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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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
늘 좋은 이야기를 써내는 작가 최은영.
슴슴하게 읽히지만 가슴 속에 은은한 슬픔과 불안과 이미 오래전 열화된 분노같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하고픈 말들을 차마 발화하지 못한 채 마음을 누르고 또 누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마음이 계속해서 울컥하게끔 만든다. 마음 속에 잠겨 있는 그들의 말들을 누군가는 경청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 읽은 단편들도 있었지만, 미묘하고 간과되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환기시켜주는 이야기들은 다시 한번 마주쳐도 좋았다.

-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을 수 없었다. 구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 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 43,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 52, 몫

- 그 문제를 왜 지금 다뤄야 하는 거죠?
용욱이 물었다.
아직도 그곳에 사람이 사니까요. - 71, 몫

- 일을 마치고 복도로 나와서 서울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날들이 떠올라. 그럴 때면 내가 아직 스물두 해밖에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어. 벌써 백 년은 산 것 같은데, 이미 너무 오래 산 것처럼 지쳐버렸는데 아직도 스물둘이래. 밤하늘 아래의 불빛들이 반짝이면서 너는 앞으로도 살아야 해, 살아가야 해, 하고 낮게 합창하는 것 같았어. 더 알고 싶은 것도, 더 해보고 싶은 것도 없는데, 이젠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데, 그런데도 살아야 한다고 자꾸만 누가 내 등을 떠미는 것 같았지. - 160, 답신

- "...... 나는 언니가 살아 있어서 좋아."
"......"
"언니더러 틀렸다는 사람들은 잊어."
"너도 잊어. 그따위 말들."
"응." - 230, 이모에게

- 원고를 묶으면서 그 동네에서 글을 썼던 삼십대 초중반의 시간을 고마운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었다. 그때의 내가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마음 덕분으로 나는 나의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여러모로 결핍이 큰 사람이었고, 어려서부터 삶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벌처럼 느낀 적이 많았다. 그렇지 않은 척 스스로를 포장할 때조차 그랬다. 그런 내가 나의 결핍에 감사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데까지 쉽게 점프하여 갈 수 없다는 것도 이해는 한다.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나는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를 풀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나의 결핍을 안고서 그것을 너무 미워하지도, 너무 가여워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슬프면 슬프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 나는 지금 그런 일을 하는 중인 것 같다. - 작가의 말 중


2024. jan.

#아주희미한빛으로도 #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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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믈렛 문학동네 시인선 203
임유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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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안도감이 드는 시.
이해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전해져오는 위로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시가 죽음을 이야기 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인지.

- 나는 붓을 들어 이 이야기를 종이에 옮겨 적었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벽에 붙여두었다. 후에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있어 적당한 값을 받고 팔았다. - 시인의 말

- 어린이는 새가 없는 다리 한쪽이 그리워 운다고 생각해보았어. 헤어진 어미, 아비, 형제, 자매 새들이 그리워 운다고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새에게는 인간의 생각이 없다. 새는 새의 생각을 할 뿐이다. - 생일기분 중

- 너는 고통 없이 고통 없음의 일부가 되고 싶다. 너는 지구보다 늙어서도 순순히 죽고 싶지 않지. 너는 부패 없이 분해되길 원할 뿐인데. 너는 원하는데. 네가 모르는 바다의 일부가 되기를. 나는 바다 앞에서 너를 향해 외치네. 너를 돌아오게 하려고. 듣게 하려고. 네가 들어오게 하려고. 나는 보는데. 너는 뒤돌아보지 않고. 한때 젊은 당신은 결코 머뭇거리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가네. - 유형성숙 중

- 그러나 그건 중요한 일이 모두 시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탓이다. - 기계장치강아지 중

2023. dec.

#오믈렛 #임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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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지음, 양윤옥 옮김 / 청미래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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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것은 좀더 에세이같은 글이었으나, 연대기같은 책이다.

연말에 류이치 사카모트의 음악들을 자주 듣다보니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 면이 있어 읽게 되었다.
생각했던것 보다도 훨씬 더 반골기질의 음악가였고, 사상적 격동의 시대를 거쳐온 사람인데,
유명했던 곡 말고 다른 실험적인 곡들도 많이 찾아 들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스스로도 언급했듯, 건방지고 힘이 넘쳤던 청년인 류이치 사카모토를 볼 수 있어서 신선.

- 개인적인 체험과의 박리를 통해서 음악이라는 세계의 실존을 얻는 것으로써,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을 뛰어넘어 모두와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음악은 그런 힘을 가졌다. - 21

2023. dec.

#음악으로자유로워지다 #류이치사카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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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이름 붙이기 -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할 때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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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게 읽었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저자 룰루 밀러가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과학자인 캐럴 계숙 윤의 저서.
그때도 이름을 보고 한국계구나 하는 호기심이 있었는데, 그게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던 건지, 번역이 되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룰루 밀러의 책이 드라마틱한 서사가 존재해서 재미의 측면도 충분히 만족시켜줬기에, 약간은 그런 기대를 했지만, 사실 이 책은 상당히 분류학, 특히 분기학에 대해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는 글이다.

생명의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학문인 분류학은, 생태계를 쉽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고도로 발달하는 학문이 되어갈수록, 오히려 생물의 분류를 초월해 직관적으로 이해해오던 생물의 이름을 지워나가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분류학의 붕괴를 혼돈스러워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에 집중하고 이해해야 된다는 이야기 인가... 싶다.
솔직히 집중하며 읽지는 못한 책.

- 분기학자들은 엄청나고 자극적인 혁신으로 가장 탁월한 단계의 현대 과학을 눈부시게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따를 수 있으니, 이 혁명으로 초반에 희생된 존재 중 하나가 바로 물고기였다. - 25

- 여러 박물학자가 '종'이라는 말을 쓸 때, 그들의 머릿속에 각자 들어 있는 개념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를 보면 정말 우습다. 나는 그게 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 113

2023. dec.

#자연에이름붙이기 #캐럴계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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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미터 문학과지성 시인선 478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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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시들이다.
가만히 책장에 다시 꽂았다.

-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 - 시인의 말

-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 오십 미터 중

- 생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삼키는지
똑똑히 지켜보라
욕망이 욕망에게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
(...)
계시는 언제나
천만 년 전으로부터 왔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생은 나를 삼키고 있었다
위대한 것들은
위대해서 아득하다. 남아 있는 생이여. - 행성의 노래 중

- 냉정한 햇살이 담장 넘어 사라질 때 눈을 감으면 우등열차가 머릿속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이명을 앓듯 아프게 그해의 꽃들이 지고 있었다. 그는 비극을 주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세상에 떠나보내도 괜찮은 건 없었다. 세월도 사랑도. - Midnight Special 3 아버지의 날들 중

- 아시는지요. 늦은 밤 쓸쓸한 밥상을 차렸을 불빛들이 꺼져갈 때 당신을 저주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 목련이 목숨처럼 떨어져 나갈 때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 목련이 죽는 밤 중

- 사람의 일에도 눈물이 나지 않는데 강물의 일에는 눈물이 난다. - 강물의 일 중

- 나는 아직도 생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상처에 대해서 알 뿐
안부를 물어줄 그 무엇도 만들어놓지 못했다 - 외전 2 중

2023. nov.

#오십미터 #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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