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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난초가 되지 않았다.
꽃망울 단 긴 잎의 난초를 보았다면
그건 아직 난초가 아니다.

은은한 향을 풍기는 난은
향기를 품기 전에는
난이 아니다.

그 꽃망울 터뜨려
그리 이쁘지 않은 꽃잎 내리뜨렸을 때에야
진짜 난이 된다.

꽃없는 난은 한번도 꽃피우지 않았으므로
향기 풍기는 난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 향기, 얼마나 아련한가.

옛 전설 속 흐르는 난들은
모두 꽃을 피웠나니
그 인재들은 모두 향이 있었노라.

그렇다고 질투해서는 아니된다.
향없는 자의 줄에 서서
향있는 자를 흘겨볼 수는 없나니.

아련한 향을 품기를 기대하며
다만 바라볼 밖에.
평생 미란이어도 좋을 그런 삶.
바라보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하며.

난이었노라.
향품지 못한 미란이었노라.
그러나 언젠가 향 품기를 고대하나니.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미란도
떄로는 난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 향기 마음에 품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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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는 요양원에 딸린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길준에게 루가에 대한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길준은 한 유도선수와 함께 연습중이었다. 낙법을 구사해서 상대 선수에게 받은 충격을 완화한 그는 다시 벌떡 일어나서 상대의 옷깃을 잡고 붙었다.
그러다가 한바퀴 돌고 나서 다시 내쳐졌다.
일어나면서 길준이 짓는 표정을 보고 은미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덜컹거렸다. 저 눈매는 조금은 다르지만.
한때 자신을 설레게 했던 병률의 표정과도 닮아 있었다.

"사장님."

길준이 다시 일어난 후 상대 선수에게 인사를 한 후 은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은미씨? 무슨 일로..."

"루가씨 문제로..."

"그 문제라면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좀 있다가 또 만날 사람이 있어서..."

길준은 그렇게 말한 후 매트위에 잠시 앉았다. 

"오늘은 체육관에서 몸을 좀 풀어야겠습니다."
"...사장님."

"만약에 있을 일을 대비해놓는 것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죠."

그 말에 은미는 병률을 떠올렸다. 만약의 경우라면, 길준은 언젠가 병률과 맨몸으로 맞붙는 걸 생각하는 것일까?
병률도 물론 그녀가 알기로 단련을 게을리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니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병률이 결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막상 막하가 되리라.

"사실은."

길준이 다시 일어나서 몸의 굳어진 부분을 풀었다.

"나는 기분나쁜 일이 생각나면 체육관에서 몸을 풉니다.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당신 얼굴을 보니 다시 기분이 별로 안 좋아져서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왜 제 얼굴을 보면 기분이 나빠지시죠?"

그녀의 말에 길준이 피식 웃었다.

"당신은 내 아내를 닮았습니다. 혈연관계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그리고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복수심과 연민과 분노가 항상 따라온다는 걸 알죠. 그 배후에 있던 인물에 대한 연민처럼."

"그건 병률씨를 두고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 보다 더 안쪽. 내 분노는 거기를 향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그 진범을 혼내줄 수 없는 게 내 한계죠."

"정치인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말 은미는 궁금했다. 이 남자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아니, 내 마지막 상대는 그냥 정치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병률을 응징한다는 건 그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복수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당신은 서글프겠지만."

혈연관계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은미는 서글퍼졌다. 이 남자는 마치 눈앞에 장막이 없는 것처럼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일 관계도 몇번의 삐걱거림 이후 부터는 직설적이고 확고하게 진행한다.
금괴를 찾으러 간 날도 은미와 몇번의 전화통화 이후, 그 마을 사람들이 눈치채지도 못하게 트럭과 운반기계를 들여서 그 금괴를 조용히 실어날랐다고 했다.

"제가 왜 서글플까요..."

마음추는 이미 길준에게 기울었는데, 한때 무척 사랑했던 원수는 그녀를 이용해 다른 일을 벌이려고 하고 있는데...
그 점은 길준이 모르는 것 같아 은미는 마음이 아팠다.

"그 남자가 더 이상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당신에게 남은 건 그 남자에 대한 복수 뿐이니까...그럴 겁니다. 당신은..."

그때 체육관으로 건장한 레슬링 선수 하나가 들어왔다. 길준은 거기서 말을 끊고 레슬링 선수와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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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빔 좋고.

그는 싱긋거리면서 연신 새로 산 목티를 만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짧은 목이 터틀 넥이라는 옷을 입자 더 짧아진 느낌이랄까. 거북이라고 놀려줄까하고 여친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하지만 어째서 저 녀석이 여기에 끼는 걸까...

"오빠, 그 옷 참 잘 어울린다. 그지?"

그 녀석을 오빠라고까지 지칭하면서 모처럼의 낭만적인 여행의 흥취를 몽땅 다 깨고 있다.
아아. 내 청춘이여.

"그래. 장춘이가 옷 보는 눈이 정말 좋아...응? 근데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김장춘?"

"어째서 네가 온 걸까 생각 중이다. 대구가 좀 더 가까웠으면 날려보냈을텐데."

"오, 기왕 보낼거면 마라도로 보내줘..."

섬출신인 이 녀석은 입버릇이 마라도로 보내줘.이다. 그렇다고 마라도출신도 아니건만.

"가끔은 설빔구실로 커플 브레이커 역할도 하지...다혜랑 사귈거면 우장이는 다른 여자한테 붙여주고 그래라.
어설픈 네 애인이 그 나사빠진 놈한테 가기 전에..."

선배 애인이 우장이에게 빠지는 바람에, 과내에서 우장이에 대한 평판은 극과 극을 달린다.
여자들은 걷어채이거나 말거나 좋은 오빠. 라면서 우장이를 감싸고, 여친들이 우장이에게 환호하는 걸 본 남자들은 우장이를 미워한다. 물론 실적이 좋으니 대학원에 들어가는 것도 문제없다. 친척들이 그럭저럭 잘 나가는 그룹의 사장들이니, 용돈 걱정 안 해도 돼 공부 잘하니 취직 걱정안해도돼...이러니 남자들이 우장이를 눈꼴시게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인 것이다.
어째서 촌 시골뜨기놈이 밥그릇이란 밥그릇은 다 들고 먹는 건지 

"방은 더블로 써라."

우장이가 내가 쓰는 목록을 보더니 한마디한다.

"연인끼리 계속 붙여놓으면 가연성이 되니까, 너네는 좀 떨어져 있어야겠다."

"아이 오빠두 참..."

"야. 우장. 가연성인거 알면 우리 사이에서 떨어져."

"싫은데? 넌 나랑 같이 방써야 돼. 그러니까 더블. 그리고 다혜는 싱글로."


이 빌어먹을 놈의 커플 브레이커 자슥을 치워버릴 방법이 없을까?
나는 샤워끝난 다음 머리를 말리면서 입는 옷이라고는 오로지 터틀넥밖에 없는 저 요망한 물건을 치워버릴 궁리를 했다. 설빔은 벌써 했고, 설 이후에 핑계되면서 저 녀석을 보내버릴 방법이...

"장춘아."

"응?"

"우리 룸서비스 시켜먹자."

"뭐?"

가난한 학생이 간만에 겨우 돈 벌어서 좋은 델 왔더니 이 기생충이 못하는 말이 없다!

"돈없어."

"거짓말하지마."

"설빔 샀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가 왜 이놈에게 휘둘려야 하는 걸까. 선배들의 진리를 듣지 않았던가. 우장에게 설빔을 사주는 사람은 항상 여친과 꺠어진다.

"커플 브레이커의 결말을 듣고 싶은 모양이군."

우장이 짐작한 듯 후후 웃기 시작했다.

"그건 아주 장렬한 역사지. 김장춘도 그게 듣고 싶은 모양이군. 그래. 내가 김군을 위해서 특별히..."

다 들으면 안된다. 
나는 발로 우장이의 코를 걷어찬 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엎어진 우장이의 팔을 꺾었다. 그정도로 내 사랑은 지극했다. 다혜는 어떻게든 사수해야 한다!

"오빠? 무슨 소리가 들려서 왔는데 괜찮아?"

"으...다혜야."

별것도 아닌 공격에 엄살을 피우는 우장이를 막기 위해서 나는 손으로 그녀석의 입을 막았다. 우장이는 꽉 깨물었고, 그리고 동시에 우장이가 이렇게 외쳤다.

"다혜야. 장춘이가 룸서비스 시켜준대!"

"어, 정말? 장춘 오빠 정말이야?"

"으..응."

룸 밖에 있던 인기척이 사라졌다. 나는 원망스런 눈으로 우장이를 노려봤다.

"이게 다 뭐냐. 우장."

"뭐긴 뭐지 미리 예약해놨지.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서. 아, 다혜방에는 프로슈토랑 멜론 주문해놨다. 혹시 그거 먹고 싶으면 내가 특별히 다혜방을 방문할 기회를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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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이, 안자기...

이 이름들의 공통점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들었을 때 일본인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공통점일 뿐이다.

특히나 이자이에 대해서는 반감까지 들었다. 일본인인데 유명한 작곡가라고? 흥!

물론 난 훌륭한 일본인에 대해서 반감을 가진 적은 별로 없다. 오자와 세이지에 대해서 들었을 때도 반감은 가지지 않았었다. 근데 왜 이자이만?

그건 나도 모른다...다만 첫 느낌이 별로 안 좋았을 뿐이다.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 이름이 듣기 싫어서 그랬는지...

 

하여간 이자이에 대해서 들은 건 근 10년전에 들은 건데, 이제사 이자이가 일본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프랑스인-벨기에인일지도?-이고, 그의 곡은 나도 한번 들어봤던 것이었다. 익숙한 곡...나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람이 익숙한 바로 그 바이올린 소나타 제 6번...;;;;;이 느낌은 그 곡을 들으면 안다.) 아마 이자이에 대한 반감은 그가 현대인이라고 생각한데서 나온 듯 하다.

좀 검색해보면 근대에 가깝게 살았던 인물이고,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로 활동했다고 나온다. 초상화가 꽤 미남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하여간, 이자이 곡을 한번 들어보겠다고 네이버 앱에서 찾아보는데, 웬 이쁜 츠자가...

마츠다 리나라고 나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인데, 이자이 소나타 6번을 굉장히 정신이 팔리게 연주한다. 물론 라벨의 치간느가 그녀의 최고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런 건 알바 없고, 어쨌든 이자이 소나타 6번이 멋지게 연주되는 동안 다른 곡들도 구경했다.

라벨의 치간느보다는 내 취향에는 라벨의 포스트휴머스(?-사전을 찾아봐야겠다. 협주곡인것 같긴 한데...피아노도 나오고 바이올린도 나오니...)라는 곡이 더 잘 맞는 것 같다.

물이 졸졸 흐르면서 돌멩이에 부딪혀 나는 소리가 난다.

졸졸졸 탕탕 졸졸졸 탕탕...이렇게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리는데...

그리고 햇살에 물방울이 부딪히는 느낌도 나고...

 

하여간 태그는 복수로 쓴다...

이번 제목이야 저렇게 쓰긴 하지만, 이건 내 인생의 포르테들에도 들어갈 취향직격의 물건이 틀림없다. 라벨과 이자이와 마츠다 리나~ 멋진 곡들을 발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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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아.
동생이 언니에게 말했다.
그 사람하고 난...
이미 결정된 일이잖아. 왜 걱정하니?
언니의 말에 동생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우린 아닌 것 같아.
혼수도 다 넣고 했는데 이제 와서 그러면 어떡하니?
어쩔 수 없어. 사랑할 수 없는 걸.
사랑?
언니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이 있는 지 아니?
그 사랑으로 다 해결될 줄 알고 강행했다가 그 남자한테 버림받은 난 어떻고?
언니가 더 잘 알잖아. 그런 식으로 또 한번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

언니는 읽고 있던 대본을 무릎에 내려놓고 동생의 뺨을 한대 때렸다.
그 남자가 나빴던 거야. 사랑이 없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난 돌아갈 거야.
동생이 말했다.
어차피 여긴 우리 고향이 아니야. 언니.
언니도 시댁이 될 곳이라고 생각해서 온 곳이잖아.
우리 둘다 그냥 돌아가면 돼.
아버지, 어머니도 우리가 결혼하지 않은 걸 알아야해.
우리 둘다 여기  수선집에서 돈 얼마받고 일해? 그러느니 돌아가서 농장을 돌보는 게 더 현실적이야.

언니는 식탁에서 일어나서 한쪽 구석에 있는 보자기를 풀었다. 그 보자기에는 보기에도 눈부신 하얀 웨딩 드레스가 있었다.
봐. 이 웨딩 드레스...
얼마나 예쁘니? 이게 본래 내 거였는데 얼마 전에 네 치수에 맞게 조절했어.
3달 전에 이걸 고치면서 울컥했는데...
할 수 없잖아. 이젠 돌아가야 해.
사실 언니한텐 이야기 안했지만 약혼자에게는 벌써 이야길 끝냈어.
상의도 없이 그러는 게 어딨니?

목소리는 날카로워졌지만 언니도, 동생도 남은 길은 하나뿐이라는 걸 알았다.
이 셋집에서 벗어나 돌아가는 것.
결혼에 대한 미련때문에 자신을 버린 남자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언니와
결혼에 대해 미련도 없고, 감정도 없던 동생은 드디어 서로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이젠 저 웨딩드레스도 필요가 없구나. 그럼...

그 다음날, 두 사람이 월세를 지불하고 짐꾸러미를 챙겨들고 기차역으로 가던 아침 9시.
그 옆 아파트 앞 드럼통앞에서 두 사람이 버리고 간 웨딩 드레스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눈이 안 좋은 수위는 그것도 모르고 두 사람이 더 태워줄 헌 옷을 넣어준 줄 알고 마냥 좋아하고 있었다.

아, 마음 좋은 아가씨들이야. 착하고 말고. 다정하기도 하지...

흰 것은 검게, 검은 것은 다시 희게 그렇게 웨딩드레스는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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