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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
허연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평점 :
단상들로 쓰인 산문.
허무주의자의 건조한 시선이 느껴지는데, 사제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냉소적인 무신론자 같은 아이러니한 사제가 되었을 것만 같다.
빗나가고 싶었지만, 끝내 현실에서 직시하는 법을 택한 시인이 된 것일까.
짧은 글들의 묶음이라 시간을 오래 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책을 덮으며 나도 더불어 조금 더 허무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 나는 노동에 투여하는 시간 이외의 시간을 최대한 내 식대로 살았다. 내 방식대로 세상을 읽었고, 즐겼으며, 사랑을 했고, 우정을 지켰고, 나누는 삶을 위해 애썼고, 자주 아팠으며, 때로는 분노를 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지금의 내가 되어 있었다. - 9
- 실패한 생이 오히려 밀도가 더 높듯
쇠락한 바다가 더 가슴에 깊게 남는다.
바다는 망했어도 여전히 바다다
자신감 넘치던 빛나는 시간들 모두 뒤로하고
누구라 할 것 없이 결국 평범하고 초라해지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바다다.
보석 같은 푸른 파도와
재잘거리는 유희가 없어서 더 바다 같은 바다
모든 것 내려놓고 평민이 되어 버린 바다
그 서해 바다에 다시 가고 싶다.- 68
- 생은 숙연한 벌이다.
인생에 환희는 없다.
정해진 약속도 없다.
그냥 묵묵히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아주 가끔 뜻밖의 일을 겪는 것일 뿐. - 83
- 우리는 타인의 아픔을 존중해야 한다. 타인의 아픔을 분류하거나 그 아픔에 대해 무게를 가늠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최선을 다해 아프고 있다. 우리가 타인의 아픔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다. - 85
- 세상엔 어둠에 기대어 존재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둠이 고마웠다. - 97
- 나는 고통받는 삶의 형식으로 시를 택했다. 고통을 자처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시는 내게 밥도 돈도 직업도 계급도 환희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한참을 도망치다가 문득 돌아보면 시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섬뜩하게 날 지켜보던 영물. 그것이 시였다. - 120
- 결국 우리는 이토록 혼자여서 아찔하고 아름답다. - 182
- 신념이니 의리니 하는 것들은 허세다.
인간은 또 얼마나 상황일 뿐인가.
상황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 243
- 질문은 근본적이어야 한다. 왜 사는지, 공동체란 무엇인지, 예술은 왜 필요한지, 왜 권력은 선해야 하는지. 뭐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의 답을 고민하는 사회가 훨씬 두껍고 단단하다. - 261
- 불온한 시를 위하여 살았다.
빗나가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을 증거하고 싶었다.
시를 만나는 일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세상과 친해지는 일이라고 믿었다. - 294
2024. jun.
#너에게시시한기분은없다 #허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