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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들의 모국어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9월
평점 :
술과 안주.
술꾼이라 자부하는 작가의 음식들은 과연 안주로 가능한 것들이 많구나.
소주로 키운 입맛이라는 작가의 말이 딱 어울린다.
요리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이미 꽤 근사한 손맛이 연상되는데,
계란말이라도 당장 둘둘 말아 먹고 싶은 기분이 된다.
이제껏 무척 좋았던 권여선 작가의 글들엔 '술'이 존재했었는데, 술을 의도적으로 배제했을 때 조금 감흥이 떨어졌었던 기억을 보면 확실히 '술'의 작가랄까.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고 있고,
이전의 술꾼? 시절에도 딱히 술이 좋았던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부러운 술과의 궁합이다.
맛있게 한 잔, 들이키는 기분이 가끔 필요한데 그러질 못해서..
대신 글로 영상으로 그 기분을 대리 경험하고 있다. 그 점이 조금 아쉽다.
어쨌든 어서 돌아오세요 주류!!! 문학의 세계로. 작가님!
- 다만 내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혼자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 여자를 향해 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들은 주로 순댓국집 단골인 늙은 남자들의 것이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자기들은 해도 되지만 여자들이 하면 뭔가 수상쩍다는 그 불평등의 시선은 어쩌면 '여자들이 이 맛과 이 재미를 알면 큰일인데'하는 귀여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반세기 가깝게 입맛을 키우고 넓혀온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 - 26
- 첫 단식 이후로 나는 몇 년에 한 번씩은 단식을 한다. 단식을 하면서 내 속에 있는 오래된 서랍을 열어 이것저것 하나씩 꺼내 들여다본다. 내가 살아온 과거들을 차근차근 짚어보고, 지금 맺고 있는 관계들을 곰곰이 따져본다. 그러다 문득 달걀을 푼 라면이 먹고 싶어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행복한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면 그 꿈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과오를 떠올리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내 곁을 떠난 사람들 생각에 슬퍼하기도 한다. 열무김치에 고추장 넣고 맵게 비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극히 사소한 이유로 화가가 되지 못한 것에 서운해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따위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기도 한다. 나는 이 모든 감정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내 속에 웅크린 채 언젠가는 내가 한 번 뒤돌아 보아주고 쓰다듬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고아처럼 어리고 상처 입은 감정들이다. 내가 그렇게 해준 뒤에야 그것들은 비로소 조용히 잠이 든다. - 68
- 공부와 음주의 공통점이 있다면 미리미리 준비해야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 118
- 나는 사람들을 가장 소박한 기쁨으로 결합시키는 요소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놓고 둘러앉았을 때의 잔잔한 흥분과 쾌감, 서로 먹기를 권하는 몸집을 할 때의 활기찬 연대감, 음식을 맛보고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의 무한한 희열. 나는 그보다 아름다운 광경과 그보다 따뜻한 공감은 상상할 수 없다. - 170
- 집에서 해 먹는 게 집밥이라면, 집집마다 그 집 부엌칼을 쥔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그게 죄다 소박하면서 맛깔날 수 있단 말인가. 집밥이 무조건 맛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옳지는 않다. - 183
2024. sep.
#술꾼들의모국어 #권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