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마스터 - 위기에 더욱 빛나는 경제학 고전 16권
존 메이나드 케인.헨리 조지즈 외 지음, 서경호.정명진 외 옮김 / 부글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으면서 책제목을 조금 변경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책제목은 <경제학 마스터>, 사실 책을 읽으면 경제학자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인문사회 철학자까지 등장한다. 그들의 이름과 책들, 그리고 사상까지 소개한 것 까지는 좋겠지만, 책을 읽으면 책속의 내용은 엮은이가 직접 그 책을 토대로 판단하고 요약 정리한 게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책들을 골라잡아 그 속에 있는 어느 주요 부분만 선택하여 그대로 실어 넣었다.

 

그런 점에서 <경제학 마스터>란 책제목은 어불성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양한 경제학자 및 사상가들의 책 내용을 소개하고 알려준 것은 좋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경제학이라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필두로 정치경제학 연구 분야로 존 스튜어트 밀과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론을 제시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자본주의 경제가 세계적으로 넘어가면서 등장한 경제학의 기린아인 하이에크와 케인즈가 주요 경제학 흐름 골자다.

 

여기에 리카도나 슘페터, 멜서스 같은 정치경제학자들까지 가세하면 나름 정리된 경제학 이론도서가 되기도 한다. 물론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라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제란 단순히 돈만 벌고 도는 것보단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원과 자원 그리고 노동력 등을 연구하여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제란, 그들의 호주머니 속의 지갑에 많은 지폐가 들어가기만을 원한다.

 

경제학적으로 그 부분도 놓칠 수 없는 점이지만, 그 점은 단지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 거대한 물결은 아니다. 이 책을 엮은 저자는 그 거대한 물결을 가지고 책을 논한다. 문제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은 경제학 도서가 아니라 정치사회학 도서에 가깝다. 따라서 이 책이 <경제학 마스터>라고 보기에 어려운 것은 경제가 정치사회적인 요소와 맞물려 돌아가는 게 사실이나, 단순히 경제라는 단어에 치중했다면 몰라도, 책은 경제만을 다루지 않는다. 토머스 페인의 <인권의 정의>같은 경우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논하는 책이다.

 

그렇다면 경제를 무엇으로 보는 게 정답인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경제성과 자유성에서 인간의 빈곤이 해결되지 않은 진정한 자유는 없다. 경제라는 것을 돈이나 자본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나 사회적 합의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제학 마스터>란 책제목이 전혀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이다.

 

경제라는 용어는 어느 사회가 어디에 있든지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단어이다. 인간이 살면서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을 먹으려면 농사를 통해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 식량을 보유하지 않으면 노동력과 생산력조차 없어진다. 인간의 삶에 필요한 그 요소가 경제라는 점이다. 민주주의 정치체계나 간활한 군주의 정치공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가라는 체계는 국민이란 인간들로 구성된 커다란 사회체계이다.

 

사회체계 내 살아가는 인간은 재원과 자원을 필요로 한다. 경제성은 그런 말이기도 하나, 그 경제학이란 학문적 가치에서 인간의 오만과 고정관념이 오용될 가능성이 높다. 환경생태학적으로 인간의 합리성에 의해 우리는 문명의 편리를 누리는 대신 목이 마르면 안심하고 하천의 물을 마실 수 없다. 아스팔트 차로에 빠르게 달려가는 차 안에서 다른 차의 매연과 다른 운전자의 흡연으로 인해 창문을 열고 다닐 수가 없다. 에어컨 바람은 잠시 상쾌하겠지만, 탁한 공기는 인간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법이다.

 

인간의 욕심은 타인의 재산을 노리고, 자신의 재산을 신성시 여긴다. 책 안에서 부모님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자신이 빼앗긴 재물은 잊어지기 어렵다는 홉스의 말에서 소름이 끼친다. 경제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정작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을 잡아먹는 동굴 속의 외눈박이 괴물인가? 경제학을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화에 대한 욕구와 욕망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표출되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책 자체가 여러 저자의 내용을 고스란히 옮겼기에 처음 접하는 분에게 이게 경제학 입문서 내지 정독서로 추천 드리고 싶지 않다. 단지 경제학을 알려면 어느 사람을 찾아보면 좋을 지에서 나름 추천 드릴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1/3 가량이 경제학 서적이 아니다.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 정치, 문화, 역사 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지 경제학 도서가 아닌 것까지 경제학 도서로 포함한 게 아쉬울 뿐이다. 차라리 <정치경제학 입문 마스터>로 만든 게 훨씬 좋다고 여긴다. 아래 목차를 제시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1장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2장 이반 블로흐의 전쟁의 미래

3장 에드워드 벨러미의 과거를 돌아보며

4장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5장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6장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7장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철학강의

8장 토머스 로버트 맬더스의 인구론

9장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

10장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

11장 제러미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들

12장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13장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14장 몽테스키위의 법의 정신

15장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16장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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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8-2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경제입문론 정도...마스터는 한권으로 마스터가 될수 없었나 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20 13:50   좋아요 1 | URL
입문정도도 어렵습니다. 걍 소개~ 정도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 요즘 상종가를 치십니다그려.. ㅎㅎㅎ 가을 되면 한 잔 아시죠 ?

만화애니비평 2016-08-20 14:21   좋아요 0 | URL
서울 유진식당이 목표지점인겁니까!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0 14:24   좋아요 0 | URL
다음에는 만애비 님이 지정하신 곳에서 하죠... 야외 식당 좋은 곳 있으시면 추천하십시오.

yamoo 2016-08-20 21:38   좋아요 0 | URL
에이, 곰발 님만하겠습니까?! 연일 상한가를 치셔서 `제한폭`을 실시해야 할 듯한데욤^^ㅎㅎ

yamoo 2016-08-2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차를 보니, 정치경제학 입문론 쯤 되는 거 같습니다.

제가 공부한 바로는 하이에크의 경우 주류 경제학자가 아닌 거 같습니다.
보통 경제학에서 주로 언급하는 학자를 보면, 케네, 애덤 스미스, 멜서스, 리카도, 밀, 프리드리히 리스트, (구스타프 슈몰러, 베르너 좀바르트,) 칼 마르크스, 베를런, 칼 멩거, 왈라스, 마셜, 피구, 케인즈, 슘페터, 로빈슨, 돕 등을 많이 꼽습니다. 뭐, 다수설 쯤 된다고 봅니다.

하이에크는 정치경제학자로 분류되어 주류 경제학에서 많이 언급되지는 않는 듯합니다.(교과서 차원에서..)

현대경제학으로 분류된 학자들을 보면, 새뮤엘슨, 프리드먼, 갤브레이스, 뮈르달, 스라파 등을 언급합니다. 물론 교과서적이죠.

하이에크와 미제스는 오스트리아학파로 분류되어 경제학이 아닌 정치경제학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거 같습니다.

물론 위의 책에 대한 만애비 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책 자체가 경제학 마스터라는 타이틀을 달기에는 너무 범위가 넓어, 그 부분을 언급하시고자 했겠지요.

제가 한 때 미제스와 하이에크를 읽으면서, 이 학자들은 왜 교과서에 잘 언급이 안 되는지 의아해서 교과서를 많이 찾아 봤는데, 이들을 다루는 교과서를 본 적이 별로 없는지라...그 부분 때문에 주저리 많이 쓰게 됐네욤^^;;

개인적으로 경제학은 `희소성의 원리`를 구현하고자 성립된 학문 같아요. 아미티아 센같은 학자는 경제학에서의 철학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경제학이 인간에 대한 학문으로 자리매김할려면 교과서 자체에 `소비자`를 대체하는 학술어가 빨리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경제학 어떤 교과서를 봐도, `소비자`만 있지 `인간`은 없는지라..

만화애니비평 2016-08-20 23:54   좋아요 0 | URL
야무님 말씀이 거의 맞습니다.
오스트리아파로 하이에크 미제스 이름은 밀의 정치경제학에서 봤는데, 신자유주의 노선에선 하이에크 이론을 가져와도 그것이 교과서로 되지 않은 점은 조금 의아하네요.

소비자란 용어에서 소비자가 우선인지 소비자는 바보인지 의문되는 현실인지라 어째보면 경제학에 철학이 가장 필요한 것 같습니다.

루쉰P 2016-08-20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는 읽을 때마다 재미지네요 마치 제 관심사를 꿰뚫고 있으신 듯 해요 전 지금 고향에 내려와 친구와 술 한잔하고 집에 가고 있어요 전 파스칼의 팡세 리뷰 쓸거에요 만화애니비평님이 감탄할 정도로 쓸겁니다 이얍

만화애니비평 2016-08-20 23:52   좋아요 0 | URL
술을 맛나게 드시는 겁니다,. 니빠앙~ㅁ
 
루소 - 시공 로고스 총서 31 시공 로고스 총서 31
로버트 워클러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최근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을 읽었다. 랑시에르의 책에서 말하는 요지는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대중을 수동화 시키는 점이다. 수동적인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 서식한다. 한 마디로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프레임이 갇혀 거기서 나오지 못하고, 그 틀 안에서 열렬하게 돌고 도는 인생을 만끽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없는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도덕이란 가치가 있다. 그런데 도덕적 가치는 사회적 합의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회적 합의는 그 시대의 풍미와 조류에 의해 움직인다. 건전한 사회에서 흘러나오는 도덕은 매우 아름답고 사람들은 행복의 미소로 가득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 사회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서로 경계하고 미워하며, 조금이라도 작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성난 이리처럼 으르렁거릴 것이다.

 

인간이 진정 행복한 시대란 도대체 언제라는 것일까? 사소한 일에 인간들은 수지가 틀리면 친구에서 적이 되고, 돈 앞에서 우애 좋았던 형제자매마저 법적 소송까지 벌인다. 심지어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관계가 비틀린 모습도 TV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인간의 행복은 무엇으로 망가지는가? 마르크스이라면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했으니 자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전이라면 루소는 개인의 이기심이라 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루소를 다소 비판적 관점에서 대하고 있으나, 마르크스의 서적들을 읽은 후 루소의 서적을 읽으면 상당한 유사한 요소를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친구인 엥겔스 같은 경우 루소의 서적을 세심하게 읽었고, 노동자에 대한 현실의 비극은 루소가 보던 것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 발견자, 루소>에서 루소는 마르크스, 로베스피에로의 아버지라고 한다.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서적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이전에 존재하던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찾아간다.

 

그 원류는 애덤 스미스의 제자인 데이비드 리카도 좌파와 또 하나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활약하던 자코뱅 좌파였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고전경제학의 발전과정이고, 마르크스의 정치학은 계몽주의 운동가의 발전과정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의 고전경제학은 마르크스의 <자본>에게 이론적인 요소를 전달했지만, <자본>이 가진 정신적 가치까지는 아니다. 산업혁명 당시 메뉴펙처라는 분업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그의 제자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자본>에서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생산력은 발전시켰으나, 분업은 인간은 도구화시켰고, 임금의 질을 하락시켰다. 분업이 만약 노동자들이 하나의 합동체계로 만든 회사면 모르나, 분업은 자본가 하나에 의해 운영되는 곳이다. 노동자가 기계부품처럼 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임금이 생계수단의 한계점으로 이어지고, 가혹한 노동환경은 직업병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부분에 대해 루소는 조금 다르게 보았다. 인간이 분업이 되면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거기에 메여진 것들만 가능하다.

 

인간의 직업이 시인, 벽돌공, 수리공, 교사, 의사 등으로 세분화되면 인간의 인생은 매우 한정적이고, 지나친 전문화는 인간에게 부조리한 권력한 명예 그리고 허영을 쫓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논조는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밀>에서 언급된다. 위에서 언급한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이 루소의 주장에서 시작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스펙타클화 된 인정투쟁은 인간 스스로의 감옥을 만들어낸다.

 

루소의 직업에 대한 고찰은 후에 가면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이어진다. 사회적 분업은 비단 노동자의 임금만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마저 분리시킨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의사의 손에, 교육은 교사의 손에, 결혼도 예식매니저, 죽음도 상조전문가에게 맡긴다. 인간 본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전혀 없어지게 된 세상이다. 인간 스스로가 노동자, 교사, 시인,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은 없다.

 

루소의 경계는 바로 현대사회에서 드러난다. 영국 정치사상학자 로버트 워클러의 <루소>는 근대민주주의 꽃을 피우던 프랑스대혁명 전야에 존재했던 루소에 대하여 연구한 도서이다. 그의 말대로 18세기를 가장 과격하여 비판한 사상가이고, 가장 심하게 박해를 받았던 사상가 중에 하나이다. 루소의 철학을 보면 관념적으로 칸트로 넘어가고, 유물론적인 요소는 마르크스로 넘어간다. 그러나 루소가 보던 시기는 언제나 스파르타의 절제된 간소함이고, 로마의 민주정이었다. 과거를 바라보던 루소는 플라톤의 정치사상을 담고 있으나, 오히려 전도시켜버린 광기의 천재였다.

 

루소의 사상이 오히려 현대사회에 더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은 철학의 시작이나 인문학의 시작일 수 있겠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공감대로 이어지는 것에서 다소 벽이 느껴진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를 이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오면서 루소가 주장한 내용이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의 입으로 나온다. 루소 이전의 사회는 종교가 정치와 결부된 사회다. 종교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삶의 가치를 강요했고, 인간의 운명은 이미 신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의 삶은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 움직이고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이라도 루소는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일반적 계몽주의자처럼 지식인 엘리트들이 무지한 대중을 계몽하여 이끌어간다는 것과 다르게 루소는 오히려 민중의 선한 감정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처럼 기계화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불가능하겠지만, 자연이 있는 농촌인간들의 순박하고 정직함이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의 도서는 당대 엘리트에게 많은 공격을 당하고, 지금도 그의 사상을 두고 말이 많다. 죽어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은 사상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루소가 보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자아성찰과 자아반성만의 영역이 아니다. 루소의 <에밀>처럼 어린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면 타락한다고 보았다. 아이의 비위를 너무 맞추면 그 아이는 버릇이 없어진다. 루소는 직접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 적은 없으나, 루소가 말하는 자연이란 인간의 본연의 세계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기 전부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을 빼앗겨버렸다. 주입식 교육으로 수동적인 인간이 되었고, 주변 사물에 대한 판단은 누군가의 경험으로만 대체되었다. 선험적인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이성의 영역은 모조리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서평 머리부에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이 나온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미 어릴 때부터 우리의 눈을 빼앗았고, 어른이 되어 다시 이어진 것이다. 루소는 그 이유는 부패한 사회와 문명이라고 했다. 그 문명의 교육이 다시 아이에게 이어지고, 다시 재생산되어 인간 본연의 세계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를 읽는 것은 18세기가 아니라 21세기의 우리가 보는 세계를 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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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6-08-07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 애니 비평님 글은 만화 애니가 아닌 사회 문화 비평글일때 더 재미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07 22:15   좋아요 0 | URL
아니고, 오타쿠가 실천해야할 본연의 임무가 이렇게 되다니요..ㅎㅎ

루쉰P 2016-08-07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도대체 이런 글을 어떻게 쓰시는지 원...감탄을 하고 갑니다 ㅋ 루소 정말 정말 매력적이네요 ㅋㅋㅋ 읽고 싶은데 왜이리 저는 읽을 게 많은지 ㅋㅋㅋ

역시나 재미난 글 잘 보고 갑니다 ㅋ

만화애니비평 2016-08-07 22:16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지금도 루소가 적은 도서를 다시 읽는 중입니당..ㅎㅎ

루쉰P 2016-08-08 10:16   좋아요 0 | URL
항상 독서를 하면서 느끼지만요 ㅋ 한 명의 사상가를 온건히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더라구요 ㅋ 전 톨스토이, 간디, 마틴 루터 킹, 루쉰 이렇게만 파고 들고 있거든요 ㅋ 어찌나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정말 루소의 전문가이신게 대단하신 것이라 느껴집니다. ㅋ

2016-08-07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7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9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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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회적인 영역으로 항상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사는 세상을 연구하는 사회학을 찾아가면 그래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눈으로 돌아가는 현실이나 그 원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거대한 조류로 휘말려 있다. 마치 수수께끼로 얼룩진 미스터리 현상처럼 우리가 사는 일상은 늘 익숙하면서도 그 익숙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궁금해지기 시작하면 머리에서 에러 신호가 깜빡인다. 사회학이란 영역을 내 개인적으로 독학을 했다.

 

사람들은 나보고 독한 놈이라 한다. 돈도 안 주고, 봐도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왜 하냐고 묻는다. 책을 읽으면서 넉넉하지 않은 시간을 내어야 하고, 초반에 책을 살 때는 박봉을 나누어야 했다. 지금은 도서사이트의 포인트가 총알이 되었지만, 그 총알이 장전되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총알을 공중으로 뿌려야 했다. 어째든 사회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란 결국 내가 모르는 세상에 대하여 내 스스로가 그 곳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의 투쟁이다.

 

책을 읽다보면 왜 그런 논리가 되는지가 이해가기도 하고, 가끔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경우가 많다. 책이란 지식의 보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읽혀지는 책도 있고, 그렇지 못한 책도 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읽히는 책들은 그 안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는 함의가 현재도 통용되고 앞으로 통용될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책을 읽은 후 세상 안의 인간들을 만나면 순간 낯선 나를 발견한다. 사회에 살아가는 것은 그 안에 머물러가는 존재지만, 안에 머무는 것은 그 안에서는 자신이 어떤 세상인지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

 

사회학을 두고 현실적인 도구로 대체하자면 반투명 유리라고 생각한다. 자신 주변의 벽은 색으로 가려진 벽이나, 사실 그 밖은 안을 볼 수 있다. 단지 안쪽은 거대한 용기이기에 보는 사람은 그 벽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을 볼 수 있는 규모가 작고, 너무 멀리 있으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멀리서 봐야지 다양한 인간군상을 알고, 세상만사를 알 수 있다. 만일 그렇게 멀리서 자세히 보려면 좋은 안경이 필요하고, 다시 확인하려면 녹화장치도 필요하다.

 

인간이 살고 있는 거대한 반투명용기에서 사람들은 출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도, 그 문을 여는 것은 주저한다. 문을 열면 시간을 괜히 낭비해야 하고, 그 문까지 찾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게 귀찮다. 그래서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은 참으로 난감한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이 이미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에 자신이 느끼는 바를 이야기하는 것과 멀리서 바라보는 인간이 말하는 것과 너무나 큰 차이점이 있다. 물론 멀리서 보는 인간들도 다 좋은 의도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하이에나 같은 시시탐탐 기회를 보면서 자신의 잇속을 채울 수 있는 사냥감을 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회에 살면서 부조리와 모순에 부딪힐 때 아무 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가만히 있어야 할 경우, 그 위기를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살며 걱정을 한다.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말이다. 단지 눈앞에 이익과 즐거움만 원한다. 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이기심과 쾌락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리 원하고 찾으려 해도 마치 신기루처럼 자신의 손에서 멀어져 간다. 신기루는 사라져가도 그 이미지의 상을 더 크게만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헛된 욕망과 스펙타클의 열렬한 선수가 되어 허상 위의 경기장에서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 현대사회는 모든 척도가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경제적인 빈부는 인간의 인성과 가치마저 형성하고, 그 사람이 가진 의식과 판단력조차 돈으로 결정된다. 좋은 옷과 좋은 잡화류는 자신의 신분이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이미지에 상당히 집착한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은 기호이다.

 

백화점 고급핸드백에 빚을 내고 구입하는 여성들, 기름 값과 보험료에 고민하면서 고급 차량을 구매하는 남성, 이 모두가 자신의 처지와 실용성보단, 세상의 조류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다. 하지만 그 애절한 움직임은 이미 무의미한 것이다. 단지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자신이 마치 낙오되지 않았다는 것을 억지로 보여주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위한 하나의 기만이다. 기만의 세계는 언제나 열려 있다.

 

사회성에서 책에서는 인정투쟁을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지 못한 채 언제나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는 게 현대인들의 슬픈 초상이다. 책에서 오타쿠가 차라리 나아보이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 없다. 힘없는 사람 앞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위에 권력자에겐 바른 말 한마디 못하고, 아부를 밥 먹는 것과 유사할 정도로 잘 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지 못해 고립된 상태이기에 남의 이목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남에 시선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지 경계나 이형의 존재로 보이기는 싫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움직이는 이상한 세계의 인정투쟁,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해야지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한다. 대놓게 내가 입고 싶어서 혹은 지나가는 누군가 잘 보이려 입은 게 아니라 하나, 막상 그들의 정신분석을 해보면, 그들의 입장을 옳으나 그 입장에 숨어있는 타인에 대한 욕망은 인정하기가 싫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도서모임에서 이런 대화를 자주 나눴다. 한국인은 개인주의화가 덜 된 나라 사람이다. 개인주의보단 오히려 개인적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활보치는 세상이다.

 

따라서 뭔가 이익이 목적되지 않은 이상, 뭔가 자신을 돋보이거나 더 좋은 것이 오지 않은 이상 더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에서 타인의 입장보단 나의 이익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문제는 포커스가 남에게 무의식적으로 사소한 피해가 아닌 생존의 박탈 앞에서 무덤덤할 수 있는 자세다.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의 세계다. 주변을 돌아보기보단 자신의 주변을 스스로 뱅글뱅글 돌아야 한다. 한국사회가 가진 공동체 사회에선 인간은 소외되지 않은 존재였다.

 

태어나면 마을에서 크고, 마을에서 일을 하며, 마을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가졌다. 죽어서는 마을에서 장례식을 지내고, 마을 산자락에 있는 언덕에 시체를 묻었고, 그 과정을 되풀이 했다. 그런다고 과거의 유산이 모두 좋다는 게 아니다. 적어도 과거의 인간에게 외로움이란 고독에 스스로를 보내지 않았다. 지금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직장과 학원으로 소원해지고, 아파트 이웃은 다정한 사람보단 집값을 위한 동원될 정예군이고, 층간 소음에 따른 불천지 원수가 되었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만족해야 하나, 막상 감옥은 같은 규격이 아니라 돈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와 오브제로 구성되어 있다.

 

서평을 적어가는 동안,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왜 말이 연결되는 것처럼 적어가나, 내용은 계속 여기저기 튀는 것일까? 사회학을 연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순은 사회란 것은 단순하고 명쾌한 영역이 아니라 매우 복잡 다양한 미로라는 것이다. 미로를 찾아갈 때 미로를 향하여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다.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새처럼 다 볼 수 있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신이 아닌 이상, 새는 새대가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꾀꼬리가 노래 한 수 불러주면 감사할 따름이나, 도시에는 꾀꼬리 대신 닭 같이 생긴 비둘기만 펄럭거린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이런 복잡 다양한 사회상의 문제를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러나 작가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더구나 자유롭게 서평이나 적는 독자이기에 이렇게 적을 뿐이다(나보고 이딴 식으로 글 적는 것에 불만 있는 분은 나에게 월급을 주면 된다. 적어도 내 글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이상 말이다). 사실 사회학 관련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엘리트의 시선은 왠지 피곤하게 느낀다. 이 책은 엘리트가 적은 글이나 그나마 엘리트라도 수면 아래서 코와 입을 밖으로 내놓은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한 글이다.

 

어떤 사건과 문제가 발생하여 거기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최대한 중립적으로 비판하여 최종적으로 어떤 대안과 가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거나 상관하기 싫거나 또는 별천지에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판단내릴 수 없다. 사회학은 위에서 보는 게 아니라 차라리 아래로부터가 더 좋은 것이다. 거대한 반투명유리에서 위에 보다는 아래에서 보는 게 좋다. 빛이 내리면 모든 사람들이 일광욕을 하는 게 아니라 일부는 그늘에 가려 태양에 가린 채 살아간다. 그래서 사회학은 아래서부터 바라보는 시각이 있어야 문제의 원인과 해결대안을 찾을 수 있다.

 

이미 자신은 어떤 문제에 대해 겪을 일도 없고, 겪을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공감이란 단어는 물 건너갔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직접 노동자의 삶을 보고 저술했다면, 현대인 중에 엘리트들은 그저 마르크스의 저서가 어렵고 엘리트로서 볼 책 중에 하나로 취급당하면 난감한 상태가 발생된다. 물론 마르크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는 실천적인 연구자세가 필요하다. 이론이 있어야 생각을 할 수 있는 판단력이 갖추어지나, 그 판단력이 어떤 판단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 글을 보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잘 때까지 세상살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거리는 많다.

 

단지 어떤 원리이고, 무엇이 문제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가 귀찮아진다. 이슈는 신경이 가지만, 현황에 대해 지겨워한다. 세상물정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세상물정에 대해 돋보기로 보는 것은 불편한 것들에 대한 연속적인 만남이다. 대신 눈을 돌리면 지금은 편하지만, 나중에 더 불편한 것들이 찾아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계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세상물정은 어떤 맛인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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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번에 터진 웹툰 사건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뭔가 조금은 관계성이 있어 보인다. 2014년인가? 부산대학교에서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정기세미나가 열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참석하여 수많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님, 그리고 부산경남권의 웹툰작가들을 만났다. 물론 2013년 부산CT교류대회에서 몇몇 웹툰작가들과 만났고 가끔씩 마주치는 때도 있다.


그당시 내가 지금도 만화애니메이션학회의 학회장으로 계시는 장동렬 교수님께 아주 무례한 발언을 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소비자를 조금 더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만일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님들이 그들을 무시하면 그들은 한국 만화애니메이션을 포기할 겁니다. 그러면 교수님들의 제자들이 졸업하면 나갈 길이 없을 겁니다."라고 말이다.


이 말은 재작년 7월 서울 SICAF에서도 다른 교수님들과 2차로 호프집으로 가서도 발언했다. 그들의 눈엔 그냥 지방에서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오타쿠 나부랭이가 학회에 논문 1~2편 집어넣어 뭐하는 인간인가 싶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오타쿠 소비계층은 한국에서 2000년대 신세기 에반게리온 열풍에 따라 당시 10대들이 20~30대로 진입하고 그들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구매되는 각종 문화콘텐츠를 생각하면 우리 만화애니메이션 학회나 산업은 무엇을 보고 느끼야 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웹툰시장은 진짜 말하자면 초기의 웹툰작가 혹은 웹툰 이전의 만화작가들이 노력한 시장이다. 도서가 전자매체로 변화하면서 책이 인터넷 웹으로 변화한 것이다. 만화책들이 이제 웹에서 컴퓨터 화면으로 볼 수 있다. 웹툰 역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있다.


그러면 플랫폼의 변경에 따라 콘텐츠 그 자체는 변화하는 것인가? 담겨지는 틀에 변해도 그 안에 담고 있는 이야기는 언제나 작가의 몫이다. 그리고 작가를 알아주는 것은 독자의 선택이다. 고맙게도 디시인사이드 한국애니메이션 갤러리는(다른 갤러리와 비교는 하지 마세요) 아직까지 희박하고 열악한 한국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위해 응원한다. <고스트메신저>가 나오기 전에 이들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극장이 나올 때 서로 먼저 극장에 가서 감상했다는 인증을 남겼다.


그 작품이 성공하든지 안 하든지 제작자 입장에서 자신들을 응원해준 팬들이 있다는 점은 상당한 행운이다. 현대사회가 아무리 자본주의 시장겨제로 인해 인간의 물화되어버렸다고 해도, 그래도 소비자 주권시대는 유효하다. 작가의 사상은 자유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누리는 것은 권리이다. 하지만 자유와 권리는 타인에게 상처입힐 권리는 없다.


그리고 남자가 하면 용납되고, 여자가 하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은 더 더욱 어이 없다. 생물학적으로 남녀의 차이점은 분명하나,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서로 용납될 수 없다. 진짜 그 티가 미혼모, 소녀가장, 성폭행 피해자를 돕는 금액으로 간다면 좋은 일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범죄를 일으킨 사람을 위해 소송비로 나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보고 거기에 대하여 반성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이 억울하여 우리가 도와주겠다는 식은 스톡홀룸 증후군의 말기 현상에 가깝다고 본다. 현재 작가에 대해 협박메일을 보내는 것도 문제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욕설하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욕설하는 사람이 있다면 왜 욕설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없는가? 


어느 분들은 이 문제가 한국의 페미니즘 발전에 어떻게든 도움이 될 것이라 보는데 사실 나는 그 말에 비관적이다. 광우병사태로 인해 일베가 탄생하고, 그들은 애국서사를 내세우고 네오-메카시즘을 일으켰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조롱을 퍼붓고, 518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그런 그들에게 애국서사 탄생은 한국사회에 일반화로 자리잡았는가? 일반여성들에게 불쾌감을 안겨주는 일베를 일반남성 역시 불쾌감을 느낀다.


메갈리안 사이트가 일베의 미러링이 되었고, 그리고 그들은 페미니즘을 말한다. 처음부터 논조에서 일베의 미러링의 방법이 틀렸다. 과격파가 되어 사람들에게 쇼크를 주어 인식의 전환을 준다는 전략이 있겠지만, 그 전략의 사용이 영국의 서프러제트 운동(1910년대 영국여성선거권 획득운동)과는 전혀 다르다. 영국의 여성들은 정확한 이념과 목적의식이 있었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려고 하면 그들은 대화를 하면서 서로 풀어가려 했다. 지금은 대화조차 되지 않는다. 


내 생각이 옳다고는 볼 수 없고, 그런다고 무작정 오류라 볼 수는 없다. 내 생각에도 구멍이 있고, 저들의 논리에 구멍이 있다. 하지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 자체에 구멍 밖에 없다. 아래는 미디어투데이 이선옥 기자의 글이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게 옳은 것인가? 내가 대학교 수업 수강 시 시간이 남아돌아 여성학 수업을 우연히 들었다. 교양수업을 하시던 여자교수님의 말을 듣는 것과 현실은 별개로 돌아간다.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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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원리 2 - 사회철학에 대한 응용을 포함하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77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동천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1권에 대한 서평을 적으면서 어느 분이 재미있는 의견과 조언을 주셨다. 그분이 주신 코멘트 중에서 인상 깊은 것 중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고전적인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자유주의라는 단어를 남겼다. 생각해보면 밀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근식 교수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같이 일반적인 자유주의하고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일단 <정치경제학 원리> 2권째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존 스튜어트 밀이 자신의 아내인 해리어트 테일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단순한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자유주와 페미니스트적인 자유주의자로 될 수 있던 원인은 해리어트 테일러의 영향이 컸다. <자유론>이나 <여성의 종속> 같은 책을 읽어봐도 밀의 자유주의 논조는 단순히 개인만의 자유를 강조한 게 아니라 타인의 권리와 인격을 존중했다. 어느 누군가 문제를 일으키면 문제자가 속한 사회는 그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것도 중요하나, 그 이상으로 그가 다시는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예방과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즉 한국처럼 누가 잘못을 저지르면 사회적 단절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만약 그가 진정으로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바라며 좋은 삶을 원할 경우 사회에서 도움과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밀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관은 공리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아버지의 동료인 벤담과 다르다. 벤담은 양적인 공리주의, 누군가 다름이 없이 모두 같은 것을 줘야 한다면, 밀의 경우 그 상대방이 처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국가사회에서 전부 국가적으로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누군가에 따라 필요한 인프라나 서비스는 다르다. 그렇기에 사회적인 영역을 공공성의 여부를 가려 정책을 펼친다면 결국 국가나 민간에서는 자본이 이용된다. 정치적인 상황에서 경제적 조건을 따라가기에 경제학은 단순히 수학식으로만 볼 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적 흐름과 여건을 보는 것이 옳다.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그의 경제에 대한 관점은 바로 대다수로 이루어진 농민이나 노동자의 생활 그리고 그들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자본과 토지 등을 판단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존 스튜어트 밀이 살던 시절에 영국 런던에 카를 마르크스가 와 있었고, 마르크스는 코뮤니즘 즉 공산주의 이론을 1848<공산당 선언>으로 통해 발표했다. 물론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 마르크스 말고도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을 말한 것을 보면 마르크스 혼자 공산주의를 논한 것도 아니고, 당시 생시몽, 오웬, 푸리에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활동했다. 마르크스가 아마도 밀의 경제학에 대해 다소 공격적 반응을 보인 이유는 <정치경제학 원리> 2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밀은 생시몽과 친분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었다.

 

생시몽의 이론을 제법 책 시작부에서 많은 고찰을 했으며, 국민경제와 관련하여 어느 경제적 관점이 좋은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어느 것만이 좋고 나쁘다고 밀은 판단하지 않는다. 그 효용성에 대해 언젠가는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밀이 살고 있을 무렵은 경제학은 전형적으로 부르주아 경제학이었다. 즉 자본가를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제도, 경제적 구조가 있었던 것이다.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를 읽으면 밀의 정치사상이 어느 정도 이해가게 된다.

 

밀은 인간의 비참한 생활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인구에 대한 고찰과 인구조절을 위해서는 식량이 중요한 점을 검토했다. 그리고 식량과 더불어 인구증가를 단순히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인구정책을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고 밀은 주장한다. 밀이 페미니즘 관점에서 적시한 부분은 너무 많은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그들을 양육할 능력이 되지 않아 일부 아이들은 병으로 죽게 되거나 먼 미래 아이들은 가난으로 인해 결혼하지 못한다고 했다. 가난으로 인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고, 약을 구할 수 없으며, 재산이 없으면 자식들이 새롭게 시작할 수 없다.

 

아이들은 2명 정도, 혹은 병이나 사고로 죽을지도 몰라 3명까지만 존재하는 게 맞는 것이다. 밀의 생각은 현재 한국이나 일본 사회에서도 놀랍게도 적용된다. 한국의 인구출산 비율이 1.2인에서 다운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여성 2명 중 1명만 자녀를 가질 것이고, 출산을 해도 몇몇은 사고나 병으로 죽는다면 인구유지는 1.1인으로 될 것이다. 인구의 감소는 경제적 생산력 축소와 경제활동 영역이 축소된다. 경제력이 축소되어 시장경기가 퇴보하면 나라는 극심한 빈곤으로 치닫게 된다.

 

밀도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하고, 교육을 위해서라면 사적인 투자와 공적인 투자가 있지만, 공적인 투자는 누가나 지원할 수 있기에 그런 직업을 가진 자는 넉넉한 임금이 오지 않은 점을 말했다. 이에 반면 사적인 투자, 즉 집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의사나 법조인으로 선택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변호사 수임료가 그토록 비싼 이유는 변호사가 되고 싶으나 되지 못한 사람의 몫까지 챙기기 때문에 비싸다고 했다. 결국 직업의 선택적 사항이 상황적 유리함과 불리함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정치경제학 원리>는 경제학에 대한 책이기도 하나, 사실 매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부분도 강하게 반영되었다. 솔직히 책 앞부분을 보면서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학문과 예술에 대하여>가 생각나기도 했다. 정치경제학자인 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민들의 생활이 여유롭지 못하고 빈곤과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다면 분명 심각한 문제다. 그 모든 것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농사를 짓는 농민의 상황을 제대로 고찰했기 때문이다.

 

본 서평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현재 수준 이상의 인구가 필요하고, 재생산이 되려면 결혼 내지 남녀 간의 동의 아래 자녀가 태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양육비와 교육비가 제대로 구비되지 않을 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재생산의 기능을 위해서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충분한 생활비가 받아야 하고, 농민은 자신에게 돌아갈 수확물이 있어야 한다.

 

특히 농민과 같은 경우 밀은 자작농의 활약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자신이 밭의 규모가 작아도 그들 스스로가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기에 성실하게 일을 한다. 농지를 가꾸는 것은 어렵다. 유럽의 토지는 대부분 척박하고, 석회질이 많은 토질이 많기 때문에 시비관리나 수자원관리가 어렵다. 황무지개간을 하고 나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곡식을 수확할 수 있다. 그러나 농민이 자기 땅을 조금이라도 가지면, 애정을 가지고 농지를 개간하고 수확물을 거둔다.

 

지주가 있는 땅을 빌려 차지농으로 일을 한다면 그 농지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 농지를 관리하려면 계속 땅을 갈아야 하고, 잡초를 뽑아야 하며, 시비관리도 해야 한다. 토지의 양분을 위해 가축을 사육하여 가축분뇨를 퇴비로 이용해야 한다. 만일 자기 땅이 없다면 굳이 농민을 농지를 개선해야 할 의무는 없다. 또한 농민이 지주에게 땅을 빌릴 경우 지대를 지불해야 하는데, 당시 영국에서 지대를 납부하면 농민에게 돌아오는 소득은 거의 없었다. 때로는 내년 파종을 위한 씨앗까지 먹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금이야 식량생산이 기계화 농업으로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고, 부족하면 수익 농산물을 대량 구매하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때는 무역을 위한 교통수단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고, 대량으로 운반하기에도 기술력이 부족했다. 자작농을 육성하면 자신의 노력에 따라 생활이 안정될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충분한 생계유지를 통해 농업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차지농이나 농노의 경우 자신에게 돌아갈 양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할 수 없다. 같은 땅의 규모로 차지농과 자작농의 생산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이것을 현대에 두고 생각하면 굳이 농사만이 아니라 소규모 상업시장을 보면 생각할 수 있다. 각자의 가게를 가진 사람들이 밀집한 지역과 어느 큰 백화점 내 점포로 들어간 것에 대해 생각하면, 경제적 이용에서 소비자에게 나가는 금액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소비자가 사용한 금액이 배분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대규모상점 백화점에는 대기업에게 큰 이윤이 돌아가고, 직원으로 고용된 자에겐 단지 근무시간에 따른 임금만 지급된다. 만일 상점가의 개인상점들이 모인 곳에 같은 금액이 소비되었다면, 그 이익이 돌아가는 비율은 전혀 다르다.

 

소규모 운영되는 자작농이나 자영업자들이 줄어들면 그들은 임금노동자로 속해지고, 기존 임금노동자와 관계에서 임금인하에 따른 고통을 받게 된다. 즉 대규모 운영되는 상가에서는 인력을 최소운영인원만 필요하기에 많은 인원이 노동을 원할 경우 경쟁이 생기는 바람에 임금의 저하가 따른 것이다. 밀의 <정치경제론 원리>를 보면 영국에서도 농지에 대한 지대로 많은 농민들이 경쟁했다. 전임 차지농이 당초 자신이 대여한 가격과 비교하여 몇 배로 비싸게 다른 농민에게 파는 경우도 많았다.

 

밀이 경제적으로 자본을 얻는 경로는 임금, 이윤, 지대이다. 고전경제학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케인즈의 거시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도 통용되는 기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부동산이 기능하는 지대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 같다. 아무리 농지에서 생산력이 증가해도 지대가 너무 높을 경우 농민에게 돌아가는 수확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전에 EBS 자본주의 특별4부작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현대 자본주의와 비교하여 크게 다른 것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이어 마지막 고전주의 경제학자이면서 색다른 경제학을 보여주는 존 스튜어트 밀의 경제학 역시 마찬가지다(1권을 보면 20세기 초반에 경제학과 학생들의 교재로써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가 탁월하다고 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국가에 살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해 연구하는 도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 먹고 잘 살려면 무엇을 보고 생각해야 하는가? 스미스의 고민을 밀도 역시 똑같이 생각했을 뿐이다. 단지 추가한 부분으로 리카도와 멜서스의 이론을 접목했다. 마르크스는 멜서스를 경멸했지만, 후에 문화유물론을 내세운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멜서스의 인구론을 중요하게 여겼다. 식량이나 혹은 현대로 따지면 식량 같은 재원이 인구를 조절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라는 것은 필요한 것을 구하고 이용해야 하는 것인데, 대다수 국민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임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경제학은 단지 숫자만으로 결정짓는다. 도서 모임에 경제경영학 전공자에게 경제학에 대해 전반적으로 물어봤다. 그 분이 말하기를 현대 경제학은 수학논리로 움직이는 반면 보통 사람들은 수학적으로 움직이지 않기에 경제학의 공공성이 없는 것이 한계성이 높다고 했다.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1권에서 왜 후대 학자들은 존 스튜어트 밀의 서적을 높이 평가했을까? 경제학 속에 철학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철학이 없는 경제는 결국 어느 대통령의 성공신화에 군중은 매몰된다.

 

성공한 기업가는 나라의 부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와 기업을 성장시킨 것이다. 물론 기업 활동이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 중요하지만, 기업의 목적은 기업이익증진이나 국가경제에서 국민생계수단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업화시대 자본주의 시장이 확실히 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경제규모가 성장했을 뿐이지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국민생활 현실을 지금 확인해보면 과연 우린 성장했을까? 철학이 없는 정치는 큰 죄악이다. 정치적 행위로서 정부의 운영은 예산이 움직이고, 예산은 경제성으로 움직인다. 아마 돈에 관심이 경제를 찾아가는 사람에게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는 아무 매력이 없을 책이나, 나라경제를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접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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