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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때 독신주의자였다. 아마도 20대 초반까지 그러했던 것 같은데,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 시간에 책과 음악을 포함한 문화적 유희를 즐겨왔던 터라 혼자만의 삶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렇다고 히키코모리로 살아왔던 것도, 그렇게 살 생각은 없지만 분명히 내겐 문화적으로 투자하고 집중해야 할 시간이 필요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축복이다’라는 생각이 생기기 이전까지는. 주변인들이 하나하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자연스레 조카들이 생겨났는데 아이는 정말 존재 자체가 축복인 미지의 생물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어두컴컴한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존귀한 행위를 통해 그런 축복을 잉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부터는 독신주의에 대한 꿈을 접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땅이 아니다 한국은. 남자들의 결혼적령기는 점점 더 늦어지고 있고, 결혼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 독신을 강요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시대적 흐름에 맞춰 <독신의 오후>는 시기적으로 꽤 흥미로운 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노자의 책을 보며 한국인들이 통쾌해하는 지점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습속들을 3자적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끼리 모여 있으면 할 수 없던 피드백을 3자적 시선이 따끔하게 지적해주는 것이다. 외국에서 생활해왔던 진중권이나 홍세화 같은 저자들의 책도 마찬가지다. 우린 3자적 시선, 즉 내가 속해있는 집단과 다른 이의 시선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독신의 오후>의 텍스트들은 충분히 약이 될 수 있다. 저자인 우에노 지즈코는 여성이고 고로 이 책은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독신 남성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에 따른 조언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독신 남성이라니 으아 찌질해”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걱정하지 말자. 우려와 달리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 아니 아름다워질 수 있다.


꽤 많은 조언들이 숨어있지만 그 속에 관통하는 메시지는 ‘내려놓음’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불교적 상념 같은 것이 아니라 예컨대 나이에 걸맞게 치솟는 우리의 권위(쉬운 말로 꼰대성이라고 한다), 혹은 대인관계에서의 권력 같은 것을 경계하고 내려놓는 순간 그는 자유로워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


아직은 두세 번 곱씹을 만큼 인상적인 책은 아니었지만 내가 좀 더 나이가 들고 이 책의 소제목처럼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를 생각할 시기가 찾아올 때, 그 땐 이 책을 한 번 더 펼쳐볼 것만 같다. 약간은 고정적인 젠더에 대한 관념이나 나와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 사례들의 기술은 이 책의 흠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서재 언저리에서 내 선택을 기다릴만한 책은 되는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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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마피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해외축구를 10년 넘게 봐오면서 매년 변함없이 느끼는 것이 있다. 비단 축구뿐만 아니라 스포츠와 관련된 행사가 있으면 어린이나 동물과 함께 퍼포먼스를 하며 순수와 스포츠 정신을 논하지만 결코 스포츠는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포츠이자 2002년 이후로, 특히나 월드컵 시즌만 되면 국내에서도 인기를 누리는 축구는 그 인기만큼이나 불편한 진실은 전쟁통의 지뢰처럼 도처에 널려있다.


피파라는 집단과 블래터라는 인물은 굉장히 상징적인 인물이다. 사실상 양대리그라 볼 수 있는 잉글랜드와 스페인 축구협회 또한 말 많고 탈 많은 집단이긴 하지만 정치, 자본, 비리의 스케일면에서 피파를 압도할 수 있는 집단은 없다. 피파의 부패 이미지를 척결하겠다 식의 취임사 같은 건 허울 좋은 말들에 불과하다. 각양각색의 설전이 오가는 축구팬들 사이에서 피파와 블래터는 평화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로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던 축구팬들은 그들의 이야기만 나오면 거짓말처럼 입을 모으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노답’, 이 집단에는 대안도 없고 해결책도 없다. 집단의 자정작용 같은 건 애초에 사라져버린 썩을대로 썩어버린 집단이고, 집단이 할 수 있는 모든 비리를 시도한 듯 창의적인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요즘 한국에서는 원전 마피아, 관피아라는 신조어가 많이 언급되는데 아마도 ‘-마피아’라는 언어를 가장 먼저 대중화시킨 게 피파 마피아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래된 축구 팬들 사이에서 그 말은 심심찮게 언급되어 왔다. 그런 부분을 생각해보면 피파의 온상을 다루는 책은 좀 더 많은 종류로 시중에 나와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일텐데 왜인지 특히나 국내에는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왜인지는 피파가 가지고 있는 로비력과 현재까지 해왔던 수많은 비리들을 취합해보면 답을 도출해낼 수 있다.


<피파 마피아>는 국제축구연맹과 그 중심에 서있는 블래터를 ‘까대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기자 출신인 저자가 봐왔던, 공공연히 알려져 왔던 그들의 진짜 얼굴을 까발리는 것이다. 스포츠라는 것이 얼마나 환상에 차있고 아름다운 플레이 속에서 ‘아트’를 논하지만 그 이면의 실상에 대해서 누군가를 말해야 하는 것이고, 그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은 저자는 조목조목 성실하게 적어두었다. 월드컵 개최지에 따른 계략, 광고를 해주겠다며 요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 검은 돈으로 점철된 그들만의 투표, 결코 그들은 아름답지 않다.


가장 보편적인 스포츠 중에 하나인 축구를 보면서 우리는 ‘공정성’을 논한다. 불합리한 자본주의의 생리 속에 살면서 모든 걸 내려놓고 공 하나 앞에서 공정하게 승부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아름다운 플레이 뒤에 그들의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의 내면을 알아야 하듯 단순히 축구를 보고 즐기면 끝나는 일이 아니라 이제는 그 이면의 무언가를 확인해야 한다. 그 일을 하기에 이 책은 정말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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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스탠리 큐브릭 / 스탠리 큐브릭, 진 D. 필립스


영화학도이거나 영화연출에 대해 관심 있는 씨네필이라면 큐브릭이나 히치콕이 얼마나 영화에 대해 집요하게 접근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좀 더 편집증적(?) 면모를 드러낸 인물은 큐브릭이 아닐까. 현장을 포함해 영화 전반적인 요소 하나하나 통제하려 했던 그에 대한 이미지는 편집증 내지 외골수, 요즘 말로 덕후에 가깝다. 큐브릭 스스로 영화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진솔하게 털어놓은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큐브릭에 대한 이미지가 오해이든 아니든, 해명되든 안 되든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은 흥미롭다.









레트로 매니아 / 사이먼 레이놀즈


난 레트로가 그렇게 나쁜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사이먼 레이놀즈의 요지는 레트로에 매몰된 음악이 더는 진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꼭 음악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적으로 정체되어 있고 새로움이 없는 문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전제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냥 그가 어떤 방식으로 레트로를 인식하고 접근하는지 궁금해졌다. 












뉴스의 시대 / 알랭 드 보통


뉴스를 신뢰하는 것과 뉴스를 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언론은 욕하고 믿을 수 없다 말하지만 그 최소한의 신뢰로 매일 같이 뉴스를 접하고 그에 따른 이슈에 매몰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의 신작은 뉴스에 관한 이야기다. 언론에 대해 한 권의 책으로 모든 걸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분명한 건 이 한 권의 책은 당신에게 언론의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이해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고, 언론에 대해 특별한 사명감을 부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이 정보범람의 시대에서 조금 더 현명하게 뉴스를 접하는 태도에 대해 조목조목 적어놓았을 것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언론이 만든 이슈에 매몰되어 사라졌던 그 무언가의 반짝거림에 조금 더 주목해보는 것이다. 그 정도는 한 권의 책으로도 가능하다.






괴물이 된 사람들 / 패멀라 D. 슐츠


아동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기에 우린 그들을 ‘괴물’이라고 부른다. 괴물을 더럽다고 멀찌감치 두고 외면하는 것보다 왜 괴물이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훨씬 사회적일 것이다. 공포와 눈을 마주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게 건강한 사회를 위해 비로소 제대로 맞닥뜨리는 정직한 대면이다.











사랑할 것 / 강상중


불안시대의 추상적 어구들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겉핥기에 불과하고 진정성이 없으며 시대를 관통하는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강상중은 다를 것 같다고 감히 추측한다. 그의 전작들은 대제목 아래 펼쳐진 목차, 그 속 소제목에 충실한 이야기들을 시대에 대한 고민으로 엮어냈다.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지지만 그의 전작을 읽었던 사람으로서 ’사랑할 것‘이라는 제목을 어떻게 풀어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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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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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 탁상공론 같은 말들이 가장 많이 쓰이는 대상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떠올리는 대상, 그리고 그 지점에서 철학은 자유롭지 않다. 대중에게 철학은 그런 이미지에 가깝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철학이 사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인식하는 철학은 삶의 저 언저리쯤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많은 학자들이 대중과 아래로부터 소통하려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뒷짐 진 백발의 방관자의 모습으로 비춰지곤 한다.

 

고병권 같은 학자가 그러하다. 그는 꾸준한 대중 강연과 집필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인문학을 행해왔던 사람이다. 철학하는 것이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곳에서 철학이 시작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믿음 아래 수유너머같은 연구공동체에서 글을 쓰고 강의를 해왔다. <철학자와 하녀>도 그런 믿음 아래 쓰여진, 그의 또 하나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제목 <철학자와 하녀>는 어떤 맥락에서 나온 제목일까. 친절하게도 프롤로그에서 설명을 해주고 시작한다.

 

어느 날 철학자 탈레스는 별을 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트라케의 하녀가 깔깔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탈레스는 하늘의 것을 보는 데는 열심히면서 발치 앞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트라케의 이 하녀는 총명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몸은 지구에 두면서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철학자의 삶을 이토록 재치 있게 조롱했으니 말이다.

 

이것이 철학이라는 학문과 대중 사이의 간극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간극은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놓여있다.

 

책은 에세이의 연속이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철학적 명제를 던질만한 준비가 되어있다. 큰 사건, 사고 외에도 삶 주변에 작은 에피소드 하나까지도 들여다보면 흥미로울 정도로 말이다. 이제 책을 펼쳤다면 저자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인문학자는 어떻게 그 안에서 명제를 떠올리고 들여다보는지 읽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철학은 한가로운 학문이 아니라 내 삶을 되새김질할만한 길이 된다. 발치 앞에 있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이제는 저 밤하늘의 별을 한번 보는 것이다.

 

위대한 탈레스를 재치 있게 조롱했던 총명한 하녀가 어느 밤 다락밤 창문을 열고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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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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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한 선입견이랄 건 없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윤리적일 거라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물론 지식인 사회에서의 도덕적해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말끔히 날려버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우리가 흔히 나치 부역자를 떠올릴 때 철학자를 먼저 떠올리는 경우도 많이 없다. 도덕적인 학문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나치주의를 거부했을 거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철학은 사실 대중들에게는 추상적으로 다가오는 학문이기도 하다. 물론 인문학이라는 것이 그러하긴 한데 그렇기에 히틀러 같은 독재자에게는 필요한 학문이었다. 물론 지금도 철학을 자기들 멋대로 해석해서 인용하는 위정자들이 있지만 히틀러에게는 좀 더 스케일 큰 뻥(?)이 필요했다. 히틀러에게는 더러운 두 가지가 있었다. 혈통을 강조하는 인종차별, 전쟁을 위한 이념. 히틀러는 이 두 가지를 합리화시키려 했다. 먼저 도덕적 당위성을 얻기 위해 철학을 이용했고, 법률적 근거를 만들어 내기 위해 법률가들을 이용했다. 그로 인해 독재국가를 위한 법률해석과 합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책의 목차는 간단하다. 1부는 히틀러에게 부역한 철학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2부에서는 히틀러에 반기를 든 철학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부역과 반기에 대한 단서를 그들이 살아왔던 삶으로부터 찾으려 하고 있는데 과거로부터 되집는 그런 방식은 흥미롭다. 하지만 다소 자의적 해석이 될 여지가 있어 조심스럽게 읽어내려 갈 필요는 있다.

 

에필로그의 제목이기도 한 나치사상에 물든 철학자의 사상을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이 책이 정확한 답을 주는지는 모르겠다. 윤리적 기준에서 벗어난 철학자의 학문을 우리가 우리의 후대에게 가르쳐야 하는가. 히틀러 철학의 씨앗이 새로운 세대로 전달되는 것을 우려하는 저자의 의견은 다소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히틀러나 혹은 어떤 위정자의 해석에 의해 놀아나는 것이 철학이지, 그런 해석을 하고 이용했다고 해서 히틀러 철학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린 인류가 지니고 가르쳐 온 학문이 어떤 논리로 찢겨지고 벌겨 벗겨졌는지 알 필요는 있다. 경계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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