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 마왕의 결단 1 - S Novel
미즈구치 타카후미 지음, 이재경 옮김, 나베시마 테츠히로 그림 / ㈜소미미디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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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 마왕의 결단>을 읽기 전에 먼저 생각나던 도서가 제임스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이었다. 왜 많고 많은 책 중에 황금가지인 이유는 마왕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게다가 책을 사기 전에 마왕의 딸이 인간계에 찾아온 이유는 역대 마왕의 힘을 가진 「질리언․디마이즈」를 찾기 위해서다. 과거 마왕의 딸은 2명이 있었다. 1명은 주인공 에모토 코키의 할머니인 아크마리나, 그리고 다른 1명은 이 작품의 히로인로 등장하는 에밀리다. 그런데 왜 황금가지가 생각나는 것일까?

 

에밀리의 아버지는 마족세계에서 아주 강력하여 모두에게 두려움을 사던 최공최악 마왕 갈무트 일솔저 어셈블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등장한 마왕은 그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으로 인자한 말투에 상냥한 행동, 그리고 마왕이라고 보기에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선량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무서운 마왕이란 점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조차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그의 무서운 능력은 과거 초대 마왕과 더불어 유일하게 「질리언․디마이즈」를 사용하지 않은 마왕이다. 그만큼 그가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왜 「질리언․디마이즈」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를 내 개인적으로 추론하자면, 선대마왕인 갈무트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거나 혹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무슨 사단이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황금가지>에서 북유럽 네미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숲속에 칼을 들고 있는 남자 미친 듯이 주변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른다. 그가 지르는 이유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오는 도전자를 물리치기 위해서다. 도전자가 그의 칼에 쓰려지면 그의 자리는 계속 지속되는 것이고, 상대방의 칼이 그를 베면 그는 왕이라는 권좌에서 내려온다. 마왕 갈무트의 모습은 마치 왕의 자리를 놓고 싸우던 한 늙은 왕의 모습과 같다. 그는 이때까지 가장 많은 마족을 학살했고,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인간세계에 와서 딸인 에밀리와 딸의 손자인 코키를 찾은 왕의 모습은 영락없는 평범한 노인이고, 학교수업 참관까지 할 정도로 다정한 분이다. 그런 다정한 사람이 왜 죽음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는가?

 

끊임없이 자신의 권좌를 노리는 부류가 있고, 자신이 만약 그 권좌에서 내려오게 된다면 자신의 딸들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마왕의 목숨을 노린 자객들은 바로 마왕을 암살한 후에 그의 딸인 에밀리조차 죽이려 했다. 에밀리가 살아 있으면 언젠가 화근이 되어 자신들을 향해 칼이 돌아오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늙은 왕은 자신의 위치인 마왕이란 자리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 딸을 지키려 했다. <황금가지>처럼 늙은 왕은 마족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고 강한 마족이 통치한다. 그것은 단순히 마족의 논리가 아니라 <황금가지>에서 등장하는 미개 내지 야만인들의 논리다. 자연이 곧 하나의 생명이고 신이라고 여기는 관념적인 요소가 강한 시대의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에서 겨울이 되면 모든 생명이 죽으나 봄이 오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고 보았다.

 

그런 자연의 변화가 자신들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왕이란 존재로 통해 자연의 변화로서 대체하고, 자연이 늙은 겨울이 되어 생명력이 넘치는 봄이 된다는 것은 자연의 신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인간도 그러하다. 그래서 왕의 목숨이 곧 자연의 순환이고, 늙고 병든 왕은 죽어야 했다. 강한 왕이 선발될 때마다 피를 물든 아름다운 네미 숲속에서 인간의 신화와 문명의 이야기가 빛과 그늘로서 나타난다. 문명사회와 관련하여 야만의 시대는 문명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지 문명인으로 가져야 할 지성과 사회적 형태를 덜 갖추었을 뿐이다. 마족의 세계에서 갈무트의 죽음이란 바로 마족 그 자체가 기독교 이전의 사회와 연계되기 때문이다.

 

마족과 천사, 단순히 마족이 악마라는 거대한 악의 존재보다는 하나의 종족으로 설정된다. 그들이 마족이라 하여 인간계에 피해를 주고 있는가? 주인공 코키가 처음 마족인 공주를 만날 때도 허무하게 죽어야 했고, 마계에 가서 공주를 찾아갈 때 하급마족에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정도다. 마계는 마계 그 자체적으로 야만이란 공간이었고, 인간계와 별개의 관계였다. 아니라면 천계의 천사들이 인간들을 지켜주고 있었을까? 천계의 무리에서 또 다른 히로인으로 등장하는 미카의 경우, 그는 200세나 산 천사의 환생이었다. 육체는 인간이나 영혼은 천사인 것이다. 작품성에서 인간은 육체와 정신(관념적 영혼)은 분리되어 있다는 것처럼 보이나, 정신은 육체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관념적으로 보면 코키는 25%의 마족의 피가 섞여있고, 그것도 마왕의 혈족이다. 마왕의 후예로서 반인반마인 아버지 같은 존재도 아니고, 오히려 반인반마인 아버지가 더 마족의 모습이 약했다. 아니 교통사고로 돌아갈 정도로 연약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학교 시절에 죽었다는 사실은 일본이란 나라의 특유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욕망이다. 서양에서 그리스신화와 같은 신화에서는 아들들이 아버지를 죽이거나 추방하고,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가 작은아버지에게 살해당하나, 사실 자신의 내면에서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손이 아닌 우연한 죽음인 사고 내지 병사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그 자리에 앉고 싶다는 이중적인 욕망과 갈등이 섞인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이란 욕망은 이제 대신 다른 자리로서 대체된다. 그것은 사촌이란 존재다. 일본에서 촌수가 삼촌 이내이면 결혼이 불가능하나 사촌끼리는 가능하다. 그렇다면 에밀리는 언니의 손자인 코키와 합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하다. 연배는 비슷하게 보이나, 사실 에밀리는 언니 아크마리나와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다. 언니에 대한 배신감이 곧 언니의 부재로 인해 그의 손자인 코키에게 대체된다.

 

하지만 사랑의 크기가 큰 만큼 증오도 커지게 되나, 그 증오의 세기만큼 역으로 사랑이란 마음이 존재한다. 식당에서 코키가 말하던 가족사들, 특히 할머니는 매우 활달하고 밝은 분으로 가족의 중심에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여고생 시절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따라 다녔고, 둘은 연애를 한 후 결혼을 하였다. 「질리언․디마이즈」를 훔쳐간 이유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할머니가 무척 가족들을 사랑했다는 것은 코키는 기억하고 있다. 마왕조차 딸인 아크마리나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딸이 「질리언․디마이즈」를 훔쳐 달아난 것에 대해 오히려 더 잘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질리언․디마이즈」에 숨은 힘과 비밀이 마왕의 가족에게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이고, 사랑하는 아버지와 동생을 두고 아크마리나는 인간계로 찾아와 자신의 가족을 위해 가족을 떠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그 가족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을 마무리한다. 아크마리나는 가족을 위해 떠나 가족을 이루었고, 그 가족이랑 보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손자인 코키에게 전달한 것이다. 「질리언․디마이즈」의 정체는 정확히 뭐라 말할 수 없겠지만, 마력은 마족의 마음을 담은 것이고, 그 마음이 강할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 비밀의 상자는 역대 마왕들이 가진 강한 집념이라 볼 수 있다. 죽음 이후 남겨진 마음, 인간이나 마족이나 모두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은 잊을 수 없는 아쉬움과 분노, 슬픔, 그리고 즐거움과 의지를 품고 있다. 「질리언․디마이즈」를 사용하지 않은 갈무트조차 「질리언․디마이즈」를 남기에 증손자인 코키에게 전해준다.

 

「질리언․디마이즈」의 정체는 마왕이 가진 집념과 마음 그리고 그것을 이루고 싶다는 욕망이다. 즉 인간의 무의식적으로 숨겨진 욕망으로서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마왕의 소망이다. 그래서 그 소망은 죽은 자가 이룰 수 없기에 누군가로 통해 대신 이루게 하여 대리만족을 누리는 것이다. 처음 코키가 죽을 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마치 언제 마음을 누가 알았는지 작은 상자가 자신의 몸 주위에 등장하여 코키를 소생한다. 마왕이던 자가 자신이 살고 싶다고 빈 것이다. 다른 마왕은 음식을 맛있게 먹고 싶다는 것에서 음식이 맛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음식을 마음 편하게 즐겁게 먹고 싶다는 점이다. 또한 다른 마왕은 살육을 원했다.

 

자신의 욕망 아래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나, 그 정신은 비단 마족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기도 하다. 에밀리를 죽일 수 있었던 상황에서 바로 인간의 이드(id)라는 무의식적 요소에서 공격적 성향으로 바뀐 것이다. 폭력으로 인한 파괴본능, 게다가 리비도(Libido) 역시 존재했다. 그것은 마왕의 리비도가 아니라 코키 본인의 리비도였다. <고교생 마왕의 결단>에서는 기존 다른 라이트노벨과 다르게 그런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를 마치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 게 아니라 그 요소 자체를 스스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또한 리비도를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적용했다.

 

코키의 소꿉친구이면서 천사의 환생인 미카의 경우, 본래 천사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천사의 영혼은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하나, 그녀가 가진 성향은 전형적인 사디스트적인 요소였다. 코키에 대한 애정이 마치 소유권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코키의 누나처럼 행동하던 그녀는 나이는 만15세나 정신연령은 200살이 넘었다. 그래서 인간의 몸으로 살고 있지만 삶의 과정 자체에 대해 어느 정도 통달했으며, 천사의 영혼을 지녀도 여성의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리비도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코키를 노리는 이유는 처음에는 코키의 「질리언․디마이즈」이었지만, 미카의 가치는 그저 코키의 감시를 넘어 코키와의 우정과 사랑으로 전환된다.

 

처음에는 감시자였지만, 이제는 감시하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리마 증후군에 빠진 셈이다. 즉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관념인가? 아니면 육체인가? 어느 쪽이든 모두 다 지배하고 있었다. 천사가 육욕에 대해 눈을 뜨고, 리비도라는 무의식적인 성적에너지를 사랑으로 형태로 에로스로 전환하는 것이다. 에로스라는 삶에 대한 욕망이다. 삶에 대한 욕망에서 단순히 코키와의 성욕만이 아니라 코키와 같이 아이를 낳아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란 형태를 이루고 싶은 것이다. 즉 미카는 처음에 코키를 수단을 위한 존재로 접근했지만, 이제는 수단을 위해 삶의 목적으로 변했다.

 

에밀리도 처음에 코키를 증오와 원망으로 바라보았으나, 가족애와 더불어 근친상간이란 금지되지 않은 금기를 넘어보면서 수단에서 삶의 목적이 되었다. 그러나 코키는 가족 그 자체로만 상대방을 대한다. 코키가 이미 정신적으로 성숙하기 전에 가족들을 모두 잃고, 그 충격으로 가슴 한편에 큰 짐을 지고 있다. 그가 쿠몬지 절의 스님으로 되고 싶은 것은 모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보면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도 존재한다.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의 자리를 받고, 그 절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가 절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 이름을 받고 싶은 것이고, 그의 결단 중에 마왕이 되고자 하는 것은 이때까지 혼자라고 생각하던 코키가 자신에게 또 다른 가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왕이던 갈무트는 외증조할아버지고, 에밀리는 이모할머니다. 게다가 갈무트는 이제 막 보는 것 같더니 그의 딸 무덤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만큼 불효는 없다는 마왕의 말에 코키는 마족이란 존재를 그저 이질적인 존재를 떠나 보편적인 존재로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사실 때문에 더욱 슬프고 화가 나고 가슴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온다.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만큼 가장 괴로운 일이 없다고 한다. 가족은 평생 자신의 옆에 있던 사람들이고, 그들이 같이 있는 게 당연한 것이나, 그 당연성이 사라지는 것은 과연 인간 개인에게 어떤 고통인가? 코키에게 외증조할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자신을 노리던 자가 이모할머니란 사실에서 남은 혈육을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마왕이 되어야 했으나, 학생도 되어야 했다. 학생이란 신분이 결국 속박된 자신을 보여주며, 그 속박은 결국 자신이 인간으로 사회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고, 한편으로 사회는 속박의 사슬이다.

 

이에 반해 마계는 오로지 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야만의 세계다. 그래서 <고교생 마왕의 결단>에서 고교생은 사회적 인간으로서 이성적인 존재이고, 마왕은 무의식에 이끌리는 본능적인 인간이다. 음식에서 날것과 익힌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불을 이용하지 않는 점이고, 그것은 곧 문명의 사회가 도래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작품에서 마족공주가 먹던 음식은 동물의 피와 살이었다. 음식을 불을 이용하여 요리하지 않은 채 식사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 먹어본 요리를 먹은 에밀리는 맛있다고 한다. 그녀는 이때까지 야만의 사회에서 문명의 사회에 들어온 셈이고, 인간의 사회에서 대화란 중요하다.

 

대화라는 것은 사회적인 언어로서 서로 간의 사회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요건이다. 그녀가 처음 학교에 올 때 전혀 사회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나 점차 사회적인 존재로 변모해 간다. 에밀리가 야생의 본능에 강한 것은 코키가 「질리언․디마이즈」의 힘에 잠시 각성할 때 알 수 있다. 코키의 친구인 미카가 심각한 사디스트라면, 에밀리는 심각한 마조히스트다. 그녀가 마조히스트적인 요소를 보인 것은 강한 힘에 의한 굴종이다. 코키에 대해 강한 태도에서 반대로 코키의 각성에는 순종적인 모습을 지나 변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에밀리의 변태적은 모습은 그녀가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같이 잠을 자주지 않으면 제대로 자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어머니가 없는 시점에 시녀가 같이 잠을 자주지 않았다면 잠을 제대로 못잔 점에서 매우 심성이 여린 소녀이다. 그녀의 마조히스트적인 요소는 자신의 어리광적인 모습에 대해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 억지로 강한 척하나 그 내면 이내에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자신을 처벌해주는 것으로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부록으로 딸려온 포스트카드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미카의 경우 사디스트적인 요소에 교복을 입을 때는 도발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강조하고, 천사인 상태도 교복을 입은 상태의 표정과 별로 변화가 없다.

 

이와 다르게 에밀리는 마족의 복장에서는 도도하고 프라이드가 높은 공주지만, 교복을 입은 상태에서는 아주 어리고 연약한 소녀로 나온다. 미카는 겉과 속이 같은 인물이라면, 에밀리는 전혀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마족의 공주와 천사의 환생에서 코키의 목적은 지금의 목표인 가족들의 공간인 절을 다시 계승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살아있는 가족과 죽어있는 가족에서 어느 것을 택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모두 놓치지 않는다는 결단을 내린다. 그러나 결단은 또 다른 결단이 필요할 것이다. 서사의 시작에서 주인공은 완전하지 못한 불완전 존재로 시작되어 안정된 존재로 변해가고, 과업의 완료에서 영웅은 최종 통과의례는 바로 혼인이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가족인 에밀리, 후천적으로 꾸준히 함께 자라온 미카, 원래 가족이었던 사람과 가족처럼 지낸 사람의 관계에서 코키는 과연 누구를 선택해야할지? 아니면 둘 다 포기해야할지 혹은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작품을 보아서는 하렘으로 가는 게 바르지 못한 것 같다. 코키가 수행해야 하는 것은 「질리언․디마이즈」의 찾는 것이고, 그것으로 통해 자신이 어린 시절 행복한 추억을 남겨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찾는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과거를 찾아간다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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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R 2014-09-26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디게 잘쓰시내

만화애니비평 2014-09-26 08: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2 - J Novel
마미야 나츠키 지음, 시로미소 그림 / 서울문화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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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서평을 나열하기 말하자면, 나는 정의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의는 윤리라는 가치관이 없다. 단지 정의라는 이름은 힘과 권력이란 개입을 정당화시키는 악적인 수단이다. 어느 작품에서 나온 것처럼 정의라는 이름은 악이란 이름을 질투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것일까? 아닌 것인가?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 것은 정의라고 말하는 자와 정의라는 것에 매달리는 자는 자신의 정의론에 대해 생각해 볼 의무가 있다. 문제는 그런 자신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대한 성찰 없이 단순히 정의는 그 자체로서 의문을 가지게 해서 안 될 극단의 성역인 것이다. 성역이란 이름이 되어버린 정의가 하나의 관념처럼 돌아다녀 눈에 보이지 않은 대기 중에 떠다니는 공기라면 문제가 없을지 모르나, 그것은 인간의 관념 안에 숨을 쉬고, 때로는 인간의 숨을 끊어주게 만든다.

 

그런데 그 정의라는 이름은 분명히 어떤 조건 안에서 타당해야 하는가? 우리는 살아오면서 자신의 정의로운 존재라고 믿고 있다. 그것만큼 가장 큰 착각과 오만, 그리고 편견이란 인간이 가진 그 어떤 죄보다 더 무겁고 지독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정의라고 믿는 것은 자신들이 믿는 가치관이나 도덕관이 옳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점이다. 가령 최근에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과 총격은 두고 우리는 그것을 정의라고 논하는가? 물론 정의의 철퇴라고 말하는 부류도 있지만, 국제연합 UN에서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두고 비인간적인 처사고,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라고 비난했다.

 

정의라는 가치를 두고 저 사건을 생각하면 무엇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전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의 갈림길, 그 갈림길 속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좋은 결과를 볼 수 없었다. 더 나아가 마이클 샌델이 강의하는 하버대학교 정치철학과에서 강의하던 존 롤즈의 <정의론>에선 이렇게 인간의 선택에 대해 이렇게 논한다.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손해나 피해가 적은 것으로 선택한다고 말이다. 정의에 대한 가치는 결국 인간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의라는 그 자체로서는 도덕적이고 사회 관념에 따른 힘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대다수의 판단에서 비롯되는 다수결, 문제는 다수결이란 것은 인간의 보편적 사고이기도 하나, 그 보편적 사고를 지배하는 인간의 사고방식 역시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왜 라이트노벨 1권을 읽으면서 이런 정의와 도덕 그리고 인간의 선택이란 난해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가? 이번에 읽은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라는 라이트노벨은 그런 인간의 딜레마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고, 그 딜레마를 어렵지 않게 그저 라이트노벨이란 경소설이란 장르에 맞게 재미로서 이끌어 간다. 중간마다 보여주는 플롯과 또한 그 플롯을 배치하기 위한 복선은 기본적으로 암시하거나 또는 생략하기도 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1권에서는 카미우치 유우진의 자살심리에 대한 저지에 반해 2권에서는 사나 엔마에 대한 성정체성에 대한 열띤 토론을 펼쳤다. 하지만 그 복선의 구조가 어디서 나오는가에서 1권에서 이미 사나 엔마의 고뇌가 시작되었다. 2권에서 검도부 1학년이 목격한 엔마의 몸은 단순히 발화의 시작점에 지나지 않았다. 1권부터 사나 엔마는 이미 밀폐된 공간에 방치된 가스처럼 언제 어디서라도 스위치가 눌러지면 폭발해야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2권에서 보여주었고, 그것으로 통해 리코와 리코 일행들이 보여주는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투쟁을 보여준다.

 

왜 정의와 도덕 그리고 선택이 따를까? 기본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은 단순히 생각하면 아직 미성년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훈육기관이다. 학교 그 자체적인 기능을 생각하자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은 학교라고 하여 그 자체로 분리된 공간이기도 하나, 때로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는 학생이란 존재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학생이란 이름 뒤에는 사회적인 배경과 조건이 따른다. 학교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사회구조로서 움직이는 조직인 것이다. 따라서 그 사회구조 속에서 정치적인 맹점과 정치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투표라는 것은 결국 참여에 대한 인간의 권리다. 그 참여라는 것이 하나의 선택지점을 지정하고, 그 선택은 그 정치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사나 엔마가 처해진 상황은 바로 그 정치적 상황 그 자체였다. 따라서 리코는 1권에서 프로이트와 융과 같은 정신분석학자의 이름과 이론을 내세웠다면, 2권에서는 왜 니체의 이름과 그의 말을 따라 했는가? 리코는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가 보낸 강력한 도전장을 두고 니체의 말을 인용하였다. “저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지. ‘정의는 거의 동등한 힘의 상대를 전제로 하는 보상과의 교환이다.’라고, ‘정의’는 정정당당하게 부를 때가 아름답지 않은가? 적어도 약한 상대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태에서 철퇴를 내리려는 행동은 삼류 행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군. 그런데 하라 사이토 군, 자네는 몇 류지?”

 

저 말은 어렴풋이 내 기억에서 돋아났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출판사 책세상)>에 나오는 문구 중에 하나일 것 같다는 점이다. 니체의 서적은 당시 도덕관이나 정의관에 대해 무척이나 비웃고 깨부수려고 했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를 읽다보면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가 왜 유치한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니체는 본래 민주주의를 혐오하던 사람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에서 대다수의 군중으로 이루어 있으며, 그들은 충분한 판단력과 이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중심리에 의해 자행되는 일들은 그것이 분명히 틀린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인간이 가진 광기의 폭발이 정당화 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도덕과 정의라는 이름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에서 내가 발췌했던 글 중에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라고 한다. 결국 집단과 시대라는 특성 아래 사이키델리코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하나의 집단이 구성된 조직이고, 현대적인 상식이란 이름을 가진 시대적 요건도 갖추어져 있다. 학생회는 학교학생들의 대표이기도 하나, 그것은 정말로 대표인지 아니면 하나의 권력을 가진 존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조직과 집단 또는 국가조차도 법과 제도가 있다. 법과 제도는 그 자체로 공정하고 공평해야 하나, 그 공정성과 공평성의 이름을 가진 법과 제도는 자신의 이름으로 집행하지 않는다. 어느 특수한 인간으로서 공정성과 공평성을 실행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 개인에게 공정성과 공평성이 완벽하지 않을 경우 어느 특정한 이해관계나 사적인 감정이 녹아들어가는 순간 이미 법과 제도라는 자체는 공정성과 공평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2권에서 바로 그 공정성과 공평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에서 결국 권력이란 이름의 도덕과 정의는 정당한가라는 리코의 반격이 시작되는 점이다.

 

1권부터 복선을 깔라놓은 사나 엔마, 그는 아니 그녀는 원래 여자지만, 남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녀가 여자인데도 남자로 살아가야할 이유는 단순히 엔마가 변태적인 성욕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녀가 자라온 환경이었다. 즉 학교라는 것이 사회구조고, 모든 사람들은 같은 조건 아래 성장할 수 없고, 같은 상황에서 살아갈 수 없다. 바로 개인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외압적인 조건에 의해 자신의 현재가 갖추어지는 점이다. 엔마의 아버지는 뛰어난 무술가이고, 게다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여행을 다니는 방랑무술가였다. 어머니도 없이 아버지 아래 아버지 같은 생활을 했다면 분명 평범한 여성으로 삶을 기대할 수 없다.

 

섹슈얼리티라는 생물학적인 조건에서 엔마는 키도 크고 날씬한 소녀였지만, 젠더적인 요소에서는 그녀는 여자보단 남자로 살아야 했다. 결국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엔마의 집안사정에 따른 문화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분명히 여자가 여자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남자라는 존재로 학교를 다니는 것은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하라 사이토는 엔마의 약점을 두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퇴학을 내리려 한다. 퇴학의 조건에서 일반적으로 학교 내 교무위원들이 의론을 걸치고 나서 결정해야할 사안이나, 먼저 학생회에서 의론을 결정하였기에 학생회의 대회의로서 결정지으려 했다.

 

그 목적은 엔마의 퇴학이나, 그 이면에 학생회에서 눈에 가시거리로 비추어지는 리코의 기압제선이었다. 학교에서 기인으로 소문난 리코에게 리코의 주변인들을 쳐내는 것으로 충분한 반격이 될 것이고, 리코가 학교 내에서 유명인이지만 확실한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리코의 약점을 노려 리코를 눌러 버리는 것이 하라 사이토의 목적이다. 하지만 리코가 분명히 특이하고 단정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단지 리코가 어느 특정인에 대해 특별한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선에서 말이다.

 

하라 사이토와 같이 결백증이 강한 입장에서 리코는 자신의 미적인 감각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예전부터 계속 마찰이 있었다는 점에서 어떻게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방법이다. 책을 읽는 독자로선 하라 사이토의 방법이 매우 치사하게 보이겠지만(물론 치사하지만), 이것이 우리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편집자의 후기에서 분명 나타냈기도 했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사회의 축소판처럼 여론으로 통해 마녀사냥하기가 참 용이한 곳이다. 더구나 학교는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군중심리를 자극하기가 참 좋다.

 

왜 리코가 메이드복을 입고, 퍼포먼스를 펼치는가? 대중은 왜 그런 리코를 기대하는가? 한 마디로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나, 또는 학교 내의 대의회 역시 하나의 쇼라는 점이다. 쇼라는 이유는 이미 학생회에서 엔마에 대한 불리한 판결이 내리도록 사전에 수를 쓴 것과 동시에 정의라는 이름을 들먹인 것으로 모든 학생들을 피해자처럼 만들었다. 특히 검도부 1학년 후배는 그때 엔마의 모습을 본 것으로 큰 충격을 받아 더 심각한 피해자로 만들었다. 조용하고 정체된 사회에서 어느 외적인 침략자 내지 혹은 내적으로 반역자가 나올 경우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단결력이 강해져 더 큰 결속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흔히 서사에서 말하는 Narrative적인 요소다. 쉽게 말하면 누군가는 나쁜 사람이 필요하고, 그 나쁜 사람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으로 인식되어, 그 적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대중들은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고 믿게 된다. 그게 바로 니체가 가장 증오하는 모습 중에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에서 또 인상적인 말은 “우리의 가장 강항 충동, 우리 안의 있는 폭군에게는 우리의 이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도 굴복하게 된다.”라고 한다. 양심 그것은 무엇일까? 이미 대회의 이전부터 대회의 진행 도중까지 엔마는 자신의 초라하고 나약함에 두려움을 떨었고, 그는 사나운 염라대왕이 아니라 그저 연약한 남장여자였다.

 

이미 전교생에게 알려진 마당에 계속 학생회로부터 내려오는 비수 같은 폭언은 그녀로 하여금 심한 정신적 붕괴를 유도했다. 그러나 그런 비정상적인 존재는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물론 그들에 대해 다소의 불쾌감 내지 이질감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으며, 그들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은 이상 그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지 그렇게 사는 것 자체에 대해 우리는 방관해주는 것이 오히려 자유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주지 않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단지 성별을 속이고 부활동을 하고, 연습까지 했다는 점에서 충분한 자숙과 근신을 처하는 것이 옳다.

 

리코의 행동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엔마의 탈의모습을 목격한 1학년 여학생이 큰 충격을 받아, 그것으로 인해 엔마가 퇴학을 당하여 학교에서 떠나면, 과연 그 1학년의 충격은 모두 없어지는 것인가? 뒤에 가서 분명 자신 때문에 엔마가 퇴학당하여 불우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학할 것이다. 대신 그녀가 자학할 순간에는 정의와 도덕을 외치는 자들은 무관심하게 그녀는 방치하고, 오히려 지나간 일에 매달리는 그녀를 두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정의와 도덕이란 이름을 보여주면 그 후에 일어나는 남의 일은 그저 개인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리코가 엔마의 퇴학을 막은 이유는 3가지다. 1번째 엔마는 자신의 친구이기에 친구를 위해서고, 2번째 엔마가 자신의 처음 친구이기에 엔마가 없으면 외로워지므로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고, 3번째는 검도부 여학생이 나중에 겪게 된 양심의 가책에 대해서였다. 그 1학년 소녀는 자신의 괴로움과 검도부를 위해 검도부장과 상담하여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했으나, 한편으로 그 이유로 어느 개인이 비참한 상황에 맞이하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쇼가 이루어지는 대회의 시간에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란 없다. 단지 이분법적인 대립관계에서 어느 한 쪽 세력을 지지하여 잘나지도 않은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은 다른 이유는 윤리는 약자의 입장과 더불어 소수자의 상황을 고려하지만, 도덕이란 이름은 절대적인 대다수의 입장만 견지한다. 엔마 같은 소수자들은 어느 사회에서 환영하지 못할 존재다. 또한 리코나 유우진 역시 그렇다. 리코는 부모가 없고, 유우진은 부모 없이 살다가 누나마저 눈앞에서 자살했다. 인간이 비틀어지는 이유는 처음부터가 비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비틀어지는 이유가 있다. 어느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결과론적인 요소로서 사람들은 판단하나, 그 이면에 가려진 원인에 대해 충분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에 대한 판단은 결국 어리석은 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본문에서 리코의 반론을 잘 생각해야 한다. 그녀는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에게 “윤리의 중요성을 부장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도덕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정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천차만별, 시대와 문화, 이들은 외적 요인에 쉽게 좌우되는 애매한 가치관이거든, 획일적인 가치관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사물의 본질을 간과할 수 있다니까?”라고 말이다. 현대사회는 이른바 사회적인 요소가 인간의 개인을 지배한다. 결국 인간이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을 지배하고, 문화로 통해 하나의 사회적 양상까지 좌우되는 것이다.

 

문화적인 요건에서 상대방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번역자인 MOEX의 후기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 과거 시대라면 인간을 나누는 것이 조선시대에 사농공상, 군주정인 유럽에는 왕족, 귀족, 평민, 농민, 노예라면 이제는 자본의 소유다. 자본이란 것은 단순히 경제학적으로 말하는 화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사회적 조건, 그리고 문화적 자본까지 고려해야한다. 문화자본이란 개념이 존재하듯이 사나 엔마의 문화자본은 여성의 삶을 강탈된 삶이었고, 그런 삶에서 고교생이 되는 순간 억지로 여자로서 삶을 강요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질과 양의 변증법에서 사나 엔마라는 존재가 살아온 시간에서 그녀는 여자보단 남자로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여고생이란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대회의의 사건과 그 사건이 원인이던 비밀의 노출, 사나 엔마는 대회의라는 계기가 하나의 통과제의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통과제의 과정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상식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의 생각을 옭아매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인간에게 큰 편견과 고정관념이 되는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식이란 것은 결국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는 사고방식이나 그 사고방식이 되는 기본적인 정보가 일방적이거나 획일적인 가치라면 인간의 판단은 올바른 길보다 어긋난 길로 간다는 점이다. 사나 엔마가 마녀사냥 당해야하는 것처럼 인간의 판단력은 언제나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2권까지 읽다보면 분명 리코는 기인이고, 특이한 인물이다. 절대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기에 그 사회구조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틀에 갇힌 인간이 가진 사고방식으로 그 사회의 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잡을 수 없다. 오히려 그곳에서 벗어나는 인간이어야말로 그 사회의 틀을 보거나 바꾸어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도 리코에게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는 있었다. 친구는 소중하다고 말이다. 단지 상식적인 시선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고, 그래서 리코는 사나 엔마의 모든 것을 감싸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정의와 도덕이란 이름으로 무장한 편견과 오만으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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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비평의 쟁점 - 잃어버린 만화 문화의 자리찾기
김성훈 지음 / 니들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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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구한말 아니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만화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만화같이 단순히 애들이나 보거나 또는 시간 때우기 용으로 이용되는 오락도서만이 아니란 점이다. 물론 오락적 기능도 중요하다.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즐길 수 있는 휴식시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런다고 만화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만화라는 것은 단지 그림으로 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 안에는 엄연히 이야기가 존재하고, 그 이야기 내에는 상대방에게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기호적인 요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만화문화는 단순히 재미와 오락을 생겨나기 보다는 시대적인 흐름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서 생긴 문화다. <한국 만화비평의 쟁점>에서 처음 소개된 대한민보에 실린 최초의 만화가 나온다. 긴 모자에 양복과 구두, 그리고 지팡이를 잡고 있는 중년남성을 보면 무엇인가에 대해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 만화는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삽화로서 만화의 역사와 더불어 만화라는 매체로 통한 비판적인 요소, 그리고 민중적인 요소를 반영하여 그 문화적 명맥을 유지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화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그래 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만화이기 때문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대 지식인이며 언론인이던 최성수는 만화로 통해 언론적 기능을 강화하고, 만화라는 매체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프랑스혁명사에 관심이 많지만, 그 혁명적 배경에는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한 정보와 홍보 수단으로 만화가 중요한 수단이었다. 최성수 언론인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통치와 나폴레옹 이후 다시 부르봉 왕가가 통치하고 또한, 나폴레옹3세가 집권하기 이른다. 이런 와중에 권위적이고 비자유적인 통치에 대해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반발하자, 프랑스 만화작가 오노레 도미에는 시민들의 편에서 만화를 그린다. 그의 작품 중에 <봉기>는 분명 만화라기보다는 혁명을 위한 그림에 가까우나 그래도 만화가라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림들이 대부분 시대적 문제를 풍자적인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하면 만화라는 매체가 효과적인 이유는 억압받는 민중계급 부류들은 대부분 글자를 몰랐으며, 글자를 모르는 것은 그런 문제점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판단력 내지 그런 개념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과 같다. 가령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의 불꽃과 심지어 전 세계의 헌법조차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개념을 알려면 받아들이는 상대방에게 정보력을 각인 시키야 하는 점이다. 정보의 각인에서 기표가 되는 그림이 상대방에게 이해가지 못한다면 정보매체로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만화라는 그림은 상대방에게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그릴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만화가 가진 언론적인 기능은 곧 누구나 보고 이해할 있고,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점에서 만화는 민중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민중에 의한 문화라는 것처럼 매우 민주주의적인 문화라는 점이다. 특히 보는 이로 하여금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시사만화의 경우, 누가 보더라도 이해가 빠르면서 한편으로 미소와 더불어 씁쓸한 맛을 베어나게 만든다. 그렇지만 시사만화라는 것은 시대적 문제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이슈를 부각시키고, 그것으로 하여금 대중들에게 관심을 유도하므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국의 만화역사에서는 결국 시사만화 내지 민중의 삶에 스며든 민중의 대변자라 볼 수 있다. 그런 만화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비평적 쟁점이 되고, 만화로 통해 보여주고 그것에 대한 고찰로서 만화비평은 성립된 점이다.

 

한국의 만화비평문화는 결국 언론의 기능으로서 즉 민족독립에 대한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일제로부터 착취와 억압에 시달린 민중의 한을 내보인 것이다. 최성수의 그런 가치는 그가 남긴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첫째는 조선의 저널리즘이 먼저 만화를 알고 또 저널리즘이 가져야 할 만화와의 동반성을 잘 인식하는 동시에 세계 저널리즘과의 만화대세를 거울삼아 거기서 조선 저널리즘이 가져야 할 위치를 깨달아 그 깨달은 바를 하루바삐 이루어져 할 것과 둘째로는 민중이 만화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가져야겠고 마지막으로 만화가는 좀 더 만화다운 만화를 창작하여야 할 것이다.”

 

만화이기에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프랑스에서 9가지 예술에서 만화 역시 예술의 한 범주에 들어간다. 미학에서 예술이란 것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 그렇기에 만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대해 작가로 눈으로 통하여 새롭게 해석하여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이 만화작가의 소임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만화의 가진 가치를 논하는 정신이기에 한국만화는 계몽주의적인 요소를 내재한 근대적인 문화였다. 그렇지만 만화는 그 누구에게 열린 세계이며, 특히 한국전쟁 이후로는 그 대상이 어른에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게 된다.

 

아마 만화가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인식은 군사독재정권 이전에 한국전쟁 전후로 근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쟁이 닥치면 어른들은 밖에서 일을 하게 되면, 집에는 어린 아이들이 남게 되고, 또한 전쟁고아와 같이 누군가를 의지할 수 없는 사람들도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어린 아이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만화였고, 새로운 만화가 나오면 아이들의 손에서 이리저리 흘러 다니며,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렇지만 이런 형태는 만화에 대한 작품적 가치를 다루기보단 대량적으로 만들고, 재미위주로 가게 되는 모순이 생긴다. 만화에서 물론 시대적인 배경과 시사정신이 빠질 리는 없지만, 만화가 그런 가치에만 몰입할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일본 문화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은 이미 쇠퇴하고 이제 그것을 대체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란 문구를 보았다. 문학평론가와 언론인에 의해 우리나라 만화문화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할 상황이 온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만화는 여전히 자유로운 사고와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해줄 수 있는 매체였다. 그런 만화에 대한 평론은 만화가 단지 저속한 문화로 인식되는 것에서 좀 더 넓은 관점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김현, 오규원 선생 같은 문학도의 출현은 매우 중요한 의미인 점이다. 만화규장각에서 발행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에서 김현 선생은 자신이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만화가 가진 민중예술성을 재발견했다.

 

위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문구처럼 지식이 없다면 자신이 처해진 위치나 상황조차 파악할 수 없다. 글을 모른다는 것은 지식을 축척할 수 있는 방법이 어렵다는 것이고, 지식의 축척은 곧 지식이 없는 대상으로 하여금 우월한 위치에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따라서 지식은 권력으로 이어지고, 권력은 지식은 생산하는 것처럼, 만화의 기능은 지식이 없는 자에게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만화를 보고 그는 처음에 자신인지 모르지만, 그 만화를 보고 나서 뭔가 잘못된 점을 느끼고, 그 만화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가치로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만화가 예술적인 요소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을 하나의 시학(詩學)처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 내지 필연성이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다. 하지만 생각하게 되는 것과 그 생각으로 인해 사회적 문제를 알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억압하거나 은폐, 조작, 위조를 하려고 한 것이다. 한국에 대표적인 만화분서갱유는 유신체계에 대한 권력독재화의 산물이다. 만화가 자유로운 사고로서 그것을 제작하고 보는 이들은 매우 귀찮은 존재가 아닐 수가 없다. 따라서 만화의 검열과 제한된 이야기, 그리고 사유의 폭을 제공하는 만화를 억압함으로 만화문화는 그저 아이들이나 보는 단순한 오락물로 치부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1980년대로 오게 되면서 만화비평에 대한 도서도 나오고, 1990년대에는 신춘문예에서 만화비평도 하나의 비평가의 등단기회로 올라가게 되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만화비평으로 통해 정식으로 만화평론가로 등단할 수 있는 신춘문예에 만화부문은 빠져있다. 그렇지만 만화가 가진 이야기의 전달력은 신춘문예가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만화비평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만화비평의 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1990년 국내 최초로 공주대학교에서 만화학과가 창립되어 만화라는 것이 단순히 오락이 아니라 학문적 기능을 유지하며, 만화에 대한 평론가협회 내지 만화를 연구하는 만화학회를 창립하여 만화라는 것이 하나의 학문적, 예술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었다.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만화가 지금처럼 하위문화로 간주된 게 아니라 만화가 차지하고 있던 한국사회의 여가생활에서 TV의 보급과 극장의 설립이 멀티미디어매체로 인해 만화가 한국 대중으로부터 저절로 멀어지게 되었다. 하위문화가 된 만화가 계속 대중문화와 그것을 이용하는 대중으로부터 저질문화로 인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만화 그 자체에 대한 가치를 올릴 수밖에 없다. 만화비평은 처음에는 시대정신과 저항의식, 그리고 민주화 열기로서 발전해왔다. 하지만 만화라는 것도 역시 하위문화라고 해도 대중문화에 포함되므로, 만화가 보급되면서 만화라는 위치가 영화나 문학과 같이 예술성, 작품성을 인정받는 것이 사회적인 조건에서 유리하다는 점이다.

 

1980년대 만화비평가인 위기철의 글에서는 만화의 대중성을 결국 사회적으로 보급되면서 자본과의 관계를 제외할 수 없다. 그래서 위기철가 남긴 글로 “한 작품이 성실히 작가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상업성의 산물일 때 그 비평적 접근은 당연히 작품 생산의 동력이 되는 ‘상업성’을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되며, 또한 이 상업성이 비단 만화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일 때 비평의 접근방식은 당연히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는 만화책, 최근 그 만화책의 토대가 되어가는 게임과 라이트노벨, 위의 이야기들로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 역시 상업적인 요소가 반영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중에 대한 상품적 가치로서 만화관련 콘텐츠는 사회구조적인 요소로 보지 않을 수가 없고, 대중에게 만화가 전달되는 것 역시 자본을 매개로 하기에 만화비평 역시 사회적인 구조와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단순히 보자면 작품적인 가치 높고 낮고를 떠나 어떤 작품에 대해 비평을 할 때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기능과 정치적 현황 또한 사람들이 최근 가지고 있는 인식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점이다.

 

물론 만화 혹은 서브컬처로 같이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등과 같은 부류는 그 역할과 기능을 인정받지 못한다. 현대사회에서 보이는 문제로는 대중문화는 획일적인 가치관을 강요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낯설게 되는 것이다. 만화비평이 모든 이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다양한 문화의 공존성이다. 만화가 만화라는 부류에 갇히게 된다는 것은 결국 고립된 부류로 낙인찍히고, 당초 만화는 즐거움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교감이란 목적성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점이다.

 

예술이란 것은 정치적인 요소와 멀어져 보이겠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동물, 곧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라는 것이 단순히 말하여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 앉아있는 고위관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행동하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는 것조차 정치다. 아니라면 자신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조차 정치적이다. 그 정치성을 논하는 이유는 만화라는 것으로 통해 자신의 삶을 윤택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 역시 정치적인 논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료로 보는 웹툰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작가들과 출판사들의 수익을 거두게 하는 출판만화의 무관심 내지 편견은 어떻게 보면 만화를 즐기는 부류에게 큰 타격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만화비평이 필요한 점은 만화가 프랑스에서 제9의 예술이란 말처럼 그 예술적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국 그것을 즐기는 부류가 스스로 앞장을 서야 하는 점이다. 프랑스 부르봉왕가에 대해 풍자를 날린 프랑스 화가 오노레 도미에는 먼저 그림을 그려 대중에게 알렸고, 대중들은 그 그림으로 통해 시대적 현황을 파악한다. 그리고 프랑스는 1848년 2월 혁명에서 영원히 군왕을 추방한다. 물론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이 된 후 의회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혼란에 빠졌지만, 계속 저항을 하던 그들이 있었다. 근현대적으로 저항이 있는 곳에 풍자만화 내지 시사만화가 뒤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다.

 

만화비평은 단순히 만화를 보고 비평을 남긴 것으로 만화비평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그 자체에서 만평을 통한 비평일까? <한국만화비평의 쟁점>에서 다루고 있는 사안에서 기존에는 엘리트들이 만화비평문화를 이끌어왔다면 21세기 온라인 문화에서는 대중들이 만화비평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까지 단순한 리뷰 내지 감상에 머물러 있기에 그 작품에 대한 활발한 논의에서 깊이를 논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소개된 만화비평가들 중 최근에 소개된 사람들은 만화작가 내지 대학교수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만화는 분명 하위문화인 서브컬처이다. 그렇기에 가장 밑자락에서 즐길 수 있다. 만화를 즐기는 점에서 단순히 보다는 개념에서 읽는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시도되어왔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문학평론가와 문학도 혹은 만화전문비평가 내지 교수들에 의해 주도된 점은 안타까운 점이다. 대중 스스로 만화비평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만화의 기능이 이제 만화만이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로 점차 번지기 때문이다. 만화는 대중문화이기도 하나 하위문화이기에 다양한 이야기와 소재들이 위로 떠오른다. 기존의 대중문화는 계속 대중의 대다수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같은 이야기와 소재를 반복한다.

 

따라서 새로운 전환점이나 가치관의 정립이 매우 어렵다. 만화라는 것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처럼 대규모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분야다. 작가의 개인적 특성을 반영하므로 어느 특정 개인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는 점이다. 물론 한국의 만화작가를 보면 열악하다. 사회적 인식, 생계에 대한 부담, 그리고 이 어려운 여건 속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열망, 실제 만화작가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쉬운 길을 택한 사람들이 아니다. 만화비평적인 요소에서 그들과 대화하면, 자신의 작품에 들어오는 의견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꼼꼼하게 평해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만큼 자신이 만든 작품을 열심히 보고 생각했다는 점이 그리는 입장, 즉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결과일 것이다. 만화비평은 만화문화의 저질성이란 인식개선에 큰 전환점도 되나,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만화비평은 단순한 리뷰쓰기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미학적 판단을 함으로써, 일반적인 문학과 영화를 보고 있다는 조건 아래 시작해야 한다. 영화나 문학이나 다 좋은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영화, 문학, 만화가 있고,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만화비평이 어려운 점은 이런 사회적 인식과 개인적 역량의 향상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만화를 그리는 것은 작가에게 이윤을 남기지만, 만화비평은 이윤이 오지 않은 것이 한계성이다.

 

대학교단이나 또는 문화관련 단체에 소속된 일부인사들을 제외하면 만화비평을 한다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취미생활로만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한국처럼 대중들에 의해 수행되는 비평문화가 거의 전무한 곳에서는 만화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는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만화를 좋아한다면 그 만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즐거움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의식주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어 남는 시간에 여가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가시간에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으나 만화만큼 짧은 시간에 즐거움을 주는 매체는 많지 않다.

 

우리 사회는 만화 내지 애니메이션이란 문화를 단순히 위해요소로 되거나 또는 아동이나 유아용으로 사용하려고 하며, 특히 교육자재로서 기능을 수행하려 한다. 만화작가와 만난 시간에서 많은 만화작가들이 교육자재에 필요한 그리는 것으로 수익을 본다고 한다. 물론 교육을 위한 교육자재에 만화를 그리는 것 역시 만화를 익숙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나, 만화작가가 본래 원하는 목적은 아니다. 결국 만화문화의 밝은 미래는 자유로운 창의성과 깊은 토론이 오갈 수 있는 문화정착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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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1 - J Novel
마미야 나츠키 지음, 시로미소 그림 / 서울문화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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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이상한 사람의 정신인지 혹은 낯선 사랑의 정신인지? 아무튼 제목으로 봐서는 분명히 교복을 입은 두 사람이 서로 교차하는 장면에서 학원물과 연애물이 등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분명 이 작품은 라이트노벨이지만, 라이트노벨로 하기에는 뭔가 큰 갭이 보인다. 작가인 마미야 나츠키는 어떤 인물인줄 모르지만, 그가 보고 있는 관점과 시각은 분명 이 작품 표지에 나오는 소녀인 사이케테이 리코로 대체된다. 사이키델릭이란 정신에서 그 말을 살짝 바꾸어 사이케테이, 즉 사이키한 인물로서 리코를 등장시킨 것이다.

 

역시 제목부터 정신이란 것을 내세울 때부터 조금 이상했지만, 막상 책을 열어보니 역시 그 예감을 틀리지 않았다. 책 안에서 지그문트 프로이드와 그의 제자이자 배신자인 칼 구스타프 융이란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정신분석에 대해서 논하자면 기라성 같은 존재이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한 연구는 20세기에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구조주의에 영향을 끼칠 정도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제목인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의 소유자는 리코가 되는 것이고, 그녀는 마치 프로이트와 융을 꺼내면서 일러스트 표지 주인공 중 하나인 유우진을 자꾸 파헤치고 꺼내려 한다.

 

가령 이것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파리정신분석학회에서 파문되어 프랑스정신분석학회를 만든 라캉에 대한 일화가 생각난다. 물론 라캉에 대한 것은 구조주의 내지 후기구조주의를 소개하는 책으로 만나고, 대략적인 이론만 봤을 뿐이나, 그가 치료하는 방법 중에 환자의 뺨을 손바닥으로 치는 것이다. 만약 환자가 뺨을 맞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다면 그 치료는 성공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환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로서 타인과의 대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즉 어느 문제대상이 감추고 있는 그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서는 충격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라캉이 아니더라도 정신분석적인 방법으로 리코는 유우진의 방어기제적인 요소를 간파하여 그의 벽을 허물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기인이란 별명과 함께 상당히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유우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문제로서 파괴한다. 기존에 갇혀있는 유우진의 고립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행동하는 리코의 관계에서 리코의 정이라면 유우진의 반이고, 그 둘의 대립은 합으로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되는 셈이었다. 그 부정을 부정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리코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방어기제에 대한 공격이었다. 감추고 싶은 것에 대한 재생이고 회상이었다. 인간의 내면에는 누구나 알 수 없는 깊은 아픔을 지니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그것은 드러내고 싶지 않기에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그 아픔을 밖으로 드러내어 해소시키는 것이 정신분석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이다.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면 결국 곯아 썩는 것이 인간이다. 육체적으로 세포가 균에 침식당해 몸이 곪아 가고, 정신적으로 더욱 고립되어 극단적 행위를 하게 된다. 유우진의 자살충동은 바로 정신적인 고립에서 발생되는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리코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화적 요소가 담겨 있다. 가령 대표적으로 정신분석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다.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남자 오이디푸스는 인간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는 인간은 근친에 대한 터부의식과 반드시 근친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정신적으로 가족에 대하여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유우진이 부모를 잃은 것은 8살, 그의 누나인 유우키는 초반에는 16살이고, 후반에는 17살이다. 작가가 실수한 것인지 번역과 편집과정에서 실수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남매는 아직 마음이 여릴 때 부모를 잃는 충격을 맛보았다.

 

그런 상태에서 어린 유우진는 누나인 유우키에 대해 친누나이지만,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우키는 달랐다. 그녀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동생도 잘 돌보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었다. 유우진에게 어머니를 대신한 유우키 자신이 있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대체물이 없었다. 그래서 일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직장 상사와 불륜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라면, 반대로 엘렉트라콤플렉스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서 된 것이다.

 

하지만 누나인 유우키가 아버지 같은 직장상사에게 마음이 빼앗기면 어머니 같던 누나 유우키를 잃어버린 것처럼 유우진은 질투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종말은 비극적인 살인사건과 자살로 이어진 것이다. 유유키의 친구이며, 리코의 친구이자 부활동교사인 마호 역시 이 사건을 두고 계속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드러나기 싫은 과거의 기억이 계속 그녀의 그림자에 숨어 유령처럼 머물고 있었다. 유우키의 죽음에 대해 마호 역시 유우진에 대한 죄의식과 깊은 슬픔이 남아있었기에 리코는 유우진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어 그 악몽을 상기시키며, 이제는 유우키를 대신하여 리코라는 이름을 유우진에게 넣어 주려고 했다.

 

결국 유우키는 가족이란 이름의 누나에서 사랑이란 이름의 누나(선배)로 대체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도는 오토마톤처럼 유우키는 죽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죽음으로서 자신의 삶을 확인하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보였다. 유우진은 자신의 존재를 두고 실존주의적 모습은 세상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와 분리되어 있기에 고독을 추구하는 한 마리의 늑대와 같았다. 그렇지만 유우진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에서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를 추구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간 누나처럼 자신도 사라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코가 유우키의 죽음을 모방하여 유우진의 트라우마를 부수려 했다.

 

유우키는 유우진을 사랑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 점과 그 유우키의 죽음에서 얻은 고통의 사슬을 끊고, 리코라는 한 사람을 위해 살아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이런 용어들의 사용에서 상당히 인용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이 나에게 도착하기 전에 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있었다. 기인처럼 문학가이자 시인인 괴테의 명언을 남기는 리코에서 리코가 보여주는 행동은 결국 유우진의 사슬을 끊어주는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자신이 사모하던 로테의 집에서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와 논쟁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베르테르는 “폭군의 압제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드디어 궐기하여 그 사슬을 끊어버릴 경우”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베르테르가 말한 사슬과 리코가 말하는 사슬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사슬이란 말은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나온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로 묶여 있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을 것은 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라고 말이다. 리코가 유우진에게 계속 말하는 사슬은 결국 유우진이 세상을 살아가야 인생의 자유고, 그 사슬은 유우진의 고뇌에 자리 잡은 누나의 죽음이고, 그것을 이겨낼 방법은 사랑이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을 읽다보면 문학, 영화, 철학, 정신분석에서 나온 내용들을 많이 인용한다. 라이트노벨이란 재미를 넣은 경소설이지만, 보통 일반 시중에 나온 왜만한 소설보다 더 깊이 내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때에 따라서는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을 읽는 순간 나는 프랑스의 유명한 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의 색>에서 <Blue>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Blue>라는 영화는 프랑스 삼색기에서 푸른색으로 자유가 무엇인지 다룬 것으로 여자주인공은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고 스스로 고립하기로 한다. 혼자만의 방랑 속에서 남편의 물건을 정리하던 중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그 바람피운 여자는 아이까지 임신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친구인 남자가 여자주인공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나,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같이 남편이 남긴 악보를 정리하던 중에 서로에 대해 사랑하면서, 여자주인공은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 인간은 본래 자연적으로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결국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사랑이란 감정을 두고 원시시대의 인간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즐겼다면, 사회가 생기면서 사랑은 인간의 사회성으로 이어진다. 결국 사슬이란 존재는 인간의 도처에 묶여있기 때문에 그 사슬을 끊을 방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감이란 점이다. 고립된 유우키는 자유보단 방종에 가까웠으며, 그것은 자유보다는 자신만의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하지만 감옥은 유우키만 것이 아니었다. 유우진에게 말은 건네주는 이안과 유이, 유이는 과거 중학교 시절 어떤 여자아이를 왕따 시키는 집단에 속해있었다. 당시 유우진만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자 반대표로 억지로 끌려나와 유우진에게 협박적인 말투를 내뱉다 오히려 역으로 자신이 공포를 맛본다. 인간을 속박하는 사슬은 도처에 있다는 것은 결국 그런 인간의 집단주의에서 비롯되는 비이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은 정신분석에 대한 내용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작가는 알고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연애 카운슬러로 활동하는 마호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모습으로 옷을 입는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자크 라캉이 남긴 말 중에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와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가 있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남긴 것이다.

 

그런 명제에서 리코는 항상 튀는 행동을 한다. 자신이 여자임에도 여자인 리코를 좋아하는 엔마 사나의 지나친 장난에서 리코는 옷이 물에 젖어 브래지어가 노출되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다. 만약 보통 여자라면 가슴을 가리고 수줍은 얼굴로 피하려 했으나, 오히려 당당히 자신의 몸매를 뽐내는 그녀는 참 특이하였다. 아니라면 엔마 사나가 아방가르드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것처럼 리코 자체가 아방가르드, 즉 반미학적인 전위성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렇기에 유우진을 구하였을 것이다.

 

인간이 가진 사회성에서는 인간 스스로가 규격화 일반화 획일화를 강요한다. 상대방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다른 언행을 보여주면 바로 낙오시키거나 차별한다. 이런 것을 두고 집단주의의 한계성인가? 자신들이 옳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틀려야 하고, 어긋나야 한다. 인간은 겉으로 예외의 존재를 부정해도 속으로 나오기를 바란다. 그래야지 자신들이 단합되어 정의의 이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에서 이안은 제대로 헤쳐 나오지 못했고, 유이는 그들의 일부가 되어 유우진을 공격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존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 사고방식을 부수는 색다른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은 사랑으로서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책 제목이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이 아닌가 싶다. 1권에서 유우진에 대해 리코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그를 사회적 존재로 변모시켰다. 남과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는 유우진에서 2권에서는 유우진의 새로운 인생과 그 주변에 있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다. 이 책에서는 현재 기성세대 관념적으로 매우 위험한 부분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것은 유우진 옆에 계속 머문 이안과 리코 옆에 계속 있던 사나에 대해서다. 리코 친구 사나는 남자처럼 행동하나 사실 여자였고, 이안은 남자인 유우진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안은 감정적인 모습이 드러내고, 사나는 매우 차갑고 냉혹한 모습이 보인다. 작가가 융이란 이름을 드러낸 것처럼 남자와 여자는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지고 있으나 무의식적으로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 있고, 여성성 안에도 남성성이 존재한다. 이안이나 사나의 모습은 그런 인간의 상대적인 성별에 대한 심리적 왜곡이 내재되어 있다. 라이트노벨이라도 환상과 마법, 공상과학을 배제된 평범한 학교공간에서 다루어지는 이 이야기는 등장인물이 다소 과장되어 있을지 모르나, 그 이야기에서 차용된 모티브들은 분명 지금이라도 어디에선가 숨 쉬고 살고 있을법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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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 (특별한정판) - 요희전기 2, Novel Engine
크레파스 지음, Mx2J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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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은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를 이은 요희전기다. 일단 이 작품을 보면서 생각하지만 작가인 크레파스라는 인물은 동양철학에 깊은 조예가 있다는 점과 그가 적은 글을 본다면 깊은 조예성과 더불어 부실한 요소도 같이 있다는 점이다. 즉 라이트노벨이란 특성이 경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문자적 서사를 가지고 있기에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문자서사에 만화나 애니메이션 포스터와 같은 일러스트를 첨부함으로써 라이트노벨이 만화와 같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라이트노벨의 주요 특성 중에서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은 설정이 미소녀 하렘이란 Cliche이다. 주인공 남자 주변에 많은 여자가 존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많은 여자들이 그에 대한 애정공세를 멈추지 않는 것은 내키지 않다. 왜냐하면 문학의 시작점은 바로 신화라는 것이다. 신화(神話)란 신이란 존재를 내세우나, 그것은 정말 신이 아니라 인간의 무의식적인 요소에 잠재된 욕망 내지 억압심리로부터 탄생한 캐릭터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만큼 좋은 현대적 신화는 없다. 그 캐릭터는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나 남이 하고픈 이야기를 대신 해주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만들어진 이야기이므로 누군가 거기에 자신 내지 혹은 남의 이야기를 끼워 넣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만든 이야기가 자신의 욕망과 억압에 비롯된 하나의 왜곡이라면, 그 왜곡되어버린 이야기가 타인도 역시 같이 빠져갈 수 있다. 그래서 미소녀 하렘 계통을 좋아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자기 현실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갇혀 자위하는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다고 이런 장르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방식이 하나의 대세라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점이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되고, 너무 부족하면 재미가 없는 법이다.

 

적당한 선에서 여러 가지의 종류가 다양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이야 말로 문화콘텐츠로서 라이트노벨 장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작품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하렘 요소 내지 또는 미소녀 캐릭터와 이벤트적인 요소에서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은 조금 지나쳤다고 할까? 아니라면 부드럽게 이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흔히 성적 묘사에 대해 논하자면 문학에서도 충분히 그런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문자서사가 영상서사로 변모될 때 문자서사 안에 있는 베드신 내지 성적으로 강렬한 모습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가령 볼테르의 <캉디드>에서 캉디드가 사모했던 퀴네공드 양은 아직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나 그녀는 무척 순진했다. 하지만 캉디드의 스승인 팡글로세가 퀴네공드 가문의 하녀와 성행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따라하고 싶어 캉디드와 성행위를 하려고 했으나, 자신의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쫓겨나는 장면이 나온다. 혹은 20세기 대표적인 소설가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자신의 여자 친구와 성행위를 나누는 모습이 소설에서 나온다. 그러니깐 단순히 라이트노벨이나 만화 또는 애니메이션이 선정적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인류가 만들어온 많은 문학에서 성적행위나 묘사 등은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 단지 문학에서 그런다고 해도 문학과 만화적 속성이 섞여 있는 라이트노벨이란 특성이 그런 성적 묘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듯하다. 불의 공주라고 불리는 국가 화선의 공주, 유하는 자신이 화선의 황녀이면서도 화선을 떠난 이유는 권력다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용병단은 화선에게 고용되었으며, 그 용병단은 월하라는 국가의 1번째 공주인 월영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2번째 공주인 월린이 황녀의 자리를 물러받아 레지스탕스와 같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유하와 월린의 만남은 서로 적이면서 어떻게 보면 같이 운명을 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문제는 유하가 월하의 국가를 구해주는 대신 월린은 유하의 하녀가 되어야 했다. 유하는 기가 세고 똑똑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이나, 그 성격에는 지나치도록 심각한 편집증적인 정신병이 보였다. 유하는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것도 알고 있으며, 자신의 가족들이 언제나 피로 물든 권력다툼으로 인간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 만큼 유하의 삐뚤어진 성격은 월린에게 대하는 모습에서 나온다. 자신의 손가락 하나 내지 혹은 두 개를 월린의 입에 넣는다는 점이다.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에서 월린이 유하의 손가락이 들어오고 나서 뺀 후의 장면이 책 중간 흑백 일러스트로 나오는데, 그 모습은 마치 여자와 남자가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게다가 월하는 자신의 큰 가슴 위에 자신의 두 손목을 올리고 있을 정도였다. 노골적인 성적묘사가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의 가장 큰 오류이지 않나 싶다. 적어도 이 책은 19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서사적인 흐름을 읽고 세계관과 인물에 대한 갈등과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리뷰의 목적이기도 하나, 적어도 리뷰 한다는 것은 비평적 관점을 배제해서는 안 되므로 이런 문제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표지나 일러스트가 다소 여성의 성적인 요소를 부각하여 모에속성을 노리는 것을 두고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책 내용에서 그런 노골적인 요소는 좋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Critical한 비평은 독자로서 분명히 생각하고 판단하여 반응해줘야 할 의무인 것 같다. 어째든 책의 내용을 읽어보자면, 이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우선 월하의 국가 내부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갈 것은 없다. 단지 그들은 위기에 처한 국가이고, 월하의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 상징성인 월린이 어떤 운명을 겪을지 모르는 작품이다. 월린이 죽거나 또는 유하가 죽거나 혹은 흑록이 죽게 되면 이 작품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다. 그들이 끝까지 생존하여 마지막에 이르러 어떤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스토리텔링의 맛이다. 적어도 이제 주요 인물들이 모였다면, 다른 식으로 보자면 진정한 적과 그 적에 대항할 수 있는 연합세력 및 지원군이 나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향이란 나라의 공주인 수희가 등장한다. 만약 요희전기가 국가별로 공주의 존재를 두고 작품시리즈를 붙인다면 다음 작품은 물의 공주라고 말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혹은 부록에 나오는 화율의 어머니의 고향은 화령이듯이 꽃의 공주로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공주 내지 황녀라는 인물을 달, 불, 꽃, 물로 통해 나가는 것은 각 나라마다 존재하는 속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불을 상징하는 화선은 강력한 무력, 달을 상징하는 월하는 신비한 존재(신선), 꽃은 아름다운 자연, 물은 풍요로운 국가로서 말이다.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은 그 풍요로운 경제대국인 물의 국가 수향의 공주가 나온다. 그녀는 화선에 의해 고국은 멸망했어도, 수향의 상징성이란 수희로서 존재한다.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에서는 강력한 화선을 대응하기 위해서는 군자금이 필요하고, 그 군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사람은 수향이란 국가였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법처럼 수향의 군주인 수희를 만나는 것은 화선의 책략이 존재했으며, 유하의 최대의 라이벌인 태화가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유하가 어떻게 하여 화선의 황궁에서 나왔는지에 대해 상세히 나오지 않으나, 단편집인 <작열 & 유하등>을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화율의 어머니인 화이는 산 채로 아궁이로 버려져 백골이 보일 정도로 타버렸고, 화율은 유하와 같이 여행 가려는 도중 유하의 수석 호위관의 책략에 의해 죽게 된다. 수석 호위관은 화이의 죽음으로 화이를 존경하거나 사모하거나 또는 측은하게 여기는 이들이 언젠가 문제를 일으킬 것을 알고, 화율을 꾀어내어 모두 섬멸한다. 그런 수석 호위관의 책략도 모른 채 자신의 배 다른 동생인 화율의 죽음을 모르는 유하는 돌아가면 화율에게 과자라도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하에게 과자를 사주고 싶은 배 다른 동생은 사라지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잔인한 권력다툼의 상처뿐이었다.

 

황궁을 나온 황녀, 그녀가 선택한 용병생활에서 자신을 숨길 수밖에 없는 유하는 그 누구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흑록에게 말이다. 흑록에게 집착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단지 흑록은 단지 죽을 곳은 찾고 있었다. 삶의 미학을 알지 못하는 흑록, 그는 누군가를 믿지 못하고, 누군가를 믿는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으며, 남에 의해 배신당하여 상처받는 것조차도 두려워했다. 철저히 자신의 마음에 벽을 쌓는 흑록에게 유하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대화나 상황설정은 매우 좋았다고 보았다. 유하가 명령을 내릴 적에 직접 흑록이 아니라 월린으로 통해 내린 점에서 말이다.

 

만약 단순히 흑록과 명령을 내리는 것과 작전을 위해 대화하는 사이가 되어버린다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 사이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월린이 중간에서 중재하던 모습에서 이 작품은 1권에서 삼각관계적인 요소에서 월린이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3권에서 어떻게 변할지 혹은 수희와 그녀의 비서인 연서로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흑록에게는 유하가 모든 것이란 점이다. 흑록은 1권부터 나오지만 아버지는 월하의 장군이나 전쟁에서 죽고, 자신은 월하가 패배하여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용병 생활하는 내내 망해버린 월하의 백성이란 이유로 무시당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즐거움과 희망을 품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그저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것이 흑록의 현실이었다. 그런 흑록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것이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이다. 제목처럼 불의 공주로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흑록으로 통해 인생의 전환점은 결국 자신의 주변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혹은 자신을 찾아 떠나는 기나긴 여정에서 말이다. 부록에서 등장하는 <작열 & 유아등>에서 수향의 고아로 태어나 뒷골목의 이리처럼 살아온 희는 아무런 삶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망해버린 수향, 그리고 버려진 고아, 자신이 주변을 인식할 때 자기가 눕고 있는 침대자리에 어떤 여자가 남자를 안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게를 전전하다 결국 뒷골목의 창녀촌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각종 허세와 거짓, 그리고 도둑질과 싸움질, 그에게 주어진 삶은 항상 피 냄새와 빛조차 외면하는 그림자였다. 화선의 용병이 될 때, 상대 가리지 않고 싸움만 즐겼으며, 전투에서는 미친 듯이 총과 칼을 쏘고 휘둘렀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오직 어깨에 메어진 큰 가방이었다. 그 가방 속에는 이때까지 용병활동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이다. 돈이 가방을 다 채우고 있을 정도니 얼마나 많은 피 냄새를 맡았을까? 그는 사나운 이리였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좋았다. 단지 칼로 심장을 찌르고, 총으로 상대방의 뇌수를 박살내면 말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항상 유령과 같이 잠재되어진 무의식적인 요소가 있었다. 그는 수향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수향에 대하여 원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말 수향에 대해 미워하고 싫다는 것은 그만큼 수향에 대해 마음속 깊이 담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가 자신의 그늘로부터 나오기 위해서는 수향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이다. 그는 수향에 대해 겉으로는 부정해도 속으로는 내심 수향에 대한 애증관계에 사로잡힌 것이다. 마지막에 수향의 왕이 도피생활하면서 자기만 편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은거하고 있었던 것을 알았다.

 

이때까지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수향이 그토록 증오만 하고 살았지만, 그 증오의 정점이 되어야 할 수향의 군주는 오히려 자신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끝까지 화선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싸웠던 것이다. 이때까지 그 누구에게 진지하지 않았던 희는 왕이 없는 허물어가는 왕궁에 거수경례를 하고, 그 마을을 침범하는 용병 출신 산적을 치러 간다. 거기서부터 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길을 간 것이다. 전쟁이란 공간에서 인간은 자신의 모든 터전을 잃거나 또는 타인의 터전을 모조리 부수거나 빼앗는다. 그런 전쟁이란 정치적 함의가 무력으로 동반될 때 그 모든 것이 악몽으로 변한다.

 

그렇기에 전쟁에서 이때까지 가진 것을 모두 소멸하게 만들고, 혹은 아무 것도 없는 자를 다른 방식으로 채우게 된다.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에서 자신의 길을 찾은 흑록이나 또는 부록에서 보인 희, 그들은 화선에 의해 고국을 잃고, 삶의 가치도 잃었다. 그런 만큼 요희전기에서는 전쟁이란 공간에서 던져진 인간의 삶을 역경과 위기 속에서 보여줄 것이다. 언제나 유하를 믿지 못한 흑록이 유하를 믿을 수 있던 것은 그녀가 죽을 위기에 처한 것과 그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내부의 갈등이 외부의 위기로부터 극복하는 것이라는 Narrative라는 전형적인 서사적 속성은 다음 3권부터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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