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다, 당신이군요. 최초의 프로그래머 - 컴퓨터 탄생을 둘러싼 기이하고 놀라운 이야기
시드니 파두아 지음, 홍승효 옮김 / 곰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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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컴퓨터에서 프로그래밍(programming)에 해당하는 일련의 명령을 해독하면서 자동적으로 계산을 실행하는 기계를 19세기 초에 영국의 수학자 C.배비지가 계획하였다. 그 시작기(試作機) 중에서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과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이라는 것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영국 수학자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1792~1871)는 다항함수와 로그함수, 삼각함수 등을 계산할 수 있는 기계식 계산기인 차분기관을 1822년에 제작하였고, 1835년에는 해석기관을 설계하였다. 이 해석기관은 최초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컴퓨터로 인정받고 있다.”

 

 

  위 두 문단은 컴퓨터의 유래에 관한 내용 일부를 서로 다른 지식백과에서 발췌한 것이다. 내용을 찾을 때 검색어를 ‘컴퓨터’로 했으니,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기계의 형태를 누가 먼저 구안했느냐의 문제로 따져 본다면 상기한 서술들의 정합성은 더 따지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컴퓨터를 컴퓨터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고장이 나서 작동하지 않는 컴퓨터나 (어찌 보면 작은 컴퓨터라고도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보며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가?

  백과사전의 서술은 컴퓨터를 컴퓨터답게 하는 것, 수의 언어를 “숫자 외에 다른 것에도 작용”(28)하도록 하는 규칙, 컴퓨터의 영혼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의 성취마저 배비지의 공으로 돌렸다는 점에서 편향적이다. 역사적 기록은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찰스 배비지와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해석기관의 설계에 ‘공동으로’ 관여했고, 에이다는 그 중 해석기관의 논리를, 오늘날의 언어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그러나 그 기록은 얼마간은 가려진 기록이었다. 나 역시 수학 교과서에서, 어린 시절 보았던 과학 교양만화에서 차분기관의 대략적인 형태를 삽화로 접했을 뿐이다. 프로그래밍이 컴퓨터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한 ‘물건’은 누가 설계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책 제목에서부터 ‘에이다, 당신이군요. 최초의 프로그래머!’라고 우리의 주인공을 호명하니, 추측건대 그래픽노블의 형태로 다시 쓴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전기(傳記)일 것이었다. 그러나 책을 받아보고는, 그 추측이 반만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전기는 전기이되, ‘다중우주’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컴퓨터 창조의 주역들로 하여금 종횡무진 활약하게 하는, ‘워너비 전기’인 셈이다. (참고로 원제목은 『The Thrilling Adventure of Lovelace and Babbage』, 우리말로 ‘러브레이스와 배비지의 짜릿한 모험’ 정도로 직역할 수 있겠는데, 책 내용에는 조금 더 부합하지만 아무래도 비영어권 독자인 우리에게는 밋밋하고 낯선 제목이었으리란 생각도 든다. ‘러브레이스는 누구며 배비지는 또 누군데?’)

  대체역사물이 한국의 출판시장에서 그리 드문 것은 아니지만, 대개 이러한 형태의 ‘워너비 서사’는 대중의 헛헛한 역사의식, 역사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민족의식을 왜곡된 방식으로 충족시키기 마련인지라 책의 기본 설정을 확인한 후 우려가 되는 바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책을 빼곡히 매운 각주, 그리고 거기에 더해 각주를 보충하는 미주, 그리고 각 장마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빛나는 러브레이스와 배비지의 모험담을 마주하며, 나는 나 자신의 얼굴을 새삼 다시 마주했다. 어떤 대상을 깊이 사랑하면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지 않을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이 질문은 나에게나 유효한 것이었다.

  저자인 시드니 파두아는 수학 전공자가 아니다. 본업은 애니매이터 겸 특수영상 아티스트라고 한다. 사소한 계기로 그리게 된 러브레이스에 관한 웹툰을 보충하고자 시작한 자료조사는 저자를 러브레이스와 배비지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기이한 수학자들에 대한 무한한 매혹으로 이끌었다. 책은 말하자면 저자가 경험한 매혹의 과정이자 결과다. 요즘에는 시각 관련 업계에서 컴퓨터가 필수불가결한 도구이기에, 저자의 매혹은 어쩌면 운명적인 것이었을까? 그러나 모든 애니메이터가 수학의 역사와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저자는 엄밀히 말하면 수학 이론의 장(場) 바깥에 있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더 객관적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구글링이라는 이 시대의 보편적 방법론에 러브레이스와 배비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더함으로써. 그렇기에 저자는 “러브레이스가 무지한 사기꾼이라는 주장과 배비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엄청난 천재라는 주장은 둘 다 … 과장되어 있다! // 당신은 한쪽이 그녀를 축소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 다른 한쪽은 그녀를 확대했다.”(258-259)라는, 객관에 가까운 주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군데군데서 실없이 웃게 만드는 영국식 유머라든지, 저자가 직접 온라인 ‘노가다’를 통해 발굴한 러브레이스와 배비지에 관한 ‘원전’이라든지, 수많은 논문과 연구자료를 참고하여 저자가 ‘직접’ 그린 해석기관 전체의 도해라든지……. 이 책의 빛나는 부분은 많다. 그러나 이 빛나는 모든 것들을 빛날 수 있게 한 유일한 요소를 꼽으라면, 미완의 과제에 평생을 매달린 두 수학자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창작물로 바친다는 것이 굉장히 지난하지만 아름다운 작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ps. 나는 소위 ‘문돌이’다. 수학에 일찌감치 거리를 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책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충분히 되지 않는 부분(가령 해석기관의 도해라든지!)은 충분히 되지 않는 대로 넘기며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저자가 짠 방대한 이야기 그물을 샅샅이 훑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또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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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월 3일, 나는 고민에 빠진다. 전자책캐시 10만원어치를 지를 것인가 말 것인가.

 

 

  10만원은 절대 적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매월 1일부터 3일까지 전자책캐시를 충전하면 마일리지가 두 배로 쌓인다. 10만원을 충전하면 마일리지가 18,000점이 들어온다. 어지간한 종이책 한 권을 살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역시 10만원은 적은 돈이 절대 아니다. 18,000점 마일리지의 유혹에 이끌려 매달 전자책캐시를 10만원씩 충전했다가는 잔고에 바람 부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매달 빠져 나가는 돈이 아까워서 월납 저축액도 줄였는데, 매달 전자책캐시를 충전하게 된다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섬 게임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나에게 다시 한 번 자문한다. 그래서 충전한 캐시가 쓸모없었느냐고, 충전만 해 두고 묵힌 적이 있느냐고. 그렇지는 않다. 어떻게든 ‘총알’을 채워두게 되면, 전자책이 이상하게 눈에 잘 띄고, 그래서 아낌없이 ‘쏜다’. 나는 돈이(캐시가) 있으니까!

  이쯤에서 내면의 양심이 나에게 묻는다. 그렇게 산 전자책, 다 읽었느냐고. 여기에서 나는 할 말을 잃는다. 그렇지. 나와 같이 사는 사람들이 나에게 한결같이 이야기한 건 ‘제발 산 책 다 읽기 전에 새로운 책 또 사는 것 자제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부모님께서 그러하셨고, 지금은 배우자가 그러한다.

  그렇지. 읽지도 않을 책을 뭐 하러 사는가.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독서에 허영심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보다 자세한 내용을『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을 참고하세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책을 마구잡이로 사는 것은 내 생활에 맞지 않는, 독 같은 허영이 아닌가. 배우자는 비록 나에게 ‘골프 치러 다니거나 낚시 하러 다니는 것보다는 낫다(=골프채나 낚싯대 사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말해주었지만, 남편이 철없이 공부도 소홀히 하고(남편은 현재 수험생이다) 책, 책읽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답답할까.

 

 

  ……이렇게 마음 속에서 ‘지르지 않기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면 매월 3일이 지나간다. 그러면 남은 27일 동안은, 새로 나온 전자책, 특가 할인하는 전자책들을 쭉 훑어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아, 역시 지를 걸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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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들은 이 소설의 내용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느냐고, 극단적인 사례만 모아놓은 것이 아니냐고.1) 다른 한편에서는 이 소설의 내용을 가지고 이렇게 평한다. 소설로서의 미학이 부족하다고, 단순히 우리 사회의 현상을 르포처럼 기록한 것이라 문학적인 가치는 떨어진다고.2)
  나는 이들 모두에게 묻고 싶다. 대체 '현실'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또 무엇인가?

  문학은 그 자체로서의 미학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주장은 문학이 언어예술이라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다. 문제는, 문학을 둘러싼 현실의 자장을 애써 무시하면서 문학의 미학을 제일로 여기는 이른바 '예술지상주의'의 수호자들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맞다면 오늘의 문학은 미학적 가치가 부족해서 외면받고 있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가. 그 미학이라는 것, 사실은 낡고 비루한, 누구네들만의 미학은 아닌가.

  '책의 위기'라는 말은 지난 십수 년간 꾸준히, 지루한 돌림노래처럼 되풀이되었다. 정작 그 말은 사람들이 문학에서 무엇을 읽고 싶어하는지를 간과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아니, 어쩌면 이것도 모른 '척'한 것일 수도.


  입때껏 한국 사회는 여성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겼다. 있어도 거짓인 것처럼, 사실이 아닌 것처럼 취급했다.
  한국문학이 독자로부터 지속적인 호응을 얻지 못한 데에는, 독서와 문학에 관심이 많은 여성 독자를 타자화하고 그들의 서사를 주변화했다는 것에 그 이유가 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이유는 아니며, 노력하는 작가들이 지금에는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허나 어쩌랴, 못난 사람들이 목소리가 크다는 법칙은 문단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과 관련하여 현재 돌아가고 있는 꼴을 보라. 그네들은 자기들이 잘난 줄로 알고 있는 천하의 못난놈들이다.)  

  이제는 흐름이 변하고 있다. 이 흐름은, 비록 언젠가는 더디어지거나 또다른 흐름으로 바뀔지언정,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1) 2017년 7월 31일 현재 알라딘의 해당 작품 100자평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반응을 '가끔' 접할 수 있다.

2) 문학평론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물론 이렇게 직설적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하나는 SNS에서 확인했고(그 분은 "82년생 김지영"하고 "은교"에 똑같이 별 세 개를 주더라. 어이가 상실됨), 다른 하나는 문예지에서 봤는데, 훑어보기를 한 것이라 내가 오독한 것일 수도 있다.)

 

 

 


 

 

*오늘의 작가상 후보작 응원 이벤트에 남길 코멘트였는데, 길이 제한이 칼같이 지켜져서(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개인 서재로 옮겨 쓴 생각임을 밝힙니다. 옮겨 쓰며 수정을 조금,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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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누이
싱고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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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시인이 되고 싶어서 시를 많이 읽은 적이 있다. 시인이 되려면(=등단을 하려면) 시를 ‘잘’ 써야 하는데, 잘 쓰려면 우선 시를 많이 읽어야 한다는 조언을 여러 경로로 접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고등학교 졸업을 기점으로 시 읽기에서 손을 떼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다. 앞 문장을 ‘생각했었다’라고 끝맺은 이유는, 생각만 야심차게 하고 생각만큼 많이 읽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집에는 사 두고 읽지 않은 시집만 많다. 어쨌든.

  ‘시인 되기’에 대한 미련이야 아직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그러니까 남들보다 시를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던 시절보다는 확실히 시를 덜 보는 요즘이다. 그렇다고 시에 대한 감각이 아예 제로베이스로 돌아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생활이 목표하는 바가 단순해지다 보니 단순한 사고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시 읽기가 그 경향에 맞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것이 낫겠다.

  그러니까, 예전에 시를 조금 읽긴 읽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시와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는 초심자를 위한 시‘선’집도, 눈 밝은 시 마니아를 위한 시집이나 시 ‘전’집도 애매하기만 하다. 초심자와 마니아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나 같은 독자에게 다시 시 읽기의 즐거움을 매개해 줄 책이-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없었다.

 

  『詩누이』의 저자는 시인이다. 시인은 아무래도 시와 친연한 사람. 시를 보는 안목이 빤하지는 않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시와 너무 친연하고 익숙한 나머지 시가 막연히 어렵고 낯선 사람들에게 어떤 고난이도의 ‘과제’를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가질 수 있다(“어때요. 참 쉽죠?”). 시의 목록을 찬찬히 보았다. 앞의 기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과 뒤의 우려가 현실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낌적으로’ 느낄 수 있다.

  ‘느낌적으로’라는 말은 중요하다. 학교에서는 언어와 사물이 일대일로 대응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과 사람의 일, 세계에서 목격하는 사물과 현상들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언어를 현실에서 단박에 찾아본 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원래 세계는 복잡하다. 그리고 우리는 늘 그 복잡함에 어울리는 언어를 찾지 못해 주저하기 마련이다. 그저 ‘느낌’으로 우리 주위의 감정과 일과 사물과 현상을 파악할 뿐이다. 그 주저하는 가운데, 언어의 첨단을 탐색하는 시도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시(詩)다. 그래서 시의 언어는 ‘느낌적’이다. 어떠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詩누이』의 그림은 시의 이러한 ‘느낌적’인 성격과 어울린다. 시와 최소한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풀어가는 에피소드도 있고, 시의 구절을 이미지화한 에피소드도 있고, 시의 이미지를 고유한 서사로 변주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들 그림-이야기는 시의 해석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받았던 시 교육을 생각해 볼 때 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가 그림 안에 숨어 있을 것도 같지만, 그런 것 없다. 이 포근한 만화는 우리로 하여금 시를 더 잘 ‘느끼게끔’ 해 주는 역할을 할 따름이다.

책 띠지에 있는 ‘토닥토닥’이라는 단어가 나로 하여금 이 책의 성격을 오해하게 할 뻔했다(띠지에 있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시로 ‘마음의 온도’를 맞춰주는 싱고의 ‘토닥토닥’ 웹툰 에세이). 그러니까, 섣불리 자신과 독자를 위로하려 하는, ‘힐링’ 계열의 책으로 잠깐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생각이 짧았다. 시는 아무 것도 단정하지 않는다. 앞서 나는 이 책의 그림(자꾸 그림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저자님께 양해를!)이 시의 성격과 어울린다고 했는데, 단일한 해석을 내리거나 섣부른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책의 그림과 시는 닮아 있다. 그러므로 또한 어울린다.

  “이 책에서 봤던 시와 그림이 떠오른다면, 그것대로 보람”일 것이라는 저자는 마음껏 보람을 느껴도 좋을 것 같다. 나만 하더라도, 이 책의 그림에서 보았던 차분한 유머에 피식거렸던 순간, 시와 그림의 절묘한 컬래버레이션에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던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책의 유일한 결점(?)이라면, 제목이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어떠한 ‘느낌’. 짐작건대, 대다수의 기혼 여성들에게 ‘시’자가 앞에 붙은 존재들은 마냥 편한 느낌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댁, 시누이 등등……. 부디 그러한 ‘느낌’ 때문에 이 책이 일부 독자들에게 부수적인 외면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객쩍은 생각을 해 본다. 이런 시누이라면, 시를 즐거이 나눌 수 있는 누이-언니라면 나로서는 언제나 환영이다.

 

ps. 글의 제목은 블리자드 사의 게임 ‘오버워치(Overwatch)’ 등장 영웅 중 한 명인 트레이서(Tracer)의 대사("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이야!")를 변용했다.

 

 


 

*본 서평은 ‘<詩누이> 사전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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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1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내용이 쉬울수록 좋아요. 그런데 내용이 쉬운 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아마추어 시인이 쓴 시가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천대받습니다. 표현이 어설퍼도 시를 읽을 때 좋은 느낌을 가졌다면, 그것도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의과도기 2017-06-19 23:56   좋아요 1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읽는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시는 좋은 시입니다. 몇몇 지하철 시나 SNS에서 공유되는 창작 시 같은 것들에서, 감정이 절묘하게 포착된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쉬운 시를 무시하는 경향은, 아무래도 중등학교에서 시를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문학 갈래‘라고 전제한 후 시 교육을 한 것에 따른 부작용 같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오는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읽지 않고 ‘여기 뭔가가 더 있을 거야‘라고 의심하고 고민하다 보니 결국에는 시 읽기를 포기해 버리는 거지요. 우리가 언제부터인지 잃어버린 ‘느낌적인 시 읽기‘에 이 책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
 

  한때 주위 사람들에게 요즘 읽을 만한 한국 소설가로 장강명을 첫 번째로 권했던 때가 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권하지 않는다. 우선 요즘은 나에게 ‘읽을 만한 책이 무엇인지’ 의견을 묻는 사람이 없다. 또한, 장강명을 탐독했던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인식 체계의 격절이 있다. 유신 시절의 김지하와 지금의 김지하 사이만큼의 격절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장강명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 리뷰를 쓰지 않아 독서 이후의 느낌이 어땠는지 떠올릴 만한 단서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을 테니까 계속 찾아서 읽었겠거니’ 하는 생각이다.

 

   그의 등단작인 『표백』은 독서기록을 찾아보니 2013년 여름에 읽었다. (그러고 보니 이때는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한국 소설을 정말 많이 읽었던 때다. 현실로부터 무작정 도망가는 데에는 이야기만한 게 없지 않은가 말이다. 어쨌든.) 그 이후로 한동안 ‘장강명’이라는 이름으로 인상적인 작품이 발표된 적은 없었다. 내가 당시 『표백』에 대해 가진 인상이라면 ‘한겨레문학상’이라서 가능했던, 적당히 잘 만들어진, 적당히 사회적인 소설이라는 것뿐. 뭐, 앞으로 작품 활동이야 계속 하시겠지요, 건필을 바랍니다. 이 정도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장강명’이라는 이름을 잊고 지내다, 『한국이 싫어서』를 접했다. ‘헬조선’ 담론이 한창이던 때였다. 약간의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지금-여기’의 당대성을 이렇게 잘 포착해낸 소설이 있었던가. 거기다 불필요한 수식, 미학 그 자체를 위한 미학적 문장도 없어 잘 읽힌다. 드디어 ‘한국문학은 재미도 없고 만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한다’는 세간의 해묵은 편견을 반박할 증거를 찾았다! 이 소설 이후로 나는 ‘장강명 전도사’를 자처한 것이다. 한국문학이 재미가 없어요? 고개를 들어 장강명을 보세요. (한국문학하고 담 쌓은, 그리고 정말로 ‘한국이 싫어서’ 이민 준비하고 있던 나의 지인에게도 이 소설을 추천했다. 그 소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결혼해서 잘 사는 듯 보인다.)

 

 

 

       

   전도사는 자고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큰 믿음이 있어야 하는 법. 장강명의 신작은 신작 알리미 신청해서 소식 받자마자 주문해서 읽고(『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댓글부대』), 이전 소설들은 일부러 찾아서 읽었다(『호모도미난스』, 『열광금지, 에바로드』). 단편도 찾아 읽었다. 계간 문학잡지 『세계의 문학』(민음사 간, 지금은 폐간되고 없다)에 게재된 「알바생 자르기」,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단편 하나 더(파업 참여자/관계자의 삶을 건조하게 취재하듯 쓴 단편소설이었다), 『다행히 졸업』에 수록된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까지. 글을 쓰는 이 시점까지 읽지 않은 장강명의 작품은 『한밤의 산행』 수록 단편, 『뤼미에르 피플』, 이 둘 뿐이다. 물론 다른 지면에 내가 확인하지 못한 작품이 실렸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찾아보고 싶지는 않다. 전도사는 어쩌다 냉담자가 되었을까?

 

 

 

  장강명을 탐독할 때 그가 출연한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더 테라스’를 유튜브로 찾아 들은 적이 있다. 정확한 워딩이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는 여기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을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 아직 내가 본격적으로 페미니스트 정체화를 하기 이전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2016년이 되고, 그의 본모습(?)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시작은 ‘악스트를 위한 변명’(링크)이었다. 은행나무에서 출간하는 문학잡지 악스트는 매 호마다 작가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익명의 SF 소설가 ‘듀나’와의 인터뷰가 그 준비의 무성의함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에 ‘알트SF’라는 1인 SF 웹진이 악스트의 인터뷰를 비판했고, 은행나무 출판사는 여기에 법적 어쩌구 하는 문제를 언급해 결국 알트SF는 무기한 휴간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 장강명의 저 글이 드러난 것이다.

  초록창에 ‘악스트를 위한 변명’ 검색하면 나오는 블로그 글(링크)에서도 비판하고 있지만, 그는 ‘한국 SF 독자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글을 쓴다는 것을, 은행나무 출판사나 악스트 측으로부터 어떠한 부탁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굳이’ 강조하면서 객관적으로 양측(악스트-은행나무/알트SF)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기술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은행나무-악스트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나는 이 글을 ‘물타기의 전형’이라 판단했다.

 

 

 

 장강명의 첫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행』은, 출간 전 인터넷 연재분만 읽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이다. 읽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부분들이 있었다. 가령 폴리아모리에 대한 언급 같은 것들(링크).

 

 

 

 

  올해 들어서는 한국일보에 칼럼도 종종 쓰는 것 같은데, 그 중 하나를 보고 나는 문자 그대로 기함했다. 그 제목부터가 대단하다. ‘심오롭고 공허한’(링크). 지금의 내 기준에서 보면 첨삭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가장 심각한 부분은 이것이다. 그는 ‘심오로운’, 그러니까 심오한 것 같지만 사실은 별 뜻 없는 문장이 SNS에서 널리 확산되며, 그 중 일부는 ‘위험하거나 해로운’ 것이라 규정했다. 그 대표적 예가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 같은 문장이라고 한다. 이 ‘심오로운’ 문장이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구분하면서 살 것이라며 농을 들었는데, 그 아래 문단에서 ‘장학생 선발은 차별 없이 어찌 하나? 형사재판에서 범죄자 양형은 차별 없이 어찌 하나?’라는 요지의 문장들을 발견하다 보면, 그가 ‘차별’과 ‘구분’을 제대로 ‘구별’하고 있는지부터가 의심이 드는 것이다. 때마침 이 글을 내가 읽은 시점은 군인의 신분으로 동성애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A대위에게 군사법원이 유죄를 선고한 날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이러한, 인간 이하의 일이 너무 태연하게 일어나는 것을 차마 예측하지 못하고 무려 2주 전에 이런 글을 썼으니까 이번 일과 상관이 없을까? 나는 오히려 그와 같은 부류가 더 심각하다고 본다. 레드홍이나 태극기부대, 일베처럼 차별을 대놓고 조장하는 이들은 그래도 사회 전반의 교양 수준이 올라가면 걸러내기가 쉽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는 기자 출신이다. 문장 수련을 다년간 받은 사람이다. 그것은 자연히 소설에 드러났고, 기사문과 같은 명확하고 건조한 문장은 그가 쓴 소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여기에 독자들이 많이 호응해 주었다. 그런 그가 소설 아닌 글을 쓴다. 사실과 판단, 개념과 오개념을 섞어서 쓰고, 논점을 교묘하게 흐린다. 나는 그가 ‘몰라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산문을 읽고 대놓고 책잡을 사람들이 사회적 소수파밖에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렇게 쓰는 것이다. 장강명의 산문에 나타나는 이런 ‘심오로운’ 문장들에, 의외로 많은 이들이 납득을 한다. 그리고 진정한 ‘숙의’는 이 지점에서 멈춘다. ‘숙의’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많은 말들을 논의의 차단이라고 받아들이시면, 아, 예. 할 말이 없어집니다. 전 ‘논객’이었던, 곧 ‘페미니즘의 억지를 고찰’하는 책을 낸다는 모 씨가 생각나는군요.

 

  이쯤 되니, 장강명이 ‘진보가 좋아하는 주제들 적당히 믹스하면서’ 글을 썼을 뿐이라는 비판이 어느 정도 와 닿기도 한다(링크). 그런데 이걸 반대로 생각해 보면,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작가들은 왜 작품을 이렇게 못 쓰는가? 예전에 이우성이 장강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인터뷰에도 이런 문제의식이 포함되어 있다(링크).

  이런 점에서 장강명은 나에게 애증이다. 내가 여전히 과문한 탓이겠지만, ‘지금-여기’의 현실을, 선명한 서사와 함께 환기하며, 동시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문제의식을 떠올리게끔 하는 소설을 쓰는 동시대 작가는 한국 문단의 규모에 비하면 초라하리만큼 적다(진보연하면서 막상 자기 성찰도 안 하는 분들이 일단 한 다스다). 장강명이 그 초라하리만큼 적은, 몇 안 되는 동시대 작가에 해당한다. 소설만 보면 그렇다. 그 가치를 높이 산 증거로, 작년에 학교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때 학생들에게 장강명의 단편을 읽히고 토론을 진행했다. 물론 ‘성인의 현실’이 학생들에게 곧이곧대로 와 닿겠냐마는, 그래도 한국전쟁기나 산업화 시대 소설보다는 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불행히도 교과서에는 그런 ‘옛날’ 소설들이 많다). 소설만 보면, 장강명의 몇몇 소설은 학교 현장에서 주로 가르쳐지는 대부분의 ‘아재 문학’보다 낫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이전보다 덜 읽는 지금도 장강명의 신작은 뭐가 나왔나 찾아보게 된다(사실은 신간 알리미를 해제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이 글을 처음 쓰고자 한 이유도 장강명의 최근작 『아스타틴』에 대한 감상평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 소설은 스페이스 오페라다. ‘지금-여기’를 연상케 하는 요소가 1도 없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로운데, 초지능의 후계자들이 초지능의 자리를 놓고 서로 살육전을 펼친다. 최후의 생존자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어, 잠깐, 나 이런 이야기 본 적 있어.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자백(?)한다. “이 소설은 SF 명작들의 영향을 듬뿍 받았고, 저는 글을 쓰며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 SF 세계관 속에서 벌어지는 서바이벌 게임은 스티븐 킹의 『런닝 맨』, 타카미 코슌의 『배틀 로얄』,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에 멋지게 나온 바 있습니다. 특히 『런닝 맨』과 『헝거 게임』은 그런 서바이벌 게임들이 TV로 방영되고, 시청자 반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SF 장르가 특히 한국 문학계에서는 변방 취급을 받고 끊임없이 주류로부터 ‘후려치기’를 당하는 만큼,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인용한 부분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이 작품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다. 다만 이 작품을 ‘굳이’ 봐야 하는 이유를, SF 문외한인 나로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작품에 ‘지금-여기’를 연상케 하는 요소가 하나 있기는 하다. 이야기 말미에 주인공 ‘사마륨’의 행보와 관련한 내용인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다. 2017년 상반기 현재가 정말 잘 연상된다는 것만 이야기하겠다.

 

  나는 작년에 『5년 만에 신혼여행』 100자평에 이렇게 썼었다: “장강명의 문장을 변용하자면, 나는 소설가 장강명의 팬이다. 에세이스트로서의 장강명에 대해서는 견해를 다소 달리 한다.” 지금은 여기에 한 문단을 덧붙인다.

  장강명은 최근 칼럼(링크)에서 세대갈등을 다루며 베이비붐 세대와 88만원 세대가 “잘 모르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를 하나씩 추측해 써” 본다고 했다. 88만원 세대에게 모를 것이라고 추측한 이야기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 개인주의와 인권 감수성은 언어와 같다. 몇 시간 동안 공부한다고 저절로 몸에 익지 않는다. 그리고 성, 인종, 성적 지향에 대한 인권의식이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온 건 선진국에서도 상당히 최근 일이다. 나를 비롯한 기성세대들은 지금 외국어를 배우느라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기본적으로 서툴고, 아는 것도 자꾸 틀린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답한다. 언어 습득에 있어 학습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직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권 의식이 언어와 같다면, 인권에 대한 직관이 없는 사람은 인권을 배우려 하지도 않을뿐더러, 이해를 해도 잘못 이해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일부가 뛰어난 직관을 가질 수도 있고, 88만원 세대의 일부가 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충분히 숙의하고 있다. 그는 글에서 쉽게 제3자, 관찰자, 판단자의 위치를 점한다. 창작자의 사상이 교묘하게 뒤틀리면 그 흔적은 반드시 그 자신의 작품에 남는다. 나는 그가 오래도록 유의미한 작품 활동을 하길 바란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그에게는 조금 더 많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ps. 『아스타틴』 본문에 편집 오류인 듯 보이는 부분이 있어 문의를 하려고 출판사 트위터를 찾아 봤는데, 음... 총체적 난국이다.

  ps2. 악스트 사태의 이후 결과: 악스트 편집위원들이 듀나에게 공식 사과하고, 문제의 인터뷰는 악스트 인터뷰 모음집 『이것이 나의 도끼다』에서 전면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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