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이야기 그림
최호철 지음 / 거북이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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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순환선>을 말하면 서울지하철 2호선을 말한다. 지방에 사는 나라도 서울 을지로를 순환하는 지하철을 알고 몇 번 타 본적이 있다. 서울에 가면 중요한 시내를 환승할 때 2호선을 빠질 수 없는 구간이다. 신도림역과 합정역, 잠실역과 사당역, 우리 형이 작년까지 서울 봉천동에 살 때 내가 내리던 역도 2호선이었다. 2호선을 타면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서울의 지하철은 서민의 발이다. 교통체증이 심하고, 인구 대부분이 서울경기도에 집중된 한국사회에서 지하철의 만원사태는 항상 본다.

 

다른 지역과 다르게 서울은 지하철 중심의 교통체계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일반 아파트 단지부터 시작하여 쇼핑센터, 대학교 및 정부 공공기관마저 그렇다. 모든 중심이 지하철로 매개되어진다. 그러나 최호철 선생의 <을지로순환선>은 지하철 내부를 보여주거나 지하철에 탑승하는 사람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을지로라고 하는 것은 지하철 노선이기도 하겠지만, 맨 처음 검은 바탕에 그려진 하얀 실선의 그림들은 서울의 한 바퀴를 돌아가는 것처럼 서울이란 도시를 하나의 유기적인 존재로 보고 그려낸다.

 

여기는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거나 혹은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세상은 발전되면 될수록 좋아진다고 하나, 왠진 그것은 꿈과 같은 이야기다. 꿈이라도 좋은 꿈이 아니라 최악의 악몽이다. 남의 입에 들어가는 좋은 떡을 보는 게 정말 행복한 일인가? 내 입에도 하다못해 콩고물 하나라도 들어가 그 달콤한 맛을 보는 것이 좋을지 모르나, 세상은 오로지 그것을 멀리서 부러운 시선으로 보도록 한다.

 

이런 세상에서 매일 같이 일상을 전쟁터로 보는 이들의 삶은 어떤가? 삶에 흔적에 언제나 행복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울한 하늘 위에 구름이 잔뜩 끼여 낮에 맑은 하늘과 밤에 반짝이는 별조차 볼 수 없다. 하지만 구름은 언제나 이동하고, 그 농도가 강해지면 비로 내린다. 비가 내린 하늘은 맑고 푸르며,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그런데 왠지 우리의 서울하늘은 언제나 여름철 장마전선인 모양이다. 눈에는 분명 하늘은 맑은데, 마음의 눈에는 언제나 흐림이니 말이다.

 

16세기 영국의 왕국은 국가재정을 탄탄하기 위해 혹은 영주가 자신의 부를 늘리기를 위해 농지에 살던 농민들을 모두 내쫓았다. 농민들은 왕과 영주를 위해 농사를 짓던 농노였다. 그들을 내몬 이유는 그 자리에 목축지를 만들어 양을 풀었고, 양에서 나오는 양모를 팔아 수익원을 삼았기 때문이다. 농지를 잃은 주민들은 모두 도시로 흘러가고, 배고픔과 추위에 시름 앓는다. 운이 좋으면 공장의 노동자나 부잣집 하인으로 고용되나, 대부분 거지나 좀도둑이 되어 마지막에 범죄자로 몰려 고문당하거나 교수형에 처하게 되었다.

 

서울이란 도시 혹은 서울 인근에 위치한 지역이 급격한 성장한 현대사회에서 갈 곳이 없는 가난한 자들은 계속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내쫓기게 된다. 그들은 더 저렴하고 개발이 당장 되지 않을 것 같은 곳을 찾다가 멀리 이동한다. 나쁜 주거환경, 불편한 교통여건, 각종 공공성 재산이 없어 항상 생활은 허덕인다. 우리 이웃은 이렇게 우리의 이기심에 의해 우리의 눈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들도 사람이고, 그들 역시 살아가야 한다. <을지로순환선>으로 그려낸 최호철 선생이 바라보는 세상이란 이렇게 아프지만 사랑스럽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힘들게 살아가는 그들이 있는데 말이다. 땅 밑이 있어야 땅 위에가 존재한다. 토대가 있어야 멋진 건축물과 빌딩들이 하늘을 향하여 올라갈 수 있다. 거만한 인간의 욕망은 마치 하늘 위에 존재하는 절대자처럼 되고 싶은지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이런 차가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그것조차 없다면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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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10-0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이 양반은 그림 자체가 스펙타클하잖아요. 저번에 세종문화회간인가 거기서 이 분 그림 본 적 있는데.. 진짜 보니까 후덜덜합니다. 그 크기부터 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10-03 15:30   좋아요 0 | URL
곰발님의 글 자체가 스펙타클합니다..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5-10-03 15:51   좋아요 0 | URL
앞으로는 글자 폰드 34로 쓰겠습니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8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김경훈 옮김, 토베 스나호 그림 / 서울문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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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로미오의 필력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8번째 시리즈, 사실 이 작품을 보면서 7권 이후의 녹나무 마을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 상황에서 보는 현실적 관점이라고 한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주인공의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 로봇이 마을을 초토화하는 바람에 녹나무마을은 점차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마을이 황폐해졌기 때문에도 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버드란트 러셀이란 영국 철학자는 인간에게 가장 즐거울 때는 바로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보통 우리 일상생활에서 흥분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성적인 욕망을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성적욕망을 위해 새롭게 시도하는 각종 행위들은 흥분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흥분은 한계점이 있다. 성적인 에너지인 리비도는 인간이 항상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도 욕망의 분출에서 욕구의 한계로 만족하면 그 다음 욕망을 느낄 때까지 인터벌이 존재하는 것이다.

 

식욕, 수면욕, 성욕과 같은 동물적 기능은 인간에게 한계성을 준다. 밥을 먹는 양도 어느 정도 한도가 있고, 잠을 계속 자면 어느 순간 불면증까지 이어진다. 성욕은 과도한 체력소모로 충분한 휴식과 영양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흥분이 왜 동물적 요건으로 보는 것이 한계라는 점은 도출되었다. 인간에게 육체적인 흥분은 언제나 그 한계가 있기에 결국에 이와 다른 정신적 흥분이 중요한 것이다. 인간생활사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문제 되는 것은 바로 게임이다. 게임은 인간에게 여가생활과 동시에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지만, 한편으로 지나친 중독은 일상생활에 좀을 먹게 만든다.

 

게임중독에 빠지는 이유는 게임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계속 흥분을 하기 때문이다. 뇌에서 전해오는 화학물질이 눈에 보이는 게임영상에 의해 계속 생성된다. 뇌에 작용하는 화학물질로 인해 인간은 극단적인 흥분을 느낀다. 게임을 하거나 혹은 거리에서 운전할 때 주변 차량과 레이싱을 하려는 상황에서 흥분을 느낀다. 인간에게 흥분은 육체적인 조건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영역에 가까운 곳이라 볼 수 있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8권에서는 이런 인간들의 정신적인 흥분을 잘 보여준다. 물론 작가의 시나리오에서는 마을의 재건을 고민하는 조정관 주인공의 모습에서 보이나, 그 주변은 분명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것이라면 무엇인가에서 러셀의 말을 인용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이 즐거울 때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 자신의 자아실현에서 인정받는 것이 사회적 인정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이다. 그 답은 바로 할아버지의 선택이다. 만물박사이며, 유엔 업무담당관 중에서 가장 총명한 그는 사실 영락없는 모험탐락가다. 사냥을 좋아하고, 미지의 유적지를 가는 것도 좋아하며, 특히 골동품(특히 무기들)을 모우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총을 사무실에 걸어놓고 사격연습을 하는 박사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도전정신이 빛이 난다. 과연 그것은 8권에서 어린 시절 아주 말썽꾸러기로 살아갈 때 입었던 알로하셔츠를 거치고 우주여행 모험에 참여한다. 솔직히 작품배경이 의상과 건축형태를 보자면 19세기 정도 보이나, 실제적으로 30세기에 근접한 쇠퇴하는 인류이다. 지금의 최첨단 기술인 우주비행선이 우리에겐 미래를 열어갈 도구지만, 작품에서는 우주비행선이란 과거에 존재했던 우수한 기술이었다. 마치 우리가 미스터리로 가득한 마야문명을 바라보는 시선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위험한 곳인 것을 알면서 우주비행선을 타고 달에 가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다. 일상생활을 보면 특별한 것이 있을 것도 없고, 마을은 늘 분위기가 시골마을을 보는 것처럼 조용한다. 총기를 손질하며 하루를 보내고, 조정관의 업무를 맡은 손녀에게 일만 주고 딴청 피우는 할아버지에게 새로운 이벤트는 눈에 확 들어오는 찬스다. 게다가 주인공 옆의 조수마저 할아버지와 같이 달에 가고 싶어 한다. 다행히 초대권이 없기에 다행이지 만약 있었으면 상당한 골치로 되었을 것이다. 이게 바로 흥분의 시작이다. 소풍 전날 잠 못 드는 아이처럼 뭔가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은 할아버지나 조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주 성향이 특이한 주인공의 학사동기 Y의 경우 남성끼리 연애하는 BL장르에 빠져있고, 자신의 취미를 살려 주변마을에 사는 소녀들까지 녹나무마을에 이끌어 온다. 마을이 침체된 상태에서 주인공은 그런 망상을 이용하여 마을을 번창 하려 했지만, 의외로 골치를 썩는다. 요정의 힘으로 만들어진 약물로 통해 현실에 존재하는 영상이 투과되는 증강현실을 마을에 도입한다. 우리 일상에서는 가장 좋은 예를 네비게이션이다. 네비게이션에는 아주 먼 곳에 있는 지역까지 화면 위에 지도로 나타낸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그 전경을 볼 수 없다.

 

21세기 스마트폰, PC인터넷의 발전은 단순히 가상현실만이 전부가 아니라, 증강현실에도 큰 변화를 준다. 그래서 디바이스가 해킹되면 자신이 가야할 길이 아니라 엉뚱한 길을 찾아 갈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진짜가 아닌 가짜가 오히려 진짜같이 되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증강현실을 이용하여 마을을 부흥하려 하나, 그것은 도박에 가까웠다. 임신을 한 여성이 의사도 없어서 애태우는 모습은 정말 골치 아프다. 그런 증강현실은 하나의 게임플레이 어플리케이션처럼 작용하여 어느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해진 루트를 밟아 진행하는 것이다.

 

오락실에서 비트 마니아처럼 박자에 맞추어 키보드를 누르면 good & bad가 뜬다. 게임이 아닌 분야에 마치 게임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라 한다. 녹나무마을을 융성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의욕을 줘야 한다. 의욕을 주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나 기회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한 것이다. 21세기가 도래하면서 문화콘텐츠가 중요한 것은 문화적 감성은 결국 인간에게 새로운 감각을 전달해주고, 삶에 대한 만족과 새로운 목적을 준다는 점이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에서 인간은 수동적인 삶보단 능동적인 삶에서 재미를 찾는다. 하지만 수동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바로 동기유발이 없다는 점이다. 마을이 피폐해져도 이미 확보한 군용텐트가 완벽히 주거환경을 제공했고, 주변지역에서 구호물품이 계속 쏟아진다. 마을재건을 막상 하려니 도저히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이 삶에 흥분을 일으킬 새로운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요정이 준 수면제는 이상한 약초로서 꿈을 꾸게 되면 마치 마약을 먹은 것처럼 환각 증세를 일으키는 것이다.

 

꿈이란 세계는 인간이 깊은 잠이 아니라 엷은 잠에 들었을 때 이미지가 보인다. 이미지의 세계인 꿈에서 인간은 자신의 현실에 가려진 욕망을 마음대로 분출할 수 있다. 이상한 모양의 물건을 만들고, 자신의 신체를 특이하게 강화시킨다. 게다가 요정의 수면제는 개인에게만 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꿈이라 그 마을 전체를 꿈의 세계로 이끈다. 꿈의 세계란 인간에게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신화란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많은 인간들이 꾸는 꿈나라는 마치 환상의 세계에 온 것 같다. 신화란 환상의 세계이나, 그것이 현실의 인간을 반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현실에 대한 회의적인 자세는 마을을 떠나는 악순환도 발생하나, 자신이 처한 현실에 빠져 현실도피를 하는 경우도 다분하다. 어느 쪽이든 마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극단적 처방전으로 일시적인 구호물품을 받지 않는다. 물건이 오지 않으니 다들 불만이 쌓이고, 불만 역시 하나의 흥분에 가깝다. 기분 좋지 않은 흥분일지 모르나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녹나무마을을 다시 재건에 이른다. 생각해보면 발전한 마을이나 도시로 사람들이 유입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오는 게 정답이다.

 

그런다고 처음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계기나 동기가 필요하다. 환각 증세와 Y의 BL의 공세는 처음에 마을에 이웃에 사는 소녀들을 대거로 오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욕망의 목적에 치중하지 그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을의 청년과 친하게 지내는 부류도 있었다. 대규모 군중이라도 모두가 같은 인간이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번 8권에서는 요정의 역할이 적은 편이었다. 기억나는 부분은 루이16세를 따라하려던 요정이었다. 루이16세는 같은 세대에 살았던 장 자크 루소를 두고 조롱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의 저서 <에밀>의 영향으로 자물쇠 만들기가 취미였다.

 

자물쇠 만들 수 있는 것은 아주 고급된 숙련공만 할 수 있었다. 요정의 기술은 그런 세세한 손길로 만들어지는 기술이 아니라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기술인 요술과 같다. 단지 인공지능의 전원을 충전시키거나 이상한 수면제만 만들었지 직접적으로 작품의 무대 위로 나오지 않았다. 요정의 특징이 인간의 문명흔적이 집중적으로 모인 곳을 좋아한다. 전쟁의 결과 문명의 파괴이니, 예전 녹나무마을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이 떠나니 요정들의 활동이 더딘 것도 역시 그렇다. 문명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이 기반되지 않으면 성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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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노래 일본군 위안부 만화
정기영 지음, 김광성 그림 / 형설라이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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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아베정권이 일본의 군사력을 확장시키려는 정책을 시도하려 하고, 과거 다른 국가를 침략한 역사를 부정하려고 한다. 침략은 했으나 그것은 그 나라를 억압의 수단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은폐하려 한다. 그렇기에 그 시대 일본이 저지른 행위를 진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을 다른 식으로 말한다. 일본에서 유네스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군함도, 그것은 완전히 지옥의 섬이었다. 조선에서 징용한 사람들을 강제로 노동하여 죽을 때까지 일을 시켰다. 그것도 더위와 피로, 음식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의료의 혜택조차 노동력의 징발여부만 가렸다.

 

그런 과거의 행위가 왜 지금에 논란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누군가 그런다.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그것은 우리하고 상관이 없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일은 당장 지금 우리 앞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의 정치적 형태가 자꾸 과거의 모습을 속이고, 군사적인 요소를 부각한다면 또 다시 저런 문제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영향으로 100% 재현되지 않겠지만, 어디서 모른가 저런 비인간적인 행동까지는 아니나, 많은 인간들을 절망으로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라는 것은 왜 지나간 것만이 아니라 현재와 계속 대화하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만약 우리가 어느 위기에 빠지면 일본은 그때도 야욕을 보이며 달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란 기억해야 할 것들이 많고, 그 기억에서는 좋은 기억보단 나쁜 기억이 많다. 좋지 못한 기억이 있다는 것은 기억해야 하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부담을 준다. 과거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단지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지지 않는 꽃>은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간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실재로 존재했던 일들, 영원히 지옥의 악몽에서 풀려날 수 없는 저주, 사실상 마음 깊이 담아두는 것만으로 상처가 깊은데,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란 상당한 고통이다. 한국사회는 여성에 대한 기준이 참으로 난감하다. 성폭행은 분명 나쁜 것이고, 성폭행은 당한 대상은 약자인 여성이 많으나, 그들의 피해사실을 제대로 말하기가 어렵다. 과거 형사나 경찰이 피해 진술과정에 대해 들어보면, 피해여성에게 상황묘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 해 달라고 한다. 그것은 피해자가 아주 두려워하던 순간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충격으로 인해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해진다.

 

예전에 성폭행 당해본 여성들은 대부분 자신의 피해과정을 숨기거나 고소를 취하하던 이유가 바로 여기다. 재판과정에서 다시 그 상황을 공개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을 더 심각하게 찌르는 것과 같다. 위안부 할머니는 아마 그런 성폭행 피해여성에 비교하면 괴로움이 더 심할 것이다. 집단성폭행에다가 잔인한 고문과 살인위협에 항상 시달렸기 때문이다. <지지 않는 꽃>에서 처음 주인공으로 등장한 할머니가 공장에 일하러 간다는 말만 믿고 따라가는데, 알고 보니 동남아 일본군 진영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으로 계속 패배를 겪고 있었고, 위안부의 공급은 패배의식에 짓눌린 일본군들의 사기를 충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남자의 성적인 욕구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행은 한편으로 정복욕을 충족시켜주는 해결방안이었다. 전 근대적인 사회에서 전쟁이 나면 항상 승리한 침략자는 마을 안에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은 자신의 첩으로 삼는다. 여성들은 전쟁에서 항상 전리품으로 다루어진 것이다(그런다고 여성의 인권만 생각하지 말고, 몰살당하는 남성의 인권도 생각해야 한다). 위안부는 현지에서 약탈이 불가능한 일본군들이 강제로 약탈했다는 인식을 심어준 행위이다.

 

작품에서 사병을 관리하고, 일본군의 복무신조를 지켜야 하는 장교가 오히려 위안부 처소 안으로 들어와서 행패를 부린다. 이미 전쟁에 의한 정신적 외상이 극으로 치닫고, 피해의식과 파시스트의 광적인 요소는 학살과 자살 등과 같은 만행으로 연결된다. 예전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아직 16살의 꽃다운 소녀들이 끌려오면 얼마나 두렵고 괴로워했을까? 아직 몸과 마음이 성숙하지 않았는데, 강제로 성노예로서 성폭행 당한 소녀들은 자신의 성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아 강제로 칼로 성기부분을 찢은 만행을 들었다.

 

<지지 않는 꽃>에서도 그 내용은 나왔다. 다행히 더 끔찍한 장면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일본군들이 전투를 벌일 때 자신들의 병력피해를 줄이기 위해 위안부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일부러 진열의 앞에 서게 하여 적군들이 쏘는 총알을 대신 맞게 하는 총알받이로 이용하기도 했다. 한 많은 세상, 희망도 없이 그저 유린당한 채 죽어야 하는 그녀들의 운명에서 일본의 사죄는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당시 패악을 저지른 자들은 현재의 자는 아니지만, 그것을 잊으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되는 점이다.

 

독일에서 네오나치가 나오면서 많은 지탄이 되었는데, 그것은 인종차별로 이어지고, 인종차별의 극단성은 테러리즘으로 이어진다(물론 그걸 저지르는 광신자들은 정의라고 믿는다). 일본의 사과를 계속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망각하면 망언을 계속하고, 일반 국민들까지 그런 나쁜 정신이 유포되어 한일 양국 간의 우호가 나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조건 사과한다고 해서 사과 받는 쪽이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와 용서로 통해 서로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만행은 저지른 일본은 상당한 젊음들을 전쟁터로 보냈고, 그들의 가족들은 자신의 아들과 형, 친구들이 시체로 돌아오거나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으니, 피해자가 가진 피해의식만큼 가해자에 동조하던 자들의 주변인들도 피해의식을 가진다. 결국 누군가의 이기심으로 인해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야 한 게 전쟁이란 허무이다. 국가정부의 오류로서 전쟁과 전투로 죽은 군인들은 죽을죄가 없이 죽어야 했던 희생자다. 물론 그들이 전쟁 중에 무고한 자를 죽였다면 죄는 된다. 단지 그 죄를 만들도록 한 자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그런 자들의 밑에서 이익을 챙기고, 이권을 이어받은 자들은 용납할 수 없다.

 

아베정권이 오면서 일본전쟁범죄 가문의 후손들이 정계와 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자국의 국민뿐만 아니라 타국의 국민들까지 위험으로 몰고 간다. 그들은 자신의 망상이 국가의 존립과 위엄이라 말한다. 피해자를 두고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외면하고 거짓말하고 있다고 발뺌 하는 현실에서 <지지 않는 꽃>을 보는 것이란 바로 우리의 미래까지 지키는 것까지 연결된다. 꼭 위안부 할머니라 하여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자.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소녀들이 거친 남자들 사이에서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게 일어나면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가 저래 당해서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인간이 보편적 조건에서 일어날 현실로서 접근한대도 그건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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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9-21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안부 할머님들 다큐 보니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연을 하고 난 뒤엔 끙끙 앓으시더군요. 잊으려했던 상처를 다시 꺼내 헤집으니 상처가 또 터지는 거지요. 돌아가실 때까지 그 상태를 견디실 거라 생각하니....
시간이 약이 된다는 말, 아픔과는 상관없는 참 쉬운 말이라 생각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21 09:31   좋아요 0 | URL
시간이 약인 것은 아픔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아픔을 망각하게 해주는 진통제일 뿐이죠. 진통제 맞는다고 병이 치유되는 게 아니니깐요.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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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는 마스다 미리의 <수짱의 연애>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다. 수짱이 카페 일을 그만두고, 보육원에 취업하여 우연히 쓰치다라고 하는 남자를 만난다. 쓰치다는 수짱이 카페 일을 할 때 그 건물 옆의 서점에서 일하고 있던 점원이었다. 성격을 보면 소탈한 면과 소심한 요소가 보이는 평범한 남성이었다. 과거의 일본과 달리 이제 일본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쓰치다의 한 달 월급 이야기나 나오는데, 그의 임금은 월 25만엔이라고 한다.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250만원이다. 이 책이 2012년 일본에서 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쓰치다의 나이 32 전후로 그 정도 월급이면 무척 박봉인 점을 보여준다. 그의 성격과 더불어 그의 월급으로 나오는 숫자는 그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난다. 왠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현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현실이란 점이다. 마스다 미리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분명 심리적인 요소를 잘 보여주고, 상황에 대한 절묘한 묘사를 잘 나타내는 것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현실적 조건, 즉 리얼리즘이란 사실주의적인 요건이 들어간다.

 

보통 만화작가의 연애 장르에는 사실주의적 요소보단 오히려 낭만주의적 요소가 강하다. 낭만주의란 낭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점이다. 연애의 조건에서 현실의 일상적 모습보단 오히려 그 과정을 다루는 요소가 많다. 그래서 연애 장르에 큰 매력이 느끼는 것과 그렇지 못한 점은 현실적인 조건을 너무 무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인간은 현실에서 느끼고 있는 박탈감과 욕망은 작품으로 하여금 신화적인 요소를 부여한다.

 

여자에게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지위가 낮은 여성 혹은 경제적으로 불리한 여성이 부와 지위를 갖춘 남성을 원하는 이야기다. 현실에서 드라마와 영화의 주요 소재로 써먹는 경우가 많으나, 그것은 현실 안에서 가상의 이야기로 될 뿐이지, 일반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극히 드물다. 물론 0.001%가 된다고 하여 안 되는 게 아니라 되는 것은 분명하나, 나머지 99.999%는 분명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존재한다. 경제적 조건이 연애의 조건이 되는가에서 마스다 미리의 작품에서 그것을 은연히 드러낸다.

 

수짱이 그동안 왜 남성과 사귀지 못했는가에서 그녀의 직장을 보면 남성이 없다는 점이 드러나고, 그렇다면 수짱이 카페와 보육원에 일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녀는 일본사회의 상류계층이 아니라 중하위계층에 가깝다는 점이다. 마스다 미리의 작품이 보통 일본작가의 작품과 다른 이유는 현실적 조건으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는 점이다.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에서도 쓰치다는 평소 월급쟁이 생활을 하며, 소시민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집이나 회사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쓰치다 같은 경우 자신의 현실을 어렴풋이 잘 알고 있다. 월급이 적은 것과 그에 따라 연애도 힘들다는 점이다. 사랑은 돈과 관련 있는지 혹은 없는가에서 사랑의 조건에서 돈은 필요하다. 단지 돈으로만 인간을 대할 수 없기에 적당한 균형관계가 필요하다. 쓰치다 월급을 한국의 32살 남자와 비교하여 거의 지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남자와 비슷한 여건이다. 거기다 임대받아 사는 집세와 생활비를 제외하면 그가 한 달에 여유로 가질 수 있는 돈은 매우 적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건이 어려울 경우 일상생활에서 활동이 제한받는다. 그가 평소 계속 집과 회사 가끔 들리는 부모님 댁(명절)과 큰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은 그의 생활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평소 하는 것이랑 독서생활이다. 쓰치다가 서점에서 일하게 된 이유는 어릴 적 큰아버지 댁에 가서 장서에 꽂힌 책들을 보고 나서부터다. 일본 문학 소설 응모대회에서 상을 받은 작품을 다 읽을 정도이며, 그의 독서생활이 직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대신 철학과 사회학보단 소설 위주란 점에서 그의 성격이 매우 감성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감성적인 남성들은 일반적인 여성과 조우하기 어렵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명확히 있기에 그것과 유사하거나, 혹은 자신의 감성적인 감각으로 왠지 느낌이 끌리는 대상에게 마음을 품는다.

 

쓰치다가 마음이 약한 남자라는 것은 작품 내에서 큰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할 때 큰어머니가 쓰치다보고 큰아버지의 병환으로 우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나중에 진짜 큰아버지가 병환으로 죽자, 가족들 중에서 쓰치다만 큰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 집으로 온 큰아버지의 유품을 보며 쓰치다는 혼자 서럽게 운다. 남들에게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쓰치다는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소개팅에서 잘 보여준다. 서점 동료와 그 동료의 여자지인은 야요이, 야요인 친구까지 4명이서 자리를 마련한다.

 

야요이 친구와 독서취향이 비슷하나, 그녀는 애인이 있었고, 결혼도 준비하려던 사이다. 소개팅을 나오고 말고는 자유지만, 결혼을 앞두고 소개팅에 나온 것은 조금 치사한 게 아닌가 싶다. 애인 없는 사람이 있기에 만든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재미 반으로 나온 것이라면 책임감이 없는 것이다. 그 덕분에 쓰치다는 야요이와 사귀게 된다. 야요이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과 사귀려고 했던 것조차도 쓰치다는 상상할 수 없었다. 가령 나도 군대전역 후 학원에 다니다 같은 수업을 받던 사람들과 친해지다가, 그중 한 여성과 친해져서 소개팅을 부탁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주선한 여성이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성격차이와 기호적 차이(나는 기관지가 좋지 않아 담배연기를 싫어한다)로 인해 깨졌지만,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와 많이 놀랐다. 마스다 미리 작가가 여성이고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남성의 심리를 잘 보여주었다. 대신 조금 더 추가했으면 좋을 부분은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에서 사와코의 심리를 여성이 아닌 남성에 대해 적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와코는 나이가 40이 되지 결혼에 대한 문제도 그렇지만, 자신이 27살 이후로 남자와 사귀지 않아, 늙어가면서 자신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이 상실할까 겁이 났다.

 

여성의 매력에 대한 사와코의 자신감은 떨어지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성적으로 욕구불만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직 32살 전후인 쓰치다에게 그런 욕구불만을 조금 반영했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부드럽고 성향의 남자를 초식계라고 하는데, 최근 남자들 사이에서 이런 유형은많이 등장하고 있다. 어찌 보면 쓰치다는 초식계 남성의 전형적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남성에게도 욕구불만 요소는 있다는 점이다. 작중에서 쓰치다가 얼떨결에 야요이에게 자고 갈래?” 물어본 장면에서 조금 억지스럽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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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짱의 연애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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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짱의 연애>는 마스다 미리 작품에서 수짱 시리즈 4번째 마지막편이다. 이번 편에서 수짱은 나이가 37살이 되었다. 이미 30대 후반을 향한 수짱에게 현실의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단지 전에 카페에서 일할 때 손님으로 남자들이 왔으나 보육원에 오고부터는 남자성인 대신 남자 꼬마들만 넘친다. 그나마 같이 일하는 분이신 원장님이 남자지만, 사모님이 조리사로 계시고, 그 조리사로 일하는 사모님의 나이가 일흔이라 한다. 일흔이면 노인에 해당되는 나이다보니 수짱에게 연애의 기회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수짱에게 고민이 오더라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단지 매일 하루를 보육원의 아이들을 위해 요리도 하고, 농장도 일꾸며, 같이 놀아준다. 수짱다운 성격인지 매사 꼼꼼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일을 한다. 그런 일상에 묻힌 수짱은 자신의 처지를 계속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와코를 만나도 혹은 결혼하여 아이를 대동하는 마이코를 만나도 뭔가 고민이 풀리는 것보다 단지 그 순간 잊어질 뿐이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서점에 가서 쓰치다를 만나게 된다. 쓰치다는 수짱이 카페에서 근무할 때 가끔 점심식사를 하러 온 손님이었다. 수짱이 카페에서 일할 때 그가 가끔 올 수 있었던 것은 쓰치다의 근무하는 곳이 수짱의 카페 옆에 있었다. 쓰지다의 업무는 서점에서 근무하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수짱의 나이가 37일 때 쓰치다의 나이는 33세이었다. 수짱의 나이가 4살이 더 많았던 것이다.

 

쓰치다를 거리에서 본 수짱에게 새로운 관심거리가 생긴 것이다. 아침에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의 식단을 준비하려는 수짱이 갑작스레 쓰치다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의 연락처나 메일 정도 알아보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항상 뭔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또는 고민해야 할 거리가 있어도 다른 잡생각이 머리에 떠오른 법이다. 수짱은 언제나 단조로운 일상에 뭔가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했다.

 

수짱이 우연히 도서를 구매하기 위해 예전에 자신이 근무한 카페 옆의 서점에 온 것이 아니라 사무실 근처 서점에 방문했다. 그런데 그곳에 쓰치다가 먼저 와서 책을 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수짱은 당황하나 의외로 그를 만난 것에 큰 호감을 느낀다. 수짱이 원하는 책을 위해 서로 이야기하다가 연락처를 주고받고, 나중에 같이 식사도 한다. 식사를 하고 난 후 쓰치다는 갈등에 빠진다. 쓰치다는 수짱이 아닌 원래 만나던 여자 친구 야요이가 있었던 것이다.

 

야요이와의 관계는 얼마나 신뢰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야요이를 밤에 만나 지하철역까지 마중 나가는 쓰치다의 모습에서 뭔가 둘 사이의 벽이 시자된 것을 알 수 있다. 야요이는 쓰치다에게 집에 같이 가자고 말은 한다. 하지만 쓰치다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밤에 달이 뜬 상태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자신의 집에 같이 가자는 의미는 같이 침대로 올라가자는 의미다.

 

잠자리를 거부한 것이 단순히 업무적인 요소라고 핑계를 둘러대지만, 쓰치다의 마음 한편에 수짱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서이다. 사람의 심리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쓰치다는 여자 친구 야요이도 있고, 수짱은 자신보다 나이가 4살이 많았다. 일본은 연애관계에서 나이의 요소를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나, 한국에서는 아직 여자의 나이가 남자보다 어린 경우가 다분하다. 야요이는 쓰치다보다 2살 어린 31살, 한국에서 평균적인 나이일 것이다. 단지 차이점은 한국에서 남자는 군대를 강제로 복무를 해야 하는 법이 있기에 그런 상태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남녀가 같이 대학을 졸업하면 같은 조건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남녀의 나이에서 한국보다 덜 구속받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애 그 자체에서 상대방에게 이성의 연인이 있고 없고는 별개의 문제다. 쓰치다에게 야요이란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수짱에게 상당한 벽으로 다가왔다. 겨우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 밥도 먹고 맥주도 한 잔 했는데, 안타깝게 처음부터 자신의 마음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수짱의 처지가 가엾기도 했다.

 

왜 그때 카페에서 한 번 제대로 말을 걸어보지 않았을까? 왜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까? 기회란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기회가 오더라도 상대방이 자신과 잘 지낼 수 있는지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느 정도 잘 어울리면 한 번 상대방에게 권유를 해볼 가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상대방이 배려의 차원인지 아니면 그저 그냥 그렇게 대해주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사람은 항상 고민하게 된다. 쓰치다와 수짱은 서로에게 마음은 있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고, 안타깝게도 수짱이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여러모로 기회가 닿지 않았다.

 

인연의 반쪽은 어디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하나, 그것도 상황과 여건의 차이가 드러난다. 이렇게 적으면 너무 비관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막상 그 중간에서 헤매야 하는 사람에게 그 자체가 현실이다. 현실의 속내를 거기에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울 부분이 많을 것이다. 수짱 시리즈에서 사와코가 독신생활을 하는 모습에서 40살 주변의 골드 미스 이야기가 등장한다. 왜 그녀들은 혹은 그녀들의 반려가 되어야 할 남자들은 왜 서로에게 도통 나타나지 않을까?

 

사회에서 나이가 많이 찬 미혼의 남녀에게 결혼문제 건으로 가끔 이런저런 쓴 소리를 한다. 그러나 정작 그런 말을 한다면 그에 대한 배려나 책임감은 없다. 나는 했는데 너는 왜 못하고 있니? 끝나는 무책임한 발언보다 혹시 주변에 상대가 없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 볼 것이니 생각 있으면 이야기해주겠니? 라고 말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거나 너무 불성실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타입이 아니라면 대체로 결혼하여 생활하는 것에 문제는 없다. 정작 필요한 것은 그런 점을 알아주는 것인데 말이다. 알아줄 사람이 있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골키퍼가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짱은 그렇게 자신의 희망이 다시 현실의 우울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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