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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 성경 해석의 오류와 신앙의 일탈
강만원 지음 / 창해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주요 내용 정리
프롤로그 / 한국 교회는 왜 외면당하는가?
○ p.14
지금처럼 목사가 교회 운영의 전권을 장악하는 한, 세상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외면하는 주된 원인, 이를테면 ‘재정비리’나 교회성장주의‘, '교회지도자의 부정‘은 목사의 책임일 수 밖에 없다. 담임목사는 마치 사기업의 주인인양 교회의 재정을 좌지우지하고, 인사와 행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한을 독점하며 사실상 교회운영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세상의 신뢰를 잃게 된 요인은 일차적으로 목사들의 책임이라는 날선 비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p.19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말이나 생각으로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교인들 앞에서 공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교인들에게 죄를 용서받는 것이 회개의 성경적 기준이다. 비리목사들의 치명적 문제는 죄에서 돌이켜 온전히 회개치 않는 것이며, 이는 신학의 빈곤이 아니라 영적 무지에 따른 말씀의 부재이자 왜곡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
1장 목사에 대하여
○ p.57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다윗시대처럼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시기 때문에 비리목사들의 타락과 불의에 침묵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목사는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종이 아니라 종교절차에 따라 사람들이 세운 ‘사역자’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역을 맡기기 위해 세운 직분이 목사라면, 사역자를 세운 사람들이 목사의 비리를 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자신들이 선택한 사역자의 불의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며 침묵하는 것은 기껏 권리를 행사하고 책임은 회피하는 비겁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 p.67~8
예수가 베드로에게 “내가 네 발을 씻어 주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의 발을 씻어 주는 비천한 종으로 살기를 거부한다면 너는 결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마지막 순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가 오늘날 사역자들에게, 그리고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예수를 따르는 자는 기꺼이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매야 하며, 주의 계명을 지키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아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장 교회에 대하여
○ p.93~4
신약시대의 예배일은 율법주의의 종교적 숭배가 아니라, 주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계명을 마음에 새기는 결단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은 ‘새 계명’을 통해 밝힌 것처럼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오직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주일의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기도와 찬송, 예배의 중요성을 무시하려는 것 또한 아니다. 주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의 다양한 물질적 요구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일주일에 하루, 온전히 구별되는 하루는 영성을 지키기 위해 매우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3장 헌금에 대하여
○ p.102
신약시대에 ‘십일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핵심적인 율법으로 존재하던 십일조가 빈민구제를 위한 법과 제도로서 분명한 가치를 지니므로,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십일조의 정신까지 전면폐지를 주장할 수는 없다. 다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것처럼 새로운 시대에 맞춰 내용과 형식을 정비하되, 그 정신을 바르게 계승해 본래의 가치를 지니도록 해야 한다. 이를테면,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맞춰 ‘연보’나 ‘구제헌금’이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p.115
교회는 가난한 과부에게 ‘생활비의 전부’인 두 렙돈을 바치라고 말하기 전에, 곳간을 열어 가난한 형제들에게 나눔을 베풀어야 한다. 헌금은 목사를 비롯한 소수의 교회지도자들이 멋대로 사용할 수 있는 ‘눈먼 돈’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 복음의 ‘밀알’이 되고 ‘겨자씨’가 되어야 한다.
4장 방언과 은사에 대하여
○ p.134~5
방언에 제한해서 말한다면, 원래 초대교회의 방언은 요즘처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외국어로서, 말하는 사람들이 ‘다른 언어들(글로사)’로 말하되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언어(디알렉토)’로 알아듣는다. 따라서 방언은 소통이 가능하며,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한 언어능력’을 의미한다.
○ p.137~
방언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알맞은 다른 은사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적 둔감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은사를 깨닫지 못할 수는 있다. 하지만 ‘만인제사장’시대에 각각의 그리스도인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영적 권위를 지니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지체로서 각각의 지체에 합당한 기능, 즉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신앙이 부족해서 방언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귀중한 은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의 갈등을 느끼는 것이다. 방언은 자신이나 남에게 ‘자기 의’를 과시하기 위한 은사가 아니다. 심리적 효과가 있다는 구실로 방언의 은사를 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알아차려 아름답게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5장 기복신앙에 대하여
○ p.155
육신의 눈으로는 고난의 때가 암흑기이지만, 영의 눈으로는 찬란한 승리를 위대한 태동의 시기일 수 있다. 성경에서 일컫어지는 형통은 이처럼 세상의 주술적 성공이 아니라 자신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자에게 고난은 진정한 형통을 위한 시험의 때이며, 연단의 때이며, 준비의 때이다. 지금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주의 손을 꼭 붙들길 바란다. 주의 손을 꼭 잡고 동행하는 순간, 당신이 겪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형통의 아름다운 전주일 수 있다.
6장 비판에 대하여
○ p.169
교회는 교권을 장악한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교회를 사랑하는 것 또한 그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외형적으로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며, 원형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무리로 이른바 ‘성도’이다. 한국교회의 새로운 성장과 부흥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 주의 가르침을 오롯이 깨달아야 한다. 예수가 맡기신 거룩한 사명을 지키고 행하기 위해, 교회의 타락과 불의를 당당히 비판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 p.174
종교생활을 성실히 수행하거나 목사나 중직들의 지시에 다소곳이 복종하는 사람들을 ‘온순한 교인’이라 말할 수 있다. 교회에서는 온순한 교인들을 온유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실한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교회의 요구에 잘 따르고, 질서에 순응하며, 정해진 규범에 복종하는 ‘순둥이’ 교인들이 주께 순종하는 온유한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온유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비판하지 말라’는 구절의 왜곡된 해석과 더불어, 교인들을 ‘순한 양’처럼 길들이는 유용한 빌미가 되었다.
7장 회개와 용서에 대하여
○ p.182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아주 간단하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상처를 입은 형제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고 화목해진 다음 하나님께 속죄하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준엄한 명령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사보다 자비를’, 그리고 화목을 원하시는 이유를 모르겠는가? 나로 인해 상처를 입은 상대방의 아픔을 외면한 채 ‘나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는 것은 종교의식을 빙자한 책임회피일 뿐, 진정한 회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회개의 뚜렷한 증거를 먼저 보이라고 질책했다. 진정한 회개에는 반드시 변화의 열매가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회개를 빙자한 겉치레 행동에는 회개의 진정한 증거가 아니라 음험한 거짓이 있을 뿐이다.
○ p.191~2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며, 죄의 유혹을 물리쳐 마침내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는 마음먹기에 달린 듯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처절한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죄의 두터운 타성에 갇힌 ‘자아’를 깨뜨리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내면의 변화’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남’이라는 고통스러운 산고를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거룩한 고통, 그것은 회개로 말미암아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며 구원의 영원한 축복을 위한 순간의 고통이다. 탕자를 맞이하며 뛸 듯이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회개한 죄인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 벌이어 반기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 p.202~3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죄도 용서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다만, 성령을 훼방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죄로 말미암아 마음의 고통을 겪는 자가 그 사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고 믿음으로,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회개이다. 죄책감이나 죄의식으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은 도덕적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무지이며, 사탄의 술수에 넘어가는 영적 패배라고 할 수 있다. 구원받을 수 있는 자는 ‘죄 없는 의인’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반드시 기억하자.
8장 사랑에 대하여
○ p.212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종교적 의식에 몰입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방의 ‘우상 숭배’ 같은 종교의식이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실천은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오롯이 전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의 본뜻은 종교의식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이 존귀하게 지으신 인간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면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라는 조언이다.
○ p.232
잔뜩 웅크린 자신을 외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뿌리 깊은 열등감을 고이
쓰다듬고, 처절한 슬픔을 따뜻하게 위로하며, 애써 상처를 치유하고, 담대히 죄를 용서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에 갇혀 남 몰래 눈물 흘리는 ‘나’를 긍휼히 여겨야 한다.
외면하고픈 자신의 모습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예수가 말씀하신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 세상이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제자로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사랑이며 순종이다.
9장 시험에 대하여
○ p.257
예수는 우리에게 주기도문과 겟세마네의 기도라는 두 가지의 기도의 원형을 가르치고, 기도의 본을 보이셨다. 기도가 없는 신앙은 영혼이 죽은 신앙이다.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되,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탐욕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맡기는 순종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10장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 p.277~8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왜 “돈주머니를 차지 말고, 옷도 부 벌 가지지 말고, 지팡이나 달랑 하나 들고 가라.”고 매몰차게 말씀하셨을까? 가난한 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가난한 자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마땅히 가난해야 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 또한 ‘본’을 보이기 위해 인간의 비천한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가난하게 사신 것이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어찌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말할 수 있으며,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자를 섬기는 것이 바로 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
에필로그
○ p.288
아르케 처치의 형제들은 ‘말씀’을 올곧게 배우고 바르게 전해야 한다. 말씀이 왜곡이 신앙의 왜곡과 신앙의 타락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종교개혁의 외침은 신앙의 근본인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말 아니던가? 그리스도인은 영적 군사이며, 영적 전쟁에서는 오직 말씀이 ‘승리의 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