면 돈도 많이 못 벌고 힘든 일만 한다고 했다. 우리 세대의 부모들은 다들 공사장과 공장에서 몸을 축 내면 일을 했고, 그렇게 몸이 망가진 채 노년을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면 가는 경우가 많다. 안전도구와 지침은 필수적으로 착용하고 지켜야 하나, 막상 현장에서 그런 일들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최근 서해 쪽 고속도로 건설 중에 노동자 4명이 공사용 난간이 무너져 30m 가량 낙하했다. 그곳에 안전관리자와 공사관리책임자는 없었다. 건설노동자는 하루하루 일을 해야 임금을 받는다. 그들과 상대하면 매우 거친 인간이고, 보통의 상식으로 대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힘든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근무하는 중간에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며,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도 언제나 반주이다. 담배를 마구 피며 던지지만, 사실 누구보다 인간적인 분들이다. 자신의 몸을 망가져 가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챙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분들의 마지막은 언제나 슬프다. 자신의 실수보단 안전문제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안전에 대한 관리기준은 결국 투자에 비례한다. 기업에서 수급한 공사금액에서 하도로 넘길 때 이윤을 챙기기 위해 안전관리를 소홀히 한다. 안전모와 안전화는 개인의 것을 사용해도 안전비계나 도구들 300만원 아끼려 할 때 사고로 그 수십 수백 배를 손해 보는 일이 많다.

 

그런데도 계속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고의 확률은 전체 공사 진행과 대비하여 매우 적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목숨보다 고귀한 게 이윤이다. 이윤의 가장 큰 조건은 빠른 시간에 해당 공정을 정리하여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전 공정이 계속 발목을 잡으면 다음 공정까지 더 많은 시간을 소요되고, 그때까지 대출이자의 상환금은 높아지고 이윤은 축소되며, 다음 계약을 착수할 시간적 여유가 줄어든다. 결국 자본의 순환을 위해 인간의 생명과 건강은 무참히 밟히는 현실이 우리 사회의 슬픔이다.

 

이런 사회적 약자에 대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보장해준 시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과저 노동자 몇 명이 사고로 죽어도 뉴스조차 나오지 않았다. 건설로 통한 선진한국을 이룩하기 위해 부정적인 언론을 내보서는 안 되었다. 공장에서 어린 소녀들이 열악한 환경에 병에 걸려 피를 토하고, 폐가 손상되어 차가운 방에서 외롭게 생을 접어갈 때 세상을 그녀에게 따듯한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여공소녀들이 먼지가 날리는 공장 닭장에서 울어야 했다. 우리는 그런 과거를 잊고 살았다. 오늘날의 한국을 이룩한 것은 한강의 기적이 아니다.

 

한강의 둔치에서 눈물을 흘리던 어린 소녀와 강변에서 홀로 외롭게 술을 마시며 달래던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강은 기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 기만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매우 짧다. 주권을 빼앗긴 것과 더불어 전쟁의 상흔이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냉전이 지배적이었고, 자본주의 시장체계가 부흥하던 시절이다. 돈이 국가를 위해서라면 무조건 희생되던 시절, 막상 돈이 국가로 모여도 그것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에겐 혜택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임금은 제자리고, 노동 강도는 더 강해졌다.

 

5월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저 행사에만 집중하지만, 5월은 저항과 혁명의 시기이다. 55일 현대철학과 경제학 그리고 문학과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친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이다. 200주년이 된 그의 탄생기념일이고, 그가 저술한 <자본론>이 세상에 알려진지 약 150년이 넘었다. 현대 경제학을 바라보면, 고전경제학의 시초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어도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제시한 자본주의의 문제는 지금 보아도 큰 괴리감이 없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속에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의 삶은 겨우 조금 나아진 점이다.

 

지금 한국이나 유럽에서 만 5세의 어린 아동이 공장 엔진에서 고된 노동을 하지 않는다. 방적기계를 돌리다 이제 중학교 되는 어린 소녀가 손가락이 잘리거나, 30세 정도 청년들이 폐암이나 폐질환으로 사망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일들이 마르크스가 150년 전에 목격한 일들이다. 마르크스를 두고 사람들은 그저 사회주의 사상가 내지 공산주의 이론가 창시자 정도로 알 것이다. 주변에 어느 누가 경제학과를 나와 내가 개인적으로 <자본론>을 읽어봤냐는 말에 대부분 아직이란 대답이 많았다.

 

경제학에서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으로 구분하여 배우고, 거기에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보단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을 더욱 선호하는 한국 경제학이다. 문제는 사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도 엄연히 노동자의 자리로 들어가는데,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사회적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만 하라고 배우고 생각해도 막상 현실의 벽은 이론적 역량과 별개의 문제이다. 신자유주의에서 경쟁의 자유라고 해도 그건 공정한 조건이지, 대기업과 정부기관의 유착관계, 법과 도덕을 초월한 경제논리에서 스미스의 <국부론>은 결코 예상하지 못한 문제였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저술한 시기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자본론>을 읽으면 단순히 자본주의 문제점을 거론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를 연구한 서적이다. 자본의 흐름과 유통만 아니라 자본의 시작과 탄생, 자본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역사와 정치, 더 나아가서 혁명과 사회적 헤게모니까지 이어진다. 마르크스는 기존 사회는 관념으로 통찰하는 것을 지나 물질적인 토대가 되어 움직인다고 보았다. 가령 한국에서 법을 제정하고 개정할 때 임금이나 아동정책, 그리고 교육정책을 보면 인구감소와 영아출생 그리고 결혼비율에서 조인한다.

 

물질적 토대, 즉 인구의 비는 관념적인 조건이 아니라 현실 있는 그 자체의 조건이다. 인구의 비례에 따라 시장체계는 변화하고, 정책도 바뀐다. 자본이 인구문제를 야기 시켰으니, 이제는 인구의 문제가 자본주의 체계를 위협한다. 사람들이 인구가 감소해도 오히려 기술발전이 되어 노동인력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분명 기술발전과 과학의 진보는 인력의 감축을 유발하고, 사람의 손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기계로 대체하면서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상품의 수보다 기계에서 찍힌 상품의 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말은 무엇이냐? 결국 고생산성이 인력이 감축하여 노동력의 투입을 감소시켜도 그 상품에 대해 구매해야 할 대상들은 더욱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구매자들이 부족하고, 상품은 나와도 팔리지 않는다.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기업은 이윤을 추구할 수 없고, 끝내는 기업을 접어야 한다. 인력의 감소는 경제활동에서 생산만 보는 게 아니라 소비의 대상까지 이어진다. 교육대학교 학생들이 과다선발로 인해 임용 후 대도시권 진입이 어렵다고 한다. 대도시권이 아닌 농촌과 어촌의 모든 학교의 필요교사 인원을 더해도 서울의 교사 수보다 적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수도권 초등학교 정원이 감축하고, 변두리지역은 폐교에 이른다. 폐교가 되는 순간 임용교사의 취업률은 저하되고, 결국 교육대학교 정원수는 감축된다. 학생 수가 감소되면 교육관련 업체와 학원, 각종 아동 생산품들의 소비가 감소되고, 그 아동들이 성장함에 따라 관련 생산품들의 소비 역시 감소된다. 인구의 감소, 노동력 감소로 외국인의 이민을 늘리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에 정착하기 어렵고, 정착하기 위해 의식주에 많은 비용이 필요하며, 그 이상의 생산품을 소비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정책의 방향에서 마르크스의 고찰과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연구는 거의 들어맞는다. 단지 마르크스가 부정적인 대상이 된 이유는 그의 예언이 일치하지 않았고, 제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은 산업혁명이 이룩한 지 반 세기가 도래하던 시대다. 공장의 매연과 폐수는 강과 하늘을 덮고, 많은 하층민들은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렸다. 주간의 공장은 어느덧 24시간 체계로 바뀌었고,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오던 사람들은 아침에 가서 다음날 아침에도 공장에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마르크스는 그런 이들에 대한 연민감과 그들을 착취하는 부르주아를 경멸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은 국가체계 상 위협적이었고, 그는 환대받는 학자가 아니라 주의와 감시의 대상이었다. 마르크스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박사학위까지 받은 엘리트이다. 헤겔학파 청년이던 마르크스는 관념적인 망상을 떠나 실제적 현실을 보자고 했다. 라인신문을 다니다 폐간되고, 파리와 브뤼셀로 옮기면서 그는 새로운 사상을 연구하고 전파하려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만큼 대단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평생 마르크스의 친구이던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의 연인이며 아내인 예나였다. 예나는 베스트팔렌 가문의 영애였다. 부유한 귀족집안 출신인 그녀가 평생 화려하고 품위 있는 귀족의 딸이 아니라 노동운동가의 아내로 살아야 했다.

 

가난과 배고픔, 질병과 추방이란 아픔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와 평생을 나누었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에서 예나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정열적인 여성으로 나온다. 마르크스가 홀로 영국에 가야할 때, 그는 고민한다. 아내와 어린 딸을 나두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르크스에게 예나는 오히려 그 길을 가라고 권유한다. 위대한 혁명사상가와 혁명가는 그 자신만으로 위대해진 것이 아니다. 그 옆에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적인 아버지 장 자크 루소는 테레사라는 여성이 있었고, 볼셰비키 혁명을 이룩한 레닌과 트로츠키 역시 자신과 함께 한 여성이 있었다.

 

영화에서 마르크스의 열정적 삶을 그릴 때, 좌절과 시련의 시간에서 예나가 보여준 용기, 그리고 예나와 마르크스가 서로 격렬한 애정행위를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마르크스가 나오는 점, 마르크스의 삶을 조명한 점에서 상당히 이 영화는 정치적인 이념이 가득한 작품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삶에서 예나의 모습은 없을 수가 없었고, 엥겔스의 옆에도 공장에서 노동하던 여성 메리의 모습 역시 지울 수 없었다. 혁명에 대한 열정과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무모하게 대항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예나의 모습에서 영화는 지겨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영상시간 100분이 금방 갈 정도로 영화 프레임은 갈등과 갈등 그리고 저항과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마르크스가 프루동 박사와 대립하게 된 동기가 나온다. 프루동은 <빈곤의 철학>이란 서적을 내놓는다. 가난하고 소유물이 없이 평등하면 좋을 것이란 생각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상에서 조금 틀어진 사고방식으로, 루소는 너무 가난해도 안 되고, 너무 부유해서 안 된다고 했다. 루소의 <정치경제론><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으면 마르크스의 사상가 매우 흡사한 게 많았다.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이 자연적 원인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란 것을 밝혔다. 단지 마르크스가 제시한 것처럼 그 수학적 원리를 내세우지 못했을 뿐이다. 산업혁명이 아직 제대로 태동하지 않았고, 농업과 수공업 중심이 되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착취의 개념을 시간과 노동력의 착취, 그리고 노동력과 생산수단 간의 관계, 임금과 물가 간의 관계를 연구했다. 실제 <자본론>을 읽으면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물가가 상승하면 상품의 가격이 상승하여 자본가는 이윤을 확대하고, 물가가 하락하면 임금을 하락하거나 동결하여 지출을 감소하여 이윤을 확대할 수 있고, 또한 가격이 저하되면 상품이 박리다매하기에 이윤을 확대할 수 있다고 말이다. 어느 것이나 자본가가 손해 보는 일이 없다. 그 조건이 노동력의 착취가 계속 되는 조건 아래서 말이다.

 

영화는 마르크스가 라인신문 폐간에서 <공산당 선언>이 나오기까지의 여정을 그린다. 그가 다투던 대상은 권력을 가진 정부와 자본가만이 아니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이었다. 현실을 망각한 채 형제애를 외치는 바이틀링, 현실물질 조건을 경시하던 프루동과 바쿠닌, 그 외의 많은 사회운동가 역시 다투었다. 현재 이중에서 가장 신뢰하고 높은 가치를 지닌 인물은 마르크스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승리자가 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추구하던 사회는 영원히 올 수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생산조건이 어느 일정단계 이르면 더 이상 생산할 필요 없이 컨트롤하게 되어 노동착취가 일어나지 않을 생산단계가 목표였다.

 

러시아 소비에트의 실패는 생산조건에서 생산수단의 기술력 한계, 생산품에 대한 보급, 생산품이 사회에 끼치는 실용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소비에트가 존재해도 이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미래에는 지금과 비교하여 훨씬 더 좋은 생산품과 뛰어난 과학기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이런 생산품을 대중에게 보급하기 좋은 수단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 구조에서 대부분 시민인 노동자를 희생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보장하게 만드는 것이 마르크스가 남긴 업적이다.

 

마르크스와 많은 사상가들이 활동하면서 유럽의 19세기는 혁명의 시대를 만들었고, 유럽은 혼란의 시기를 보냈다. 어느 누구는 마르크스에 의해 일어난 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나, 다르게 생각하면 마르크스의 사상이 없이 계속 고된 노동을 많은 시민들을 괴롭혔다면 그들의 죽음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제작진이 프랑스계열이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대화는 독일어로, 마르크스가 유럽을 망명할 때 프랑스어로, 마지막으로 생을 마친 영국에서 영어로 대화한다.

 

하지만 영화제작진들이 프랑스이기에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간한 <공산당 선언>이 등장한 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보여주며 마친다. 혁명은 참으로 달콤하면서 위협적인 단어이다. 실상 19세기는 유럽만이 아니라 남미에서 일어난다. 혁명이 있었기에 근대가 있었고, 근대가 있었기에 현대가 있다. 현대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권이다. 인권은 국가에 의해 생명과 재산이 보호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결합한 적에서 기업에서 노동자의 생명과 재산은 보호되는 게 아니고, 그저 관리되는 것이다.

 

노동자의 생명이 산업재해로 잃으면 막대한 벌금과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 영업시설을 며칠 간 정지해야 한다. 운이 없을 경우 언론에 노출되어 기업이미지 훼손으로 영업 손해를 보기도 한다. 노동자의 재산은 오직 자신의 신체밖에 없다. 신체가 손상당하는 재해현장에서 기업은 그저 약간의 보상비와 노동관리청에 부과하는 세금만 더 납부할 뿐이다. 그나마 제대로 신고하면 모르지만, 산업재해가 발생되면 산업재해보험금을 더 납부해야 하기에 일반 진료로 돌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비정상적이고 무책임한 일이 있기에 마르크스의 사상이 소비에트 붕괴와 함께 사라졌다고 믿은 20세기 말의 사고방식은 틀렸다.

 

21세기 역시 인간이 소외와 착취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교묘하게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있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의 대상물로 삼아 정복하기 시작했고, 그 정복이 끝이 나면 마지막에 인간은 인간을 착취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대해 많은 이들은 그 결과의 고통만 알지 그 과정의 흐름을 알지 못한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에서 마르크스는 그 과정을 찾아가며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마르크스의 삶을 알고 사상을 알아도 당장은 사회를 변혁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금씩 변화하며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 모두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나의 삶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후손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미래가 더 이상 의미 없다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삶을 위해 우리는 투쟁을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평생 사회적 약자 극빈층 노동자를 위해 살았다. 우리는 마르크스와 같이 살아갈 수 없고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가 말한 인간의 가치와 삶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 마르크스>를 본다면 그가 위대한 사상가 이전에 한 여인을 사랑하고, 늘 현실에서 방황하고 좌절했던 청년이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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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 되었다. 나는 그것을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가만히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조짐을 조금 이상하게 다가온 것은 429일이었다. 나는 2018428일 토요일 생애 처음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마치고 짐을 정리한 후 인천공항 인근에 있는 호텔에서 1박을 한 후 29일 낮 비행기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거기서 하루를 쉬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우연히 공항인근에 위치한 마트로 갔다. 공항과 지하철역과 인접한 마트라서 그래 큰 규모는 아니지만, 신문을 팔았는데, 거기서 우연히 재미있는 그림을 보았다. 카를 마르크스의 사진을 인쇄물로 나온 신문기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43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중앙역에서 파리 동역에 가는 고속열차를 타고 난생 처음으로 프랑스로 가보았다. 평소 내가 마르크스의 책을 이래저래 읽었지만, 대부분 내가 읽는 철학, 문학, 인류학 등 관련도서들은 주로 프랑스학자의 책이었다. 가령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야생의 사고>, 루이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철학에 관하여>, <재생산에 관하여> 등의 서적을 읽었다. 물론 독일과 미국, 영국의 학자의 책을 읽은 것은 아니나, 20세기에 등장한 학자 중에 대부분 주류는 프랑스였다.

 

프랑스학자의 책을 읽으면 프랑스가 어떤 곳인지 대충 이해가 간다. 100% 좋다고 할 수 없지만, 한국과 다른 문화적 범위, 문화적 수용, 그리고 오랜 문화역사의 토대가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파리대학교와 파리고등사범학교를 가고 싶었다. 특히 파리 파리고등사범학교 주변을 가고 싶었다.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그의 자서전인 책을 읽으면서 그가 머문 파리고등사범학교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래 알튀세르는 가톨릭 신앙을 믿는 집안이었으나, 추후 마르크스주의로 돌아선다.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네오-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로 변환되나. 마르크스의 학문의 영향이 얼마나 크게 끼쳤으면 프랑스 8대학과 10대학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관련 학문이 강하다. 그런 파리에 갔는데, 그런 대학교 가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쉽다. 물론 파리에 가니 그런 이유를 잘 알 것 같았다. 에펠탑 앞 하천 건너 위치한 에밀 졸라 거리에 우리의 숙소가 있었다. 그 숙소에서 실제 에펠탑까지 걸어가는 시간은 20~30분 내외였다. 그 곳을 처음 방문을 430, 길을 찾기 어렵고, 스마트폰 인터넷을 신청하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지만, 결국 찾아 갔다.

 

문제는 다음날, 51, 바로 메이데이, 또는 인터내셔널을 기념하는 노동자의 날이었다. 한국은 근로자이나, 외국은 노동자였다. 하다못해 프랑스 파리에 가장 많은 마켓인 Mono prix 마저 가게를 열지 않았다. 참 곤란했다. 호텔에서 조식을 신청하지 않더라도 중식과 석식이 문제였다. 우리가 노동절 전후로 파리에 갔으니 상점이 문을 닫고, 루브리박물관이 문 닫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참 아쉬웠다. 파리에 가는 것이 쉽지 않으나, 그날이 그런 날이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지만 나는 기분이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날이 노동자의 날이고, 한국에서 비교할 수 없는 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존엄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52일 오르쉐박물관에서 19세기 그림을 보았다. 그때 우연히 파리코뮌에 대한 그림을 보았다, 1871년 일어난 그 학살의 비극, 보통 사람들은 프랑스혁명에 대해 깊이 모를 것이다. 사실 1789년 바스티유의 프랑스대혁명은 귀족과 왕족의 죽음을 알지만, 일반 파리시민의 비극은 모른다. 파리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운동에서 파리의 자유와 평등 거저 얻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프랑스 지식인은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인들은 처벌하더라도 알제리에 대한 식민지정책에 불만을 표출했다.

 

프랑스를 알려면 이런 역사를 알아야 한다. 문화예술은 바로 이런 역사적 현실에서 나오고, 그 조건을 이해하지 못하면 전후맥락을 잃기 때문이다. 그리고 53일 하이델베르크에 가고, 54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 55일 우리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하우스를 찾아 다. 길 기가 어려워 잠시 인터넷 와이파이가 되는 카페에 갔다. 그때 우연히 독일 신문을 봤는데, 자주 본 얼굴 하나가 나왔다. 머리 모양이 다르나, 분명 카를 마르크스이었다. 55일은 한국에서 어린이날이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카를 마르크스의 탄생일이이다.

 

올해 2018년은 마르크스가 세상에 나온 지 200년이 되는 날이다. 그가 이룩한 업적을 생각하면 51일 파리가 너무 인상 깊다. 길거리에 문을 닫은 상가,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파리시민, 마르크스의 존재는 이렇게 현대인의 가슴에 살아있는 것이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귀환한 날은 56,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6시 반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내리니 낮 12시였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과 택시를 타고 신혼집에 오니 저녁 8시였다.

 

다음날 57, 그날은 어린이날 대체휴일이란 추모공원 봉안당에 모셔진 아버지에게 찾아가 성묘를 했다. 성묘가 마치고, 내 차에 엄마와 아내를 잠시 두고, 내 친구의 유해가 묻은 수목장 공간에 갔다. 친구가 이제 세상을 떠난 지가 3년이 다 되어 간다. 사람의 감각은 참으로 무섭다. 내 손에 아직 친구의 관을 잡고 병원 장례식장과 화장터 입구까지 운구한 느낌이 아직도 살아있다. 마르크스의 탄생과 노동절 그리고 친구의 묘비와 아버지의 봉안당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왜 우린 아직도 이렇게 가슴을 펴지 못하고 계속 울분을 감추어야 하냐고 말이다.

 

친구 여동생에게 1월 문자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친구가 분명 안전사고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났지만, 회사는 친구가 약을 먹는다는 이유로 다른 식으로 접근하려 했다. 재판이 2년이 훨씨 넘어도 계속 진행되고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 결혼식 때 친구의 여동생이 축의금을 주었다. 겉으로 미소를 띠고 있지만, 마음으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2018년 신년 대학동기들이랑 연락하여 죽은 친구의 부모님에게 인사가고 싶다고 했지만, 친구의 어머니는 우리를 보면 그 친구의 얼굴이 너무 생각나서 우리보고 오지 말아 달라 했다.

 

이게 노동자의 현실이고, 그 노동자의 가족이 처한 현실이다. 신문기사를 보면 노동자의 기사가 올라온다. 그들의 현실은 너무 딱하다 불쌍하다. 진보언론이 겨우 그들을 다루주고 있지만, 이상한 나라의 페미니즘이 있어서 짜증난다. 이상한 나라의 페미니즘은 노동자를 깔보고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산업재해로 친구를 잃고 가족이 크게 다친 것을 본 입장에서 상처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노동자가 있기에 우리는 하루를 편하게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은 힘들지만 즐겁지만, 그곳에 본 내 경험에서 한국의 현실은 그저 암울한 비극일 뿐이다.

 

진보언론과 지식은 정권이 교체 되어도 당장 노동자의 앞날은 나아진 게 없다 한다.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퇴보된 것도 아니다. 나도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었기에 그 마음을 알지만, 당장 해결될 수 없는 것은 안다. 하나하나씩 실오라기를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소비에트 붕괴 시 마르크스의 죽음이름으로 끝날지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예언은 맞지 않아도, 마르크스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태어난 지 200주년 그의 꿈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난 게 아니다. 그가 항상 마음에 두고 있던 자들이 세상에서 계속 고통 받는 한, 마르크스의 이름은 영원히 우리의 기억에서 돌고 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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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23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님 늦게나마 결혼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신혼 생활 보내세요!

만화애니비평 2018-05-23 21:58   좋아요 1 | URL
아하하 와이프에게 충성해야 결혼이 편하다는 그 진실이 차츰 깨닫게 됩니다..ㅎㅎ

2018-05-23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4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8-05-23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만애비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무려 신혼여행에다 마르크스와 알튀세르를 엮어내시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5-24 09:09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함께 대화했던 그 카페에 가다보니 그런가봅니다..ㅎㅎ

북다이제스터 2018-05-23 2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생애 처음’ 결혼식을 축하드립니다. ㅎㅎ

만화애니비평 2018-05-24 09:10   좋아요 1 | URL
생애 처음인지라 요새 정신없이 바쁜가봅니다. 감사합니더...ㅎㅎ

짜라투스트라 2018-05-24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비자가 잠시 불편해도 노동자가 편해진다면 그 사회는 노동자의 권리가 존중받는 선진 사회겠죠 그런 사회의 모습을 경험하고 오신 듯 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05-24 15:01   좋아요 0 | URL
한국은 소비자나 노동자 모두 불편한 곳이죠...
외국을 가니 종업원이 직접 메뉴판을 주고, 돈을 계산할 때 오는 점에서
한국의 소비자는 노동을 대신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