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쪽
그녀가 모독한 것은 단순한 아버지 사진 이상으로,그녀가 쾌락에 사용한 것, 그러나 쾌락과 그녀 사이에 끼어 쾌락을 직접적으로 맛보지 못하게 한 것으로 바로 아버지와 닮은 얼굴이었으며, 아버지가 가보처럼 물려준 어머니의 푸른눈이었으며, 뱅퇴유 양의 악덕과 그녀 사이에 어떤 말투나 정신을 깃들게 한 다정한 몸짓이었다. 그 정신은 악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악덕이란 것이 그녀가 평소에 지켜야 하는 수많은 의무적인 예의범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정신이었다. 쾌락이라는 관념을 부여하고 쾌락을 매혹적으로 보이게 한 것은 악이 아니었다. 오히려 쾌락은그녀에게 해로운 듯했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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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쪽
불어오는 바람이 벽면에 자란 무성한 잡초와 암탉의 솜털을 나란히 잡아당겨, 잡초도 솜털도 모두 바람 부는 대로 한껏 그 길이 끝까지, 마치 무기력하고도 가벼운 물체처럼 몸을 내맡긴 채 나부끼고 있었다. - P271

272쪽
바로 그 순간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한 농부가지나갔는데, 그는 내가 휘두르는 우산에 얼굴을 맞을 뻔하자기분이 더 나빠져서는, 내가 "날씨가 좋지 않습니까. 걷기에좋은 날이군요."라고 말해도 별 성의 없이 대답했는데, 

그 농부 덕분에 나는 똑같은 감동이 미리 정해진 순서에 따라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272

271쪽
메제글리즈 쪽에서 내가 느낀 것이나 그 소박한 발견들을 결산해 본다면, 메제글리즈가 우연한 배경에 불과했는지 아니면 필연적인 계시자였는지는 모르지만, 그해 가을이런 산책을 하던 어느 날, 몽주뱅을 감싼 관목 덤불의 비탈길 가까이에서 나는 처음으로 우리 인상하고 일상적인 표현 사이에 어떤 불일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던 것이 기억난다. - P271

275쪽
그때 나는 탐험을 시도하는 여행자나 절망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처럼, 비장하게 망설이며 정신을 잃고는 창문을 통해 내게로까지 드리운 야생 카시스 나뭇잎 위에 달팽이의 자연스러운 흔적이 덧붙을 때까지 죽음의 길이라고 여꺼지는 그런 미지의 길을 내 안에 개척하고 있었다. - P275

283쪽
"이 끔찍한 늙은이에게 내가 뭘 해 주고 싶은지 아니?"
고 친구가 사진을 들며 말했다.
그리고 뱅퇴유 양의 귀에다 몇 마디 속삭였는데, 내게는 동리지 않았다.
"어머, 네가 설마 그런 짓을."
"내가 침을 못 뱉을 줄 알아? 이 사진에다가?" 하고 친구가일부러 거칠게 말했다. - P283

284쪽
물론뱅퇴유 양의 일상에서 겉으로 드러난 악의 모습은 너무도 완벽해서, 그 정도로 완벽하게 실현된 악의 모습을 사디스트 여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란 힘들 것이다. 오로지 딸만을 위해 살아 온 아버지 사진에 친구가 침을 뱉는 것을 구경할수 있는 곳은 시골 별장의 진짜 등불 아래서가 아니라 오히려도시 불바르 극장의 조명 아래서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멜로드라마의 미학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사디즘밖에 없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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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쪽
그런데 아무리 진실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위선적인 면이 있기 마련인데, 남과 얘기할 때는 그 사람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를 삼가지만 그 사람이 자리에 없으면 금세 말하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께서도 뱅퇴유 씨와 함께 있을 때는 원칙과 예절의이름으로 스완의 결혼을 개탄하면서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 부모님은 같은 부류의 충직한 사람으로서 뱅퇴유 씨와 함께 그 원칙과예절을 주장하셨다.) 몽주뱅에서는 그런 것을 위반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비추셨다. - P262

257쪽
때로 오후 하늘에는 하얀 달이 빛을 잃고 구름처럼 슬그머니 지나갔는데, ... - P257

263쪽
태양은 구름 뒤로 자주 숨으면서 그 타원 모양을 일그러트리며 구름 가장자리를 노랗게 물들였다. - P263

263쪽
빗방울 은 마치 함께 날아다니는 철새처럼 하늘에서 빽빽이 줄을 지어 내려온다. 빗방울은 결코 다른 빗방울과 떨어지지 않으며, 빨리 내려올 때에도 결코 헤매지 않으며, 저마다 자기 위치를 고수하면서 뒤이어 오는 것을 이끌고 내려온다. 하늘은 제비떼가 이동할 때보다 더 컴컴해진다. 우리는 숲 속으로 몸을 피했다. 빗방울의 여행이 끝난 후에도 더 약하고 더 느린 비 몇방울이 또다시 내려왔다. - P263

267쪽
나는 작은 거실에 앉아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책을 읽으면서 마로니에 나무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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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쪽
우리는 총포상의 인사를 받기도 하고, 우체통에 편지를 넣기도 하고, 기름이나 커피가 떨어졌다는 프랑수아즈의 말을 지나는 길에 테오도르에게 전하기도 하면서, 스완 씨네 정원의 하얀 울타리를 따라난 길을 지나 마을 밖으로 나갔다. - P239

240쪽
나는 꽃들의 나긋나긋한 허리를 껴안고 향기로운 별 모양 곱슬머리를 끌어당기고 싶었지만, 이런 내 욕망에도 아랑곳없이 가족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지나갔다. - P240

244쪽
이에 비하면 몇 주 후에 작은 바람의 숨결에도 날아가 버릴 단색 붉은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햇빛 아래서 이 시골길을 기어 올라갈 들장미는 얼마나 순진한 농부 아가씨같아 보일까!
...

울타리 뒤쪽 들판을 향해 가파르게 난 비탈길로 올라가서는, 홀로길을 잃은 개양귀비 꽃 몇 송이와 게으르게 여기저기 뒤처진수레국화 몇 송이를 쫓아다녔다. - P244

245쪽
꽃이 내게 불러일으킨 감정은 내게서 떨어져 나가 꽃에 가서 들러붙으려 했지만 헛수고였고, 그리하여 그 감정은 여전히 모호하고 막연한 채로 남아 있었다. 산사 꽃들은 내가 느낀감정을 해명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 P245

248쪽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떤 모습이 단지 우리 시선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깊은 지각을 요하면서 우리 존재 전부를 사로잡은 것이다.

붉은빛 도는 금발머리 소녀가 지금 막 산책에서 돌아온 길인 듯 손에 정원용 삽을 들고 분홍색 주근깨투성이 얼굴을 들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당시에는 어떤 강렬한 인상을 객관적인 요소로 환원·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그 후에도 배운 적이 없었으며, 또는 눈 빛깔에 대한 개념을 추출하기에도 충분한 ‘관찰력‘이 없었으므로 오랫동안 그녀를 생각할 때면 그 눈의 광채에 대한 추억은, 그녀 머리가 금발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선명한 하늘광채로 떠올랐다. - P248

250쪽
이렇게 해서 질베르트의 이름이 내 곁을 지나갔다. 

그 이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불확실한 이미지에 불과했던 것에 사람의 모습을 부여하여 어느 날인가 그 사람을 되찾게 해 줄 부적처럼 주어졌다. 그리하여 재스민과 비단향꽃무위에서 발음된 그 이름은... · - P250

253쪽
그러나 나 스스로는 그 이름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으므로, 내가 질베르트와너무 멀리 떨어져 유배된 듯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그녀와 그녀 가족에 근접한 주제로 부모님을 이끌어 가곤 했다. 가령 갑자기 우리 할아버지 직책이 할아버지 선대부터 내려오는 것이라고 믿는 체하면서, 또는 레오니 아주머니가 보고 싶어 하는분홍빛 산사나무 울타리가 마을 공유지에 있다고 하면서, 아버지로 하여금 내 주장을 정정하게 하여 내 뜻이 아닌데도 아버지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게 했다. · - P253

254쪽·
그 이름은 언제나 그것이 쓰인자리에 놓여서 나를 숨 막히게 했는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 이름이 다른 어떤 이름보다 가득 차 보였던 것이다. 마음속에서 미리 수없이 발음할 때마다 그 무게가 더해 갔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내게 기쁨을 주었지만, 그 기쁨을 감히 부모님에게 요구했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기쁨은 아주 강렬했지만, 부모님께서는 그 기쁨을 내게 주려고 그분들과는아무 상관도 없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일로 많은 수고를 해야 했다.  · - P254

256쪽
또 그바람이 그녀 곁을 지나왔으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메시지를 속삭인다는 생각이 들어,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나는그 바람에 입맞춤을 하였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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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쪽
그럼에도 아주머니가 프랑수아즈를 집에 두었던 것은, 그녀의 잔인함을 잘 알면서도 그 시중을 높이 샀기때문이다. 마치 성당 채색 유리에 합장한 모습으로 그려진 왕과 왕비의 치세가 실제로는 피로 얼룩진 역사임을 보여 주듯이, 나는 점차로 프랑수아즈의 상냥함이나 뉘우침 또 여러 미덕들이 부엌 뒤채의 비극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P217

220쪽
이와 마찬가지로 프랑수아즈는 어떤 하인이라도 우리집에 오래 붙어 있지 못하도록 그 끈덕진 의지로 매우 교묘하고도 가혹한 술책을 썼는데, 그해 여름 우리가 거의 매일같이 아스파라거스를 먹어야만 했던 것도,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도맡아 벗기던 부엌 하녀가 냄새 때문에 심한 천식 발작을 일으켜서 마침내 우리 집을 떠날 수밖에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해가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 P220

214쪽
"젊은이, 자네에게는 하늘이 항상 푸르기를 바라네. 그러면지금 내게 다가오는 이 시간처럼, 숲은 이미 어둡고 밤이 빨리 저무는 시간이 와도, 내가 지금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러듯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을걸세." - P214


226쪽
그러나 게르망트라는 이 이름에, 우리 친구의 푸른 눈 한가운데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바늘 끝으로 찔린 듯 작은 갈색홈이 나타났고, 눈동자 나머지 부분은 하늘색 물결을 분비하면서 반응했다. 눈꺼풀 언저리가 검어지더니 아래로 축 처졌다. 그리고 쓰디쓴 주름이 잡혔던 입은 이내 제 모습을 되찾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반면 그의 시선은 흡사 온몸에 화살을 맞은 아름다운 순교자의 시선처럼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것같았다. "아니, 나는 그들을 알지 못한다네."라고 그가 말했다. - P226

233쪽
·"제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닙니다." 하고 나무처럼 고집 세고 하늘처럼 냉혹한 아버지께서 가로막았다. "장모님께 무슨일이 일어날 경우, 외진 곳에 있다고 느끼지 않으시도록 혹시그곳에 아시는 분이 있나 해서 물어본 겁니다."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나는 누구나 알지만, 동시에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라고 르그랑댕이 좀처럼
항복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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