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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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권의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했다 중도 포기한 내용이다.

순종만을 강요받으며 눈치 보는 자세로만 살아온 붉은 머리의 소녀. 

어느 날 학교로 찾아온 신비스러운 외모의 남자에 의해 이세계로 납치?를 허락?하며 시작되는 이야기.

초반의 소극적인 주인공의 모습이 딱히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애니메이션으로의 시도는 실패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요코의 고난이 어디까지 될지 모르겠는 암담한 와중에 등장한 반수 라쿠슌은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 게다가 귀엽.....
차별받는 반수의 삶이지만 긍정적이고 넘치는 호기심과 지적인 모습은 새로운 왕의 동행으로 아주 적절하다.
물론 안국으로의 동행은 라쿠슌의 높은 학구 욕망도 충족시키기도 하고...

다소 뒤늦게 경국의 새로운 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헛되지 않은 수련의 시간을 보낸 경왕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 "참으로 고집이 세십니다."
내뱉듯이 말하고는 느닷없이 무릎을 꿇었다. 반응할 새도 주지 않고 요코의 발을 잡았다.
"어전에서 떠나지 않고, 충성을 맹세할 것을 서약한다."
빠르게 말하자마자 요코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허락한다고 하십시오."
"뭐야?"
"목숨이 아깝지 않으십니까? 허락한다고 말씀하십시오."
거친 말에 기가 죽은 요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 - 36

- 날이 저무니까 검을 쥐고 일어난다. 적이 오니까 싸운다. 아침이 오니까 잠잘 곳을 찾아 잔다. 그것만이 계속된다. - 242

- "이 주변에서 반수는 나뿐이야. 주상은 나쁜 왕이 아니지만 좋고 싫은 것에 따라 차별이 다소 심한 편이야. 해객에 대해서도 엄격하고 반수에 대해서도 냉정하지."
말하고 나서 수염을 튕겼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이 일대에서 가장 머리가 좋아."
요코는 이런 말을 하는 라쿠슌의 의도를 헤아릴 수 없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영리하고 재치가 있고 마음씨도 좋아."
요코는 살짝 웃었다.
"......그렇군."
"그래도 나는 한 사람 몫을 하지 못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반푼이지. 절반만 인간이니까. 이 모습으로 태어날 때 그렇게 결정되어버렸어. 하지만 이건 내 탓이 아니야."
요코는 살짝 끄덕였다. 말하려는 바는 막연히 알았지만 그래도 경계심이 풀리지 않았다.
"해객도 그렇지. 그러니까 해객이 해객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 326

- 그렇게 굳은 목소리로 말한 라쿠슌은 요코를 쳐다보았다. 지그시 바라보며 수염을 맥없이 실룩거린다.
"요코는 먼 사람이었구나......"
"나는......"
"사실이라면 나 같은 신분이 말을 걸 수 있는 분이 아니야. 더는 요코라고 이름을 부를 수도 없겠어,"
(...)
"나는."
지독한 분노로 목소리가 떨렸다.
"나일 뿐이야. 한 번도 내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어. 왕이든 해객이든 그런 건 나라는 존재와는 관계없어. 내가 라쿠슌과 여기까지 걸어온 거야."
라쿠슌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따름이다. 라쿠슌의 둥근 등이 지금은 요코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어디가 달라? 뭐가 바뀌었느냐고. 나는 라쿠슌을 친구라고 생각했어. 옥좌라는 것이 친구가 갑자기 변해버리는 지위라면 그딴 거 나한테는 필요 없어."
작은 친구는 대답이 없다.
"이런 걸 차별이라고 하지. 라쿠슌은 나를 해객이라고 차별하지 않았어. 그런데 왕이라고 차별하는 거야."
"..... 요코."
"내가 멀어진 게 아니야. 라쿠슌의 마음이 멀어진 거지. 나랑 라쿠슌의 사이는 고작 두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잖아."
요코는 자신의 발치에서 라쿠슌의 발치까지의 짧은 거리를 가리켰다.
라쿠슌은 요코를 올려다본다. 앞다리가ㅏ 어쩔 줄 몰라 하며 가슴께 털을 만지작 거리더니 명주실 같은 수염을 흔들었다.
"라쿠슌, 아니야?"
"...... 나한테는 세 걸음이야."
요코는 미소 지었다.
"...... 미안."
라쿠슌이 앞다리를 뻗어 요코의 손을 톡 하고 만졌다.
"미안해."
"아니야, 나야말로 이상한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 411

2024. mar.

#십이국기 #오노후유미 #달의그림자그림자의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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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의 아이 십이국기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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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십이국기 시리즈를 읽기 전, 현세계의 이야기로 워밍업하는 느낌.

십이국기를 한 권 두 권 사 모은 건 이미 오래전이지만, 왜인지 이제야 꺼내 읽기 시작한다.

아마도 유명세에 애니메이션을 봤던 것이 패착이었을까. 초반의 무거운? 분위기때문에 십이국기 장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일 듯.

이제 와 읽기 시작하니 너무 흥미진진한 이세계의 이야기다.

물론 철저한 신분사회, 천계의 뜻에 따른 신분이라는 것이 엄청 와닿지는 않지만,
이세계물에서 곧잘 접하던, 주인공이 쉽게 적응하고 쉽게 영웅이 되는 류의 주인공 위주의 서사가 아닌
그야말로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는 점이 이제 와 읽으며 가장 재밌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마성의 아이는 십이국기 시리즈의 외전 격이랄 수 있는 가미카쿠시를 당했던 아이 다카사토와 왜인지 그런 다카사토를 이해하는 어른 히로세의 이야기.

- 녀석은 태풍의 눈이야. 본인이 조용할수록 주변이 날뛰지. 금세 알게 될 거야. 하나도 재미없는 반이기는 하지만 보통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걸.
어째서죠?
다카사토가 있으니까. - 33

- 사람은 더럽고 비열한 생물이지. 그건 우리네 인간이 짊어진 숙명이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거기서 도망칠 수는 없어. 이기적이지 않은 인간은 없어. 사욕이 없는 인간이 과연 인간일까? - 364

2024. mar.

#오노후유미 #십이국기 #마성의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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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막는 제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7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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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의욕이 말살된 듯한 첫 문단을 읽고, 아... 이 이야기도 몹시 마음을 허하게 만들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독서가 시작된다.

식민 국가만이 아닌 식민지 정착민 조차 수탈하는 구조를 지닌, 그야말로 수탈을 위해 존재하는 식민지에서의 생활을 뜨겁게 그려냈다.
나아질 희망은 늘 그렇듯 본래 있는 자들에게만 있는 것인 그런 구조.
경작을 위한 불하지는 경작이 가능한지의 여부는 물론 지역을 고를 수도 없고 게걸스런 토지국 관리들의 탐욕은 어차피 충족시키기 힘든 조건이다. 뒤늦게 잘못된 불하지를 받았음을 알아차렸지만 발을 들인 이상 앞으로도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덫에 이미 빠져들고 만 것이다. 

희망을 차마 놓을 수 없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버릴 수 없는 두 자식의 이야기.

꽃이 피는 데 100년이 걸린다는 용설란을 심고 눈물을 흘리며 나무를 바라보는 어머니와 그걸 뽑다 내다 버리는 조제프.... 암울하다.

불행을 잘 꺼내어 보란 듯 펼쳐놓는 엄청난 재능이랄까.

뒤라스를 딱히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매번 작품을 만날 때마다 깊이 남는 면면들이 사실은 몹시 좋아하는 작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 셋 모두 그 말을 사는 게 좋은 생각이라고 보았다. 그래 봤자 조제프의 담뱃값을 버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우선 어쨌든 생각이었으니 세 사람이 아직 생각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나아가 그 말을 통해 바깥 세상과 이어지니 덜 외로웠고, 어쨌든 이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설사 보잘것없고 형편없다 해도 이전에는 자신들 것이 아니었던 무언가를 끌어내서 소금기에 전 이곳 평야의 자기들 땅으로, 권태와 회한에 전 자기들 셋에게로 끌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운송이 그렇다. 설령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사막이더라도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지나가게 함으로써 무언가 나오게 만들 수 있다. - 11

- 의사는 제방이 무너진 충격을 발작의 원인으로 진단했다. 아마도 틀린 생각이다. 어머니가 품고 있는 그토록 깊은 원한은 아주 서서히, 한 해 한 해, 하루하루 쌓여 온 것일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이유만 있는 게 아니다. 천 가지 이유가 있다. 무너진 방조 제방, 세상의 불의, 냇물에서 헤엄치는 두 자식의 모습도 그중에 포함되었다. - 21

- "그러니까......" 쉬잔이 말했다. "우리가 산 건 땅이 아니었어요."
"물이었지." 조제프가 말했다.
"바다였어. 태평양." 쉬잔이 말했다.
"똥이었지." 조제프가 말했다.
"제정신이면 안 샀을 텐데......" 쉬잔이 말했다. - 59

- 더는 어머니를 원망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삶을 무한히 사랑했고, 삶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치유 불가능한 희망이 지금의 어머니를 만들었다. 어머니는 바로 그 희망에 절망했다. 그 희망이 어머니를 마멸시키고 부서뜨리고 발가벗겼다. - 145

- 카르멘은 어머니를 보면 주변을 집어삼키는 괴물이 떠오른다고 했다. 어머니는 평야에서 살아온 농부들의 평화를 무너뜨렸다. 심지어 태평양에 맞서 이기려 했다. 카르멘에 따르면 조제프와 쉬잔은 어머니를 경계해야 한다. 어머니는 너무 많은 불행을 겪으면서 강력한 마력을 지닌 괴물이 되어 버렸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불행을 위로하느라 곁을 떠나지 못하고, 어머니의 뜻에 무조건 따르고, 어머니에게 그대로 삼켜질 위험에 놓여 있었다. - 188

2023. dec.

#태평양을막는제방 #마르그리트뒤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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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빛 - 제11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임재희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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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기억, 노아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여정.

그러나 노아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여러 상황의 생존자들에 대한 이야기.

총기난사 사건도, 자살 유족의 이야기도, 성폭력 생존자, 이민자, 인종 차별, 해외 입양 문제까지...
초반까지는 최근 자살 유가족의 고통에(남은 자들 역시 생존자가 되게 만드는) 대한 이야기를 읽어서, 아.. 또 이렇게 연결되는 독서구나 싶었는데 꼭 그런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집중도는 조금 떨어진다.

생존한다는 것이 이토록 피로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도.

- 총기 규제는 너무 우려먹는 거 아니에요? 누군가 식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인종', '이민자'와 같은 예민한 단어는 최대한 자제하자고 편집장이 다시 말했다. 그럼 뭘 쓰지? 모두 그런 표정으로 편집장을 바라보았다. 아직 너무 이르다고. 편집장은 예전에 비슷한 이슈를 다룰 때와 똑같은 이유를 댔다. 그 어느 쪽도 상처 주지 않겠다는, 휴머니즘을 가장한 비겁한 중립 선언이었다. - 20

-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 오래 생각했어요. 나와 함께 이 야만적인 세상을 견뎌야 할 사람들이 그들이니까요. - 45

- 폭력의 기억은 지문처럼 지워지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몸으로 배웠다. - 56

- 인간들의 삶은 더 구차해졌는데 단어들만 고급스러워졌네, 젠장. - 72

- "네 메일을 열 때마다, 우리가 오래 서로 떨어져 살았지만, 폭력이라는 이름 아래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현진이 차분하게 말했다. 예전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먼 길을 달려오며 보았던 풍광을 묘사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오랫동안 분노와 슬픔이 함께 밀려오는 날들 속에 있었어." - 99

- 여름 숲 이후에 모든 게 잘 흘러갔을 거라고 상상했던 리사의 삶이 꼭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건 몹시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숲에 어떤 맹수가 살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있을 만큼 우리 인생은 길지 않았고, 하나의 결핍이 채워지면 또 다른 허기가 입을 벌리고 있다는 상상은 언제나 가능했다. - 190

- 하루의 마지막 빛을 끌어모으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다. 작은 빛이라도 마음에 품고 오늘을 건너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 작가의 말

2024. feb.

#세개의빛 #임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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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0
이장욱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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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불어오는 습하고 뜨거운 열풍이 느껴지는, 공허하고 끝끝내 폐허의 이미지로 남는 이야기다.

어쩐지 등장인물 모두 얄팍한 종이로 만들어진 인간같이 기류에 흔들리며 팔랑대는 위태로운 느낌이다.
그렇게 최종의 날을 위해 팔랑팔랑 살아가겠지... 싶은.

제목을 읽고도 자꾸 뭐였더라 하게 되는.

- 나에게 망망대해는..... 무겁게 밀려오는 파도의 세계입니다. 밀려와서 돌아가지 않는 물의 세계입니다. 물의 세계에 잠겨가는 사람의 표정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무슨 말인지는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당신도? 우리는 지금 함께 망망대해를 건너가고 있잖아요. - 10

- 연은 가만히 고여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제는 그것이 좋지 않았다. - 96

-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
연의 중얼거림을 따라서 천이 중얼거렸다. 언젠가 자신이 해본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그 말을 한 것이 한나였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연의 중얼거림이 듣기에 좋았고 듣기에 좋은 것은 따라 하기에 좋을 따름이었다. - 154

- 무덥고 뜨겁고 견디기 어려운 바다를 바라보는 그이들을 상상했다. 죽음이 흔해져버린 세계에서, 국가가 스스로를 방기한 세계에서, 잔여물들만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 불안과 우울만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 바닷가를 산책하는 그이들을 상상했다. 상상은 힘에 겨웠다. 먼 데 수평선이 허공에 걸려있고 그 너머에서 파도가 밀려올 것이다. 외롭다거나 우울하다거나 하는 감정이 사치스러울 것이다. 그이들은 햇빛 속에 잠겨 들듯 더 깊은 물 속으로 침잠해갈 것이다. 그곳에서도 무언가가 발견될 것이다.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 작가의 말

2024. feb.

#뜨거운유월의바다와중독자들 #이장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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