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어느 고위공직자 후보자가 과거에 행적에 대해 문제 삼으며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그 일이란 바로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다. 박종철이란 이름은 한국의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상처어린 이름이다. 그는 19871월 젊은 나이에 남영동 고문실 안에서 잔인한 고문과 야만적인 시대의 권력 앞에 사라져 갔다. 그의 죽음이 결국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6월 항쟁에서 이한열 학생은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

 

올해는 6월 항쟁이 발생한지 28주년이 되는 해이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거의 30년이 되었고, 30년이면 거의 한 세대가 교체한 시간과 같다. 그 시간이 지나면서 특별히 뭔가 바뀐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단지 고문으로 죽는 사람은 없지만, 여전히 고문을 받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아직도 그때의 상처로 인해 고통 받는 점이고, 그들을 고문하거나 고문하도록 사주하거나 또는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람들은 여전히 근엄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아마 후보자 역시 그동안 30년 가까이 그 시대의 흔적들을 남긴 역사의 산물일 것이다. 과거란 결코 자신이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사실 부정해야할 사실이란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일이나 혹은 부조리한 일들을 외면하거나 또는 사주한 게 아니라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가 다시 30년 지난 이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현재란 결국 과거 시간의 축척으로 인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규석 작가의 <100>란 작품은 지금 다시 봐도 매우 섬뜩한 작품이다. 20096월에 발표된 이 작품은 6년이 지난 2015년 현재에도 여전히 강한 인상을 준다. 어머니 말씀대로 공부만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가서 좋은 직장만을 가는 게 목표이던 시절, 부모들의 고생만 하고 내 자식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의 가치, 아마 지금의 부모들은 1980년대의 부모보다 내 자식에 대한 욕심은 더 강할 것이다.

 

주인공 역시 그런 부모 밑에 자라 서울로 오고 선배들하고 만나면서 기존에 알던 자신의 가치관과 전혀 다름을 느낀다. 주변 선배들은 선술집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울분을 토하고,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며, 때로는 사람들을 피해 숨어 지낸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열이 올라 99에 멈추다 어느 순간 100로 된다. 그리고 그것은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물의 비열에 맞춘 <100>처럼 어떤 물질이 양적 에너지를 계속 주입하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현상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변증법으로 작용하여 수학적 수치는 아니지만, 인간에게 가해지는 불만과 분노가 바로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화선이 불이 붙기 전까지 너무 많은 희생이 따랐고, 수많은 청춘들이 밤하늘의 별이 되어야만 했다. 이 작품은 이론적인 영역보단 차라리 직접 보고 느끼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성적 사고로서 세상을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나, 그 시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다. <100>란 작품은 한국만화에서 덜도 아닌 더도 아닌 그 시대 그 자체를 그린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사실주의는 일상생활 또는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가 인지할 수 없기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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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10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규석 작가 전작품들이 다 훌륭하더군요. 더많이 주목받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2-10 10:05   좋아요 0 | URL
예전에 경남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2014년 행사에서 바로 제 옆 자리에 앉아 계시던데, 한국만화계에서 국내 대표만화작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대중들에게 알려져야 할 것이죠. 이 분은 만화의 에너지가 억압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라 합니다. 본 작품은 바로 그런 느낌이 강하게 실린 작품이죠

AgalmA 2015-02-1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가장 대중에 밀접한 걸 말하는 작가가 대중 호응도가 떨어지는 게 매우 아이러니합니다. 좋은 소개글 감사합니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 2 - Novel Engine
히로사키 류 글, 파세리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 1권을 이어 2권을 읽어보았다. 1권에선 신선하고 상당히 리얼리티한 요소가 반영되어 일반적인 라이트노벨과 다르다는 점이 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2권은 약간 설정이 조금 현실성을 고려했지만, 상황전개는 비현실로 가게 되었다. 물론 라이트노벨이란 장르가 경소설로서 재미 내지 오락을 제공하나 작품 배경이 현대 일본이라면 현대적인 요소가 당연히 반영된다. 상당히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주인공 타카시, 그러나 그 주변에 포진한 여자 인물들이 비현실적 설정 내지 혹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게 특성이다.


기본적으로 어머니가 40대 주부에서 상당량의 수명을 소모한 뒤로 17세가 되고, 할머니가 죽기 전에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17세 되었다. 유카는 집에서 나오지 않은 히키코모리고, 타카시의 여자친구인 메이코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뒤로 새어머니가 17교에 의탁한 여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권에서 17세의 타카시가 17세의 어머니, 할머니, 여자친구와 조우하게 된다. 바로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는 인간의 나이 17세가 과연 어떤 상황을 맞이하고, 자신의 삶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를 다룬다.


1권보다 2권에서 그런 점이 비현실적인 요소로 가는 것은 타카시 자체는 현실적 판단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나 주변인물들의 비현실적 상황과 현실적이지 못한 행동들이다. 유카의 방에 들어간 타카시는 유카가 다른 여자아이와 다른 방식으로 산다고 하나, 유카의 방이 어지러운 모습에서 쌓아둔 책 사이에 여동생과 오빠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책이 나온 것이다. 유카가 바로 친오빠인 타카시에 대한 오빠 여동생의 관계 이상으로 오빠를 원하는 것이 보인다.


1권에서 타카시의 어머니인 카즈미가 타카시에게 충고를 해준 내용이 있다. 만약 타카시의 성욕이 주체하지 못하여 그것이 유카에게 성적 욕망을 느낀다면 그것을 여동생이 아니라 본인인 어머니에게 해달라는 부분이다. 물론 타카시는 그럴 생각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겠지만, 작품 내에서 여동생 유카는 분명 타카시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점이다. 타카시에게 어린 시절 희미하게 아버지의 기억이 남아있지만, 유카에게 아버지의 기억이란 없다. 추억이 없는 것에서 유카에게 아버지는 단지 있었다고 여긴 인물이지 그 이상으로 다가올 수 없다.


타카시의 아버지가 죽고, 타카시의 할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할머니 와카바의 허전한 마음하고 유카가 느끼는 마음은 다르다. 그래서 유카에게 타카시는 오빠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아빠같은 인물이다. 타카시는 여전히 1권부터 그랬던 것처럼 2권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무리 어머니가 다시 17세로 되어 아이도로 활동하더라도 그가 일하는 이유는 가정형편이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카즈미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타카시와 유카에 대한 현실적인 경제문제부터다.


현실적 상황에 대한 비현실적인 상황전개가 이 작품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2권에서 어머니의 소속사 변경, 그리고 메이코가 그동안 계속 사이가 나쁜 새어머니 줄리아에 대한 사연은 조금 아쉽게 여겨진다. 이른바 문학이나 영화에서 사용되는 cliche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17세의 줄리아는 예전에 메이코의 아버지와 사랑하던 연인 사이다. 하지만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야기로 인해 비극적으로 이별한다.


메이코의 어머니가 죽고, 줄리아의 회사가 망해 다시 찾아온 지난날의 사랑에 대한 회한, 그런 와중에 불의의 사고로 다시 태어나던 줄리아, 1권에서 메이코의 시선이 2권에서 이런 방식으로 복선이 드러난 것이다. 비현실적인 조건이 너무 상투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해결한 점이 아쉬운 것이다. 물론 타카시가 보인 결단력과 행동은 작품 전개상 제목은 어머니가 메인으로 나오나, 어머니라는 명칭은 결국 카즈미가 어머니이기 위해 그 어머니로서 성립되어야 할 대상이 타카시다.


타카시의 어머니인 카즈미가 17세가 된 것처럼,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타카시로 시작하여 타카시로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평범한 모습에서 주변 상황은 비현실과 현실적이지 못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의 현실성과 타인이 비현실성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관계에서 상황정리는 너무 아깝다고 할까? 물론 타카시의 시선으로 보는 현실적 조건, 가정환경과 가족관계, 더구나 메이코의 상황은 그에게 계속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시선으로 보기보단 가족간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1권 리뷰 때도 생각했지만, 가족의 파편화와 재결집이란 모티브는 우리 일상과 아주 밀접하다. 현실에 대한 관찰은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제대로 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적 상황과 조건 그 자체가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현실의 상황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거나 또는 상황적인 요소로 보이는 것으로 리얼리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는 분명 비현실적인 상황을 소재로 하여 이야기르 전개하나 그 이야기의 결론은 언제나 가족이란 어떤 것일까? 라는 타카시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가족에 대한 인간의 마음은 어느 특별한 문화권이 아닌 이상,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17세 때 아버지와 사랑의 도피를 한 어머니, 17세 때 할아버지와 결혼한 할머니, 그들의 17세는 지금 타카시의 17세와 다르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다. 주어진 조건과 상황은 분명 비현실적일지라도, 타카시가 살아가고 있는 17세의 현실은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나, 2권에서 보이는 것은 당신의 17세는 누군가 진심으로 사랑했었는가? 라는 것이다. 타카시가 바라본 17세라는 시기란 사랑이란 이름으로 맺어진 연인과 가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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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X프린세스X블레이드 1 - Seed Novel
오버정우기 지음, 보라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페르세우스)

 

 

(안젤리카를 구하는 로저)

 

 

이 작품을 보기 전에 먼저 제목과 프롤로그의 시놉시스를 보는 순간 나는 어떤 그림이 생각났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영웅 페르세우스가 바다의 괴물로부터 안드로메다를 구출할 때를 말이다. 그 이유는 그 괴물은 바로 바다의 용이고, 페르세우스가 영웅이라고 하나 이번에 읽어본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를 구출하기 위해 긴 창으로 용을 꿰뚫고, 이에 용은 쓰러진다. 하지만 신화에서 등장하는 안드로메다의 표정은 기쁨보다 조금 허무한 심정으로 페르세우스를 바라보고 있다.

 

또 다른 그림으로 페르세우스 신화에 등장하는 모티브와 유사한 그림인 안젤리카를 구하는 로저역시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페르세우스와 유사한 상황이 보인다. 기본적인 판단력에서 요구되는 것은 이 작품에서 영웅은 남성, 구출되는 대상은 여성, 타도되는 대상은 용이다. 그러나 잘 알아야 할 것은 영웅의 복장이다. 로저의 복장은 중세 기사의 갑주이고, 페르세우스는 고대 그리스 장수의 복장이다. 페르세우스 복장이 결국 그리스 문화, 그 문화는 철기문화이고, 그리스 문화에서 산업체계는 노예제를 이용한 농경사회다.

 

폴리스국가를 이루던 그리스는 10%의 남성만이 정치적 의결권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점을 미루어 보면 용의 퇴치는 남성중심 정치사회를 완전한 구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용의 존재는 여성으로서 이미 몰락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일 중요한 신은 제우스다. 그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쫓고 헤라와 결혼하여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런 제우스에 대한 연구에서 그의 딸인 아프로디테, 즉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로 들어가면, 비너스의 어머니는 메티스로 바다의 여신이다. 그 여신은 본래 뱀 내지 용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뱀과 용은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페르세우스의 긴 창은 단순히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으로 들어가면 여성의 첫 순결을 뺏는 남근이 되는 셈이다.

 

그런 신화적 요건에서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가 과연 어느 방식으로 갈지 궁금해서 책을 구매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본래 생각하던 안드로메다와 페르세우스 신화하고 조금 거리가 있었다. 드래곤이란 부족이 여성으로 이루어진 부족이라면 좋았을 것인데, 아쉽게도 주인공 히로인 밀레니아는 용왕의 딸인 황녀이었고, 그의 용약의 계약자는 리온이란 드래곤 슬레이어 일족이었다. 용과 인간의 전투에서 안드로메다의 페르세우스의 결투는 남성과 여성의 주도권을 다투는 과정에 남성의 승리였다면, 만약 이런 신화적 요소가 여성이라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또한 환상문학과 많이 연결된 라이트노벨에서 흥미와 재미로 이끌어 가면 어떤 결과로 나올지 생각해보았다.

 

작가는 라이트노벨을 작성하면서 북구신화에서 많은 모티브를 삼았고, 주인공이 드래곤 슬레이어였다면 신화적인 요소를 빌어 현대적인 감각으로 살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신화란 우리 현대인에게 낯선 것일지 모르나, 신화는 집단적인 무의식의 표출이라 볼 수 있다. 어딘가 다르나 각국의 신화는 조금씩 유사한 요소가 많은 것이다. 게다가 신화란 우리 현대인에게 환상이겠지만, 신화는 옛날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서 역사인 셈이다. 그리스에서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위해 축가를 불렀다.

 

그의 영원한 죽음과 삶이 반복되는 점에서 말이다. 북구신화와 그리스신화에서 차이점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신들의 의상과 무기, 타도대상에서 유사한 점이 많았다. 신화가 역사인 옛날, 신화가 환상인 지금에서 현대인에게 신화와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지는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다. 라이트노벨을 토대로 만화 내지 애니메이션 역시 그렇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최초의 서사는 신화고, 현재 최근에 만들어진 서사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서 근본적으로 인간이 드러내는 욕망에 대한 심리적 근원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를 보면서 위의 맥락에 충족되지 않은 것은 분명 필자 개인적으로 아쉽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을 보면서 나름 만족했다. 드래곤이란 소재, 검사의 소재, 그리고 불완전한 소년의 등장에서 많은 cliche를 공유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나름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고, 복선 설정 역시 억지로 불어넣지 않았다. 작가가 만든 세계관에서 나름 충실하게 반영되었고, 용인전쟁에서 패배한 인간에게 현재 우리 지구의 중심은 인간이나,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에선 용이 중심이다.

 

세계의 중심이 용이라면 그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에 빠지는 것인가? 게다가 최근 일본에서 방영한 라이트노벨 원작의 애니메이션 <성각의 용기사>와 비교해보면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의 흐름이 훨씬 부드럽고, <성각의 용기사>에서 용기사와 용에 대한 모험이나 그 속내는 하렘장르란 한계성에 갇히나,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는 연애적 요소를 크게 부각하기 보단 하나의 보조적인 역할로 설정했다. 그런 점은 작가가 작품에서 서사를 얼마나 잘 전개하는가에서 독자로 하여금 재미와 흥미를 줄 수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생각에서 불평등에 대해 생각했는데, 인간은 불평등은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나이, 민족, 성별에 의한 선천적 불평등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차별에 의한 후천적 불평등이다.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에서 용과 인간의 불평등은 바로 선천적 불평등, 즉 선천적인 불평등이다. 황녀 밀레니아는 다른 용과 다르게 인간에게 매우 관대한 자세를 보인다. 불평등의 차이에서 오히려 상대방과 자신의 존재가 다른 것을 알기에 그런 판단이 가능하다.

 

작품 내에서 다른 용과 계약으로 하나의 우월성을 얻는 자들은 오히려 후천적인 요소에 강하다. 그것은 서로 간의 계약, 사회적 계약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용인전쟁에서 승리한 용의 지배권에 인간과 용의 평등관계를 강요하는 것이나 혹은 그 이전의 불평등을 강요하는 것이나 모두 지배권자의 논리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논리가 논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윤리라는 가치가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밀레이나의 그의 의지, 그녀가 가진 각오, 드래곤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진 리온은 과연 그녀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보면 나름 잘 풀어나갔다고 본다.

 

그리고 인간과 용이 서로 다르지만, 밀레니아는 항상 나는 나이고, 내가 아닌 다른 드래곤은 나하고 같은 대상으로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상당히 작품에서 실존주의적인 요소가 강하게 풍긴다. “나는 나 너는 너라는 명확한 인식에 대한 발언은 어느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 자체로서 봐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드래곤 황녀인 밀레니아가 아니라 리온의 친구인 밀레니아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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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1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단 무의식이라 할 때 아담-뱀-이브 / 전사 혹은 왕자-용-여자 이 구도는 어떤 연결점이 있을지요?

만화애니비평 2015-01-21 16:41   좋아요 0 | URL
제 개임적으로 뱀에 대한 여성적 상징성을 부정적으로 몰아넣는 것이 예상됩니다. 예전에 마빈 해리스의 서적을 보면 남성의 무의식에 의해 조성된 (문명적 폭력) 것이기보단 문화에 의해 조성된 남성의 것이라고 보더군요.
에덴동산의 뱀은 욕망을 말하고 금기를 어기는 존재로 나오듯이 문명화 된 국가사회에선 여자의 행동을 배제하려는 남성의 심리가 아닌가 합니다.

AgalmA 2015-01-21 16:51   좋아요 0 | URL
음. 남성적 문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기도 하겠군요. 답변이 엄청 빨리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21 16:55   좋아요 0 | URL
사무실에 컴 앞에 있으면, 메일로 바로 알림이 오거든요(아니 알라딘 북플로도).
예전에 제우스, 아프로디테, 메티스에 대한 페미니즘 분석을 귀동냥하면서 신화적인 요소와 인류학(히즈 스토리)에 대한 서적을 보면서 정리한 것이죠.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4 - Seed Novel
맑은날오후 지음, 토브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이제 모두 장기판의 말이 모였다. 단지 부족한 점은 그 장기판의 말을 격렬하게 움직이게 할 방아쇠가 필요했을 뿐이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4권은 바로 그런 순간인 것이었다. 전편에 보면 알 수 있듯이 인피니티 황제와 48대 용사는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키는 이른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론의 인생과 론의 여동생인 시즈를 하나의 도구로 삼기로 했다. 문제는 자신의 손자와 손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할아버지의 큰 계획을 반대하기보단 그것을 따른다는 점이다.

 

론의 전생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통해 무의식적인 기억에 새겨진 악몽에서 모든 이종족을 죽인 것에서 시작된 기나긴 비극과 고통은 새로운 서사로 이어진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이 라이트노벨 시리즈 1권부터 3권까지 읽어보면서 지적하고 생각한 부분이 이번 4권에 확실히 드러났다. 이종족에 대한 전력을 이미 황제와 주요직에 있는 간부 내지 귀족들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종족들이 인간의 세계에 더 이상 대항할 여유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침범했고, 마왕을 죽여 인간의 세계를 넓혀왔다.

 

그렇다면 마왕군과 인간군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그것은 인류라는 조직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계속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가령 인간의 사회는 비록 왕이 존재하는 군주정이고, 하나의 구체제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문명과 산업은 다르게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피니티 국가를 산업구조를 보면 도대체 어느 체계에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농경산업인지 혹은 공업화사회인지 아니면 상업중심인지 말이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끝없이 팽창하여 토지 영역을 확대하는 점에서 이익을 계속 추구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산업의 기반이 농업, 상업, 공업이 어느 것이 될지는 모르지만 “문화발전의 과정을 이해하는 열쇠로서 인간의 생식압력(인구증가압력) → 생산증강과정 → 생태환경의 파괴․고갈 →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이란 구도로서 바라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인류의 역사보단 오히려 마왕군의 역사가 길었고, 인류는 이미 균형이 맞추어진 세계에 마왕의 영역을 넘어본 것이고, 그것이 마왕군과 전쟁이 되었고, 용사는 겉으로는 인류를 지키는 수호신이어야 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영역확대로 통한 이윤 추구였다.

 

끊임없이 미지의 영역을 정복하고, 끊임없이 적군을 파괴해야지 자신에게 새로운 이윤과 특권이 부여된다. 지난 용사의 동료인 쾌속의 검인 다드와 같은 경우 자신에게 이미 많은 권력과 재력, 그리고 명성이 부여되었음에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 채 심지어 마왕군의 비밀까지 알면서 론의 일행을 위기에 몰아넣는다. 그가 오직 바라는 것은 자신의 지위를 올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4권에서 큰 사건이 되었고, 론과 루리 일행에게 큰 위기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1권에서부터 이미 장수족인 루리는 아무리 강한 육체를 타고나도 아직까지 어린아이다. 보통 사람에겐 큰 위협이 되겠지만, 인류에서 어느 정도 랭크가 되는 전사나 마법사에게 손도 쓰지 못할 만큼 약하다. 게다가 하급 몬스터 하급에게 공격당해 죽어야 했던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적 내지 혹은 적이 되어야 했던 존재들은 정의의 철퇴를 맞는 게 당연하여야 하기에 어떻게든 제거되어야 했다. 인류에겐 평화라는 이름 아래 무력으로 마왕군을 제압하겠지만, 처음부터 마왕군은 인류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러나 마왕군은 영원히 인류의 적이야 했고, 그들의 편을 들어주거나 협조하는 것은 인류의 배신이기에 언제라도 숙청당할 수 있었다. 이종족으로 이루어진 마왕군, 어떻게 보면 그들은 마왕군이란 집단적 부류이지, 그 이면에는 각 소수의 부족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연합구조인 셈이다. 연합구조에서 그들이 뭉치는 이유는 자신들 하나가 보통 인간보다 강해도 용사에 비해 상당히 약하며, 이미 많은 마왕군들이 섬멸되었기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약해진 것이다.

 

물론 작품 설정상 마왕군의 간부들로 구성된 이종족 소왕을 보면 대부분 10대라는 점이고, 심지어 외모가 10살조차 되지 않을 어린아이가 있다. 마왕군에서 나이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지능과 유사하게 비례한다. 가령 루리가 장수족에서 어린아이라고 해도 보통 인간보다 오래 살았다. 하지만 루리는 보통 인간족의 어린아이와 같은 지적수준과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개의 나이가 20살이면 노인이고, 인간의 나이로 70~80대와 비슷한 점에서 장수족의 수명 역시 인간의 신체 상태에 비례할 수 있는 셈이다.

 

이종족의 관계에서 그들의 다툼은 그저 생존 그 자체에서 다툼이지 그 이상의 것을 빼앗는 다툼이 아니었다. 힘의 서열을 정해도 그 결과로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지는 않은 것이다. 야만스러운 생활방식이나, 필요이상으로 누군가 죽이지 않은 점에서 인류와 비교하여 더 야만스러운 것은 누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는 인간 그 보편적인 개인으로서 약할지 모르나, 인류의 용사와 동료들을 보면서 필요 이상으로 강하다. 정의라는 것은 그 사회의 도덕적 가치이고, 그 도덕적 가치는 권력에 의해 결정된다. 법과 제도로서 정해진 정의에서 인피니티의 정의는 제국의 번영과 평화다.

 

하지만 번영과 평화에는 기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해주는 점에서 그들의 정의를 실천에 당연히 안티테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데올로기만 합당하다면 수단과 방법이 비윤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용납이 되고, 제 아무리 부당하여 세상에 알리게 하더라도 론과 루리, 그리고 린의 입장은 여전히 반역자와 인류를 위협하는 마왕군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데도 인피니티 황제와 황제 옆에서 정찰을 하는 제3황녀는 이런 행동들을 다 알고 있었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점은 그들이 원하는 바는 단순히 마왕군을 섬멸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여인처럼 론의 어머니는 이세계에서 초군주형 몬스터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인류와 마왕군이 격전을 펼쳐도 도저히 건들지 못하는 것은 바로 몬스터들이 가득한 세계다. 그곳이 만약 몬스터들이 사라지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 계속하여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이익을 추구하려 할 것이다. 문명이란 결국 인간의 손으로 자연을 파괴하면서부터 시작이다. 파괴할 수 있는 자연이란 언제나 한정적이다. 따라서 미지의 세계를 찾아 정복하면 그 순간부터 그 영역은 발견한 자의 것이고, 거기서 나온 자원과 보물은 그들의 이익이 된다.

 

이런 식으로 용사의 여정은 상부구조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되었지만, 하부구조는 경제적인 이익에 의해 부합된 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끝이 없고, 이익에 대한 열정은 태양을 도는 지구처럼 한 없이 돌고 돈다. 자연에 대한 착취와 농락이 끝이 나면(거기에 대한 흥미가 끝이 나면) 그 후에는 다른 인간들에게 전가된다. 다드와 같이 자신에게 권력과 재력 그리고 명예가 있지만, 그에게 그 명예가 한이 되었다. 서열이 낮아지는 것과 그 서열을 올리기 위해 용사 린을 위기에 몰아넣는 행위 역시 그렇다.

 

인간의 행복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보자면, 자족감이 결국 인간의 행복 그리고 그 행복을 만족하기 위한 욕망의 바탕이 된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식주를 넘어 원하는 물질적인 욕구를 초월하여 더 높은 단계의 목표다. 그 목표에 대한 열망에서 인간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어야 할 가치와 존엄은 모조리 버린다. 하나의 이름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다드의 모습에서 역겨움을 느끼지 모른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다드와 같은 인간들은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고, 옆에 있어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일상적인 생활이 되어 그런 부류들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우리도 당연함을 느낄지 모른다. 도덕과 정의에 대한 판단에서 그 사회의 법과 제도, 그리고 그것을 합리화하도록 하는 힘의 논리가 숨어져 있다. 다드의 행위는 우리 독자의 눈으로 보기엔 악랄하겠지만, 그 인피니티제국이란 가상의 이야기 세계 속에서 당연한 행동이 될 것이다. 단지 린에 대한 협박은 드러나지 않으면 모든 것은 완벽하다. 인류에게 마왕은 섬멸되어야 할 존재고, 마왕에 협력한 존재는 모두 반역자이다.

 

반역자에게 내려지는 것은 구체제에서 참수형 내지 교수형이다. 그나마 한 번에 죽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다행일지 모른다. 봉건사회에는 화형과 능지처참 같은 잔혹한 고문과 사형이 이어진 것이라면 말이다. 이런 도덕과 정의에 따라 루리는 고문당하고, 론과 린은 위기에 빠진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와 48대 용사가 기대했던 순간이 다가왔다. 서사적인 흐름에서 론이 루리를 만난 것은 서사의 발단이 되고, 론이 린을 만나 마왕처럼 착각한 문지기를 격파할 때 하나의 위기와 전개에 불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론의 신변이 큰 위기는 위기를 넘어 절정으로 다가왔다. 그 절정의 순간에 다시 전개와 위기처럼 거대한 서사 안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이때까지 여정을 떠난 론, 루리, 린의 여정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게 이번 4권의 주요 포인트라고 볼 수 있다. 론은 용사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인간이 아닌 자의 피를 이어받았다. 게다가 억지로 몸을 통제하고 있는 수많은 봉인들이 그의 위기로 통해 어떤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 그 열쇠의 키는 루리에게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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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14 - 완결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드디어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완결되었다. 내 인생에서 만화애니메이션 세계에 빠져든 이유를 무엇이 계기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본 후 애니메이션에 빠졌고, 이후 계속 애니메이션을 감상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감상할 때도 있었지만, 그 자체가 나에게 큰 동기나 지속성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만큼 나에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미 전에도 혹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3가지로 구분된다.

 

1가지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가이낙스 재직시절 TVA 26편과 극장판 2판을 제작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그리고 그가 가이낙스에서 퇴사하여 카라라는 스튜디오를 설립한 후에 제작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마지막으로 가이낙스부터 카라까지 계속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제작한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각각의 에반게리온이란 이름으로 어느 점은 유사하고, 어느 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점에서 우리는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의 묘미를 각각 음미할 수 있다.

 

물론 <이카리 신지 육성계획>, <학원 타천록>과 같은 번외적인 작품이 있으나, 메인은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3번째의 붐을 일으킨 이 작품은 이미 하위문화를 지나 대중문화에 큰 여파를 주었다. 우리가 모르지만 이 작품에 사용된 장면 내지 OST가 대중방송에서 종종 나오는 경우가 있다. 특히 미사토의 테마송은 많은 CM송으로 나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란 매체가 단순히 하위문화로 볼 것만 아니라 하위문화 내에서 대중문화를 자극하는 하나의 모티브로 작용된 셈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효과는 애니메이션은 단지 애니메이션일 뿐이다.”라는 고정관념과 틀을 깨고 하나의 예술성을 지닌 작품으로 승화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내용이 기존의 작품들과 큰 방향성을 돌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와 똑같은 주제에 지겨움과 친근함을 동시에 느끼며 문화소비를 해왔다. 문화소비의 문제점은 바로 유행에 대한 부분인데, 유행이란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이 기존의 자신과 맞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보여준 작품적 특성은 인간의 이중적 잣대로서 판단할 수 없는 주제로 다가왔다.

 

기성세대에 대한 복종과 긍정보다는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했고, 언제나 아이들은 순종적이거나 활발한 요소를 강조하기보단, 오히려 불안함으로 매일 괴로워했고,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삶의 활력을 잊어버렸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신지의 경우, 그는 이제 중학생에서 어른도 아닌 그런다고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놓인 청소년이었다. 불안한 성장과정과 생활환경,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신지는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회 청소년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신지의 어머니는 실험으로 인해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도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현실에 남아있었다. 가족의 죽음이란 상당히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잔혹한 사건이다. 이카리 사령관이 왜 그렇게 냉혹하고 잔인하고 사람의 마음이 사라졌는지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신지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없는 자신과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하는 자신의 입장이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만화책을 보면 오히려 아버지인 이카리 사령관 역시 불쌍한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카리 유이가 대학교 시절, 그녀는 매우 우수하고 아름다운 대학생(대학원생)이었다. 거기서 만난 이카리 사령관은 조용하고 조용한 학생에 불과했다.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이 그에게 가자, 이카리 사령관은 유이에게 바꾸어 먹자고 권한다. 별로 말이 없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에 모든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였으나, 유이는 그를 발견한 것이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모습에서 말이다. 유이는 후유츠키 부사령관이 자신의 교수이던 시절, 교수에게 이카리 사령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난다. 그는 아주 귀여운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가 왜 귀여운 것일까? 외모로 보면 이카리 사령관은 표정이 어둡고 깔끔하지 못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유이에게 자신이 받은 음식을 교환하는 것과 교환 후 괜히 부담스러울까봐 피하려는 모습에서 유이는 이카리 사령관이 상당히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란 점을 알았다. 겉으로 활발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여주기보단 실제적인 모습에서 오히려 그가 좋은 사람인 점을 알았다. 자신의 벽에 갇혀 있지만, 그래도 유이에 손길에 있는 힘과 용기를 다해 유이와 가까워지는 이카리 사령관을 두고 귀엽다고 할 것이다. 아마 일본적인 표현으로 가와이이 미학으로 따지자면, 가와이이란 귀엽다란 말이 되나, 단순히 영어의 cute 내지 pretty 같은 의미가 아니라 왠지 보호해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곁에서 같이 지켜주고 싶은 그런 대상을 가와이이라고 볼 수 있다.

 

이카리 사령관은 이때까지 남에게 제대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후유츠키 교수가 그를 처음 만날 때 매우 불쾌한 기분을 느낄 정도로 그의 인상은 호감을 얻을 수 없었다. 단지 이카리 사령관은 유이로 통해서만 모든 인생의 구원과 의미를 부여받았다. 아들인 신지에게 그토록 질투하는 이유는 유이에게 남겨진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듯 남편과 아내는 분리된 존재이지만, 아들과 어머니는 원래 하나의 동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초호기 조종사로 가능한 것은 오직 신지이었다. 초호기 실험가동 중에 죽은 유이의 몸과 마음이 초호기에서 잠들고 있었다.

 

신지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육체와 정신이 모두 에바 초호기에 흡수되어도 강력한 힘으로 보여주었다. 그런 신지를 차갑게 구는 이카리 사령관은 오직 인류구원계획으로 유이를 만나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이용하던 이카리 사령관은 마지막 순간에 유이를 만나 깨닫게 된다. 유이의 몸에서 태어난 신지의 작은 손을 만질 때, 생명의 경이함과 사랑스러움을 말이다. 유이는 이카리 사령관에게 신지는 우리 부부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카리 사령관은 이때까지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자신이 가장 질투하던 신지를 사랑했다는 사실과 이때까지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신지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신지를 나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런 욕심도 없이 자신들이 있어야 할 그 곳으로 가고, 유이는 신지를 영원히 지켜 봐줄 것이라 한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이나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른 부분은 인류보완계획에서 수많은 레이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그들은 LCL 용액으로 변하게 만든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End of Eva>에서 아스카는 양산형 에바의 공격에 의해 죽는 것으로 나오나, 만화책에서는 그녀가 가장 바라는 카지의 품에 안겨 LCL 용액으로 변한다. 신지가 미사토의 의지를 이어받아 최후에 괴롭고 힘들고 아무도 잡아주지 않을 냉정한 현실에 남아있길 바랄 때 그 옆에는 오직 아스카만이 누워있었다.

 

신지는 아스카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며 죽이려고 할 때, 아스카는 신지의 얼굴을 쓰다며 주면서 기분 나빠란 말과 함께 끝이 난다. 결론이 아주 불안정하고, 마무리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채 끝난 가이낙스 시절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두고 생각해보면 만화책은 전혀 다른 세계로 이어진다. 신지가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25~26화에서 자신 안의 꿈을 꾸는 모습이 나온다. 그때 레이는 전학생, 아스카는 소꿉친구, 아버지는 과묵하나 하지만 어머니를 무척하는 애처가, 어머니 유이는 활달한 정치인으로 나온다.

 

그런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신지에게 자신의 꿈은 많은 사람들과 웃는 얼굴로 하루 일상을 보낼 수 있는 평범함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에서는 신지는 그런 꿈을 꿀 수 없다. 모두가 LCL 용액을 변한 후 신지의 선택이 결국 다른 세계로 이어져 마무리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신지에게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의 기억과 신지의 기억은 전혀 다르고, 신지가 가진 시간적 축척과 타인이 가진 시간의 축척은 다르다. 원래의 세계에서 신지는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고독을 느꼈을 것이나, 이제는 아무도 그 치열한 세계를 모르고 자신만이 알기에 고독할 것이다.

 

미사토의 목걸이를 바라보며 신지는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스토리에 대해 상세히 논하기보단 작품이 의미하는 요소를 서술했으나, 만화책은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전혀 다른 분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에서 인류보완계획 실시 이후 TVA25~26화에서 자신의 껍질 안에서 벗어난 신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으나, <End of Eva>에선 모든 것이 파괴에 이르렀다. 그런데 만화책은 모든 것이 파괴한 것도 지금의 상황에서 새롭게 신지가 새롭게 (자신의 자아로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세상이 리셋이 되어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가는 신지가 있을 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작품적 배경에서 4계절이 없고, 단지 여름만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겨울이 시작되어 봄이 오기 전에 신지는 중학생이란 신분을 벗어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살아가고,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아이도 아니요, 아이도 어른의 중간적인 경계점에서 어른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 자신에 대해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힘든 여정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디 길가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이미 과거에 알 수 있을 사람일 수 있겠지만, 그들은 신지를 모르고, 신지는 그들은 알고 있다.

 

모든 게 단절되어 새롭게 시작되는 세상, 자신의 과거의 어둠을 모두 벗어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시간에 대해 비가역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리셋도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인류보완계획이란 수단은 인간에게 태어나는 것은 결국 고통과 괴로움의 시작이므로, 삶의 시작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시작한 프로젝트다. 제레의 의지는 바로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이 태어난 이상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의 선택이고 목적이다. 그 어느 인간이 불행한 삶을 살아가라고 할 권리는 없으나, 현실적으로 인간은 늘 불행한 삶과 마주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다른 세계에 있더라도 조건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존의 세계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본래부터 불리하고 부조리하기에 새로운 조건 제로베이스적인 요건이 필요하다. 자신이 무언가를 원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할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우리는 그런 기회를 잡고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하여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현실의 냉혹함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신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없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다고 그의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게 아니라 그가 접촉할 수 있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세상은 자신의 의지로서 만나고 접촉하고 마주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 스스로를 바꾸고 싶다고 하여도 우리 사회는 그 개인 당사자의 의지를 쉽게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위치란 내가 옆에서 이야기하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방에 불과하다. 그런 상대방에 대해 마음을 나누고, 위안이 되어주며, 서로가 이해해줄 때 우리는 안정과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그 모든 인간에 대해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알 수 없다. 인간 내면에 가려진 무의식이란 세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가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처음부터 부여된 성품 내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주어진 조건에 의해 형성된다. 신지처럼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을 고려하면 당연히 그의 무의식공간에 내재된 불안과 외로움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누적된 그 시간만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시간과 방법 역시 길고도 어려운 법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보완계획이란 거대한 사건은 신지의 인생을 전환하게 해준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그럴 시간 혹은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흔히 에바 시리즈가 루프물이란 이야기에 대해 조금 다시 생각해보았다.

 

루프란 같은 시간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말하며, 시간의 비가역성을 가역적으로 되돌려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면서 에반게리온은 루프물이기보단 어느 한 동일한 조건에서 여러 가지 분기점을 나누어지는 병렬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 부록 편에서 등장하는 마리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등장하는 캐릭터와 똑같은 이름과 외모로 등장한다. 그녀는 아마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한 신캐릭터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약 인류보완계획이 만화책에서 하나의 결과로 이어지고, 신극장판에 등장한 마리가 존재하려면 역시 루프의 결과보단 병렬적인 세계관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25~26화에서 이미 신지는 자신이 살아가야할 세상에 대해 인지했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 시점에 <End of Eva>의 파국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 보여준 Second impact 이후에 등장한 Third impact<End of Eva>에서 보여준 파국과 맞먹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신지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루프되어 갈 필요는 없다. 이미 1<End of Eva>에서 맞이한 파국을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 되풀이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이 시기적으로 <End of Eva>를 기본으로 이야기로 제작되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제작년도로 하나씩 정리한다면 루프물이란 것은 앞뒤가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리의 등장에서 그녀가 안경을 착용한 점이 유이를 동경한 한 여학생이라면, 병렬적인 흐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만화책에서 마리의 등장 없이 인류보완계획이 끝난 시점에서 루프의 원인이 되어야 할 사건이나 배경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한양대학교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의 <애니메이션 서사구조와 전략>에서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두고 TVA 25~26화와 <End of Eva>를 두고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로 분리된 것으로 본다. 실재하지 않은 것의 복제 내지 또는 실재했던 것보다 더 실재 같은 복제로 구성된 시뮬라크르(simulacre)이고, 그것이 동사형으로 되면서 시뮬라시옹(simulation)로 되었을 뿐이다. 물론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시리즈 역시 시뮬라크르로서 다가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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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4-12-1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게 아직까지 연재돼고 있었다니!!!! 마지막권이네요...이거 티비판 애니 마지막편 보고 멘붕에 빠져 허우적 거리던게 엊그제 같은데...
엔날 생각납니다. 글 잘봤어요~

근데, 베르세르크 완결은 언제나 날런지...1년에 한권 나오다가 이제는 소식도 감감...헐~

만화애니비평 2014-12-11 17:35   좋아요 0 | URL
오덕력이란 언제나 촉을 세우고 대기를 타야 하는 거지요..
아 아스카짜응이...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