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를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한국경제를 두고 자유시장주의 즉 자본주의적 가치를 토대로 이루어진 시스템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라고 해서 자유시장 경제 체계를 자유권리를 가진 국민의 힘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유럽의 길드연합이 존재하던 시절이 더 자유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국가의 통제권한이 지금과 비교하면 덜하면 덜 했지 더 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대 자본주의 체계가 자유시장 보단 국가의 개입이 완강하다. 지난 보수정권에서 자유주의 경제구조를 도입했다고 하나, 그 속에는 국가의 개입이 여전히 있었다.

 

국가의 개입이 없는 시장 따위는 없다. 결국 시장은 세계는 국가

라는 시스템과 더불어 경제활동을 하는 국민과 기업 그리고 여러 조건들에 의해 움직인다. 경제를 두고 사람들은 많은 말을 한다. 하지만 정작 경제학(經濟學)이란 영역을 들어가지 않는다. 정치학이란 영어철자는 economics로 불린다. 하지만 경제학은 단순히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적 요건이 갖추고, 세계적인 고전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를 읽게 되면 생각이 바뀐다.

 

세계 경제학의 시초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을 읽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학의 원리와 일반적으로 세계에서 흘러가는 경제학은 다르다. 경제학은 많은 재화가 생산되어 소비자에게 소비되어 그것으로 인해 소비자는 생활의 도움이 되고, 판매자는 수익을 거두어 이윤을 추구한다.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원료, 노동력, 물류 등 각종 업무로 통해 많은 직업을 창출하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생계를 일구어 갈 수 있는 최적의 시스템을 목표로 하는 것이 스미스의 경제철학이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자 이전에 윤리도덕학을 전공한 철학자였다. 그가 <국부론>을 적은 이유는 당시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는 공업화로 통해 재화가 대량생산되고, 거기에 많은 소비자가 소비를 했다. 결국 경제를 잘 돌아간다는 말은 더 많은 종류의 상품이 더 많이 생산되어 소비자가 계속 소비되는 것이 목표이다. 소비자는 노동자이기도 하지만, 결국 생계를 이어가는 국민이다. 소비와 생산의 관계성에서 자본주의는 그렇게 성장했다. 이번에 감상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바로 그런 시스템이 붕괴하던 한국의 지난날을 다시 돌아보는 작품이다.

 

IMF, 그것은 하나의 재난이고 저주였다. 많은 은행이 도산하고, 기업이 부도나고, 기업가들은 도망치거나 구속되고, 노동자들은 절망의 외침을 내거나 심각한 경우 목숨까지 버렸다. 한 해 자살 율이 40% 증가하던 그 절망의 시기, 이때의 우리에게 닥친 것은 불황이다. 경제학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본주의의 시작은 자본이다. 자본은 무엇에서 시작하는가? 바로 화폐에서 시작된다. 화폐는 무엇을 중심으로 돌아가는가? 그것은 기축화폐, 전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통화(通貨)를 말한다. 통화의 움직임이 없다면 돈의 흐름도 없다.

 

돈의 흐름이 없다면, 돈이 돌 수가 없다. 돈이 돌 수 없으면 재정적으로 파탄 나고, 부도가 난다. 한국 경제학에 대한 성찰에서 경제학과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단지 애덤 스미스나, 존 스튜어트 밀, 루소, 마르크스&엥겔스 책 몇 권을 읽은 정도이니 완전 일반인으로 보기는 어렵지만)으로 보자면, 그래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경제사는 이제 100년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 경제는 일제에 의해 자본주의 개념이 들어왔으나, 자유경제는 없다. 전시 군국주의적 경제체계에 의해 자유경제가 아닌 식민지 경제에 돌입된 것이다. 자유경제구조라면 조선인이 가진 자본시장이 확대되어야 했지만, 일제는 거부했다. 독립군들의 자금이 거기에 흘러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자본시장은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고, 일본처럼 전시 이후 미국과 연합 국가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적 정책에 따라 경제성장을 올린 것이다. 경제성장이 정상적으로 일반 국민과 기업에 의해 움직인 게 아니라 국가의 대규모적인 정책에 따라 시행했고, 달러를 벌어들여 외화를 유치하고, 그 외화로 각종 공업기계를 도입해야 했으므로, 당연히 초반 공업은 경공업에 치중했다. 섬유공장은 늘 어린 여공들의 눈물로 가득했고,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강산은 폐수와 매연으로 물들어갔다. 자본주의의 시장성장 아래 인권이 밟히고, 자연이 오염되어 갔다. 그 과정에 따른 여파라고 하나, 지금 21세기 국민 중에서 옆에 매연이 나오는 공장 옆에서 살고 싶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장에서 매연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환경법규에 따라 벌금 내지 징역에 처할 수 있다. 바로 성장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배분을 어떻게 할까 에서 대규모 공업을 투자하기 위해 대기업을 투자했고, 대기업은 부품 및 조립 그 밖의 외주를 시행하기 위해 중소기업이 성장했다. 문제는 수익금이다. 중소기업의 임금이 대기업의 임금에 비하여 격차가 심했고, 그것의 차이는 점점 심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 차이는 비교하지 못한다. 대기업 정직원과 중소기업 비정규직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대기업 정직원이라도 어느 순간 권고사직 또는 명예퇴직이 닥쳐올지 모르는 시기다.

 

이 모든 것이 언제부터인가? 바로 IMF 통화구제부터이다. 군복무를 할 때 생각난다. 차량으로 출퇴근할 때 고속도로를 올려 비행장으로 가는데, 처음에 엄청 막히는 길로 갔다가 우연히 안 막히는 터널을 통해 갔다. 통행요금이 제법 비싸나, 편하게 출퇴근을 했다. 문제는 터널은 국가시설이고, 그것은 국민을 위한 시설이다. 터널요금의 수익금은 국가재정이나 거기에 투자한 시설공사 기업이 받는 것은 정당하나, 그것보단 공사에 투자한 투자자에게 배분이 더 큰 관건이었다. 맥쿼리코리아란 업체는 상당히 좋은 위치에 SOC 사업을 벌인다. 도로의 통행세를 받으면 아주 유리한 돈벌이다. 신대구 부산고속도로, 인천공항 영종도 고속도로, 각종 터널은 SOC 사업을 국가가 인허가를 주도하지만, 거기서 나온 수익금은 조금 다른 방식이 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검은머리의 외국인이 탄생하는 원인을 알 수는 있는 모습이 나온다. 미국이 IMF기구와 협상을 하고, IMF 구제통화는 미국으로부터 받는다. 미국의 자본침투로 통해 기존의 한국기업들은 순수 한국지분이 아니라 외국기업의 지분이 들어있고, 지분의 50% 이상이 어느 지분소유자에게 들어가면 기업운영권이 넘어간다. 기업운영권이 넘어가면 그것은 한국기업이 아니라 다국가 기업이 되고, 자본은 국경은 초월하여 그 나라의 경제까지 좌지우지 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면 경제부 차관의 모습에서 정말 국가재정 파탄을 몰랐을까? 알았어도 왜 막을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유리한 경제적 조건을 알았다. 경제학에서 중요한 것은 기업과 소비자, 그리고 노동자, 이들을 법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국가가 있다. 국가가 국민 대다수인 소비자와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에게 모든 것을 부여했다. 기업이 이긴다는 것은 그 외의 사람은 죽어도 무방하다. 영화는 정경유착으로 망가진 지난 한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업총수의 아들과 경제 관료의 밀실논의, 상황이 발효 되도 밀실에서 진행하는 모습, 자신의 이기심과 무지를 책임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국민의 과소비로 돌리는 모습도 보인다.

 

외화의 유출에서 외국여행도 어느 정도 나가지만, 최고 중요한 원인은 외국에서 한국의 은행에 투자한 것이다. 투자를 하면서 이자를 받거나 혹은 원금을 유지하면 몰라도 외화를 빼면 다른 말이 된다. 과거 외화 내지 금 같은 기축화폐들은 은행의 창고 속에 보관한다. 하지만 전산화 된 세상에서 화폐는 다른 개념이다. 미국기업이 우리에게 1억 달러를 투자하면 그 돈이 종이라는 화폐단위로 한국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전산망에 따라 1억 달러가 인터넷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공인인증서로 로그인하여 보는 기업인터넷뱅킹 서비스를 하면, 실제 100만원이 있다고 해서 그 100만원이 지폐다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전산으로 옮겨질 뿐이다.

 

순식간에 전산에서 사라진 화폐로 국내 남은 달러가 소멸되자,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는 폭등한다. 1달러에 500원이 천원이 되면, 자재를 구매할 수 없다. 원자재 수입을 통해 수출하는데 자재가 들어오지 않고, 달러가 없으면 대금결재를 할 수 없기에 무역 자체가 불가하다. 이런 무능한 사태는 바로 금융권의 대출시스템, 은행의 감독권의 부실이 문제이다. 가령 한국은행이 100만원을 시중은행에 대출하면 그 은행은 100만원만 있다. 하지만 실제로 현금보유액 10배만큼 대출할 수 있고, 만일 10배만큼만 하면 문제는 없으나, 그 이상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은행에 100만원을 보유하다 은행이용자들이 현금을 찾는 액이 200만원이 될 경우 뱅크런으로 은행은 도산할 수 있다.

 

하지만 전산망의 금융시스템은 뱅크런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게 만든다. 투자자에게 아무런 사전조사 없이 대출하는 은행과 대부금융업체, 받은 돈을 사업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횡령하는 총수들은 결국 불굴의 기업이 도산하게 되는 길을 열게 되고, 이런 문제점이 쌓이고 쌓여 국가부도의 날로 이어진다. 물론 우리는 몇 년 안에 빚을 갚았다고 하나 그 여파는 강하다. 흔히 21세기란 길가에서 Hell-조선이란 신종어가 생겼다. 지옥 같은 조선, 한국은 그런 나라이다. 경제의 후퇴는 인구감소로 이어진다. 인구감소 심각성은 시장경제의 축소이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창출하자, 그들은 생계의 문제로 식료품 필수 의복을 제외한 나머지를 최소화한다.

 

그런 나머지 산업들이 후퇴를 하고, 거기에 문을 닫는다. 인구가 감소하기에 앞으로 식품산업도 시장규모가 축소한다. 그러면 그런 부류의 산업체계가 붕괴하고, 다시 경제적 문제가 생긴다. 한국의 문제는 소비할 수 있는 부류가 축소이다. 집도 차, 심지어 핸드폰조차 할부로 구입한다. 할부도 단기간이 아니라 장기간 할부이다. 채무를 안고 계속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그날의 운명은 많은 이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영화에서 좋은 연출은 경제정책을 움직이는 관료, IMF 여파로 피해를 보는 일반 소시민,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삼은 사람들이 나온다.

 

절망의 심정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갑수가 있는 반면, 그 같은 거리를 웃으며 활보하는 정학도 있다. 정학이 새로 산 집에 가니 자살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갑수의 거래처 사장이었다. 부도가 나고, 자신도 어렵지만 모두 어려우니 차마 돈을 받을 수 없고, 그런다고 해결되지 않으니 그 우울함에 극단적 선택을 고르게 된 것이다. 영화 주인공 한시현 팀장은 경제엘리트 관료이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따듯한 인간이었다. 그녀가 그런 마음을 가진 이유는 갑수라는 인물이 오빠였고, 그 오빠가 IMF로 괴로워하자,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 없고, 간접적으로 정치적 대안조차 내놓을 수 없었다.

 

그녀가 현실에서 좌절한 모순은 바로 그녀 주변인에게 닥친 것이다. 또한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정치문화와 정경유착 체계는 소수 남성 지배계급(그런다고 갑수나 자살한 사장이나 해고된 노동자들은 지배계급이 아니다)이 움직이고 있었고, 새로운 경제지식인이던 한팀장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한팀장이 바라본 현실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한국은행 총장은 경제학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저 낙하산인사로 떨어진 인물이고, 사무실조차 제대로 붙어있지 않았다. 일에 무지하고, 책임에 무능한 그 자체가 결국 재난의 길로 빠진 것이다.

 

영화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해준다. 20년의 IMF가 영화에서는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도 새로운 위기가 온다는 점이다, 운이 좋은 것은 당시 경제수석과 관료들은 국민을 버리던 자이나, 이제는 국민을 살리려는 자이다. 당시 나라경제를 말아먹은 자들은 기업의 임원으로 잘 먹고 잘 산다. 생각해보면 IMF 당시 경제업무를 맡은 관료 중 책임자가 아니라 실무자가 지난 정권에서 경제관료 책임자급으로 있었다. 부도사태를 나고도 다시 돌아온 그들에게 국가경제의 핵심은 누구인가?

 

부익부 빈익빈은 심각한 국가문제를 야기한다. 사회는 피폐해지고, 범죄도 증가한다. 게다가 소비위축은 새로운 경제위기로 이어진다.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재고가 남고, 재고가 남아 대금을 치루지 못하면 부도가 난다. 부도가 나면 은행의 채권들은 휴지조각이 되고, 부실채권의 돈에 투자한 사람들은 거리로 내몰린다. 위기는 기회가 되겠지만, 그 혜택을 볼 수 있는 부류는 극히 일부이다. 기회는 찬스라는 말 따위를 다수 사람에게 떠벌리는 인간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국민의 책임이 아닌데도 물과 전기를 절약하고, 과소비를 억제하라 한다. 영화는 그런 지옥에서 겨우 살아남은 국민에게 다시 위기를 말한다. 다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때처럼 호락호락 당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때 일을 잊어서는 안 되고, 그때 그 지경까지 만든 놈들을 잊으면 안 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12-03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03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역주 목민심서 1~7 세트 - 전7권 역주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다산연구회 옮김, 임형택 교열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돌아가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목민심서는 다산 선생 혼자서 저술한 게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만든 책이며, 이책이 완성되자 제자들은 이 책을 스승에게 바쳤다. 목민심서는 탄생은 다산과 조선 민중의 고통에서 시작했지만, 다산 서거 후 다산과 제자들의 후예까지 고통을 받았으니 얼마나 소중한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뒷북소녀 2018-11-21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보헤미안 랩소디>란 영화가 나올 때, 나는 문득 1사람이 생각이 났다. 그의 이름은 데이빗 보위, 영국 글램락의 대부이자, 상당히 멋지고 잘생긴 미의 노인(老人)이다. 그가 생각난 이유는 그의 노래보단, 퀸의 곡 중에 “Under Pressure"이란 곡에서 데이빗 보위가 프레디 머큐리와 듀엣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머큐리의 고음 속에 왠지 모를 감칠맛 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머큐리의 고음에도 중후한 목소리가 허밍의 조화는 상당히 인상이 깊다. 물론 “Under Pressure"는 프레디의 목소리보단 처음 베이스기타의 둥둥둥 둥두둥둥 하는 소리에 감이 온다. 퀸은 프레디의 맨 파워가 강한 것은 사실이나, 기타리스트나 드러머, 물론 베이시스트 역시 실력을 갖추었다.

 

단지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 그가 가진 음악적 센스, 더 나아가 관객과 하나 되는 그 열기가 퀸이란 그룹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퀸이란 그룹이 영국과 세계에서 활약한 시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이다. 이때 세계는 락의 전성시대였다. 보통 사람은 퀸은 어느 정도 알지 모르겠으나, 락을 아는 사람들은 퀸보다 레드 제플린이나 딥 퍼플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퀸의 실력이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퀸은 보컬리스트 머큐리의 카리스마가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이다. 레드 제플린의 보컬 로버트 플랜트와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 드러머 존 본햄의 연주력이 더 돋보였기 때문이다.

 

레드 제플린의 “Moby Dick"을 들으면 많은 충격이 온다. 보컬의 목소리와 기타의 에드립은 멜로디의 음악적 흐름을 느끼지만, 드럼은 멜로디보단 박자의 비트감을 준다. 그런데 “Moby Dick"을 들으면 그 생각이 달라진다. 드럼이 중심이 되어 기타와 베이스 음이 진행된다. 더구나 라이브 10분짜리를 연주를 들으면 더 놀란다. 뜬금없이 레드 제플린이 나온 이유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제목처럼 "Bohemian Rhapsody"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오페라에 팝송 락을 이래저래 뒤죽박죽 섞어 넣었다. 클래식에 락을 이래저래 오고가는 과정에서 레드 제플린의 곡을 들으면 여러 가지 장르를 뒤섞은 것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레드 제플린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지미 페이지는 전설의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 에릭 클랩튼, 제프 벡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였다. 물론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도 훌륭한 기타리스트이다. 다른 기타리스트들을 보면 펜더 스트라토 캐스터 또는 깁슨 레스폴 전자기타에 마샬 앰프를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그는 VOX 앰프에 자신만의 기타를 사용한다. 기타 사운드나 베이스 음에서 같은 음을 내더라도 기타의 나무재질과 픽업, 그리고 앰프와 이펙터에 연결하는 것에 따라 사운드가 천지만별로 나온다.

 

그래서 음악이 재미있는 것이다. 같은 종류의 기타와 앰프를 들고 같은 곡을 연주해도 그 연주자가 누구냐에 따라 음악은 엄청난 개성을 가지게 된다. 퀸의 노래는 계속 들리지만,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의 퀸은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퀸은 프레디 머큐리로 시작했지만, 결국 퀸이란 밴드로 계속 이어져왔다. 데이빗 보위를 추모하는 이유는 그가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타계할 때, 그가 프레디 머큐리와 노래를 같이 부른 보컬이란 점, 프레디 머큐리 사후 “Under Pressure"를 다른 가수와 부를 때, 퀸의 멤버들과 같이 공연에 올랐다는 점이다. 퀸의 대단함은 바로 이런 것이다.

 

메인 보컬 천재 싱어 프레디 머큐리가 세상에 없더라도 퀸은 사라지지 않고, 그들만의 음악적 감각을 관객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머큐리가 없어도 머큐리를 좋아하는 보컬과 관객이 있다면 얼마든지 모일 수 있는 게 퀸이다. 다행히 멤버들이 건강하고 자주 모이는 게 중요하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면 처음 시작은 프레디 머큐리와 브라이언 메이의 주도로 시작한다. 그 옆에 드러머 로저 테일러가 있었고 후에 베이시스트 존 디콘이 영입되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디 머큐리란 인물이 가난한 이민자 노동자에서 성공한 보컬리스트로 보여주는 과정을 그린다. 단순히 그의 성공만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의 절망과 고독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한 딜레마까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에게 단순한 벽에 불과했다. 그에겐 음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의 열정은 왜 인간에게 희열과 감동을 주는가? 음악이란 인간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1편을 2~3번만 봐도 지겹게 다가온다. 하지만 음악은 어느 곡을 매일 1번씩 들어도 지겹지가 않다. 음악이란 우리의 귀를 통해 머리로 들어와 상상력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바로 이런 음악적 요소를 영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게 관건이었다. 주옥같은 퀸의 노래가 나오면서 관객 중에는 입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음악을 들으면 이게 퀸의 노래이었구나! 하는 것은 모두 다 느꼈을 것이다. 영화는 재현성을 매우 충실하게 구성했다. 프레디 머큐리가 멤버를 떠나 혼자 활동할 때 에이즈에 감염되고, 외로움과 적막함에 힘겨워 했을 때, 우연히 자선모금 공연에 참가하기 위해 멤버와 만나고, 오랜 시간 떨어져 있어도 합주를 막상 진행하니 모두 잘 맞아 떨어졌다.

 

합주나 공연은 오랜 연습을 해야 좋은 사운드가 나온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시작하면 제대로 사운드가 잡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공연 전 연습에서 곡은 다 맞아떨어졌다. 단지 프레디의 건강과 컨디션만이 관건이었다. 공연 본방송이 시작할 때 프레디의 진가는 드러나고, 모든 관객과 TV앞의 사람들은 퀸의 음악에 빠진다. 음악은 나만 좋은 게 아니라 모두 다 같이 즐기고 느끼는 게 최고이다. 물론 어느 유명한 가수가 한 말이 생각난다. 삼류는 관객은 멀쩡한데 가수만 흥에 취할 때, 이류는 관객과 가수가 같이 흥에 취할 때, 일류는 관객은 흥에 취하는데 가수는 멀쩡한 경우다.

 

그렇다면 퀸의 어느 뮤지션인가? 이류에 가까울지 모르나, 팬들은 자신들이 2류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퀸이 "We will Rock you!”처럼 관객을 흔들어 대는 것이 곧 반주가 되고 음악이 된다. 퀸의 곡이 좋은 곡이 많은 이유는 아마 그들은 많은 충돌과 우여곡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머큐리는 본래 이민자이고, 가난한 노동계급이었다. 그 속에서 음악을 하고 싶은 열정이 있었고,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사랑하는 여자하고 헤어졌다. 동성애와 마약, 알콜과 담배의 수렁에 빠진 프레디는 결국 에이즈란 최악의 질병에 걸린다. 결국 모든 것을 잃었다는 그 순간에 그는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오직 내가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을 관객에게 던지고 싶다는 일념 아래서 말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동료들에게 말한다. 그가 솔로음반을 준비할 때, 다른 스텝들은 오직 내 말에만 따르지 그 이상은 없었다. 자신들의 의견은 없었고, 오직 기계적인 반응으로 작업만 진행할 뿐이란 점을 말이다. 서로 다투고 갈등을 빚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이란 다 자기만의 가치관과 삶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그런 삶의 충돌로 서로에게 빠져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던 곡이 1년이 지나든, 10년 지나든 심지어 30~40년이 지나도 좋아하는 곡이고,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도 그 곡을 좋아하게 된다.

 

영화 제목처럼 <보헤미안 랩소디>이란 곡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곡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아직까지 어린아이였다. 그래도 나는 퀸을 알고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를 안다. 음악이란 그런 것 같다. 수 십 년이 지나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고 알아주는 그 감동을 말이다. 그리고 그 감동을 만들어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갔다는 것을 안다는 자체만으로도 진한 감동을 전해준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8-11-20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탓인지 요즘 10대들한테 퀸의 노래가 상당히 인기가 만다고 하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8-11-21 11:03   좋아요 0 | URL
락이란 그런 강렬한 느낌이 젊은 친구의 하트를 잡는 게 아닐까합니다.
저도 고교시절에 그랬거든요

뒷북소녀 2018-11-20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꼭 봐야 할 것 같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11-21 11:03   좋아요 0 | URL
재미있습니다. 신나는 영상과 음악~

겨울호랑이 2018-11-20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91년도 머큐리가 죽었을 때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11-21 11:04   좋아요 1 | URL
에이즈로 판단 이후 그 시기까지 살았다면 제법 머큐리도 많이 견뎌낸 겁니다. 그떄는 머큐리의 죽음이 충격이면, 지금은 머큐리를 모르던 이들이 그 음악을 들어 충격이겠죠

2018-11-21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1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시대 임금 중에 문장력(文章力)이 뛰어난 사람으로 세종대왕을 최고로 치고, 다음으로 정조를 꼽는다. 무예(武藝)를 생각하면 조선을 최초로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가장 뛰어나다. 그럼 다음 누구로 하면 좋을 것인가? 무예가 뛰어난 임금으로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정조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가 장용영(壯勇營)이란 기관을 만들고, 직접 군사를 열병하여 지휘도 할 정도로 병무에 해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훨씬 무예가 뛰어난 것으로 기록된다. 사도세자는 직접 무예와 관련된 도서를 검토하고 제작하기도 하고, 실제 창과 검술이 뛰어난 인재였다. 게다가 사도세자는 무예를 뛰어넘어 문장력도 제법 있었다. 문무를 갖춘 왕이나, 문장보단 무예가 뛰어났다.

 

그를 노론에서 보자면 가시거리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똑똑한 것도 모자라 무예도 출중하면, 후에 왕으로 등극할 경우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왕은 현명한 임금은 몇몇 있지만, 그들이 있으면 어쩐지 권력층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임금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편한 용군(庸君)이기 바랐다. 최초의 용군인 중종(中宗)은 연산군 폐위에 대한 반정으로 임금이 되었지만,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갈등은 사림시대가 열리기 전부터 시작하여 결국 조선망국의 원인이 되었다.

 

임금이 현명하거나 또는 침착하거나, 더 나아가 아주 무서울 경우 신하들은 곤란해 하였다. 조선은 농사가 주업이고, 많은 토지를 차지할수록 재산이 늘어 가는데, 그 재산은 대부분 착복의 결과물이다. 지방유림이 상소를 올려 농민이 어려움을 전하고, 수령의 가렴주구한 태도를 전달한다. 하지만 결국 상소를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 이미 그런 착복의 과정이 고관대신을 끼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하의 권력이 높으면 임금은 고민한다. 개혁을 추진하거나 문제 있는 정책을 수정하는 게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쟁의 역사도 한몫을 차지했다. 지배계급이 양반이었던 조선이지만, 양반이라도 모두가 지배계급이 아니다. 양반 안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일부고, 혹은 지방에서 대지주로 있는 자도 일부다. 많은 양반도 스스로 농사를 짓거나 노동을 하며, 때로는 훈장선생을 하며 글을 학동에게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조선의 사회성이 가장 혼란하던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와 병자호란 전후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동아시아 관계성에 크게 요동치던 시기이다.

 

그나마 임진왜란 승전국가로 돌아갔지만, 병자호란은 그렇지 못하다. 병자호란의 상처는 수십만의 조선인이 청나라로 피랍되어 돌아오지 못한 채 한스러운 삶을 마감해야 했다. 일부는 돌아와도 받아주지 않았고, 도망친 자는 다시 송환되어 더 심한 고초를 겪었다. 인조시대의 조선은 비참 그 자체였다. 조선의 무예가 뛰어난 임금이 누구냐는 첫 머리의 질문처럼 인조시대에 그런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효종(孝宗), 봉림대군(鳳林大君)이다. 사도세자가 입었다는 그 갑옷은 원래는 효종이 입은 방어구였다. 뛰어난 무관조차 입어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그 옷을 효종은 임금이 된 후에도 자연스레 입고, 말 위에서 창을 휘둘렸던 무예의 왕이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직접 전쟁을 참전하여 군사들을 지휘하지 못한 것이다. 조선임금 중 전쟁에서 몸을 다진 자는 이성계와 그의 아들뿐이었다. 그나마 전쟁에서 군사를 지휘하며, 적을 물리친 자는 광해군에서 끝이 났다. 효종이 집권하던 시기를 보면 북벌론(北伐論)이 유명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자주독립국가로서 조선이 아니라 청나라를 허물고 다시 명나라를 세운다는 헛된 망상이다.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再造至恩)은 병자호란에서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에서 끝이 났어야 했다. 아직까지 조선의 사대부는 자신을 소중화(小中華)의 후예라고 하여 청나라에 대한 압력을 거부했다. 아니라 정확히는 외면하거나 도망치려 했다.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 이후 많은 고생을 했다.

 

특히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돌아오는 것을 대해 긍정적인 반응보다 오히려 두려워했다. 청나라 황제가 자신을 폐위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책봉하는 것을 말이다. 영화 창궐(猖獗)”은 미묘한 스토리와 소재를 역사적 사실에서 받아온다. 왕의 이름과 세자의 이름조차 다르다. 왜냐하면 창궐의 주인공은 강림대군으로 나오나, 그 실상은 봉림대군이다. 봉림대군과 소현세자, 그리고 2왕자의 동생 인평대군은 사이가 매우 좋은 형제였다. 특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왕자였다.

 

청나라에서 갖은 어려움을 겪었다. 형은 외국문물에 눈을 뜨고 새로운 바람을 접했다. 동생은 그런 바람보다 오히려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창궐의 강림대군을 보면 단지 봉림대군의 무예만 받은 것 같다. 사실 강림대군의 형의 정신은 효종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백성의 고통을 무척 생각했다. 심양에 끌려가서 어려움을 겪은 조선의 백성을 위해 노력했고, 배고픔을 해결해 주려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신망이 있었고, 게다가 신문물을 전파하려 했기 때문에 인조에게 가시거리였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미묘하다. 하지만 그의 시체를 염을 하러 간 왕실의 친척이 말하길 온 몸이 퍼렇게 물들었다고 했다. 그것은 독으로 중독되어 사망하면 그렇다. 독살의 가능성이 높으나 인조는 장례식조차 신속히 진행했고, 추후 며느리와 손자까지 죽는다. 아들 내외, 손자까지 다 죽는다는 사실은 이상하다. 하지만 조선의 효종은 이렇게 탄생한다. 권력에 집착하던 임금, 억울하게 죽은 형, 그리고 그 유지를 받아야 하는 효종, 영화에서 소원세자가 죽자 강림대군이 인천 제물포로 온다. 그리고 창궐의 습격을 받은 후 박종사관 일을 만난다. 강림대군이 궁으로 가면 세자가 되고, 다음 왕이 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 된다.

 

실제 역사에서 봉림대군의 동생 인평대군은 인조의 동생의 아들로 입양된다. 인조의 동생이 어릴 때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의 왕은 선조처럼 명종의 후사가 없을 때 종실에서 뽑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실부인에게 나오지 않은 왕은 권력이 미약하고, 종실에서 뽑힌 왕은 더욱 그렇다. 인조는 거기에 많은 콤플렉스를 겪었다. 아버지는 인조의 형제 1명이 역모에 연루되어 죽게 되자, 그 일로 너무 슬퍼 죽고 만다. 할아버지 선조는 자신만의 왕권을 위해 기축옥사를 일으킨다. 신하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고, 다시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갈린다. 서인은 숙종에 이르러 노론과 소인이 확실히 구분되어진다.

 

인조는 서인의 지원을 받아 왕이 되었다. “창궐이란 영화는 역사적 소재에서 찾아냈지만, 그런다고 그 설정은 모두 피해갈 수 없다. 조선의 절대적 악 김자준, 그의 소재는 어딜까? 개인적으로 생각했다. 인조반정에 가장 활약한 인물은 이귀와 김류이다. 특히 김류는 인조시대 영의정이 되어 많은 업적을 남긴다. 하지만 병조호란의 여파에서 그들은 광해군 시대보다 훨씬 덜어진 행동을 보여줬다. 김류의 이름이 생각난 이유는 병자호란 당시 김류의 아들, 김경징은 강화도로 피신한 왕족을 호위하던 책임자였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호위업무에 태만하고 게다가 왕족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강화도마저 청군에 함락된 이후 그는 그 죄를 물어 사약을 받았다.

 

김류의 아들 김경징이 영화 창궐의 김자준과 어울린다고 생각한 이유는 김류가 서인의 영수이고, 최고 권력에 있었던 점, 김경징이 만일 그때 사약을 받고 죽지 않았으면, 김자준이 연기한 병조판서를 할 정도의 나이였던 점이다. 인조가 집권할 때 서인의 집권시기이고, 서인에서 김씨 성을 가진 권력자는 김류였다. 물론 김류의 아들은 역모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행한 행동은 역적질이었다. “창궐에서 김자준의 직책이 병조판서라는 것이 엄청 중요하다. 병조판서(兵曹判書)는 군사와 관련된 업무를 보는 장관이다. 무관의 임명부터 병력의 작전권까지 잡고 있다.

 

조선 최고 권력자는 왕이나, 왕 혼자서 모든 업무를 못한다. 영화에서 내금위장의 지시가 없으면 병력을 다시 궁으로 올 수 없다는 말처럼 어명(御名)을 받을 수 없거나 조치할 수 없다면 직책의 재량권으로 실행해야 한다. 병조판서가 무기와 병력을 관리감독하기에 병조판서의 승인 없이 병력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김자준이 왕궁 내 무기를 숨기고,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요건은 바로 병권의 수장이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뒤 조선의 왕권은 바닥까지 추락했다. 인조는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면 그 누구도 용납지 않았고, “창궐에서도 그렇다. 아들인 소원세자가 청나라에 대한 타도는 받아들이지 않고, 그가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장면을 본다면, 오직 그 자리만을 위할 뿐이다. 김자준의 반란은 거기서 부터이다. 청나라를 우러러 보는 왕이고, 게다가 권력만 집착하며, 후궁과의 애정을 탐하는 왕이라면 아무 쓸모없다는 점이다. 무능하고 이기적이며 세상을 보지 못하는 왕이라면, 결국 조선에서 그런 왕은 없는 편이 좋다.

 

김자준은 분명 역적이고, 난을 일으킨 절대적 악이나, 지금에서 보면 절대적 악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악이라도 그 만큼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시대 많은 사대부들은 인조가 청나라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인 이유로 산림에서 나오지 않았다. 광해군이 저지른 패륜을 징벌하기 반정을 일으켰으나, 그들 역시 패륜을 저지르고, 권력을 탐했으며, 백성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다. 상소문에는 작금의 시기는 혼군(昏君, 광해군)보다 더 어렵고 혼란스럽다고 말하는 내용도 있었다.

 

백성의 위하는 왕과 신하는 거의 없었다. “창궐을 보면 백성들이 어려움에 빠져 있어도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고 오히려 역도라 말한다. 강림대군이 사실을 고해도, 주변 신하들은 왕의 귀와 눈을 속인다. 백성이 오직 기다리는 것은 조정의 조치뿐이다. 영화 초반부 강림대군은 왕좌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청나라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한다. 무예에 능하기에 큰칼을 잡고 호탕한 모습으로 살려 한다. 그러나 백성은 다르다. 그는 왕자이고, 일반적으로 군()이 아니라 대군(大君)이다. 지금 왕의 아들이나, 다음 왕의 동생이다.

 

절대 권력자의 최고 측근이다. 백성들은 강림대군에게 영웅의 자각을 가지길 바란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하다. 그가 영웅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그가 영웅이길 바라던 민중과 함께 하면서부터이다. 백성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창궐로 변하여 무참히 죽자, 더 이상 그 고통은 외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거는 백성을 보며,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백성들에게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을 무리라고 말하나, 그런 바람조차 묻거나 대답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말이다.

 

한자 중에 성()은 귀 이(), 입 구(), 임금 왕()의 합한 회의문자이다. 임금이 귀를 열고 말을 하면 위대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임금이 들어야 할 것은 백성들의 말들이며, 그것 말을 들으면 거기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 곧 왕의 책무이다. 왕의 시작은 바로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제물포 관아에 가자 모든 관리를 도망치고, 거기에 남아주고 같이 있던 자는 오직 강림대군이다. 웹툰의 내용이 약간 생략되나, 제물포 관아에서 모든 사람에게 감자를 나누어줄 때 한 소년(영화 마지막에 병력이 오는 것을 알려주던 소년)이 강림대군에게도 전달한다. 강림대군은 그 감자를 받을 때, 학수가 가지고 온 육포를 그 소년에게 준다.

 

왕좌에 대해 관심은 없지만, 인간적인 삶을 좋아했다. 초반 모습에 강림대군은 상스러운 말을 하고 다소 품위가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왕자의 체통보단 그저 한 사람의 남자, 또는 남동생으로 살아가는 게 좋은 사람이다. 영화는 창궐이란 악귀가 나타나 사람을 헤치는 것에 대해 해결하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강림대군이 일개 왕자가 아니라 왕의 재목으로 커가는 것을 보여주는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김자준이란 인물을 보면 왕의 자리는 권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준다. 사실 그래 따지면 인조가 그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왕의 재목이란 권력을 가진 자만이 아니라 그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 자이다.

 

지킬 수도 없는 약속만 하고 나간 강림대군은 스스로 직접 병력을 이끌고 오는 점에서 효종이란 인물의 탄생을 영화 창궐에서 보여준다. 물론 효종은 젊은 나이에 단명 하는 안타까운 왕이다. 술과 여색을 멀리하며, 무예에 늘 정진했다. 하지만 당쟁의 역사에서 남인과 서인의 투쟁이 시작되고, 그가 죽은 후 예송(禮訟)에 대한 논쟁은 한 당파의 사대부들을 피로 숙청하는 복수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김자준은 영화 창궐에서 패배하지만, 김자준의 옆에서 곡학아세를 하던 관리는 여전히 판을 치고 있었다. 그래서 창궐은 왕의 자세, 혹은 정치 권력자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백성들이 말을 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예상하기 좋은 식으로 잘 흘러갔다. 이야기 스토리가 복잡하지도 않고, 단순한 점이 많았다. 단지 액션에서 강림대군 역할을 맡은 현빈 씨의 노고가 아주 컸다. 실제로 자신이 했는지 대역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몸으로 직접 움직이는 액션이 너무 많았다. “부산행이란 영화처럼 물리적으로 좀비는 이길 수 없는 것으로 나오는 것보다, “청궐처럼 약점이 있는 편이 좋다. 무조건 도망치는 것보다 거기에 대항하는 편이 영화의 박진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나라 진보세력 내지 지식인, 정치인들이 걸러먹은 이유를 다시금 확인헸다.

삼계탕집에 몸을 보신하기 위해 점심 때 삼계을 먹으러 왔다.

옆에 회사 다른 직원의 생각은 알 수 없다

까데기! 흔히 부산사투리로 맥주나 소주병을 담은 상자를 들고 옮기는 일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50대 아저씨가 더우 날에 그 까데기 일을 하고 있었다.

들어올때 3박스 나갈 때 4박스

단지 새병과 다 마신 병의 차이다. 그분의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

37도가 오르는 날에 더운 낮여름에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자신이 아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의 모습들을...

사회적 시스템이란 바로 이런 것인데, 이런 분들을 조롱하고 우습게 보는

인간들을 쉴드치는 모습에 그저 답답하다


더운 여름 나의 할아버지의 100주년 탄생이라는 작은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2018년 6월(음력), 그때가 할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난지100년째라고

전 1918년 조선의 민중이 일제에 억압받는 그 치욕

나의 큰할할버지는 일제에 의한 노동징용에 끌려가 1946년 광복절 다음해

돌아가시고, 그해 11월(음력 10월)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났다,

어느 순간 모르나 약 10년 넘게 나의 할아버지만 아니라더라도

징용에 끌려간 할아버지의 형님에게도 나는 술잔을 올리며 절을 올린다.


518묘역을 가니 광주의 정신은 이미 오래전 315 혁명만이 아니라 동학혁명을 계승했다.

동학혁명은 농민이 직접 몸으로 느낀 부조리에 대한 투쟁이다. 그때 제대로 현실을 알게 해준

것이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라고 한다. 우리집안 대대로 아니 문중 대대로 

정약용 선생과 벗어날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운명에서 지난 과거가 단순 과거가 아니란 사실에

그저 한탄만 외칠뿐이다. 윤한봉 선생도 민중의 삶을 알아갈 때 다산의 정신을 두고

다시 마음에 새겼다 한다. 


늦은 진짜 아는 분의 SNS에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 올라왔다.

노의원님이 7월 23일에 세상을 하직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5월 23일에 하직했다.

나는 23일이 슬픈 날이 될 것 같다 했다. 그때 그분이 답이 많이 사람들이 그렇게

여긴다고 했다. 그 답글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 

왜 세상은 좋은 사람은 먼저 데리고 갈까? 그건 뒤따라갈 사람들이 그들의 정신을

뇌리 속 깊게 남겨주기 위해 그런 게 아닐까? 많은 할일이 있는데 먼 가 버린 

노씨 성을 가진 그들이 원망스럽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곰곰생각하는발 2018-07-25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노회찬 분향소 다녀왔습니다. 쓸쓸하네요. 서울 오시면 술 한 잔 합시다..

만화애니비평 2018-07-25 11:32   좋아요 0 | URL
으크크...서울 언제 갈지 고민입니다....메인 몸이니
승인을 받아야 하므로....가더라도 날 좀 풀리고 생각해봅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