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트로츠키
타리크 알리 지음, 정연복 옮김, 필 에반스 그림 / 책벌레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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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러시아혁명과 트로츠키에 대한 자료를 구하는 도중 로버트 서비스의 책을 보면서 어이 없이 페이지만 넘긴 기분이었다. 아무리 반공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역사의 공정성에서 자유주의자라는 가치를 생각하면 전혀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니었다. 자유주의자와 혹은 공산주의자가 반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자유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목표가 민주주의 정치체계라면 더욱 그러하다. 가령 러시아혁명이 마르크스주의자와 계몽주의자에 의해 일어났다면 그들의 뿌리는 루소와 마르크스다. 리오 담로시의 <루소, 인간불평등의 발견자>에서 루소에 대해 마르크스, 로베스피에르, 프로이트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런 역사적 연계성에서 본다면 마르크스가 후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보여준 삶의 모습은 그야말로 투쟁과 같다. 마르크스는 성격이 급하고, 담배 피는 것을 좋아하고 싸움도 많이 한다. 하지만 겉으로 점잖은 척하고, 깔끔한 척하고, 매너 좋게 보이려는 인간보다 훨씬 좋다. 후자는 자신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지나 원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나마 마르크스가 영국에 망명 올 때 당대 자유주의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마르크스로부터 비난을 들어도 그에 대한 발언권을 존중했다. 자유주의철학자라면 여러 가지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보단 그 발언 자체에 대해 막을 권리가 없는 것이다.

 

단지 발언에는 책임 소재가 있었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다보면 지금처럼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민주적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존 스튜어트 밀의 서적을 보면 오히려 자유주의가 진보적인 사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행위는 여전하나, 적어도 공정성이란 것이 존재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좋은 책이 아니었다. 물론 이번에 보는 책이 그렇게까지 좋은 책은 아니나, 그런다고 나쁜 책은 아니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영국 좌파 사상가 타라크 알리가 사람이 저술했다. 그의 프로필을 찾아보면 국제 마르크스주의자에 제4 인터내셔널 회원이었다. 제4 인터내셔널은 트로츠키가 설립한 국제노동자연합이다. 트로츠키가 설립한 국제노동자연합인 제4 인터내셔널은 그 규모나 활동범위가 매우 협소하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남은 유산인 점에서 트로츠키가 남기려한 의지일 것이다. 그런다고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만 마르크스주의자만은 아니다. 프랑스, 영국, 독일 등과 같은 서유럽에선 네오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면서 세계적 지식인들을 창출하고 있다.

 

단지 트로츠키란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 다시 봐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맨 처음에 나오는 부분이 웃긴다. 예전에 우리나라의 적대국가 중의 50~60년대의 소련과 중공을 보면 양쪽의 정치지도자가 서로를 향하여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한다. 도대체 트로츠키가 도대체 무엇 인지 밝혀두지 않은 채 서로 으르렁 거리는 것일까? 트로츠키라는 인물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선 금기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하기 전까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고, 그나마 유럽에서나 혹은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5월 혁명에서 등장했다. 트로츠키는 잘은 몰라도 트로츠키 이름이 나오는 것은 요새까지도 체 게바라에 대한 정보를 모르면서 체 게바라를 말하는 것과 같다.

 

실제와 현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적 공백을 어떻게 받아들이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말 그대로 트로츠키란 인간이 무엇을 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려고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트로츠키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다.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은 트로츠키란 인물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그가 저지른 실수와 판단미스, 완고한 그의 성격은 차갑게 비판했다. 인간은 완벽한 신이 아니니 그런 평가가 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 트로츠키의 실수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그런다고 그가 했던 업적을 그렇게 날조하거나 축소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러시아혁명은 끝이 나고, 소비에트 연방도 끝이 났다. 마르크스의 실험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꺼졌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해 모든 것이 조작되었고, 서방세계에서도 역시 요주의 인물이었다.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여 안락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영화 <트로츠키 암살사건>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트로츠키를 알아가는 것은 20세기 그 격동의 시기를 알아가는 것과 같다. 트로츠키는 1905년 러시아혁명과 1917년 10월 혁명에서 활동을 했다. 혁명의 원인은 전쟁으로 인한 빈곤과 추위, 그리고 정치적 모순이다.

 

레닌이 말한 것처럼 혁명은 국가를 사랑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증오해서 일어나는 것처럼 국가가 왜 국민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생각하는 매우 중요하다. 만약 증오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런 위험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트로츠키가 지적한 차르의 모순이나 스탈린의 모순에서 결국 관료주의 내지 압정이었다. 그 근본에는 경제적 궁핍이 있었고, 하부의 경제적 조건이 상부의 정치적 체계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가 그런 점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보다 훨씬 나은 점은 이 책은 어렵지 않게 만화와 코멘트로 작성했지만, 당시 러시아와 국제정세를 잘 보여주었다.

 

물론 로버트 서비스의 서적에서 나오나, 스페인의 통일노동자당이 독재자 프랑코와 맞서 싸우다가 스탈린의 하청기관인 GPU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과 독일나치의 등장부분이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가 훨씬 좋은 책이란 점은 바로 그런 세계정세에 트로츠키라는 인물은 어떻게 행동을 하였을 까이다. 트로츠키 혼자 정치국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만이 아니라 망명가서 주변 사람과 옥신각신이 다투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적 정세에서 어떤 관점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만화라는 속성과 페이지수가 작아 일일이 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으나 적어도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단지 대체로 긍정적인 요소만 보여주었고, 부정적인 요소는 1921년 크론슈타트 수병의 봉기에서 보여준 잔인한 대처였다. 레닌도 만약 봐주게 되면 정세가 불안한 시국에 여기저기에 봉기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강제진압 조치에 동의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저지른 가혹한 처사는 분명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내전에서 적진에 인접한 전장에 몸소 나가 싸우는 것은 전쟁지휘관으로 본받을 상황이다. 전략과 전술을 몰랐다면 상대편의 군사력에 밀렸을 것이나 오히려 내전에서 승리했다. 로버트 서비스는 트로츠키의 내전에 보인 승리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우회적으로 말을 돌린 것이다.

 

그래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가 더 좋은 책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가면 역시 트로츠키의 유언이 있다. 인간을 평가함에 있어서 어느 단편적인 부분만 판단해서는 아니 되지만, 분명 트로츠키는 자신의 신념을 믿고 간 사람은 분명하다. 미국 교육철학자 존 듀이의 법정에서 그의 무죄선언이나 영국의 진정한 귀족정신을 가진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경과 소통한 모습에서 그가 과연 당대 지식인으로부터 배척받아야 존재라고 보여주기 어렵다. 단지 인간이 워낙 사무적인 관계만 추구하여 인간적인 맛은 없는 것은 사실이다.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직선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스탈린에게 패배했지만, 러시아혁명을 만든 것도 그렇다.

 

인간의 최고의 단점은 최고의 장점으로 연결되고, 최고의 장점은 최악의 상황도 만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20세기 문턱에서 시대를 흔들게 한 어느 남자의 모습에서 단지 그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이고, 그 시대를 어떻게 보는 것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지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트로츠키에 대한 판단은 바로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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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 1 - Novel Engine
히로사키 류 글, 파세리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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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문학이라고 해도 근본적으로 현실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이란 공간을 문자서사로서 만든 세계이다. 그런 세계가 나오는 것이 현실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아도 문학에서도 현실적 조건을 기반으로 만들게 된다. 단지 신화라는 것은 문학에서도 인간이 보이지 않은 욕망을 토대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런 적나라한 인간의 욕망을 현대적 신화로서 재미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라이트노벨이 아닐까 싶다. 라이트노벨에는 보통 현실적 리얼리티가 존재하기보단 환상이란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그래도 계속 내가 강조하는 것은 제 아무리 환상세계고 몽상으로 가득한 망상공간이라도 그것은 현실에 기반 하여 만들어진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실을 토대로 작가가 새롭게 보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은 것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욕구불만 내지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간이란 물리적으로 현실에 속해 있으며, 제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고 하여 그것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도저히 가늠하기 힘든 상태라도 그런 상상조차도 현실의 육체가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제 아무리 컴퓨터의 능력이 뛰어나 인간을 초월한 연산능력을 갖추어도 인간과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조력은 없다. 단지 환상에 지나치게 열중한다는 것은 현실과 자신의 존재성이 격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인식할 수 자신의 존재성이 격리된 것이라 볼 수 다.

 

자신이 속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에 젖어 거기에 매진하는 것이고, 그런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자신이 현실에서 만족할 수 없는 것이고,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여기서 남은 것은 선택은 제한적이다. 억지로 사회에 적응하든지 혹은 사회와 단절하든지 아니라면 어중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니라면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현실과 환상 모두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다. 어중간한 선택과 비슷하기도 하나 그것은 아니다. 어중한 것은 자신에 대한 명확한 위치를 잡지 못한 채 이래저래 흘러나가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라이트노벨을 읽다보면 작가의 글은 결국 작가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이고, 그런 글이야 말로 작가가 위와 같이 작가 자신이 세상과 대하는 모습이라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딱 좋다 내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사고방식이 다양한 이야기와 기발한 소재가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단지 작가가 스토리텔링으로 라이트노벨을 보여준다면, 이와 대조적으로 작가의 라이트노벨 속에 담긴 스토리텔링을 즐기는 독자가 있어야 한다. 작가가 글을 쓰고, 독자가 글을 읽는다면 서로 직접 마주보며 대화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으로 통해 서로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만약 독자가 어느 작가의 글을 보고 나서 그것에 대해 공감을 한다면 작가와 독자는 서로 교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에서 미묘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라이트노벨이란 것은 재미와 오락요소를 위해 만들어진 경소설이다. 경소설이라고 해도 문학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문학소설에서 읽을 수 있는 심도 있는 세계관을 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다고 하여 라이트노벨이 우리 독자에게 뭔가 작은 의미를 넘어 큰 감동을 주지 말란 법은 없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를 읽는 순간 재미와 더불어 나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조금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대 주부가 혼자서 아들과 딸을 키우는데, 남편은 14년 전에 병으로 죽고 아들은 부족한 살림을 돕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남편 없는 주부란 참으로 가혹하다. 아무리 설정이 17교에 입교하면 17세의 외모와 신체적 조건을 가진다고 해도 그 대가란 자신의 수명이다. 자신의 생명을 줄여서라도 이루고 싶은 소원,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작가의 눈이 되는 주인공 타카시는 매우 상식적인 인물이다. 평범한 고등학생이나 어머니를 돕기 위해 집안일도 돕고 게다가 아르바이트로 돈을 받아 가계에 도움을 준다.

 

때로는 상식을 떠나 그가 매우 어른다운 사고를 지닌 것도 알 수 있다. 자신의 할머니가 준 1만 엔의 가치를 그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1만 엔은 13시간이란 노동으로 통해 얻어지는 대가라는 것을 말이다. 왠지 노동에 대한 가치를 고등학생의 입으로 나올 것이라 내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야말로 고등학생이면서 청춘을 누리지 못하고, 힘들게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에게 본 작품의 히로인인 어머니 카즈미의 자식사랑은 왠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래 전 27년 전에 인기 아이돌이던 카즈미, 그녀는 어느 계기로 인해 아이돌을 그만 두고 타카시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타카시의 아버지는 평범한 청년이었고, 단지 어머니를 아낀 분이었으나 카즈미는 타카시에게 아버지에 대해 별로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아버지 없는 어머니, 그것은 외로움과 괴로움의 연속이다. 카즈미가 왜 17세로 되어 아이돌이 되었을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정주부와 아이돌뿐이었다. 아들인 타카시가 집안일을 거들어주어도 타카시와 유카는 계속 성장하고 있고, 거기에 따라 가계지출은 늘어간다. 그런데 40대 중반에 이른 카즈미에게 더 이상 일자리는 나오지 않았다. 17세가 된 이유는 2달 전에 일자리에서 나간 것이 계기라고 볼 수 있다.

 

타카시의 어머니가 40대 주부에서 17세 소녀로, 그것도 몸매가 아주 좋은 아이돌로 갔다는 것은 환상적 세계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환상이란 공간을 단지 환상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환상이란 구조가 존재하는 이유는 환상이 아닌 현실적 벽에 의해서였다. 아이돌이 되면서 자식이 아닌 타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카즈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팬이 아니다. 자신의 팬에게 3번째로 사랑한다고 선포하는 이유는 바로 타카시와 유카에 대한 사랑이었다. 타카시와 유카가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이기에, 그 가족이 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27년 전에는 자신이 힘들어서 아이돌에서 나왔다면, 이제는 자신이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가족이 있기에 아이돌로 있을 수 있었다. 처음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은 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40대 주부에서 17세 미소녀로 변한다면 과연 남자주인공인 아들은 성적인 충동이나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까? 물론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타카시는 집에서 나오지 않고 혼자 방안에 박혀 있는 유카의 속옷과 맨살을 보면 얼굴을 붉혀지면 고개를 돌리는 부분이 나온다. 정말 여동생이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면 봐도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동생이 여성이란 점을 인식하기에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다.

 

타카시를 보면서 카즈미는 만일 여동생에게 욕정을 품는다면 대신 자신에게 그 욕정을 풀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래서 17세가 된 어머니로 인해 타카시는 미묘한 상황에 놓인다. 근친상간에 대한 욕정은 없어도 그런 상황에 내몰린 그에게 학급 동급생인 메이코는 새로운 해방구이면서도 걸림목이다. 이 작품에서는 감추고 있는 인간의 욕망을 작가 스스로 감추고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발설하는 것이 특징이다. 메이코는 유카가 느끼는 감정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한다. 메이코의 아버지는 유명한 대기업을 운영하는 부자나, 메이코의 어머니는 병으로 별세한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 옆에 17교의 입교로 새로운 여자가 자신의 새어머니로 들어와 메이코와 아버지의 부녀관계를 모두 망쳐놓았다.

 

그런 과거를 가진 메이코가 타카시와 유카 관계에 들어와 마치 메이코가 증오한 새어머니와 같은 위치를 자신이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신화에 인용한 엘렉트라콤플렉스로 딸이 아버지를 무의식적으로 사랑(육체적인 관계도 포함)하고 싶은 심리로서 그 자리를 새어머니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아버지로부터 거세(멀어지게) 된 것이다. 유카에게 아버지는 14년 전에 별세했으니 유카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오빠인 타카시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 셈이다. 아빠와 오빠라는 단어에서 우리 인간은 어느 점을 바라보는 것인가?

 

물론 다 그렇지는 않으나, 여자들 중에서 어린 시절 자신은 아버지에게 시집가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혹은 아버지(대신 그 아버지는 그 딸에게 매우 좋은 분이야 하나)와 닮은 사람에게 결혼가거나 또는 이끌리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남자라면 자신의 어머니와 닮은 여자에게 끌리는 경우가 있다. 특별한 정신적 외상이 없다면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17세의 어머니가 등장한 점에서 유카는 어머니가 외적 조건으로 어머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조건이 17세이기에 오빠랑 동갑이기에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환상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어머니, 그리고 그 환상에서 현실의 도덕에서 오빠가 그 선을 넘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말이다. 다행히 카즈미는 일에 바쁘고, 대신 메이코가 그 자리를 차고 왔으니 유카로서는 불만이 아닐 수가 없다. 유카는 작품 내에서 어머니에게 질투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카즈미가 타카시와 둘이서 찍은 셀카가 유카의 메일로 오자 유카는 잘 씻지 않은 자신의 몸을 정리하면서 타카시와 셀카를 찍는다. 그래서 만약 메이코가 들어오지 않고, 카즈미를 이어 타카시의 할머니인 우메노가 17교로 입교하지 않았다면 타카시의 일상은 수라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전에 라이트노벨 원작으로 만든 <MM>이란 애니메이션을 보더라도 남자주인공 사도 타로는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가 자신을 일반적인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남자로 보고 계속 성적 구애를 하자, 여기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성적으로 큰 문제점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에서는 이에 대해 다른 식으로 전개한다. 어머니인 카즈미는 아이돌이 된다는 것은 곧 사회적 존재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사회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가져야 할 도덕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그 도덕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은 그런 점에서 환상이란 설정 뒤에 매우 현실적인 요소가 녹아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17세로 된 것도 그러나 메이코가 17세의 여사장이란 설정도 환상적인 설정 중에 하나다. 그래도 제대로 잘 설정한 것은 몸이 비록 17세가 된다고 해도 그 사람의 인격조차도 17세가 된 것은 아니다. 카즈미는 17세의 아이돌로서 활동하나 모성애가 매우 강한 사람이고, 우메노는 17세의 소녀가 되어도 옛날 말투와 옛날 복장을 하고 다닌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적 요소를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배제할 수 없는 점이다. 그리고 할머니 우메노에 대해 생각하면 이 라이트노벨은 전형적으로 일본의 유미주의 요소가 잘 보인다고 생각했다.

 

유미주의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라질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늙어서 병든 노인이다. 며느리인 카즈미는 혼자서 두 자식을 키우고, 타카시는 고등학교 청춘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아마 타카시의 아버지가 죽자 자신의 남편이 살아생전 타카시와 유카를 많이 옆에서 보살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옆에서 짐이 된다는 생각에 우메노 자신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했고, 카즈미에게 카즈미의 남편 대신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사는 “몰골스레 죽기는 싫었단다.”였다.

 

노인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약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자신 스스로 의지할 수 없고 주변 사람의 도움을 계속 받아야 한다. 병으로 인해 노환이 겹치면 가족들에게 큰 짐이 될 것이고, 가족에게 힘이 되지 못한 것도 모자라 힘들게 한다면 어떨까? 몰골스레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늙어서 병이 들어 죽는 것보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에게 슬픔을 주는 것이 싫어서 아닐까 싶다. 게다가 우메노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17교에 입교했으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입장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만큼 가족들과 건강한 모습으로 미소 짓고 싶은 것이 그녀의 소원이다.

 

작가가 결혼했는지 아니면 했더라도 가정을 꾸린 가장인지는 전혀 모른다. 적어도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사람은 변한다는 것은 분명 사실인 것 같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이 존재하듯이 어떻게든 타키시와 유카를 지키기 위해 17세의 아이돌이 된 카즈미는 분명 환상적인 존재이나 그 존재성에 대한 현실적인 요소는 큰 공감이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현대에 들어와 가족이란 이른바 해체되어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그 옛날 대가족을 이룬 시대와 달리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 간의 사랑은 중요하다. 일본의 대부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을 보면 가족이 단절된 경우(혹은 다른 가족들이 등장하지 않거나)가 허다하나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는 그런 상황에서 매우 독특한 설정을 지닌 작품이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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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틸 어쌔신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AnZ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기존의 김월희 작가의 라이트노벨을 읽는다면 세계관 자체가 역시 디스토피아적인 요소가 강하다. <세계제일의 여동생님>과 <중2병 데이즈>도 그렇다. 세상은 과연 한 개인에게 친절한 곳인가? 그것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세상은 개인에게 가혹하고 잔인하고 심지어는 환상의 세계에 있는 곳과 같다. 라이트노벨이란 장르가 환상적인 요소에 재미와 오락요소를 집어넣은 하나의 콘텐츠다. 콘텐츠라는 미디어로서 하나의 자본력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하는 상품이다.

 

그런 상품적인 가치가 라이트노벨과 부합되므로 라이트노벨은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으로 재편집 되어 상품으로 나오기도 한다. 한국의 기존 라이트노벨을 아직까지 많이 읽은 편은 아니나, 마치 이것을 영화 내지 애니메이션에 접목하면 어떤 것일까 생각하면, 영상연출 기법에서 몽타주(대립되는 것을 상반되어 보여주거나, 또는 같은 장면을 계속 보여주는 방법 등)와 같은 표현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흔하지 않을 것 같다. 한국 라이트노벨은 액션적인 요소보다 일상적인 요소가 강하고, 설사 액션이 강한 요소라도 역동감이 넘치는 글은 많지 않다.

 

이번에 김월희 작가의 신작인 <블랙스틸 어쌔신>은 그런 점을 조금 뛰어넘을 느낌이 든다. 작가 후기에도 그러나, 여러 가지 영화나 게임의 장면을 하나의 모티프로 삼아 작품 내의 상황이나 묘사를 잘 적용했다. 내 개인적으로 작품을 보니 마치 홍콩영화 중에서 느와르 장르를 소설로 보는 기분이었다. 물론 스포츠카로 고속도로 위를 전력 질주하여 총을 발사하는 스타일은 미국 할리우드 스타일이나, 여자 주인공인 유나의 전투를 보면 오히려 홍콩영화에 더 가깝게 느낀다.

 

좁은 건물에 더러운 계단에서 보는 세상에서 미국식보단 차라리 홍콩식이 가깝게 느껴진 것이다. <블랙스틸 어쌔신>의 제목처럼 흑철의 살인자, 살인자를 의미하는 어쌔신은 미국 할리우드보단 오히려 홍콩이나 일본하고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어둠에서 살아가는 자객, 그 자객은 혼자이고, 세상과 싸우는 고독한 자다. 그들에게 조력자는 없고, 강력한 적들과 싸워 나가야 한다. 김월희 작가 작품에서 <중2병 데이즈>가 있는데, <중2병 데이즈>에서는 주인공 연오는 다른 학생들의 눈에는 중2병 학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작품은 자신이 중2병 환자로 낙인이 찍힌 것을 주인공 자체가 인식하고 있으며, 그 인식 자체가 라이트노벨 자체가 중2병에 대한 내용인 만큼 세계관은 오히려 중2병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설정 자체는 작품 내의 화자인 주인공이 1인칭 시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블랙스틸 어쌔신>은 중2병적인 요소를 매우 강하게 반영했다. 정의가 불의의 악이란 대결하여 결국 패배하여 모든 세상은 악으로 물들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에서 정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의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정의라는 것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 정의가 하나의 가치관으로 옳고 그릇된 것을 판단하여 그 정의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윤리적 가치에 의해 정립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정의라는 이름에는 철학적 가치가 뒤따르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나, 사실 현실에서 보는 정의라는 이름은 단지 자신들의 입맛과 상황에 적당하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허황된 명분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 즉 희망이 없고, 암울하고 절망적인 세계에서 말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라이트노벨에서 그런 설정은 충분히 등장할 수 있다. 암울한 현실에 영웅이 나타나 역경과 시련을 겪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거기서 마주치는 불의와 현실의 타협에 상처받고 때로는 좌절도 하나, 끝까지 밀고 간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신화부터 시작하여 최근에 개봉되는 영화 <헤라클레스>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만약 악에 대해 악으로 처단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블랙스틸 어쌔신>에서 주인공인 유나와 레이는 악에 대해 빛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악으로 싸우는 모습이 나온다.

 

작품에서 암살 5대왕에서 가장 높은 자가 레이가 가진 칼을 생각하면서 그 칼에 대한 은근한 암시가 나온다. 왜 악은 악을 공격하는 것일까? <블랙스틸 어쌔신>에서 나오지만, 암살자 집단들이 암살행위를 하고 세상에 공포를 안겨주는 일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런데 그 이익을 가져갈 수 있는 영역이 어느 순간 가득하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고착될 수밖에 없는 포화상태에 이른다. 유나는 처음에 악과 선의 이분법적인 대결에서 악이 이겼다고 한다. 하지만 악이 이겼다고 세상이 끝난 것이 아니다. 단지 악이 선이라는 가면을 쓰고 세상에 군림할 뿐이다.

 

그 군림하는 자들에게 밸런스라는 것이 존재한다. 왜 흑철이란 저주받은 검이 레이에게 잘못 배달되었지만, 처음부터 누가 유나에게 그 흑철을 배달해주었으며 그것은 어떤 이유로 하였는가? 유나는 세상에 자신을 도울 아군은 없고, 오직 혼자만 싸움을 하고 있었으며, 그런 와중에 저주받은 검이 도착했다. 그 검은 세상의 모든 악과 적의를 품은 것이다. 악이 악으로 섬멸하는 것은 결국 그 악 자체 내부에서도 보이지 않은 대립이 있다는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흑철의 존재는 악에서도 하나의 시스템을 유지해주는 것과 같은 자동장치라고 생각한다.

 

파과점이라고 하는 일정 수위를 지나면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암살자 집단이 계속 활동을 하다보면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자신들의 공통된 적이 존재하지 않으면 서로 자기 살을 깎아 먹게 되는 행위를 하는 셈이다. 이런 유명한 속담이 존재한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는 공통된 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와 유나는 단순히 거대한 암살집단과 싸우겠지만, 암살집단 내부에서 가장 강한 자들만 골라 보내 싸운다면 간단하게 처리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정의라는 것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어져 있겠지만, 적어도 악이라고 불릴 자들도 그 나름에는 자신만의 정의와 가치가 있다. 악이란 존재가 추구하는 정의는 바로 자신들만의 이익이다. 그러나 막상 우리 현실에서 우리 인간이 항상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베푸는 이타적인 존재였는가? 나의 이익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 나의 이익이 박탈당할 수 있는 공간에서는 모두 냉정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이 모인 집단세계에서는 그런 마음이 하나의 정의다.

 

<블랙스틸 어쌔신> 첫 장을 열다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세상의 마지막 빛이라는 교만(驕慢)에 사로잡혀 싸우다가 어느새 깨닫는 거야. 나 역시 어둠과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을..” 이런 세계관에서 악이 이긴 세상이지만, 세상은 잘 돌아가고, 누군가 죽지만 아무도 그 이유는 모른다. 그런 세계가 이상하겠지만,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다소 중2병 세계관이나 어떻게 보면 우리 현실도 이런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르고 스쳐가기에 중2병적인 세계관이 작품에서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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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전선 1
나이토우 야스히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혈계전선>을 읽다보면 전형적인 하드고어가 날뛰는 일본 만화의 한 장르다. 환상적인 세계와 현실의 공간이 뒤엉킨 세계, 그것은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관념 안에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것이 왜 그런가? 이 작품의 배경은 미국의 뉴욕이란 곳이다. 미국의 뉴욕은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도시이다. 뉴욕이란 도시가 단순히 미국의 대도시라고 하여 그런 것일까?

 

미국 뉴욕에 월-스트리트라고 불리는 경제의 중심지가 있다. 월가라고 하면 주식의 무대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주식에 대한 경제적인 지식이 없지만, 적어도 미국의 월가라고 한다면 세계 금융의 중심이 오고가는 큰 요충지다. 현대사회는 이미 경제구조가 자본주의구조에 해당되며, 자본의 증식은 결국 자본에 의해서고, 수많은 자본가들이 움직이는 뉴욕의 월가는 그야말로 황금의 도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황금은 그 모두에게 열리지 않고, 오히려 가려진 채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래서인가? <혈계전선>의 주인공은 레오나르도 워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면 모르지만, 워치라는 것은 watch라는 시계라는 명사적 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 지켜보다 관찰하다 등의 의미가 있다. 그의 이름은 워치 즉 무엇을 지켜보고 관찰하는 존재이다. 관찰의 존재성에서 무엇을 관찰하고, 감시라는 점에서 무엇을 감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괜히 그런 이름이 붙인 것도 아니란 점에서 우연히 가족과 미국에 와서 산책을 하는 도중에 거의 신과 같은 존재가 관찰자의 눈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라는 대답에 그 운명의 두 눈을 레오나르도가 받게 된다.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이야 하는가? 보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결국 그것은 Justice 정의로 이어진다. 왜 정의인가? 보고 관찰하는 것은 말 그대로 누군가의 편에 일방적으로 드는 것도 아니고, 아주 정확하게 사물을 파악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의 본질은 인간이 가진 다섯 가지의 감각인 촉각, 미각, 청각, 후각, 시각 중에 시각만이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촉각, 미각, 후각은 무의식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쉽고, 청각은 감정에 의해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보는 것만은 관찰하는 것만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하여 거기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판단기준은 그가 살아온 인생과 가치관에 의해 결정되나, 자세하게 보고 명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반드시 정의로 이어진다. 워치의 두 눈은 정의로 이어지나, 그 정의의 수단과 방법은 폭력 내지 비폭력으로 이루어진다.

 

1권의 에피소드에서 음속원숭이와 반쪽 사신의 해결에서는 폭력적 수단에 대한 비폭력적 수단이 발휘하고, 인신매매단에 대해서는 폭력이란 하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방법은 비폭력적인 것은 요구하나, 반드시 비폭력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는 점이다. 왜 이런 것을 담고 있을까? 작가는 분명 일본인이나, 작품 배경은 미국 뉴욕이란 거대한 도시다. 그 도시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사는 만큼 온갖 부조리와 뒤틀림이 존재하는 법이다. 평소 눈에는 당장 보이지 않으나, 눈에 보이지 않은 어둠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눈에 보이는 법이다.

 

헬사렘즈 로트, 실제로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공간이나, 우리가 바라보며 느끼는 관념 안에서는 하나의 악마의 소굴과 같다. 처음부터 은행 강도가 등장하고, 미친 테러리스트가 존재한다. 미국에 은행 강도가 자주 일어나는 것도 그러하나 뉴욕에서 비극적인 테러가 일어난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그것이 하나의 불안감으로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처럼 볼 수 있다. 단지 만화라는 매체가 작가의 상상력에 스토리텔링으로 입혀질 뿐이다. 그런다고 만화는 현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로서 받아들인 것이 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헬사렘즈 로트에서 존재하는 것은 이형의 괴물체와 무서운 사건들, 그리고 거기에 대항하는 비밀결사, 그렇지만 비밀결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 없다. 비밀결사에 조직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작가가 보는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다. 주인공 워치로 보는 뒤틀려 버린 헬사렘즈 로트이나, 그것의 토대가 되는 것은 결국 현실의 상황이다. 왜 뉴욕이 그렇게 뒤틀려 보이는가?

 

뒤표지에 이런 말이 나온다. “뉴욕 붕괴 후 하룻밤 만에 구축된 도시, 헬사렘즈 로트, 이계와 현계가 뒤섞인 이 마도에는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암약하는 비밀결사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뉴욕은 현실에서 붕괴되지 않았지만, 이곳에 무엇이 뒤섞여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원래 실천해야할 도덕적인 사회와 더불어 그렇지 못한 세계가 놓여 있고, 그 모순된 공간에서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이 작품은 나쁜 요괴 퇴치로 끝날 작품이라면 워치에게 모든 것을 보는 눈을 줄 이유는 없다.

 

음속원숭이를 죽이는 것만 생각한 대다수 사람과 달리, 워치는 원숭이에 숨은 장치를 찾아내어 위기를 막는다. 위기를 막는다며 무조건 달려드는 것보다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파악하여 처리하는 것,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은 어두운 세계를 워치는 찾아낸다. 그것이 바로 관찰하는 눈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은 judgement라는 판결로 이어지나, 그는 육체적으로 강력한 힘이 없기에 옆에 동료를 의지하는 것이다. 물론 동료들도 그의 눈을 의지하여 그의 판단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눈이란 외부의 물리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것만 본다. 물리적 존재의 그 너머에 존재하는 그 사람의 의지와 사고는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판단은 눈으로 하지만, 눈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혈계전선이란 표지제목에서 보인 워치의 보스는 비밀결사를 운영하는 리더이나, 한편으로 그 무엇을 알 수 없는 깊은 살기를 가지고 있다. 정의의 수행이 정의로운 의지로서 이어지는 게 아니다. 처음 워치를 찾으러 온 사나이도 하는 짓이 건달에 민폐를 일삼는 사람이다. 민폐를 일삼는 사람이 정의 따위를 생각할까? 우연적인 기회로 통한 자신의 심심풀이 내지 기분전환으로 정의를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만화의 액션은 박진감이 넘쳐야 한다. 조용히 끝낼 상대도 아군도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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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더블유 Dimension W 1
이와하라 유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인간의 존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그것은 없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다소 종교와 철학을 넘나드는 담론에서 인간은 죽음 이후에 그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관념론적인 요소와 더불어 인간은 죽으면 단순히 시체와 같다는 유물론적인 요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예전에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이란 작품이 있었다.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1990년대로 하여 사이버펑크라는 장르가 흥행했다. 그리고 21세기를 맞이하여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는 그다지 잘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본 <Dimension W>에서는 어떻게 나는 생각해야 할까? 우선 Dimension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단위를 나타내는 차원, 크기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W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책 뒤표지에 보면 이런 단어가 나온다. “X·Y·Z에 이은 차원축 'W'의 비밀에 다가가는 운명의 만남?” 아무래도 W라는 것은 어느 공간이나 차원에서 그것을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체라 볼 수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면 어느 지점과 지점의 포인트가 있어서 공간과 면적을 이루지만, 그것을 이루게 하려면 선이라는 하나의 매개체가 필요하다.

 

공간의 매개체라는 의미처럼 이 작품의 1권에서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는 모른다. 단지 여기서는 먼 미래 세계를 그린 공상 과학적 요소와 더불어 사이버네틱스란 독특한 신체기관으로 풀어나간다. 여기서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란 생물 및 기계를 포함하는 계(系)에서 제어와 통신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주인공 소녀인 미라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지닌 로봇이다. 그녀의 사이버네틱스적인 요소에서 단순히 기계인간이란 인공지능으로서 명령을 받아 그 명령에 대한 계산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인간들처럼 자신의 의지로서 행동한다.

 

로봇에는 단순히 논리라는 기계적인 요소만 있지, 윤리나 감정은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러나 미라는 그 감정과 윤리를 지니고 있었다. 기계를 전혀 의존하지 않은 마부치와의 만남에서 마부치는 기계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마부치의 입장에서 마리라는 존재는 영 마음에 들지 않고 왠지 친하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이 만든 기계문명의 진화는 인간의 신체마저 기계화로 만들었다. 그리고 기계로 인한 전 자동 시스템으로 일상생활을 누린다. 그러나 마부치는 자동차도 기계를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한다. 그의 생활요소는 21세기 초반에 살고 있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 시대는 21세기 초반이 아니라 먼 미래라는 설정이다. 기계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것에서 제일 중요한 경제 산업 기반은 기계를 다루게 하는 에너지, 즉 전기에너지인 셈이다. 작품 초반의 프롤로그에 위대한 발명가 에디슨만이 아니라 니콜라 테슬라라는 사람을 거론한다. 전기에 대해 자세히 모르나, 테슬라를 찾다보면 자기력선속 밀도의 단위라고 되어 있다. 자기력이 왜 중요한 것일까? 인간에겐 감정을 전달하는 것에서 뇌에서 시작하여 중추신경을 타고 인체 전반에 이어진다.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바로 신경의 전달에 의해서다. 신경이 전달될 때 뉴런이란 전기를 전달하는 세포가 있기에 가능하다. 인간은 전기적 신호에 의해 신체를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나 기계인간이나 전기적 신호로 움직이는 점에서 유사한 존재일 수도 있고 다른 존재일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 처음에 <공각기동대>를 다룬 것은 인간의 신체적 조직을 제외한 순수 이성으로 본다면 만약 판단력을 가질 수 있는 지성과 감정만 지닌다면 인간이든 기계인간이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런 사고의 방향은 주인공인 미라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기계인간이고, 살아온 역사적인 시간도 2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미라는 자신이 기계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만든 박사 부부에 대해 아버지와 어머니로 여기고, 유리자키 박사가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미라가 돌보는 이유는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윤리와 이성에 의해서다. 어느 것이 더 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아무튼 이 작품은 분명 사이버네틱스라는 인간과 기계의 이원화가 아니라 그 이원화의 해체지점이 보인다.

 

그렇다면 사이버네틱스와 저항적인 의미를 가진 펑크(Punk)의 결합은 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유리자키 박사의 아내와 친딸이 살해당한 시간에 미라는 그 범인의 흔적을 메모리장치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 영상장치에서 미라는 마로치와 일행들에게 범인의 단서를 알려준다. 첫 번째 미라의 진술에서는 ‘뉴 테슬라 차원관리국 DAB’과 미라의 영상장치에서는 ‘상대는 국가보다 더한 힘을 가진 세계 최대의 독점기업’인 'NT Energy'로 나온다.

 

정부와 다국적기업의 이름이 거론된 점에서 사이버펑크 장르는 이미 형성된 것이다. 가령 <신세기 에반게리온>나 <아키라>와 같은 경우 그 사회의 주도층인 어른에 대한 반항이고, <공각기동대>는 인간이란 존재가 완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하다는 것으로 휴머니즘(인간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요소를 보인다.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점에서 <Dimension W>의 소재에 대한 접근성에서 이 작품에서 부정하는 것은 자본은 국경을 초월한다는 말처럼 그 국경을 넘어 세계적으로 횡포를 부리는 다국적기업과 거기에 기생하는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마리의 아버지 유리자키 박사는 분명히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매진했지만, 그 결과는 정부와 다국적기업의 음모에 의해 살해당하고, 결국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절망에 의해 세상은 어둠으로 물든다는 저주와 함께 사라진다. 그가 저주를 하던 세상은 무엇이 잘 못된 세상이고, 올바르지 못하며, 게다가 그런 문제점을 만드는 사람에 의해 은폐 및 조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라가 아버지 죽음에 대한 기사가 엉뚱한 것으로 나온 것을 보고, 이미 이 작품은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투쟁으로 변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3차원이란 부피를 나타내는 X·Y·Z를 이어주는 W의 존재는 무엇일까? 각각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 서로 연결해주는 마음이면 좋을까? 인간은 순간의 전율로서 짜릿함을 느낀다. 그 짜릿함을 느끼기 위한 마음, 그것이 W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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