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미는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을 끄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휴대폰이 울리기 전 일어났던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폰을 집어던진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보세요. 아, 이의원님.”
병률의 전화였기 때문에 던지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다년간의 정치인 보좌관 일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건 모를 일이었다. 지금의 그녀의 마음은 아무도 몰랐다.
“아, 잠을 깨웠군. 내가 깨어 있어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니오. 뭐 하실 말씀이라도?”
“...긴히 할 말이 있어. 지금 잠깐 나와줄 수 있을까?”
“네.”
은미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이준구의 저택에 있는 동안 그녀는 그다지 많은 일을 하지않았다. 사단법인 등기는 아직이었다. 이준구가 추진한다는 유기농 녹차 사업도 아직은 지지부진이었다. 죽일엽의 죽엽차 개발도 아직은 시도중일 뿐이어서 그녀가 개입할 부분은 많지 않았다.
복수라고 불러달라는 남자의 정체는 애매모호했다. 하지만 그녀는 약간은 실마리를 잡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 병률이 요구하는 것이 그것이 아닐까...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녀는 눈치가 예전부터 빨랐고, 정치인의 길을 걷기를 희망했었다. 그래서 그 직감이, 이 수상한 무리에게 향해진 것이었고, 그녀는 병률의 전화에서 그걸 읽었던 것이었다.
“새벽 3시네. 아직까지 안 주무시고 있었던 걸까...”
뭐가 근심할게 있을까? 그녀는 병률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다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사실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감정을 뺀다면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의혹과 복수로 차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 무리에 대해서 가지는 감정도 그와 유사했다. 다만 사랑한다는 감정은 없을 뿐.
그녀는 문을 살짝 열고 집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다. 가끔 돌아가는 공기청정기 소리 외에는...
그녀는 누가 봐도 변명을 할수 있게끔 트레이닝 복을 입고 계단을 밟아 현관쪽으로 내려갔...
아니, 아니었다.
현관에 복수라고 불러달라 했던 길준이 서 있었다. 한쪽 손에는 물컵을 들고 있는 채였다.
“어디로 갑니까?”
“운동...하러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응대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었다. 아니 단지 닮은 인물일지도 몰랐다. 사촌언니의 결혼식에 신랑이었던 그 남자.
아마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름으로 추적해 본 결과 언니의 죽음에는 이 남자도 끼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체력단련실은 별채에 있습니다만, 그리고 별채는 잊어버렸나 싶어서 알려드리지만 오른쪽입니다. 현관 반대방향이죠.”
“.....”
치밀했던 자신이 빈틈을 보였다고 자책하면서 하은미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새벽 3시에?”
피식 웃으면서 길준이 그녀쪽으로 돌아섰다.
“새벽 3시에 만날 정도면 각별한 사이겠군요. 실연한 걸 받아달라고 징징거리던가요? 아니면 정치인이 되려고 하니 기밀이라도 하나 터뜨려 달라고 하던가요.”
“......”
“뭐, 표정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잘 다녀 오세요.”
길준은 냉랭한 어조로 그렇게 말한 후 현관쪽에서 돌아섰다.
“그리고 말해두지만 누군지는 몰라도, 우리 일을 캐려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은미씨.
당신도 우리하고 일을 하려면 누군가의 하수인 노릇은 그만둬야 할 겁니다. 적과 아군 정도는 미리 정하고 일을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