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왜 하지? - 수업으로 읽는 우리 교육
서근원 지음 / 우리교육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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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르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적성의 문제가 아니라 부단한 성찰과 배움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인 동시에 배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처음 교단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말 그대로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30명 넘는 제각각의 아이들 틈바구니 속에서 쏟아지는 공문과 학교 안팎의 지침과 계도는 나를 숨 막히게 했다. 1년을 하고 나니 내 기운이 다 소진되는 것 같았다. 힘이 부처 군 입대를 신청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복직하고 새롭게 시작했다. 막연히 수업을 잘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수업 기법과 방법에 연수를 받으러 돌아 다녔다. 기법과 방법에 대해 많이 알아갈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배우면 배울수록 풀어내기가 버거웠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간과한 채 몰아붙이고 혼자 좌절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수업을 하면 그 때만 반짝인 것 같았고 아이들은 또다시 제자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난 항상 바쁘게 지냈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수업은 기법과 방법의 연마가 아니다. 수업에 대한 가르치는 자의 철학의 문제이다. 내가 수업에 대한 철학이 있었던가. 수업을 왜 해야 하는지 몰랐다. 교과서를 다 배우고 진도를 맞춰 나가야 하는 게 가장 큰 일인 줄 알았다. 그게 안 되면 아이들을 닦달했고 난 조급해졌다. ‘수업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이 없이 모둠학습을 하고 조별학습을 진행했다. 동기유발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교수-학습 체계는 지켜져야 했으며 교과서에 실려 있으니 꼭 해야 되는 것인냥 전투적이었다.

 

<수업을 왜 하지?>는 제목 그대로 수업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담은 책이다. 9편의 수업 사례를 통해 수업의 장면을 복기해가며 대안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법률가들에게 판례가 소중한 것처럼 교사들에게 수업사례, 상담사례, 교육적 문제와 처방 사례가 소중하다.(11p, 추천사) 이 책은 아이 눈으로 수업하기바람을 일으켰던 서근원 교수가 썼다. 2003년에 초판으로 나왔고, 2014년에 2판이 나왔다.

 

2판을 내면서 글의 내용은 크게 손보지 않고 장의 배치를 달리하고 부를 나누었다.(p5)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우리나라 수업의 현실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 살펴보고 2부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현재의 방식과 그 한계를 알아본다. 3부는 수업이 무엇인지 새롭게 고민하고 4부는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수업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각 부는 특성에 맞게 수업장면이 삽입되어 있고, 9개의 수업 장면을 전사하거나, 분석한다.

 

다양한 수업 사례는 이 책의 백미이다. 9편의 수업 사례는 읽으면서 공감했으며 때론 소설을 읽듯, 키득거리는 유머집을 읽듯 신났다. 교사들이 펼치는 일상적 수업 사례는 내 이야기인 듯 가슴이 아프다가도 아이 눈으로 수업을 본다면 진짜 배움이 일어나고 있을까라고 생각할 때 뜨끔하기도 하였다. 내 이야기인 듯, 옆 반 이야기인 듯 실제 상황 속에서 철학적 고민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 더욱이 서근원 교수의 고백에 가까운 마지막 장(가고픈 저 길)은 읽으면서 또 다른 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서글프고 감동적이었다. 마치 문학 작품에서 오는 감동처럼 느끼는 까닭은 수업이 가르치는 자로서의 숙명이라는 공감이 들어서였을 거다.

 

교육과정과 교과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에서 나오는 수업 장면에서 줄기차게 나오는 선생님들의 딜레마는 교과서와 교육과정이다. 교과서와 진도에 매몰되고, 형식적인 수업 기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될 때의 모습들이 담겨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의 눈으로 수업을 살펴보고 배움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그 모습을 이해하며 바라본다. 이 책은 2003년도에 이루어졌으니 10년도 넘는 이야기이다. 물론 여전히 그런 관행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지금은 교과서는 교육과정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범례이고 잘 정선된 예시안으로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 계속해서 7차에 따른 교과서와 교육과정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금 보면 문제가 있어 폐기되었거나 재정선된 새로운 교과서가 나온다. 그래서 나 역시 주제중심으로 재구성해 가르치고 있으니, 교과서 참고자료이고 단원은 주제에 따라 선별적으로 사용된다. 물론 면밀한 교육과정 분석은 필수임은 당연한 일이다.

 

정리하자. 그렇다면 수업을 왜 하는 것일까. 모든 교사의 현재 진행형은 수업이다. 그럼에도 왜 가르치는 것일까에 대한 고민은 상념으로 치부하는 교사가 많다. 나 역시 그랬다. 국가의 명을 받아 국가가 만들어 놓은 커리큘럼에 아이들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왜 가르치는지 고민은 쓸데없는 막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교실 상황에서 수업 상황에서 하나도 나아지는 게 없다고 느끼는 데에 있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왜 가르치는 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과 사유 없이 기법으로만 수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 배움의 대상자인 학생은 어떠한 눈으로 배움을 해나가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수업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임무는 가르치는 기계가 아닌 아이들의 진정한 배움을 이끄는 스승이 되는 것이다. 나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수업을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p5), ‘나는 수업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라는 질문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대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p7)고 말하는 것처럼 이 책은 직접적으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읽으면서 같이 대화한 독자들은 직접적으로 안다. 수업은 아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같이 이해하는 과정이며 서로의 배움을 같이 공유하는 과정이다. 이해로서의 상대가 아니라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볼 때 교육과정의 혁신과 교과의 재구성은 요원한 일이다. 그들을 단순히 가르치는 대상이 아니라 주제 속에서 함께 배우는 상대로 볼 때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진정한 배움이 일어난다. 화려한 멀티미디어나 기법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것, 맨손 수업이라도 삶을 이해하고 주제를 공유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수업을 왜 하는지에 대한 답이 아닐까 한다. 교사와 학생들 모두 진리의 공동체 안에서 같이 배우며 같이 성장한다고 믿는다.

 

야영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보았는데 왜 수업 시간에 또 음식을 만드는 것일까? 야영하면서 음식을 만드는 것과 수업 시간에 음식을 만드는 것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p25)

 

“ ‘이것을 왜 하는 거니?’ 내가 아이들에게 묻는다. ‘선생님이 하라고 하니까요.’ 우성이가 대답한다.(p26)

 

그리하여 교과를 배우는 것이 우리의 삶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가 그의 수업과 삶에서 먼저 배어 나가를 바란다.(p33)

 

수업이 질적으로 변화기 위해서는 학급당 정원의 감축이라든가 시간 운영 방식의 변화와 같은 세부적인 조건의 변화와 함께 교사 자신의 노력이 요구된다. 그것은 집터와 목재를 준비한다고 해서 집이 저절로 지어지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p68)

 

교사는 한편으로는 학생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현재 수준과 속도를 확인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이 생산되기까지의 과정을 교사 자신이 먼저 경험할 필요가 있다. 교과서에 적힌 내용을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해서 기억하게 하는 일은 몇 가지 수업 방법과 학생 통제 방법만 익히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런 결과물을 낳는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일은 교사 자신이 직접 해 보지 않는다면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p90)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이 실제로 무엇을 학습했는지, 또는 무엇을 경험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학생들이 학습하거나 경험한 그것이 그가 학습하기를 기대한 그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p133)

 

예를 들면, 폭우로 수해를 입은 지역의 학생들에게 앞서 살펴본 <비 오는 날>이라는 시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p188)

 

요컨대, 수업의 표면에서는 교사가 학생을 가르침으로써 아이가 성장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교사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불안을 느끼며,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노력하는 가운데 성장해 간다. 아마도 여기에 수업의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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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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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주의보가 경보가 되어 조심스러웠는데 다행히 비가 왔다. 계속 푸석거렸던 공기가 물기를 빨아내어 부드러워졌다. 이러 날은 괜히 싱숭생숭해서 시와 소설, 영화 등의 텍스트를 기웃거린다. 아마도 텍스트 속에 담겨있는 서사와 이야기에 교감할 수 있는 느낌이 살아나서이지 않을까. 나같은 범인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그 느낌. 그 '알 수 없는 느낌'을 신형철은 글로 '알 수 있게 복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그 어떤 공동체를 향해 노를 젓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신형철은 문학 작품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정확하게 말로 표현해내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수 편의 시와 시집, 소설 등에서 나오는 느낌 하나를 가지고 자유롭고 적확하게 글을 쓴다.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p12)는 그의 말이 투정처럼 느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는 어느 평론가보다도 공유하기 쉽게, 명확하게 글을 쓴다.

 

사실 신형철의 글을 제대로 마주한 건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을 통해서다. 읽자마자 그의 글에 매료되었고, 텍스트를 정확하게 본다는 것은 그 텍스트에 대한 사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평을 썼다. http://blog.naver.com/magicsm/220169497060  그리고 눈을 떼레야 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글에 대한 매력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만들었다. 이 책 <느낌의 공동체>는 2011년에 발행되었다.

 

책의 구성은 시인, 시집, 세상, 소설, 영화에 대한 이야기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묶음 구성은 평소 계속 신문과 잡지에 써 오던 글의 합으로 되어 있다. 그러하기에 쓰여진 연도와 날짜와 제각각이다. 하나하나 낱으로 읽어갈 때의 느낌과 그 읽어감을 큰 카테고리로 묶어 바라보는 느낌은 또 다르다. 한 편씩 읽을 때마다 그 독립된 한 편 자체를 음미했고, 큰 카테고리로 바라볼 때마다 신형철의 사유의 이미지로 그 틀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였다.

 

우선 짚고 넘어가자. 신형철은 시와 시인을 바라보는 눈은 '진보'와 '혁명'이다.  문학은 서정성에 머물러서 투명하고 편안하고 또 안이한 것을 경계한다. 그는 '예술은 먼저 예술 자체를 혁신하면서 우선 인간을 바꾸고, 멀게는 제도의 변혁에 기여하겠다는 '가망 없는 희망'에 헌신해야 한다.'(p19)고 말한다. 그의 이런 '진보'와 '혁명'의 관점에서의 문학론은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시인 '진은영'에 대한 평론에서 그렇고, '모국어가 흘리는 눈물'편에서 허수경의 시에 대한 평론도 그렇다. '총을 든 선승의 오늘'편에서 서정성으로 회귀하는 고은을 매몰차게 밀어냈으며 '치명적인 시, 용산' 평론에서는 전투적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며 대표되는 그의 일련의 글과 평론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진보'와 '혁명'으로 무장한다.

 

얼마 전에 서평글을 남겼던, '처형자와 시인이 나란히 앉아 통치한 서정시의 시대' 속에서 '시인'을 죽여야만 했던 <생은 다른 곳에>를 신형철이 평론한다면 어떠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강렬히 '진보'로움을 갈구한다. 쿤데라든 신형철이든 시인과 시의 세계를 다룬다. 그런데 적어도 위 책에서는 사유하는 방식이 다르다. '예술에서의 진보는 대중과 함께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창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p18)고 믿는 신형철이 옳을까. 혁명시로의 전환한 야로밀을 죽인 쿤데라가 옳을까. 

 

다만 정확히 텍스트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은 필수다. 그 눈을 신형철은 가지려 한다. 수 명의 시인과 수십개의 시와 시집, 그리고 소설과 영화의 정확한 느낌의 표현을 읽고 있노라면, 얼른 하던 일을 멈춰두고 서점에 달려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책 속에 실려있는 작품집을 갖고 싶고, 시인과 작가를 얼른 만나고 싶을 만큼 멋지고 가치있는 작품들이 속속 등장한다. 이 작품들만 읽어도 여러해가 다 갈 것 같은, 풍요로운 이 감정을 감사하게도 신형철은 먼저 맛보고 글을 써주었다.

 

관점이 어찌 되었던, 그의 글은 읽는 재미가 있다. 이 재미는 그냥 말초신경의 흥미를 의미하지 않는다. 텍스트를 정확히 분석하고 느낌을 적확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에서 오는 글을 읽는 '탐구'와 '몰입'의 재미이다. 느낌의 공동체에 같이 배를 타고 가는 두근거림의 재미이다. <느낌의 공동체> 속의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과 만나서 그들의 사유함을 공유하는 성장의 재미이다. 그래서 항상 신형철의 평론을 읽으면 감사하다. 

 

밑줄긋기

 

"사랑할수록 문학과 더 많이 싸우게 된다. 사랑으로 일어나는 싸움에서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워한 쪽이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야 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다. 나는 계속 질 것이다.(p12)

 

"그녀의 사전에는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관용구가 없다. 솔직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서정적'이지 않다고? 그러나 분명히 '시적'이다.(김민정, p30)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진은영, p54)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아름다운 엄살, 실존적 깽판, p127)

 

"크리스마스의 역설이 그렇게 생겨난다. 평소보다 훨씬 더 행복해야 마땅한 날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흔히 겪는 어떤 사소한 불행 앞에서도 '오늘은 크리스마스인데!'라고 생각하면 더 서러워져서, 결국 우울한 날이 되어버리고 마는 역설.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문학들은 흔히 이 크리스마스의 역설에 초점을 맞추고 '너만 그런 게 아냐. 다 그래'하고 우리를 위로한다.(이런 몹쓸 크리스마스, p159)

 

"시집 제목은 싱싱한 것으로 고르되, 시식용 시 제목은 반대로 고르자. 목차를 펼쳐서 사랑, 그리움, 슬픔 따위의 해묵은 단어들을 제목 안에 품고 있는 시를 먼저 읽어보라. 본래 시인의 진짜 실력은 저런 진부한 소재들을 처리하는 솜씨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감히 '사랑' 운운하는 제목의 시를 쓴다는 것은 기왕의 수많은 연애시들과 진검 승부 한판 하겠다는 얘기다.(읽어야 할 것 투성이

, p178)

 

"얼굴 공개로 얻게 되는 '공익'의 실체는 불분명하다. 그가 향후 지속적으로 공중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공인이 아니기 때문에 '알 권리' 운운도 설득력이 없다. 징벌의 차원에서 얼굴을 공개하자는 논리는 법치주의에 위배될 뿐 아니라 살인자의 가족에게는 연좌제의 굴레가 될 수 있어 위험하다. 유사 범죄 예방 운운은 추단과 바람일 뿐이어서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성문법을 훼손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피해자의 인권이 문제가 된다면 살인자의 얼굴을 유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개할 수 있겠지만 본래 이누건이란 서로 주고 뺏는 것이 아니라 함께 수호되어야 하는 것이어서 저 논리는 감상적이다. 예외를 허용하면 원칙은 파괴된다. 살인자가 아니라 인권 그 자체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연쇄살인자의 얼굴은 전쟁터가 되었고 그 전쟁에서 우리는 졌다.(얼굴들, p231)

 

"마지막으로 말줄임표와 마침표. 흔히 말줄임표를 자주 사용하면 글이 겸손해보인다고 생각한다....(중략)말 줄임표는 겸손함이 아니라 소심함의 기호다. 마침표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없다. 담배는 백해무익이요, 마침표는 다다익선이다. 많이 찍을수록 경쾌한 단문이 생산된다.(구두점에 대한 명상, p255)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일은 끝내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 그 사랑은 가련한 사랑이다.(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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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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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에 새겨진 한자 속에 담긴 인문학적 이야기 <한자의 탄생>

 

우리가 중국의 한자의 영향을 받은 한자문화권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로 인해 우리 문자의 혁신이 있었음에도 한자는 우리 생활 깊숙히 박혀있어서 지금까지도 낱말과 어원은 한자로 풀어야 이해되는 것들이 상당수다. 통계적으로는 우리 말의 70%정도는 한자어라 하니 그냥 넘길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한자는 사물을 본 떠 그 사물이나 그것에 관련있는 관념을 나타낸 상형 문자이다. 우리 나라의 문자는 표음문자로 그 과정이 다르다. 그래서 한자를 무턱대고 외우고 공부하면 낭패일 수 있다. 한자의 조형원리를 알고 그 발전 단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한자 문화권인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일 수 있다. 한자가 위대하니 그것을 받들자는 사대주의와는 다르다.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었다. 이 책은 갑골문자에 나타난 한자를 분석하여 그 모습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그 전의 학자들이 충분히 시도했었기에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장점은 그것에 더해 갑골문에 담긴 문화와 역사를 인문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한자의 모체는 중국의 갑골문에서 찾을 수 있다. 갑골문은 동물(거북이)의 뼈나 껍질에 새겨져 있는 글자로 오래 전 고대 중국에서 주술적으로 사용했던 문자 기호이다. 이러한 문자 기호의 발견은 그동안 베일에 쌓여져있던 중국 역사와 문화, 농법, 역법 등 다양한 분야를 확인할 수 있기에 획기적이었다. 때문에 갑골문자는 당시 사회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하며 중국 문자와 문물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탕누어는 갑골문 속에 담긴 한자 이야기와 한자 변천 과정을 인문학적으로 재미있게 서술한다. 한자 속에 담긴 그 시대의 이야기와 삶은 읽는 소소한 재미를 준다. 탕누어 식의 신변잡기성의 편안하면서도 위트있는 이야기도 재미를 배가시킨다. 더욱이 한자의 조형 원리인 상형, 회의, 지사, 형성, 전주, 가차를, 모든 살아있는 것이 흔적을 남기는 상형, 모니터 커서같은 막대부호 지사, 하늘아래 새로운 문자는 없다는 전주와 가차로 알기 쉽게 설명하여 유익한 지식의 즐거움까지도 얻어갈 수 있다.

 

다만 이 책은 한자의 기초적인 지식이 부족하거나, 한자에 흥미가 없다면 몰입도를 떨어뜨릴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한 것도 사실이다. 한자권이라고는 하나,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우리로서는 한자의 특성과 그 시대 중국 문화를 아는 것이 우리 문화를 알아가는 것보다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중국이나, 한자를 직접 사용하고 있는 문화권에서 더욱 요긴하게 읽힐 수도 있다. 그런 걸 감안하고 책을 선택해야 할 듯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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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연대기 -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모든 것
애덤 프랭크 지음, 고은주 옮김 / 에이도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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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경이로운 인간과 우주의 시간 이야기 <시간 연대기>

 

풋풋했던 첫사랑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상냥하고 친절하고 위트까지 있었던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해버린 나는, 결국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첫사랑이었고, 처음으로 하는 고백이었기에 얼마나 두근거렸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고백은 해야겠는데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물어물어 번호를 확인한 나는 삐삐라 불리는 무선호출기에 고백과 함께 00곳에서 몇 시에 기다릴테니 나와 달라고 음성을 남겼었다. 그리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몇 시간을 계속 기다렸었다. 오직 삐삐라는 음성메세지에 의존한 채, 올지 안올지도 모르는 그 몇 시간이 나에게는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시간이 정말 가지 않는 듯 했던 그때.

 

가끔씩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 와 달리 삐삐나 공중전화가 사라지고, 스마트폰이 대체된 요즘은 약속 시간이 칼 같다.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이야기하고, 1분 1초를 스마트폰으로 확인한다. 정해진 시간에 늦거나 또는 빠르면 몸이 들썩이고 불안해진다. 또한 끊임없이 시간을 체크하고 이메일을 확인하며 뉴스를 실시간으로 검색한다. 지나가버린 시간과 메일과 뉴스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간다. 시간에 중독되어 정밀한 시간의 시대 속에 잡혀 살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왜 이렇게 같은 시간(흔히 우리가 물리적으로 이야기하는)에 있었던 우리는' 빨리 감과 느리게 감'을 느끼는 것일까. 단순히 그냥 느낌에 불과한 것인가. 시간의 개념이 희미했던 목가적 낭만을 그리워하면서도 왜 시,분 단위로 나누어지지 않으면 일상 생활이 낭비된다고 느끼는 것일까. 시간이란 원래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 '시간'이란 진정 무엇이란 말일까.

 

<시간 연대기>는 현대 물리학자인 애덤 프랭크가 물리학의 관점에서 이러한 시간의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 쓴 책이다. 인류의 시간과 우주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태초의 시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의 장면을 연속적으로 기술해 나간다. 자연 시간의 일부분으로서의 인간이 자연에서 떨어져나와 시간을 갖게 되고, 그 시간을 조립하고 만들어 내는 일련의 인류 역사를 방대하게 기술해 놓았다. 문화와 시간의 상관 관계와 그 속에서 물질이 어떻게 시간을 바꾸고, 문화를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 정밀하게 설명한다. 즉, 이 책은 우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다룬다.

 

시간은 문화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과 동시에 우리가 속해있는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과도 뗄레야 뗄 수 없다. 더욱이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저자가 우주의 기원과 우주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은 우주를 다루고 우주의 시간과 공간을 다룬다. 덕분에 이 책은 시간과 문화, 물질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우주의 이야기까지 확장하며 책 한권이 인류의 시간 전체를 다루는 듯한 방대함이 느껴진다.

 

태초의 우주는 무엇이었을까. 시작이라는 시간이 과연 우주에서는 어떻게 어떻게 작용할 까를 수많은 물리학자와 천문학자 등이 고민했다. 과학적인 발견과 놀라운 지식의 축적으로 우리는 우리 지구만이 유일한 우주임이 아님을 알고 있다. 수많은 은하와 점점 넓어지는 우주 속에서 우리는 끝과 시작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한때 '빅뱅'이라고 물리는 우주 폭발 기원설이 그럴듯했으나 갑자기 폭발해서 생겼다는 빅뱅이론은 '이전'이 없는 우주와 갑자기 시간이 발생했다는 비논리에 막혀 있다. 그래서 현재 끊임없이 브레인 우주론, 인플레이션이론, 다중우주론, 끈이론, 루프양자우주론 등 대안 이론들이 나타나서 대체하려고 햐고 있으나 이론들 역시 완벽하지 않고 진화중이다. 그 속에서 시간의 개념은 아직도 둥둥 떠나니고 있는 듯하다.

 

놀랍고도 흥미로운 우주 이론과 물리학 이론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기초 지식이 부족하면 따라가기 버거운 점도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굳이 분석하지 않고(분석의 정밀함은 물리학도와 천문학도에게 넘기고) 그냥 이야기라고 받아들이면 쉽게 읽을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도 매력인 것이 시간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겉핥기 수준이겠지만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아인슈타인 등의 시간을 바라보는 다양한 이론들은 정말 흥미롭게 경이롭기까지 하다. 특히 과학 혁명을 이끈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시간 이론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개인적으로는 상대성이론을 막연하게 인식하는 정도였는데 이 책을 통해 좀 더 시공간의 장이 펼쳐지는 상대성이론을 접할 수 있어서 지적 줄거움이 컸다.

 

우리가 우주 속에서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으로 인한 물질의 창조, 그리고 문화의 변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의 각고의 노력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연속된 시간 속의 집단 지성의 힘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화하고 있으며 과학 속에서, 잡힐 것 같지 않는 보이지 않는 우주와 시간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집단 지성의 놀라운 힘에 감탄한다. 그리고 과학 지식이 부족한 범인인 나에게더 큰 세상과 우주를 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해주고 있는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감사하다.

 

드넓은 밤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지금 여기'의 나를 발견할 때 경이롭다. 이 책에 나와있는 줄리안 바버의 주장대로 '지금'이라는 나의 시간만이 계속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지금' 이 시간이 곧 우주의 시간일지도 모르기에, 과거의 우둔함과 아쉬움은 접어놓고, 미래라는 시간의 불안을 털어버리며 삶을 살아가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더욱 강렬히 든다. 아득한 시간과 문화와 과학의 위대함 속에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책읽기다.

 

 

밑줄 긋기

 

" 질문1. 우주는 하나인가, 여러 개인가?  질문2. 우주 공간은 무한한가, 한계가 있을까?  질문3. 우주공간은 스스로 존재하는가?  질문4. 시간은 스스로 존재하는가?  질문5. 우주에는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 아니면 둘 중 하나라도 있을까? (p100)

 

" 달의 주기인 29.5306일을 태양의 주기인 365.2422일에 맞추려는 활발한 노력이 대부분의 달력의 역사를 진행시켰다. 1년을 달로 나누면 12.3683이라는 수가 나온다. 로마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자,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1년을 12개월로 만들자는 점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은 비교적 쉬었다. 그러나 나머지 0.3683월을 그냥 무시해버릴 수는 없었다...(중략)대신관은 날짜와 계절이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윤달이라는 27일짜리 달을 별도로 삽입해 주기적으로 달력을 조정하는 일을 했다. 이는 물질이 개입하여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인데...(p110)

 

"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발견은 중대한 뉴스였다. 유럽에서 일본을 거쳐 미국까지, 허블의 발견은 숨 쉴 틈도 없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당시 혁신적인 언론매체였던 라디오에서도 모두를 열광케 하는 이 소식이 전해졌다. 허블이 우주의 시공간이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그 순간, 라디오는 인간 세상의 공간을 서로 좁혀놓고 완전히 새로운 시간을 경험하게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작은 아이러니가 아니었다.(p251)

 

"그러나 항상 그리고 영원히, 우주론을 만들어내는 일은 인류 문화의 창조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인간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p464)

 

" 우리가 시간을 발명했고 계속 재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시간을 다시 한 번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p465)

 

덧붙임.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물론 솔직한 리뷰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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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다른 곳에 - 교양선집 16
밀란 쿤데라 지음, 안정효 옮김 / 까치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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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 가득 찬 시와 시인들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 <생은 다른 곳에>

 

<일 포스티노>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시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네루다는 이렇게 대답한다. "시는 메타포(은유)다." 시는 메타포의 향연이기에 시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소설도 그러할 일이다. 소설로 시와 시의 전달자인 시인을 설명하는 것은 난해한 일이며, 그러하기에 소설을 쓰는 작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밀란 쿤데라가 그렇다. 그는 메타포의 결정체인 시인과 시를 위해 초현실주의적 소설이라는 모험을 했다.

 

이 소설<생은 다른 곳에>을 읽은 독자들은 쿤데라에게 난해하며 낯설다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일반적인 소설적 흐름과는 다르다. 시인 '야로밀'의 일대기를 썼는데, 읽다보면 일대기가 아니다. 일대기를 따라가다가 어느새 무의식의 세계에 빠지고, 분열된 자아를 보게 되는 심리학 소설이기도 하고. 서정성으로 대표되는 모성과 사랑의 본질적 의문을 갈구하며, 서정시와 전위시의 충돌로 대변되는 격변의 체코에서 가치관이 뒤흔들린 세계를 바라보는 고백 소설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소설을 구성하는 것인가. 해답은 책 안에 있다. 이 책은 시인 야로밀의 이야기로 포장한 쿤데라의 경험적 고백일 것이다. "그것은 공포의 시대일 뿐 아니라 처형자와 시인이 나란히 앉아 통치한 서정시의 시대이기도 했다!"(p311) 에서 그가 말하는 것처럼, 갑자기 쿤데라는 "시를 바라보는 전체적인 가치관이 갑자기 산산조각으로 무너지며 더 이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는"(서문, p9)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부정확성 속에서 그는 불가피하게 자해를 감당해야 했을 거이며 초현실주의 , 형태파괴, 난해 등으로 규정되는 이 소설을 썼을 것이라 여겨진다. 나는 이것이 무슨 비정상적인 징후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의심할 때 나타나는 어떤 진정성의 표지 같은 것 아닐까 여겨진다.

 

다시 돌아와보면, 이 소설은 시인 야로밀의 탄생과 죽음의 일련의 과정으로 장이 구성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쿤데라의 메타포에 대입하여 보면 서정시의 탄생과 죽음으로도 연결될 것이며 서정주의와 대비되는 정치 속의 전위적 시인의 탄생과도 연결될 것이다. 모성으로 충만한 야로밀은 위대한 상상력과 감정을 가진 재능있는 시인이다. 그런 서정성을 확보한 그가 사랑의 감정의 욕구가 공산주의라는 사회적 혁명 시기를 만나면서 서정성을 포기하며 시대의 처형자와 나란히 앉는 시인이 되어간다. 그런 그의 모습은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며 자비에르(제2부, 자비에르)라는 또다른 자아를 불러내는 것이다.

 

메타포(은유)로서의 자비에르는 결국 눈이 큰 그녀의 사랑을 뿌리치고 그녀를 배반한다. 이는 '그러나 창 너머의 세계가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만일 그 세계를 위해서 사랑스러운 여인을 버린다면, 그때는 배반한 사랑의 대가로 인해서 그 세계가 훨씬 더 가치있게 되리라.'(p108)는 쿤데라의 독백처럼 시의 서정성을 버리는 시인의 모습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당신은 아름다워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배반해야만 합니다."(p108)에서 나타나듯, 시인 야로밀의 서정시와의 결별과 혁명시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결국 시인 야로밀은 어떻게 되는가. 쿤데라는 서정성과 결별한 시인을 죽인다.(7부 시인의 죽음) 이 죽음의 과정에서 여종업원과의 사랑은 반전으로 마무리되며 모든 혁명가와 시인들이 떠다니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 때 시인의 분열의 상징인 자비에르가 소환되는데, 자비에르가 뻥 차버린 그 소녀가 곧 야로밀, 즉 서정성의 소멸로 인해 사라져버린 야로밀로 그려진다. 야로밀은 자비에르고 동시에 소녀인 것이다. 그런 야로밀이 죽었다.

 

<생은 다른 곳에>는 쿤데라만의 특별한 모험이고, 새로운 기교로 가득찬 문학이다. 독자는 서사적 흐름을 따라가다가도 무의식의 화폭에 담기기도 하고, 분열된 자아를 발견하기도 한다. 몽환적인 상황, 그리고 물과 불의 이미지로 꾸며 있는 작품을 보면 바슐라르의 이미지와 상상력의 시 세계도 그려진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을 틈타, 시인과 시의 의미를 최대한 음미할 수 있게 초현실적 세계를 만들어 놓고 독자를 초대한다.

 

그렇다면 독자로서의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마음껏 현실과 문학사적 일화를 버무린 그의 초현실적 세계에 발을 들여, 생은 다른 곳에 있다고 여기는 시인들의 모습과 창작하는 시인들의 존재를 마음껏 만끽하면 된다. 이번만큼은 시에서 허용되는(시적허용) 관념을 허용하면서, 서사구조에 당황하지 말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봤으면 한다.

 

 

 

"그래서 야로밀은 10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군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고, 그가 이모부에게 말을 하는 것은 10만 명이 단 한 명의 개인에게 이야기를 하는 셈이었다. '그건 폭동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그가 말했다.(p148)

 

"그러나 그의 시보다도 훨씬 소중한 무엇이, 그가 결코 소유했던 적이 없었고 진심으로 갈망하는 무엇이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자신의 남자다움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용기와 행동을 통해서만 그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만일 그 용기가 철저히 혼자여야 하고, 그의 여대생 친구를 포기하고, 그의 화가 친구와 심지어는 시까지도 포기하는 용기를 의미한다면-좋다. 그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말했다.(p175)

 

"그러나 기억하는 자는 반드시 증언을 해야 하니, 그것은 공포의 시대일 뿐 아니라 처형자와 시인이 나란히 앉아 통치한 서정시의 시대이기도 했다!(p311)

 

"나는 죽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불로 인하여 죽게 하라......(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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