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의료, 구멍이 커지고 있다.
사람 치고 아프지 않을 사람은 없고, 중환이 있을 경우에 우리 나라에서 부담이 되지 않을 가정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의료제도는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마음 놓고 살 것이냐 아니냐, 아플 때 마음놓고(?) 아플 것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1970년대 말에 의료보험이 도입된 이후, 비교적 최근까지 여러 가지 곡절을 거치면서 의료보장은 점점 확대되었고, 병원 문턱은 점점 낮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2000년 이후에는 그런 추세가 반전 되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대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요즘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권 대상자들은 늘고 있고, 의료보험 가입자들의 의료보험료 미납 세대 또한 점차 늘고 있다. 경기가 좋지 않음을 나타내는 반증이다.
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권자들은 본인 부담금 거의 없이 의료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외래 진료나 입원의 경우 비보험 항목, 즉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은 본인이 전액 부담해야 한다. 우리나라 보험 체계상 의료비의 30-50%는 비보험이라 나타나 있기 때문에, 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권자라 하더라도 실재로는 많은 병원비를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른바 차상위 계층, 즉 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권자는 아니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가정은 더욱 사정이 어렵다.
불황이 지속됨에 따라서 의료보험료와 의료비가 가계에 부담이 되는 세대가 점차 늘고 있으며, 만약 의료보험료를 3개월 이상 미납하기라도 하면 의료보험 자격이 상실되어 실질적인 의료 이용이 거의 단절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오히려 기초생활 수급권자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들 계층의 의료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와같이 가만히 있어도 어렵고 구멍이 점점 커지고 이는 우리의 의료안전망에 외부로부터 큰 충격이 닥쳐오고 있다.
요즘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켜면 수시로 나오는 ‘의료보험’ 광고. ‘다보장’이니 ‘1만 몇천가지 질환’이니 하며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고, 뉴스마다 나오는 경제 특구나 시장 개방 이야기 중에 의료개방도 꼭 포함되어 있다.
광고에 나오는 의료보험은 엄밀하게 말하면 ‘민간 의료보험’으로, 기본적으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운용되는 의료보험이다. 한달에 2-3만원으로 보장을 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1인당 비용이고, ‘다보장’은 실제로는 다보장이 아니라 일반 의료보험이 커버하고 남는 부분을 일부 보조하는 구조일 뿐이다. 게다가 많은 경우 가입하기 전에 검진을 해서 ‘건강한’ 사람만, 즉 병을 앓을 가능성이 적은 사람만 골라서 뽑는다.
그러니, 어찌 이런 민간 의료보험이 싸다고 할 수 있으며, 다보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돈을 낼 여력이 안되고, 또 가입 의사가 있다 하더라도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아 거절당하는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돈을 낼 수 있고, 건강한 사람만 가입할 수 있는 보험에 우리의 건강을 책임지도록 기댈 수 있는 것인가? 참으로 위험한 일인데, 이런 방향으로 착착 진행이 되어가고 있다.
경제특구나 의료시장 개방, 대덕 특구 문제도 그렇다.
원래 경제특구에서의 의료개방은 ‘경제특구의 외국인들의 의료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제안되었었다. 그러나 점차 경제특구의료기관의 내국인 진료 허용, 이익금의 본국 송금, 영리의료법인 허용, 전면적인 민간의료보험 도입(국가 의료보험과 민간보험 중에서 택일하는 것) 등의 문제가 꼬리를 물고 제기되고 있다. 진보적인 보건의료단체들이 언뜻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사안에 왜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일까?
작은 물꼬가 트이면 그것을 따라서 우리나라의 보건의료 정책을 뒤흔들 수 있는 엄청나게 큰 물줄기가 밀고 들어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에 나열된 정책들이 도입이 되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돈 많이 내고 혜택이 많다는 민간의료보험으로 대거 이동할 것이고, 지금도 허술한 점이 많은 국가 의료보험 보장성 강화에 대한 사회적 압력(아쉬워하는 사람)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사실상 의료비가 많이 드는 환자 가족이나 노인들은 경제적 여력이 그다지 없는 경우가 많다. 소득에 비례해서 내는 의료보험료이기 때문에 이들이 내는 보험 재정은 적은 반면 지출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더 악화될 것이다.
영국에서 최상위 계층과 최하위 계층의 사망률을 비교해보았는데, 최하위 계층의 사망률이 최상위 계층의 네 배에 이른다는 통계 자료가 있다. 전국민 의료보험이 되고, 본인부담금이 거의 없는, 비교적 고른 의료 혜택을 받는 영국의 계층간 사망률의 차이가 이정도인데, 하물며 비보험 항목의 부담이 커서, 본인부담금의 벽에 막혀서, 의료보험료 낼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는 우리 나라의 사망률은 얼마나 크게 벌어질 것인가? 생각만해도 아찔한 일이다.
의료생협이 대안적인 모색으로 점차 관심을 많이 받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나를 위해, 우리 가족의 건강권을 위해, 아플 권리를 위해서, 의료 제도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함께 대안, 변화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려오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