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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종속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4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군복무시설 내가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건물 다른 사무실의 사병 하나가 간질 발작으로 새벽에 죽은 일이었다. 원래 지병이 있었지만, 자대에서 안타깝게도 젊은 삶을 마감한 것이다. 부대에 사망한 사병의 어머니가 오시고, 듣기론 화장까지 해서 장례를 마쳤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이상한 숙제가 있었다. 그 사병이 죽고 난 후 그의 앞으로 택배가 왔다. 사병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에게 물건을 보냈던 것이다. 수취인은 분명 이름이 적혀 있지만, 그 수취인은 영원히 그 택배를 받을 수 없었다. 주임원사가 나를 부르더니, 나보고 그 택배를 다시 집으로 보내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수취인의 이름 대신 발송인의 이름은 나로 하여 그의 집으로 다시 택배를 보낸 기억이 난다. 진중권의 <레퀴엄>이란 책을 보면, 군대에서 자살한 사병이 차가운 군병원 영안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사병의 어머니가 차갑게 식어버린 아들의 몸을 보자 오열을 하기 시작한다. 진중권 교수가 사병 시절과 그는 옆에 있던 사병들과 같이 욕을 했다고 한다. 왜 자살 하냐고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녀 간 문제를 거론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여자는 임신, 남자는 군대다. 남녀사이에 갈등에서 내가 가장 불만을 느끼는 것은 남녀갈등의 사회적인 영역에서 갈등을 겪는 부류는 미혼 중심으로 담론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10년 전인가? 어느 유명 명문여대에서 많은 여학생들이 군대에서 복무 중인 남성들은 여성들을 언제라도 성폭행할 수 있는 잠재적 예비범죄인이라 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다. 여대에 다니는 분들이니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군대에서 남자들이 죽거나 크게 다치면 누가 가장 힘들어하는가? 그의 학교친구나 군대 안의 동료들일까? 아니다. 그의 가족들이다. 특히 그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가장 괴로워하신다. 한국에서 남녀문제는 기혼여성을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 기혼여성과 미혼여성에서 둘 다 여성이고, 둘 다 인간이다. 기혼여성의 문제가 사회적 등장하면 남녀문제보단 오히려 가정문제로 이어진다.
한국사회에 남녀문제 해결을 보는데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가정에 속한 기혼여성, 그리고 그녀와 같이 사는 기혼남성에 대한 사회적 함의를 배제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화성에 사는 남자 금성에 사는 여자라는 방식으로 남녀문제를 보는 한국사회의 감정적 방식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갈등만 증폭시킨다. 작년 가을, 서울과 부산에서 어느 한 여성과 데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분에게 내가 가진 책으로 매릴린 옐롬(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인문학자로 저명한 페미니즘 학자다)의 <유방의 역사>와 그 뒤에 <아내의 역사>를 드렸다.
이런저런 한국 사회의 여성과 남성에 대한 사회적 입장에서 그분은 나에게 한국의 여성은 참 불리하고 불쌍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대답했다. 한국에서 불리한 남성이 불쌍하고, 불리한 여성이 불쌍하다고 말이다. 즉 불리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 불쌍한 것이 나의 주장이다. 하지만 물론 여성이 불리한 것은 많은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대상은 미혼의 여성이 아니라 기혼의 여성이다. 예전에 <4천원 인생>이란 비정규직과 식당식모 아줌마들의 생활을 보여준 책이 있었다. 한국의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1시간당 몇 천원도 안 되는 일당으로 10~12시간 정도 일하는 수백만 기혼여성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남녀문제에서 미혼여성의 입장에서 남녀문제를 말하는 것에 대해선 상당히 답답하게 여긴다. 남녀가 사회생활하기에 필요한 것은 가정과 학교의 교육과 지원이다. 만약 가정에서 어머니보고 자식이 남자가 좋냐 여자가 좋냐?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겠는가? 이미 어머니에게 모든 자신의 아이들은 소중한 존재다. 여자인지 남자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하지만 사회에서 대립되는 미혼남녀의 입장은 첨예하게 다르다. 서로에게는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를 찾기 위해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 라이벌은 남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남녀가 속한 가정의 조건에서 달라진다. 가정이 부유하고 여유가 있다면 학업을 유지할 수 있지만,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 생계수단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다면 상황이 다르다. 물론 그런 와중에 우등생은 존재하나, 그것은 확률적으로 아주 낮고, 그것이 될 가능지수는 아주 낮다. 로또복권을 샀으니깐 1등에 당첨될 기회가 있다고 해서 된다는 보장은 없다. 막연한 가능성에 현실적 조건을 무시하는 것만큼 오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인 성공에서 남녀는 서로간이 적이 아니라 현재 자신이 속해져 있는 상황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다.
어째 보면 이런 말은 당연할지도 혹은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하나, 이번에 읽은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에서는 이런 내 생각에 상당히 닿아있는 맥락이었다.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이 살던 시절은 한창 영국의 공업화시대였고,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세계의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군사적으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이때 19세기 때 영국의 통치자는 빅토리아 여왕이었고, 영국에서 가장 통치를 오래한 왕이었다. 그 앞에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이 유럽에서 최강의 국가로 옹립된 시기다.
위에서 나온 나의 의견, 그리고 밀이 살던 시절, 빅토리아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등장에서 연계성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에서 여성도 역시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갖추면 남성 이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밀이 살던 시절에 아직까지 노예제도 흔적이 있었으며,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다. 20세기에 도래해서 서구사회에도 여성에 참정권이 생겼다. 여성에게 강요된 인생만 있었고, 그런 시대에 밀은 자유주의 사상가로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보여준 게 <여성의 종속>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도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에게 태어날 때부터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라는 이유로 차별당하는 것은 부당하고, 단지 그에게 공평하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 인간에게 생물학적 기능이 있기 때문에 남녀 간의 생리적인 구별은 필요하다. 가령 여성들이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브래지어를 착용하는데, 남자도 인간이니 남자보고 착용하라는 논리도 이상하고, 남자들이 전쟁에서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우니, 여자들도 인간이니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우라는 논리도 이상하다. 인간의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은 분명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밀의 지적한 것처럼 영국의 빅토리아나 엘리자베스나 훌륭히 통치할 수 있는 것은 그녀들이 여자이든 혹은 남자이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녀가 태어난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 글자를 배울 수 있던 중세 내지 근대 초기 시대의 여성은 거의 드물었고, 일반 평민 남성들도 드물었다. 단지 여성에게 열린 길이 더 적었다.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은 여왕이라 가능했지 평민여성뿐만 아니라 평민남성도 역시 어렵다.
밀의 자유주의적 관점은 <자유론>에서 드러난다. <자유론>에서 자유란 자신의 이성으로서 선택하는 것이고, 이성의 의지로서 타인과 조우하는 것이다. 자신만이 모든 권리를 누리는 게 아니라 타인의 권리도 누리게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밀의 아버지인 제임스 밀은 공리주의자 벤담과 친분이 깊었다. 밀의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는 현대 민주주의 제도에 큰 공헌을 한다. 밀의 자유주의는 만일 타인에게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을 도와주고, 누가 잘못했다면 그 자에 대한 처벌도 필요하나,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주변에서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했다.
밀의 자유주의는 철저히 이성과 논리로서 대했기 때문에 만일 이성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남자나 여자나 상관없었다. 단지 이성적 능력이 없는 자가 정치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성적 영역에서 윤리적 가치관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 가치관에 여자 역시 동참이 가능한 점에서 <여성의 종속> 번역자는 밀의 대표작인 <자유론>보단 오히려 <여성의 종속>을 우위에 두는 것 같았다. 사실 밀은 자신의 아내 헤리엇 테일러를 만난 후로 엄청난 발전을 했다.
천재적인 지식인이던 밀에게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헤리엇의 만남은 운명 같을 것이다. 밀은 영국사회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자유주의 가치관을 보여주었으나 현실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대학의 문을 가는 것은 극히 일부 부잣집 영애만 가능했고, 일반 남성조차 가난에 의해 대학은커녕 중고등학교 문도 못 가신 분도 많았다. 지금에 와서 여성보고 대학에 가지 말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정신병원에 먼저 가라고 할 것이다. 밀도 역시 그런 시대를 겪었다. 밀이 죽고 난 뒤 몇 십 년이 지난 후 영국에도 여성에게 참정권이 생겼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참여에서 문화인류학 영역에서는 전쟁이 원인이라 한다. 국가기관에서 경찰, 소방, 의무 같은 시스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활동에서 남성이 주도했지만, 전쟁이 일어난 남성들이 참전하여 그 체계들이 무너지거나 손실되었다. 과거 구식무기를 사용하던 시대는 농민들이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 어느 순간 징집되어 칼과 창을 들고 전쟁터에 나갔다. 하지만 산업사회 도래 후 농민들은 대거 축소되어 도시로 가게 되었고, 공업화와 서비스 직업에 몰리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남성이 있다면 그 옆에 같이 살던 가족에서 여성도 있다. 그 남성의 빈자리를 여성이 대체하는 방식이 20세기에서 여성의 권리에 큰 전환점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사회는 유지되었고, 여성의 능력은 결코 남성에 못지않고, 어떤 분야에서는 더 탁월한 성과를 보인다. 여태까지 보일 수 없던 이유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던 점, 그런 기회가 없으므로 어떻게든 활동할 수 없었다. 기껏 해보았자 옆에 있던 남성이 그럴 기회가 주었다면 가능했다. 남성의 힘으로 여성의 능력을 발휘하면 그 수준의 정도는 한계점이 다다른다.
물론 기회가 있다면 능력을 충분히 보일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남자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귀부인과 애인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수많은 귀부인이 젊은 남성을 이끌고 있는 것이 파리의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귀부인 귀족의 무리에 속한 사람이란 점이다. 18~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책 1권이면 어느 평범한 식구가 2주 동안 생계비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보는 것에 엄청난 재원이 필요한 점에서 결국 밀의 서적을 다시 생각해도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남녀가 태어난 사회적 조건이란 점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때까지 지구역사상 가장 용맹한 남자는 스파르타의 전사라고 한다. 그들은 그 누구의 명령을 듣지 않는 불굴의 전사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부인에게만 복종한다고 했다고 한다. 세상을 지배한 것은 남성인지 아니면 그들이 진정 복종시키는 부인인지는 보는 관점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밀도 남성이 가지는 미개한 이성적 수준이 인류의 진보와 문화를 파괴하고 퇴보시킨다는 점이다. 그 중 하나가 여성에 대한 심한 착취행위다. 제도적으로 재산은 여성에게 주지 못하고, 여성이 가진 모든 것은 남성이 갈취한다. 어느 순간 아내를 버린 남자가 어느 날 다시 와서 그 여자가 혼자 힘으로 얻은 성과품을 갈취하던 게 과거의 산물이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밀은 자유주의자이나 페미니즘은 밀과 동시에 살던 마르크스에 의해 만들어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후에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과격하고 급변적인 사이보그 페미니즘도 등장한다. 밀의 시대적 환경과 후대의 상황의 변화는 다양한 의견과 사상으로 발전했으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단지 그렇게 태어난 이유로 노예 같은 삶을 강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노예 같은 삶을 사는 자에겐 그 삶에서 굴레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다. 본래 페미니즘은 소외된 계층에 대한 해방철학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만 인간이고, 이방인과 외국인, 노예와 아이들에겐 인간적인 권리가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 논쟁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논하는 게 아니라 이익에 집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조건은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인 트로츠키의 도서인 <배반당한 혁명>에서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그 사회가 경제적인 빈곤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적인 문제를 전반적으로 해결해야지 남녀문제가 해결되는데, 그 문제의 본질을 내버려두고 서로간의 입장만 내세울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가끔 이상한 나라에 왔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페이스 북에서 나를 아껴주시는 영화학 여교수님이 올린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글은 여자가 남자들에게 알려둘 점으로, 여자를 그냥 단순히 즐기기 위해 대상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감성과 이성을 존중하고 서로 뜻을 나누고, 그렇게 하기 위해 남자들에게 좀 더 자신을 향하여 성찰을 하고, 상대 여자를 위해 남자가 되라고 하는 내용이다. 딱히 덧글을 남기지 않았으나, 내가 하고픈 말은 그것이 만일 거대사회의 남녀라면 그럴 수 있으나, 남녀관계가 그런 거대한 사회에서 거대한 틀로 만나는 게 아니라 일상적 생활에서 만난다. 남자 역시 자신을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나, 처음부터 그런 남자를 선택했던 것은 여자란 점이다.
만일 상대 남자의 인격이나 가치관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인줄 모르고 계속 만난 것이라면 그 여자가 남자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대한 점이고, 설사 알았다면 그것은 엄청난 기만이다. 누가 누구보고 노력하란 점이 아니라 둘 다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밀의 <여성의 종속>처럼 남성이 억지로 만든 야만적인 사회체계도 문제지만, 그런 문제적 사회가 사라지는 세상에서 남성에게 억지로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도 문제다. 하지만 생각해본다면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지만, 이성보단 오히려 감성과 무의식에 의해 더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을 서로 감수하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분쟁만 일어날 뿐이다.
밀은 연애관보단 결혼관에서 밝히나 남녀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었다. 여성이 처음에 젊고 예쁠 때는 남성은 정력을 당하여 그녀를 위해 행동하나, 그것이 다하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성이 사치와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허황된 망상만 추구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밀의 조건은 여성도 충분히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전제를 둔 것이다. 솔직히 생각하여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말처럼 쉬운 법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