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는 길준에게서 요양원 자료를 받아 분석하고 파악하기 시작했다.

정금실. 길준이 발급받아온 가족관계증명서 상의 그의 어머니.

병률에게 속아 길준을 병원으로 보내버렸던 사람.

길준은 자기를 감싸고 죽은 어머니를 잠시 경악의 표정으로 보았지만, 이내 그것도 가라앉아버렸다. 그 죽어버린 감정의 바다에.

정금실에게 투약된 약, 용량, 빈도수 등이 그 서류에 꼼꼼히 적혀 있었다.

은미는 이 정도로 일을 꾸민 병률이 지긋지긋해졌다.

 

“서류 만지는 거 지겹지?”

 

어느새 왔는지 털보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를 손으로 쿡쿡 찔렀다.

 

“바쁩니다. 술상대는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아, 차갑고 따끔하다.”

 

털보는 그렇게 말한 후, 그녀에게 말했다.

 

“나도 놀려고 온 건 아니야.”

 

“그럼요?”

 

“준구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근데요?”

 

“유언장, 비밀문서, 다 찾아서 그 위치를 알아냈는데 말이야...”

 

“...그건 다 남자들의 어린애같은 장난이에요.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그녀의 말에 털보가 약간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뒤이은 웃음을 위한 거짓 표정이었다.

 

“난 말이야.”

 

“예.”

 

“당신이 우리 적이라고 생각했어.”

 

“...예리하시군요.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근데 생각이 바뀌었어. 나중에야 어떻게 될 값에라도 당신은 지금 우리 편에 있으니 사정을 좀 알아야 할 것 같아.”

 

“같은 편이라서 금괴놀이를 하자는 건가요? 거절입니다.”

 

“...놀이가 아냐.”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어느 누가 먼저 살아남느냐지. 우선은 상대편도 대충은 아니까, 놈들이 와서 차지하기 전에 아버지의 유산을 먼저 구해야 해. 그리고 당신도 우리 편이니까 이젠 우리하고 같이 일을 해야 해. 모레, 폭포수 밑에 있는 모래를 다 들어내고 금괴를 차에 실어나를 거야.

차 배정하고, 믿을만한 사람 부르는 건 당신이 좀 해줘야겠어. 그리고 그 역사적인 순간을 위해서 같이 있어줘야지.“

 

“......”

 

그녀가 침묵하고 있는 동안 털보가 말했다.

 

“폭포를 걷어내는 용제는 다 구해놨어. 우린 아무도 오지 않는 새벽 2시에 그 작업을 시행할거야. 길준이 재주좋게 몇 달 전부터 그 주변 땅을 다 사들였기 때문에 방해받을 일도 없고. 그 놈은 돈 굴리는 거나 돈으로 구워삶을 걸 배우지도 않았는데 진짜 잘한단 말이야?”

 

“그럼?”

 

“이제부터는 진짜 전쟁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내 조언이 도움이 되었나?”

 

좋아하는 기네스 맥주를 앞에 둔 채 털보는 코를 벌름거렸다. 자랑스러움의 표현이리라.

 

“음...”

 

길준은 맥주잔에 맥주를 따른 후 잔을 높이 들여보였다.

 

“이번만큼은.”

 

“호오, 인색하시군. 하지만 대단해.”

 

“뭐가 말입니까.”

 

“해직 당한 기자가 할 수 없는 인맥을 당신이 동원했어. 대단한 일이야.”

 

기자가 인맥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인 막이 있는 경우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정치인들은 기자들에게 ‘용돈’을 풀어서 관리하니까.

당연히 털보는 그 용돈을 거부했고, 큰 몸통된 비리를 기사로 올리려다가 해직당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길준이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난 재벌도 아니고, 당신 아버지의 유산을 일시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당신 아버지가 내게 맡긴 복수가 끝나면 다 내려놓고 다시 돌아갈 생각입니다. 적어도 그때는 마음 홀가분하게 일반인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너무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유언장에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금괴를 찾으면 적어도 당신 몫은 정해준다고 하셨으니.”

 

“그리고 방심할 순 없습니다.”

 

길준이 기네스 맥주캔을 우그러뜨렸다.

 

“내가 친 건 적의 머리가 아니라 꼬리니까요. 상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테니 다음에는 몸통을 막대기로 세게 두드려줄까 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몸조심 해야 할 겁니다.

불까지 낸 놈들이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역시 경찰출신이군. 냉정한 것이.”

 

털보가 하하 웃었다.

 

“걱정할 정도로 일을 만들진 않을테니 걱정마. 강원도에 금괴는 다 찾았는지, 준구한테 전화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물론 길준은 증거를 없애야 한다는 걸 잊지 않았다. 산들바람 요양원에 대한 그의 대처는 놀라울 정도로 신속했다. 환자들 사이에서 원장의 불법행위에 대한 불평이 나돌고, 길준의 손이 닿은 기자 몇 명이 몰래 병원을 취재해갔다.

길준의 인맥은 놀라웠다. 한때 소설을 사랑하는 평범한 경찰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은미조차도 놀랐다. 웬만한 일은 보고도 놀라지 않던 그녀는 길준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캐물었지만, 길준은 입을 다물었다.

 

“이거 어떻게 된거야?”

 

병률은 산들바람 병원 비리사건이 언론에 터지자 크게 당황했다.

더더군다나 알려온 바에 의하면 길준과 길준의 형이라는 준구가 핵심명단을 빼갔다는 것이었다.

 

“당신 바보인가?”

 

독대한 원장을 향해서 병률이 분노를 터뜨렸다.

 

“그 놈이 어떤 놈인지 알면서 그 자료를 넘겨줘?”

 

“...하지만 비상벨도 울릴 수 없었고...”

 

금괴에 넘어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원장은 순간적인 탐욕으로 일을 처리하려다가 크게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라면 병률도 할 말이 없었다.

평범한 경찰, 그것도 비번인 날에는 한가롭게 소설이나 쓰던 놈이 도대체 어디서 인맥을 구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짐작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병률이 사무실 책상에 손을 얹었다. 원장은 자기 책상에 올라와 있는 손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놈들은 자기 정체를 드러냈으니,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몸을 빼는 게 좋겠어.”

 

병률의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돈은 이쪽에서 대줄테니, 멀리 하와이라도 갔다오는 게...”

 

“...병원은요!”

 

“내가 윗선에 말씀드려서 처리를 해주지. 조용해지면 다른 곳에 원장으로 보내줄테니 너무 걱정은 말고...”

 

병률은 그렇게 말하면서 원장을 보냈다. 물론 길준만큼이나 병률도 증거를 없애야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 3달후 원장의 시체가 콘크리트에 들어간 채로 울산 앞바다에 가라앉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란은 지금 한 몇주째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진행형이다.
나는 클래식을 듣기는 듣지만,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듣는 것과 좋아해서 듣는 것은 좀 차이가 있으니까.
또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뮤지컬과 내용을 알고 봐야 이해가 가능한 오페라의 차이도 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가끔은 말귀를 못 알아들어도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그건...세상 온 세계가 공감하는 바디 랭귀지가 소리로 체화되는 부분이다....아아.
집중해서 음악을 들으라는 게 보통 음악계에서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주의가 이지리스닝인지라...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주로 책읽기)
근데 순간적으로 음악에 집중하는 일이 생겼다.
바로 피가로의 결혼 몇막인지는 모르겠는데...(아마 2막이 아닐까 생각 중...)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얻어맞는 쪽의 아리아가...
찰싹!오오! 찰싹!오오! 찰싹! 오오!...
이런식이니 킬킬 웃을 수밖에. 읽던 책을 내려놓고 음악에 집중.

이게 뮤지컬이었으면 더 웃겼겠지만, 말귀를 못 알아듣고 귀싸대기를 찰지게 때리는 부분에서 할말을 잃을 수 밖에.
하여간 그날은 다음날 출근도 해야했기에 그 부분만 듣고 껐지만, 내심 웃기는 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렵고 까다로운게 오페라인줄 알았는데(희가극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접근법이 굉장히...코미디같았달까. 옛날 바로크, 클래식, 낭만주의자들도 저렇게 웃으면서 듣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 싸다구의 위력이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소년은 어릴 적부터 인기가 많았습니다. 유난히 하얀 얼굴에 여자처럼 붉은 입술.
숱이 많지만 옅은 갈색머리카락, 투명하게 상대를 비추는 것 같은 눈동자의 동공.
여자아이들은 그런 그를 무척좋아했고, 남자아이들은 그런 그를 질투했지요.
나이가 들어서도 그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붉은 입술의 색깔이 약간 바래기만 했을 뿐, 그의 섬세한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았지요.
그렇게 평생 살다갈 것 같았던 그의 일상은....

차갑고, 무섭고,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고, 남자들 또한 진정한 우정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여자는 그리고 사람들은 그저 필요할 때 잠깐 미소를 짓거나 친절을 베풀 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그는 결혼을 다섯번 했습니다만, 항상 끝은 그가 내는 것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는다고 그 말을 장난치듯이, 혹은 일부러 상처주는 듯, 아리쏭한 태도로 한 탓에, 이혼한 부인들은 엄청난 정신적 타격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친구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친구들 또한 여자를 생각하듯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라고 해서 결말이 좋았던 건 아닙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그 사람도 결국은 노인이 되었거든요. 물론 그의 그 품위넘치는 아름다움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만.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나가버렸으니 그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 사람도 결국엔 미쳐버렸죠. 원장님 말씀으로는 하루 종일 세수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자기 얼굴만 쳐다본지가 벌써 30년째라는군요.
그리고 그 세수대야를 치워버리면, 다시 돌려줄때까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린 답니다.
그래도 세수대야만 갖다주면 조용하니 얼마나 편안 환잔지 몰라요. 그것만 있으면 행복해보이거든요.
참 부러운 왕자에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