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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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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너스바움은 <시적 정의>라는 책에서 문학의 존재이유와 문학이 법과 사회와 어떻게 만나야 되는가를 논했다. 법과 사회의 필수조건으로서 문학을 바라보며 사회 속에서 인간의 따뜻한 시선이 법에 담겨져있어야 함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따뜻한 법학자와 철학자의 이미지를 가진(나에게는) 그녀가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책으로 다시 다가왔을때 강렬한 호기심이 들었다. 그녀는 어떻게 혐오와 수치심을 대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더욱이 진은영 시인은 <눈먼 자들의 국가 -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에서 수치심을 이야기할 때 수치심의 근원적 존재에 관해 물었던 적이 있어 제목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너스바움은 우선 전제로 감정없는 법은 없다고 말한다. 법은 감정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분노,적의, 동정심은 다 법에 담겨져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부분이 혐오와 수치심과 같은 감정으로 무장하여 있는가.

 

너스바움은 이 두 감정이 현재 법에도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고, 이러한 감정은 적어도 법에서는 베재되어야 함을 말한다. 혐오에 담긴 핵심적 사고는 자신이 오염될 것이라고 여기는 생각이며, 혐오의 감정은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거부를 표현한다. 따라서 인간은 혐오라는 감정을 통해 위험하고 공적격인 제노포비아를 생산해 낸다. 즉 정상인을 간주하고 그 정상 범주를 넘어서는 것들에 대해 혐오라는 단어로 매도하여 제거해내는 양상, 여성혐오가 그렇고, 유대인 학살이 그렇고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러했다. 따라서 이러한 혐오라는 감정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그러므로 혐오가 법적 정치적 목적에 적합한 귀중한 반응이라는 결론을 도출해서는 안되고 인간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많은 반응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공적 행위의 지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수치심 역시 마찬가지다. 너스바움은 수치심은 완전무결한 상태의 지향이 무너져 내렸을 때 즉 자신이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말한다. 즉 수치심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노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치심은 법으로써 다루어지면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우리 모두는 좋은 것을 완전히 통제하려는 유아기의 요구가 결국 충족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 내면에 깊숙히 있음을 안다. 따라서 이런 불완전한 집단은 완전성을 노력하기 위해 안정을 찾는데 그 과정에서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별하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이 만약 법으로 들어온다면 동성애와 일탈자들의 부도덕함을 엄격한 잣대로 들이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통제하고 파괴하는데 사용하여 강자들만의 부당한 법과 논리로 확대 재생산된다.

 

결국 너스바움은 이러한 혐오와 수치심의 감정은 법에서 배제되어야 함을 말하고 자유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우리가 혐오와 수치심으로 사회를 편가르기 하고 강자의 위치에 서려고 하지 않는지, 잘못된 판단으로 인간성을 무너뜨리고 있지 않는지에 대해 검토해볼 때다.

 

덧붙임.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물론 솔직한 리뷰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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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언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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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식 레스토랑에 가면 으례 패턴이 있는데, 나는 그 패턴에 익숙하지 않아 곧잘 당황해한다. 메뉴를 보고 고르며 에피타이저를 먹고 메인 메뉴를 기다리는 과정이 나에게는 어색하다. 메뉴의 종류도 다양하고 언어도 현란해서 은근히 긴장한다. 그러면서 패턴을 꼭 따라야 교양있는 것인가라는 의미없는 반항심이 일기도 한다. 물론 요즘은 일반적인 식사를 끝내도 꼭 디저트를 챙겨먹어 할 말이 없긴하다. '식사를 하면 아이스크림이나 커피는 꼭 마셔야지!'

 

그런데 궁금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반항심이 정말 잘못된 것일까. 왜 일정한 패턴으로 서양음식을 우리는 먹는 것인가. 음식의 제목과 언어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 책은 이러한 음식에 대한 '왜'라는 질문이 가득차 있는 책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무심히 넘겼던, 갖가지 이름붙여진 음식과 일상적 관례가 되어 있는 패턴에 신비한 언어가 덧씌워짐을 말하고자 하는 책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언어로 말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전체적인 책의 구조는 식사의 순서에 따라 전개된다. 메뉴고르기부터 생선코스, 에피타이저, 메인 메뉴, 디저트에 관련한 순으로 전개된다. 음식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가 흥미를 끌긴 하지만 읽으면서 좀 삐딱해진다. 그 까닭은 우리 문화와 맞지 않는 서양 음식 일색으로 이야기소재에 낚인 느낌이다. 육류로스트나 앙트레, 칠면조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별로 흥미롭지 않다. 오히려 내가 지금 매일 먹는 고추장,된장 이야기, 각종 나물과 국 이야기등이 더 흥미가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영국의 피시앤드칩스가 무엇인지모르고 맛보았을 때도 관심도 없었으며 먹을 일이 없어서 더더욱 별로 알고 싶지 않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음식의 패턴과 유래 그리고 명칭등을 알아가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재미도 일정부분 담보한다,. 케찹은 발효생선에서 왔다거나 터키(칠면조)의 명칭이 포르투칼 인의 광신적 신비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거나 하는 점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음식의 전달 과정이 세계 정치 경제 흐름과 맞닿아 있고 그러하기에 음식을 통해 문명의 충돌과 그 양상을 다루어 볼 수가 있어 그리 확 눈에 들어왔던 책은 아니었으되, 버리기도 애매한 책이 아닐까 한다.

 

덧붙임.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물론 솔직한 리뷰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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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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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와 세미나를 엮은 기록이다. 강의록이기 때문에 완전한 문단구성이나 배열, 문장 구조를 기대할 수 없다. 그 대신 롤랑 바르트의 강의의 생생함이 묻어 난다.

 

이 책은 하이쿠,디아포랄로지, 은유와 욕망, 그리고 바르트의 모습 등 여러 주제가 뒤섞여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의 전반부는 하이쿠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세계적인 구조주의 언어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바르트가 매혹적으로 주목한 글쓰기의 본질적 모델이다. 롤랑 바르트는 초기에 하이쿠에 심취해있음을 나타내는데 특히 하이쿠의 현재 순간의 지시성과 짧은 순간 포착에서 글쓰기의 형식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하이쿠는 알다시피 일본의 즉시적 글쓰기 방법 중 하나인데 바르트는 이에 대해 '바로 가벼운 스침의 에로틱한 지대, 순간의 글쓰기, 절대적 글쓰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스침의 순간의 글쓰기에 대한 직관적 해석은 소설쓰기에 들뜬 바르트의 욕망을 보여준다.

 

바르트의 이 강의는 온전히 소설에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엄청난 분량의 이 책은 두 파트로 나누어서 설명하는데 하나는 '소설의 준비:삶에서 작품으로'와 다른하나는 '소설의 준비:의지로의 작품'으로 소설을 구성하는 요소들부터 쓰기에 집착하는 작가의 욕망, 그리고 문학의 본질과 소설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특히 바르트는 하이쿠와 더불어 푸루스트를 조망하는데, 아마도 푸룻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자극을 받은 듯하다. 프루스트의 기억으로 인한 쓰기와 그것을 통한 존재의 의미를 되살린다. 그렇지만 이런 기억으로 인한 쓰기는 바르트 스스로 한계를 느끼기에 현재의 현현한 본질을 써내는 순간의 글쓰기로서 하이쿠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메모하기'로 명명하는데, 즉 바르트는 하이쿠를 통해 메모하기로 변형하고 그것이 소설로 넘어가는 형식을 고민하는 듯 보인다.

 

바르트는 쓰기를 욕망이자 자아 실현을 위한 근본적 행위로 본다. 즉 쓰기를 통해 타인들로부터 인정받는 욕망과 연결되고 그러하기에 쓰기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가치있어지도록 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따라서 바르트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소설의 전반적인 과정을 이 책은 다룬다. 글쓰기의 기본적인 전개부터 글쓰기의 욕망, 작가의 고민과 작품의 산출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또한 수많은 작가와 작품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다룬다. 물론 강의록이기에 서두에서 말했듯, 완결한 문단이나 문장이 나타나지 않아 독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차치하고라도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는 바르트의 소설쓰기의 내밀한 욕망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기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

 

" 문제의 작품이 필연성의 감정을 끌어내는가, 그 작품이 우리를 회의주의에서 해방하는가, '왜 그렇지?, 왜 그렇지 않지?'입니다.(p44)

 

"실제로 (소설의) 창조적 요소는 기억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억의 변형입니다.(바슐라르의 "상상력은 이미지들을 해체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참조)(p48)

 

"하이쿠는 힘과 효울성의 극한으로서의 언어이자, 정말로 언어를 보상하고, 언어에 사례를 하는 것으로서의 담론입니다.(p79)

 

"하이쿠는 순간의 글쓰기(철학)입니다. 예컨대 순간에 대한 절대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죠.(p99)

 

"현재의 단편적인 메모하기(우리는 하이쿠를 그 모범적 형식으로 삼았습니다.)에서 어떻게 소설을 쓰는 계획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하이쿠로부터 무엇이 우리의 서구적 성찰로, 서구적 글쓰기 실천으로 이행될 수 있을까요?(p166)

 

덧붙임.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물론 솔직한 리뷰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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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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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명작들간의 혈연관계를 밝히는 미술 이야기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여기 두 장면이 있다. 첫 번째 장면과 두 번째 장면의 선생님과 학생의 대화를 살펴보자.

장면1) “여기 종이컵이 있어요. 이 종이컵이 무엇이라고 보이나요?” “우주선으로 보입니다.”

왜요?”

모르겠어요. 우주선으로 상상했어요.”

장면2) “여기 종이컵이 있어요. 이 종이컵이 무엇이라고 보이나요?” “우주선으로 보입니다.” “왜요?” “왜냐면요. 그것은 종이컵의 밑부분이 원형으로 우주선의 추진체와 닮았고, 추진에 필요한 제원은, 발사각도는, 수학공식을 적용해보면…….”

 

창의성이란 어느 날 문뜩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라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집중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장면1)은 아무 의미가 없는 말장난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지만 장면2)에서는 종이컵을 우주선으로 고안하는 창의성을 본다. 뉴턴은 문뜩 쉬다가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만유인력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 훅 등의 무수한 인물들의 연구에 영감을 받고 달의 궤도 운동을 생각하다가 지구 중력이 궤도 운동에 미칠 것이라 생각하며 만유인력을 발견했다. 창의성은 그 앞 시대의 끊임없는 유산으로 만들어진다.

 

모든 창작은 창작이 아니다. 명작이라고 표현되는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이 흘러 회화 방식이 바뀌어도 영향을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명작의 탄생은 불현 듯 떠오른 감성의 표현이 아니라 이전부터 내려온 작품에 대한 고뇌와 열정이 만들어낸 영감의 총체인 것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화가란 결국 무엇인가? 남들이 소장하고 있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자기도 갖고 싶어서 직접 그려 소장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시작은 그러한데 거기서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 책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는 서양 미술사의 창작물의 계보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이 책의 주제는 작품들의 계보를 확인하는 것, 다시 말해 수십 년 혹은 수 세기의 간격을 두고 세상에 나온 작품들 간의 혈연관계를 밝히는 것이다.(p7) 결국 미술사는 반복의 역사라는 것인데 그것을 세 편의 작품들로 상관관계를 증명한다.

 

예를 들면, 클로드 로랭의 [해질녘의 항구] 풍경화는 로랭을 숭상하는 윌리엄 터너의 [국회의사당의 화재]라는 인상적인 작품으로 이어졌으며, 터너의 이러한 실험정신은 곧 모네의 인상주의적 그림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모네는 [런던, 국회의사당, 안개를 뚫고 비치는 햇빛]을 그렸다. 또한 카라바조의 [카드 사기꾼]은 카라바조주의라는 유파의 형성을 불러왔으며 풍속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도는 르냉 형제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에 세잔은 르냉 형제의 작품에 감영을 받아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통해 사실주의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즉 로랭-터너-모네, 카라바조-르냉-세잔으로 이어지는 그 그림들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 세 작품(어떨 때는 여러 작품)을 등장시켜 서로의 작품의 연관관계를 밝히며 때로는 경외감의 표현으로, 또는 조롱의 표현으로, 때로는 창조의 표현으로, 또는 모방의 표현으로 위대한 화가들은 작품을 서로 받아들이고 경쟁하였다. 그러하기에 작품을 보다보면 그 작품 어디서 본 적있는 작품이야란 말이 수긍이 가며 생각이 확장을 가져온다.

 

무엇보다도 책을 따라가다 보면 많은 천재 화가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야, 마네를 만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마주하며, 마티스, 세잔, 피카소 등 셀 수 없는 많은 화가들을 한 곳에서 만나는 경험을 한다. 문외한이더라도, 아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을 마주 할 수 있어 문화적 경험을 향유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그 속 숨어있는 소소한 작품이야기가 마음속의 이야기의 갈증을 살살 풀어주는 것 같아 즐겁다.

 

반면에 그것이 역효과가 날 때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너무나 많은 작품들의 등장은 때론 이야기 전개에 혼란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고, 작품을 잘 모르는 나 같은 평범한 독자들에게는 작품의 구체적인 맥락과 그 의미를 간과한 채 겉핥기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온갖 고양이(p212)’ 관련 그림들처럼 세 작품의 혈연관계를 다루는 데 여러 작품이 난립해서 서로 우선순위를 가위바위보 같은 인위적으로 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천재적인 과학자들처럼, 문학가들처럼, 그림으로 표현하는 화가들 역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로 상관관계에 놓인다. 그리고 공감과 존경, 경멸과 해체를 통해 화가들은 자신의 의식 세계를 창조성 있는 작품으로 이끈다. 놀라운 미술 작품은 끊임없는 주제의식에 대한 고민과 열정, 이전 작품의 모방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은 그러한 일련의 의식의 흐름을 다룬다. 무엇보다도 200여점의 작품, 45개 챕터의 혈연관계를 다루는 장들을 읽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술 작품을 보는 초보인 나 같은 사람들에게 적어도 작품의 맥락을 보는 눈을 갖게 해주니 쉽게 읽고 버릴 책은 아니다.

 

덧붙임.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물론 솔직한 리뷰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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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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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시대를 위한 한바탕 반항의 흔적 『호밀밭의 파수꾼』

​대학 처음 발을 딛고 비트를 봤다. 정우성의 멋진 눈빛은 둘째치고, 오토바이 위에서 정우성이 두 눈을 감고 양팔을 벌리고 질주하던 모습에 한동안 먹먹했다. 그 시기의 불안과 방황, 무엇인가 주변인이 된 것 같은 내 모습이 영화에 깊게 덧칠해져였을 것이다. 속도감이 최고조로 다다르지만 결국 잡을 수 없는 그 무엇. 그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외롭다고. 아프다고. 그때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그 영화를 반복해 보며 위안을 얻었다. 시간은 상황을 해결해준다. 시간이 흐르니, 상황이 변했고 생각이 변했으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어른이 된 나는 그 반항의 시간의 흔적을 붙잡지 않았다. ​

 

아마 그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으면 어떠했을까. 비트 영화는 이 작품의 대체되지 않았을까. 지금에서야 읽어버린 나는 '홀든 콜필드'의 반항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동화되지 못한다. 그 반항을 존중하지만, 어른들의 거짓과 속물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나는, 홀든 콜필드를 그저 바라보았다. 순수함이 없어진 지금의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라 한다면 힘든 일이라고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런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p230)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왜 홀든의 마지막 장면이 남아있는 것일까. 순수함이 없어져 버렸다고 애써 말하지만 그 순수함을 갈망하는 것일까. 변해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누군가의 만남과 헤어짐을 쉽게 받아들이는 지금의 나를 속으로는 거짓과 위선으로 만들어진 사람으로 여겨버리기 때문일까.    

​갑자기 비가 엄청나게 퍼붓기 시작했다. 누가 하늘에서 물통으로 물을 붓기라도 하는 듯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전부 비를 피하기 위해 회전 목마의 지붕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참 동안 난 그냥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완전히 젖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목 근처와 팬티가 많이 젖었다. 그나마 사냥 모자가 도움이 되긴 했지만, 흠뻑 젖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피비가 목마를 타고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며, 불현듯 난 행복함을 느꼈으므로. 너무 행복해서 큰소리를 마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피비가 파란 코트를 입고 회전목마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정말이다. 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p278)

<호밀밭의 파수꾼>을 지금에서야 읽어버린 나는, 나이가 너무 들어서 홀든의 일련의 과정을 치기로 치부하면서도 한편으로 또 다른 생각이 드는 건, 순수한 그 무엇에 대한 갈망이 여전히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약 그때, 홀든의 나이였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더욱 드는 건, 적어도 내가 힘이 들고 사회의 거짓과 가식에 절망했을 때 홀든이 친구가 되었을 터라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은둔의 작가로 유명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매카시 열풍이 불던 그 1960년대 미국의 일방통행식의 사고, 번영과 호황을 누리지만 그  이면의 성찰이 부족했던 사회, 그리고 존 레넌의 암살범 마크 채프먼이 암살 직전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이 책은 많은 비하인드스토리​가 가득 차있다. 문학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간과한 채 읽어버리면 텍스트의 구조를 분석하고 서정적인 관념으로만 빠질 수 있다. 특히 이 책도 그럴 수도 있다. 이 책이 지루하다는 사람들! 그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라. '홀든 콜필드'라는 그 시대의 질풍노도의 젊은이를 만날 수 있으리라.

 

 

"내가 그 애가 죽던 날 밤 차고로 숨어들어, 유리창을 전부 주먹으로 깨부쉈으니까.(p58)

"그렇지만 이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10만 번을 보더라도 에스키모는 여전히 물고기 두 마를 낚은 채 계속 낚시를 하고 있을 것이고, 새는 여전히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중략)...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게 있다면 우리들일 것이다. 나이를 더 먹는다거나 그래서는 아니다. 정확하게 그건 아니다. 그저 우리는 늘 변해간다. 이번에는 코드를 입고 왔다든지, 지난번에 왔을 때 짝꿍이었던 아이가 홍역에 걸려 다른 여자아이와 짝이 되어 있다든지 하는 것처럼. 아니면 에이글팅거 선생님 대신 다른 선생님이 아이들을 인솔하고 있다든지, 엄마하고 아빠가 욕실에서 심하게 싸우는 소리를 들은 다음이라든지, 아니면 길가의 웅덩이에 떠 있는 기름 무지개를 보고 왔다든지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늘 뭔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설명하고 싶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략)... 예전에 내가 보았던 것들을 그 애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그리고 매번 그걸 볼 때마다 동생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지. 이런 생각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것들은 계속 그 자리에 두어야만 한다. 저렇게 유리 진열장 속에 가만히 넣어두어야만 한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p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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