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당 - 해남윤씨 댁의 역사와 문화예술
정윤섭 지음, 서헌강 사진 / 열화당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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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소 시대유행에 따라가는 것보다 그냥 내가 좋아서 선택하여 취향 및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때로는 진보적이고, 때로는 보수적이고, 혹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다. 전통과 관련하여 21세기 중국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이 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 아래 기존 중국의 전통문물 및 사상을 파괴했다. 공자의 출신이 중국이나, 중국은 공자를 묻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공자의 사상은 다시금 세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중국의 공자의 위패를 모조리 없앤 바람에 그나마 공자의 위패가 있고 향교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에 와서 다시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 공자의 사상이 왜 다시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하면 답은 나온다.

 

근대화란 이름 아래 서구화를 이룬 것은 좋으나, 결국 자기정체성이란 이름 아래 문화적 모순에 빠진 것이다. 중국이 그동안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으나, 정작 마르크스가 가르친 교훈은 전혀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주도로 이루어진 관료주의 사회주의 체계만 존재한다. 거기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중국은 자본주의형 사회주의 국가로 된 것인가? 그런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 이름 아래 과거에 버렸던 공자를 찾고, 유학을 찾는다. 우리는 유학 하면 고리타분한 것으로 알겠지만, 우리 일상생활에서 유교의 문화, 아니라면 조선의 문화가 강하게 숨 쉬고 있다.

 

하다못해 우리 언어라고 하는 한글조차 사실 그 기원은 조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성과품이다. 유교문화 국가에서 나온 성과품이 계속 이용하고 있다. 과거의 훈민정음이 한자를 읽지 못하는 백성을 위한 언어라고 해도, 결국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정치사회를 이끌어간 왕조와 사대부들이 창조한 하나의 체계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20세 말에 시작되어 한국에서 21세기 초반에 담론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사상을 해체 및 보완을 하는 것도 있지만, 3세계의 문화가 소외되지 않고 자기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도 볼 수 있다.

 

아프리카나 남미, 중동아시아 등 비서구화된 세계가 있는 공간에도 그들만의 문화와 사회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한국처럼 서구화된 국가조차 서구화 이전의 문화가 없던 것은 아니다. 한국 전통문화가 예전에는 별 소득이 없는 것으로 봤지만, 이제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매년 관광객이 찾아온다. 20세기까지 중공업이 주요한 산업경쟁력이면, 이제는 탈산업화에 따른 문화적 관점, 즉 취미와 취향, 그리고 문화유산인 것이다. 한국이 김치가 유명하다면, 그 김치의 기원은 조선에서 시작된다.

 

조선이 전근대사회이고, 조선은 일제침략과 산업화에 따른 문화적 해체를 겪는다.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의 주요경제활동은 농업이고,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기존 향약체계에 따른 문화적 전통이 남아있었다. 조선의 시작은 훈구대신이란 공신들이 있었지만, 차후에 사림 선비에 의해 운영되었다. 사림의 선비는 권력을 잡기도 했지만, 권력에 소외되면 향리에 남아 농사를 짓거나 글공부를 하였다. 그런 선비들 중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

 

과거에 나가지 않고, 현세의 문제를 찾아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를 책으로 남겨 실학적 면모를 남겼다. 한국의 실학사에서 지봉 이수광, 반계 유형원 등이 시작하고,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이란 거대한 학맥을 이룬다. 지금 한국의 유교를 보면 길재와 정몽주, 김종직과 정여창, 김광필과 조광조를 내세우고, 이언적과 이황, 율곡과 송시열, 조식과 서경덕 등을 내세운다. 그러나 유교연구에서 가장 많이 검토되는 대상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다. 그들이 그나마 앞자리에 있던 선배들보다 뒤에 있는 점도 있지만, 그들은 단순히 조선을 사대부들만의 국가가 아니라 그 이상의 국가를 원했기 때문이다.

 

유교의 학문은 성리학에서 많은 장점과 단점을 만들었다. 공자의 유학은 정치적 도를 추구하나, 죽음과 세상만물 이치에 대한 부분에서 부족했다. 이것을 보완한 게 주자의 성리학이다. 문제는 성리학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만들어진 학문체계이고, 그것이 그대로 정치적으로 큰 효과를 보았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예송논쟁 같은 거대한 혈쟁을 펼쳤지만, 그 이면에 생각하면 통치술이란 어떻게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사유지만, 성리학은 그 원래 취지를 벗어난 길을 걷고 있었다.

 

조선에서 광해군 시대를 막을 내리게 만든 인조반종에 따라 서인들이 집권하고, 서인들이 정치적 암투로 인해 소론과 노론으로 분리되고, 조선이 망하는 그 마지막까지 노론이 지배했다. 을사조약에 서명하고, 동참한 대신 중에 거의 대부분 노론이라 한다. 조선을 말아먹은 노론의 형태에 대해 생각하면 조선의 유학은 정말 버려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의 유학은 노론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이 있었고, 그 중에서 오히려 21세기에도 위대한 세계적 위인으로 칭송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2012년 유네스코 기념 세계인물로 장 자크 루소, 로드 드뷔시, 헤르만 헤세와 같이 올라갔다. 세계적인 음악가 드뷔시, 문학가 헤세,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에 민주주의 정치사상을 확립한 루소, 이 거대한 인물 속에 정약용이란 이름이 당당히 올라갔다. <왜 조선유학인가>란 책을 보면 정약용에 대한 부분이 책자의 1/3에 이른다. 정약용이란 이가 있기에 조선의 유학은 세계적으로 큰 학문으로 인정받았고, 세계 유학 학술에서도 당당히 그의 사상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검토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다산이 역사적 조명을 되찾기 위해서 아주 기나긴 시간을 참아야 했다. 그의 명성을 다시 찾은 것은 100년 뒤다. 18362월 고향 마재에서 회혼식을 맞이하던 중 눈을 감은 그는 평생 정치적 박해로 시달렸다. 형제와 가족, 일가친척, 친구들의 목이 형리의 칼에 무참히 베어졌다. 그가 유배를 마치고 와도 아무도 그를 기용하려 하지 않았다. 열수가 무너지면 수만권의 서고가 무너질 것은 알아도, 그 서고를 아무도 이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 이유는 정약용 선생은 벽파노론이 아니라 시파남인이었다.

 

벽파와 시파의 차이는 사도세자, 정조의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두고 애절함을 느끼는 자가 시파이고, 오히려 제거가 잘 되었다고 보는 자가 벽파이다. 정약용의 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다. 이때 정약용이 태어나고, 귀향하여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에 지은 아명이 귀농(歸農)이었다. 정약용의 본관은 나주정씨이고, 어머니는 해남윤씨이다. 아버지 정재원이 화순현감에 있을 때 외갓집인 해남에 내려가 책을 읽기도 했다. 정약용의 사상은 단순히 그의 천재성이 아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조성된 집안 환경이 매우 컸다.

 

어머니의 할아버지는 공재 윤두서이고, 공재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종손이다. 또한 공재 윤두서의 아내는 지봉유설 저자 이수광의 후예이다. 지봉유설이 실학의 시작점이고, 그 뿌리는 다른 줄기로 타고 가서 정약용이란 거대한 대양(大洋)에 흘러간 것이다. 독립운동가 위광 정인보는 다산을 두고 조선의 마지막 등불이라고 했다. 다산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다산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 및 기념관, 다산에 대한 책들은 계속 우리 주변을 돌고 있다. 정약용은 역사기록에서 권력자에 의해 패배자로 기억되었지만, 후대에 이르러 한국의 위대한 위인이 되었다.

 

문제는 그의 기록이 지금까지 무사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정약용 선생의 가족과 제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조선왕조 시절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의 사촌이었다. 2014811, 한국 천주교회사에 가장 성스러운 행사가 있었다. 교황 프란치스코 신부님이 한국에 방문하여 천주교 유적지를 방문하고, 명동성당에 미사를 봤다. 프란치스코 신부님이 한국에 방문하여 하신 업무 중에 한국 천주교 성인을 시복하는 일이었다. 그 시복대상자 중에 1791년 신해사옥 때 참수당한 윤지충이란 진사였다.

 

윤지충은 다산 정약용 선생과 사촌이었다.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 사촌동생 권상연도 천주교 문제로 참수를 당했다. 국가반역죄인과 동급으로 취급당한 윤지충의 죄목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유교식으로 장례를 치루지 않고, 신주를 불사른 후 천주교방식으로 장례식을 치룬 것이다. 관아에 고발되어 배교를 하지 않은 채 참수당한 그는 정약용 선생만 아니라 해남윤씨 일족까지 여파를 주게 되었다. 윤지충이 죽은 후 1801년 신유사옥에서 정약용의 친형 정약종, 매형 이승훈이 참수를 당한다.

 

정약용의 유배 18년의 시작이 가족들의 비극적인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정약용의 유배지 중에 가장 유명한 장소는 강진 다산초당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외가의 먼 친척들의 소유물이었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귤정공댁이고, 다산초당은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행당공댁이었다. 다산의 주변을 보면 해남윤씨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다산은 학문을 쌓을 때 평생 성호 이익 선생을 흠모했다고 한다. 성호 이익은 다산 외증조부 공재 윤두서와 아주 친했다. 게다가 이익의 형인 이잠과 이서 역시 윤두서와 매우 친한 친구였다.

 

이익의 아버지 이하친은 숙종 때 경신대척출로 귀양지에서 사망하고, 큰형 이잠은 상소문을 올리다 노론의 공격에 의해 장살되어 죽었다. 이 사건으로 이익과 윤두서는 벼슬을 포기한 채 학문에 매진했고, 단순히 성리학만 아니라 지리학, 천문학, 의학, 음악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는 잡학가가 되었다. 잡학은 벼슬에 도움 되지 않으나, 조선의 백성에게 필요한 기술이었다. 기상을 알면 농사가 보이고, 지리를 알면 무역이 보이고, 의학을 알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기술을 쌓으면서 성호 이익은 박학다식한 학자가 되었고, 남인들 대부분은 성호 이익에게 가르침을 받아 성호학파란 거대한 실학학파가 탄생했다.

 

윤두서 역시 그런 실학적 가치관을 지녔고, 그의 관점은 백성의 삶을 연구하고 그들을 관찰했다. 이런 사상적 흐름이 다산에게 이어진 것이다. 다산의 외가 해남윤씨 녹우당, 한국 최초 천주교 순교자의 집, 한국 국문학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고산 윤선도, 녹우당 터는 해남윤씨가 기거한지 500년이 되었고, 고산이 효종에게 하사받은 가옥은 400년이 되었다. 한국 전통고택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과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는 녹우당, 한국 전통가옥 연구에서 녹우당은 매우 중요한 건축연구 대상이다.

 

몇 백 년 동안 전쟁과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그곳은 조선의 문화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세계이다. 예전에 전주 한복마을을 놀러간 적이 있었다. 한복마을 인근에 전동성당이 위치해 있다. 그곳은 정약용의 사촌 윤지충이 참수당한 곳이고, 그의 피가 서린 곳에 성당이 올라가있다. 해남윤씨 문중 홈페이지에 그동안 그늘에 숨어 있었던 윤지충의 초상화가 등장하고, 518 광주 민간인학살사건에서 마지막 수배자인 윤한봉도 다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다.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해남윤씨는 그렇게 바람 잘 곳이 없는 집안이다. 나의 아버지는 배를 타시고 몇 개월 동안 외국에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부자의 정을 깊게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어디를 놀러가는 일은 전혀 없었으며, 집에 오시면 집안 내부 수리일을 돕기만 했다. 그래서 대화의 주제는 그렇게 많지 않았으나, 유일하게 제대로 이야기한 부분이 정약용 선생과 고산 윤선도 고택에 대해서였다. 아버지는 정약용 선생의 따님이 강진 항촌마을에 시집을 왔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터져도 녹우당이 무사한 것은 국군과 북한군이 교대로 지켜주었기 때문이라 말했다.

 

해남윤씨 기원은 윤선도의 고조부 어초은 윤효정이 해남에 장가와서 생활하던 도중 나라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해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가뭄에 시달려 배고픔도 한탄스럽지만, 가난이란 이유만으로 옥살이를 해야 했던 많은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었다. 이때 어초은공이 자신의 재산을 나라에 기부하여 옥문에 갇힌 백성의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고 한다. 그것도 1번도 아닌 3번이었다고 한다. 해남윤씨 종가와 관련하여 본관이 해남이라 해도 본래 해남윤씨 집성촌은 강진군이고 문중의 장손 역시 강진에서 터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무관직을 주로 역임하다 조선 후기로 가서는 문관을 주로 많이 배출했는데, 양반 사대부 집안이라 해도 일반적인 양반의 모습으로 살지 못했다. 어초은의 스승인 금남 최부는 윤효정의 아내 언니의 남편이었다. 최부는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화를 당해 죽임을 당하고, 윤효정의 아들 윤구는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해 유배가게 되었다. 개혁적인 정치세력에 따라 권력으로부터 견제를 당했고, 신해사옥과 신유사옥 시에는 더 큰 위기에 봉착했다. 해남윤씨는 8대 종파가 있는데, 그중 어초은공파가 가장 많이 활약했지만, 그만큼 시련도 많았다.

 

선조시대 정여립 반역사건 시 동인의 영수 이발이 죽임을 당할 때, 그의 노모는 윤구의 딸이었고, 윤선도에게 고모할머니가 되었다. 고산 윤선도 역시 유배로 이루어진 삶이었고, 그런 비운의 삶은 한국의 국문학을 성장시켰고, 그의 흔적은 한국 대표 문화관광지가 되었다. 21세기 한국이 세계적으로 계속 인지도가 상승하면서 한국이란 그 나라는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 되묻게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를 방문하면 국가적으로 전통적 문화를 유지하고 있으며, 얼마 전 한국에 방문한 벨기에 여군대령은 그 나라의 공주였다. 벨기에의 공주라고 해도 그녀는 특권을 가진 권력자보단 시민의 한 사람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다.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그동안 멀리했지만, 다시금 찾아가게 되는 회귀현상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절 유교는 모조리 뿌리 뽑았지만, 지금의 유교는 전 세계에 공자학교가 세워질 정도로 다시 활약하고 있다. 조선유학에 대한 책을 보고 난 뒤 서양철학을 보면 그 말을 취지는 조금 상이할지어도 거기서 의미하는 맥락은 유사하다. 서구의 학문이 들어와 서구화된 것처럼, 그 서구화의 사상적 토대 역시 서양 철학가 내지 사상가에 의해 존립된 것이다. 그런 학문적 전통을 살리기 위해 각국에서는 그들 나라의 위인들의 역사적 기록과 업적을 기리며, 그들이 살았던 공간을 문화적 배경으로 삼는다.

 

과거의 가치가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나, 적어도 지켜갈 가치가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전통문화 기념한 유적지 및 관광지를 찾아가면 많은 관광객들이 온다. 지금은 어느 정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들의 후손들이 꾸준히 잊지 않고 지켜온 것이다. 녹우당 외에도 많은 전통한옥에 오랫동안 지켜오고 살아온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자유로운 인생을 포기하게 만들지언정 자신의 인생철학에서 오히려 더 소중한 것을 지켰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봐서는 답답할지 모르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은 휴가와 휴일을 이용하여 그런 장소를 찾아 떠난다는 점이다. 누군가 즐기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토대를 구성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누군가 그것을 맡기기만 하면서 그것조차 비웃으면 참으로 바보가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해남과 강진의 관광문화지도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정약용의 외가만 아니라 정약용의 친구 겸 사돈, 그리고 사위의 집과 무덤도 올라간 것을 보았다.

 

정약용 선생의 어머니가 해남윤씨지만, 자신의 딸도 해남윤씨 집안에 보냈다. 다산의 외가가 어초은공파라면, 다산의 따님이 시집간 곳은 해남윤씨 참봉공파 만호공댁 집안이다. 다산의 친구 윤서유,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의 친구 윤광택, 다산의 따님과 외손자가 같은 장소에 잠 들어 있다. 그들의 묘를 관리하고 제사를 받들어준 것은 역시 그들의 후손들이다. 집안의 틀에 얽매여 거기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굴레지만, 그 굴레가 없다면 한국의 전통문화는 모조리 사라졌을 것이다.

 

<녹우당>이란 책을 보면서 다시 또 느낀 점은 조선시대 사대부는 남성중심이라 해도 여성들의 업적이 너무 감동스러웠다. 여성 국문학에서 규한록을 저술한 광산이씨의 기록에서 애한과 갈등 그리고 운명적 기로가 돋보인다. 나의 가까운 친족이 많지 않은데, 내 할아버지들이 독자로 내려왔기 때문이라 들었다. 나의 고조부는 30살 되기도 전에 운명했다. 아직 10살 채도 안 된 증조할아버지는 고조할머니 손에 이끌려 강진군 항촌마을에 왔다고 한다. 몰락한 가난한 양반에 시집와서 남편을 여의고 하나뿐인 아들을 키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파온다.

 

집안 족보시작은 임오보라 하고, 그것은 고산 윤선도가 시작하여 그의 외손자가 마무리했다고 한다. 남자만이 아니라 딸의 생년월일도 기록하고, 어디에 시집간 것까지 기록했다. 제사문제는 유교문화 이전에 한국전통문화이기도 하지만, 제사를 지내야 하는 점은 단순히 친척을 모이기 위한 문화적 장치만 아니라, 힘들게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나오게 해준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으나, 아버지의 빈자리란 공백이 이렇게 만든 모양이다.

 

<녹우당>은 해남윤씨 댁의 역사와 문화예술이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내 아버지와 나와 이야기한 것에 대한 각인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이야기했던 많은 내용들이 이 책에 소개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 가난과 배고픔, 서러움이란 한에 눈을 감은 내 아버지를 돌이켜본다면 내게 남은 것은 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들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정리하고, 그런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책을 읽고 거기서 또 다른 이야기를 찾는다. 해남윤씨 집안에 태어나면 그 집안의 특성에 따른 문화적 영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그것과 무관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배제할 수도 있다. 허나 그것을 아직도 버리지 않았기에 해남 녹우당 뒷산에는 비파나무 숲길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다산초당에 있는 정자에서는 강진만의 푸른 바다가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한다. 시대는 계속 변화하고, 사회는 계속 이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나온다. 한국인이 한국 사람으로 남는 것은 문화적으로 계속 교류하는 것도 있지만, 기존의 것을 버리는 게 아니라 계속 새롭게 해석해 나가는 것이다. 실학자들은 기존의 것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늘 받아들여 색다른 결과로 이어갔다. <녹우당>의 책에서 소개한 녹우당은 기존의 것을 버리지 않고, 그 기존의 그릇이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어 우리 삶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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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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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전국적으로 돌풍을 일으킨 도서라서 한 번 읽어보았다. 그는 유대인이고, 저명한 생물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감명 깊게 읽은 후 이번 도서가 나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심히 보면 그가 전형적인 백인우월주의적인 면모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백인은 세계적으로 선진국인데 유색인종은 후진국에 핍박을 받는 것인가? 역사적인 맥락에서 그리고 인류학적인 맥락에서 읽어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안모색 반성정신이 없다면 책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내포할 수 없다.

 

인류학에 대한 보고에서 기존에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연대><야생의 사고> 같은 서적을 읽으면 인류학의 관점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문물의 교환으로 기술력의 차이를 말할 수 있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생활에 미치는 문화수준이란 틀에서 우월한지 아닌지를 논하기란 어렵다. 그 책들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는 나는 단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그 책을 저술한 사람은 유럽 내지 미국 등과 같은 백인 중심문화권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게다가 유발 하라리 백인이 아니라도 백인 중심의 문화가 되는 기독교 발생지인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다.

 

어느 것이든 단지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조건이다. 하지만 그 우발적인 우연은 그곳에서 태어난 인간에게 하나의 운명이 된다. 자연적 인간과 사회적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피엔스를 읽으면 바로 이런 관점을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 사피엔스만 현재 인류를 대표하고 나머지 인류는 사라지고 없는가? 네르탈인이나 자비원인 등과 같은 사피엔스와 다른 인류가 과거에 존재했고, 어느 순간 그들은 사라졌다. 분명히 존재했지만, 어떤 경로로 사라지고 없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과거 선사시대 이전에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이 극히 제한적이다. 남은 것은 인류의 사체에서 뼈 조각 정도이다. 하라리가 사피엔스와 다른 종족은 병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사피엔스의 강력한 힘에 의해 소멸되었는지 알 수 없더라도 적어도 사피엔스가 과거에는 자연에서 매우 약한 동물에서 지금은 모든 동물을 지배할 수 있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문화라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여 그 자리를 정복하여 만든 자리이다. 문화는 노동의 산물이나, 문화가 탄생한 시작은 농업시대이다. culture란 단어는 문화를 의미하기도 하나 프랑스어로는 농업이란 의미도 있다.

 

농업 이전에 인간은 많은 무리들이 소수 인원으로 구성되어 움직이면서 사냥과 채집하였다. 식단은 농업사회보다 훨씬 좋았고, 키도 신체조건도 훨씬 좋았다. 인류의 승리는 단순히 두뇌의 발달만 아니라 인류구성원 증감에도 큰 여파가 달려있다. 전 지구에서 어느 동물은 가지 못하는 곳은 인류는 모두 갔고, 심지어 달 표면까지 발자국을 남겼다. 모든 것을 확장시킴으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간 인류, 하지만 이것은 좋은 효과도 있겠지만, 나쁜 효과도 많이 등장시켰다.

 

인류학 서적 특성에서 마지막은 인류의 과잉성장과 욕망에 의한 자연파괴, 환경오염, 경제적 빈곤문제가 늘 등장한다. 사피엔스는 그런 인류학 도서의 흐름에서 그저 흘러가는 1권의 책이라 생각한다. 단지 작가는 생각보다 마르크스주의를 묘하게 드러낸다. 유물론적인 가치에서 경제적, 물질적 하부구조가 되어야 상부구조로 이어지는 점이 말이다. 우리가 구축한 세상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마르크스는 사상에 대해 논하기를 인간이 사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상이라 이념이나 이상적 가치조차 물질적, 경제적 조건에서 시작되면 어떻게 보는 것이 답일까?

 

물질적 요건에서 인류의 시작은 물질 그자체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지금처럼 이성능력이 탁월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생존을 위해 활동했다. 생존의 조건은 식량의 비축이고, 식량을 섭취하면 그 다음은 종족의 번식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에 비해 태어나는 아기들의 조건은 매우 불안하다. 동물은 태어나면서 이미 걷을 수 있고, 조금 시간만 지나도 사냥도 하고, 생식기능을 갖출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제대로 된 노동력(여기에는 2세를 만들 수 있는 생식기능까지 고려한다면)을 발휘하려면 14세 정도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14세는 아직 어린편이나, 과거 인간의 수명이 30~40살 정도라고 생각하면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매우 불리하다.

 

이게 인간의 두뇌가 발달된 이유일 것이다. 육체적으로 인간은 팔의 힘이나 다리의 속도나 이빨의 날카로움을 야생동물에게 이길 수 없다. 오직 두뇌의 발달, 사고력의 향상에서 태어난 창의력만이 생존의 방법이었다. 대신 인간은 두뇌와 손기술의 발달로 4족 보행에서 2족 보행으로 살아간다. 정교한 손작업에서 손은 땅을 지지하는 것보다 도구를 이용하는 편이 효율적이나, 직립보행을 하는 덕분에 인류 대부분은 요통을 가지게 되었다. 4발에서 2발로 몸을 지탱하므로 척추와 관절에 부담이 많이 가게 되었고, 다른 신체기관보다 대뇌로 혈액을 많이 보내야 하므로 운동능력이 다른 생물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피엔스 이외에 다른 인류는 사피엔스보다 더 좋은 신체조건과 체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피엔스만 남아 인류의 역사가 되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가지고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시간을 계산할 수 있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기에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인류의 전쟁사에서 위대한 영웅들의 작전은 바로 미래를 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할 수 있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사피엔스가 가진 힘이란 바로 생각을 할 수 있는 상상력이었다.

 

상상력의 완결은 사피엔스 인류에 대한 영속적 삶이 아니었다. 사피엔스 내부에서도 거대화로 이루어지면서 이에 대한 새로운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했다. 인류는 농경사회를 구축 전에 이동을 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농경사회를 거치고 나자 잉여가 발생되고, 잉여를 지키기 위해 혹은 약탈하기 위해 군대 내지 국가적 시스템이 개발되었다. 시스템 구축에서 통치 권력을 합법화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이념이 필요했고, 그것은 신화라는 매체로 통해 부족과 국가를 하나로 만들 수 있었다. 역사의 시작은 신화의 시작이라 나는 생각한다. 역사는 사실을 말하지만, 신화는 그 역사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록을 남기지만, 기록은 있어도 타 종족에게 삼켜진 종족은 기록은 남아도 신화는 없다. 신화는 가장 먼저 파괴되고 삭제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이 책에서 가장 잘 지적한 것은 서양국가가 아직 세계를 모르는 시기, 그 위험한 도전에 선원들이 배를 타고 항구를 떠난다. 다시 돌아올 시기가 1년일지 아니면 10년일지 혹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배에는 3가지 직업군이 항상 탄다. 하나는 군인, 둘째는 성직자, 세 번째는 상인이다.

 

침략의 조건은 무력으로 개방하여 피정복자들을 정치사회적으로 순화시키며, 이익창출을 위해 식민지로 삼는다. 하지만 상인이 가장 뒤에 뛰어드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경제적인 이익이 가장 먼저이다. 전쟁 내지 침략의 조건은 자국의 생산력이나 거기서 발생된 잉여물들이 넘치고, 그것이 처분되지 못해 경제적인 위기가 된다. 현대인들이나 15세기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경제학적으로 자본가나 기업인들은 이익영업을 위해 상품 판매전략을 짠다. 그들은 모든 상품이 팔리지 않을 것을 전제로 마케팅을 구상한, 현대인들은 상품이 나오면 모조리 다 팔리는 경제구조로 바라본다.

 

상품이 남으면 판매되지 않은 물품은 창고나 혹은 재고처리가 되고, 이익을 창출하지 못해 기업은 망하고, 국가경제는 위축된다. 방법은 확장하는 방법 경제적 침투이다. 현대사회는 금융자본주의가 정착되었으나 불과 20세기 중반까지는 금융자본보단 상품판매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모든 국가가 자본주의 시장체계를 가지지 못했고, 자본주의 시장체계의 정치제도는 민주주의이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조건이 부여되고, 그것을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하는 점이다.

 

국가가 시장과 정치를 독점하면 상품의 진입은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이 저지른 최악의 악덕이 아편을 중국에 밀매한 것이다. 아편전쟁으로 승리한 영국은 아편을 마음대로 중국에 뿌렸고, 시장개방까지 얻었다. 시장을 침공당하면 자본력이 침식되어 다시 역전하기는 어렵다. 또한 금융자본주의 이전에 경제는 금은 같은 귀금속이 화폐적 가치가 높았다. 과거 미국달러는 은행에 저장된 금과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금의 보관이나 금의 가치적 문제로 미국은 달러를 금과 동일한 가치로 나두지 않았다.

 

화폐와 금의 등치관계에서 화폐 그 자체로 모든 가치를 척도를 두면서 자본주의시장에서 금융자본이 활성화와 연계된다. 경제적인 이익에서 국가는 전략을 바꾸고, 식민지 정책과 대외 외교정책을 수정한다. 게다가 외교정책에서 경제정책을 잘못 펼치면 망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프랑스대혁명이다.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한 산악파들은 민주주의 열성을 외쳤지만, 그 계기는 국가부도 사태이다. 루이16세 이전 루이14세는 대외외교정책과 식민지정책에서 경제적인 참패를 겪었고, 국가예산의 대부분을 빚의 이자를 갚는데 사용했다.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높이고, 중앙집권적 통치는 지방귀족들을 위축시켰고, 지방의 농민은 부조리한 경제적 모순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귀족과 성직자는 세금을 내지 않고 시민과 농민만 부담이 가중되자 결국 혁명이 일어난 셈이다. 혁명의 에너지는 가스가 새고 있는 가스배관과 같았다. 단지 도화선을 붙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한 셈이다. 변증법적으로 질량 변환법칙이 있다. 물이 100도를 넘으면 수증기가 되듯이 에너지가 일정수준 올라서면 바로 속성이 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조차도 경제적 구조이기도 하나, 그 구조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문화유물론자들 주장하는 경제적, 물질적(문화유물론자는 환경적, 생태적 조건도 본다) 조건에 의해 사회적 변환이 일어난 셈이다. 인류의 혁명 내지 전쟁, 각종 사태는 이런 경제적, 물질적 조건이 따르게 되어 있다. 최근 한국 프로바둑선수인 이세돌 씨가 구글에서 만든 지능성 컴퓨터 알파고와 대국을 두어 14패를 기록했다. 컴퓨터는 단순히 계산만 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중심으로 예측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예측은 인간을 뛰어넘은 것이다. 나도 업무를 하면서 다른 사람과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마다, 모델링 자료를 확인한다. 대기가 확산 및 이동되면서 대기 중의 대기오염물질이 어떻게 퍼지고 농도는 얼마나 증감하는가를 말이다.

 

인간의 확장은 처음에 동물과 다른 인류는 이제는 인류 스스로에게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너무나도 흔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 일원인 하버트 마르쿠제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나면 최종적으로 착취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라고 했다. 자연이 파괴된 지 옛날이고, 인간은 인간 유전자 조작기술을 연구하고, 사이보그 연구를 한다. 과거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활약한 <터미네이터>란 작품은 괜히 나온 것은 아닌 듯 보인다. 하지만 인류의 확장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그것에 따른 혜택을 보고 있다.

 

인간의 수명이 30~40살이던 게 지금은 70~80살이다. 하지만 여전히 심각한 빈부격차로 나이가 너무 들면 국가적 재정문제만 아니라 노인에게 주어진 환경조차 가혹하다. 빈곤한 노인은 병원비를 제대로 내지 못해 아픈 몸을 시달리고, 길거리에 손수레를 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돌아다니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도 1960~1970년대 경제성장 주도라고 하나, 경제는 성장했지만, 성장한 것은 국민경제생활이 아니라 경제라는 공간이 팽창했다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제가 제대로 성장했다면, 지금 길거리에 손수레를 끌고 밤에 뺑소니로 운명하는 분들을 2번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하라리도 잘 지적했지만,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이미 그 문제에 대한 의문을 잘 지적했다. 하루 8시간 노동시간이라 해도 출퇴근 1번에 1시간 넘는 시간을 보내고, 집에 와서 세탁기 및 청소기가 있어도 늘 생활은 빈곤하고 바쁘다. 여유가 있어야 하겠지만, 기술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진다. 부시맨 혹은 원시부족은 하루 3시간 일하고 며칠 동안 계속 놀거나 휴식을 취한다. 기술적 수준은 원시부족이 떨어져도 삶의 질은 그보다 못한 게 우리의 삶이다.

 

삶의 질을 본다면 우리가 그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기술의 발전은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인류를 바꾸고 그것은 정치와 사회적 틀로 변모한다. 외교와 전쟁관계에서도 결국 자국의 생산시스템이 확장되어 더 이상 한도를 지탱할 수 없기에 벌어지는 사태이다. 우리는 이런 욕망의 굴레에서 스스로 억제하기보단 언제나 그 굴레를 수레바퀴처럼 계속 돌린다. 수레바퀴는 그저 같은 반경으로 회전하나, 우리는 눈사태가 난 산처럼, 끝임 없이 눈덩이를 불리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문명의 혜택이고, 그 혜택은 당연히 빈부격차로 통해 구현된다.

 

세계 인구는 70억을 돌파하여 전 세계가 사피엔스로 가득하나, 한국은 오히려 역으로 인구가 축소되고 있다. 세계의 거대한 흐름이 우리 일상생활을 크게 뒤흔들지는 않으나, 작은 변화가 계속 누적되어 큰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 게 옳은 것일까? 하라리는 인류는 계속 확장되고 있는 반면, 반드시 좋은 방향만 향해 가고 있다고 하지 않는다. 좋지 못한 방향도 있기에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대안이 나온다. 그런 점에서 유발 하라리의 책과 그 책을 읽는 나에겐 변증법적인 상황이 보이는 것 같다.

 

책을 처음부터 끝가지 읽으며, 거대한 이야기가 오는 것처럼 보이나, 막상 무엇이 인상 깊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서 크게 와 닿는 것은 없다. 이미 이런 맥락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오래전부터 내놓은 이야기이고, 유발 하라리는 단지 그 담론 속에서 최근 일어난 일들과 최근 기술로 밝혀낸 과거의 인류와 역사를 보충할 수 있다는 정도이다. 물론 이런 책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논하는 담론은 너무 익숙한 점이다. 문명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성에 대한 현상은 잘 말할 수 있어도 거기에서 오는 비정상적인 야만의 시간을 제대로 반성하기란 어렵다.

 

그나마 유발 하라리가 다이아몬드보다 더 나은 점은 그는 문명과 역사과정에서 희생된 자들의 입장을 고려했다는 점이다.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저녁에는 파티를 열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경건하게 찬송가를 부르는 많은 착한 시민들은 사실 인도에서 굶주리는 인도인과 아메리카에서 손발이 잘려나가는 인디오 주민들의 고통 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는 자연의 파괴, 동물의 학대, 타인의 고통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이 현상이 계속 유지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착취수법이 나온다는 점이다. 사피엔스는 이미 지구를 점령했지만, 1가지 점령하지 못한 것은 타인에 대한 윤리이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형태에서 사피엔스는 자기기만으로 세운 왕국에서 군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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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5-30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피엔스는 자기기만으로 세운 왕국에서 군림할 것이다˝란 말씀에 깊이 공감하며, 그로 인해 곧 멸망할 것이란 저자 2부작 <호모 데우스>에서 중심 주제란 생각이 듭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7-05-30 22:41   좋아요 2 | URL
데우스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시계장치의 신이라 등장하는 것일까요?
도서관에 나오면 빌려 봐야겠습니다앙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7-05-30 22:54   좋아요 1 | URL
<호모 데우스>에서 기계 장치인 마키나가 원인이 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호모 데우스>를 얼핏 읽으면 마키나가 인류 멸망의 원인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전 다르게 읽었습니다. ㅎㅎ
그저 우리 문제, 우리 사고와 생각, 우리 기만의 문제였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7-05-31 10:30   좋아요 0 | URL
결론은 저 책을 제가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군요..ㅎㅎ
 
다산의 후반생 - 다산 정약용, 유배와 노년의 자취를 찾아서
차벽 지음 / 돌베개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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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후반생>을 보면서 정말 인상적인 의미가 나왔다. 한국은 단군조선 고조선을 포함하여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긴 시간 속에 무()의 상징은 충무공 이순신, ()의 상징은 다산 정약용이다. 조선의 역사는 600년이고, 긴 왕조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만큼 대단한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도 한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서 2사람은 절대 놓칠 수 없는 위인이다. 그러나 2사람 모두 공통점이 있다. 시대에 필요한 인물이나 빛을 볼 수 없던 자이다. 정적들로 하여금 죽음의 고비를 계속 넘어온 자들이다.

 

이순신은 원래 하급무관이었으나, 친구인 유성룡의 천거로 상당히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유성룡은 정치적 성향은 동인이었으나, 결국 남인의 영수가 되었고, 이순신의 정적들은 대부분 서인들이었다. 게다가 임진왜란 후반부로 가면 동인에서 시작한 남인과 북인이 서로 갈등을 빚게 되고, 유성룡은 북인에 의해 탄핵당해 평생 안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한 친구는 정치적으로 파면당하고, 그 친구가 파면당한 것을 멀리서 들은 다른 친구는 왜적의 총탄에 서거한다.

 

만일 유성룡이 정승의 자리를 지키고, 선조 옆에서 전쟁 후의 정국을 다스렸다면 분명 이순신을 죽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승리하여 돌아와도 선조와 서인들에 의해 죽을 운명이다. 자신이 반역죄로 몰려 참수당하면 유성룡 역시 무사하지 못한다. 누가 반역죄로 몰리면 가족과 친척, 친구까지 연좌되어 처벌을 받는 게 조선의 형벌문화였다. 이로부터 200년이 지나 정약용은 천주학쟁이란 오명으로 작은형과 매형 그리고 친구들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대부분 신유사옥에서 죽은 자들은 남인이었고, 그중에 신서파 내지 시파 계열이었다. 노론 벽파와 남인 공서파는 어떻게든 정약용을 죽이려 했다.

 

비극적 운명으로 살아간 2사람에게 이순신은 죽음 그 자체로 승화했다면, 정약용은 삶을 유지함으로 승화했다. 지금 정약용의 이름을 들으면 실학자, 철학자, 과학자, 정치가 등등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떻게 인생의 마지막을 보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유배지도 다산초당만 기억하고, 그 초당과의 인연, 그 안에서 생활, 초당에 도달하기까지 여정까지도 말이다. <다산의 후반생>은 신유사옥 이후 다산이 처음 강진에 있는 주막에 오고 다산초당에 가고, 그리고 해배되어 마재에서 마지막까지 보낸 것에 대해 저술한 서적이다.

 

처음 강진에 올 때 사암(정약용의 본래 호)을 보고 많은 사람은 마치 괴물이 온 것처럼 놀라 도망치기 바빴다. 담을 허물고, 집을 파하여 도망치는 그 모습에서 유배지의 쓸쓸함과 세상이 모두 자신을 버린 것처럼 여겼다. 귀양살이 하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시기, 다행히 주막의 노파는 그를 받아주고, 방안에서 기거해주었다. 귀양살이하면 참으로 괴롭다. 귀양살이하는 사람은 사대부 양반이나, 조선의 양반 모두가 권력을 가진 게 아니다. 권력자의 눈에 거슬리거나 무고를 당해 귀양 가는 일들이 허다했다.

 

신유사옥의 천주교박해에서 정약용은 이미 천주교와 관계를 끊었다 해도 작은형 정약종, 매형 이승훈와 엮일 수밖에 없었고, 이가환과 9촌이 되는 다산의 친구조차 이가환의 친척이란 이유로 귀양을 20년 넘게 했다. 이런 운명에서 귀양살이에서 그 많은 서적을 저술했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을 이미 초월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귀양살이에 감시의 눈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다산의 친구이며 사돈인 윤서유는 신유사옥 때 옥고에 시달렸다. 다산이 신유사옥을 당할 적에 서울에 있고, 친구는 강진에 있는데도 관아에 문초를 받은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박석무 학장님, 이덕일 작가의 책 이외에도 개인으로 들은 이야기가 참 많이 담긴 것 같았다. 지금이야 다산학술재단이 활발히 연구하고 있고, 강진군과 남양주시가 다산을 소재로 문화사업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 하지만 조선말기와 일제치하 시절에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다산초당은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해남윤씨 행당공파(어초은공파)의 소유물이고 건축물 관리를 위해 기와집으로 교체했다. 책에서 이것을 언급했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다산연구자로 유명한 분으로 박석무 학장이나, 체계가 잡히기 전에는 다산초당을 관리하시던 윤재찬 옹이었다. 윤재찬 옹은 작고한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나의 할아버지와 친했던 분이다. 과거의 일화이다. 내가 다도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다산초당에 갈 기회가 있어서 초당 아래에 있는 전통찻집 가게 세작 하나를 샀다. 다신계(茶信契)란 가게의 주인은 정약용 선생이 귀양살이 하던 시절에게 초당을 내어준 윤단(윤규로)의 후손이 운영하는 곳이다. 윤재찬 옹은 그들의 후예이다.

 

다산 선생이 초당에 기거하게 된 동기는 학문수준도 높은 것도 있지만, 그들이 외가 집안과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다산의 친모는 해남윤씨 귤정공파(어초은공파) 고산 윤선도 직계 손녀분이다. 다산초당에 기거한 정약용 선생은 외가 방계로부터 생계를 보장받고, 강진군 옆 해남에 위치한 외가 녹우당(綠雨堂)에서 장서를 빌려보고 공부했다. 그리고 한국 최고의 학문그룹인 다산학단을 일으킨 것이다. 시골 강진에 가면 가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같은 많은 도서가 다산 혼자서 저술한 게 아니라 제자들과 같이 만들었고, 제자는 스승의 이름으로 책을 세상에 알린 것이라 했다.

 

200년 전의 이야기가 우리 집안에서 구전으로 전해온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산초당 주인인 윤재찬 옹이 나의 친할아버지와 친구였고, 다산의 사돈이자 친구인 윤서유는 나의 직계할아버지와 친척 사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하던 일중에 하나가 집안 족보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나의 조카가 족보에 등재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아버지에 보여드린 것이었다. 병원에서 손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돌아가시기 전 나는 그 족보를 집으로 다시 들고 왔다. 어제 주말 낮에 다시 족보를 확인하면서 색인부분을 찾아봤다.

 

내가 보는 족보는 대동보이고, 집에 있던 족보는 병조참의공파세보였다. 그런데 대동보를 보니 이때까지 우리집안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의 출생을 기록한 것이 어느 책의 몇 페이지에 있는지가 나와 있었다. 거기에 정약용의 3형제의 이름이 있었다. 어머니가 해남윤씨이기 때문에 대동보에 올라가 있던 것이다. 대동보가 아닌 병조참의공파세보에도 정약용의 이름은 올라가있다. 나의 파보에서 정약용은 윤서유의 사돈으로 나온다. 게다가 윤서유가 벼슬하던 중 병으로 작고하자, 그의 묘비에 글을 쓴 것도 족보에 남겨져 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한 말이 강진 항촌마을에 다산 선생의 따님이 시집왔다는 이야기다. 시집간 집은 나의 아버지가 태어난 집에서 걸어서 10분 내외이고, 옛날 작은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 집에 2분도 걸리지 않는다. 명발당이란 이 한옥채에 아직도 사람이 산다. 여기서 다산의 따님이 시집을 왔고, 다산의 따님은 남편, 시아버지, 시할아버지가 묻힌 자리 주변에 잠들어 있다. 이미 태어나는 순간 우리 가족은 다산 선생과 엮이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정해창 선생이나 정새균 국회의장 같은 정약용 선생의 직계후손 분도 있지만, 다산 선생을 유배지에서 우러러보고, 해배 뒤에도 잊지 않고 그 뜻을 기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예전에 우리 집(고조할머니)이 불이 나서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집이 불타기 전에 엄청난 서적이 있었지만,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전후관계로 보자면 목민심서가 동학운동의 토대가 되는 책이란 점이고 다산의 제자들은 동학운동 시기에 억압을 당했다는 뜻이다. 다산이 살아생전에 서학에 의해 박해를 당했다면, 그분이 작고한지 수십년이 지나서는 동학에 의해 박해당한 것이다. 고조할머니가 증조할아버지를 데리고 항촌마을에 이사왔는데, 그 전에는 다산초당 앞 강진포구 건너편에 있는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훈장선생을 하던 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강진만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갔다고 한다. 책에서도 다산의 18제자 외, 윤정기의 인척 및 양반자제가 초당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인척이라면 분명 맞는 말이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장례식 때 다산계원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산도 그렇지만 조선말기 양반들은 모두 잘 사는 게 아니다. 남인 사대부들은 언제 무고에 의해 처형 내지 귀양 당할지 모르는 노릇이고, 힘이 없기에 하루 밥 먹는 일조차 버겁다. 다산 선생은 원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사건으로 더욱 집안은 몰락한다. 정약종의 순교와 정약전의 병사로 남은 조카들을 모아 키워야 했다.

 

강진에서 유배살이 중 아드님 2분이 오실 때 본가에서 마늘을 심고 팔아 여비를 마련했으니 그 초라함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게다가 제일 큰형의 따님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좌되어 제주도 어느 집의 종으로 팔려갔다. 정약용 선생의 큰형은 그런 딸을 생각하면 눈물로 밤을 보내고, 차라리 그때 같이 죽었으면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다산 선생의 신유사옥부터는 가족들의 죽음에 절망했고, 돌아와서는 가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다산 선생은 담바고(담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연초를 준비하는 것도 어려운데, 아내인 풍산홍씨는 얼마나 힘들까?

 

책을 읽으면 다산 선생이 위대한 분이란 사실도 알지만, 그와 다르게 그가 참으로 소박하고 조금 다르게 말하면 조금 얄미운 분이었다. 친구를 좋아하는 남편을 둔 아내는 참 괴롭다. 없는 살림에 손님이 오면 어떻게든 대접해야 한다. 귀양살이하기 전에도 친구와 찾아와서 술과 안주를 내어온다고 하나, 친구들 대부분은 가난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하나, 농사를 짓는 양반은 많았다. 실학이 발달된 동기도 남인 사대부들은 권력과 재력이 없기에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했다.

 

배고프면 귀천이 필요 없다. 시대의 모순과 적폐는 지식인들에게 고독을 백성들에게 기아를 선사한다. 강진에서 다산은 다산초당이란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지만, 그와 다르게 백성들의 삶을 보고 한탄을 토해내었다. 작가의 서적에서 보이는 사진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이어지는 동백숲속 길은 아름답다. 다산초당 옆 정자에서 보는 강진만 포구는 참으로 시원하다. 아름다운 광경 뒷면에 다산의 눈물이 어린 것이다. 정조대왕 붕어 후 자신을 알아보는 자는 양심의 눈과 존경의 눈을 가진 제자와 학자지만, 세상은 너무 무서웠다.

 

자신을 탄압했던 서용보는 정승자리에 올라가 계속 자신을 억누르고, 구중궁궐 안동김씨 세도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남양주로 돌아와 열수노인으로 학문을 집중하려 해도, 그에게 남은 것은 허무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단지 우리가 다산 선생의 서적과 연구도서를 읽으면 대단한 분이라 여기겠지만,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본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숙연해진다.

 

내년 2018년은 다산선생이 강진에서 해배된 지 200년이 되는 해이다. 매년 음력 222일은 다산선생의 기일을 지낸다. 차를 올려 제를 올리는 헌다식이 이제는 경기도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가 되었다. 아장 혜장스님께 걸명소란 시를 지어 차를 얻어 마신 다산 선생의 재치, 다산선생의 녹차 제조방법은 200년을 넘어 계속 유지된다. 과거에 있던 위대한 인물과 시기가 있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지켜가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집안문중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았다. 게시자 이름을 보니 과거 아버지와 친구 분이었다. 그분이 시제에 지내는데 집안식솔이 15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 사람이 많고 적음에서 내 글을 보는 사람들은 뭐 대수로운가? 하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이 모시는 어른은 윤광택(다산선생 아버지의 친구), 윤서유(다산선생의 친구), 윤창모(다산선생의 사위), 윤정기(다산선생의 외손자) 등등이 있다. 여기에 더 보태어 아쉬운 것은 아버지 친구는 다산선생의 외손자를 시제에서 모시지만, 피는 조금 다르다. 직계손이 이어지지 않아 윤광택의 동생 후손분이 대신 입양하여 대를 모신 것이다.

 

그래도 이마저도 다행이 아닌가? 다산선생의 친구와 따님, 외손자 되는 분은 계속 후대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물론 다산학술재단에서 방산 윤정기 선생의 학문을 연구하겠지만, 그분의 묘를 깎아주고, 제사를 지내주는 것은 후예들의 몫이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했던가? 우리의 현실을 보면 역사를 잊는 것보다 역사조차 배척한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특유의 민족주의는 내세우는 형태에서 아쉬움만 남는다. 지켜야 할 것은 그 고집스러운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아니라면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인지 한 번 더 생각하면 좋겠다고 여긴다.

 

다산은 분명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위인이고, 세계적으로 기념될 정도로 훌륭한 학자이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지키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동학혁명 시기에 다산의 서적을 모조리 없애려 했고, 그와 그 제자들의 후손들은 핍박을 받았다. 역사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후손들이 오래오래 유지를 지켜서 가능했다. 책에서 1888년 이가환과 권철신 같은 신유사옥 희생자들의 묘비를 공개했다는 내용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유사옥이 1801, 다산서거가 1836년이니 그 노고는 알아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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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5-1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허허.. 요즘 연애생활로 바쁘신 분이 어찌 이리 긴 리뷰를.. 허허..

만화애니비평 2017-05-15 21:47   좋아요 0 | URL
여자친구는 현재 야근하고 퇴근하고 있을 겁니다..ㅎㅎㅎ
 
조선 왕 독살사건 2 - 효종에서 고종까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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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1759일 이날은 새로운 대통령을 선거하는 날이다. 그리고 다음날 510일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했다. 과거 언론에서 신임 대통령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분명히 어머니이다. 그러나 보통 대부분 한국인이나 혹은 세계 어디를 가도 보편적인 성향이 있는 자라면 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란 부모님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누구를 제일 존경하면 좋을 사람인가? 한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같은 인물도 있지만, 지식인들이라면 당연히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물론 나도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다산의 위대함은 그 시대에도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가 죽은 뒤 나라가 망한 후 독립운동가에게 조선의 얼이요, 해방 후 우리 역사에서는 유네스코에 등재될 정도로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이란 언제나 가시밭길이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따르던 정조대왕이 붕어하자 그의 운명은 풍전등화처럼 변했다. 정조대왕은 아직 40대 정도이고, 문예적 실력만큼 무술실력도 뛰어났다. 효종대왕을 이어 무관군주로 사도세자를 이은 정조이다. 명궁은 물론이거와 병법조차 훌륭한 철인군주이다.

 

여기서 철인이란 강력한 철권통치자가 아니라 플라톤이 원하던 지적능력과 더불어 운동능력 같이 지닌 자이다. 이데아의 절대적 세계를 도달하지 못하여도 이데아의 세계에 가장 접근한 군주로 볼 수 있다. 그런 정조가 갑자기 승하했다. 수원화성을 만들고 그 옆에 사도세자의 무덤까지 조성했다. 그가 왜 죽어야 했을까? 조선은 특이한 국가이다. 이덕일 작가는 2009년부터 이 책을 재발간하면서 원하던 답을 이미 제시했다. 역사라는 틀을 보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미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은 전주이씨 성씨를 가지지 않으면 될 수 없고, 왕의 직계 세자 내지 세손이 아니면 그 자리에서 더욱 멀어진다. 어쩔 수 없이 방계로 이어져도 최소 10촌을 넘지 않았다.

 

대부분 4촌 내지 8촌 사이에 오갈 뿐이다. 그 정도면 가까운 친척사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온 여정은 간단하지 않다. 조선이 전근대사회이며, 인간의 수명은 40세를 넘으면 하늘로 돌아갈 정도로 생존기간이 짧다. 그래도 왕가나 사대부는 60세 넘은 자도 많고, 80세를 넘은 자도 많다. 아무리 그래도 20살도 넘지 않거나 혹은 40대 되기도 전에 죽은 임금과 세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임금의 죽음은 이상하고도 묘한 기운이 느낀다. 건강한 임금이 어느날 종기에 걸려 처방이 틀려 죽거나, 시체를 염을 하는데, 시체의 몸에서 피가 나오거나 몸 전체가 퍼렇게 멍든 것처럼 변하면 무엇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조선의 왕가는 의문 속의 죽음이 늘 곁에 숨 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과 한국의 정치체계는 봉건사회와 민주사회이지만, 그 근본적인 정치적 동력은 같다. 조선의 정치는 왕을 중심이나 왕 혼자만으로 불가능했다. 사대부가 없으면 통치가 어려웠고, 사대부들이 신봉하는 유교문화를 지탱하지 못하면 집권에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그 당시에 당쟁이 있었고, 지금도 당쟁이 있다. 단지 그 차이는 조선은 당쟁이 왕권에 의해 조절되고, 지금은 국민에 의해 움직인다. 한국에 군주는 5000만명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중종을 두고 용군이란 말을 하듯이 국민조차 용민이 되면 곤란하다.

 

조선역사에서 국가재정은 파탄 나고, 농민은 살기 위해 도망치거나 도적이 되고, 누구는 반란을 일으킨다. 이런 정치적 조건에서 정치인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조선에서 왕이 힘이 없으면 신하의 권세에 밀린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승정원은 임금의 비서를 맡은 자이다. 임금이 아무리 시정명령을 내려도 승정원 승지가 문서를 생산하지 않으면 임금의 명령은 전달되지 못한다. 승지가 임금과 권력의 라이벌일 경우 그 정도는 심하다. 조선은 붕당에서 국익이 아니라 당익을 위해 정치를 펼친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정치혐오증을 일으키는 이유도 정치적 쟁점에서 어느 당론이 맞는가이다. 그런데 그 당론을 논리적으로 보고 국익에 부합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서 현실 상황에 큰 여파가 닥치기 때문이다. 당론의 의결이 당의 이익에만 치중되고 대의가 없다면 분명 물려야 할 것이다. 조선의 왕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끼는 동생과 조카를 귀양을 보내야 하고 심지어 사약을 내려 목숨까지 빼앗아 버린다. 조선의 군주는 가족도 가족처럼 대할 수 없었다. 삼촌이 조카가 군사를 몰고 직위를 빼앗기도 하고, 사랑하는 동생을 지키지 못해 눈물로 사약을 내리는 군주도 많다.

 

이런 점에서 <조선왕 살해사건>은 단순히 조선이란 국가에서 군주와 그의 일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국왕은 죽은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국가적 존립에서 심각하다. 군왕의 죽음은 정치체계의 개편이고, 다음 군주가 어느 성향인지 신하의 포진상태에서 따라 조선의 운명은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진다. 조선의 왕이 죽은 점에서 30% 이상이 권력 다툼에서 사라진 자들이다. 그 권력을 다시 잡은 권력자도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고민한다. 형님 문종 조카 단종을 보내고 직위에 오른 세조는 이런 고민에 빠진다. 그 역시 공신을 이용하여 김종서를 죽이고, 많은 대신들을 주살한다.

 

그런 그가 포악한 임금인가? 세조는 분명 권력에 잔인했다. 하지만 백성에게는 친절했다. 군주가 되어도 몸소 검소한 의복과 식단을 지켜왔다. 그의 후손인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시키고, 도덕군주로 활약했다. 이런 일련 과정에서 조선의 왕이란 자신의 권력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인간이란 점을 우린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왕 살해사건>에 등장하는 왕과 왕족을 보면 은근히 괜찮은 면이 많다. 정조는 당연하고, 효종과 현종, 효종의 형님이신 소현세자, 순조의 아들, 예종 등등, 이들의 희생은 왕권과 더불어 조금 더 나은 조선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를 한 자들이다.

 

소현세자는 명이 멸망하고, 청이 우세하며, 멀리 유럽에서 온 서양인 선교사와 친분을 나누고, 문물을 발전시키려 했지만, 인조의 질투 아래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까지 죽어갔다. 40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이나, 그 사연은 너무 가슴이 아프다. 효종은 형님과 달리 강한 무관군주로 동북아시아의 군웅이 될 수 있었으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아들 역시 아주 현명하고 침착하지만 왕권강화를 이룰 수 없었다. 숙종은 피를 피로 물들이는 정치공작을 펼치고, 그 덕분에 영조의 형님 경종은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왕의 독살은 백성에게 당장 큰 변화를 주지 않는다. 정치암투를 늘 일상적인 궁궐의 이야기이나, 그 집권자 중심으로 누가 옆에 있는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조선이 망한 이유는 문물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무능함도 있지만, 백성의 재산을 착취하고, 백성의 눈물과 피를 빼는 포악한 행위로 인해 망했다. 공자와 맹자는 모든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라 하였거늘, 오히려 그들은 백성을 죽이고 수탈했다. 군주제의 왕권을 다시 회복하면 절대왕권으로 신하의 권력을 감퇴할 것이다. 그 시작점은 재산의 통제이고, 재산은 백성의 골수에서 나온다. 백성의 골수를 빨아대는 비리와 부패가 사라지면 조선은 분명 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기득권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기득권은 오히려 자신이 가진 기득권의 영역을 더욱 더 확장시키고 싶어 한다. 조선군주의 죽음에는 이런 기득권에 저항한 사대부들의 운명도 따라온다. 노론에게 격렬히 저항한 청남과 소론은 경종과 정조의 죽음으로 몰살을 당하고, 영조시대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사도세자의 시신이 궁 밖으로 나갈 때 많은 백성들이 슬퍼했다고 한다. 사도세자를 죽이려한 노론과 권력자들은 화근을 제거해서 좋다고 했다. 이게 정치의 현실이고, 국가가 망하게 된 원인이다.

 

이덕일 역사학자는 이런 조선의 역사를 두고 지나간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한다. 정치적 정쟁에서 정치권력은 조선 사대부들의 특권이나, 지금은 아니다. 조선의 왕은 전주이씨 적통이나, 현재는 전주이씨와 더불어 살아가는 국민이다. 우리의 군주는 아니나, 우리는 조선의 군주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역사의 교훈으로 우리의 앞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마지막 독살된 군주는 고종황제이다. 고종황제의 아들 순종은 독에 의해 뇌질환이 생겼고, 고종황제 역시 해외망명 이전에 서거한다. 비록 아버지 대원군과 아내 명성황후, 일제와 청나라 등 국가 내외로 많은 압력으로 힘든 삶을 살아도 조선군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분이다.

 

조선의 백성은 아무리 왕정이 무능해도, 그래도 조선의 백성이었다. 나라를 잃어도 고종의 존재에서 조선이란 국가는 사라져도 조선이란 역사와 영혼을 살아있었다. 조선의 몰락은 일제강점기의 시작이나, 한편으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국권을 박탈당한 시기이다. 조선이 명나라의 눈치를 보고, 고려가 몽골에 의해 점령되어도 고려와 조선이란 국가라는 이름은 존재했다.

 

4월 초, 시골에 집안제사를 지내기 위해 먼 길을 운전한 적이 있었다. 시골에 가면 우리 가족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묘지에 재배를 올린다. 이때 절을 올리면서 나의 조부모만이 아니라 조부모의 형님 내외까지 절을 올린다. 나의 할아버지는 4형제 중 3번째이다. 그런데 제일 큰 형님, 즉 나의 큰할아버지는 증조부가 별세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자식으로 가장 큰 죄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 분이 떠난 시기가 1946,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다음 해이다. 큰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강제징용을 갔다가 해방되면서 귀향했지만, 결국 운명하고 만다.

 

일제에 의한 징용당한 분들이 거기서 운명을 하거나 돌아와서는 골병으로 인해 운명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큰할아버지 따님, 사촌누나하고 친했다. 아직도 그 큰고모님은 생존하시고, 아비 없이 살아온 날이 70년이 넘은 셈이다. 만일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나도 큰할아버지 얼굴 1번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덕일은 단순히 조선왕의 죽음을 적고 있지만, 조선왕의 독살설은 결국 조선 민중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들었다. 지금도 위안부 할머니의 한은 풀리지 않고 있으니, 역사의 과오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덕일 작가는 조선역사를 주로 연구하고, 특히 정조시대, 그리고 정약용 선생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를 저술하여 관리의 중요성이란 결국 목민관의 성향에 따라 백성의 생존까지 이어짐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다산 선생은 박해 속에서 살아가고, 죽은 뒤에도 권력에 의해 묻혀 지내야 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민족사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은 다산이야말로 조선의 멸망성쇠 그 마지막 기로에 있다고 했으며, 21세기 다산은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민족의 스승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새라도 하늘에 날기 전에 올가미에 걸리면 날 수 없고, 그대로 죽고 만다. 조선의 군왕은 독살되었지만, 지금의 한국국민은 독살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과거의 오랜 모순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미래를 선택하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다시 배우고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그 선택의 순간이 과거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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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
정광호 지음 / 눌와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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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 어디를 가도 가족의 죽음은 아주 큰 비극이다. 사람이 죽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천운이다. 생물로 태어나면 생명은 사라지고, 사라진 생명을 대신할 새로운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영겁의 순환으로 살아간다. 동물은 본능으로 살아가나, 인간은 조금 다른 식으로 전환된다. 동물에게 문화라는 조건이 없다. 인간만이 지구에서 문화라는 매체로 살아간다. 동물은 필요한 수요만큼 생명을 죽이나 인간은 필요한 수요 이상으로 생물은 죽인다. 게다가 필요 이상으로 동족까지 공격하는 부류이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는 없다. 단지 인간은 문화라는 매체를 가지고 있고, 그런 문화적 문제로 인해 필요 이상으로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후반이 되자 한국은 민주주의 체계가 정립되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지하고문실로 끌려가서 물고문이나 전기고문을 받지 않게 되었고, 의문의 실족사나 행방불명도 되는 일도 드물게 되었다. 민주주의체계를 보자면 정치사회적인 여건이나, 이것도 하나의 문화적 요건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우리 역사를 유교문화국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조선은 유교가 종교이며 정치이며, 철학이며 하나의 삶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나, 거대한 시스템이란 체계구조에서 유교가 하나의 큰 틀이었기 때문이다. 유교사회의 지배계층과 더불어 우리의 역사에 남기는 존재는 대부분 양반 사대부들이다. 사대부들의 역할을 두고 공자의 <논어>와 관한 책을 조금이라도 읽는다면 전혀 다른 양상으로 가지만, 그래도 공자의 사상을 유지하려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이런 사회에서 부모가 죽는다는 것은 엄청 큰 불운이었고, 특히 집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더욱 큰 불운이었다.

 

가부장 사회라는 점도 있지만, 한국에서 역사적으로나 혹은 신화학적 연구에서 제일 심한 욕이 후레자식이다. 아비 없는 놈이라는 의미이다. 아비 없이 자란 인물도 많고, 큰 업적도 남긴 분도 많다. 단지 아비가 없는 것은 경제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큰 상실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아비가 자식의 장성하는 모습을 본 후 세상을 떠나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아비를 잃은 자식에겐 큰 숙제가 남아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죽으면 묘비를 남기는데, 그 묘비를 새기는 일은 아무나 맡기는 게 아니라 주변에 큰 인물이나 대단한 명사에게 맡기는 것이 예의였다.

 

집안의 내력이 그래서인가? 아니면 개인적 성향이 작용한 게 아닐까 싶으나, 역사서적을 읽으면 한국 향교에 배향된 인물에서 사림집단의 시작점을 지난 후 인물 대부분이 서인들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노론계통이 많았다. 한국의 유학자를 보면 서인이 아니라도 동인(북인과 남인)도 제법 올릴 사람이 많다. 남명 조식 같은 학자나 문도공 다산 정약용도 그렇다. 그러나 항교에 배향된 인물은 그렇지 못한 느낌이 다소 많이 든다.

 

어떻게 보면 어느 후손들에게 다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선비는 그런 소신과 처신의 삶에서 생애를 좌우했다. 왜 아비의 묘비가 중요한가? 광해군 이후 북인들이 득세 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득세하였는데, 서인들이 숙종 시절 남인을 무고하게 도륙한 이유로 소론과 노론으로 구분되었다. 이때 소론의 영수가 윤증, 그의 아버지는 윤선거이었다. 윤서거가 우암 송시열과 친한 사이였으나, 어느 순간 약간 미묘한 관계가 되었고, 윤증이 남인 영수인 백호 윤휴와 사이좋은 이유로 송시열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윤증의 아버지가 윤선거가 별세하자, 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했으나, 당시 송시열의 주자학의 절대적 신봉에 의해 윤선거의 묘비명은 조롱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노론과 소론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소신이 중요한 이유는 조선은 물질적 조건을 중시하는 현대가 아닌 정신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관념적 유교사회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는 그 자식에게 위로하지 못할망정, 아비를 욕되게 하는 것은 원수로 지내자는 말과 같은 것이다. 소신의 시작은 미묘하게 틀어진다. 죽음과 배신, 그리고 거대한 피바람을 부는 숙청까지 이어진다. 노론과 소론은 숙종과 영조까지 이어지고, 경종의 독살설까지 이어진다. 하다못해 사도세자의 비극에도 이런 씨앗이 움트고 있을 줄 누가 아리랴?

 

조선의 선비는 참으로 바보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장미가 승화될 정도였다. 조선의 양반은 지배계급이기도 하나, 어떻게 보면 피지배계급보다 못한 경우도 많다. 심한 착취, 무능한 탐관오리만 아니면 백성은 그렇게 살기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삶은 임진왜란 이후로 계속 이어진 점이다. 백성이 어려우면 사대부의 역할은 백성에게 편한 삶을 살도록 열어주는 게 임무이다. 여기서 권력을 잡은 자들이 계속 이윤을 추구하면 문제가 발생된다. 소신과 처신, 권력과 막대한 경계점과 마주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중종반정 후 사림의 집권은 하지만, 기묘사화는 씻을 수 없는 피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에서 다소 비극적인 게, 기묘사회로 친척들이 화를 당한 동고 이준경이 나중에 중종에 의해 기용되어 선조까지 보필한 사례이다. 동고 이준경은 연산군에 의해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목숨을 잃게 되었다. 기묘사회에서 화를 당한 사촌형 탄수 이연경에게 글을 배운 이준경은 추후에 영의정까지 올라간다. 그런 그가 아주 침착한 처신을 하지만, 한편으로 마지막은 극렬한 반응을 보여준다.

 

이준경은 죽기 전 선조에게 상소를 올리는데, 당시 명사인 율곡 이이가 붕당의 문제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았고, 이이와 서인들은 이준경을 공격하지만, 죽기 전 고령의 대신이 남기는 상소이기에 조용히 넘어가는 것은 마무리 지었다. 이때 그를 도운 사람으로 서애 유성룡이 있었다. 유성룡은 이준경에 의해 천거되고, 유성룡은 충무공 이순신의 친구이다. 이준경은 이미 을묘왜변 때 왜구를 격퇴한 문관이기도 하니, 참으로 운명은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준경은 가족들의 화를 당해도 참고 참아 국정을 수행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예언대로 붕당의 폐단은 일어나고, 이 책의 주인공인 송강 정철의 기축옥사를 발견한다.

 

이 책이 작가 분은 다소 나하고 성향은 다를지 모른다. 기축옥사에서 정개청은 반역을 주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사료를 다시 뒤집어보면 변방의 외적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하나의 방어구축체계를 따랐으며, 그 체계는 궁술연습하다 반역으로 몰렸다. 기축옥사가 임진왜란 3년 전에 일어난 일에서 만일 기축옥사를 제대로 간파했다면 임진왜란의 양상이 다르게 갔을지 모른다. 임진왜란과 호란, 숙종에 이르러 임금은 권력이 약해지면서 권신을 이용하여 피바람을 일으킨다. 남인이라 해도 정약용이나 이가환, 채제공 같은 명재가 있는 것만은 아니고, 서인이라 해도 권력에 빠진 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간의 복수심과 증오로 피를 계속 피로 씻어 내릴 뿐이다. 연좌제로 걸려 귀양 가거나 사형 당하거나, 심지어 말 한 마디를 잘못해서 자신은 참수, 아들은 교수형, 며느리와 딸들은 관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멀쩡히 산이나 변방에서 글을 읽다가 귀양 가거나 곤장을 맞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런 운명은 선비만이 아니다. 왕족은 더욱 심했다. 조선시대 가장 슬픈 왕자를 상기한다면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자들은 시파, 여기에 반대하는 자는 벽파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도 있지만, 정조의 형제도 있었다. 아니 정조의 조카도 있었지만, 대부분 귀양 내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솔직히 이 책에서 보고 놀라지만, 흥성대원군 고종의 아버지가 사도세자의 후손이란 점은 더욱 놀란다. 사도세자의 죽은 노론과의 정쟁으로 희생된 것이다. 자신의 종친들이 죽는 모습을 본 이하응은 자신이 왕족처럼 행동하기보단 거리의 건달 내지 바보처럼 행동했다. 그 덕분에 이항은 죽지 않고 국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되었다. 처신 중의 처신이 아닐 수가 없다. 소신을 내세운 왕족들은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소신과 처신 모두 다 지니어야 하는 상황은 무엇인가? 정약용은 1800년 정조대왕이 붕어하자, 다음 해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로 옥고를 당한다. 작은형 정약종은 한국만 아니라 세계 천주교회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매형 이승훈과 같이 참수되기 전 정약용은 국문에 나와 천주교와 관한 심문을 받는다. 이때 유명한 말로 자신은 나라의 신하이니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자신은 형님의 동생이니 형님을 고발할 수 없으니 결국 자신에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했다.

 

상당히 모순된 발언이나 상당히 뛰어난 재치가 숨은 말이며, 때로는 자신의 소신이 담긴 발언이다. 정약용은 귀양 전 삶은 오로지 소신을 위한 삶이었다. 정조를 위해, 백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정약용은 너무 완벽한 천재였다. 군자인 그가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사도세자의 업적을 기른 것은 벽파에게 큰 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어느 권력자는 왜 정약용을 죽일 수 없느냐고 다른 대신에게 말하자, 그 말을 들은 대신은 하늘이 그러니 어찌 하겠소? 라고 할 정도이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오자 오로지 한 일은 학문의 연구이다. 해배된 후에도 학문의 연구이지만, 여유당이란 이름처럼 살얼음을 걷는 삶처럼 그는 소신과 처신의 사이에서 아주 절묘한 균형을 찾은 것이다. 당시에 역모들의 주범이라 들었던 정약용은 21세기에는 한국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에 하나이며,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학자이다(유네스코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정도이니). 그분의 삶이 소신을 숨기기 위한 처신이니 참으로 선비의 운명은 기구했다. 21세기 한국에서 그 당시 권력을 위한 소신을 삶을 산 자들은 비난의 대상이, 백성을 위해 소신으로 죽은 자에게 다시 평가가 이루어진다.

 

생각해보면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지만, 인간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막상 이름만 남기고 죽으면 무슨 이유로 보람이 있을까 하나, 적어도 그 이름을 남긴 자들의 후예들에게 평생의 짐이 된다. 매국노 을사5적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에 부와 권력을 잡았고, 현재도 어느 정도 잡고 있지만, 점점 갈수록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오욕으로 남는다. E.H 카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한다. 과거의 오점이 먼 미래의 후예에게 미치고, 현재의 상황이 과거를 바꾸기도 한다.

 

21세기 한국에서 소신의 삶을 살아가기 너무 힘든 것 같다. 바른 말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도 어렵다. 물론 처신도 더욱 힘든 것 같다. 처신은 자신의 몸만 무사하게 넘기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게 아니다. 자신의 가족과 주변까지 돌아봐야 한다. 눈앞으로 이익에 눈이 멀어 처신을 잘못하면 그 화가 언젠가 자신이 아닌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일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민주주의사회이기 때문에 목숨까지 잃는 경우는 종종 없지만, 조선은 연좌제도 강했고, 상대방을 무고할 때 그만큼의 죄를 되받는 반좌죄도 역시 무서웠다. 내가 상대방을 죽일 것을 건의하면 나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권력만 믿고 행패를 부리다 능지처사 후 효수된다면, 죽기 전의 그 고통은 얼마나 괴로우며, 죽은 이후에 올 치욕은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가? 하지만 더 안타까운 일들은 그런 비극적인 일들은 권력자보단 권력자에 의해 희생된 자가 많았다. 백성들이 능지처사보단 그저 곤장이나 참수로 끝나지만, 선비사회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소신을 물리자니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배반하고, 소신에 너무 따르자니 화가 닥친다. 화를 받는 순간 목이 떨어지고, 화를 피하는 순간 화병으로 죽는다. 그래서 경종의 독살에 의심한 소론 김일경은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 라고 했는지 모른다.

 

지금 보면 너무 무모하지만, 다르게 보면 누군가 당산에게 소신이나 명분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자라고 듣는 것도 싫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걸핏하면 홧김에 하는 경우가 많으나 선비의 삶에서 소신과 현대인의 홧김에는 분명 차이는 있다. 어떻게 보면 소신의 삶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도 처신일지 모른다. 적어도 역사의 이름 앞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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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5 14: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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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5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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