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을 보면 참 슬픔을 느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닐 터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내 앞에 젊은 커플이 이게 왜 칸영화제에서 상을 탄 거지?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느꼈다. 이 영화를 정말 제대로 느끼려면 삶이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란 말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있고, 삶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을 통해 보이는 예술이다. 봉준호 감독은 확실히 후자에 속한다. 영화감독이란 점에서 영화란 대중문화이란 거대한 자본시장에서 출현되는 콘텐츠이다. 미디어란 공간적 설정에서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고, 그 투자로 성사된 필름이 영화관에서 상영될 때 자본주의 시장의 완벽한 구조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우습게도 인류의 발전과 퇴보를 모두 가지고 오고, 자본주의로 통해 자본주의를 성장하게 하나, 그 자본주의 자체를 비판하기도 한다. 가령 쿠바혁명가인 체 게바라는 전형적인 코뮤니스트였다. 하지만 체 게바라의 옷을 입는 젊은 친구들도 많고, 체 게바라의 청춘을 그린 <모터사이클>이란 영화도 대중문화에서 살아간다. 체 게바라의 서적도 역시 화폐로 통해 구매된다. 자본주의 시장체계란 그런 곳이다. 자본주의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암울하게 만드는 사회적 기생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기생충들은 대부분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소유하는 반면, 사회적 기생충에게 생기를 빼앗기는 대중은 그저 하루가 힘든 소시민들이다.

 

영화 <기생충>이란 바로 그런 소시민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기택은 가난한 집안의 가장이다. 그는 백수로 살아가고, 반지하 건물에서 아스팔트 골목길이 보이는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아간다. 자녀들은 핸드폰 요금을 내지 못해 통화가 되지 못하고, 게다가 주인집에서 와이파이 공유비밀번호까지 바꾸다보니 인터넷도 할 수 없다. 겨우 화장실에 도달하자 인근 커피가게의 와이파이가 연결되자 거기서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아보는 서글픈 현실이다. 이런 가족에게 하나의 기회가 왔다. 기우의 친구가 유학가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과외학생을 지도해달란 부탁을 받는다. 가난해서 진학도 포기하던 기우에게 대학의 문턱은 높다.

 

게다가 포토샵을 해주던 기정은 오빠 기우의 재학증명서를 연세대학교로 바꾼다. 사실 영화를 보면 기우나 기정은 제법 실력을 갖춘 사람이다. 단지 돈이 없어서 대학에 가지 못한 헬조선의 청춘일 뿐이다. 기우가 간 곳은 유명 CEO 박사장의 집이다. 박사장의 아내 연교는 부유한 집의 사모님으로 살아가지만, 아이들의 교육에 늘 불만이었다. 이때까지 잘 되지 않았던 애들의 모습이 기우가 오자 딸인 다혜의 학업능률은 오르고, 다혜는 절실함이 담긴 기우의 과외에 마음을 품는다. 기정은 정서불안인 다송의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하지만 연교가 이들이 자식의 교육을 제대로 맡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학벌의 조건이었다. 국내 유명대학교, 해외 유명대학교 출신이란 말에 모든 것을 혹한다. 결국 학벌이란 존재가 하나의 상품과 이미지로 된다. 현실에서 오히려 그 일에 대한 적성도가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학벌의 문제로 밀리는 게 안타까운 일이다. 박사장 가족의 마음을 잡은 기우와 기정은 운전기사로 아버지 기택을 부르고, 주방아줌마로 어머니 충숙을 부른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이들의 모략은 매우 비열하나, 그 모습은 비열하기보단 왠지 모르게 웃음을 자아낸다. 살아나기 위한 이들의 몸부림이다.

 

겉모습은 어떻게 속이고 살아갈 수 있었다. 기택의 운전실력은 발군이다. 박사장은 기택의 운전솜씨를 확인하기 위해 커피 잔을 들고 차 뒷자리에 앉는다. 기택의 운전에서 커피 잔의 커피는 넘치지 않고 조용히 컵 안에서 맴돌았다.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면서 살갑게 대해주는 기택이 마음에 들자, 기택의 가족은 박사장 가족들과 이상한 공생관계를 유지한다. 박사장의 집에서 기생하던 이들이 오히려 박사장이 이들에게 의지(기생)한다. 그러나 뭐든지 간극은 존재했다. 과거 일하는 아줌마와 그 아저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겉은 속여도 본질을 속일 수 없다는 점이다. 기택의 가족에게 비슷한 냄새가 난다. 구역질나게 만드는 악취, 가끔 지하철을 타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 이 모든 게 가난과 부를 구분 짓게 하는 인간사회의 본능이었다. 악취(惡臭, 惡趣)와 취향, 전자의 악취는 냄새이나 뒤의 악취는 좋지 못한 비열한 뜻이다. 기생하는 이들은 비열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악취(惡趣)를 저지르고, 여기에 그들은 역겨운 냄새를 낸 악취(惡臭)를 풍긴다. 이들의 악취는 계획적이 아닌 삶에 대한 몸부림이다.

 

기생충은 계획성으로 움직이는 생물이 아니라 살기 위해 움직이는 동물이다. 인간 기생충에게 냄새나는 것은 결국 대부분 삶을 위해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의 몸부림이 부자들에게 냄새나는 것으로 여길 뿐이다. 박사장 가족이 모두 캠핑가고 없을 때 이들 기택 가족은 술과 안주를 벌여놓고 파티를 즐긴다. 그러나 갑자기 예전에 일하던 아줌마와 그 남편을 만나 소동을 겪는 와중에 박사장 가족이 다시 집에 돌아간다. 폭우가 내리자, 기택가족은 거실을 정리하고 박사장 가족의 눈을 피한다. 기택가족이 장대 테이블 밑에 숨어 있을 때 박사장과 연교는 이상한 냄새를 맡는다.

 

처음 나는 이들이 술판을 벌인 직후 알콜 냄새를 맡았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들은 숨어있는 기택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맡은 것이다. 그리고 악취와 기택에 대한 험담이 이어진다. 그런 와중에 박사장은 연교에게 애무를 하고, 연교는 윤기사가 해고될 때 팬티이야기를 하며, 마약을 구해달라고 한다. 기정은 사실 윤기사가 박사장 차에서 카섹스를 하는 것처럼 보이려 했지만, 박사장과 연교는 그것을 넘어 차 안에서 마약섹스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윤기사가 저열한 인간으로 취급했지만, 사실 그들도 더티 섹스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느낀 것은 기택의 몸에서 나는 악취 덕분일까? 기택의 부부에게 악취가 나지만, 박사장 부부에게 악취미(惡趣味)가 보인다. 악취를 맡는 박사장 가족에게 악취 나는 사람이란 별 볼일이 없고,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해주지 않은 사람이다. 아무리 외견을 바꾸고, 말투와 행동을 속이더라도 몸에서 나는 원초적 요소(사회적 경제적 빈곤)는 숨길 수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봉준호 감독이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란 책을 읽었을 것이라 여겼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는 본래 프랑스 최고 교육기관인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는 대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교수를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엘리트기관이다.

 

부르디외는 우수한 학생이지만, 그를 두고 주변 학생들은 무시하거나 외면했다. 그 이유는 그가 파리의 부유층이 아니라 시골의 가난한 집안출신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조건, 부모의 직업과 조건에 따라 계급이 나오고, 이들 조건에 따라 취향과 문화적 간극이 벌어진다. 다행히도 20세기 부르디외가 살 때는 인터넷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못했다. 21세기 한국의 인터넷은 세계 최고이다. 모든 정보가 인터넷에서 홍수처럼 쏟아진다. 그래서 기정이 미술치료사 못지않은 실력을 가지고 다송의 치료를 진행할 수 있었다.

 

아니라면 오히려 밑바닥에서 쌓은 삶의 축척이 그대로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단지 학벌이 위조되었을 뿐이다. 사실 생각하면 기택의 가족은 가난한 집안이 아니었다. 내가 어린시절 보이스카웃이란 클럽에 가는 친구들은 어느 정도 집에 여유가 있었다. 가입비와 활동비, 각종 행사비용을 해결하려면 부모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했다. 기우는 보이스카웃 활동을 했고, 마지막의 모스신호를 읽을 수 있는 이유도 그렇다. 기택은 원래 사업을 했었다. 우리가 예전에 한참 호황을 누린 대만카스테라, 어느 순간 이 사업은 망했다.

 

많은 이들이 이 사업실패로 빈곤하게 되었고, 중산층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기택의 운전실력은 발레주차와 대리운전으로 만들어진 실력이었다. 문광의 남편 근세 역시 대만카스테라로 망했다. 정신이 이상해진 근세이나, 그가 나온 말을 들은 기택의 눈빛은 근세를 적으로 여기기보단 자신과 똑같은 기생충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시민이란 사실을 알았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현실은 폭우의 현장에서 잘 나온다. 다송은 인디언놀이에 빠져 폭우가 내려도 텐트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텐트 안의 다송은 빗줄기 한 방울도 맞지 않는다. 기택은 집에 가자 동네가 물난리를 겪었고, 기택과 주변이웃은 체육관에 누워 밤을 보내야했다.

 

부자의 텐트와 빈곤한 자의 집은 이미 처음부터 틀렸던 것이다. 이때 집에 가서 찾던 물건들이 인상적이다. 기우는 친구가 준 돌을 집었고, 기우는 천장 위의 담배, 기택은 아내가 예전에 받은 메달이었다. 기택은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고, 기택이 부족한 가장이라도 가족들은 그를 따랐다. 물난리를 났을 때 이들이 잡은 물건은 상징적이다. 기우는 돌을 잡은 이유는 부의 성공을 포기하지 않았고, 기정은 순간적 도피, 기택은 가족의 자존심이었다. 성공과 쾌락, 정체성이란 갈림길에서 영화는 그대로 반영된다.

 

근세는 다송의 생일파티에 나와 무차별적 칼부림을 일으킨다. 이때 칼에 찔려 죽어가던 기정 앞을 두고 기택은 고민한다. 다송의 트라우마로 쓰러지자 박사장은 기택에게 차를 몰고 병원에 가자고 한다. 기택은 고민한다. 딸을 살려야 하고, 아내를 위협하는 근세를 말리야 하고, 박사장과 다송을 태우고 병원에 가야 한다. 충숙은 근세를 제압하자, 송강호는 딸을 선택하기 위해 차 키를 박사장에게 던지나 중간에 근세 옆으로 떨어진다. 죽어가는 근세 옆으로 박사장이 차 키를 줍자 순간 악취가 역겨워 하며 코를 감싼다.

 

이때 기택은 칼을 잡고 박사장의 심장에 그대로 꽂아버린다. 기택은 그 칼을 꽂은 이유는 기택의 존재가 방해되는 이유가 있지만, 박사장이 맡은 냄새에서 자신과 근세 모두 같았고, 그 냄새를 지닌 사람을 인간 이하로 무시했기 때문이다. 기택이 병원에 다송을 데리고 갔다면 운전기사라는 직위로 부를 보장받았고, 기우를 지키고 있었으면 딸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택이 선택한 것은 박사장의 죽음이다. 그 죽음은 자신의 정체성을 택한 것이다. 근세는 적대적인 기생충이지만, 그래도 자신과 같은 기생충이었다.

 

기생충이란 존재가 비난받을망정, 그 존재성 자체를 부정 받아야 하는 것에서 기택은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기택의 선택은 후회의 연속이다. 평생 나오지도 못할 그 곳에서 눈치 보면 생존해야 하는 기생충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기우는 머리를 크게 다쳐 재판장에서도 죽은 누나가 있는 유골단지 앞에서 웃음만 나왔다. 그리고 다시 찾아간 그 집을 바라보면서 기우는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소망을 빈다. 언젠가 그 집을 사서 아버지가 밝은 태양 아래로 나와 같이 포옹하는 모습을 말이다.

 

기택의 죄는 분명 크다. 사람을 속이고 사람을 죽인 죄는 분명 죗값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택의 죗값을 치루는 모습보다 그가 영원히 죗값조차 치루지 못한 채 어둠에서 기생해야 한다는 선택에서 큰 슬픔을 느낀다. 거기 내가 있어도 저쪽에 가족이 있어도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운명 아래서 영화 기생충의 블랙코미디는 비극적인 드라마로 다가온다. 코미디는 희극이나 드라마는 비극이다. 비극은 누구나 일어날 수 있는 개연 내지 필연이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악취냄새로 빈곤의 딱지가 새겨져 있다.

 

사람의 정보 중에 촉각, 시각, 미각, 청각, 후각이 있다. 이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당연히 촉각과 미각일 것이다. 하지만 음식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시각과 청각이다. 말은 어떻게든 속일 수 있다. 처음 기우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겉모습은 속일 수 있다. 기택이 적당히 양복을 입고 가면 되듯이 말이다. 하지만 냄새는 다르다. 냄새는 그가 살아온 삶의 시간이 담긴 축척세계이다. 누군가에게 어떤 냄새가 나면, 그가 사는 집이나 방에서도 그 냄새가 난다. 냄새는 가장 강렬한 기억과 정보를 준다. 그렇기에 그 냄새를 지울 수 없는 기택에겐 영화 <기생충>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은 개미지옥처럼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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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9-06-03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전 지식 없이 보고싶어서 개봉하고 바로 기생충을 보고왔어요

저도 너무나 현실같은 상황과 결말을 보면서 슬픔을 누르기 어려웠어요

만화애니비평 2019-06-05 20:01   좋아요 0 | URL
마지막은 기택의 모습에서 한없이 애처로움을 느꼈습니다...
참 감정이란...
 



학부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하고 생태환경 관련된 엔지니어 업체에서 근무하는 나로서는 이 영화는 상당히 와 닿는 작품이었다. 자연의 파괴로 인해 환경이 오염되고 새는 떠나고 사람들은 쉴 곳은 잃어간다. 그런데 만일 자연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 <물의 기억>은 그런 마음을 염원하던 자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그 모습이 만들어가는 장면을 찾아내는 영화이다. 보통 5월이 되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해이다. 더구나 518의 슬픔 뒤의 523일이 다가오면 마음이 심란한 사람이 있고, 이에 반해 조롱과 비웃음을 날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전자인 사람이다. 518 망월묘역을 보며 그 끔찍한 일들을 스스로 상기시켜 보고, 책을 읽으면서 가족과 친구를 잃은 그들의 분노와 절망에 마음이 심란했다. 올해 4월 시골에 시제(時祭)가 있기에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터전을 찾아갔다. 집안의 문중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문중 제각으로 가기 위해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 벽송마을을 찾아가면 입구 쪽에 작은 안내표지판이 있다. “합수 윤한봉 생가라고 말이다. 집안제각 근처 합수선생의 본가가 있다. 낡은 슬레이트지붕 한옥식 건물은 왠지 모르게 쓸쓸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골에 있는 문중 사람들은 그에 대해 잊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그에 대한 오명과 조작은 여전하다. 합수(合水)라는 말은 물을 합한다는 의미이나, 물은 좋은 것만 오는 게 아니다. 똥오줌 같은 오물도 들어온다. 하지만 그게 없다면 논이나 밭에 천연비료를 줄 수 없으며, 심지어 맑은 시내에 살아가는 생물들의 영양분이 될 수 있다. 물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 물의 기능을 말하자면 수소원자 2개에 산소 원자가 모여 결합하여 4기준 1L1이란 물리화학적 구조를 가진다. 윤한봉과 노무현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갔으나, 그들에겐 물이란 공통적 성상을 가진 것 같다.

 

합수란 물이 모인 곳을 말한다면, 노무현은 강물은 바다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이 흘러 최종적으로 흘러 그 종착점은 바다이다. 똥오줌이 결국 비와 강물에 의해 씻기어 나가면 바다로 간다. 물은 생명의 고향이고, 인간에게 없어서 안 될 존재이다. 물이란 문화의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물을 업신여기고 그들을 파괴했다. 그리고 물은 농부에게 소중한 존재이기도 했다. 윤한봉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으나, 농민과 함께였으며, 노무현은 농부의 아들이었다. 농부가 농사지으면 무조건 잘 되란 법은 없다. 농부는 언제나 성실하고, 그 성실함에 보답하여 땅을 은총을 내린다.

 

신이 내리는 것은 기상의 이변일지 몰라도,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손에서 달려있다. 영화 <물의 기억>은 인간의 손에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마치 한 폭의 생명처럼 보여준다. 환경업무를 하다보면 화포천이란 지방하천이 어떤 곳인지 대략 안다. 2008년 봉하마을에 노무현 대통령이 귀향할 때 그곳은 오염으로 심각한 몸살을 겪었다. 각종 폐기물이 하천변을 어지럽게 만들었고, 하천 바닥은 저질로 가득했다. 저질이 가득하면 물 안이 썩어가고, 결국 죽은 강물이 되고 만다.

 

그가 처음 와서 한 업적은 화포천 살리기이다. 화포천에 맑은 물이 되면 농사도 잘 되고, 생명들도 찾아오고, 세계적인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말이다. 2017년 화포천 일원은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정말 변했다. 봉하마을에 봉사활동가면서 농촌 봉하마을이 자연적으로 잘 관리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가기 전부터 많은 이들이 그곳을 정리해갔다. 우리가 아는 봉하마을과 다르게 우리가 모르는 그곳이 있다. 동물과 식물이 살아가는 봉하마을을 말이다.

 

영화에서 부지런한 농부는 벼의 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벼의 꽃은 단 1시간만 피고 진다. 그 벼는 우리에게 식량이 되고, 논 안의 생태계는 매우 다양한 공간으로 가득하다. 작은 물고기, 곤충, 잡초, 황새와 두꺼비, 이때까지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들이 다시 찾아온다. 나는 조금 놀란 것이 영상에서 긴꼬리투구새우가 발견된 점이다. 멸종위기 2급 야생생물인 이 저서성대형무척동물이 발견된 게 신기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멸종위기 1급 야생생물 수달이 나온 것이다. 수달을 직접 본 것은 진주시에 있는 수목원이었다. 수달이 좁은 욕조에서 이리저리 오고가는 모습을 보면서 수달이 귀엽다는 생각보단 가엽다는 생각만 들었다.

 

공작처럼 우아하게 천천히 걸어가는 새라면 모를까, 수달은 아기자기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훨씬 어울리기 때문이다. 화포천이 이런 생물이 찾아오고 황새가 날아온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동네 뒷산에 가면 무당개구리가 천지였다. 플라나리아를 찾기도 했다. 산가 산책로를 돌면서 산딸기도 따서 먹기도 했다. 어느 순간 그런 자연은 사라지고,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올라섰다. <물의 기억>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후손에게 물려줄 것은 손자가 자연에서 뛰어놀고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라 했다.

 

내가 어린 시절 내 집 뒷산이나 시골에 가면 자연과 함께 살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뒷산은 사라지고, 시골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영원히 찾을 수 없는 하늘로 가버렸다. 그리움만 사무치는 가슴 한편에 그저 머무는 것보다 우리가 그런 자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란 새로운 안식을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진 꿈은 사람 사는 세상이라 했다. 그곳엔 조금 먹고 사는 것도 어렵지 않고, 더러운 꼴도 안 보고, 하루 좀 신명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려면 사람 사는 세상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풀 한 포기라도 작은 물고기 한 마리도 소중하다. 그래서 물은 우리가 지켜야 할 존재이다. 물은 우리 모두를 비추는 거울이며, 우리 모두를 담아주는 요람이다. 그곳에 삶도 있고 죽음도 있다. 늘 같은 모습은 아니나, 그런다고 우리가 모르는 모습도 아니다. <물의 기억>은 정화되어가는 봉하마을과 화포천에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만든 것은 노무현이란 존재이다. 대통령 노무현도 시민 노무현도 아닌 그저 촌로 농부 노무현의 꿈이다.

 

모든 생명이 공존하고 생존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자연에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인간성을 찾아갈 수 있다. 올해 4월 벽송마을에 갈 때 그곳 역시 논밭과 산자락을 가진 농촌마을이다. 벽송(碧松)이란 말처럼 푸른 소나무가 우리를 반겨준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모른다. 아마 노무현 대통령처럼 그때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가난과 배고픔에 서러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서러움이 깃든 공간이 없어진다면 더욱 서러울 것이고, 그 공간이 영원히 사라지고, 후예들에게 남기지 못하면 더 서러울 것이다.

 

다행히 최근 웰빙 라이프가 유행이라 공기 좋고 물 좋은 산과 들, 강과 바다에 많은 인파가 북적인다. 하지만 아쉽게도 농촌의 공간은 잘 보이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윤한봉의 고향에 푸소가 유행이다. 푸소는 'feeling-up, stress-off'의 약자 fu-so로 자연 속에 살아가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고, 모든 인간은 자연 앞에 평등하고 서로 공평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옆에 누군가 힘들면 같이 도울 수 있다. 서로 마음을 합치고 살아가는 그런 공간이 자연인 점이다. <물의 기억>에서 태양의 빛은 그 모든 생명에게 공평하게 간다고 했다. 태양의 하늘 아래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은 오죽할까?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서 만일 거기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간다면 왠지 조금 더 두려울 것 같았다.

 

자연이란 존재, 물이란 존재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봉하마을에 자원봉사를 할 때 봉하 들녘에 나가 잡초를 뽑았던 기억이 난다. 피를 뽑아내며 봉하마을의 그 모습을 만들어간 기억이 있다. 그때 왕우렁이 알이 생각난다. 벼의 줄기에 붙은 분홍색의 알들이 말이다. 그게 왕우렁이 알인지는 몰랐다. 단지 왕우렁이가 잡초를 먹고, 그 잡초를 먹은 후 배설물이 나오면 벼에게 필요한 영양분이 되는 것은 알았다.

 

왕우렁이가 알을 낳고, 왕우렁이 알에서 새끼들이 탄생할 때의 소리를 들었다. 소리는 분명 존재하나 우리는 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그것이 들렸을 때 너무 신기했다. 우리 모두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그것조차 물의 기억이다. 농부가 조심스레 논두렁을 걸어가고, 벼를 심어가는 것도 물의 소리이다. 우리는 자연의 공간에서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물은 기억해 줄 것이다. 우리는 분명 오늘 이 순간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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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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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악질경찰>은 스토리를 보면 조금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약간 산만한 소재를 하나로 뭉칠 때 다소 부드럽게 전개해야 할 것, 그리고 과거의 회상이 너무 몰입하여 신이 전개한다. 차라리 몽타주 방식으로 현재와 과거가 다소 현기증적으로 반복대비 된다면 조금 더 긴박한 상황을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질경찰>은 한국영화의 고질적 요소를 상당히 많이 탈피했다. 이른바 클리쎄(Cliche)라는 전형적인 이야기 흐름, 전개, 결론, 방법론적 양식에서 크게 벗어난 셈이다.

 

만일 영화를 본다면 이렇게 느낄 것이다. 이런 큰 사건을 다른 검사와 언론기자들과 힘을 합하여 다른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특히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나 또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사도 괜찮은 방법이다. 영화 <소수의견>에서 실패한 변론이었지만, 주인공은 운동권출신 진보정치인의 힘을 빌려 재판에서 유리한 방향을 찾으려 한다. 물론 판결에서 패배하더라도 어떻게 보더라도 부조리한 세상에서 그나마 희망의 끈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악질경찰>은 다르다.

 

영화 자체가 매우 폭력적이고, 직설적이며, 잔혹하고 때로는 냉소적이다. <악질경찰>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나가 조필호 형사와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조필호가 묻는다. “야 너는 커서 뭐가 될래?”, 여기에 답하는 미나의 대답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보통 힘을 가진 자가 되어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은 게 보편적 인간의 대답이다. 가령 국회의원이 된다던지 검사가 되는 방법도 좋을 것이다. 이때 미나의 대답은 진격의 거인이라고 말한다. <진격의 거인>, 원작은 만화인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일본만 아니라 한국 및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작품을 보면 거인이 등장하여 어느 왕국의 벽을 부수고 마을을 파괴한다. 이들의 특징은 말이나 돼지 같은 가축에는 손을 대지 않으나, 오로지 인간만을 노린다. 인간을 손으로 잡은 이들은 그 커다란 입에 인간을 넣고 그대로 씹어 먹는다. 거인의 크기는 작은 것은 3m 넘는 것도 있지만, 약간 강한 거인은 10m 넘기도 하고, 매우 강력한 거인은 40m도 넘는다. 초대형거인은 왕국의 장벽높이보다 더 놓은 체구를 가진다. 그 거인의 손길 하나 성벽이 무너지고, 집이 박살난다. 손아귀에 인간을 잡으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난다.

 

미나는 바로 그런 거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 거인이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청와대 안에 있는 인간 모두를 죽이고 싶은 것이다. 만화에서 나올 만한 공상적 발상, 결국 현실에서 좌절하고,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어린 소녀의 절망이었다. 미나는 분명 불량한 소녀이나, 그 내면은 보통 인간보다 더 훌륭한 마음을 가졌다. 조필호가 모은 돈을 챙겨 어디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 돈이 사용한 곳은 미나의 친구 지원이가 바다에서 죽자, 그때 지원이의 시신을 찾아준 잠수부의 병원비로 기부한 것이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고, 분노를 참을 수가 없는 세월호 참사, 미나의 친구 지원은 세월호가 바다로 가라앉을 때 그 꽃다운 청춘이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차디 찬 바닷물 속에 그저 말없는 비명을 지르던 그들은 주변의 가족과 친구에게 큰 상처를 안겨줬다. 미나가 권실장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자살을 선택했을 때 조필호는 미나의 손목을 본다. 수도 없이 손목을 그은 흔적을 말이다. 그녀는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바보 같은 남자친구인 기철의 죽음을 밝힐 수도 없고, 미나의 죽음을 만든 그들에게 단죄조차 할 수 없다. 부모님도 안계시고, 혼자 고아인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자살이었다.

 

자살은 흔히 사회적 타살이라 말한다.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자살 이외에 그 어떤 선택지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악질경찰>의 현실적 냉소주의는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왜 조필호는 정의의 사자보단 악질경찰로 등장하는지 말이다. 조필호는 도덕적 양심이 없는 형사이다. 뇌물을 좋아하고, 조폭과 합작하여 건물투기도 한다. 게다가 투기자금이 부족해지니, 기철과 공모하여 은행ATM까지 턴다. 그것조차 부족하니 경찰이 피의자들로부터 압수한 창고까지 털려고 한다. 사건의 발달은 이렇게 시작한다. 창고 안에 들어간 기철은 나오지 않고, 창고는 폭발로 인해 송두리째 날아간다.

 

우연으로 가장한 사고이나, 뭔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흔적을 발견한 소방관은 살해되고, 미나와 알고지낸 동네 양아치도 권실장에게 살해당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일을 크게 여기지 않고, 아무도 그 일을 자본의 권력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남검사는 겉으로 태성그룹을 수사하는 척하나, 사실은 권실장과 내통하고 있었다. 세탁소에서 만나자고 했던 남검사는 권실장을 데리고 와서 조필호를 구타한다. 이때 조필호의 반응이 재미있다. 겁에 질리기보단 그의 모습은 오히려 반항하는 모습이다. 반항과 저항은 다르다. 저항의 불의의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라면 반항은 그저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항하는 것이다.

 

미나와 조필호는 처음 만날 때부터 반항했지만, 둘 사이에서 계속된 충돌이 유대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권실장은 달랐다. 골절되고 피 범벅이 되어도 조필호는 기가 죽지 않는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필호의 존재는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도덕이나 사회적 관념에 매몰되지 않고, 그저 자기가 마음에 들고 들지 않은 것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미나가 조필호에게 마음은 연 계기는 권실장에게 살해당하기 전보단, 미나의 친구 소희가 유산할 때 옆에서 도와준 것, 그리고 유산할 때 소녀성애자인 양심이 불량한 의사를 구타한 이유이다.

 

그 의사는 조필호가 데리고 온 여자아이를 본 후 조필호에게 돈을 주면서 자신도 미나하고 성적관계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 조필호는 그 돈을 던지고, 병원내부를 엉망으로 만든다. 조필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영화 마지막에 가면 나온다. 조필호가 권실장과 정회장을 살해할 때, 그 모습을 와이프가 본다. 와이프는 딸에게 메시지를 남겨 무조건 집에 빨리 오라고 말한다. 조필호가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그가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라는 가치관, 법을 실행하는 경찰관만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단지 개인적 원한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영화의 전개성은 바로 악적인 존재에 대한 응징이 정의의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원한에 의해 실행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나가 거인이 되어 청와대에 있는 인간들을 물어뜯어주고 싶은 것처럼 현실의 제도에서 부조리를 타파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조필호가 다른 것은 몰라도 미나가 입고 있는 옷을 지원의 아버지에게 돌려달라고 한다. 삼우제 지낼 때 옷을 태우려 하는데, 그렇지 못해 지원의 아버지가 무척 아쉬워한다고 말이다. 개인적 감정에서 나온 말이나 우리는 그 말에 심히 공감한다.

 

인간은 감정은 선과 악을 떠나 그저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이다. 따라서 때로는 광기에 빠지기도 한다. 광기가 그저 순간적으로 머리가 이상해져서 표출되기보단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실행할 뿐이다. 7800억원을 횡령한 정회장은 조필호에게 7800만원을 주면서 말한다. 조필호는 7800억원에서 1000분의 1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미나는 780원밖에 되지 않는 쓰레기라 말한다. 친구의 시신을 수습해준 잠수부에게 3000만원을 건넨 미나가 780원짜리 인생으로 취급받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조필호에게 정회장은 법앞에 만민은 평등한 것이 아니라, 만명만 평등하다.”라는 기득권의 논리를 말한다. 조필호는 그런 정회장의 머리를 겨누며 미나는 780원짜리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동료경찰이 발사한 총을 맞고 자리에 쓰러진다. 피눈물을 흘리는 조필호의 눈에 어떤 소녀가 줄넘기를 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보인 환각은 경찰이 되고 싶은 지원이 줄넘기를 하는 장면이었다. 어찌 보면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친구에게 눈물은 그냥 눈물이 아닌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한 피눈물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조필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가 경찰압송차량에 태워져 가는 길에 추모공간을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때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미나를 본다. 조필호는 미나를 보면서 손을 흔들어댄다. 미나는 갑자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던지 순간 조필호를 보면서 미소를 환하게 짓는다. 분명 미나는 이 세상에 없는데 말이다. 미나와 그 옆에 있던 소녀들은 바로 세월호에서 희생당한 어린 아이였을 것이다.

 

영화는 냉소적 현실을 풀어낼 수 없기에 환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차라리 그게 더 현실적인 모습이 아닌가 싶다. 정회장과 권실장이 죽자, 그들이 벌여온 행각이 드러난다. 권실장이 협박하던 핸드폰 여성기술자가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을 증언하고, 남검사가 기업과 손을 잡고 수사를 방해한 사실이 드러나자, 그들은 사회적 응징을 받는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합리적이고 법리적인 과정이 아니라 조필호의 광기에서 시작된 결과물이 아쉽다. 조필호는 분명 말한다. 정회장의 살인 동기는 개인적 원한이라고 말이다.

 

개인적 원한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조필호의 행동이 용서받지 못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갈등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매우 드라마틱하게 흘러간다. 드라마, 비극(悲劇)이라는 것은 비참하고 끔찍한 일들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하나의 개연성을 지닌 이야기서사이다. 조필호는 영웅도 아니고, 그런다고 악질경찰일망정 악당도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성격이 더럽고, 내 마음대로 하는 인간군상이다. 다행히 악질만큼 성격도 모질다는 게 그의 장점이다. 인간의 극단성은 드라마틱한 이유는 그게 자신에게 틀린 답이고 이득이 없어도 그 일을 해야 하는 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다른 것은 모르지만, 정말 이선균씨의 노고가 돋보인다. 운전 중 사고 나는 장면, 건물에서 떨어지는 장면, 심지어 몸에 결박당한 채 목욕탕 수조의 뚜껑을 입으로 여는 장면도 생생하다. 욕도 잘 했고, 표정연기도 잘 했다. 이선균씨의 연기가 매우 돋보였다. 그리고 세월호의 아픔을 인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날의 슬픈 비극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되고, 계속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가 생각났다. 조필호의 이마에 남긴 상흔은 바로 세월호의 상처이다. 그 상처를 보고 미나는 지원의 아버지를 구한 사람이 조필호라는 것을 안다. 이마의 상처는 조필호만의 상처만이 아닐 것이다. 세월호라는 상처가 영상에서 조필호의 몸으로 각인이 된 것이다.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영원히 남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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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에 대한 이야기가 최근 들어와서 다시 큰 화두로 되었다. 19805월에 일어난 비극은 이제 2019년이 되어 39주년이 되어간다. 그리고 내년 2020년은 40주년이 되어 간다. 그 당시 태어난 이들도 이제는 한 사람의 어른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이제 어른이 되어 그들에게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흔적으로 가고 있는 셈이다. 518에 대해 어째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민주화 운동이라 하고 있고, 누군가는 사태 즉 소요사태로 보는 이들도 있다. 나는 민주화나 사태보단 개인적으로 학살에 가깝다고 본다. M16으로 무장한 군인, 거기에 장갑차와 헬기까지 출동하는데, 고작 저항했다고 M4카빈 10개이든 100개이든 그게 상대가 되겠는가?

 

처음부터 고속도로에 최초모델 티코와 최근 제네시스를 가지고 경부고속도로 누가 먼저 돌파하는가? 하는 퀴즈를 내는 것과 같다. 게다가 티코의 연료는 E를 가리키는데 제네시스는 F를 가리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국 개입설을 주장하는 일파가 있다. 군대를 갔다 오는 이라면 당연히 생각한다. 국군의 체계에서 단순히 한국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과 같이 엮이는 경우가 많다. 매년 더운 8UFC(을지 포커스 레인지)라는 훈련을 뛰면 한국만 아니라 미군 역시 같이 동참한다. 한국에서 전쟁은 한국군이 아니라 미군도 같이 공조한다.

 

내가 군생활하던 시기 우리 부대 안에 미군기지가 있었고, 미군도 존재했다. 훈련이 아닌 실제 상황에서 미군은 우리 기지를 전초기지로 삼아 보급과 전투지휘를 위한 체계를 잡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럴 만큼 미군 아니 더 나아가 미 국무부, 국방부, 상세하게 CIA518 그때 일을 모를 일이 있겠는가? 미국의 기밀문서 보존기한이 해제되면서 518 당시 미국의 정보들이 공개된다. 그 당시의 정보를 보면 다들 북한과의 무관함을 증빙한다. 하지만 아직도 518의 문제를 북한으로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민중가요가 국내에서 금지되고 북한에서 허용된 적이 있어 그런 것인가?

 

그런다고 북한에서 민중 그 스스로 북한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혁명이나 민주화운동을 실천했는가? 노동운동과 관련된 시위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종종 울린다. 독재와 노동운동이 밀접한 관계에서 시작한 한국이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은 아쉬운 일이나, 적어도 독재정권에서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운동은 유사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었다. 피로 물들어진 5월의 슬픔은 아직 우리에게 떠나지 않았다. 최근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 이야기를 들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꽃보다 더 고운 맵시를 가진 그 소녀가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빼앗겼다.

 

꽃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진보 몇몇 단체도 있지만, 꽃이란 이름은 진달래꽃처럼 아기자기 하고 다정하고 늘 우리 곁에서 미소지어주던 그런 분들이다. 그런 봄날의 진달래꽃이 무참히 뿌리까지 뽑히고, 그들은 평생의 한을 지니다가 눈물이 마른 채 세상을 떠났다. 그때가 1940년 전후인데, 40년 뒤인 광주의 한은 오죽할까? 예전에 광주 518망월묘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머리에 하얀 백발이 들어선 할머니 몇 분이 묘역에 앉아 묘지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그 누구의 아내일까? 어머니일까?

 

TV나 신문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할머니들이 눈물을 흘리며, 묘비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들이 40년 전의 일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그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그들을 학살하던 이들을 옹호하고, 오히려 학살자들의 가족을 두고 진짜 유공자인지 아닌지를 가리자라고 말하는 부류가 있다. 죽음 앞에서 당사자는 말은 없으나, 죽은 자들의 주변사람은 평생 한으로 살아간다. 그들의 가슴은 이미 가족의 죽음에서 죽었고, 그들의 죽음을 진상하려는 시도조차 밟아 또 죽었고, 또 다시 그 죽음을 모욕한다.

 

사람이 살아생전 누군가 크게 다투고 원수로 남게 될 일이 있다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살아있을 때 자신 스스로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면 된다. 상대방도 살아있다면 용서를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 베풀 수도 없다. 5월의 죽음을 모욕하는 행위는 바로 죽음 자에 대한 용서를 바랄 수도 없는데, 그 이상으로 망자를 모욕하기 때문이다. 망자의 모욕과 치욕은 살아남은 가족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고인을 모욕한다면 고인은 죽었기에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온다.

 

518 유공자와 당시 가담하던 살인자들의 분류가 비공개라서 옭아매는 행위는 참으로 우습다. 이태까지 부정하다 최근에 헬리콥터로 사격을 실시한 사진과 증거가 공개되었다. 칼빈 소총이 헬리콥터에게 어찌 이길 수 있는가? 하다못해 공군기지 전투기까지 동원하려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증거가 넘쳐 남는데도 아직도 망언과 망언에 대한 책임회피는 여전하다. 518의 비극은 죽음과 은폐만이 아니라 국가가 그동안 저지른 내분도 책임이 있다. 518 당시 희생자 가족을 매수하려고 했다. 일부 그런 자가 있어 그것을 이용한 것도 역시 국가이다. 세월호 비극을 가지고 유가족들이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가지고 배상금 흥정하려 했다는 말을 만든 것도 국가였다.

 

국가란 결국 그 자체를 운영하는 정부의 도덕성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부의 운영을 책임지고 결정할 수 있는 국민의 정치적 참여 역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촛불정권이라 하나 사실 100% 마음에 들 수는 없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 현재 정부에 대한 배신감이나 또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전의 정권이 유지된다면 어찌 되어야 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 역시 두렵다. 지금 어느 당이 일으킨 문제를 두고 전의 정권이라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넘어갔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런 막말을 하는 인간이나 그것을 두고 옹호하는 인간이나, 그 문제를 가지고 다양한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버젓이 존재하는 것도 경악할 일들이다. 독일이라면 나치옹호론자를 가만 두지 않을 터이나, 아직 우리에게 그런 강력한 제재 방안을 없는 게 아쉬울 뿐이다. 518 내지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그 당시 권력자는 그들이 잡으려고 한 인물만 괴롭힌 게 아니라, 그 가족을 잡아 고문했다. 늘 감시하고 문초하고 행패를 부린 그들이 이제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말하고 보수의 가치관을 말한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말할 것 같으면 조선시대로 돌아가면 그만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조선의 정통성을 밟은 것은 그들의 시작점에 있던 그들이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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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9-02-14 10:59   좋아요 0 | URL
적대심, 내지 색깔론을 이용한 정치적 공략이죠. 이제 통할 시기도 지났는데 아직도 집착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뇌는 이미 30년 전에 멈춘 듯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2-14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18 민주화 운동‘을 광주라는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한정하려는 역사인식이 문제라 생각합니다. 물론, 광주, 전남 지역의 움직임이 컸지만, 신군부 세력 퇴진을 위한 전국적인 투쟁이었다는 측면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지 않는 이들의 역사관이 문제라 여겨집니다. 전국적인 투쟁 속에서 광주시민과 전남 도민의 희생이 컸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상식이 있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9-02-15 08:43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대신 겨울고양이가 눈에 들어오나, 이른바 부채의식....
다른 곳은 몰라도 광주전남 일대가 피바다가 된 사실에 지식인들의 고통을 자주 보곤합니다. 작금의 지식인들은 거의 엘리트화 관료주의가 되어가고 있어 걱정입니다.
진보의 가치는 인륜의 합목적성이지 그들의 희생위에 권력을 잡은 게 아니니 말이죠...

나그네 2019-02-1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518때 시민군이 장갑차 가지고 있었고 TNT 폭탄 수백톤 광주시청 지하에 매설해 놓았고
탈취당해서 시민군이 무장하고 있었던 칼빈소총이 4000여정 기관총, M16소총 100여정까지
가지고 있었다는건 알고 있냐? 헬기 사격? 웃기고 있네 헬기에서 기총소사하면 얼마나 피해가
크게 발생하고 얼마나 넓은 지역에 총알이 날아가 박히는지 알기나 하냐? 영화나 방송에서
산에다 쏘니까 조그마한 공간에 총알 박히는것 같지? 축구장 반개 정도에 박힌단다.
그리고 헬기에 장착된 무장으로 사격하면 총알 맞은 시신은 형체가 알아보기 힘들게된다.
근데 518때 그런 사망자나 그런 사격 결과가 있었냐? 소설 쓰지마라
당신 말대로 광주는 진행형이야 왜냐하면 아직도 칼빈소총으로 시민들 살해한 살인자들
찾지 않았거든 그 살인자들 지금 광주시내 활보하고 있을건데 잡아서 법정에 세워야지
그거 아니 광주 사망자중에는 어떤 미친놈이 평소에 원한을 품고 칼빈소총으로 일가족 몰살한
경우도 있었다는거.. 궁금한건 그사람들 망월동에 묻혔을라나? 유공자 일라나?
칼빈소총으로 살인한 살인자 찾아내고 칼빈에 사망한 사람, 차에 치여죽은 사람, 광주에 한번도 안가본 사람 색출해서 유공자로 지정되어 있으면 제외해야지
그래야 정말 민주화 유공자 명예가 살고 광주의 한이 풀어지지 안그러냐?

만화애니비평 2019-02-19 19:33   좋아요 1 | URL
병신새끼 자신이 없어서 나그네 하는 아이디 달랑 하고 그런 개소리나 하나?
나이 먹고 쪽팔리지 않나 병신아
그래 살다 가라
 
90년생이 온다 -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임홍택 지음 / 웨일북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80년대생인 나에게 운좋게 90년대 청춘들 친구 몇몇 있다. 그들과 같이 맥주와 통닭을 먹으면서 느끼는 것이나, 7080년생대의 진보들이 젊은남성들로부터 멀어지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과거 보수꼰대는 여전히 신보수꼰대로 이어지난, 기성세대 진보도 역시 꼰대로 변해간다. 왜 그런지 본인은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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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4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12-14 10:58   좋아요 1 | URL
예전의 일입니다.
곰곰발님과 저하고 2~3번 만나 막걸리를 마시고 하던 그런 사이입니다.
곰발님은 분명 10~20년 전이라면 새로운 물결같은 분이나,
지금의 그분의 글(페미니즘 옹호)을 보면서 꼰대로 되어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꼰대는 별 것 없습니다. 과거에 형성된 자신의 가치관을 아직도
외치는 겁니다. 이번에 예스24의 사태도 그런겁니다.
진보 스스로가 기성세대화 되어가는 점에서 그때 그 시절에 머무른 겁니다.
아래 사람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왜 그런가를 생각하지 않고, 아직 그렇다 식은
그저 역방향으로 갈 뿐이죠...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