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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빛
백수린 지음 / 창비 / 2016년 8월
평점 :
알고 보니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들.
천연덕스럽게 시작되는 이야기가 어느 지점 갑자기 개인의 행, 불행과 겹쳐지고.
그 느닷없음이 작가가 보여주려 한 어떠한 감정을 툭 던져 놓는다.
그 감정이 불쾌하지 않아서
어쩌면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처연함이 있어서.
이 작가의 글은 계속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첫 단편집이었던 폴링인폴도 좋은 기억이었는데 이번 역시:)
시차, 길 위의 친구들이 특히 좋았다.
마지막 단편인 국경의 밤은 어딘지 홀로 따로 떨어져 나온 것처럼 결이 다르게 느껴졌다... 뭐 그랬다.
이미 오래전의 일이므로 더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어진 줄 알면서도, 막상 오랜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귀국일이 다가오자 나는 리버풀이 한번쯤 보고 싶어졌다. 컴컴한 관객석에 앉아 무대 위를 바라보는 사람처럼, 아니 평생 동안 거리를 헤매는 마음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처럼, 그러니까 어두운 거리에 맨발로 서서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타인의 유리창을 맹목적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살았던 그 시절을 설명해내기 위해서. - 10, 스트로베리 필드 중.
봄이면 저 거리에 온통 꽃이 펴.
그녀가 말했다. 체리 블로섬. 시간이 흐르면 꽃이 피고 진다. 그리고 시간이 더 많이 흐르면 마른 가지에서 또다시 움이 튼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단지 그런 것뿐인지도 몰랐다. 시간의 흐름이 허락하는 선한 치유.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시간을 살아낼 것이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녀는 유리 너머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저 나무에서는 하얀 꽃잎이 눈꽃처럼 떨어져. 언젠가 너도 볼 수 있기를. - 53, 시차 중.
그러면 여기에는 미래가 있어? 내가 또 묻는다. 그건 모르지. 어디에도 미래가 없다면 차라리 자기 나라에서 사는 게 낫지 않아? 이방인으로 평생 사는 건 외로운 일이야. 내 말에 짧은 침묵을 두고, 그가 말한다. 자기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보다 더 외로운 일은 없어. - 78, 여름의 정오 중.
삶에 생로병사가 있듯 사람 간의 관계에도 생로병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은 한때 내게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모든 관계가 생로병사를 겪으며 자연사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지척에서 우리에게 닿을 것처럼, 닿을 것처럼, 밀려왔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고사로 끝나는 수많은 관계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기습적으로, 불시에, 사멸하는 관계들. - 266, 길 위의 친구들 중.
2016. N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