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 - Seed Novel
온점 지음, 모밍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권을 읽으면서 전에 읽은 1권과 2권을 생각했다. 최근 들어 일본이나 한국에 마법소녀를 중심으로 만든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라이트노벨이 활발히 발행되고 있다. 게다가 용사와 마왕장르까지 나오면서 기존의 마왕용사와 마법소녀의 일반적인 형태를 해체하고 있다. 문제는 해체라는 것이 기존의 틀에서 해체된다고 하여 그 해체주의적인 작품 역시 또 다른 틀이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틀과 흐름의 물길을 돌린다면 그 물길 역시 다른 틀과 흐름에 잡힌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전개는 틀린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이 계속 유지되어 일종의 패턴주의적인 형태로 간다는 사실은 그렇게 좋게만 볼 수 없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가장 맨 처음 다른 해체적 시도는 마법소녀가 다소 폭력적이란 점과 동시에 여고생보단 오히려 남학생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1권부터 심지어 2권 그리고 최후의 3권에서는 남자의 의상을 입고 있다. 그것도 나비넥타이를 목에 걸고, 옆에 악당조직 중간보스인 주인공은 차이나드레스로 요염하게 포즈를 하고 있다. 여자와 남자라는 생물학적 관계는 역시 일러스트로 하여금 의미가 없어지게 만들었다. 라이트노벨의 작가와 일러스트를 그린 작가는 서로 다른 인간이기에 각자의 인식과 방식으로 적거나 그림을 그린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권에서 주인공은 남자인데도 아주 가늘고 마른 남성이나, 제 아무리 남성이 몸이 가늘고 야위어도 대퇴부 근육과 골격이 그렇게 형성되지 않는다. 라이트노벨 작가는 마르고 성격이 유약한 주인공으로 표현했다면, 일러스트 작가는 주인공을 여장남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여자로서 그린 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처음과 끝까지 마법소녀의 모습과 악당 중간보스의 모습 계속 반대로 한 것이다. 설정을 본다면 그것은 좋고 나쁘다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단지 작가가 설정한 세계관의 일종일 뿐이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권은 주인공의 요염한 자태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점을 암시했고, 주인공 역시 선머슴이란 사실을 각인했다. 남자교복 상의를 계속 입어야 했던 마법소녀의 아이러니에서 마법소녀가 마법소녀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충분히 깰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작가본인의 의도는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아쉬운 부분은 전에 2권을 지적한 것처럼 점장의 여동생이 붉은 이리집단에 속했던 것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이 작품은 현실에서 물가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고기뷔페 중에 가격이 저렴한 곳은 1인당 10,000원 정도하는 것은 현실성이 있고, 돼지두루치기를 12,000원에 파는 것도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그런 리얼리티에서 점정과 붉은 이리의 삽을 든 악당이야기는 아쉽게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3권도 역시 아쉬운 눈으로 바라봐야 했다. 2권은 너무 쓸데없이 늘리고 늘렸다면, 3권은 너무 줄이고 줄여 결말이 다소 명확히 끝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작가가 3권이 발매될 무렵에 국방의 의무로 군입대를 해야 하는 점이다. 군입대를 하고 제대까지 걸리는 시간은 거의 2년이다. 그동안 라이트노벨을 집필하지 못하는 점에서 3권은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3권은 2권보다 설정이나 전개가 좋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갈등, 그리고 비밀과 그 비밀 속에 가려진 마법소녀의 정체성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1권부터 마법소녀 같이 안 보이는 하춘식이 악의 조직 중간보스인 주인공과 Lovely 하게 흘러가는 것은 처음부터 알 수 있었다. 단지 그 과정에서 어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그로 인해 무엇을 전달하는지가 중요한 셈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이아> 이야기를 보면 주요인물이 처음 등장하여 모험을 떠나면 그 모험을 마치고 결국은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가는 것이 전형적인 이야기다. 그렇다면 엇갈린 두 남녀의 이야기라면 마지막은 결국 연애적인 요소다. 마법소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흔히 말하여 마법소녀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라고 한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을 읽는다면 하춘식 사랑과 우정까지 그렇지만 마을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만은 분명하다. 단지 보통 마법소녀처럼 마법(魔法)보단 마력(馬力)적인 힘으로 F-Killer의 주인공을 아주 쉽게 무찌를 뿐이다. 3권 역시 전혀 마법소녀에 상대되지 않은 주인공이 계속 하춘식에게 쩔쩔 매는 모습이 나온다. 그래도 조금 실마리가 풀리는 것만은 좋은 전개라고 생각했다. 단지 그 전개과정이 3권으로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에피소드로 통해 최소 5~6권 이상 되는 게 좋지 않았나 싶으나, 국방의 의무를 생각하면 아쉬울 뿐이다.

 

이때까지 등장인물 중에 있어도 그만 혹은 없어도 그만이던 조나단의 위치가 이번 편에는 확고했다. 철제 양동이를 머리에 쓰고 눈앞에 있는 대상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도 잘만 보고 심지어 대화까지 유능하게 하는 주인공의 참모, 그 참모의 정체가 의외로 쉽게 드러나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F-Killer가 있다면 그 만든 총장이 있었을 터이다. 아무리 봐도 총장의 정체는 양동이를 쓰고 장난 같은 헛소리만 늘어놓는 조나단이란 사실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마법소녀가 순결을 잃으면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처럼 과거 최고의 마법소녀이던 딥 블루가 10년 전의 전쟁을 종식시켜주던 이야기에서 그 중심에 조나단이란 사실을 조금 의외였다.

 

아니라면 작가는 복선을 깔아두고 싶었지만, 군입대로 인해 제대로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3권이 2권보다 내용적으로 조금 더 발전한 사유는 악의 조직과 마법소녀의 대립관계에서 과연 악이 무엇인가이다. 혹은 F-Killer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다. F-Killer는 남들이 가지진 행복을 가지지 못한 존재다. 어떻게 보면 흔히 불쌍하다거나 또는 무시당하는 존재다. 자신들의 정체성에서 남에게 폭력과 강제적인 힘으로 이권을 찾는 악당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여 행복하지 않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여기는 소시민적인 가치관이다.

 

덕분에 대놓고 범죄조직 같이 활동하는 악당보다 이런 어중간하고 목표자체가 의미 있는 악당이 더 위험하다고 마법소녀 관리부에서 판단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기존에 활동했던 마법소녀들은 대부분 중고등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존재고, 주인공은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다. 이미 사회적인 불평등 내지 또는 자기희생에 의해 구축된 일상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흔히 인간들은 전쟁 당시의 참혹함만을 기억하나, 막상 전쟁은 끝난 후에 더 잔혹할 수 있다. 누군가 죽는다면 누군가는 살아야 하고, 그 산자들은 기존에 같이 있던 망자들의 몫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라그나로크의 방문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 생각할 수 있다. 라그나로크는 딥 블루의 동기로서 강력하지 못하나 그나마 죽지 않을 정도로 마법소녀 세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베테랑이다. 라그나로크는 마법소녀가 10대에서 끝내야 하나 계속 20대까지 활동하고 있었으며, 악의 조직에 대해 일체의 자비나 용서가 없던 마법소녀다. 이와 다르게 딥 블루의 모습은 술에 빠지고, F-Killer 총수 만나 헤어진 뒤부터 계속 처녀라는 말을 한 것처럼 중간에 일탈적 행위가 있었다. 마법소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 소녀의 순결이란 말도 있다.

 

딥 블루는 그것을 버리고 총장과 단합하여 전쟁을 종결한 대신 라그나로크는 10년 넘게 변신을 풀지 않고, 계속 마법소녀 모습을 활동했다. 자기가 이때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새로운 계기를 찾지 못하고, 옆에 있던 동료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인해 분노가 증오로 바뀌고, 증오가 다시 정의라는 이름 앞에 폭력이 합리화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구해줄 수 있으나 정작 자신은 구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영희라는 소녀로서 새로운 자기 자신을 찾아갔다고 볼 수 있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권을 보면 결국 이 작품의 목적은 성별역할을 전환한 점에서 기존의 마법소녀의 틀을 깨려고 한 부분만큼, 악당이란 불리는 조직은 단순히 악의 조직이 아니라 세상에 악(보기가 좋지 못하거나 왠지 가까이 가기 싫은 존재)적인 존재로 되어야 한 사람들이다.

 

편의점에서 힘들게 일하는 주인공이나, 맨날 게임이나 하는 점장과 승희를 보면서 악당의 정체성보단 그저 소시민적인 자들이 몸부림치는 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쁜 짓이라곤 처음 주인공이 하춘식을 유혹하여 마법소녀의 힘을 잃게 만들려는 수작이었으나, 처음부터 주인공이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작가의 후기만큼 등장인물의 가족이나 과거사들이 제대로 엮어가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제대하면 작가는 다른 소설을 쓴다고 했으니 그때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여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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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여동생이 마법소녀 - Novel Engine
무기상인 지음, hakusai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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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장르를 대해 생각하면,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의 박인하 교수가 학술논문으로 저술한 글이 생각난다. 마법소녀라는 존재는 어린 소녀가 현실에서는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나, 어떤 특이한 조건과 상황에 맞이하게 되면 마법이란 환상적인 힘으로 일상에서 보여줄 수 없었던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로 말하자면 현실의 여성은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비현실이란 환상적 공간에서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장소에서는 그런 논리는 통할 리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을 적들이 존재해야 한다. 마법소녀의 변신은 2가지로서 작용한다. 하나는 현실에서 여성은 아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에 결국 남성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고, 또 다른 특징은 마법소녀라는 존재로 통해 평소 자신에게 부여되지 않은 요소가 부여된다. 작은 소녀가 성숙한 여성의 몸을 가지게 되거나 혹은 의상이 아주 독특하여 남성으로 하여금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이다. 흔한 클리셰 중에 하나가 여자 주인공이 마법소녀로 변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앞에 다가가면, 그 남자는 그 마법소녀에 대해 반한다는 점이다.

 

평소에는 서로 잘 지낼 수 없으며, 여자주인공은 멀리서 바라본다. 즉 변신이란 이름 아래 소녀는 소녀가 아니라 여성이란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그건 남성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 조건 아래서 말이다. 1990년대까지의 마법소녀 장르를 살펴보면 대부분 이런 패턴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법소녀 역시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은근히 욕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에겐 순응적인 여성, 혹은 여성에겐 자신의 성적매력으로 통한 사회적 지위 향상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법소녀 이전의 평범한 소녀이던 여자주인공이 옛날 마법소녀 장르처럼 약하지 않고 오히려 강하다면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이번에 읽어본 라이트노벨인 <나와 내 여동생이 마법소녀>는 기존의 마법소녀 장르를 새롭게 변모하여 나타났다. 물론 마법소녀 장르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 우선 작가인 무기상인부터 일본 만화애니메이션부터 라이트노벨까지 어느 정도 파고들어갔다는 점이다. 남자주인공인 유청명이 남자인데도, 마법소녀의 의상을 입어야 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좀비입니까?>라는 하렘 애니메이션이 생각났다.

 

마법소녀가 아니라 마장소년이 되어버린 좀비 소년은 자신의 주변에 괴기스러운 미소녀들이 찾아온다. 남자주인공이 좀비설정과 미소녀 괴물들이 모이면서 겉으론 괴기와 모험으로 가득하지만, 속은 여전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욕망을 달성하려고 하는 남성이었다. 일단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멀리 내쫓고, 형제인 헤라와 결혼한 것도 모자라 수많은 여자들을 범한다. 단지 제우스는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면, 하렘계통 작품들은 주인공이 가만히 있어도 온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망각 속에 정신적 자위는 착각의 자유라는 말도 있겠으나, 결국 그런 작품으로 통해 읽혀지는 것은 한계성이 드러날 뿐이다. 어째든 그런 작품이라도 <나와 내 여동생이 마법소녀>에서는 열심히 패러디로서 차용한다. 게다가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에 나오는 남매처럼 오빠는 늘 여동생에게 무시만 당하고, 심지어는 심한 꼴을 당하기도 한다. 게다가 같은 반에는 마이 페이스인 미소녀 세별이의 등장까지 말이다. 작품에서 원래 마법소녀로 등장하는 루다의 입을 빌리자면 주인공의 여동생인 유아영은 츤데레라고 한다. 겉으로 심하게 차갑게 굴지만 속은 엄청 부끄럽고 좋아한다고 말이다.

 

라이트노벨 표지에서 보다시피 아영이란 인물은 마법소녀의 의상을 입었지만, 뭔가 특이점을 볼 수 있다. 보통 트윈 테일이란 헤어스타일로 등장하는 마법소녀는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일단 주인공 캐릭터가 표지에 나왔으니 그 모습을 분석하면, 원 피스에 고등학생치고는 제법 큰 가슴의 위 부분이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어깨부위에서 손목까지 연결되는 상의, 그리고 무릎 위에까지 올라오는 부츠, 마법소녀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트윈 테일과 부츠 끝에 날개가 달려있다.

 

하지만 마법소녀에 가까운 복장보다는 오히려 총잡이인 건너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런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역시 왼손에 매그넘 모양의 권총이 잡혀있다. 최근에 들어 마법소녀의 무기는 상당히 변해온 것을 알 수 있다. 본래는 마법 봉이나 지팡이에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처럼 칼이나 창, 그리고 활을 사용하고, 심지어는 m-16이나 수류탄도 사용한다. 그런데 아영이는 권총을 들고 있고, 화가 나면 기관총을 들고 싸운다. 사실 총과 칼이 마법소녀 입장에서 중요한 위치가 있는 이유는 본래 칼이나 총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의미한다.

 

그러니깐 여자가 여자로서 그냥 있기보다는 여자가 남성으로서 있고자 하는 것이다. 성적인 요소로 들어가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르게 본다면 남성이 가진 권력을 이제 여성이 가지고 있겠다는 의미도 같을 것이다. 그런 요소는 작품 내에 다분한 모습을 보여준다. 원래 과거의 마법소녀들은 평상시에는 매우 귀엽고 순종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아영이는 순종적이거나 혹은 고분고분한 모습이 아니다. 나이 20세 이전까지 애인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뛰어난 외모인데도 남자축구모임에서 활약할 정도로 매우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다.

 

최근의 마법소녀 장르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성적인 구조는 달라도 신체적인 조건과 정신적인 조건 더불어 사회적인 조건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남성보다 더 우월하여 남성의 위에도 군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동생인 아영은 오빠인 청명보다 문무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상당히 인간관계도 좋다. 이에 반해 오빠인 청명은 2D 소녀에게 푹 빠진 오타쿠란 존재다. 물론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등장한 오타쿠와는 조금 다른 개념일 것이다. 적어도 1982년의 오타쿠는 상대방을 가리키는 의미이나, 현재의 오타쿠는 청명처럼 인간실격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실제 아영은 오빠가 롤리타 콤플렉스라고 하면서 변태 취급을 한다. 게다가 오빠가 전혀 되면 안 될 마법소녀가 되면서부터 더 곤란해진다. 마법소녀 장르에서 남자에게 환상의 세계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금기였지만, 이제는 오히려 남자가 환상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오타쿠라는 존재도 있지만, 청명이가 2D 로리(어린 소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옆에 있던 아영이란 존재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가령 <가와이이 제국 일본>이란 책을 보면 가와이이라는 것은 단순히 귀엽다는 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다.

 

만일 여자가 아주 괜찮다면 남자들은 우츠쿠시(아름답다) 내지 키레이(예쁘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와이이는 단순히 귀엽다는 것을 넘어 자신의 손에 의해 지켜줄 수 있거나 혹은 소유하고픈 욕망이 드는 대상을 가리킨다. 아영이란 여동생은 이미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슈퍼우먼이었고, 이어 등장하는 7세 기계소녀인 여리 역시 강력한 힘을 가진 어린 소녀다. 도저히 청명에게 여동생이나 여리에게 가와이이 즉 귀엽다고 여길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안하고 잠을 자는 여리라면 모른다.

 

주변 동급생인 세별이의 경우, 그녀는 분명 외모도 출중하고 스타일도 좋으나, 마이 페이스에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보자면 <나와 내 여동생이 마법소녀>에서는 평범한 사고방식을 지닌 등장인물은 없다는 점이다. 물론 라이트노벨에서 특이한 인물을 내세우거나 혹은 특이한 상황을 설정해야 이야기가 흐르고, 재미를 줄 수 있다. 그렇지만 왜 모든 사람들에게 특이한 속성과 일반적이지 못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청명이로 보는 세계관은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나 속으로 뭔가 자신의 취향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예전의 마법소녀 장르라면 대개 주인공은 옆에 좋은 친구나 다정한 부모님이랑 보내는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탈근대적인 현대사회에서는 인터넷의 발전과 개인 사생활의 중요성으로 가족과 학교라는 공간의 커뮤니티가 단절되기 시작했다. 주인공 역시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즐기고, 세별이는 인간형 인형을 고르는 것을 좋아하고, 아영이도 토끼 인형이나 곰 인형을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아영이의 팬티가 곰이 새겨진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여중생이나 여고생이 되지 않아 그런 말을 하기가 그렇지 않을까 하나, 적어도 그런 속옷은 사춘기 이후부터는 착용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특히 생식기가 도래하는 제2차 성징기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이 아직 어린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즉 몸은 점점 커지는 만큼 자신이 초등학생 같은 어린이로 취급당하기를 거부하는 점이다. 문제는 여동생은 고등학생이 된 점과 신체적으로 이미 거의 성숙한 점을 본다면 어린아이보단 오히려 어른에 가깝다. 오타쿠인 오빠와 달리 우등생인 그녀에게 탁월한 이성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곰이 새겨진 속옷을 입는 점은 아직까지 정신적으로 보자면 마음 속 깊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있다는 점이다.

 

평소 오빠를 두고 인간취급도 하지 않은 아영이가 은근히 어떤 상황에서 집착을 보이고, 때에 따라서는 매우 부끄러워한다. 별로 부끄러울 상황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세별이와 만남은 조금 의미가 있다. 둘 다 인형에 대하여 안목이 높다는 점과 때에 따라서는 상당한 콜렉터라는 점이다. 또 그게 서로간의 인격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특히 아영이의 경우, 그녀는 분명히 마법소녀지만, 기존의 마법소녀는 어린 소녀가 어른여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그녀는 반대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리가 적에서 어느 순간 적이 아니게 될 때의 모습이다.

 

여리에게 옷을 입히는 아영은 마치 여리를 인간이기보단 살아있는 인형으로서 옷을 입히는 모습이었다. 즉 자신이 인형을 제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어도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 없었으며, 대신 자신이 인형 같이 꾸미고 싶어도 꾸밀 수 없기에 여리로서 욕망을 대체한 것이다. 이와 다르게 세별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형이 여자형인데도 남자라고 한다. 인형이란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소유물처럼 집착한다. 이쁜 것은 남자인형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주변에 있는 동급생 여자보단 자신의 소꿉친구인 청명이가 더 소중하고, 청명에 대한 소유욕이 인형으로 대체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법소녀의 욕망이 아직 어린 여자아이가 어른이 가질 수 있는 특권에 대한 동경이라면, 여기서는 마법소녀들로 통해 욕망이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 시작되지 않은가 싶다. 청명이는 2D라고 하나 결국 어린소녀를 원하고, 다 큰 아영은 아직까지 곰이 새겨진 속옷을 입고 다닌다. 두 남매가 지금은 서로 원수처럼 지내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예전처럼 잘 지내고 싶다는 게 드러날 뿐이다.

 

또한 마법소녀 하면 선과 악의 이분법이 중요한 플롯인데, 여기서는 그 플롯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선의 사도여야 할 루다는 의무감도 없고, 악의 존재인 여리를 가지고 노는 모습만 나온다. 아니 오히려 여리가 아영과 청명을 위기에 빠지게 하자, 여리를 공격 후에 치료까지 해준다. 악의 역할로서 여리가 등장해도 여리는 자신의 의지로서 악의 역할을 맡은 것이 아니라 로이드라는 자에 의해 억지로 인스톨이 되었기 때문이란 점이다. 게다가 루다는 마법소녀이면서도 청명에게 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단 그저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여준다.

 

적과 아군이 원래 그래야 하는 이분법적인 요소는 해체되어 버렸다. 최근에 들어와 많은 작품들에서 이분법적인 요소가 해체된 만큼 마법소녀 장르 역시 해체되는 형태를 보여준다. 정의라는 절대적 가치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절대적이지 못하거나 그게 더 가치로서의 존립하기가 어려워진 셈이다. 게다가 마법소녀가 소녀의 것이 아니라 소년에게도 부여되었다. 그러면서 루다는 이렇게 말한다는 마법소녀는 소녀이든 소년이든 중요하지 않아 라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겠지만, 작가가 받아들이는 세계에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청명과 아영을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이것을 본 우리는 남자가 불행해서 세상이 불행질 것이라 보지만, 중요한 것은 남자가 불행해도 여자가 불행해지고, 여자가 불행지면 남자도 불행해진다. 남자주인공의 불행이 결국 여동생의 불행이 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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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소년 6
임진주 지음, 임애주 원작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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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소년> 시리즈가 단행본으로 출간되면 나는 대략 10권 정도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까지 등장인물 중에서 도대남을 비롯하여 안승호 같은 남자들이 등장한 만큼 더 등장할만한 독특한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나의 기대와 달리 이번에 보인 <금지소년> 6권은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연재종료가 되었다. 만화책을 끝까지 읽은 후에 작가의 후기에서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약 2년이란 시간동안 선보인 <금지소년>의 종료는 그저 임애주, 임진주 자매의 다음 작품에서 좋은 성과를 보여주길 바랄 뿐이다.

 

작품의 종료되었지만, 작품에 대한 그 자체적인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갈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6권에서 전혀 끝나기가 전체적인 서사에서 어울리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주말에 포푸리 카페에서 포푸리소녀로 활약하는 나운이의 모습이 그렇게 억지로 흘러가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작가가 보인 개그요소는 상당히 기발한 위기모면과 엽기적인 상황 그리고 나운이의 동생인 나솔이의 음흉한 속내였다. 그런 조건들이 붙어있었기에 <금지소년>의 재미는 충분히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금지소년> 6권에서 그런 무리한 종료라는 무리수는 이야기 흐름이 억지스럽게 만든 만큼 마무리가 다소 어설프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만화라는 작화구조에서 본다면 <금지소년>은 기존 한국만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을 부여한 것 같았다. 아니 일본 만화책에서도 그렇게까지 표현하지 못한 요소도 보였다. 작품을 보면 만화 칸과 칸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보이는 클로즈업 장면이 매우 인상 깊었다. 만화 1칸에 들어가는 얼굴의 표정이 아주 풍부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부자연스러운 인물은 마은성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나운이와 신류아의 표정이 가장 두드러진 것 같았다. 이야기의 전개로 풀어나가는 것이 어려운 만큼 작화에서 많은 노력이 보인 것이다. 수영장에 입수하는 비키니의 신류아가 물에서 나온 후의 머리모양이 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은성의 만남에서 옛날 생각을 하면서 나운이와 대화하는 신류아의 표정은 매우 풍부했다는 점이다.

 

1권부터 생각해본다면 전형적인 포커페이스로서 겉은 요조숙녀인 인기만점 여학생이나 속은 매우 오만하고 냉정하다. 그런 신류아가 나운이의 만남과 더불어 점점 사람이 바뀌어가는 것이 이 이야기의 전체 흐름이다. 신류아의 회상과 신류아 자신에 대한 고백에서 그녀는 본인을 자각한다. 옆에 아무도 없는 화려한 자신의 모습에서 진정한 친구들을 찾았다는 점이다. 진짜 친구는 도저히 비켜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몸과 마음을 던질 수 있는 것을 말이다.

 

공주와 기사에 대한 관계에서 <금지소년>은 공주(신류아)와 공주(포푸리 소녀), 혹은 로미오(신류아)와 줄리엣(포푸리 소녀)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분명 남녀의 신체적인 성적인 구분이 되어 있으나 사회적인 위치에서 보이는 행동에서는 남녀의 자리는 서로 뒤바뀌기도 하나 원래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포푸리 소녀는 계속 포푸리 소녀로 남아있어야 했다. 포푸리 소녀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신류아의 선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은 포푸리 소녀가 마은성의 싸움에서 쉽게 들킨 것이 아이러니했지만, 변태로 몰린 나운이를 위해 신류아는 은성에게 “남들이 뭐라 하든 저 녀석은 제가 본 남자들 중에서 가장 멋진 남자예요.”라고 한다. 남자 중에 남자, 가장 멋진 남자라면 남자의 가치는 도대체 어떤 것에 의해 매겨질 수 있을까? 부유한 영애인 신류아와 가난한 고학생인 나운이의 관계에서 작품은 처음에 온달 콤플렉스(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반대어로 여자가 신분이 낮지만 남자가 여자에 의해 성공하는 남성의 욕망)로 이어가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결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운이는 그 어떤 경제적인 조력을 신류아에게 받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아르바이트로 통해 받은 티켓이나 쿠폰으로 신류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신류아가 부유한 집안의 영애일뿐, 신류아라는 인간 그대로 봐준 것이다. 물론 신류아가 긴 검은머리와 날씬한 키와 멋진 몸매를 가진 아이돌 같은 소녀다. 과거의 가족에게 있던 비극이나 혹은 남에게 미움을 산 것을 생각하면 신류아는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무의식 속에 뿌리박힌 공격적인 태도, 항상 신류아는 나운이에게 강압적으로 행동했다.

 

사디스트적인 신류아, 마조히스트적인 나운, 하지만 두 사람이 깊은 공감이 이루어진 이유는 서로만이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들러붙은 남자를 벗어나기 위해 포푸리 소녀가 필요한 신류아, 어느 순간 나운이에게 의존하는 순간, 신류아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의존하고 친절을 베풀게 된 것이다. 스스로의 벽에 가두어 외톨이이던 신류아가 세상과 이어지는 교량은 포푸리 소녀인 점에서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고, 인간은 서로 위로해주는 것으로 삶의 기쁨을 얻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항상 웃거나 놀 때만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 드러낼 수 없는 깊은 좌절과 허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사람을 말이다. 물론 신류아만이 그런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언제나 학업과 아르바이트, 그리고 동생을 돌본다고 자신의 삶에 아무 것도 없던 나운이는 신류아라는 검은 태양을 만나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작품은 전형적인 서사적인 패턴이 정해져 있기에 다서 진부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책을 보면서 작가가 패러디(풍자적 모방)나 페스티쉬(유희적 모방)를 잘 넣은 것이 보인다. 가령 포푸리 소녀의 월급이 없어진 것에서 <명탐정 코난>이란 만화를 인용하고, 포푸리 소녀가 항상 두 손에 음식을 들고 가는 것은 <란마 1/2>에서 샴푸라는 소녀가 음식을 들고 가는 모습이 생각난다. 생활형 개그에서 도대남의 집에 가서 누가 더 구두쇠인지 겨루는 장면도 많이 나올 것 같은 설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작화를 보면, 포푸리 소녀가 분명 여장남자이라도, 완벽한 여자의 몸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1권부터 시작하여 6권까지 지켜본다면 포푸리 소녀의 골반은 남성의 형태가 아니라 여성의 형태로 계속 작화되어 왔다. 작가의 작화에서 포푸리 소녀 이외에 정상적인 수영복을 입은 남성들은 일반적인 남성들처럼 다리형태가 일자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용인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은성에게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서 힘겨워하던 나운이 앞에 신류아가 나타날 때, 2사람은 옆에 있지도 않은 포푸리 소녀의 모습을 본다.

 

포푸리 소녀는 나운과 신류아의 손을 서로 잡고 둘의 관계가 계속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자로서 나운이는 또 다른 자아인 포푸리 소녀의 존재를 받아들인 점에서 남성성 안의 여성성은 존재해야만 했다. 그런 성적인 위치에서 포푸리 소녀가 마은성을 비롯한 옆에 있던 남성들에게 강한 유혹을 왜 펼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작가분들이 특이하게 여겨진 것은 신류아가 로미오 복장을 할 때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 기개를 보여준 것처럼 포푸리 소녀는 여자보다 더 여자다운 유혹으로 다른 남자들을 유혹한다.

 

남자가 생각하는 여자란, 바로 남자가 바라는 여자이기 때문에 포푸리 소녀는 충분히 남자가 좋아할만한 행동으로 남자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설정에서 작가가 바로 자매라는 점에서 다소 과감한 표현을 했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 작가의 과감한 표현력은 6권 맨 뒤의 후기 2번째 편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운이의 꿈에서 나운이는 여자가 되고, 신류아는 남자가 되어 행복한 커플 모습으로 나온다. 악몽에서 깬 나운이는 안심하나, 꿈에서 등장한 커플은 “후후후 꿈이 아니지롱” 하며, 반전을 이어간다. 작가는 내심 남녀의 입장이 바뀌거나 혹은 백합 또는 BL장르가 은근히 내비추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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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2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6-12 23:09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2 - Seed Novel
맑은날오후 지음, 토브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2권을 읽은 후에 예전에 이 책의 1권을 서평 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서평에서는 내가 적은 것도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적은 글도 있었다. 거기서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나도 나름 의문이 든 것이 하나 있었으니, 주인공 론이 아주 강력하고 무서운 힘을 가졌는데, 그는 왜 용사예선대회부터 실격 처리 되었는가 이였다. 전반적인 서사를 훑어보면 그의 탈락과 마왕 루리를 만나 린을 비롯한 용사일행을 만나도 그는 약한 탈락자가 아니라 용사 린조차도 은근히 능가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2권을 보면 더욱 그런 것이, 그의 머리는 금발과 파란 눈을 지녔지만, 론의 동생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론은 분명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였다. 검정이란 색은 아무 것도 없는 무의 공간이기도 하고, 무의 공간이 있기에 유의 공간일 수도 있다. 그가 가진 어둠의 세계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나 모른 것을 무로 만들어버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즉 무(無)로 향한 강한 힘의 유(有)였다. 그가 처음에 어이없는 패배의 순간, 그것은 이 작품이 내세우고 있던 설정 중에 하나고, 복선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이런 부분이 조금 마이너스로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권 후반부에 다소 이런 의문요소에 대한 복선이나 암시를 주었다면 1권에서 보인 부정적 의견에 대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으나, 1권 분량에서는 도저히 그것을 찾지 못했다. 2권에서 그나마 찾은 것이 다행일 수가 있겠지만, 2권에서 암시가 노출된 점에서 서사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한 게 된 것이다. 작품에서 본다면 “인간은 시간적 존재이다”라는 말과 함께 론의 존재는 시간적인 진행이 다른 곳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금 루리와 여행 중인 세계에서 론은 루리와 동행하는 마왕의 기사이나, 이전의 병렬세계였던 공간에서는 론은 그 자리에서 용사가 되어 루리의 언니인 루나와 더불어 마왕국을 무너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용사로 되었던 론은 마왕을 쓰러뜨리지 않았고, 대신 마족들의 영역에 있던 루나는 킹 울프에게 습격당해 큰 부상으로 죽는다. 루리의 죽음을 보던 론은 루리의 육체가 그대로 식는 게 아니라 공중의 빛처럼 사라져 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어떤 사건의 계기, 그 사건은 론의 할아버지와 인피니티 황제의 준비된 예정에 모든 인류는 전멸하고, 오로지 론만 살아남는다. 론은 어떤 수수께끼 인물에게서 마지막 소원으로 자신이 소원은 용사가 되지 않아 이종족들을 살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종족들의 힘은 매우 우월하고, 루리는 마왕으로 억지로 된 소녀이지만, 그녀의 신체적 능력은 보통 인간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이종족과 그리고 이종족들이 있는 마족들의 세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이 세상 모두가 지옥으로 변하고, 용사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파괴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용사라는 존재는 인간의 신화적 욕망에서 태어난 존재다. 즉 인간이 욕망이란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거대한 무의식이란 소망으로 용사라는 이름으로서 대체하는 것이다. 세계를 제패하거나 마왕을 죽이거나 또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여 그 세계의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는 기존 우리가 아는 환타지 문학에서 등장한 마왕․용사가 등장하는 서사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구조를 지닌 서사는 상당히 많이 도출된다. 단지 그것으로 통해 무엇을 보여주는지 또한 무엇을 제시하고자 하는 지가 중요할 것이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2권에서 보이는 서사는 1권에서 내가 지적한 것처럼 인피니티 국가의 황제가 겉으로 용사와 함께 마왕을 제거했기에 위대한 왕으로 보이나, 그 뒷면에는 상당히 위험한 일을 꾸미는 점이다.

 

론의 할아버지인 48대 용사는 자신의 손자에게 매우 좋지 못한 것을 강요한다. 그것은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전체주의라는 파시즘은 결국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인종, 국가, 사회, 존재 등을 하위부류로 보고 그들을 억압하거나 탄압한다. 또한 자신들이 배척한 존재에 대해 하나의 악적인 존재로 부여하여 집단 자체적으로 하나의 광기가 형성되어 그 광기가 마치 정의로운 가치관으로 대체된다. 군중심리학적으로 나치독일 시대에 히틀러의 주요참모인 괴벨스가 선전한 방법 역시 그렇다. 인간의 도덕성의 유무에서 괴벨스가 외친 방법들은 매우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에는 크리스천들이 많았으며, 그것도 아주 독실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잔인한 소장인 아이히만의 경우 그는 아주 냉혹한 사람도 아니고 매우 평범했다. 단지 그는 관료주의적인 사고에 의해 매우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선택에 의해 학살을 했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키는 파시즘이란 결국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의 기계 내지 병기 그리고 그 자신마저도 도구로 전락한다. 론의 꿈에서 나온 또 다른 론은 아마 그런 가치관에 의해 자신이 모든 것을 제패했겠지만, 결국 자신의 최고의 적은 본인의 모습이었다. 용사란 세상을 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파괴하고 많은 사람과 생물들을 비탄의 나락으로 끌고간 것이다.

 

이때 등장한 의문의 인물은 과거에 인간을 비롯하여 세상을 만든 창조신이라고 한다. 그는 인간에 의해 그 신의 자리에서 떨어져 그저 방랑하는 나그네가 되었다. 마지막 힘으로 론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것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주입한 가치관을 고수한 론이 아니라 다른 가치관을 가지기로 결심한 론이었다. 처음에 루리를 지키기 위해 누구라도 벨 수 있고, 심지어 용사일행들과 유대조차 맺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린과 티나, 스팅과 이래저래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전혀 원하지 않은 길을 걷게 되는 론, 하지만 그 론이 만약 원하지 않은 길을 걷지 않았다면 최악의 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작품에서는 다른 길을 선택한 론이었기에 다른 시련을 준다. 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론은 세상과 적이 되어야 했고, 자신의 할아버지와 인피니티 황제의 기대를 배신했다. 특히 론의 할아버지인 48대 용사는 매우 특이한 존재다. 그는 나이가 이미 60살 정도이겠지만, 외모는 30대의 건장한 남성이다. 그가 어떤 힘으로 그런 모습을 유지하는지 모르지만, 할리 가문 대대로 수명이 긴 점과 48대 용사인 론의 할아버지는 황제와 더불어 붉은귀 여우족을 잔인하게 토벌할 정도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

 

론이 상대해야 하는 대상이 모호한 설정이 된 것이다. 론의 아버지는 론이라는 린이라는 용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아들을 두었지만, 론의 아버지 본인은 용사의 길 대신 포도주를 만드는 일을 선택했다. 론의 아버지보다 오히려 론의 어머니가 더 강한 힘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론의 아버지는 용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용사가 되는 길을 포기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론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론의 할아버지)에 의한 거세공포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서로 대적할 수 없기에 론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론의 할아버지)와 아들(론)하고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론은 론의 아버지를 오이디푸스왕 이야기에 나오는 라이오스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라이오스는 이제 론에게 론의 아버지가 아니라 48대 용사가 라이오스로 되어야 했다. 그 이유는 론은 이제 자신의 할아버지가 주입한 인생관을 따라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삶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외모적 관찰에서 론의 할아버지는 론의 아버지와 유사한 나이로 보인다. 그리고 론이라는 반영웅이 인피니티 국가의 영웅의 동료이며 지배자인 황제와 대립해야 한다. 그래서 1권부터 내가 지적한 것처럼 새로운 서사로서 론은 오이디푸스 혹은 오디세우스가 되어야 했다. 기나긴 여정에서 그가 가고 싶은 곳은 왕이나 용사의 권좌가 아니라 그저 루리와 같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일상이었다.

 

일상으로의 초대가 결국 론에게 주어진 최후의 과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간단한 모험이 될 수 없었고, 심지어 완료한다고 해도 장수족의 소녀인 루리는 수 백 년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 반면 인간은 100년도 살지 못하는 종족이다. 종족 간에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은 존재하기에 론에겐 또 다른 고민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남녀의 관계를 넘어 인류라는 거대한 존재로서 다른 종족과의 대립과 마찰이 어떤 세상으로 이어져 가는가에서 마족의 멸망은 결국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의 균형이 붕괴되고, 그 붕괴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이종족이나 인간까지 위험요소가 된다.

 

마족이나 이종족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황국의 군대 앞에서 인간들이 정복지가 인간이 아닌 미확인의 자연이라면, 그 자연이 정복되는 경우, 인간이 정복하는 대상은 결국 인간 그 자체다. 인간의 이분법적인 논리에 의한 서사전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해오던 cliche이다. 정해진 패턴과 틀에서 인간은 서사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보다 하나의 소재 내지 모티프, 또는 등장인물에 대한 매력이다. 모두 달라 보이나 결국은 같이 되는 것은 스토리텔링의 결말이지만, 그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결론을 같을지 몰라도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다르고, 과정 내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사건으로 통해 무엇을 보는 것이다.

 

인간의 시간은 비가역적인 것이나, 이야기로 만들어진 서사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비가역적인 시간도 가역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시간도 있다. 단지 그 가역성을 따지는 이야기에서 독자는 이야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물리적인 비가역적인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래도 물리적인 시간은 흘러가도 이야기를 읽은 후 머리에서 진행되는 이미지는 시공간을 초월한다. 결국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 비가역적인 존재인 론이 어떤 인물을 만나 과거로 돌아가는 점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등장은 이 이야기가 서사 내에서 2번째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분명한 사실이다.

 

운명을 절망의 끝에서 거부하던 론의 마지막 절규에서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는 이분법의 논리로서 용자 VS 적이라는 구도를 넘으려 한다. 그리고 그 운명이 공간에서는 론만이 아니라 린, 스팅, 텐드, 티나, 그리고 론의 여동생까지 휘말린다. 게다가 과거 용사를 죽게 만든 하얀 마녀의 미스터리, 전반적으로 이번 2권을 보면 발달을 지나 전개라는 서사적 흐름이 보인다. 그러나 그 전개는 아직까지 발단에 가까운 것 같다. 아직 등장인물들이 완전히 모이지 않았고, 그 등장인물이 모두 모인 상태에서 론의 할아버지가 준비한 거대한 위기가 봉착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론이 선택한 결과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등장하기 이전의 론이 선택한 결과는 서로 다르게 전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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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비평지 엇지 1 - 창간호
만화문화연구소 엇지 엮음 / 팬덤북스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라이트노벨이란 서브컬처 콘텐츠를 즐기는 입장에서 항상 많은 고민에 놓여있다. 내가 서브컬처에 흥미를 느끼고 빠져있다고 하여 대중문화에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다. 물론 대중문화에 특별히 관심은 없지만, 적어도 문학소설이나 인문사회 도서 정도는 챙겨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바라보는 게 타당한가? 라는 의문은 예전에도 그러하거니와 지금도 그렇다. 철학과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을 도서관에서 두 번이나 빌려 읽으면서 과연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우리가 아는 유치한 세계로 바라보는 것이 옳은가?

 

혹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기존 우리 사회가 알고 있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저렇게 낮은 대우를 받을 이유가 있는가? 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만화라는 것이 단지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을 바라지 그 이상으로 상상으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2013년 8월 부천에서 BICOF라는 국제만화축제가 열렸다. 당시 나는 VIP로 새겨진 표찰을 차고 만화규장각을 돌아다녔다. 만화규장각에서 각종 학술세미나 내지 전시회에 참석했고, 당시 행사에서 가장 큰 <설국열차>를 영화로 보았다.

 

감독을 맡은 봉준호와 <설국열차>의 원작가인 프랑스 만화가 2분이 오셨다. 실상 만화와 영화를 보면 조금 다르지만, 추운 빙하기에 열차가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은 동일했다. 만화라는 것이 영화로 대두되고, 그 영화가 성공하면 원작인 만화는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그 가치를 알아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사람들은 복잡하게 어렵게 깊게 생각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된 영화도 그러하지만 소설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기 위해 이야기를 듣고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러 말이다.

 

Story-Telling의 도입에 따라 인간은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을 위해 생각한다. 관념 속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인가? 언어로 나오는 그 단어에서 관념으로 쏟아져 나오는가? 이야기라는 게 인간의 이성에 의해 발달되나 한편으로 무의식적인 사고에 의해 나오기도 한다. 따라서 그런 인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다시 돌아보는 것이야 말로 인간 그 자체를 알아가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화에 대한 담화에서 만화는 인간의 입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나 인간의 상상력에서 기반하여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가 등장하고, 그 세계는 우리하고 너무나 멀어 전혀 다른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만화라는 환상적 공간은 바로 현실의 세계를 다른 식으로 왜곡하여 그 자체로 현실이 아닌 것처럼 속여 현실을 고발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 만화분서갱유사건은 우리의 상상력을 죽이고, 더나가 지금의 문화산업을 죽이는 역사적 기록이 되었다. 문화산업이 중요한 것은 우리는 더 이상 기계화로 이룩한 산업사회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한계점이 도달한 것이다. 이 많은 상품들은 단지 소비되고 생산되나 더 이상의 가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상품에 스토리를 입히기 시작했으며, 상품은 곧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재창조된다. 이야기의 창조는 인간의 상상력이다. 단지 그 상상력은 자유로운 표현력에서 시작되고, 독자는 상상력을 소비함으로 즐거움을 찾는다. 하지만 즐거움만을 찾는 것이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작품에 대한 사유와 판단 역시 즐거움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한국 만화를 어찌하면 좋고, 더 나아가 한국의 만화비평 어찌하면 좋을까 라는 만화비평지 <엇지>를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다양한 생각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여 이때까지 만화비평 관련 도서를 몇 권씩 읽었기는 했으나, 최근 <엇지>만큼 다양하게 심도 있는 책은 많이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전에 읽은 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학부에서 제작한 <만화비평> 시리즈와 뭔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다소 아까운 점은 <만화비평>이나 <엇지>나 모두 만화가 내지 만화학과 교수들의 관점이 중심적이고, 소비자의 관점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나 역시 리뷰를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 입장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비평은 비평일 뿐, 비평의 가치에서 타인에게 잘 보이려는 모범답안만 추구하는 것보다는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하나의 강의한다는 기분으로 주제를 정하여 작품이 가지는 의미와 목적을 찾아 하나씩 풀어가는 것이 글 적는 방향으로 전환했지만, 기본적으로 작품의 근본을 찾아가는 것이 내 목표다. 그런 점에서 <엇지>에선 상당히 공감 가는 말이 나온다. 만화이론가이신 박세현님 사회를 주관하는데, 이때 사회자의 의견이 참 와 닿았다.

 

“한국 만화계에서 비평가, 평론가를 찾아본다면 누가 있을까? 채 몇 명을 꼽기 어렵다. 영화나 문학 등 다른 예술 장르의 비평에는 - 흔히 말하는 데뷔나 비평가로서 등단하는 - 길이 많다. 하지만 우리 만화계는 공식적인 체계가 없어졌다. 1990년대 중반에는 <스포츠서울>의 만화평론상이 만화평론가의 공식등단을 마련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애기하는 걸로 스스로 평론가가 되거나 소수매체를 통해 몇 개의 리뷰를 게재하는 것이 전부다. 이제 만화비평문화를 돌아볼 때가 됐다. 자칭 비평가나, 타칭 평론가나, 귀위의 문제나, 또는 제도권이나 비 제도권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만화비평문화에 대한 체계화의 문제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학생들에게 만화를 가르치는 교수님이 다른 분들에게 나를 만화평론가라고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정식으로 만화평론가는 아니나, 만화리뷰를 적은지가 이제 5년이 넘고, 만화리뷰를 단순히 리뷰 하는 사람으로 지나 하나의 비평으로 접어든지 3년이 넘었다. 서브컬처 콘텐츠에 대한 리뷰를 적기도 하지만 서브컬처라는 문화에 대해서도 적어보기도 한다. <엇지>에서 보면 참 공감 가는 것이 만화라는 매체가 단순히 아이들 놀이나 Killing-Time 용이 아니라 미학으로서 충분히 펼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부분은 여러 차례 강연이나 도서로 통해 확인한 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화라는 것으로 통해 어떻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단지 인터넷에 몇 개의 글을 올리는 것을 두고, 평론과 비평이란 말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점이고, 만화라는 것이 단순히 만화 안에서 갇혀있는 게 아니라 만화로 통해 무엇을 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만화 안에 담론할 수 있는 것들은 정말 많다. 환상으로 가려진 세계이기에 그 환상의 눈 뒤로는 은밀한 현실이 있고, 그 현실에는 여러 가지 단면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만화가 종이책이 아닌 인터넷으로 통해 웹툰으로 등장하면서 만화는 재미만 보는 어린 학생들을 위한 장르가 아니라 전 국민이 즐기는 오락물이 되었다.

 

하지만 조금 걱정하는 것은 웹툰 작가의 현실이다. 그들의 웹툰은 공공성이란 이름 아래 제대로 된 대가를 받을 수 없고, 그들의 어려운 여건은 다양한 만화문화에 벽으로 가리게 한다. 웹툰의 가능성이 누구나 그리고 올리고 누구나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만화라는 것이 어느 순간 일상적인 공간에 우리에게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리뷰는 잘 올라와도 만화는 그렇지 못하다. 만화가 너무 간단하고, 다른 매체에 비해 그 정보전달력의 난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화에 대하여 비평한다는 것은 쉽게만 보이는 것에 가려진 의미를 찾는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런 숨바꼭질 놀이에서 숨은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만화평론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사철학>의 내용에도 나온 것처럼 어떤 유치한 이야기도 찾아보면 철학적인 요소가 없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혹은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점점 생장해 가는 작품을 비유적으로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라고 본다면, 해설자는 마치 화학자처럼 그 앞에 서 있고 비평가는 마치 연금술사처럼 그 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해설자의 경우에는 다지 나무와 재만이 그의 분석의 대상이 된다면 비평가의 경우에는 그 불꽃 자체만이 하나의 수수께끼,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것의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따라서 비평가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지나간 것)의 무거운 장작더미와 체험된 것의 재위에서 아직도 살아서 타오르고 있는 생생한 진리를 물어 보는 데 있다(372~373페이지 <비평개념과 예술개념>).”

 

만화는 죽어 있는 존재가 나오는 곳이고 만화를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은 살아있지 않은 존재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움직인다. 만약 만화평론을 한다면 애니메이션 역시 비평을 하는 것이 바르고, 그것은 마치 살아있지 않은 생물에 대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듯 그것이 계속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듯 활력을 넣어야 하는 것이다. 도저히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가려진 인식과 틀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전에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해외의 유명한 영화감독이 작품을 내면 비평가 10명이 붙어 같이 작품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0명의 감독이 작품을 내도 소수의 비평가들만 의견만 낼 수 있다. 그 만큼 비평문화라는 것이 열악하기 짝이 없다. 비평이란 것은 어느 대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통해 의견을 내는 것이다. 그런 비판의 기초가 되는 것이 세상을 보는 힘일 것이다. 만화를 계속 연구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세계에 자리 잡은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그것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이성과 지성을 펼치는 것도 쉬운 세상도 어렵지만, 자유로운 표현조차 과거의 만화분서갱유라는 악령이 다시 찾아올 것 같은 시대인 것 같다. 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학과에서 제작한 <만화비평> 2번째에서 이한열 만화상에서 수상한 작품을 실었다.

 

이한열이란 사람은 본래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연세대학교 만화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그는 지난 6월 항쟁을 촉발이 되게 한 인물이다. 이한열의 민주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만화라는 매체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볼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것도 그의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엇지>에서 만화평론가 박석환 교수님이 웹툰에 대한 편을 집필하면서 영화 <변호인> 장면이 나온다. 영화 <변호인>의 감독은 웹툰작가 양우석이고, 영화 <변호인>을 보면 마지막에 송변호사가 서울대학교 학생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두고 집회하는 모습이 나온다. 만화와 민주주의라는 설정에서 부자연스러우나 만화라는 매체는 항상 억압을 받은 매체다. 만화비평 <엇지>에서도 그런 사회적 억압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한국만화문화와 만화비평체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만화문화 <엇지>하오리까라는 의문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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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5-27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한열 열사가 만화동아리 학생이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엇지'라는 잡지가 잘되었으면 합니다. 한국 만화가 좀 살았으면 좋겠어요.

만화애니비평 2014-05-27 13:51   좋아요 0 | URL
오덕으로 그러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