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공주와 잊지 못한 상처 - 요희전기 3, Novel Engine
크레파스 지음, Mx2J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요희전기 3번째인 <물의 공주와 잊지 못한 상처>를 보며 1권과 2권이 달과 불의 공주인 점에서 다시 공주라는 인물이 메인 표지 일러스트로 등장했다. 그 인물은 수향의 이사장 외동딸인 수희, 전형적인 자본력의 토대가 되는 화폐의 운영으로 움직이는 나라다. 이곳은 왕은 대주주이며, 모든 자본가보다 더 많은 나라의 주주를 가지고 있다. 단지 일반적인 부르주아와 다른 점은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에서 보여준 것처럼 수향의 이사장은 다른 곳에 망명하면서 치사하게 혼자만 몸은 보전하려고 한 게 아니라 가난과 고통 안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한 나라의 군주로서 충분한 책임감을 느끼고, 화선으로부터 침공당한 수향을 위해 스스로 힘든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의 딸인 수희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 수향을 위해 월린과 유하와 손을 잡게 되었다. 동맹을 임시를 맺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동맹 이후에 진행되어야 할 상황 전개다. 지나칠 만큼 강한 화선의 공격 아래 무력한 월하의 게릴라전은 이미 의미 없는 것처럼 되었다. 화선의 왕자이며 유하의 라이벌인 태화는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월린과 월하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들에 대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라 한다. 일부러 모조리 죽이지 않고, 자기 진영에 빈틈을 만들어 서로 대치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의 스토리설정에서 숨은 복선과 플롯은 드러나지 않겠지만, 전반적으로 화선이란 국가를 보면 내부적으로 권력다툼이 매우 심한 곳이란 점이다. 요희전기 2권 별권부록에 나온 꽃의 나라에 온 황비와 그녀의 아이가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둘 다 아무런 힘도 없었고, 그저 가만히 인형처럼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녀들의 죽음은 화선이란 국가가 얼마나 많은 권력이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단순히 황제와 황제의 자제인 황녀와 황자만의 다툼만이 아니다. 그 뒤에서 움직이는 세력들 스스로가 알아서 권력다툼에 참가하여 원하지도 않은 죽음을 만들어낸다. 그런 세계에 있으려면 보통 사람의 정신으로 견딜 수 없다. 그 잔혹한 타성이 길들여져 같이 파멸 속으로 달려가거나 또는 거기서 나올 수밖에 없다. 아니라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자신의 현재 위치를 지키며 어둠의 타성에 빠지지 않게 살 수밖에 없다.

 

화선의 황자인 태화는 그런 존재인 것 같았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냉정한 그의 군사작전은 천재소녀인 유하 이상으로 능력을 보여준다. 월린이 있는 월하국가와 대립으로 그가 얻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니, 살아가기 위해 싸운다는 말은 결국 그에게 어떤 운명적인 흐름에 몸을 담아가는 셈이다. 그래서 월하에 최고의 전사인 산신의 반응은 재미있다. 산신이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변에 위치한 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다. 바로 흐름에 따라 움직이고, 그 흐름에 따라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제는 그 흐름을 누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신의 국가일 수 있고, 타국의 존재일 수 있다. 화선의 황자 태화는 바로 자신들이야말로 화신이고, 화신은 산신처럼 흐름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한다.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정체된 상태에서 멈추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존에 멈추어진 큰 벽이 있다는 뜻이다. 화선의 황자는 남들이 모르게 큰 계획을 꾸미는 것이다. 억지로 월린과 유하를 곤경에 빠뜨리고, 그러면서도 바로 죽이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기도 한다.

 

단지 그의 계획에는 흑록과 큰 관계가 있다. 또한 유하가 왜 그렇게도 흑록에게 집착하는 이유도 뭔가 숨어 있다. 흑록은 분명 월하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월하가 망하면서 그의 고국을 등졌다. 그렇지만 그가 등진 것은 사실 국가만 아니라 또 하나가 있었다. 바로 동생의 존재였다. 태화는 흑록에게 흑록의 동생 흑비가 자신의 옆에 있고, 그녀는 완벽한 화신이라고 한다. 화신의 존재에서 흑비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 전란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는가? 단순히 3권은 그런 새로운 상황만 암시해주고 막을 내린다.

 

이런 상황을 정리하면 전체적인 흐름 화선으로부터 수향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주주총회를 열고, 주주총회 과정에서 시량의 방해, 그리고 계속되는 대립, 그 와중에서 주주총회의 패배, 그렇지만 단순히 태화가 노리는 것은 월하를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월하가 화선과 비등하게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는 국가적 차원, 정치적 상황에서 간단해 보이는 공식이 성립되나 그 상황에 놓여있는 인간에게 간단하지 못한 것이다. 국가라는 것은 눈앞에 당장 보이는 게 아니라, 그 국가조차도 인간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에서 국가 그 자체가 관념적 존재에서 하나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국가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국가의 사람들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 많은 군인들은 전투 중에 무참하게 사라져 가버린다. 그래서 잊지 못할 상처란, 흑록만 그런 것만이 아니라 월하에서 활동하는 전장지휘관 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매우 힘든 전투상황에서 군사 반 이상을 탈환하여 무사히 퇴각했다. 퇴각에서 그는 많은 병사를 살릴 수 있었지만, 그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그의 선택은 결코 남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지시하는 과정에서 실제 그곳이 함정인 줄 알면서도 부하에게 가라고 명령하거나, 또는 그 과정에서 위험한 것임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여 상황을 타파해 나갔다. 자신과 많은 군인들은 살아왔지만, 대신 누군가를 희생하게 만든 셈이다. 전쟁에서 누군가의 희생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그 레퀴엠을 울리게 만들 상황에서 지휘관으로서 휘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족감, 즉 자신에게 대한 만족하는 것이다. 그 만족감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성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휘는 그런 성과를 내면서도 자신의 기만적 행위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

 

휘의 죽음으로 살아난 흑록은 그런 기분을 알고 있었다. 살아남는 것은 중요하나, 그런 삶이란 행복과 동시에 허무함과 후회로 가득하여 복잡한 심정이 되게 마련이다. 흑록이 가진 그런 허무함과 순간적인 위기에 놓인 생존본능, 인간은 자신의 무력한 현실 앞에 지루함을 느끼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죽음의 경계로 간다. 죽음의 공간이 펼쳐지기에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시 자신에 대한 삶의 의지가 없다는 점과 그 의지가 없다는 점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루한 일상이 되어버린 이유는 자신에게 한가한 평온함이 상실된 셈이다. 요희전기 2권에서 유하와 사이가 서먹했던 흑록의 모습은 자신이 언제나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 있어서이다. 휘의 죽음에서 자신만 살려던 휘의 과거에서 휘는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후회가 상처가 되었고, 타인과의 관계를 더 나아갈 수 없는 벽이 된 것이다. 전쟁이란 인간을 극한의 상황과 위기를 주며, 극단적 인간을 보여준다.

 

거기서 망가지거나 망가지지 않거나, 망가지더라도 단지 어떻게 망가져 가서 최후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라는 것이다. 전쟁이란 많은 인간들을 비참하게 만들어내는 재앙 중에 재앙이다. 그런 재앙에서 인간은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그런데도 전쟁을 계속 원하는 자는 있고, 그 전쟁을 계속 유지하여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내는 자도 있다. 그 안에서 흐름을 따라가는 산신이나, 그 흐름을 만드는 화신이나, 또는 거기에 사라지는 인간들의 운명은 결국 불행이란 것을 알면서 그 속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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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을 두고 말하기란 참 어렵다. 인생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의 가치는 결국 시간적 축척에 의해 현재 조성된 본인의 지금으로 통해 결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생을 그 누구의 판단으로 결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타인에 의해 보이게 해야 하는지는 정말 어렵다. 가령 우리는 우리의 판단 아래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기보단 타인의 관점에 의해 결정된다. 남들보다 좋은 차, 남들보다 좋은 집, 남들보다 좋은 여건 등에서 말이다. 물론 물질적인 만족에서 인생의 출세라는 목표는 보통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도 남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살아갈 미래 그 모두가 인생이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라이트노벨 원작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인생>은 참으로 독특한 소재를 차용하여 만든 작품이다. 인생이란 말은 쉽게 사용하면서 막상 논하자면 매우 어려운 내용이다. 인생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시작하면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일까? 인생은 사랑이라든지 혹은 고통이라든지 고독이라든지 다양한 말이 나온다. 철학에서 결국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 역시 인간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것 역시 인간의 삶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서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들은 지혜를 사랑했다. 단순히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은 남녀의 사이도, 부모의 사이에도 존재하듯이 사랑이란 이름은 어떻게든 여기저기서 사용되는 말이다. 하지만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앎을 알아가는 것에 대해 사랑이다.

 

알고 싶은 것은 그저 보고 외우는 암기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을 넘어 인간 그 자체를 과연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인간은 시간을 흘러 그 시간의 축척에 의해 현재의 모습이 결정화된다. 그런 만큼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이며, 비가역적인 시간으로 인해 살아있음이 있다면 분명히 죽음이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결국 죽어가는 것이고, 인간이 죽었다는 사실이 있었기에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삶,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인생에 대해 논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아마 철학책 수백 권이 들이대어도 난해한 문제다.

 

2. 애니메이션 <인생>

결국 인간에 대해 생각하면 마지막에 본인으로 돌아가고, 그 자신에 대한 실존적인 존재를 의문하고, 거기에 대한 답은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루소의 자연주의적인 요소일지? 아니면 타인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지는 각자마다 다르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윤리학이란 결국 인간의 삶을 다루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말해주는 학문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삶이란 바로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지금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행복을 위해서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만족을 위해서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고, 그 인간의 시간들이 곧 인생이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 <인생>은 바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들이 오고, 그 고민을 위해 해답을 내는 것이 제2신문부원들의 업무다. 인생 상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자? 만약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혹은 가지고 싶은 것이나 모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도저히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으로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분명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나이가 10대든, 20대든, 혹은 그 이상이 되어도 작은 문제가 발생하여 해결하지 못한 채 계속 주변을 방황하고 있다면 일상생활이 원만히 지나갈 수 없다.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다. 동물들은 무의식적인 본능과 순간적인 감정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자신의 이성에 의한 판단력으로 살아가지 않는 존재이다. 인간이 가진 판단력이 있기에 인간은 동물이면서 사회화된 존재다. 인간은 사회화된 존재이기에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은 단순히 자신의 단순한 무의식과 감정으로 채울 수가 없다. 인간이 가진 미적 감각 즉 쾌 내지 불쾌라는 판단력이 존재하고, 바로 그 때문에 취향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 아주 동물 중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참새처럼 배고프면 모이를 먹고, 잠이 오면 잠자고, 때로는 번식활동을 하는 것에 모든 삶을 바친다면 인간으로서 인생이 존재하지 않는다.

 

3. 등장인물들

인간에게 인생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여가생활, 즉 자신이 어디에 얽매여 기계처럼 단순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다. 때로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서 타인의 목적과 부딪히기도 하여 갈등과 고통이 수반되기도 한다. 인생이란 어떻게 보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도 보여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완벽하게 배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 노력하고 새로운 운명을 찾으려 한다. <인생>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민 상담상자 속에 이런저런 사연을 보내준다.

 

다들 처음에 별로 없을 것이라 여겼지만, 점차 질문 횟수가 늘어나고, 제2신문부원에서 이과계열 리노, 문과계열 후미, 체육게열 이쿠미가 상담을 맡아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결과들을 제2신문부장의 사촌동생 아카마츠가 정리하여 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아카마츠는 모든 경계선상에 해당되지도 그리고 접점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이과, 문과, 체육계는 서로 극성인 분야고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추후에 들어오는 예술계 에미까지 말이다, 왜 인생에 대해 이렇게 서로 다른 4명의 소녀가 모여 이야기 하는 것일까? 우선 이과에서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존재하고, 지식과 과학기술에 의해 삶을 유지했다, 그런 점에서 이과의 리노가 선택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기록을 문자로 남기고, 특히 역사서적으로 남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상상력으로 문학을 펼쳐 인간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문학의 후미가 선택되었다. 인간은 이성과 감정 앞에 무의식이란 것에 의해 더 작용을 많이 받는다. 조건적으로 반사하는 점에서 체육계 이쿠미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예술이라 했던가? 사실 인간의 삶은 그대로 바라보면 절대로 우리는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을 광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어느 한 대상으로 통해 여러 가지의 시선을 남겨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에미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하는 조건이 성립된다.

 

4. 제2신문부의 설립

이들이 펼치는 고민 해결 상담은 문제를 받아본 상담자로서 혹은 그 문제를 안고 있는 고민하는 자로서 차근차근 숙제를 해결한다. 즉 우리 인간 그 누구도 고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없으며, 그 고민을 상담 받는 사람도 역시 고민이 있어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이란 애니메이션에서 4명의 미소녀가 내놓는 답은 생각 외로 생뚱맞고 극단적이나, 그런 극단적인 요소가 서로서로 맞물리면 새로운 결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결과의 마지막 숙제를 정리하는 것은 아카마츠다. 아카마츠의 역할을 보편적인 존재, 보편적인 사람, 보편적인 인생이다. 다른 부원과 달리 아카마츠의 장점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제11화에서 아카마츠의 사촌누나이며, 제2신문부장인 아야카의 말을 빌려보자. 11화에서 아야카는 학생회장의 부정을 밝히기 위해 제2신문부를 만들고, 자신만의 영역을 확대하려 했다. 그리고 새로운 학생회장으로 바로 아카마츠를 내놓으려 했다. 그런 점에서 아야카의 대사를 잘 들어야 하는 점이다. “각성해! 네 안에 잠든 사자의 혼을 깨워! 유우키는 질 가능성이 높은 싸움에서도 해야만 할 때는 결코 물러서지 않아. 그런 남자지(아카마츠는 여기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야. 그것은 시라카와 학생회장에게 깨질 각오를 일하라는 이야기지?’라고 대답)? 어째든 평소의 유우키는 눈에 띄지 않고, 물개성에 공부나 운동도 못하고, 특기도 없고, 재밌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여자애를 좀 엉큼한 눈으로 보지만, 여차할 때에는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일 걸 알아.”

 

5. 아카마츠의 가치

이렇게 말한다. 아야카의 말에 아카마츠는 “플러스 치고는 너무 마이너스 평가다.”라고 대답한다. 아야카를 다정한 미소로 사촌동생인 아카마츠에게 “자신감을 가져. 유우키가 그런 성격이라 모두 안심하고 활동하는 거야. 엉뚱한 짓을 해도 유우키가 마지막까지 어떻게 해주니까. 리노도 후미도 이쿠미도 에미도 모두 그렇게 생각할거야. 사실은 의지하고 있을 거야. 나도 그래, 나 때문에 학생회장이랑 대립하게 되었는데, 불만 하나 없이 오히려 나를 지지해주잖아.”라고 말이다. 결국 학생회장과 싸우게 된 아야카는 다른 4인의 미소녀처럼 속성을 가지지 않은 미소녀지만, 1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저널리즘이란 기자의 정신이다. 신문부원인 그녀가 학생회장의 비리를 폭로로 인해 강제로 퇴출당하고, 제2신문부를 만들었으며, 다시 그 문제를 밝히기 위해 아카마츠와 4인 소녀를 부원으로 맞이한다. 저널리즘이란 결국 사실에 대한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공정성이 중요한 것이다. 기자의 업무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폭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발에서 기자정신이 나온다. 5명의 미소녀들이 아카마츠를 의지하는 이유는 아카마츠가 너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카마츠가 유일하게 가진 것은 보편적인 가치관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통 사람과 같다는 점이다. 합숙훈련 연습을 부실에서 할 때 자신이 가진 야한 책을 어디에 숨기는지 이야기할 때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남자고교생이었다. 보통 학생이고 자신에게 아무런 특기와 내세울 것이 없다. 그래서 유우키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곧 자신이 아무 것도 내세울 것도 없으니 그만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남의 말을 경청하거나 최대한 이해하려 해주는 것이다. 다른 부원들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 고집하고 주장할 때 오직 아카마츠만 중간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최후의 답변은 그가 작성한다.

 

6. 아카마츠의 행동

물론 제대로 채택된 답변자의 코멘트도 올라가지만, 아카마츠가 모든 고민을 정리하여 부원들에게 알려준다. 그래서 리노가 친구를 사귈 수 있었고, 리노와 아카마츠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아카마츠는 내세울 것은 전혀 없지만, 1화부터 리노의 말을 잘 경청해준다. 이때까지 리노는 그 누구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진 지식은 일반 고등학생이 가진 지식을 넘어선 것이고, 특히 이과계열에서 일반과학이 아니라 전문적인 물리학, 지구과학, 화학, 생물학으로 파고들어갔다. 이쿠미의 경우 운동을 좋아하므로 야구나 축구, 농구 등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후미 역시 평소 성격이 부드럽고, 문학계열이므로 다양한 소재로 통해 타인과 대화가 가능했다. 에미는 미술부에 원래 있었기 때문에 나름 부활동을 열심히 한 셈이다.

 

그러나 에미는 예술계로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광학적으로 바라보기에 그녀가 붓을 잡으면 광인이 되어 예술인으로서 새로운 세계가 등장한다. 물론 에미 역시 고립된 존재이기도 하나 자기만의 세계가 너무 강하여 감히 누가 옆에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런다면 에미 그 자체는 타인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개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 뿐이었다. 이에 반해 리노는 타인과의 교제를 무의식적으로 하고 싶으나 어떻게 할지 몰라 억지로 멀리하려 했다. 그런 공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관심거리인 과학에 대해 귀를 기울여준 아카마츠가 등장했다.

 

아카마츠는 그저 처음에는 남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부터 시작했으나, 사실 리노와의 사건으로 인해 점차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아카마츠가 혹시라도 다른 여자아이에게 관심을 주거나 뭔가 이상한 행동들이 보이면 리노는 무의식적으로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 추후에 자신이 제일 귀엽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투표를 할 적에 아카마츠는 리노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리노에게 가장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다수의 미소녀에 남자 1명이란 하렘구조가 외부로 드러나지만, 사실상 애니메이션 <인생>에서 하렘적인 요소를 제거되었다. 게다가 리노와 아카마츠의 관계를 보면서 오히려 옆에 친구들이 응원해주는 모습과 고교생이 되어도 여자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지 못한 아카마츠를 두고 설교하는 아야카의 모습에선 이 작품이 보통의 애니메이션처럼 미소녀를 간판으로 내걸지만, 결코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이나 하렘 같은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았다. 따라서 <인생>이란 제목과 같은 작품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7. 시학(詩學)

아카마츠가 결코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나, 그가 구심점이 되는 이유는 바로 위에서 거론한 것처럼 그가 보여준 보편적인 정신이고, 그 보편성은 윤리적인 의식이다. 타인에 대한 절대적 가치에서 공공선, 최소한으로 지켜주는 선이 아니라 그 이상의 공동선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가 학생회장에게 맞선 것과 골치 아픈 일들을 도맡는 것에서 아카마츠의 인격이 나온다. 그리고 아카마츠 중심으로 부원들이 일상생활을 보여준다. 그 일상생활이란 남들의 고민을 듣고 해결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들어오는 고민들은 너무 거창하거나 너무 대단한 것보단 언제 어디서 누구나 생각할만한 고민 상담들이다.

 

따라서 <인생>은 거대한 이야기를 중심이 아니라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구조를 이룬다. 물론 최종목표는 학생회장의 타도이고, 그 과정에서 제2신문부의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상담활동을 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 아주 유명한 문구가 있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시는 바로 그 누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역사는 어느 특정인물의 기록이다. 물론 <인생>에서 어느 누구의 고민 이야기는 작품에서 하나의 역사로 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적 가치는 주류적으로 정치적인 큰 영향력이 있을 경우 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책에 소년 A가 소녀 B를 사랑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춘향뎐>에서 나올만한 이야기다.

 

<인생>의 고민 코너는 우리가 살면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우리의 고민이 저런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었지! 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고민을 상담하여 해결하는 과정에서 너무 누구나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요소도 있었지만, 이른바 정론이란 것이 존재했고, 단지 정론으로 풀어나갈 상담에서 좀 더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것을 강조했다. 우리 인간은 거대한 문제로 고민하기보단 오히려 사소한 것들로 고민한다. 아주 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손을 쓸 방법도 없고 바꿀 수 있는 여지도 없다. 국가경제나 세계평화 같은 큰 문제를 우리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소한 것들은 얼마든지 생각하고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소한 것에 짜증을 내고 웃고 울기에 고민하는 것이다.

 

8.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인가?

<인생>이란 제목처럼 이 작품은 인생에 대하여 상담을 받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결국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질문에서 그 해답은 행복이다. 행복이야말로 인간이 최종적인 목표고 희망사항이다. 여기에 덧붙여 행복을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에 이 글에서 인간은 재력과 권력의 척도로 행복으로 연결될 수 있겠지만, 결국 그것도 타인의 존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고, 인간 그 자체가 사회화로서 자기의 실제적인 모습을 은폐되고, 허례허식적인 모습만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그 행복은 어떻게 해야 나오는가? 그것은 <인생> 5화에서 나온다. 5화에서 제1신문부와 제2신문부의 통폐합 승부에서 각 팀에서 3명씩의 발제자가 나와 서로 토론을 벌인다. 처음에 리노와 땡중, 이쿠미와 제1신문부, 그리고 마지막이 후미와 후미의 할아버지다. 제3파전의 후미와 할아버지의 대화는 이 작품에서 나오는 <인생>이란 제목을 정확하게 알게 해주는 것이 나온다. 후미와 할아버지 대화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어느 질의한 사람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다가갈 수 없는 꿈이라면 바로 그 목표인 꿈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을지에 대한 질문을 시합에 의뢰한다.

 

토론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십자창을 휘두른 후에 정신집중으로 얻은 답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꿈을 가지지 않아도 결과를 낼 수 있다고 했지? 하지만 꿈이란 성과를 내기 위해 갖는 게 아니다. 꿈이란 사람의 삶의 모습 그 자체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 밖에 없는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 꿈이 있는 게다. 결과는 꿈을 갖는 것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후미는 “저도 집중할게요. 마치 최종화인 것처럼. 지금까지의 경험과 기억을 전부 불러들이겠어요. 너무 집중해서 떠올릴 범위를 좀 넘어버렸지만,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은 꿈만이 아니에요.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은 사람이에요. 소중한 사람과 보낸 시간이 인생을 빛나게 해줘요. 니노, 이쿠미, 아카마츠, 소중한 사람들과 보낸 나날이 제 인생을 빛내주고 있어요! 물론 할아버지와의 시간도요. 할아버지 늘 고마워요.”

 

9. <인생>의 목표는 행복

<인생>의 작품 외적인 결론은 11화에서 아야카가 아카마츠를 차기 학생회장으로 추천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적인 결론, 즉 <인생>이란 애니메이션 인생이란 타이틀로서 말하는 결론은 5화에서 나온다. 바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서 꿈이

중요한지 아닌지에서 결국 꿈은 없어도 살 수 없지만, 인간이 인간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요소는 프랑스 문학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란 가명으로 적은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랑이란 단순히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남녀의 사랑만이 아니라 자기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면 꿈이 없어도 행복하고, 그 공간에서 꿈과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그 목표는 이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다는 것이다.

 

고민 상담을 하는 사람들이 그 고민이 해결하는 순간 얼굴에 미소가 만발하여 다시 일상생활에 돌아온다. 그렇지만 또 다시 다른 고민에 빠지고 또 거기에 대한 근심이 생긴다. 인간은 한 번 태어난 이상 고민과 근심을 버릴 수 없는 존재다. 물론 힘들기도 하나 그것이 해결되면 하나의 성취감으로서 큰 행복이 온다. 그렇지만 행복은 혼자만 즐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옆에 아무도 자신의 감정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결국은 외톨이란 점이다. 위에서 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다 리노와 아카마츠가 나왔는가? 리노는 이때까지 자신의 생일을 한 번도 챙기지 않은 소녀이고, 거기에 대해 아카마츠와 친구들은 리노의 생일을 챙겨준다.

 

생일을 챙겨주는 이유는 단지 리노가 친구로서 좋아하기 때문인 것이다. 친구들이 서로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기분 좋은 행복이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행복함을 느끼기보단 모두 나누면 그 배가 되는 것이다. <인생>에서 리노의 첫 모습과 마지막화의 모습을 보면, 처음에 차갑고 외로운 소녀이나, 마지막엔 사랑에 빠진 평범한 소녀로 등장한다. 자신에게 아무 것이 없다고 생각한 리노가 자신에게도 의지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후미가 말한 것처럼 사랑, 우정은 소중하다.

 

10. 우리들의 삶과 <인생>

그것은 우리 인간들을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그 존재 객체로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최근 산업화 이후 자본주의 급속화로 세상은 모든 것은 물질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친구 사이에도 손익분기점을 따지면서 가린다.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물화(物化)되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적인 요소로서 대해주는 게 아니라 계속 도구적 가치로 남아버린 것이다. 남을 도구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조차도 도구로 전략하고, 인간이 도구로 된다는 것은 결국 소외되어 고립되는 셈이다.

 

그런 인생이 과연 재미있을까? 물론 물질적인 부와 권력이 넘치면 좋겠으나, 마이다스의 왕처럼 자신의 손에 닿은 모든 게 금이 된다면 그는 영원한 외톨이로 살다 죽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 인간이 가장 필요하기 때문에 가장 저렴한 존재가 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인간을 착취, 억압, 방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다른 것은 모르지만 친구의 소중함은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인생>이란 애니메이션은 후미의 버스트 무빙(여자의 몸과 가슴이 따로 움직이는 장면) 내지 판치라(치마 아래 팬티가 보이는 장면)가 종종 보이지만, 예고편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후미가 좋아하는 이야기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인 <달려라 메로스>가 중요하다.

 

<달려라 메로스>는 고대 그리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메로스가 난폭한 왕에게 반항하다가 붙잡혀 며칠 후에 처형된다. 그런데 메로스에게 하나뿐인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고, 그 여동생은 어느 남자와 결혼한다. 죽기 전에 메로스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왕에게 간청하나, 왕은 그것을 보장하기 위해 메로스의 친구를 대신 감옥에 갇히게 하고, 만약 메로스가 기일에 오지 않으면 메로스를 살려주나 친구를 대신 처형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메로스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다 본 후 다시 처형장으로 가야 하나 마지막까지 고뇌하고 방황하지만 결국 친구와의 약속을 지킨다. 메로스를 믿어준 친구, 그 친구를 살리기 위해 달린 메로스의 우정이 <인생>이 보여준 작품의 테마가 아닌가 싶다. 친구는 역시 소중하다. 그것은 나이가 먹거나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되어도 유일하게 받아줄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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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 2014-11-1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니코윤리학을 보게 될 줄이야!! ㅎㅎㅎ

만화애니비평 2014-11-11 12:45   좋아요 0 | URL
오덕력은 뭐든지 통합니다
 
감정코치 K 2 - 내 안의 불협화음
이진 지음, 재수 그림, 조벽 외 감수 / 해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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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말하는 꿈이란 무엇일까? 지금 당신들에게 나는 질문 1가지를 던지고 싶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혹은 그 대상이 어른이라면 당신의 아이들의 꿈은 무엇입니까? 참 어려운 질문이다. 꿈이란 것은 우리가 잠을 자면서 수면 중 이미지로 보는 환상이 아니라 자신이 언젠가는 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이다.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지 뒤로는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1번뿐인 인생에서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아니면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인생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것이어야 했다.


‘것이다가 아닌 것이어야 했다.’라는 말은 결국 우리는 꿈을 꾸기는 하지만, 우리의 꿈이 아니라 타인의 꿈을 자신의 것으로 해야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뿐이다. 따라서 취미생활을 하는 것은 직업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꿈이나 또는 자아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정해진 틀에만 끌려가면 항상 우리의 마음은 촉박한 시간관념 아래 자신을 감옥으로 내몰 것이다.


<감정코치K> 2권에서는 그런 학생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공부를 잘하고 외모도 단정하며, 심지어 아버지는 국문학과 교수, 어머니는 학교 교사이다. 그리고 그 부모들은 하나뿐인 딸에게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기보단 더 좋은 곳을 보라고 한다. 보는 순간 참 답답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딸은 그러면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은 타인에게 도덕적이고 존경받는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하면서 정작 중요한 상황에서 결국 자신의 이익으로 가게 된다. 그런 부모의 이중성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다른 부모라면 몰라도 교육자라는 부모들은 그런 도덕적 가치를 떠나 더 윤리적인 가치를 요구되는데 말이다.


그 교육자의 아이인 학생은 공부를 최고이나, 자신의 친구 중에 춤을 좋아하는 학업성과가 부진한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외모는 볼품이 없더라도 항상 뭔가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힘으로 방송출현까지 한다. 그런 소녀를 보면 우등생 친구는 질투를 한다. 자신은 아무 것도 정한 것도 없이 이렇게 고민하는데, 뭔가 이루는 그 소녀를 보면서 말이다. 그 소녀의 질투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계속 자신을 다그치는 상황에서 자유로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 즉 동경과 질투의 대상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부족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알기에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학생에게 꿈을 꾸게 하기보단 오히려 꿈을 부정하고, 정해진 성공이라는 출세만 요구한다. 성공의 인생은 무엇인가? 문학과 고전에서 위인들의 업적들을 보여주면서 그 위인들이 그렇게 될 수 있던 이유는 막상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가치이지 단순히 공부만 하는 기계로 만들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망가뜨리는 교육방법에서 18세기 철학자 루소의 <Emile>이 전해주는 바는 정말 큰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은 그 당시와 다르지만, 학생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 불편함에서 아이들은 강요만 당한다.


어른들은 지성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나 감성적인 공감성은 없고,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냄새를 맡을 수 없다. 단지 풍기는 것은 향수나 화장품 냄새 또는 담배냄새 정도일까? 아이들은 자신의 고민을 쉽게 털어놓지 못한다. 고민을 터는 순간 돌아오는 것은 위로와 이해보다는 다그침과 강요뿐이란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더욱 교활해지거나 또는 더욱 반항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민은 더 심해지고,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내몰린다. 이 책 다른 편에서 아주 뚱뚱한 여학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겉보기에 너무 뚱뚱하고, 신체검사에서 100㎏을 넘을 정도도 매우 심각한 건강상태였다. 그 학생이 그렇게 된 이유는 가정환경이었다. 그런다고 부모와 가족을 나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청소부 일로 지쳤으며, 남동생은 아직까지도 어린 아이다. 그러나 그 학생은 어린 시절 삼촌과 같이 살았는데, 대한민국에서 남자친척이 여자가족에게 성추행하는 게 1/3이란 점이 매우 놀라웠다. 보이지 않는 가족사회의 어두운 부분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학생은 과식을 하게 되었다. 스트레스성 폭식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내몰리면 반사적인 조건에 의해 계속 음식을 먹게 된다.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의 심리를 되찾으려 하나, 막상 신체가 변하면서 또 다른 심리적 위축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과거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여긴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쉽게 깨지기 쉬운 유리와 같은 것이다. 깨진 유리를 다시 복원할 수 없지만, 그 깨진 유리의 파편을 치워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강조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마치 그런 부당한 일을 보면서 당연히 그래야지 혹은 마치 자신이 좋은 사람인양 말을 하겠지만, 막상 상황에 닥치면 그렇게 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또 다른 이야기지만,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동성연애에 대하여 다소 혐오적인 눈으로 보고 있지만, 그런다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동성연애를 하는 것 자체를 막을 권리는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렇게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면 동성연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고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을 제대로 건네주고 있는지도 궁금할 정도다. 자유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무엇을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조건 아래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용납되지 않은 것은 사회라는 여전하고, 그런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라면 더욱 심하다.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은 법적인 처벌로 바로 처리할 수 있지만, 학교 안의 폭력은 상당히 미묘하다. 동성연애에 눈을 뜬 남학생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 대상이 되어야 하는 대상은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다고 그런 학생의 마음을 짓밟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 상태로 계속 살아야 한다면 참 어려운 삶일 수밖에 없다. 사회라는 공간에서 우리 인간은 언제나 남과의 경쟁을 강요받아 왔다. 하지만 천재가 아닌 이상, 혹은 경제적․사회적 조건이 현저하게 차이나지 않은 이상 거기서 거기인 평범한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보았자 우린 우월함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자신의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체 내에서 소수의 약자를 선발하여 억압하여 거기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왕따현상이나 학원폭력에서 단순히 제왕적인 일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군중심리 자체도 더 심각한 문제다. 일진은 따로 격리하여 다른 방식으로 교육방침을 내리면 되지만, 집단 내의 폭력이란 하나의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학생을 게이라고 왕따 시키는 학생들의 모습에선 자신의 부조리를 인정하는 것보단 차라리 정의의 가치로서 사회악을 근절하는 정의의 사도처럼 보인다.


그런 왕따를 하는 학생에 대해 어른들은 분명히 나무라 하겠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어른이고, 어른들조차도 그런 왕따현상을 더 심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소중하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이익에 치중하는 모습에 어떻게 학생들에게 인생의 가치를 논할 수 있으랴? 계속 그런 가치관에 물들여진 학생들의 모습에서 언젠가 또 다른 가면을 쓴 어른이 되어 억압의 사슬은 계속 묶여질 뿐이다. 감정코치K에 나온 상담자는 그런 세상을 이미 맛을 본 사람이고, 그런 세상의 일원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따라서 상담이 가능한 것은 그 자신조차 방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황하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면 계속 억압의 사슬은 더 심하게 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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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코치 K 1 - 진짜 얼굴, 가짜 얼굴
이진 지음, 재수 그림, 조벽 외 감수 / 해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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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구나 같을 수가 없다. 인간 그 모습 그대로의 자연적인 모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사람은 운동을 어느 사람을 글 쓰고 사색하는 것을 어느 사람들은 분석하는 것을 특기일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 사회는 아쉽게도 그런 개인적 소질과 적성으로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단지 그런 선택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효용적인 즉 자본력과 권력을 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추천한다. 인간의 사회성에서 한계성이란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로서 보는 게 아니라 타인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나의 타인은 당신일 수도 있겠지만, 그 타인이던 당신이 자신조차도 타인에게 타인이다. 우리는 타인과 타인 속에서 본인조차도 타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와 욕망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과 거기서 생겨난 틀에서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있는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채 소실되어 간다. 그런 점에서 감정코치K는 우리 사회에 보여주는 이런 단면적인 모순이 결국 사회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하게 왜곡되어 다양한 형태로 문제점을 일으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학생에게 증폭되어 보여준다. 학생들은 아직까지 이성적인 판단력이 완성되지 않고, 심지어 감정적인 조율 역시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 그런다고 학생만이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그 학생들을 가르치고 돌보고 책임지어야 하는 어른조차도 더 심각한 판단력 부족과 감정의 부적절한 통제로 일을 더 크게 만든다. 아이들이 왜 힘들어 하는가? 대부분 어른들은 아이들의 문제라고 본다. 물론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문제를 당장 없애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인가?

 

어떤 문제인 부분만 제거하면 그것으로 끝이 날까? 학교폭력으로 얼룩이 진 사람을 다른 곳에 보낸다고 그 학교 자체에 폭력이 종결되는 것인가? 아니라면 폭력의 발생원을 다른 곳에 보내면 거기도 생기지 않은가? 극단적인 살인이나 강간 같은 범죄가 아닌 이상 분명 아이들의 비행행위나 또는 거기에 대한 피해는 원인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는 악독하고 도저히 인간의 윤리의식으로 저지르면 안 되는 행위지만, 후자의 경우 감정의 기복이나 무의식적인 충동에서 순간적인 사고가 발생한다.

 

나도 지금은 학생이란 신분에서 한참 멀어진 사람이나, 그런다고 하여 이 책에서 보인 학생들의 고민에 공감하지 않을 수도 없겠지만, 다소간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되었다. 우리 시대나 지금 학생시대나 학교라는 공간은 꿈을 키우는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꿈을 버리고 억지로 주형틀에 넣어 기성품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라 생각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처럼 학교는 하나의 감시체계가 존재하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요건으로 인간을 키우는 것보다는 인간 그 자체를 재생산하는 공장처럼 느낀다.

 

아이들의 감정과 마음은 자연적이나, 그 자연적인 요소를 억압된 공간에서 나두게 되니 당연히 뭔가 어긋나고 비뚤어질 수밖에 없다. 처음 이야기에서 투명인간인 학생은 자신은 그림을 좋아하지만, 그림만 그리다보니 남들에게 존재감이 없다. 그런 자신의 존재감 부족과 타인들로부터 왕따현상은 개인적 문제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다. 자기가 가진 특기가 드러낼 수 없다면, 결국 이것을 하나의 기예로서 당당히 올려 보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신의 특기가 인정받게 된다면 타인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른바 기죽이지 말고 기를 살려줘야 하는 교육방법이다.

 

기를 살린다는 것은 오만과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정해진 규율과 틀에만 고정시키는 협소한 교육방법이 아니다. 어차피 머리가 좋든 나쁘든 또는 시험을 잘 보든 못 보든, 학교시험을 보면 1등부터 꼴등은 정해진 자리이다. 어느 누구에게 성적이 떨어져 고민하고 있다면 다른 누구는 고민하지 않으랴? 공부 못한다고 하여 결국 다 같이 공부 열심히 해도 꼴찌는 존재하는 법이다. 꼴찌에게 따뜻한 손을 내어주지 않는 불친절한 세상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물질적인 혜택이 도래했지 마음에 대한 혜택은 일절 없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시대적 상황에 모든 것을 판단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른 세계를 보고 있고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다못해 일진인 애들도 최소한의 정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정조차도 없다. 인간이 철저하게 감정이 메말라 단지 학교의 아이들은 나의 적 혹은 이익이 되는 친구로 가고 있는 현상이 심한 것이다. 이런 책임은 아이들에게 몰아넣는 어른들의 무책임이 아이들을 더욱 스스로 감옥에 가두고 있다. <감시와 처벌>은 감시에 의한 통제력이나, 우리 사회는 어른들의 무책임한 관심에 의한 처벌로 이어지고 있다.

 

몸의 상처는 피가 나면 닦으면 되고, 상처가 남으면 연고를 바르고, 자국이 심하게 남으면 성형수술로 복원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눈에도 보이지 않고, 나체의 육신을 감추고 있는 의복을 다 벗기어내도 알 수 없다. 맨몸의 인간 신체 역시 마음을 알 수 없다. 마음의 깊이는 1㎜보다 낮으면서 1㎞보다 멀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기에 마음의 고통은 인간에게 트라우마 내지 스트레스, 노이로제 같은 행동을 보여준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과 말을 하고 저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의문에서 그 치료가 시작된다.

 

타인의 기준에서 그런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타인이 되는 그 자신조차도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이성과 지성을 갖추어도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감정과 무의식적인 요소가 오히려 이성적인 척하는 모습도 다분하다. 어른들의 모습에서 어른들은 자기들이 그런 요소를 가진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게 문제다.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화도 내고 짜증도 부린다. 그런 자신이 있다는 사실부터 알아가야 타인을 대할 수 있다.

 

문제 학생들을 만드는 것은 학생들 자신의 자질도 있겠지만, 그 자질을 만들어내는 환경이 문제다. 옛날 초등학교 시절 좋은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면 이상하게 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는 환경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하지만 생각하면 겉보기에 날라리처럼 보이는 애들도 알고 보면 좋은 녀석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리어 겉으로 우등생이 더 짜증나 보일 때도 있다. 마지막에 부모의 문제, 선생의 문제에 크게 공감이 갔다. 뭐든지 좋은 것만 강요하고, 불리한 것은 제외하는 어른들이 보일 때마다 학생들은 자신이 도망갈 공간이 없다. 사이코 패스처럼 동물을 학대하는 애나, 그 동물을 사랑해주는 불량소년에서 누가 더 인간적인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길가에 버려진 연약한 동물을 괴롭히지 않고 사랑해주는 인간이 근본 자체가 나쁠 리는 없지만, 단지 그가 공부도 못하고 반항하는 이유로 몰아가기에 더더욱 심하게 불량해지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도 방법론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은 모르겠다. 우리 역시 학생일 시절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의 이익을 사랑하는 것만 강요했기 때문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맞다. 하류의 물이 상류로 올라갈 수 없다. 그것은 과학의 법치이고, 인간이 과학으로만 판단할 수 없지만, 사회과학적으로 인간 역시 과학적 판단으로 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중요한 점을 더 망각하고 있다. 감정코치는 아이들만 받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어른들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망가지는가? 망가지는 것은 아이들이 시작한 게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그렇게 만든 공간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삶의 여유를 빼앗고, 인생의 즐거움을 빼앗고, 자연적인 인간성을 파괴하면서 사회적 목적만 강요하는 공간에서 과연 감정코치를 한다고 해도 완성될까? 그런 것부터 같이 조금씩 바꾸면서 감정코치를 하는 게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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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3 - Seed Novel
맑은날오후 지음, 토브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3권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이전에 나온 1권과 2권을 읽어보았다. 재차 읽으면서 그동안 론이 자신의 신분을 숨긴 것과 동시에 마왕의 진실, 그리고 론의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장치의 신)의 시간조작이 보인다. 외전에서 린의 모험에서도 등장한 텐드 역시 론과 같이 노란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소녀를 만난 것이 나온다. 결국 복선의 연장은 단순히 론에 의해서만 보여준 게 아니라 텐드도 역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전개 속에서 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는 단지 자신의 할아버지 48대 용사와 황제의 숨은 공작에 있을 것이다.


공작에는 노엘 인피니피 황비, 론의 동생인 시즈도 역시 끼여 있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 숨은 계획이 세계를 파멸을 이끌어가는 것이고, 그 원인은 알 수 없겠지만, 이종족의 몰락과 매우 긴밀하다는 점이다. 왜 황제와 군대는 붉은여우귀 종족을 몰살하였을까? 그것은 론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을 사전에 배제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라면 공동의 적인 이종족을 몰살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인가? 인피니티 제국은 모든 대륙에서 최고 강한 제국이고, 용사도 그렇지만, 황제 그리고 황제의 수호대는 사실상 마왕군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그렇다면 무슨 계획을 세웠기에 론에게 봉인이 붙어 있는가? 전에도 리뷰하면서 생각했지만, 황제와 용사는 바로 신이란 존재 그 자체를 없애고 새로운 신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나의 추론이기도 하나, 적어도 악령과 언데드들이 득실대는 던전에서 론은 이상한 석상을 발견한다. 신이 인간에게 검을 하사하는데, 그 검이 할아버지에게 받은 검과 매우 똑같은 모습이고, 할아버지는 신이 다룰 수 있는 검을 모두 다룰 수 있는 존재다. 할아버지의 능력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능가할 수 없는 신의 영역까지 올라간 존재다. 그런 상태에서 론의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된 유물에서 발견한 여인을 론의 아버지와 결혼하게 한다.

유전부터 론은 다른 인간과 다르다는 것은 그가 노엘 인피니티가 봉인한 힘 일부를 해제할 때 악마가 말한 장면이 중요하다. 악마는 론에게 소멸하기 전에 이런 말을 한다. “크크으...이 힘. 그 검은 머리와 눈.... 설마 네놈의 정체는... 웃기는 일이군, 나와 너 중 누가 더 악마란 거냐...” 결국 론의 비밀은 어머니 고대유물에서 발견된 불가사의한 존재란 점이고, 그녀는 유물에 발견된 것처럼 봉인되어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흔히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명칭이라면 판도라의 상자라고 보면 될까?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힘을 가졌다는 것은 론이 이미 태생부터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고, 게다가 론은 인간의 마음조차 버리도록 키워진 것이다.


산적, 현상수배범, 역적과 같이 처벌대상자라도 해도 인간인 그들을 론은 6살부터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목을 베었다. 즉 같은 인간이라도 용서가 필요 없고, 인간을 죽이는 것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수라의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론은 할아버지로부터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것은 결국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론은 할아버지가 제시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이라도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론의 과거, 즉 예전 세계에서 그는 이종족들을 무참하게 죽이는 것부터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이라 여긴 것이다.


신이 거의 소멸하지만, 마지막 론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상황, 결국 론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해서 안 될 행위를 한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작가가 복선과 숨은 시나리오로서 남겨 두었지만, 적어도 론의 행위는 인륜 내지 천륜을 어길 수 있는 것은 3권에서 은근히 내비추었다. 그것은 론의 동생인 시즈의 행동이 다소 지나친 점이다. 시즈는 린과의 전투에 기억을 잃은 론에게 충격요법이라 하여 키스하려고 한다. 제 아무리 오빠와 여동생이 친해도 볼이나 이마 정도 키스도 솔직히 부담스러울 것인데, 론의 입술을 향하여 돌진 한 것이다. 시즈는 린과 티나 그리고 루리를 보면 자신의 오빠는 오직 자신의 것이고,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다는 집착을 보인다.


게다가 자신은 할아버지가 말한 계획의 대의를 위해 충분히 그릇이 될 각오는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도 추후의 일을 위해서 말이다. 할아버지가 말하는 어느 계획과 그리고 시즈가 보이는 과도한 브라더콤플렉스는 근친상간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여동생이 필요 이상으로 남자형제에게 스킨십과 그 형제의 주변 여자들에게 과도한 질투와 경고를 보내는 것을 본다면 결국 시즈의 근친상간의 욕망이 인피니티를 비롯한 세계를 멸망으로 도래하게 할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근친상간의 욕망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처럼 그는 어머니와 부부가 되어 자신의 형제요 남매인 딸과 아들을 각각 2명씩 얻었다.


그 죄목으로 테베는 신의 노여움으로 질병이 휩쓸고 사람들은 고통에 빠졌다. 인륜을 져버린 인간의 비극적 종말은 모든 것을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다. 론이 할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인륜을 져버린 행동을 했으니 그의 마지막은 후회와 원한만 남을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리셋이 되어 황제의 용사가 아니라 마왕의 간부가 되었다. 이전 세계에서 린과는 용사일행이지만 이제는 린이 용사가 되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시간적 문제일 것이다. 그런 시간적 문제에서 작가는 어떻게 하면 론의 정체가 드러나고, 루리가 마왕이란 사실을 용사일행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에 대해 디오니소스적인 방법을 택했다.


디오니소스라는 신은 제우스와 인간인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이다. 포도주의 신으로서 인간은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난폭해져서 인간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한다. 물론 론이 난폭해진 게 아니지만, 술로 인해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에 린에 의해 밝혀진다. 술을 마시면 강한 인간이라도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의 통제성을 잃게 되므로 론의 본 모습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왜 시즈가 린에 대해 경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이다. 용사 린은 가슴의 압박에 의해 단추가 날아가고, 단추총알에 맞았던 스팅은 기절을 하고 만다.


린의 가슴이 엄청 큰 것과 미녀, 그리고 좋은 가문이란 점에서 시즈에게 상당히 거슬리는 존재다. 용사라는 직책에서 사회적 지위와 더불어 강력한 힘까지 겸비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론이 술에 취해 방 안에서 정신이 없을 때, 린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때 론은 린에게 어머니라고 한다. 린이 자신이 어머니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론은 어머니 알겠어요. 라고 한다. 단순히 린이 몸매만이 아니라 뭔가 론에게 조금 그리운 느낌을 들게 해주는 뭔가가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를 닮은 점에서 론은 린에게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단지 루리의 등장으로 론의 제일 우선하게 되는 것은 루리였으므로 린은 루리의 뒷전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나마 시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충분히 마음 편하게 론을 대할 수 있겠지만, 시즈의 등장은 가시 돋친 날카로운 장미가시처럼 론 주변에 날카로운 가시가 둘러싸인 장미나무 숲처럼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린은 론이 이때까지 있었던 일을 알게 되면서 시즈를 같이 모험에 동행하게 된 셈이다. 시즈의 등장은 린과의 충돌으로 계속 이어지고, 처음에는 무력충돌이 나중에 여자들의 싸움으로 변했다. 어떻게 보면 시즈의 등장은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 모험적인 요소로서 몬스터와 싸움, 악령과 싸움, 추후에 있을지 모르는 황제와 왕국 혹은 신과의 대결이란 거대한 서사에서 론 일행 사이에 항상 끊이지 않을 티격태격한 요소를 부여한 셈이다.


작품 내에서 개그요소를 부여하더라도 결국 모험물이고, 용사와 마왕이 등장하기에 진부한 개그를 넣기에는 한계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론 주변에 시즈가 등장하는 것은 질투의 화신이 강림하기에 충분히 개그를 넘어 왠지 생동감 넘치는 개그를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독한 브라더콤플렉스 여동생과 지독한 프라이드를 가진 부잣집 딸의 만남은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신경전이 펼쳐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주변에 있는 루리와 스팅, 티나의 모습은 또 다른 요소로 등장할 것이다.


이번 편에서 조금 인상적인 모습은 무력으로 제압된 세계라면 그 이상의 것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결국 그 진실의 결과는 귀여움이었다. 용사는 자신이 좋아하던 팀의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역시 그 언니처럼 귀여움에 대한 열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린을 무척이나 귀여워해주던 쉐어, 그리고 루리의 볼이 닳을 정도로 비벼대는 린, 심지어 린이 루리에게 천사 고리와 날개를 달아주자 루리는 이에 신나 엉성한 춤을 춘다. 그 모습을 본 용사인 린은 자신이 마왕의 최고의 적이면서도 어린 마왕에게 무릎을 꿇는다.


인간에게 먹고 살아가는 것, 즉 의식주를 해결하는 순간 문화생활을 추구하게 된다. 문화라는 것은 인생을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린이 선택한 귀여움에 대한 열의는 루리로서 그 성과를 맺은 셈이다. 게다가 장수족은 인간의 수명에 비해 거의 10배에 가깝다. 용사가 나이가 들어 수명이 다 되어 죽을 때도 루리는 아직 그 모습에서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8세 소녀가 대략 12세 소녀로 될 정도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황제는 매우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루리가 용사와 더불어 황제의 성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한 기회가 있었는데, 황제는 루리가 처음 보자말자 마왕군에 가담한 장수족의 아이라는 것을 알아본 점이다. 그런데도 황제는 마왕군 무리 중에 하나인 루리를 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나 행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마왕군이 매우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혹은 루리가 아주 어린 소녀이기에 그런 작은 아이에게 억지로 신경쓸 것도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황제는 론의 할아버지 48대 용사와 더불어 공모한 것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루리가 이종족이란 사실보다 루리가 론의 기억상실에 무슨 짓을 했는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4권부터는 론의 기억상실과 더불어 원래 목적을 가진 황제와 48대 용사의 계획에 대한 수정조치 내지 손길이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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