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2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박형섭 옮김 / 민음사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조리가 일으키는 혼돈.

아무도 타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이기적인 사회의 단면을 극대화한 느낌이다.

어느 날 광장에 등장한 코뿔소는 시민들에게 불안감과 두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코뿔소의 잔영은 사람마다 다르게 남아 무수한 소문과 주장들을 양산한다.
그리고 단순히 동물원같은 곳에서 탈출한 코뿔소 몇마리가 아닌 사람들이 코뿔소로 변하고 있는 이상한 상황으로 악화된다.

현실과 괴리된 채로 음모론을 주장하는 직장동료와 카페에서 이상한 논리를 펼치는 논리학자 들이 등장하는데, 이건 부조리극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렇듯 다양한 화자 속에서 주인공인 베랑제는 세상과 섞이는데 어려움을 겪고 알콜의존증도 있는데다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하지만,
주변 인물들이 하나 둘 코뿔소로 변해버리는 상황에서 베랑제는 끝끝내 세상의 최후의 인간으로 남겠다는 다짐을 보여준다.
그 다짐이 성공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저항하는 인간이 이전에는 사회와 어우러지지 못했던 인간이라는 지점이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2024. jan.

#코뿔소 #외젠이오네스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에 생각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96
천양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낭만과 후회와 덧없음.

- 오늘따라
생각으로 찢는 것이
시의 마땅한 일이란 것을 절감하게 된다 - 시인의 말 중

<그때가 절정이다>
하늘에 솔개가 날고 있을 때
지저귀던 새들이 숲으로 날아가 숨는다는 걸 알았을 때
경찰을 피해 잽싸게 골목으로 숨던
그때를 생각했다
맞바람에 나뭇잎이 뒤집히고
산까치가 울면 영락없이 비 온다는 걸 알았을 때
우산도 없이 바람 속에 얼굴을 묻던
그때를 생각했다
매미는 울음소리로 저를 알리고
지렁이도 심장이 있어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알았을 때
슬픔에 비길 만한 진실이 없다고 믿었던
그때를 생각했다
기린초는 척박한 곳에서만 살고
무명초는 씨앗으로 이름값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가난을 생각하며 '살다'에 밑줄 긋던
그때를 생각했다
제 그림자 밟지 않으려고
햇빛 마주 보며 걸어갔던 시인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독에 바치는 것이 시라는 걸 알았을 때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던
그때를 생각했다

돌아보면
그때가 절정이다
(전문)

- 인생은 무슨 이유로
환상은 짧고 환멸은 긴지
모를 일이다 - 모를 일 중

- 가난한 백석에게
시인이란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
백석은 말했다네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면 안 될까요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면 안 될까요 - 그러면 안 될까요 중

-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속수이며 무책인 것이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헤맬 때
심사하고 숙고한 단 하나의 진정한 시는
다른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뜨는 것
내일의 불확실한 그것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것
이 말들은 던져진 운명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 시작법 중

2024. jan.

#새벽에생각하다 #천양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이 좋은 사람
이다 치아키 지음, 송수영 옮김 / 이아소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뜻하고 아기자기 예쁜 일러스트.

집을 좋아하는 5명의 집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만화.

금새 후루룩 읽을 수 있지만 여러번 다시 펼쳐봐도 즐거움이 줄어들지 않을 그런 그림들.

시리즈로 나오거나 다른 컨셉으로 나온다면 좋겠다 싶은 책.

2024. jan.

#집이좋은사람 #이다치아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크롤! 오늘의 젊은 작가 35
정지돈 지음 / 민음사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많은 부분 설명된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뭔가 큰 의미를 담고 있지 않고, 그저 무표정의 등장인물들이 진지하게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익숙한 느낌 뭐지? 하고 생각하다 웹툰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이 생각났다.

의미가 있는 문장들이 수시로 튀어나오는데, 이야기 자체의 의미는 없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재미다.

정말이지 그렇다.

이래서 정지돈 작가의 글을 계속 읽는 독자가 되는 것이다.

- 사람들은 생략을 어려움 없이 이해한다. 프랜은 반대였다. 아무것도 생략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생략해선 안된다. 아무것도 생략할 수 없다. - 14

- 가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몽상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곧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선유도에서 난지 공원까지 걷거나 자전거를 탔고 UN 평화 공원 벤치에 앉아 인공 호수를 바라보며 새해 다짐 따위를 중얼거렸다. 두고 봐라. 내가 되고 만다. 그러나 여전히 뭐가 되어야 할지 어떻게 되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18

- 지우는 이런 종류의 모든 유행이 한심했다. 4차 산업혁명, 통섭, 공유 경제, 가상 경제, 디지털, 미디어 철학, 기술 철학,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머니즘, 사이퍼펑크, 암호 화폐, 게임 이론...... 특히 실리콘밸리나 스타트업은 최악이고 유사한 측면에서 미디어 아트나 아트 테크니 하는 것들도 비호감이었다. 그런 것들은 눈속임에 불과했고 실체가 없었다. 변화, 새로움, 혁신은 언제나 부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곳에 진짜 변화는 없다. - 51

- 그러나 역시 문제는 대부분의 음모가 상상된다는 것이며 상상된 음모, 곧 음모론이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다.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은 현실이 된다는 말과 다름없다. - 61

- 유진이 프랜에게 말했다. 뭘 받고 싶은지 프랜이 묻자 그건 그때 생각하자고 했다. 그때 생각하자...... 좋은 말이지만 프랜은 지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욕망은 달라질 거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도 변하고 약속이나 다짐, 상상이나 꿈은 헌책처럼 창고에 처박힐 것이다. 그러니 지금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한다. 구체적인 건 무엇이나 현실이니까. 미래는 시간이 아니라 꿈속에 있다. - 70

- 프랜은 단지 말들을 떠돌게 하고 싶었다. 대단한 예술 작품, 베스트셀러, 히트작, 영원불멸의 클래식 따위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어떤 생각, 아이디어, 논평, 꿈, 일상, 작은 이야기, 사소한 논쟁 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슬프게 스치고 사라졌으면 했다. - 71

- 생각이 범죄라면 진정한 범죄자는 인간이라는 종 그 자체다. - 113

- 유치장 안에는 대령과 교사, 인턴으로 불리는 세 명의 사람이 있다. 한 철창에 정해진 인원은 넷인데 침대는 세 개다. 침대가 왜 세 개인지 아냐고 간수가 묻는다. 글쎄. 일종의 고문인가? 간수는 웃는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유란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허용하면 다른 모든 것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 135

- 우울은 과거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고 불안은 미래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 136

- 프랜은 생각했다. 우리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절대 그 속사정을 알 수 없다고. 안다 해도 되돌리거나 움직일 수 없고 움직인다 해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거라고. 그것이 때로 우리를 절망하게 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주 작고 표면적인 일을 통제하고 실천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 거라고. - 148

-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논리적 오류가 진짜 오류나 실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이게 언어의 본 모습, 진정한 내면 아닐까. 말은 대단한 의미를 담고 있고 그 의미를 서로에게 전달하는 것 같지만, 실은 단지 말이 말을 하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언어가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다. 언어는 분명 뭔가를 전달한다. 다만 나는 그것이 내용이나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내 말이 뭔가 라팔리사드의 하나처럼 들린다면 그건 맞다. 물론 그렇다고 의미가 전달됐다는 건 아니다.) - 작가의 말 중

2024. jan.

#스크롤 #정지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좋은 엄마 학교
제서민 챈 지음, 정해영 옮김 / 허블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번에 읽었던 오바마 픽 소설이 꽤 흥미롭고 재밌어서 이번에도 기대했는데.....

재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너무너무너무너무 스트레스받는 이야기라 몇번이나 집어던지고 싶었던 책이다.

단 두시간(상황에 따라서는 두시간이나 일 수도 있지만) 집에 아이를 두고 외출했던 엄마 프리다에게 펼쳐지는 악몽.
정신이 없던 모든 일이 꼬여버린 하루 덕에 양육권도 친권도 모두 빼앗기고 불완전한 나쁜 엄마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내내 갑갑한 기분이 든다.

사실 프리다의 캐릭터도 답답한 면이 많아서, 모든 상황을 잘 해결할 만한 지성을 충분히 갖췄음에도, 유책배우자인 전남편에게도, 안티백서로 보이는 전남편의 여자친구에게도, 전적으로 편이 되어줄 부모님에게도 소극적이고 애매한 입장만을 취하고 있어 프리다가 느끼는 좌절과 분노를 제대로 이해시키지도 못하고 있다. 자신을 변호하고 보호할 생각보다 해리엇에 대한 죄책감과 부모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충분하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을 더 크게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종일관 미안해하는 주인공을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은데다, 엄마에게 모든 책임과 두려움과 비난을 짊어지게 하는 비정상적 묘사가 읽는 나를 몹시 지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엄마학교에서 가짜 딸이 되어주는 로봇 에마뉘엘. 인형으로 온갖 상황실험을 하면서 엄마로서의 자격을 판단하고, 점수를 매기는 행위와, 로봇에게 엄마들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심리적 고문은 진절머리가 났다.

이 이야기가 비약적으로 과장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이런 엄마 학교에 엄마들을 가두고 훈계하고 모욕하는 일을 드러내놓고 하지 않을 뿐, 이 사회는 엄마들에게 지나친 과제를 맡기는 게 아닌지 늘 생각한다.
김보라 감독의 추천사에 백프로 공감한다.

흥미롭게 읽었으나, 추천은 섣불리 못할 만한 스트레스다.


- 나는 삶의 모든 부분을 관통하는 하나의 법칙을 찾길 원했고, 두려움을 찾았다. - 앤 카슨, 플레인워터

- 프리다가 다시 한번 사과한다. 그녀는 이것이 여러 해에 걸친 사과의 시작일 것이고, 자신이 결코 벗어나지 못할 구렁텅이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음을 안다. - 23

- 이혼할 때 법원에서 거스트가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을 보고 르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르네가 프리다에게 물었다. 손을 잡음으로써 분명 그의 기분은 나아지겠지만 프리다의 기분은 더러워질 텐데 왜 손을 잡은 건지. 왜 그의 죄를 사해주는 건지. - 111

- 판사는 그녀가 해리엇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고 말했다. 이 2시간 남짓한 시간 때문에 해리엇의 뇌가 다르게 발달할 수 있다고 했다. - 128

- 엄마들은 칼이나 가위, 화학약품을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할지 상상한다. 처음 학교에 올 때부터 모두가 폭력적인 성향이었던 건 아닌데, 7개월 차로 향해 가는 지금 그들은 모두 누군가를 찌를 수도 있는 사람이 되었다. - 327

- 놀이를 하는 동안 프리다가 묻는다. "엄마 사랑해?"
에마뉘엘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너한테 좋은 엄마였니?"
에마뉘엘이 프리다의 뺨을 콕 찌른다. "엄마 괜찮아."
프리다는 에마뉘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에마뉘엘이 겪은 고통에 대해, 그리고 충분히 진짜 딸처럼 되어준 것에 대해. 그녀는 인형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눈썹의 곡선과 얼굴의 주근깨를 눈에 담는다. 다음번 엄마가 에마뉘엘을 안전하게 지켜줘야 한다. 에마뉘엘을 교사들과 다른 인형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에마뉘엘이 얻어맞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에마뉘엘이 완두콩보다 당근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 443

- 언젠가 '맘충'이라는 단어에 분노하던 내게 누군가가 말했다. "그런 엄마들도 있어서 그래." '치맛바람'에서 '맘충'까지 '그런 엄마들'에 대한 흉흉한 소문으로 가득한 한국에서, '좋은 엄마 학교'는 디스토피아 소설 속 장소가 아닌 현실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엄마는 양가감정을 느껴서도, 욕망을 느껴서도, 외로워해서도 안 되지만 무엇보다 '복잡한 여성'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나쁜 엄마'인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엄마가 있을까? 작가는 '좋은 엄마'라는 기괴한 이상향, 나아가 여성에게 부과된 족쇄들의 기원에 대해 슬프도록 서늘하게 질문한다. - 김보라(영화감독) 추천사

2024. jan.

#좋은엄마학교 #제서민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