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률은 죽일엽과 그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그가 들은 명령은 이랬다.
죽일엽을 지켜라.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하면 지키라는 말이었지만 m의장은 반어법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이라 그 뜻 그대로가 될 리 없었다.
그 축약된 말에 중간에 들어갈 단어는 그랬다. 내 소유가 될 죽일엽을 지켜라.
근데 틈이 생겨버렸다. 갑자기 이준구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그 땅을 매입해버린 것이다.
더더군다나 그 시군에서 개인 땅에 도로를 낸 것을 문제 삼아(죽일엽의 것은 아니고, 그 이웃의 미상속 체납토지였다.그것을 이준구가 샀다는 것이다.) 죽일엽을 망가뜨리려고 했던 토호들을 못 지나가게 해버렸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로 인해서 m의장에게 항의했던 토호도 돈이 먼저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버린 것이었다. 도대체 그 새로 들어온 유지는 어느 정도 수준의 부자이길래 이런 일을 하는가...가 병률의 새 고민거리였다.
그는 이준구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풍겼다.
얼핏 들은 말로는 주민등록 기록상에는 거주불명등록이 되어 있다가 최근에 이쪽으로 전입해왔다고 되어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거주불명등록자는 파산으로 인해서 그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기록으로 따진다면 파산자가 갑자기 억대 이상의 거부가 되어서 돌아온 것이니까.
그가 그렇게 문서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윤희가 들어왔다.
“뭐하고 있어. 안 자고?”
“서류 정리 중이야. 상속서류들도 보고 있었고...아,m의장님이 써보내라는 감사장도...”
“당신 요즘 항상 바쁘네.”
윤희는 병률이 앉아 있는 의자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별식이라도 해줘?”
“당연히 맛있겠지만 오늘은 포기하겠어. 늦게까지 볼 게 많으니...그거 먹고 밤에 자면 살쪄. 비례대표로 나가는 거지만 외모는 단정해야지.”
“그럼 야식은 나 혼자 먹어야겠네. 요즘 먹을 게 땡겨서 고민이야.”
“그래...근데 확실히 살이 좀 붙은 것 같...”
병률은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을 굳혔다. 뭔가가 아른거리는 것이. 죽은 그 여자의 환영이 윤희에게 덧씌워지는 느낌이었다. 병률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뭔가의 그림자를 지우려는 것처럼 얼굴을 팔로 가리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병률씨.왜 그래. 여보!”
보였다. 그 여자의 얼굴이.
마지막에 자신에게 이별을 고할 때의 그 얼굴이.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의 그 경멸감 어린 얼굴이.
“안돼,안돼!”
그는 비명을 지르다 말고 윤희를 옆으로 밀쳤다.
그 여자를 옆으로 밀쳤둣이
“여보. 정신차려. 나 당신 부인이야. 왜 그래.”
그녀가 배를 잡고 겨우 일어나 말했다. 그녀가 배를 잡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병률은 제정신을 차렸다.
“당신...”
“그래. 정신이 이제 좀 들어?”
“혹시 임신했어?”
“......”
윤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요즘 피곤한 것 같아서 일부러 말 안했어. 이제 2개월이래.”
“......그랬군.”
그는 식은땀을 닦아내고 윤희에게 억지로 웃어보였다.
“태교 잘 해야겠네. 한동안은 바빠서 외조를 잘 못하겠지만 좀 봐줘. 일이 잘 끝나면 외조 잘하는 남편이 될테니까. 아, 그러면 웨이트리스 일은 쉬어야겠지? 그리고 이제 나 따라서 봉사활동같은 것도 안 해도 돼. 우리 애기가 중요하지. 될지 안될지 모르는 비례대표가 뭐가 중요하겠어. 그것도 본인만 하면 되는데...”
환하게 웃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애를 써도 써도 그건 쓴 웃음만 될 뿐이었다.
병률은 그것도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