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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 서울성곽길 따라 6백 년 역사 속으로
유영호 지음 / 창해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참 독특한 역사문화 기행을 다룬 책이다. 보통의 역사기행문이라면 성곽을 따라 그 행로와 감상 위주로 적을 텐데, 이 책은 한양도성의 역사를 다루는 한편 다시 더 들어가 성곽 주변 내, 외곽을 누빈다. 그리고 우리가 배운 역사교과서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성곽과 마을 사람들이 당한 아픈 상처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젖힌다.
특히 평소 관심이 있었던 길상사에 대한 이야기는 진한 사랑의 느낌이 있어 감동적이었다. 세상의 영광을 누렸지만 상실의 허함을 달래기 위해 문화예술과 종교에 귀의하는 장면을 다루고 있어 흥미로웠다. 『영한은 “천억 재산이 어찌 백석의 시 한 줄에 비할 수 있으랴”는 말로 백석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을 전했다.』움켜 잡으려만 하는 요즘 세상에서 당대에 가진 것 모두 놓아버리는 해탈의 순간을 본 것만으로 이 책은 나에게 생각하지 못한 선물이었다.
[감명 깊은 구절]
○ p.7 머리말
내가 맨 처음 서울성곽 길을 따라 걸을 때는 ‘인구 1천만 대도시에 이렇게 아름다운 산과 숲이 있었나. 싶을 만큼 놀라웠다. 인왕산을 넘고 백악을 넘을 때는 북한산 등반이 부럽지 않을 만큼 확 트인 서울 전경에 감탄하며 땀 흘린 보람까지 느꼈다. 내 나라 수도 서울이 세계 대도시 그 어느 곳에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곳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어릴 적 수없이 들어왔던 ‘내나라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나이를 더할수록 깊이 와 닿는다.
○ p.21~2 프롤로그 발췌 정리
한양도성에는 사대문과 사소문이 설치되어 있다. 유교를 중시하는 조선시대는 그 이름 하나하나에도 모두 그에 맞는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며 지었다. ~~ 한나라 동중서는 오행설에 기초하여 맹자의 사덕에 신信을 추가하였다. 이리하여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오상五常이라 불렸고 유가에서는 이 다섯 가지를 두고 ‘인간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성품’이라 하였다. 즉 이 오상이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경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 우리 선조들은 도성을 지으면서도 이 오상을 염두에 두고 건설하였다. 따라서 도성 사대문에 ‘인의예지’를 넣고 나머지 ‘신’은 도성의 중심인 보신각에 넣어 한양도성이야말로 짐승이 아닌 인간이 살아가는 곳, 즉 인의예지신을 모두 갖춘 곳으로 규정하였다.
○ p.69
조선시대에는 감옥을 전옥서典獄署라 불렀는데, 이곳은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에 있는 영풍문고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건너 편 1번 출구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일대는 의금부가 있던 자리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조상들은 재판이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해서 이곳의 동명을 ‘공평동’이라 지었다. 게다가 이것으로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바로 그 윗동네는 재판과정에서 그러한 공정성을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견지동’이라 지었다.
○ p.78
조선의 궁궐은 맹목적으로 ≪주례≫의 <고공기>에 따라 건설된 것이 아니라 그 원칙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우리의 현실에 맞게 변화시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성곽의 모양에서도 나타난다. ≪주례≫에서 성곽은 원칙적으로 네모나 원을 지향하지만 조선의 성곽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조선의 성곽은 산을 기준으로 분지에 만드는 것이 원칙인데, 중국은 평지에 성곽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 조선과 크게 다르다. 그 유명한 중국의 자금성을 보면 평지에 네모반듯하게 성을 쌓고, 그 뒤에 작은 인공산을 건설해 놓았다. 이처럼 같은 유교문화권 속에 있으면서도 조선은 자신의 환경과 조건에 맞는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성곽축조의 관념을 갖고 있었다.
○ p.119
안평대군이 살아있는 때는 현진건의 집터도 역시 무계정사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500년 전 안평대군의 무릉도원에 현진건이 찾아온 꼴이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떠난 현진건, 그리고 자기 형에게 목숨을 빼앗긴 안평대군이 저승에서 만나 함께 조선의 문학을 논하며 살고 있으리라는 즐거운 사상을 해본다.
○ p.164~5
해방이 되자 백석은 북으로 돌아왔고, 그 새 영한은 서울에 터를 잡고 요정을 열어서 큰돈을 벌었다. 이후 영한은 대원각을 열어 요정정치 시대를 대표하는 장소의 주인이 되었다.
~~ 영한은 살아생전 백석의 생일이 돌아오면 그날만큼은 곡기를 끊고 방에서 불경을 외며 그를 기렸다고 한다. 또한 1997년 2억 원을 쾌척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여 문학도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맺힌 사랑을 저승에서라고 잇고자 영한은 법정스님을 찾아간다. 자신이 힘겹게 이어간 대원각을 부처님 앞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무소유의 삶을 살아오신 법정스님은 이를 받지 않았고, 결국 법정스님이 머무는 암자의 본사인 송광사에 기증 되었다. 당시 시가로 1천억 원이 넘는 규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영한은 “천억 재산이 어찌 백석의 시 한 줄에 비할 수 있으랴”는 말로 백석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을 전했다. 참고로 길상사라는 명칭은 법정스님이 영한에게 선물한 ‘길상화 보상’이라는 법명에서 따온 것이다.
○ p.173~4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 문화재 4점을 비롯한 중요 문화재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은 실로 엄청난 가치를 가진 민족문화의 보고다. 이런 대단한 장소에 간다는 설렘을 안고 발걸음을 내딛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실망하고 만다. 그러나 시설이나 장비 등 외형이 아닌 간송 전형필의 숭고한 민족애가 흐르는 공간임을 상기한다면 간송미술관이 국내 최고의 미술관임에 틀림없다.
○ p.43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이 돈의문을 서대문이라 칭하며 새로운 시설이나 지배기관이 들어서거나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족족 그들의 편의대로 서대문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면서 이러한 용법은 더욱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서대문구, 서대문역, 서대문경찰서, 서대문형무소 등 아직도 모든 것이 ‘서대문’이다. 심지어 경인선의 출발지였던 정거장까지 모두가 다 서대문으로 표기되고 그렇게 불리고 있다. 일제의 잔재가 지금까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 p.44 1943년 일제는 행정효율화를 위해 구제區制를 실시하며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남촌이 조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중구中區라고 명명하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중구의 핵심이었던 혼마치本町는 충무로로 바뀌었는데 지역구의 명칭은 여전히 중구이다. 지금이라도 남대문구나 남산구 정도로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 p.46~7 발췌 정리 최고의 친일파 가운데 또 한명이 김구를 찾아 이곳 경교장에 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바로 조선의 천재로 불리던 소설가 이광수이다. 그는 김구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정리해둔 일지를 자신이 편집하여 책으로 내보고 싶으니 이를 허락해달라고 김구에게 부탁하였다. ~~ ≪백범일지≫는 ‘저자의 말’ ‘상권-중국편’ ‘하권-조선편’ ‘나의 소원’ 등 총 4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중 `저자의 말‘과 ’나의 소원‘ 부분이 이광수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 그리고 김구는 이렇게 이광수에 의해 윤색된 자신의 글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대로 출판하도록 했을까? 우리를 무척 곤혹스럽게 하는 부분이다.
○ p.64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신문>도 논란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독립의 대상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에 국한된 것이다. 그랬기에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독립문은 일제의 식민지배하에서도 ‘독립’이란 문패를 당당히 걸고도 굳건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것은 <독립신문> 논설을 보면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그곳에 실린 논설 중에는 친일 논조를 담은 사설이 부지기수다.
○ p.82~3 무학대사가 입적한 후에 는 지금의 남산(목멱산)에 무학대사를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이를 국사당이라 불렀다. 이렇듯 국사당은 본래 남산 정상에 있었는데 ~~ 어찌하여 ~~ 인왕산 쪽 성 밖으로 옮긴 것일까? ~~ 국사당의 자리이동 또한 일본의 식민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1925년 남산의 조선신궁을 건립하며 그 위에 있던 국사당을 이곳 인왕산 기슭으로 이전시킨 것이다. 일본 귀신 위에 조선 귀신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야말로 나라를 잃으니 우리 민족의 귀한 조상까지 천대받는 형국이 되었다.
○ p.149~150 조선의 한양도성 내 축선은 나름대로 상당히 치밀하게 기획된 설계로 정丁자형 길이다. 화마가 길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축선을 꺾어서 설계한 것이다. 그러난 이러한 한양의 축선은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파괴 및 변형되고 말았다. 특히 일제는 축선을 변경시키고 지맥을 끊는 일에 열중했다. 일제는 먼저 조선이 만들어 놓은 정丁자형 축선을 일一자형 축선으로 바꿔버렸다. 광화문 사거리의 황토마루도 깎아 없애고, 그 동안 관악의 화마를 막기 위해 틀어놓았던 주작대로를 일직선으로 변경시켰다. 이로써 경복궁에서 서울역까지 쭉 뻗은 현재의 세종대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 이 길을 열면서 경운궁의 대한문 쪽이 잘려났고 이름조차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길을 태평로라 칭했다.
○ p.228 오간수문 바로 옆에 있었던 이 일대는 본래 조선시대 치안을 담당하던 하도감(현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과 군사훈련을 담당하던 훈련원(현 국립중앙의료원)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1925년 일제는 내선일체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의 동궁, 즉 훗날 일본의 왕이 되는 히로히토의 결혼(1924) 기념사업의 경성운동장을 건설하였다. 당시로서는 2만 5,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규모의 운동장이었다. 그런 이곳에서 각종 근대스포츠가 시작되었다.
○ p.252 이 현재 신라호텔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호텔이며, 2004년 일본의 자위대 창설 50주년 행사를 개최한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2011년 어느 한 여성이 한복을 입고 신라호텔 레스토랑을 찾았다가 미리 예약한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출입이 거부되어 논란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런 황당한 사건도 신라호텔 건설의 역사를 보면 일면 수긍이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 p.274 이곳 조선통감 관저에서 과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현재 이것 표석에는 신영복 교수의 글씨로 ‘일제침략기 통감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라고 쓰여 있다. 더욱이 이 때 이완용이 들고 간 황제 칙유에는 순종의 서명도 없었고 제한제국 국세 날인도 없는 등 최소한의 인준 조건조차 갖추지 않았다. 불법적인 식민조약이 맺어졌다는 증거이다. 그야말로 5천년 우리 조국이 한순간에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이 바로 이곳에서 자행된 것이다.
○ p.282~3 남산 한옥마을은 조선시대 정원과 전각들로 꾸며져 있으며, 우리의 전통적인 가옥구조를 보여 주기 위하여 서울에 산재해 있던 전통한옥 다섯 채를 옮겨놓았다. 그런데 옮겨진 다섯 채의 가옥 가운데 세 채는 친일파의 가옥이라 아직도 일제강점기를 못 벗어난 느낌이다. 예로부터 ‘나라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친일파들이 이렇게 좋은 가옥에서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산 것을 보면 조선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 p.291 1907년 일본 왕세자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왕세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리고 숭례문 옆으로 입성하였다. 이렇게 성곽을 헌 자리에는 도로와 전차도로를 만들어 숭례문과 성곽의 연결을 영구히 끊어버렸다.
○ p.299 1895년 갑오개혁을 추진하면서 육의전의 금난전권조차 폐지하여 자본주의 물결에 호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자본주의 이행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사대주의자들과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왜곡, 파탄되고 말았다. 일제의 조선침략으로 남산 일대에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 거주하였는데, 그들에 의해 칠패는 남대문시장으로 크게 성장하지만 대신 일본인을 위한 시장으로 왜곡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종로 일대의 상권은 일제의 편향적 개발정책에 따라 점차 기울어져 갔다. 일제의 시장편성에 대항하여 이현시장은 조선상인들이 새롭게 광산시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제국주의 자본의 거대한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조선이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남촌과 조선인들이 주로 사는 북촌은 확연히 차별되고 말았다.
○ p.302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에 이르면 태평양전쟁과 함께 서울은 대동아공영권의 거점도시가 되었다. 신용산 일대(현 미군기지)는 조선군사령부 등 일본군 병영이 차지하였고, 용산역 일대는 철도국을 필두로 여러 철도기관들이 들어섰다. 또한 영등포는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경성 인근의 최대공업단지로 부상하였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 서울의 공간적 확장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와 발을 맞추며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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