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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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두고 남녀의 관계는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가? 예전에 내가 책에서 본 문구가 기억난다. 여자가 남자의 말을 믿어야 하는 순간은 남자와 같이 침대에 있을 때가 아니라 침대에 나오는 순간이라고 말이다(원래의 말은 다르지만, 표현적인 요건에서 수정).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조금 바꾸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여자는 침대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침대에 가기 전에 더 조심해야 하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나 혹은 일본사회에서나 어떤 식으로 연애관계가 발전할지는 모르나, 남자인 내가 생각해도 남자는 기본적으로 리비도(Libido)라는 무의식적인 성적욕구가 원래 강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억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통제할 뿐이다. 보통 남자들에게 당신은 여자에 대해 성적욕구가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오히려 무서운 일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한 국가에서 그런 남자를 두고 뭐라고 여길까? 동성애자도 아니고 이성애자도 아닌 무성애자라면 더욱 어떤가? 여자에게 남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남자에게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약간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여자가 여러모로 불리한 점은 많지만, 그런다고 남자도 불리한 게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차이는 남녀의 성적인 차이를 떠나 그 사람이 현재 처해진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지만 할 수 없는 현실이고,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이라도 억지로 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후사정을 보고 사회적 여건을 토대로 바라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번에 읽은 마스다 미리의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는 이전에 읽은 <이대로 괜찮은 걸까?>보다 조금 심화된 내용이다. 주인공 수짱이 예전보다 나이가 더 찼다는 점과 수짱의 친구인 마이코는 결혼 후 아이를 낳아, 이번에 새로 등장할 노처녀로 사와코 씨가 등장한다.

 

수짱의 사촌동생 아카네가 등장한 <아무래도 싫은 사람> 편에서 등장한 아카네 직장동료인 기무라의 나이는 40이고,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에서 등장한 사와코의 나이 역시 40이다. 그런데 같은 40이라도 여자나 남자나 혹은 모든 인간들은 나이만으로 판단해서 안 되는 것이다. 기무라는 아주 사소한 것에 자기 편의를 챙기는 사람이라면, 사와코의 경우 자신의 생활에 나름 충실하다. 그런 그녀는 40이 되도록 결혼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아직 미모도 좋은데, 몸매관리하려고 요가학원도 다니는데, 잘 풀리지 않는다.

 

요가학원에서 만난 수짱과 친해진 사와코는 집에 어머니와 할머니가 계신다. 내용을 봐서는 할머니가 친가 쪽이 아니라 외갓집의 할머니 같은 느낌이었다. 집에 남자가 없이 여자 3명이 3대를 걸쳐 살고 있다는 것은 왠지 쓸쓸하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그나마 어머니는 연세가 있어도 정정하시나, 할머니는 치매가 있는지 제대로 몸도 못가누고, 기억력조차 없어졌다. 할머니가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왠지 슬픈 일이다.

 

인간이 가장 슬플 때가 언제인가? 여러모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내가 혼자가 될 때이다. 혼자가 되는 순간이 슬픈 이유는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같이 기뻐하고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군대생활을 사병이 아닌 간부로 복무할 때 심하게 감기가 걸린 적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 혼자 돌아와 너무 아파 아무 것도 안 먹고, 방 안에 이불을 혼자 덮고 있을 때 참 서러움 기분을 느꼈다. 혼자라는 것이 왜 슬픈가에서 이미 확실히 체험한 추억이다. 사와코의 걱정은 자신이 결혼하면 어머니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막상 어머니까지 연세로 인해 돌아가시면 자신은 그때 정도 할머니가 된다.

 

아무도 보살펴주는 이도 없고, 아무도 찾아주는 이도 없다. 외로운 생활이 젊어서 편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의 생활을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사와코의 마음은 여러모로 괴롭다. 그녀는 27살 이후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13년 동안 혼자였고, 그동안 같이 남자와 침대에 올라가지 못했다. 이럴 때 가장 느끼는 자괴감은 다시 남자와 침대로 갈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여성의 40대는 30대와 다르게 신체 구조적으로 노화의 영향이 확실히 온다. 피부에 윤기도 없고(직원이 선물로 피부기름을 제거하는 화장세트를 줘도 오히려 기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뱃살도 늘고, 가슴의 탄력도 약해진다.

 

결혼은 둘째치더라도 사와코는 자신이 여자로서 매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소개팅을 하여 우연히 남자를 만나 17년 만에 같이 침대에 가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두 사람의 가족에게 인사하는 것부터다. 남자의 집 쪽에서 사와코에게 아이를 어서 낳아달라고 요구하는 것까지 이해갈 수 있다. 하지만 임신이 가능한지 안 한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증명서를 발급해달란 소리에 갑자기 어이가 없었다. 40이 되면 거의 늦은 시기라 하더라도 그냥 되는대로 결혼해서 살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덕분에 사와코는 자신이 소개받은 남자와 인연이 아니라는 점을 알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난감한 것이 남녀사이에 가장 더 중요한 부분이 남녀로서 대하는 것 이상의 인간으로서 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점에서 나 역시 독특한 성향과 취향으로 수짱이나 사와코처럼 되어갈지 모른다. 그래도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혼 후 처음 인지하지 못한 상대방의 모습이 드러나면 엄청난 곤경에 빠진다는 점이다. 사람이 오래 알게 되면 사소한 것들에 통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나, 처음에 몇 차례 만난 사람에겐 속내를 보이는 것보다 자기포장으로 통해 보여준다.

 

인간 사회에서 자기포장은 어쩔 수 없는 것은 알지만, 같이 살아야 하는 가족의 경우 조금 말은 다르다. 사람의 성향이 처음에 맞게 느끼는 것은 상대방을 보고 맞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금방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게 쉽다. 물론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면 적당히 넘어갈지 모르나, 상대방의 입장에 따라 매우 예민할 수 있는 상황이 있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그런 예민한 부분을 어떻게 잘 보여주고 잘 넘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란 제목처럼 결혼하지 않으면 곤란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결혼해서도 곤란하다. 마이코가 결혼 후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서로 간의 대화주제가 다르고, 공감되는 부분도 다르다. 불편하지 않은 친구가 불편해지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정체된 듯 유동하는 존재이므로 자신의 정체성, 즉 그 사람의 현재의 모습과 살아온 날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저런 고민은 늘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때마다 다가온다. 심리적으로 뭔가 잘 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은 인간의 현재진행형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다고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생의 역설적인 순간들이 너무나도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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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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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의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는 이른바 수짱 시리즈의 시작이기도 하다. 여성작가가 그것도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는 것은 남성인 나에겐 약간 턱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읽어보는 순간, 그렇게 낯설게 느낀 게 아니었고, 오히려 내 나이와 비슷한 상황의 미혼 여성의 마음을 보는 기분이었다. 물론 전반적인 여성이 그런 것은 아니나, 적어도 보편적인 성향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수짱의 심정과 상황이 옆에서 관찰하면 왠지 공감이 가기도 하고, 한편으로 얄미운 부분이 있구나 여겼다.

 

인간의 모습이란 한 가지로 표현할 수 없다.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 따라 계속 변해간다. 누군가에게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나, 나에게는 짜증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의 유동적으로 변해가는 일상은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지만, 그 유동적 일상생활도 하나의 정해진 패턴에 묻힌 것처럼 보인다. 수짱의 이야기는 카페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일하면서 옆에 근무하는 이와이는 수짱보고 어리고 외모가 예쁜 편이다.

 

카페에 들리는 본사직원인 나카다 매니저를 두고 수짱은 은근히 흠모한다. 그러나 나카다 매니저는 수짱보다 나이가 어리고, 자주 오는 사람이 아니므로 겉으로 드러날 수 없는 입장이다. 가끔 그런 일이 있다. 주변에서 당신은 왜 연애를 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개인적인 성격이나 취향의 문제도 있겠지만, 주변 여건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일상생활이 그리 만들어지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수짱의 경우 카페에서 일하므로 주변에 일하는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들이 모두 여성이다.

 

여성들만 모인 공간에 남성이 없으며, 여성들 자체가 많은 집단에 남성이 들어가서 일하는 것조차 벅차다. 남성들의 공간에서 여성 소수가 지내기는 하지만, 은근슬쩍 남성들의 권위의식에 압박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남녀인원이 골고루 퍼진 곳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연애기회를 가지기란 어려울 것이다. 수짱의 가게에 오는 다나카 씨의 본사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그는 이와이 씨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

 

솔직히 누군가 사귀거나 만나지 않았지만, 주변에 괜찮은 사람이 있어서 내가 아는 주변인이 그 사람과 사귀거나 계속 만나고 있다면 한편으로 심술이 날 것이다. 수짱의 인간적인 모습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이와이 씨와 다나카 매니저가 사귀는 것을 알고, 어느 날 결혼한다는 사실까지 알 때 수짱은 집에서 우울한 눈물을 흘린다. 물론 자신에게 다나카 매니저가 연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더라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희망사항까지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짱은 결혼과 연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수짱 시리즈를 보면 항상 옆에 친구나 혹은 다른 여성인물이 조연 이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 등장한 조연급 주인공은 수찡의 친구 마이코다. 그녀는 회사에서 일하는 오피스레이디로 노처녀 자리에서 갈등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로 평범한 남성이 아니라 가정이 있는 유부남을 두고 있다. 가끔 그녀의 집에 그를 초대하여 외로움을 달래는 모습에서 그 남자를 두고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다 큰 남자 아이처럼 생각한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외로움을 느끼고, 마음의 위안을 받고 싶어 한다. 위안을 받는 행위는 먹는 것도 되고, 음악을 듣거나 혹은 영화 같은 것도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몸으로 직접 닿는 촉감 역시 피하지 못하는 유혹이다. 마이코는 그렇게 회사에서 사소한 일이 치여 살며, 주말에 억지로 직장상사의 이사한 집에 가서 집들이를 해야 한다. 가까운 친구나 친척이라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나, 직장의 상사라면 그렇지 못하다.

 

옷도 제대로 차려 입어야 하고, 들어가서 편하게 앉아 있지 못한다. 주말 하루 편하게 쉬고 싶은 일정이 모조리 사라진다. 마이코에게 일상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은 변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어도 쉽게 변화할 수 없다. 뭔가 새로운 계기나 기회가 있어야 한다. 주변에서 사람들은 왜 너는 그렇게 살아가니 어떻게 할 수 없어? 라고 이야기하지, 그에 대한 대안이나 도움은 전혀 주지 않는다. 흔히 말해 답은 이미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하든지 혹은 너는 부족한 사람이야 라는 식으로 몰아간다.

 

그런다고 은근히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말도 틀렸다고 볼 수만은 없다. 마이코는 유부남 애인을 정리했지만, 그런 만남을 하면서 처음부터 그에게 진정한 사랑을 기대하는 게 어리석었고(진정 사랑한다면 그 남자에게 현재의 아내와 이혼하라고 요구하는 게 옳은 게 아닌가), 수짱도 진정 마음이 있었다면 이와이가 만나기 전에 한 번 말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말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말이야 쉽지!”

 

사람이 살면서 진정 자신이 원하는 뜻대로 선택한 적은 얼마나 될까?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도 비단 수짱의 마음만이 아니라 우리도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조차도 선택의 권리라고 여기고 있는지를 말이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한다면 그 안에서도 뭔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다고 이성으로 이해하도라도 마음은 따라주지 않는다. 인간의 심리는 머리로 생각하기보단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라고 고민하더라도 당장 답이 나오지 않으니 오늘도 내일도 같은 고민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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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싫은 사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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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가이다. 그녀의 만화는 20~30대 여성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흐름을 타고 최근에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우연히 개인이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마스다 미리의 만화에 대해 읽어보고 서로 이야기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예전에 마스다 미리라는 작가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으나, 실제로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20~30대 여성에게 잘 와 닿으며, 특히 30대 미혼의 여성에게 많은 공감을 사고 있다고 한다.

 

아마 마스다 미리의 만화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짱때문인가 싶다. 이번에 내가 읽어본 <아무래도 싫은 사람>에서 수짱은 36세 노처녀로 등장한다. 일본의 36세와 한국의 36세는 다르다. 일본의 1살은 실제 태어난 지 1년이 지나야지 나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1살로 본다. 일본과 한국의 나이세는 차이에서 한국은 일본나이를 고려할 때 만1세라고 이야기한다. 36세의 수짱은 한국나이로 37살의 여성이다. 최근 결혼연령이 늦어진다고 하나, 남성에 비하면 상당히 많이 늦은 나이인 점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수짱이 어디 외모가 특이하거나 이상한 것도 아니다(만화에서 그려지는 캐릭터를 보고 미적인 판단여부를 알 수 없다). 결혼하지 못하는 것인지 결혼하지 않은 것인지가 매우 불명확하다. 수짱의 주변에 인연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환경적 여건이 많이 큰 것 같으며,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마음에서 누적된 자기불안심리가 더 공고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싫은 사람>은 연애를 중심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사소한 경계점이 중심이다.

 

여성작가라고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공감대는 형성되었다. 일단 수짱이 일하는 카페에 아르바이트생과 정직원이 있다. 그런데 정직원 한 사람이 사장의 친척이고, 그녀는 수짱이 가게 점장 인데도, 그녀와 상의하지 않고 자신의 기분대로 해결하려고 한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중요한 일까지 말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사람의 관습이 참 피곤할 때가 많다. 수짱이 느끼는 불편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다음에 계속 얼굴을 바꾸고, 그 험담한 사람과 잘 지내는 모습에서 인간의 이중적 모습이 지겨울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아도 아무 말도 못한 채 가만히 있는 수짱 역시 자신에 대한 짜증과 기만함에 화가 나기도 한다. 수짱의 사촌동생이 겪은 이야기도 참 공감이 갔다. 식당이나 어디 가게를 가면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이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내가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려고 한다면, 접대하는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혹은 적을 수도 있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아르바이트생으로 와서 서빙 하는 경우가 참 많다.

 

시내에 나가면 보통 대학생이나 휴학생들이 아직 어린 표정으로 손님을 대하는데, 가끔 가다보면 손님 중에 무례한 사람들이 많다. 반말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큰 소리에 짜증까지 부린다. 물론 그 아르바이트생이 친절하지 못하거나 실수를 하고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그럴 일은 거의 없다. 한국사회도 그러하거니와 일본에도 그런 요소를 지닌 점을 본다면 한일 양국 간의 문화적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의 심리적 요소는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 일상에서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들은 어떤 큰일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다. 너무 일이 커지면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침착하게 해결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소한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 인간은 어느 순간 냉정을 잃게 된다. 그동안 계속 자기 마음에 응어리를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회사 내에서 그런 점을 가끔 본다. 누구는 프린터에 용지가 없으면 다시 가지고 오고, 프린터에 종이가 걸리면 일일이 빼주는데, 막상 프린터에 출력을 보낸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 백 장의 인쇄물을 출력버튼을 컴퓨터 워드프로그램에서 지정하고, 그동안 자기 일만 한다. 다른 사람들도 출력물을 뽑아 사용해야 한다. 어느 누구만 일이 급하고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면 짜증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소한 일에서 짜증나는 것은 어찌 보면 그 사소함이 인간의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에서 수짱 사촌동생이 식당에 가면서 남자친구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본다. 점원에게 물을 주세요.”가 아니라 여기! 이라 말한다.

 

평소 사람을 대하는 인격이 거기서 그대로 묻어나오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수짱의 사촌동생은 불쾌감만 느끼는 게 아니라 집에 가서도 가족과의 스파크가 튄다. 신발을 벗을 때 가지런히 정리하는 게 아니라 그저 되는대로 벗어버리고, 말투나 분위기도 조금 감정적으로 나가기도 한다. 밖에서 왠지 모르게 불만을 받으면 거기서 해소되지 못한 채 어딘가 폭발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TV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다니는 회사에서 위에 계시는 사람이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아랫사람에게 종종 이유 없이 짜증내거나 업무로 꼬투리를 잡는 경우가 많다.

 

마스다 미리의 작품에서 보이는 그런 돋보임이란, 바로 이런 사소한 것에 대한 표현력이다. 그림체는 왠지 모르게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림에서 보이는 상황과 대사내용은 엄청난 공감대가 있다. 사람이 살다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맞지 않은 사람이 있다. 왜 그런가 싶으면 그 사람의 전반적인 것보다 사소한 모습이 자신의 시야에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나, 거대한 성곽 역시 사소한 돌멩이로 이루어진 것이라 본다면 <아무래도 싫은 사람>을 보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인간관계도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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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9-07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 한국 만화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김혜린 작가 리뷰도 부탁드립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07 17:28   좋아요 0 | URL
테르미도르라는 만화가 인상깊어 보이는데
한 번 어디서 구하여 읽어보겠습니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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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작가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예전에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김수정 작가의 <아기 공룡 둘리>는 내 어린 시절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한국에서 보통 30~40대 남녀 구분 없이 김수정 작가 작품을 만화로 보던지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봤을 것이다. <아기 공룡 둘리> 주제가 역시 추억이 담긴 노래이다. 그런 둘리라는 친숙한 이야기가 최규석 작가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었다. 우연히 인터넷으로 본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모든 친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둘리는 고철수와 고희동에게 이용당하는 모습만 나온다. 모두 어린 시절 순수하고 놀기만 좋아한 악동이었으나 커서는 악동이 아닌 악당 같은 모습도 나온다. 희동이는 다른 사람을 때리고, 철수는 자기 친구들을 이용해 먹는다. 또치는 동물원으로 팔려가고, 도우너 역시 외계인 연구가에게 팔려간다. 그나마 또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도우너는 해부를 당해야만 했다. 정직하게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서로를 뒤통수를 날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어렸던 자신과 얼마나 많은 간격이 있는 것인가?

 

그나마 둘리는 그 옛날 마음을 가졌던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모두가 변한 모습에 둘리의 좌절은 그야말로 씁쓸한 뒷맛을 안겨주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려 마법을 쓰지 못한 둘리에게, 단순히 둘리의 슬픈 오마주는 둘리를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우리 일상에서 존재하는 이방인이란 존재를 돌아보게 만든다. 겉모습이 독특한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보다 차별과 조롱 속에서 살아간다.

 

최규석 작가의 작품은 그렇게 현실에 대한 풍자와 슬픈 그리고 고뇌가 넘치는 것이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 단순히 둘리의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최규석 작가가 만든 작품들을 모운 하나의 단편선집이라고 볼 수 있다.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재학 혹은 졸업 작품으로 만든 것은 상당히 날카로운 그의 세상을 볼 수 있다. 예전에 본 <습지생태보고서>는 재미 속에 숨겨진 풍자라면, 이 단편선집들은 그야말로 날카로운 시선으로 풍자한 것이다.

 

그나마 맨 처음에 인디애니메이션 <셀마와 단백질>에서 나온 <사랑은 단백질>부터 나와서일까? 자기 팔을 잘라 족발을 파는 돼지, 자기 아이를 구워 치킨을 파는 닭, 실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나, 작품에서 말하는 현실적 모순은 상당히 날카롭다. 대학 자취생조차 돼지저금통에 담긴 동전을 꺼내기 위해 칼로 돼지저금통의 배를 가른다. 돼지저금통은 배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한다.

 

병아리를 튀김 통닭집 아저씨 역시 고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난한 우리 소시민은 오늘 당장 먹고 살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미래를 버려야하는 비극적 요소를 풍자와 해학으로 보여준다. 최규석 작가 작품은 만화로 봐도 충분히 매력을 느끼나, <사랑은 단백질>은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것이 매력적이다. 최규석 작가 작품을 보면 상당히 현실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안에서 담긴 웃음에 대한 미학은 아마 최근에 자리 잡은 것 같다. 현실에 대한 관찰에서 약자가 당하는 모습에서 정말 리얼리티 그 자체를 부여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모두 열광할 때를 대비하여 <연평해전>이란 영화도 나왔지만, 경기장과 그 주변지역에 대한 환경정화라는 슬로건 역시 문제다. 최근 <두 개의 문> 내지 <소수의견>에서는 자신의 터전을 잃는 것에 대해 공권력에 저항하다 무참히 밟혀버린 서민의 눈물이 나온다.

 

<선택>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과연 이성적으로 자유의지에 의해서일까? 아니라면 그것이 무시된 것일까?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그에게 선택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선택하는 것도 싫었었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을 그것을 종용토록 하지 않는다. 오로지 주어진 환경에 의해 흙탕물에서 뒹굴 수 없는 약자의 눈물 그리고 분노, 좌절감이 보인다.

 

왜 만화가 예술로 될 수 있을까? 일반적인 대중매체에 이런 불합리적인 존재를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영상매체 같은 경우 대규모 자본이 움직이고, 이 자본으로 통해 이익과 효과를 노린 자들은 대부분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만화는 누구나 그릴 수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화면 위로 나타낼 수 있다. 글로 적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 묘사와 상황을 글로 표현하려면 많은 고민이 되나, 그림은 당장 그려내어 볼 수 있다. 대신 그 조건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기반이다.

 

최규석 작가를 전에 가까이 만날 수 있을 기회가 있었다. 토크콘서트에 가본 것과 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행사장의 게스트로 참석해서 옆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 때이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에서 그를 억압하는 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의식이 살아있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 늘 현실에 대한 삐딱한 시선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 모습보단 그 모습 이면에 가려진 것들, 즉 광학적으로 틀어보는 눈빛이 그의 작품이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보면 다소 폭력인 장면이 많다.

 

사람의 목을 잘라내는 장면도 등장하고, 피가 흐르거나, 구타하는 장면 등등도 나온다. 만화의 문제점이 폭력성을 유발한다고 하나, 정작 사회의 폭력성에 무감각한 현실이 더 심각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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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2015-08-18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심 이거보구 바로 인터넷에 쳐봤는데.. 내용장난아니네요... 정말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ㅜㅠㅠ

만화애니비평 2015-08-18 18:01   좋아요 0 | URL
작가님의 날카로운 그림이 장난이 아니죠.

카스피 2015-08-19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끼는 책중의 하나인데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5-08-20 08:39   좋아요 0 | URL
대단한 발상력이죵
 
신과 함께 : 이승편 상.하 세트 - 전2권 신과 함께 시리즈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신과 함께> 이승편은 저승편을 이어 나온 작품이다. 저승편에서는 저승차사가 죽은 자를 불러오는 것과 저승에 가서 인간이 심판 받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이와 달리 이승편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주이다. 옷과 집이 없으면 추위와 더위 그리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먹는 것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의식주의 해결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다. 만약 그것이 곤란한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신과 함께> 이승편은 상당히 씁쓸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일어나지만 은폐되거나 또는 조작되는 우리의 이웃을 볼 수 있다. 최근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국전쟁 후 산업화 시대에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이 노년층으로 전략했다. 그들이 일할 때 농촌에서 나와 모두 도시로 이주했고, 전쟁 때 특히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도 많다. 그들은 이제 20세기 중반의 아픔을 겪은 후에 가정을 만들고 행복하게 살려고 했으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않다. 누구에게는 행복이 간다면 어느 누군가는 그 이상의 불행의 악운이 따른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차사 외에 살아있는 인간으로 서울 산마을에 살고 있는 노인과 손자다. 노인은 연세가 오래되어 거동이 사실 불편하나, 종이폐지를 주워 하루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손자는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했고, 가난하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할아버지의 아들, 그러니깐 손자의 아버지가 되는 자는 병으로 죽고, 그의 아내인 어머니는 밖에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으며, 할머니는 몇 년 전에 노환으로 죽었다. 할머니가 눈을 감을 때 아마 제대로 눈조차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부모보다 먼저 자식이 죽는 게 엄청난 불효라고 한다. 그것만큼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슬픔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의가 아닌 우연의 사건이므로 죽는 자나 살아가는 자 모두 비극이 된다. 인간의 인생은 과연 행복인가 불행인가? 가끔 생각하면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절망은 우리 인생에서 항상 반복되어 나타는 현상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도대체 내가 살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내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좌절되어 존재성마저 부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승편에서 아마 그런 인간들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같다. 가진 것 없이 가난하고, 매일 생계에 고민하는데, 몸은 이미 병들어 앞으로 살아갈 날조차도 기약할 수 없는 운명을 말이다. 그런 할아버지에게도 응원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었던 자였다. 인간이 무속신이 되어 그들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물론 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솔직히 나는 신이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신이란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관찰만 하는 존재, 즉 이신론(理神論)적인 가치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 같은 경우 거대한 자연의 힘이 신과 같은 힘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지구온난화나 각종 자연 파괴로 인해 인간은 이상기상현상에 재앙을 당하고, 공기와 물이 오염되어 인간이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분명 우리 한국인은 자신이 사는 공간과 시간에 신이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새로운 집에 이주하거나 또는 자동차를 구매하면 고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다. 음식물을 올린 제단을 앞에 나두고 절을 하여 앞으로 무사태평과 안전을 기원한다. 물론 직접적으로 행복한 일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단지 그렇게 더욱 간절히 자신이 바라는 것을 더욱 공고하게 하여 스스로의 암시를 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무생물로 이루어져 있다. 살아있는 나무도 베어내면 목재가 될 뿐이고, 돌과 시멘트, 각종 건축자재는 생명이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집에 조상신이 온다거나 또는 가택을 지키는 신들이 있다고 믿었다. 집터를 지키는 성주신,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 등이 말이다. 우리 집은 신들이 지키므로 안전하다고 여긴 것이다. 아마 그것은 지금의 건축문화처럼 대규모자본이 대량생산 대량판매로서 가옥을 구축하는 게 아니라 모두 자기 손으로 집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혹은 주변 사람들이 모여 집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의지가 집에 반영되어 있다. 집에 신이 거주하는 이유는 집에 사는 인간들이 집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집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신과 함께> 이승편은 가택신들의 활약을 그린 작품이다. 조왕신, 성주신, 측신이 거주하는 한 주택에 할아버지와 손자를 보호하기 위해 저승차사와 겨루고, 살아있는 철거업체 업주와 싸운다. 할아버지가 연로하여 이제 곧 강림도령에게 호명당할 차례였기 때문이다.

 

손자가 입학하여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가택신의 모습은 안쓰럽고 애처롭다. 이승의 신 가택신과 저승의 신 차사에서 직급은 가택신이 높다. 그러나 가택신들은 힘이 약하다. 저승과 이승을 다스리던 대별왕 소별왕 형제에서 대별왕은 공정하나, 소별은 공정하지 못하고 간사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이승을 통치하지 못해 이승의 세계는 언제나 불행과 슬픔이 넘치는 것이다. 늙은 할아버지고 고생하여 겨우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나, 아파트 재건축 투기열풍은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강제로 토지를 매입당해 집이 철거당하니 말이다.

 

이 가난한 마을에는 유독 늙은 노인이 많았다. 노인의 친구는 오락실을 운영하던 주인이나, 자녀들이 제때 찾아와 돌봐주지 않아 혼자 외롭게 병과 굶주림에서 고독사 하였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게 노인들의 죽음이다. 예전 시대에는 노인이 죽으면 그 집에서 모든 장례절차를 밟았고, 시신도 집에서 모신 후 매장을 하였다. 이제는 시신은 병원영안실에 모신 후 화장을 한다. 하지만 가족도 없거나 제대로 봐주지 못할 경우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한다. 죽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아마 아무도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은 점이다. 살아있었다는 그 자체도 무시당하기 때문이다.

 

철거업체에도 가난한 청춘이 등장한다. 가끔 용역업체에 등록금과 생계수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본다. 그들은 그들의 의지보단 현실의 상황에 이끌려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약자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아무 생각 없이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을 하면 후에 엄청난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평소 남에게 피해를 주면 언젠가 그것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신과 함께>에서는 그런 한국의 민간신앙 요소가 깊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 만큼 한국사회의 어두운 모습이 짙게 베여 있다는 점이다. <신과 함께> 전체를 읽으면 현실이 부조리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승의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장담은 못하나, 만약 있다면 대부분 거기서 살아있을 때 저지른 죄 이상으로 벌을 받을 것이다. 물론 저승조차 없으면 불가능하고, 후대에서도 과거의 인물도 다른 식으로 포장이 가능하다. 힘없이 억압받는 입장이 놓인 일반 서민들에게 현실이 오히려 수라의 세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과 함께>는 다소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승편에서 보이는 철저한 현실의 고통은 왠지 모르게 마음을 쓰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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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9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8-10 09:01   좋아요 0 | URL
아!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