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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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이 어떤 잘못은 저지르면 그것에 대한 책임감이나 혹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경우는 당연한 의무이다. 하지만 가끔 세상을 보면 그런 당연한 인간의 의무는 관심 없이 그저 개인적 이기심을 위해 모든 진실을 속이려 한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오로지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면 그의 마지막 모습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가끔 세상을 보면 국민의 눈과 마음은 의심하나,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진실을 은폐하는 자들이 많다. 진실의 눈을 속이고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 그 이상의 자신의 명예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내보낼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경우는 매우 이기적이고 고약한 사람들의 이야기지, 때로는 우리 일상에서도 어이없는 일들로 다른 사람의 길을 막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엄 매큐언의 소설 <속죄>는 바로 그런 것이다. 소설 내용에 대해 주변 반응을 보자면 충격적이거나 혹은 대단하다고 하나, 내가 느끼는 바로는 상당히 표현이 뛰어나거나 또는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점이다. 작가는 현재 영미소설가로 노년의 남성이고, 작가의 작품 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어린 소녀 브리오니, 그리고 마지막에선 77세 생일을 맞이한 할머니 브리오니이다.

 

그녀가 소설을 내는 것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고, 작가는 소설가 브리오니를 만들어내었다. 예전에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다고 하나, 막상 독서모임에서 다른 분의 말을 들어보면 소설은 브리오니 중심이나, 영화는 로비와 세실리아 중심으로 간다고 했다. 문학과 영화는 단지 비교하면 문자서사와 영상서사이지만, 문학서사인 소설은 작가 개인의 영역에서 창조되어 출판사 편집부의 검토를 받은 후에 대중에게 공개된다. 이에 반해 영화는 영화제작진과 투자자들이 모여 고액의 출연료를 받는 배우까지 섭외한다.

 

문학과 달리 영화에 엔터테인먼트를 강하게 두는 것은 상업적 성공이 받쳐주지 않으면 제대로 앞일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안 봐도 결국 로비와 세실리아의 사랑을 중점으로 갔다는 것은 소설 <속죄>가 연애와 치정이 하나의 중요소재에서 영화 내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이 된 점이다. 소설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은 1999년 런던에서 브리오니의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1부는 연애와 치정, 2부는 영국병사가 바라보는 전쟁, 3부는 18세로 성장한 한 소녀가 자신의 죄를 두고 성찰과 반성을 해간다.

 

흐름을 보면 1부는 연애물, 2부는 전쟁물, 3부는 성장물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할리무드 스타일 영화로 사용하기는 2부가 좋고, 한국드라마로는 1부가 가장 좋을 것이다. <속죄>에서 말하는 것은 브리오니가 이때까지 살아온 생애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회고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은폐하려는 공범에 대한 투쟁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순간적 감정, 일시적인 관찰로 이어진 어린 소녀의 추리는 한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었고, 자신의 언니를 암흑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정작 그 상황에서 진실을 밝힐 사람들은 오히려 브리오니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다. 인간의 운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만, 운명의 전환점이 추락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소설을 읽으면 우연한 목격과 순간적인 착각으로 비극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원인을 보면 불행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 연애의 주인공은 터너와 세실리아이나, 그 연애에 대한 질투는 브리오니였다. 브리오니는 로비가 준 편지를 언니인 세실리아에게 주지 않고 자신이 먼저 읽었고, 롤라가 성폭행 당했을 때 자신이 받은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공개했다.

 

그 편지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성적인 본능이 폭발하던 내용이 담겨있었다. 단지 그 대상은 로비가 세실리아게 향한 것이었지, 그 누구도 아니었다. 롤라에게 가해진 잔인한 행위는 터로비 터너와 관계없었다. 경찰에게 끌려가는 순간 터너는 억울함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실리아는 그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로비도 경찰에게 순수히 따라간 이유는 세실리아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기 싫었기 때문이다. 파티에 일어난 잭슨과 피에르의 실종, 롤라의 고통, 이제는 세실리아까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게다가 로비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 그가 세실리아와 오빠 레온과는 친구처럼 어린 시절을 보내도, 영국은 보이지 않은 신분의 벽이 존재했다. 현재의 영국 왕족이 가진 권력이 공고했다면 1930년대 영국은 더 공고했다. 서프러제트 운동 후 영국에서 1920년대 말부터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어도 아직까지 모든 게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은 세계명문 대학 중에 하나이다. 여자에게 학위를 주지 않았던 점에서 여성의 인권 현실은 또 다른 요소로 본다면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권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점과 같다. 경찰을 대해 세실리아 어머니 에밀리는 마치 귀족이 자신의 집 근방에 있는 영지주민을 부리는 것처럼 대한 점을 본다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의대준비생이 영락없이 최악의 범죄가 소녀 성폭행자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 소설의 시작을 보면 히틀러가 나온 점에서 2차 세계대전 앞이다.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에서 전쟁의 아픔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하나뿐인 남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에 세실리아의 아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삼촌에게 남은 유일한 꽃병, 인간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를 떠오르게 할 수 있는 공간과 물건들이 있다. 세실리아에겐 삼촌의 죽음과 삼촌처럼 죽을 수 있는 연인 로비에 대한 마음이 운명의 장난처럼 보여준다. 그 장난 같은 운명을 브리오니가 만들었고, 세실리아는 가족과 인연을 끊고 혼자 살아간다.

 

작품을 보면 아라벨라는 브리오니의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아라벨라는 나중에 왕자에게 구원받는데, 그 왕자는 의사였다. 인간은 주변의 조건과 상황적 인지에 따라 사고한다. 상상력조차 거기에 의존하는데, 의사왕자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예비의대생인 로비였다. 로비를 좋아하던 브리오니에게 로비와 세실리아의 성행위를 본 것은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가졌던 마음에 대한 배신이었다. 인간은 이성으로 인지해도, 무의식 내부에 존재하는 감정은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한다. 다른 사람을 믿고 싶은 것도 있지만, 자기가 가진 마음을 믿고 싶은 욕구도 있다. 브리오니의 배신은 자신이 가진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를 매우 비쌌다. 터너는 죄 없이 3년 반 동안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고, 형벌을 감형 받는 대신 전쟁에 나가야 했다. 브리오니가 언제 그의 무죄를 안 것인지 그리고 롤라를 범한 사람의 정체가 언제 알았는지에 대해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알 수 있는 것은 어릴 적에 브리오니는 터너를 좋아했지만, 브라오니의 소설 속에 보인 터너 역시 잘 생겼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마른 얼굴이나 몸은 다져진 점에서 성장한 소녀 브라오니는 터너에게서 남자의 매력을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터너는 프랑스에서 부상을 입은 후 패혈증으로 사망한다. 1부에서 이미 폭격에 의한 파편조각에 의해 부상을 입어도 그것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사망한 것이다. 언니인 세실리아는 폭격으로 사망한다. 가장 사랑했던 남자와 가장 사랑하던 가족을 허무하게 보내야 했던 브리오니,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터너의 명예는 회복해야 했다. 롤라의 부모가 이혼할 때 영국신문에 나왔다면, 터너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친구의 부모가 돌봐주고 학교까지 보냈는데, 그 가족을 범했다는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는 다른 사람이고, 롤라는 그 범죄자와 결혼하여 풍족하게 살고 있다.

 

속죄의 방법에서 양심이 없는 인간이라면 더 이상 상대피해자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마지막 순간까지도 용서를 구할 기회가 있다. 기회가 없다는 것은 용서할 사람도 없다는 점이고,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브리오니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 안에 존재하는 양심과 의무감이었다. 60년 넘게 짊어온 죄책감과 후회는 노령의 할머니가 되었는데도 변함이 없다. 소설을 보면서 큰 감흥보다는 적어도 인간은 순간적 판단실수가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는 점이고, 특히 그 대상이 가까운 가족과 친구라면 상처받은 슬픔만큼 실수를 저지른 사람 역시 고통 받는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영원히 양심의 가책이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자신의 인생은 항상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점이다.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방해가 되면 부자에 유명인사인 마셜 부부처럼 되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이니 내가 이 책을 보고 좋게 느낀 것은 현실감 넘치는 상황묘사다. 리얼한 상황을 알기 위해 소설에서 전쟁박물관에서 병사의 편지와 간호사들의 수기들을 잘 이용했다. 소설 내 터너와 세실리아는 가공인물이나,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던 것은 죽음으로 파시스트를 막아준 젊은 병사들과 그런 죽음을 지켜봐주던 그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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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원리 1 - 사회철학에 대한 응용을 포함하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76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동천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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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소에 말하고 싶은 것은 존 스튜어트 밀이 이미 했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말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한 글은 존 스튜어트 밀이 가장 와 닿았다. “노동계급이 박탈당하고, 때로는 실로 비참한 지경에까지 내몰리는 결과로 수리 이뤄진다. 그와 같은 절박한 시기 중에서 형편이 가장 나쁜 경우조차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익을 얻는 시기가 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어떤 사람들이란 통상적 여론의 관점에서 그들의 개인적 번영이 곧 국민경제의 번영으로 통하는 부류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우리가 흔히 알기론 자유주의 고전 철학자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적인 영역에서 갈등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갈등에서 벤담의 공리주의와 더불어 칸트의 정언명령에 의한 실천이성에 대한 갈등이다. 이때 등장한 인물 중에도 존 스튜어트 밀이 있다. 밀의 철학은 <자유론>이란 자유주의 철학도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밀은 단지 그것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영국의 서프러제트운동에서 지도자인 에멀린 팽크허스트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자유주의 철학이 사실 영국 이전에 유럽사회에서는 남성중심에서 여성까지 옮기고, 거기에 정치이론과 경제학이론까지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가 정치경제학자란 사실을 알게 된 동기는 우연히 형님과 형수님 내외가 처갓집에 와서 조카 100일을 준비하면서다. 읽어보면서 다소 편견과 오만하다고 여겼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에서였다.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매우 훌륭했다. 나는 이전에 밀의 <자유론>을 읽은 상태였고, <자유론>에서 밀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했다.

 

밀이 정치경제학자란 사실은 사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읽기 전까지 몰랐다. 이 책을 반에 반 정도만 읽은 후 다시 내가 잡은 서적이 비봉출판사에 나온 <국부론> 상권이었다. 얼마 전 세상을 작고하신 김수행 교수님의 유작을 읽으면서 고전경제학에 처음 접하게 되었다. 고전경제학을 보면서 현대사회의 자본주의 결성에서 우리가 아는 경제학은 상당히 다른 점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서평 머리 부분에 나온 밀의 말은 무엇은 의미하는가?

 

사실 이 책의 내용 전반보단 뒤에 나온 블레이든 교수의 해제와 옮긴이의 해제가 흥미로웠다. 현대 경제학 4대 학자를 뽑으라면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케인즈, 하이에크다. 경제학의 시작이 영국에서 시작되어 현재는 미국이 중심인 것처럼 보이나, 여전히 경제학의 수준은 영국이 돋보인다. 경제학의 영역에서 밀의 경제학이나 혹은 그 이전의 스미스의 경제학은 우리가 아는 경제학과 상이하다. 경제학과 관련된 서평에서 내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고전 경제학은 즉 정치경제학이다. 정치라고 해서 우리가 생각만 하는 정치적인 요소만이 아니다.

 

그 정치란 Political 공공의 영역이다. 공공성을 중시한 경제학이란 곧 자신의 이익에 목숨 거는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은 경제학이다. 한국의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주머니만 황금으로 가득하게 차게 하는 경제학이다. 국가적으로 본다면 영국이 곡물법을 폐지하기 전까지 중상주의를 유지했다. 한국의 경제체계는 중상주의가 아니지만, 개인들이 추구하는 경제에 대한 사고방식은 완벽한 중상주의이다. 최근 나온 경제도서라고 하는 서적 중에서 월세로 부자 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경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파탄 나게 하는 망국병이다. 사실 경제학은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되었고, 로마의 멸망과 스파르타의 멸망을 보아도 그것은 확실히 말하여 경제의 문제이었다. 왜 고대에 존재한 강력하고 위대한 전사국가들이 망했을까? 바로 그 전사국가의 토대가 되는 전사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사가 될 수 있는 부류는 오로지 시민이었고, 시민은 평소 생업에 활동하면서 위기 시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국가를 지키는 애국자이다. 애국자를 씨를 말린 것은 경제적인 원인이다. 가난이 민중에게 퍼졌고, 가난으로 인해 민중의 후예들은 점차 인원이 줄고, 영양실조에 시달려 전투에 나갈 수 없었다.

 

고대국가에서 병사가 되는 시민은 자기 자력으로 무기를 구매한다면, 무기조차 준비하지 못하는 셈이고, 전쟁나면 그대로 무너지는 마련이다. 평소 민중을 위협하던 용병들은 전쟁이나 참변이 일어나면 먼저 돈을 들고 도망친다. 이런 점은 고대가 아니라 현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모든 것이 정치경제학하고 관련된 것이다.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은 바로 그런 공공성을 중시한 경제학이다. 밀의 사상이 참으로 돋보인 점은 미래를 넘어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말해주는 그의 상상력이다. 그의 논리력과 직관력은 매우 뛰어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보이는 상상력은 분명 우리가 받아들이어야 할 가치이다.

 

우리들은 어떤 사업에 대해 투자를 고민할 때 당장의 이윤을 가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모든 사업이 이익을 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쓰라린 실패를 안겨줄 수 있다. 밀은 그런 이익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당장 받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먼 미래를 내려 보고 거기에 집중적인 관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내심과 관찰력, 그리고 나의 이익보단 먼 미래의 이익이 오히려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블레이든 교수의 해제처럼 밀과 스미스의 책이 제대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잘 나와 있다.

 

19세기 이후 고전학파 경제학이 아닌 케인즈주의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는 철학이 없다는 점이다. 철학이 없는 점은 부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판단할지, 부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미국에서 터진 LEHMAN BROTHERS 사태나, 미국 증시거리에 터진 주식폭락 악몽은 누군가의 탐욕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래서일까? 재미있는 일화가 나온다. 마셜 프리드먼의 가까운 경제학인 미제스가 밀을 두고 마르크스나 엥겔스보다 더 위험한 자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을 읽으면 현대 자본주의와 전혀 맞지 않은 사상을 들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사상에서처럼 경제활동을 두고 지상자유주의와 전혀 다른 방향이다. 밀은 다른 것은 몰라도 그의 정치경제학의 부란 반드시 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모든 경제적 조건이 돈이다. 돈이 부의 척도가 되어 빈부격차가 오히려 당연한 사회가 되었다. 밀의 정치경제학에서 경제의 중요한 부분은 자본, 지대, 노동이었고, 이 중에서 노동이었다. 왜냐하면 노동이 없으면 그 어떤 것들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동의 기본은 노동을 할 수 있는 제원의 유지이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막 공업화가 되어 경기가 좋았다. 공황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산업발달에 의한 분업이 계속 진행 중이었다. 단지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밀도 분업이 가진 위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밀은 분업이 인간에게 한 가지 기술에 모든 것을 집중하면 효과적으로 생산할 수 있고, 그 분야의 업무로 어떤 신체적 능력이 발달한다고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기계와의 조합은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인 피로와 파괴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놓쳤다. 마르크스가 런던에 머물 때 밀에 대해 비방을 해도, 밀은 마르크스에 대해 악의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밀의 성격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을 추구하는 편이 있겠으나, 생각해보면 밀도 마르크스와 다른 방향이라고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인권을 중시했던 사람이었다. 일단 곡물법에서 밀이 중상주의 문제를 두고 비판한 이유는 인간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는 식량이 필수적이다. 식량을 두고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은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식량이 노동을 할 수 있는 제원을 늘리고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고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고, 심지어 많은 건축물이 있는 도시가 폐허가 되어도 어떻게 금방 그 이상의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밀의 모든 관점은 인구노동력이고, 노동력을 결정짓는 것은 식량이다. 곡물법의 문제는 자국의 금은만 중시하니 외국에서 곡식이 제대로 수익되지 못했다. 스미스가 경제학 정책에서 그것을 강력히 비판한 이유는 기근이나 자연재해 시 식량을 구하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게 원인이었다. 물론 자국의 농민에게 저렴한 가격의 식량은 적이 되나,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식량을 생산해도 농민이 직접 갖기보단 국가세금이나 대출 빚으로 갚는 경우가 많았다.

 

산업기술의 발전에서 단순히 그건 공장에서 생산력만 높이는 게 아니라 농업에도 큰 도움이 되어야 하는 점은 생존과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인구의 증가는 생산력도 증가하나, 그만큼 식량이 생산되어야 했다. 밀은 인구가 증가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폐허 된 땅에 다시 원상복구가 가능한 이유는 인구노동력이나, 식량공급량을 초과할 경우 다시 심각한 상태로 접어든다고 말한다. 밀의 인구정책은 우리 사회에 전해주는 상황과 많은 공감을 시사해준다.

 

한국에서 농업조차 기계화되고, 중국과 미국 각 세계에서 오는 농축산물은 식량으로 해결된다. 단지 필요한 게 식량에서 부의 축척으로 대체된다고 하면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처럼 베이비붐이 터진 이후 다시 인구감퇴기로 접어든 상태에서 현재 노동력 포화가 노동력 부족으로 이어진다. 노동력이 없어지면 생산력이 줄고, 자본으로 매개되는 생산자의 노동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균형이 깨진다. 노동자가 없어지면 생산력이 감소하고, 이에 반해 소비자가 없어지면 노동자의 임금이 감소(해고에 의한)된다. 생산력 감소와 경제활동 축소는 국가의 기반을 흔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

 

밀의 정치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노동자의 생활을 중요한 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러하다. 자본은 내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되고, 없으면 국가가 만들어주면 된다. 지대에 대한 부분에서 땅은 원래부터 계속 있었던 존재다. 그러나 노동력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셈이다. 생산력의 발달에서 노동자의 안전이 중요한 것은 노동자의 기술력 보전과, 새로운 노동인력을 만들기 위한 시간과 비용, 노동자의 가족들의 생계문제는 결국 사회적 문제로 되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미제스의 공격은 밀이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나 사회주의자적인 태도를 가진 점이었다.

 

밀은 독신이었지만, 후에 테일러 엘리엇이란 아주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과 결혼한다. 엘리엇에게 딸이 있었고, 밀은 엘리엇이 죽고 난 후 그녀의 딸은 친자식처럼 대해준다. 당시 영국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정치경제적 입지가 좁은 점에서 엘리엇의 말을 듣고 많은 저서를 남긴 밀에게 당시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고, 미제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처음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다른 노선으로 전환되어간다는 사실이 불쾌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자신이 나가는 경우란 허다하다. 그러나 밀은 그런 현실에서 원하지 않은 방향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그 방향을 가고자 했던 것이다. 실적을 중시하던 경제학이 아니라 인간을 중시한 경제학으로 말이다. 미제스의 논리는 사실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계속 되풀이하여 언급해도 밀의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면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서평하면서 예전에 나하고 인터넷으로 말싸움 하던 사람이 생각난다.

 

어디에서 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상대방은 나에 대하여 상당히 매도적인 태도로 대했다. 상대보단 심하지 않았지만, 나도 조금 어이없다는 식으로 상대를 대했다. 그때 내가 한 말이 기계가 발달하면 노동자는 비참해진다라는 말인데, 그 단어가 마르크스 <자본>에서 나왔지만, 그 말은 마르크스가 먼저 거론하지 않았다. 그 말은 밀이 먼저 거론한 말이었다. 기술발전과 기계발명은 일자리를 잃게 만들고 노동자를 무직자로 만드는 현실에서 최근 네오 러다이트 운동이 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나보고 러다이트를 해야 하냐고, 그런 시대착오적인 말을 하냐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 글을 보니 취업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는 학생이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처음 대기업에 가도 갈 수 있는 보장이 높지 않고, 간다 해도 인턴이나 비정규직에서 시작하고, 그것도 계속 유지하기 어렵다.

 

내게 공격한 논리가 그 본인이나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를 바꾸기 어려워도, 사회는 개인을 농락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생각이다. 단지 개인들이 모두 모여 하나의 조직이 되면 사회를 움직일 동력은 된다. 그런 관점은 밀도 보여준다. 인간의 이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 상황을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그러나 밀은 적어도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중시하고, 인간의 권리를 중시했다. <자유론>에서 어떤 개인에게 만약 현실적으로 풀어가지 못할 어려움이 있다면 그 사회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손길이 가지 않아 어떤 개인이 파탄에 이르면 그 사회는 올바른 곳이 아니며, 야만의 손길이 남아있는 곳이다. 사실 사회적으로 인간의 생활을 본다면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경제성이란, 그 사람의 효용성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그 효용성을 만들기 위해 조성해야 할 보호망이다. 인간에 대한 안전이 완비되지 않은 밀은 그 사회의 생산력은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경제학 원리>를 읽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의 이익이 나라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똑똑한 바보들이 판을 치고, 그런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세상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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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6-07-1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분은 뉴리버랄리즘으로. 신자유주의 혹은 사회자유주의 쪽 계통입니다. 고전자유주의에서 좀 벗어나신 분이죠. 자유주의자 라면 일단 로크, 칸트부터 시작하는게 가장 좋은 순서라고 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7-11 10:57   좋아요 0 | URL
아직까지 로크는 안 읽어보았고, 칸트는 <실천이성비판> 정도 읽어보았군요. 사회자유주의라, 딱 적당한 표현이군요!

ㅇㅇ 2016-07-11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래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와는 성격이 완전 정반대입니다. 개인주의도 그렇고요. 자연권도 그렇고요. 저분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섞으려 하신 분이라 솔직히 전통 자유주의자들 분들이 좋아하지 않죠. 뭐랄까 특이한 분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7-11 13:04   좋아요 0 | URL
오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경제학에서 서로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라고 하나, 현실은 서로 필요한 것으 빼앗으니 자유주의와 경제 관계는 참으로 오묘하군요. 예전에 자본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에서 저 책 후기에서 나온 철학자가 만든 경제학 도서는 우리 후예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을 준다는 게 인상남네요.

ㅇㅇ 2016-07-1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통 자유주의 철학에서 사회과학 분야로 체계화 시킨게 경제학인데. 경제학 분야에서도 자유주의 경제학이 또 따로 있습니다. 주류하고 서로 티격태격하죠. 시장경제는 다들 그냥 교환현상으로 이해하지만.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개개인이 정보를 서로 소통하는 아주 중요한 시스템으로 여깁니다. 시장을 정부가 규제하고 통제하자는 쪽하고 또 티격태격합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시장경제는 자유의 원천이라 봐도 될정도로 중요한 시스템입니다. 시장거래로 전쟁도 막고 인종,국경,성별,종교의 차별도 넘어버리는 보편성을 띄거든요. 예를들어 어떤 사장이 흑인인 기업이 물건을 만들었지만 정작 소지바들은 그런것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성별도 그렇고요. 국가조차 의미가 없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 시장경제, 사유재산, 개인주의, 자유 이런것들을 지키려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루쉰P 2016-07-12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흠 어찌 이런 글을 대단합니다 ㅎ항상 만화애니비평님을 뵐 때마다 저 뇌를 빌리고 싶다는 충동을 받아요 ㅋ

루쉰P 2016-07-1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책 읽는 거 보다 만화애니비병님의 리뷰를 읽는 게 지적확장에 큰 도움이 되네요 ㅎ 아 재미지고 유익한 리뷰 ㅋ 뺏고 싶네요 이런 글을 맥주 마시며 여유롭게 쓰시다니 ㅋㅋㅋ

만화애니비평 2016-07-13 08:48   좋아요 0 | URL
제 뇌를 빌리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이 환영처럼 보일겁니다 오덕의 파워로써 아스카짜응(신세기 에반게리온 여자 파일러) 다이스키! 하는 그런 덕질에 빠질 겁니다!!!!

제 뇌는 번뇌입니다..ㅎㅎㅎ

사실 이런 리뷰 맥주 마시면서 못씁니다. 집에서 빵을 씹으면서 합나딩??? 여유롭게 못하죠. 저 책이 4권 시리즈이니 아이고...

루쉰P 2016-07-15 00:15   좋아요 0 | URL
훗 이거 절 너무 낮게 보셨군요. 아스카짜응에 가로치고 설명이라니...어찌 덕후의 길을 걷는 자가 아스카를 모르겠습니까...

전 아스카보다 레이 적군파로서 차분한 레이를 숭배하는 브로마이드 소유자 입니다. 훗훗

하기사 저런 건 진짜 집중해서 써야 겠어요. 전 집중해도 저런 글이 안 나오는게 함정 ㅋ 다음 리뷰를 기대합니다. ㅋ

만화애니비평 2016-07-15 08:44   좋아요 0 | URL
아니 그런 부담을 주시다니!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 우리 시대 여성을 만든 에멀린 팽크허스트 자서전
에멀린 팽크허스트 지음, 김진아.권승혁 옮김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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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라는 책을 본 동기는 블로그 이웃 중에 도서출판사에서 근무하신 분 때문이다. 현실문화연구라는 출판사는 나에게 다소 익숙한 출판사이다. 내 방 책상 작은 서재에 꽂혀있는 책으로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한창완 교수님의 <저패니메이션 하드코어>와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세기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논하는 <이것은 미술은 아니다>와 오타쿠 문화연구가 및 자크 데리다 연구자로 유명한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 있다.

 

생각해보면 현실문화연구 출판사는 이른바 오타쿠 문화에서 일본애니메이션에 대한 서브컬처 연구도서 그리고 예술과 미학 그리고 사회학에 대한 연구도서로 계속 접한 출판사이다(아마 이것을 보시는 현실문화연구 블로그 담당자 분은 미소를 살짝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담당하는 분의 블로그를 보면 항상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라는 책과 동시에 영화 <서프러제트>가 개봉된 것을 홍보했다. 아무튼 그분이 계속 이렇게 소개하고 있으니 분명 볼만할 책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아니 이 책을 읽었기에 이 서평을 쓰기 전 도서관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의 원리> 1권을 대출받았다. 페미니즘 운동사에서 과격파 중에 하나인 에멀린 펭크허스트 여사의 자서전인데, 왜 존 스튜어트 밀의 책을 빌렸으며, 그것도 정치사회학이 아닌 정치경제학이란 말인가? 사실 존 스튜어트 밀이 영국에서 살던 시절에 그는 자유주의 철학을 전파하던 이성의 성자였다. 그에게 왜 성자라는 말이 붙었냐면, 존 스튜어트 밀은 아주 성격이 다정하고 친절하며, 이성적 판단을 준거로 하여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대하지 않았다.

 

영구 19세기 불세출의 천재는 정치사회학만이 아니라 경제학까지 마스터했다. 그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이후 고전경제학 중에 하나였고, 자유주의 사상가였으며, 그의 자유주의 사상은 사회주의 사상까지 맥락이 연결되어 있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책 중에 가장 유명한 서적으로 <자유론>이다. 한국을 보면 자유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에는 그에 대한 사상적 기초를 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자유주의 철학사상과 대조비교해보면 그저 코미디에 불과할 뿐이다.

 

자유주의 사상에 철학이 없다면 자유주의이란 이름으로 가려진 파시즘에 불과하다. 오늘도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이 자유를 외치는 현실에서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다시 와서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어째든 존 스튜어트 밀에게 <자유론>이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그의 저서 중에서 <자유론>보다는 차라리 <여성의 종속>이 훌륭하다. <여성의 종속>은 존 스튜어트 밀이 자신의 아내인 헤리엇 테일러를 만나고 나서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적은 저서이다. 책은 그래 굵지 않고 분량도 인문학 서적치곤 짧은 편이다(대부분 정치철학 도서는 페이지가 500 내외이니 말이다).

 

그 책에서 보면 당시 영국의 여성, 특히 아내라는 신분을 가진 여성이 처한 운명이 엄청 가혹했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 적은 내용은 이미 나는 <여성의 종속>에서 읽은 바가 있었고, 그런 비참한 현실은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 특히 주부에게 전가된 것이다. 물론 <여성의 종속> 이전에도 이런 내용들은 알고 있었다. 펭크허스트 여사가 태어난 곳이 영국 맨체스터 지역이고, 그 지역은 영국 내에서 공장이 매우 많기로 소문난 곳이다.

 

당시 영국에는 대영제국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며 장기방문객이 있었다. 그자는 매우 악평 높은 붉은 박사 카를 마르크스다. 그의 저서 <자본론>은 한국에서 불온서적 취급당하나, 세계문화유산 UNESCO에서는 아주 가치 높은 책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유럽 철학과 사상을 공부하고 있으면 마르크스를 넘고 가지 않으면 도중하차할 지경이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 당시 가장 많이 참고한 서적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고 그 밖으로 리카도 데이비드와 존 스튜어트 밀의 서적이다. 고전경제학 서적을 연구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하면서 자본주의 시작은 어디서냐는 연구가 시작된다.

 

최근에 읽어본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담론에서 자본주의 정치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서 시작되고, 자본주의 경제는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시작된다. 내가 이것을 거론하는 이유는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는 그녀의 자서전이기고, 약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하나의 객관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그녀의 기록은 인류학적인 관점은 없다. 단지 현재 상황에 대한 저항과 그에 대한 투쟁의식을 확연히 볼 수 있다. 마르크스 <자본>을 보면 그런 역사적 흐름에 대한 변증법적인 관찰을 볼 수 있다.

 

<자본>을 읽으면 영국의 역사까지 알 수 있는데, 영국에서 전 자본주의적 체계에서 영주나 국왕은 자신이 관리하던 토지를 농노나 차지농에게 임대했지만, 양털사업이 발달하면서 모든 농지를 양 사육목장으로 전환시키고, 거기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는다. 마녀사냥이 이루어진 16~17세기 공포는 이른바 공공토지의 인클로저 운동과 시기적으로 많은 일치성을 보여준다. 그 당시 가장 피해자는 늙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육체적으로 병들었다. 누군가 의지하거나 혹은 구빈소에 의지했으나, 모두들 점차 그녀들에게 차가운 태도만 보였다.

 

숲속의 마녀는 사실 늙은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식량을 키우거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초를 재배했다. 숲속의 마녀가 약을 잘 만드는 이유는 바로 약초를 잘 아는 여성 노인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들을 밀어버리는 이유는 숲을 목장으로 만들고, 재정적으로 손해만 끼치는 노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다(<캘리번과 마녀>를 보시라). 마녀사냥 이데올로기는 바로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 약탈을 일삼다가 주변 군중의 눈치를 보고 그 책임을 약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다.

 

어느 시대이고, 욕먹을 자를 미리 준비해놓고 마치 자신에게 불리하면 그 구원투수를 마운드로 올리는 경우는 다분하다. 정치사회적으로 뭔가 구린내가 내면 항상 연예인들의 구원구가 던진다. 대신 그들은 <공포의 외인구단>의 오혜성처럼 팀을 이기게 만들지만 어깨가 망가져 투수마운드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이런 상태에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흘러가고, 도시빈민이 생기고, 그 중에서 양털에 대한 제조업에 따른 노동자가 탄생한다. 영국에서 기계가 발달되자 메뉴팩처가 발달하고, 점차 남성 노동자가 임금이 높아지나, 너무 기술이 좋아져서 임금이 하락한다.

 

임금을 하락하는 원인은 숙련공 남자 대신 비숙련공 여성과 어린아이에게 과도한 노동을 가한 것이다. <자본>에서 보는 끔찍함이란 상상해도 마음이 아프다. 이제 5살 된 어린아이가 공장에서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며, 심지어 야간철야까지 한다. 젊은 아가씨들은 공기가 통하지 않은 좁은 방에 먼지를 마시고, 바느질을 18시간 가까이 한다. 남자아이들은 30대가 되면 모두 병으로 죽고, 여자들은 신경질환과 폐병으로 젊은 청춘을 마감한다. 예전에 읽은 <전태일 평전>에서 이제 갓 중학교 졸업한 어린 여공들이 가혹한 환경에서 근무하다 병에 시달려 자취방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이야기를 볼 때 참 마음이 아팠다.

 

물론 여자만이 그런 고생을 한 것은 아니나, 여자에게 가해진 폭력적 처사가 다분하다. 문제는 그런 폭력을 시달리는 여성에게 사회는 관심을 주지 않으며(심지어 일반 여성조차도 그렇다), 듣는 것조차 불편할 것이다. 그런 비극은 이미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어 19세기 초절정을 이룬 것이다. 19세기 공장은 비숙련공 여자와 아이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남자보다 임금이 적었고, 힘이 약한 이유로 저항조차 못했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 자세히 읽어보면 가장 곤혹스러운 대접을 받는 여성은 주부다.

 

아이들이 7명이 있는데, 불결한 집안에서 살고 있는 것도 모자라 영양실조에 걸릴까 애 어머니는 조바심을 낸다. 아이 5명이 있는 어머니는 아이 2명이 군대를 갈 수 없을 정도로 병들었다고 슬퍼하는 모습이 보인다. 조금 지금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미안한 소리지만, 현대 여성들과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여성은 너무나도 다르다. 아니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만이 아니다.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혁명을 보면 혁명이 시작은 어디인가? 라는 질문에서 그 시초는 주부였다. 그들이 분노한 이유는 집에 어린 자식에게 먹일 식량이 없는 이유다. 여자들이 오히려 혁명 때 남자이상으로 난폭하고 무서운 이유는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 어린 자녀들의 생존에 분노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펭크허스트 여사에서 볼 수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해진 남녀차별에 분노했지만, 그녀에게 더 큰 분노감을 안겨주는 이유는 자신의 아이들과 먼 미래를 살아간 여성에게 이 굴레의 지옥이 가해진다는 이유다. 펭크허스트 여사에겐 딸이 3명이 있고, 그녀들 역시 어머니를 도와 여성의 정치참여운동에 헌신한다. 펭크허스트 여사의 여동생은 운동 중 감옥수감으로 인해 사망했을 정도이니, 왜 그녀들은 목숨을 걸어가면서 싸우는 것인가?

 

영국의 구빈소와 고아원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입을 것과 먹는 것이 부족하고, 열악한 환경과 제대로 되지 않은 관리로 인해 오히려 거기에 들어간 어린아이의 목숨을 단명 시켰다. 펭크허스트 여사가 고아원에 가서 소녀들을 돌보는데, 이제 13살 된 어린 소녀가 아이를 임신했다. 애 아버지는 대부분 그녀들의 애인이거나 친구였으면 다행이다. 소녀들의 아버지거나 친척들 중에 하나였다. 사실 여성인권에 대해 내가 생각한 것은 펭크허스트 여사와 유사했다. 여성인권이 부실하면 아동인권 역시 부실하다.

 

최근 어린이집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보육비와 양육비 문제에서 부모들은 신경이 날카롭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부모가 있으면 모르나, 고아나 편부모를 가진 아이들이라면 그 입장이 참으로 난감해진다. 한국사회처럼 미혼모나 편부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자칭 선진국은 많이 없다. 펭크허스트 여사가 싸우는 이유는 바로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개척이다. 또한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면 그들은 남성과 같이 사회적 같은 책임의식과 연대감을 짊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게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보면 여성이 만약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다면 충분히 남성과 같은 업무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빅토리아시대나 엘리자베스시대도 그렇겠지만, 그녀들은 여왕이었고, 일부 특권을 지닌 왕족과 귀족 여성만 가능했다. 사실 왕족과 귀족을 제외한 하층민에게 능력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단지 거기서 여성이 조금 더 심각한 부조리에 시달리는 사실 외에는 말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계급투쟁적인 요소다. 펭크허스트 여사가 자신의 가족도 그러하나, 사실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해진 여성들은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빈민이었다. 남편이 전쟁 중에 사망한 여성들에게 만일 자녀가 있다면 이에 대한 지원이나 대안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여성의 종속>에서 폭력적이고 거만한 남편은 그동안 아내가 모아둔 돈까지 빼앗고, 그것을 저지하면 폭력을 가한다. 문제는 그것이 분명 나쁜 일이라도 사회적으로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정에서 그런 폭력을 용인한다면 그 사회는 더 심한 상황이 발생한다. 펭크허스트 여사와 많은 여성들이 여성참정운동을 하고 있을 때, 그녀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가혹행위는 참으로 심각했다. 말을 타고 있는 경찰들이 말발굽으로 위협하고 말로 위협하며, 때로는 구타까지 했다. 감옥은 환경 위생적으로 취약했고, 금식운동을 벌일 때 억지로 호스를 넣어 음식을 주입했다. 고문 같은 처사는 오히려 더 심한 저항의식으로 이어진다.

 

불굴의 의지로 자신들을 방해하는 정치인들에 대하여 투쟁하고, 늘 집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전달했다. 책은 1차 세계대전에 멈추고 후기로는 1928년 그녀가 보수당원으로 가입하다 병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얼마 후 여성참정권이 승인되었다고 전한다.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여성참정권을 도입될 수 있는 배경은 아주 복잡다양하다. 인권을 위해서라 하지만, 그 동기는 그동안 공장에서 노동대상이 남성이었다면 그 범주가 여성에게 이전되었다.

 

경제적인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적인 권리까지 이행해야 했으며, 정치적인 결정으로 통해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전쟁의 발발은 그런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쟁이 나면 언제나 젊은 남성들은 전장에 간다. 많은 청춘들이 사망하고, 도시는 고요한 침묵을 지킨다. 그 자리를 메우는 자들은 여성이다. 여성들이 경찰관, 소방관, 공무원에 나간 것은 전쟁이 나도 사회는 유지되어야 하고, 그들이 그 사회를 지켜도 남성 못지않게 능력을 보여주고, 어느 부분에서 남성보다 우월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현실적 상황에 대해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겠지만, 재래식 사회에서는 언제나 무거운 기계를 들고 무거운 장비를 다루어야 했기에 남성위주의 노동으로 이어졌고, 그것으로 인해 남성에 대한 지배권을 주어졌다. 전쟁이 나면 미사일과 총으로 사격하는 것이 아니라 창과 방패를 들고 갑옷까지 입을 경우 전쟁의 주도권은 남성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성의 특권의식은 귀족부터 시작하여 하층민까지 분포했으니, 그 차별사회에서 싸우던 펭크허스트 여사의 일기는 예사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남녀차별은 있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픈 것은 영국에서 남녀차별이 있다고 해도 왕족과 귀족의 여성은 그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점이다.

 

엘리자베스여왕이 여성인데도 왜 침묵을 지키고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가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사회적은 생물학적인 요소도 있지만 계급적인 요소 즉 정치적인 요소가 반영된 것이다. 내가 이것을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최근 여성가족부에서 위안부 문제를 국가가 아닌 민간으로 떠밀고, 정부는 일본의 망언에도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다. 위안부에서 성폭행 당하신 분들과 현재도 성폭행 당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나 시선은 안타깝다.

 

예전에 프랑스 앙굴렘 만화전시회에서 위안부 여성들의 비극을 다룬 <지지 않은 꽃> 전시회를 열어 성공리에 마쳤다. 많은 만화작가들은 억울하게 인생을 빼앗긴 분들의 한을 세계에 알리려 했는데, 이때 여성가족부에서 한 것은 실적관리로 내세운 것이었다. 성폭행을 당한 것도 모자라 입막음까지 당한 여성들은 무엇이고? 그런 그녀들을 외면한 여성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 투쟁의 대상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이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없었다면 아마 현재의 여성인권이란 많은 벽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녀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이유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먼 미래에 살아간 후예들의 행복이다. 자신 혹은 자신 이전 시대에 살아간 인간들과 같은 삶을 반복되거나 그보다 못하다면 그녀들은 그렇게까지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여성의 인권을 지지하는 조건은 사회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를 같이 해결할 의지가 있을 경우다. 현재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고통과 책임의식을 외면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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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7-0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항상 느끼지만 만화애니비평님의 글을 읽으면 이것이 리뷰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요. 전 사실 리뷰를 빙자한 추억팔이를 하거든요;;; 진짜로 책을 읽고 쓴 것은 바로 이런 글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해요 아 부럽다...진심...

근데 진짜 회사 다니시는 거 맞아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책더미에 파묻혀 뿔테 안경을 쓰고, 이리 저리 고민을 하는 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네요 ㅋ

혹시 글을 어떻게 쓰시나요? 집필 방법이라고 할까요? 무쟈게 궁금합니다. 요즘 `신의 나라는 네안에 있다`를 읽고 있는데 이런 식의 글로 쓰고 싶어요. ㅎ 리뷰 꿈쟁이를 도와주세요!!!!

만화애니비평 2016-07-03 13:53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맥주도 마시고, 핸드폰 게임도 하고, 애니메이션도 많이 봅니다. 환경공학 전공자인데 환경이 인류학과 많은 연계성이 있어서 어쩌다 이런 식을 되었네요.

저 이것 리뷰 쓸 때 네이버에 어떤 이상한 (아마 여성인듯) 블로그에게 되게 짜증나는 덧글로 답글해주었는데...아무튼...리뷰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독서의 토대인 것 같습니다...철학 책부터 읽어야 사고의 확장이 일어나는듯..ㅎㅎ
 
자유인 루쉰 - 위대한 지식인의 초상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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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이란 이름은 예전부터 들어본 이름이었다. 내가 알게 된 동기는 그의 소설인 <아Q정전>이 제법 유명했기 때문이다. 어떤 유명 대학교나 독서 관련 사이트에서 루쉰의 <아Q정전>이 올라온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루쉰의 이름을 인터넷의 독서목록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한 것은 2015년 2월이었다. 내가 사는 지역 옆에 누구를 만나러 가서 루쉰의 이름을 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온 몸을 감싸고 있으나, 조용히 하천강변에 조성된 공원을 걸으면서 어느 한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상대방에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서적을 몇 권을 주었다.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인문학자이면서 페미니즘 연구가인 매릴린 옐롬의 서적 2권, 인류학자가 저술한 도서, 취미생활과 관련된 도서였다. 내가 가진 책을 몇 권 주었기에 그 사람도 나에게 책 1권을 주기로 했다. 그때 받아야 했던 도서가 <루쉰평전>이었다. 그러나 그때 본 이후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루쉰이란 이름은 나에겐 인간에 대한 다소의 회의감을 안겨준 채 내 기억 속에서 묻혀 있었다.

 

인간에 대해 나는 다소 비관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나 최근에는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인간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나? 그렇게 믿는 편도 아니고, 이래저래 사람들이랑 교류를 하더라도 깊이 있게 지내고 싶지는 않다. 가뿐한 마음도 아니지만 그런다고 무거운 마음도 아니다. 물과 기름이 서로 층을 분리하여 존재하고 있다면, 나는 층 가운데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점이 많았다. 어차피 내가 관심이 가는 분야나 좋아는 것들이 일반적인 대중의 시각이 아니기에 한편으로 고립된 관념적 세계에 놓여있다.

 

고립에 대한 사회적 영역에서는 직장을 다니기에 외적인 관계성에서는 고립은 아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을 볼 때마다 느끼는 이질감과 이율배반적인 가치관에서 나는 고립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생활을 하던 와중에도 나는 계속 도서사이트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내 글을 올리거나 타인의 글을 본다. 그리고 내 글에는 타인의 덧글이나 타인의 글에는 내 덧글과 또 다른 타인의 덧글이 올라온다. 이때 우연히 내 블로그 작성 글에 어느 분의 아이디가 루쉰의 이름을 사용했다.

 

루쉰에 대해 잘 모르지만, 루쉰에 대해 뭔가 과거에 찜찜한 기억에 남은 나로서는 다른 블로거와 덧글과 답글을 나누면서 루쉰에 대한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추천받고 이번에 읽은 책이 박홍규의 <자유인 루쉰>이다. 내가 아는 정도는 루쉰이 중국의 문학가 정도이지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잘 몰랐다. 하지만 읽어본 내내 루쉰이 남긴 중국의 유산, 그리고 그가 보고자 했던 가치관이 상당했다는 것은 알겠다. 루쉰을 읽을 때 조금 생각나던 한국인 아니 조선인이 떠올랐다.

 

단재 신채호 선생으로, 그는 한국의 민족주의자이면서 한편으로 아나키스트였다. 조선의 고대역사를 밝히면서도 한편으로 무정부적인 가치관으로 항일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단재 신채호나 루쉰이나 직접 몸으로 투쟁하지 않았다. 그들의 투쟁은 글로써 투쟁하여 만민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전파하여 스스로 행동하는 것을 추구했다. 물론 방향성은 조금 달라 보이지만, 평생 그런 생활을 했기에 언제나 고민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루쉰이나 신채호나 둘 다 동북아시아의 나라에서 그것도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유교의 문화가 자리 잡은 시대에 유학의 가치는 이미 타락할 때로 타락했다. 루쉰이 본 그것이나 혹은 박홍규 교수가 본 시대적 흐름에서 1900년대나 혹은 2000년대는 큰 변화는 없어 보인 것 같았다. 인간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것이 바뀌지 않는다고 여겨 그대로 눌러앉을 수만은 없다. 바뀌지 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세상이 멈추는 게 문제가 아니다. 멈추는 순간 계속 퇴보하여 마침내는 소멸의 길에 도달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변하는 세상에 나를 변화하지 않을 경우 나는 나를 유지할 수 없다. 루쉰이 본 중국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오랜 전통과 문화는 중요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하나의 주박이 되어 발목을 잡고 있으면 그것만큼 심한 독은 없다. 루쉰이 언제나 비판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집착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연연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사형수들의 시체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에 기대하는 군중을 보면서 아연실색했다. 사형집행에서 전쟁 중이면 대부분 총살하는 경우가 많다.

 

총으로 사람은 죽이면 심장을 관통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군중은 그런 방법보단 참수형을 원했다. 목이 잘라나가는 순간과 그 목이 효수되어 걸리는 장면을 말이다. 사람이 죽는 장면을 보면 당시 공개처형장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형장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구경 온다. 교수형이나 참수형이나 능지처참이나 사람이 고통 받고 죽어 가는 장면이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 루쉰은 인간의 본성을 비관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만은 옳고 타인 중에 누군가 잘못된 사람이 등장하길 바란다.

 

나와 내 주변 인간들이 합심하여 무차별적으로 비난하고 욕할 수 있는 희생양을 말이다. 그런 자가 죽을 때가 왔으니 정의의 철퇴를 내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아Q정전>에서 바로 이런 인간들이 살아가는 중국을 말한다. 아Q는 반혁명자였다가 어느 날 혁명자로 바뀌고, 나중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에게 혁명이나 사회나, 혹은 국가에 대한 가치관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익과 군중심리에 도취하여 벽 뒤에 숨기를 바란 것이다. 물론 가장 폭력적으로 타인을 칠 때는 선두에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군중심리의 문제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딜레마 증세, 루쉰은 항상 그것과 싸운 것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이란 인간에게 가질 수밖에 없는 숙제다. 인간에게 자신이 그런 것들로 에워 쌓인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언제나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세계 속에만 생각하고 말하려 한다.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가치관이 자신에게 찾아오면 거부하려고 한다.

 

물론 새로운 것들도 받은 만큼 기존에 가지고 있는 가치관 역시 잘 적절하게 소화할 필요는 있다. 너무 새로운 것만 받는데 집중하면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게 된다. 정체성은 바로 자신이 누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루쉰이 비판하는 것은 간단히 지나간 것에 모순과 부조리가 많다면 마땅히 그것을 고치야 하나, 거기에 얽매이는 점, 새로운 바람이나 혁명이 온다 해서 그 조류에 휘말릴 것이 아니라 거기서 자신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혁명이 중국에서 계속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럽은 프랑스대혁명을 필두로 19세기는 에릭 홉스봄의 책제목처럼 <혁명의 시대>이였다. 하지만 동양은 이제 20세기 초반에 혁명이란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일소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문제를 앞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만 준 것이다. 기회를 줘도 그 안에 머문 자들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저히 방도가 없다. 루쉰의 사상을 보면 그가 특히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사상에서 많은 것을 받았으며, 루소를 두고 그런 미치광이는 중국에서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루소 같은 미치광이가 나와야 새로운 물꼬를 트는데 중국이란 곳은 그런 사람을 만들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자신 안에 숨겨진 진정한 자유를 찾는 과정에 대해 루쉰은 니체의 사상처럼 그 자신이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루쉰은 자신에 대한 어떤 기념품이나 기념행사를 기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루쉰 사후 20주년이 되던 날 성대하게 루쉰을 기리는 날이 생겼다. 루쉰이 정녕 원치 않은 것은 바로 지나간 것들로 현재의 인간에게 사슬을 남겨주는 것이다.

 

물론 고전의 가치와 고전의 저자나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본받을 필요가 있으나,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지, 거기에 머물러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만큼 나쁜 것은 없었다. 루쉰이 그렇게 현실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점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유교의 문화에서 각종 혁명을 지나 현재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세상이 왔다. 그러나 공산당은 있어도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는 없다. 중국의 자본주의 시장체계는 그 어떤 국가보다 더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빈부격차를 비롯한 각종 사회의 모순을 타파하려 했지만, 그 모순의 벽이 더욱 견고하게 높이 세워졌다. 지금의 시대를 보고 루쉰은 무엇이라 말할까? 아Q가 모든 것을 점령 시켜버린 세계에 그의 외침은 깊은 어둠에서 나오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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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2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브라보!!! 정말 정말 루쉰 선생에 대한 리뷰 중에서 역대급입니다. ㅠ.ㅠ 온 감동이 제 몸을 휘감고 있어요. 아!! 정말 이 글의 품격과 근본의 정신은 정말이지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에서의 문체가 떠 오릅니다. 전 그 책은 정말 내용을 떠나서 쓴 사람의 생명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런 글이었어요. ㅠ.ㅠ 너무 잘 쓰심...저 몇 번 읽었어요.

만화애니비평님께서 쓰신 것처럼 루쉰 선생은 어떤 고정적인 이렇다 라는 사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파악하기가 힘든 것도 있죠 ㅋ `인간`에 대해 그 암흑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에는 강하다고 할까요? `쩡짜` 저항정신이라 할까요? 모든 것에 있어서 암흑을 파헤치는 재주가 아주 좋은 분이에요. 항상 사람들은 루쉰의 글이 어렵다고 합니다. 물론 논쟁으로 시간을 보낸 적이 많기도 해요 ㅎ
하지만 전 `권력`이란 것에 대하여 격렬하게 싸우던 투사는 루쉰 선생 뿐이지 않나란 생각을 해요. 정신을 날카롭게 만들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는 영원한 진격자라고 할까요?

아Q정전은 아Q는 인간의 가장 볼품없는 쓰레기 같은 생명에 대해 형상화한 것으로 보여요. 자기 기만이라고 할까요?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자세, 실패를 하고서는 내 탓은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 `정신승리법`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자기에게 눈을 감아버리는 그런 인간 내면의 악적인 생명에 대해 명확히 소설로 펼쳐 놓은 것 같아요.

역시나 만화애니비평님 대단하십니다....ㅠ.ㅠ 이 글 정말 너무 좋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6-27 08:36   좋아요 0 | URL
루쉰p님을 생각하며 서평을 적었지요...그런데 1권 보고는 대략 이 사람이 요 정도인가? 라는 생각만 했지 그 이상으로 모르겠더라고요. 안의 글이 어떤 식이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려면 결국 원래 책을 읽어야 하겠더군요....

루쉰P 2016-06-28 20:42   좋아요 0 | URL
아악...제가 여성도 아닌데...저를 생각하시다니...이거원(발그레)

개인적으로 박홍규 교수님의 저 책은 다른 루쉰 평전이나 루쉰의 글을 읽고 읽으면 좋을 듯 싶어요. 다양하게 루쉰을 조망하고 있거든요. ㅋ 저도 몇 번이나 읽었지만 루쉰에 대한 좀 더 넓은 시야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ㅎ

그리고 루쉰 선생의 사상은 참 뭐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저도 참 좋아하는 작가인데도 불구하고 ㅋㅋㅋ 어렵더라구요 ㅎ

만화애니비평 2016-06-29 08:34   좋아요 0 | URL
루쉰님이 그렇게 열변을 토하는데, 어찌 제가 책을 읽지 아니하고, 어찌 제가 그렇게 거론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아~ 그런데 여기 곰곰생각하는발님과 몇 번 만나 술을 마셨습니다...ㅎㅎ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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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전공이 환경공학이 나는 환경부문의 여러 분야 중에서 수질 및 폐기물 쪽으로 공부했다. 그래서 자격증 역시 수질과 폐기물 관련 기사 자격증이 있다. 환경을 공부하면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모든 것을 접하게 된다. 인간이 먹고 살아가는 것은 곧 환경에 대한 파괴이고, 그 환경에서 다시 새로운 자원을 얻기 위해 환경을 복원해야 하는 이중적인 행위를 맺게 된다. 인간이 처음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식량을 찾는 것이었다. 대부분 수렵과 사냥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채집은 식물의 생존전략을 이어주는 방편이었다. 분변에 씨앗이 그대로 지면에 닿으면서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유지된다.

 

하지만 동물은 다르다. 동물은 잡히는 순간 도살당하여 뼈와 살이 분리되어 생명을 잃게 된다. 지나친 사냥은 숲을 황폐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사냥대상이 육식동물일 경우 작은 초식동물의 천적이 사라짐으로써, 초식동물이 모든 나무와 풀을 먹어버리는 상황에 이른다. 동물을 먹는다는 게 그래 간단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생태환경시스템은 어느 균형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인간의 역사에서 생태환경의 파괴는 결국 인간의 목숨을 좌우하는 아이러니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역사와 문화를 이어오면서 동물을 사냥하는 게 아니라 우리 속에 가두어 키우게 되었다.

 

최근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통 한국사회에서 주요 안주나 간식거리 중에서 치킨이 주요 음식이 되었다. 내가 어릴 적에 옛날통닭 즉 시장에서 파는 통닭을 사면 양이 엄청 많았으나, 지금은 그렇게 크지 않다. 몇 조각 안 되는 닭고기는 현재 45일 정도 된 어린 닭인 것이다. 과거 시장에서 파는 시골촌닭은 조금 다르다. 닭장 우리 속에 있는 닭은 옛날에 내가 먹어본 닭이 아니다. 그저 자동화된 공장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인스턴트식품이 되었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기 전에 이미 나는 <가축이 행복해야 인간이 행복하다>라는 책을 읽었다.

 

그래서 새삼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고, 생각보다 이전에 읽은 책보다 새로운 느낌은 없었다. 단지 전에 읽은 책은 가축인 소와 돼지 중심이라면 이번에 읽은 서적은 해양생물이 나온 게 마음에 들었다. 가축사육과 관련하여 최근 환경부 관할법령으로 “가축분뇨의 관리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 개정 반포되었다. 가축 중에 당연히 대표되는 동물은 한우, 젖소, 돼지, 닭, 오리, 사슴 등 다양한 가축이 있다. 가축이 내뿜는 분뇨의 양은 인간에 비해 많고, 대규모 사육은 밀집된 공간에 점오염원을 발생시킨다. 한국에서 주요 광역도시와 경기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가축이 사육된다.

 

가축사육은 주로 농촌의 농가에서 이루어지고, 농가 주변부에 하천이나 저수지 같은 수원지가 분포하는 경우가 많다. 비오는 날 강우유출수에 의해 지표면에 부착된 오염물질이 그대로 빗물에 휘말려 하천으로 유입된다. 가축분뇨의 어려움은 대부분 축사 영세한 농가인 점이다. 그러나 가축을 잡는 도살장은 다르다. 옛날에 시골 축제에서 돼지 1마리를 그대로 잡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지정된 도살장에서 가축들을 잡는다. 가축도살 과정을 들어보면 우선 소 같은 경우 전기 총으로 충격을 주어 기절시키거나, 그것이 되지 않으면 머리에 총을 사격하여 뇌를 관통시키는 경우가 있다.

 

실제 도살된 소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전기충격으로 인해 두 눈에 붉은 실핏줄이 보이고, 입은 크게 벌려져 있으며, 눈알은 조금 돌출되었다. 그 다음에 소의 목을 베었으니 그 모습이 참으로 엽기적이었다. 겉으로 본다면 징그럽고 무섭지만, 우리는 그런 과정을 거친 고기를 식당에서 매우 맛있게 먹는다. 그 절차가 잔인하고 끔찍하다 말하면서 식당에서 맛있게 입맛을 다지는 모습에서 상황적 간격이 있다. 문제는 바로 그 고기에 대해서다. 최근 시골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면 소 사육시설이 있다. 수많은 소들이 볏짚과 영양 사료를 먹고 성장하고, 작은아버지는 그것을 판매하여 생계를 꾸려간다.

 

그러나 내가 아주 어릴 때 적어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2분이 계실 적에 소는 우사에 1마리가 있었다. 그런데 소가 따로 외양간 건물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조부모님이 살던 집 지붕과 이어진 우사에 있었다. 작은할아버지 댁에 가도 그렇다. 작은방에 작은 문을 열면 우사에 소가 있었다.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우리집안은 농사일을 약 200년 전부터 시작한 것 같다. 증조부께서는 급사로 돌아가시기 그 전날까지 소에 쟁기를 끌고 다니면 논일을 했다. 소가 예전에는 한국농촌의 거대한 뿌리였지만, 이제는 소로 농사를 하지 않는다. 들판에 나가 여물을 먹거나 여기저기 움직이지 않는다.

 

돼지도 인간이 주는 잡식이 아니라 사료만 먹는다. 닭도 마당에 풀어 키우는 게 아니라 닭장 아래 갇혀 있다. 인간도 어디 나가지 않고 좁은 독방에 갇혀 사육되면 아마 몸이 먼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정신이 붕괴되어 자살할 것이다. 동물은 시간적 감각이 인간보다 덜하다. 인간은 시간을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단지 몇 시인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뿐이다. 전등기 빛으로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어 닭에서 알을 계속 뽑아내고, 돼지에게 수없이 사료만 준 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나마 위생적인 축사는 괜찮다. 축사 내 분뇨가 가득하여 냄새가 진동하고, 병이 나도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가축도 있다. 이런 가축의 육질은 떨어질 뿐만 아니라 게다가 몸에 질병을 앓고 있어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병균이 이미 심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미국보다는 아니다. 적어도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은 미국 내 대형 공장식 가축사육시설을 두고 저술한 책이니 말이다. 하지만 국내도 미국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그런 과정은 금융시장만이 아니라 공장도 마찬가지다. 사육시설은 공장처럼 기계화 되어 있다.

 

가축사육시설은 언제나 악취와 비위생적인 공간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운 좋은 기회가 있어서 여러 가축사육시설을 본 기회가 있었다. 물론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만큼 비참한 상태는 아니나, 영세한 축사 중에는 매우 심각한 상태도 있었다. 우리가 먹어야 하는 식량이 바로 이렇게 관리되는 셈이다. 이 글을 적는 와중에 내가 왜 닭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가? 예전에 우리가 이렇게 닭을 많이 소비하지 않았다. 닭고기 소비량이 최근에 들어 부쩍 상승했고, 일반 주택지역과 아파트 대단지 인근을 보면 치킨집이 즐비하다.

 

이 많은 가게들이 수많은 가정집에 닭고기를 요리해준다. 심지어 시내 술집과 식당을 가더라도 닭고기는 메인 메뉴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닭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45일 아니라면 최장 60일까지 성장한다면 닭은 대량생산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닭의 부리가 잘려나가고, 발톱도 잘려나가며, 수평아리는 그대로 처분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가축들의 희생 아래 그 위에서 서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보인 작가의 관점을 좋게 보지 않는다. 동물의 죽음에서 분명 잔혹한 것은 있다. 하지만 작가는 알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물가의 차이다. 자동차의 가격이 예전에 비해 수 천 %가 올랐지만, 그 기간에 고기의 가격은 몇 백%만 상승한 점이다.

 

왜 자동차와 식량인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것을 몰라도 쌀 가격은 올리지 않는다. 물론 고기가격은 많이 오른 편이라도 해도 식량에 대한 가격은 올리지 않는다. 작가인 조너선 샤프란 포어는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가축도살 현실에 대해 잘 지적한다. 그 기업이 펼치는 로비나 혹은 미디어의 작용도 거론한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기를 먹지 않아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니라면 고전의 경영방식을 답습하여 운영하는 농장주를 계속 키우는 것일까?

 

식물을 위주로 하면 식당의 판매가격이 낮아지는 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시장에 공급하는 대규모 경영업체가 보여주는 행동이다. 권력기관과 언론기관을 동시에 협력하여 눈속임하는 것, 그리고 공장 내 노동자의 인권문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 시점에서 단지 고발만 하는 식은 좋지 못하다. 과정의 관계에서 대안의 설정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모든 음식이 그렇게 전달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시장구조는 제대로 맥을 잡아내지 못했다.

 

수 억명에 이르는 인구가 살고 있는 나라에 식량을 저렴하게 공급하려면 그 만큼의 자본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규모농장이 용인되지 않은 경제적 상황, 영세농가의 현실, 자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산업구조 변화에 대한 대안성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빈부격차는 어마한 것이고, 그 빈부격차에서 빈곤계층이 주어지는 식량은 고칼로리의 햄버그와 콜라다. 그들에게 신선한 건강식이란 벽에 걸린 그림이고, 더러운 공장에서 도축과정에서 잔인하게 죽는 동물의 피 때문에 살아간다.

 

작가는 미국 유명한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몇 년 동안 상을 받은 사람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 중산층에 있는 사람이고, 상당한 엘리트다. 엘리트이기에 그런 책을 서술할 수 있지만, 엘리트의 한계성이 드러나는 책이다. 그런 음식을 먹고 싶고 말고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으나, 선택권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도 있다. 미국 도심지 내 텃밭을 가꾸어 채소를 가꾸기란 무리고, 농촌에 자기의 텃밭을 꾸며서 자신의 생계를 꾸릴 수도 없다. 문제의 현실을 잘 지적해도 그런다고 대안성은 없다.

 

세계의 절반은 왜 굶는가? 미국 내 식량은 빈민을 모두 살릴 수 있지만, 모두 가축사료로 사용된다. 남는 것이 있어도 그렇게 하는 것은 절망적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하나의 숫자로 보는 자본주의시장경제의 비참함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선택지가 파괴된 인간에게 이 책의 논리는 그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공장식 사육시설 비위생적이고 비인도적인 도축시설이 사라져간다고 작가는 말하나, 그의 말은 너무 오점이 많다. 물론 가능하다. 지금 살아있는 빈곤계층이 사회적으로 재생산을 할 수 없으면 말이다.

 

경제적 능력이 따르지 못해 2세를 낳지 못하거나, 또는 출산율이 저하되어 부부 당 출산인원이 2.0 이상이 아니라 1.0에 머물면 인구는 확연하게 감소된다. 우리나라가 지금 그런 경제적 상황에 머물려 있다. 게다가 식량의 문제, 생계에서 주거비용과 의복도 중요하나 식단의 구성에서 작은 임금으로 식사를 해결하려면 저렴한 식품공급이 필요하다. 이런 현실에서 이 책은 상당히 낭만적인 발상만 넘치는 것 같다. 좋은 내용을 보여줘도 좋은 대안은 없다. 동물이 불쌍하게 죽어 우리의 입으로 오는 것은 안다.

 

특히나 대기업들은 자신들이 만든 환경오염문제를 자신들의 비용이 아닌 공공성의 영역을 침해한다. 이래저래 막지도 못하고, 현실을 비판하면서 뭔가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란 얼마나 답답한가? 문제의 근원은 어디부터 있지만, 그것을 건들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옛날에 가난의 상징은 영양실조이나, 지금은 비만의 상징은 과도한 비만이다. 경제적 빈부격차는 음식에서 바로 차이난다. 영양제와 항생제가 듬뿍 들어간 고기를 먹는 게 나쁜 것은 잘 알아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은 훨씬 나쁘다. “내가 이래 잘 알고 있는데, 너는 왜 그것을 몰라? 아니면 모르지만, 이것을 알면 정말 놀라울 거야.” 라는 식은 결국 자기 만족의식이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에 대한 배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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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6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7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6-06-07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시간이 날 때 페이퍼를 쓰려 하는 주제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육식은 반-생태순환적이지만, 인류 역사 초기의 반-생태순환은 농업이었고, 친-생태순환은 사냥에 의한 육식이었죠. 사냥감이 줄어들면 인간은 굶어 죽음으로써 균형을 이루었는데, 인간이 굶어 (또는 이에 의해 2차적으로 다른 이유로) 죽는다는 것을 막은 것과 생태 순환과 어느 것이 더 도덕적인지 고민 중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6-07 16:06   좋아요 0 | URL
저도 진보성향이나, 가끔 진보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가장 짜증나는 요소는
바로 대안이 없다는 점입니다. 현실에 대해 까기만 바쁘고, 근본원인과 대안책도 없고,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면 계속 뱅뱅이니...참 고민입니다.
이번 고기도 마찬가지죠. 자신들조차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모순과 혜택을 누리면서
거기에 대한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