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읽는 한국 근대문학사
한국근대문학관 엮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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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한국근대문학사 교양서가 이 책 이전에 거의 없었다는 데 새삼 놀랐다. 한국근대문학관의 도록으로 생각지 않고 읽어도 교양서로서 충실한 책이다. 부록으로 실린 작가 소개와 작품 해제가 의외로 꼼꼼해 국문학 전공자들도 일별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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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선생님 9
다케토미 겐지 지음, 안은별 옮김 / 세미콜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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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출판사의 서평단 이벤트에 따라 출판사로부터 『스즈키 선생님』 9~11권을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학교와 사회는 공통점이 많다. 그렇기에 학교는 종종 사회라는 추상명사를 대신해서 호명되는 하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가령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라는 명제에서처럼.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교 구성원을 온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성 세계의 시각에서 출발한 수사일 뿐, 학교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다. 다시 말하자면, 학교 문제는 곧 하나의 사회 문제이며, 학교로부터 출발한 문제의식은 현재 학교에 속하지 않은 사회 구성원들도 깊게 숙려해야 할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스즈키 선생님』 9~11권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사건은 세 가지이다. 학생회 선거 출마자들의 연설회, 문화제를 앞두고 이루어지는 스즈키 선생님과 2-A반의 연극 지도 및 연습, 문화제 직전에 발생한 ‘공개 강간 예고’ 사건. 여느 학교에서 경험할 수 있을 법한 일과 일상에서 차마 상상으로라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 혼재되어 있지만 이 사건들의 기저에는 독자들이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의식들이 물음표를 드리우고 있다. 작가는 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한 니시의 입을 빌려서 ‘현대 대의민주주의 제도(시스템) 자체의 정당성/제도 하에서의 한 표가 지니는 가치’를 따져 묻고, 스즈키 선생님과 오타의 갈등을 통해서는 ‘격려와 위로의 딜레마’를 제기하며, ‘공개 강간 예고’ 사건 이후의 일들을 묘사하며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재고한다. 이 문제와 고민들이, 과연 학교에서만 발생하는가?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들의 사회’로 나아가면 모든 문제는 개인의 고민과 노력 없이도 저절로 해결이 되는가?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 세상을 살아가는 성원 모두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이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더 많은, 유효한 질문들이 필요하다. 『스즈키 선생님』을 읽으면서, 우리는 더 많은 질문에 답할 힘을 얻게 된다.

  『스즈키 선생님』 완독자로서의 나는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스즈키 선생님』을 읽는 경험은 분명 가볍지 않을 것이다. 만화이지만 결코 오락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느 지점부터는 만화를 읽는다는 느낌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스즈키 선생님』은 성가시고 복잡하게 여겨지는 질문을 자주 건넬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들을 귀찮아하지 않고 내면화하여 스스로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성장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스즈키 선생님』의 마지막 권을 덮으며 독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다는 아니더라도, 나의 이야기였어, 라고.

  개인의 내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성장이 왜 필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장은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성장한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사람들이 손을 잡을 때, 비로소 사회는, 세상은 바뀔 수 있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학교 사회를 한정지어 이야기해 본다면, 지금도 분명 문제는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 모두에 산적해 있지만, 과거보다는 나아졌다. 적어도 현재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촌지와 체벌,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거보다 나아졌으니 현재에 만족하라’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처럼 여겼지만 실은 그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인식하고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확산될 때, 그리고 그 열망이 변화를 꿈꾸는 행동에 힘을 더할 때에만 사회는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스즈키 선생님』을 읽는 나의 경험은 복잡다단했다. 때로는 스즈키 선생님의 견해에 동조하고 때로는 길항하며 많은 것을 고민했지만 답이 명쾌하게 나오지 않은 영역이 많다. 그러나 흔들리고 고민하는 상태 그 자체가 성장의 가도 위에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지금 겪지 않는, 감히 상상되지도 않는 시련 앞에 서게 될 때, 『스즈키 선생님』을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의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기 위해, 그리하여 더 나은 학교와 세상에서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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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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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소설가의 작품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무엇이 나를 한 번도 읽어 본 적 없는 소설가의 작품으로 인도했을까, 문득 생각해 본다. 발랄한 표지 디자인 때문에? ‘보건교사 안은영’이라는 제목 때문에? 아, 그렇다. ‘대체 보건교사를 주인공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을까?’라는 (반쯤은 의구심에 가까운) 호기심이 제목을 보는 순간 생겨났고, 그 호기심이 나를 이 소설의 독서로 이끌었다. 내 기억 속의 보건교사란 도무지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 없는 존재다. 담임을 맡아 학생들의 생활 지도를 담당할 수도 없고 주요 교과목을 가르치지도 않는, 그러나 어쨌든 학교에 없어서는 안 되는, 위치가 ‘애매한’ 교사.

  그러나 소설 속 보건교사 안은영은 전혀 애매하지 않다. 오히려 특별하다. 그는 특별한 능력,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많지만 그것이 역설적으로 ‘문제 없음’을 증명하는 사립학교 M고는 안은영의 능력과 홍인표의 조력이 더해지면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모이는 관문으로 변모한다. ‘이야기가 될 수 없는 밋밋하고 평평한 현실을 가공해 이야기로 만든 것’이라는 소설의 정의를 따른다면, 『보건교사 안은영』은 근래의 소설 중 가장 소설다운 소설인 셈이다.

  하여, 밋밋한 현실에 놓여 있던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입체적인 감정의 지류들을 지나올 수밖에 없다. 혜현과 승권이 애정행각(?)을 보이는 부분에서는 그 나이 대의 자식을 둔 부모처럼 흐뭇해했다가, 안은영이 중학교 때 단짝이었던 김강선과 조우하는 대목에서는 몸의 일부분이 시큰해지고, ‘온건 교사’ 박대흥이 겪는 고초를 보며 발을 구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내내, 씩 하고 미소를 지을 것이다. 재미있으므로.

  아니, ‘재미있다’라고만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다고 고백하지만,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얻을 수 있는 쾌감은 통상적인 의미 이상의 것이다.

  쾌감에도 급이 있다. 타인의 고통에 뿌리내리고 자라는 저열한 쾌감이 있는가 하면, 감히 비틀거나 넘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견고함에 야유하는, 누구도 다치지 않으면서 즐거울 수 있는 쾌감이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얻을 수 있는 쾌감은 이런 것들이다. 명랑하고 활기찬 인물들을 대하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 ‘고등학생이면 벌써 다 큰 것 같지만 그래도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어른들을 그만큼 잘 믿기도 힘들다. 믿지 말아야 할 어른들까지 철석같이 믿어 버린다’(38),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233)와 같은 문장에 담긴 성찰과 ‘때이르고 폭력적인 죽음’(81)을 안타까워하는 구체적인 목소리를 마주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 이러한 쾌감들은 건강하다. 미국 코미디언 코난 오브라이언의 개그에 왜 많은 한국인들은 열광을 하는가? 간단하다. 지금껏 우리는 쾌감을 ‘저열함’에 뿌리박아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높은 급의 쾌감은 그렇지 않다.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2015년 여름, 한국 문단을 뒤흔든 사태 이후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말들 중 하나는 ‘한국문학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이 진술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하나, ‘미학적’이고 ‘문학적’으로 곧은 마름새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았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이제 나는 ‘재미없는 한국문학’이라는 테제를 깰 하나의 실증적 사례를 찾았다. 여간해서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과 흥미로움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에로에로 에너지는 생각보다 대단하니까요.”(40)

 

  ps. 이토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토록 재미없게 소개해서 작가께 죄송한 마음이다. ‘언젠가 다시 또 이어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이제 그의 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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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잡이들
은승완 지음 / 들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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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한국만큼 치안 상태가 좋은 나라가 없다는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한국은 해가 지고 난 한참 뒤에도 도시 번화가의 불이 꺼지지 않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며, 어지간해서는 총기 사고가 발생할 일도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의 현상일 뿐,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자의 총칼을 벼리고 있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 보상의 시스템이 무너져 더 이상 시스템에 의한 구원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누구든, 무엇이든 쏠 준비가 되어 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총잡이들’은 크게 ‘한 방’을 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주변부 인생을 살고 있는 세 사람이다. 등단했으나 소설 창작보다는 생계유지를 위한 ‘잡문 콘테스트’에 매진하는 공노명, 마찬가지로 청탁을 거의 받지 못해 잡문 콘테스트로 눈을 돌려 업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소정훈, 개인적으로 큰 빚을 져 공노명과의 협업을 시작하게 된 최보희. 3억이라는 돈은 표면적으로 ‘좋은 소설’에 상응하는 대가이지만, 세 사람에게는 이들을 모이게 해 준 유일무이한 동기이자 최소한의 구속점이다. 문학은 애초에 증발했다. 단순한 동맹에는 인정이나 배려가 설 자리가 좁다. 3인조가 서로에게 잠깐씩 인간다워졌다가 다시 ‘찌질’해지는 모습을 보는 독자는 그들을 마냥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는 독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총잡이들』은 일차적으로 소설가 소설이지만, 소설(또는 예술)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만 천착하는 이야기로 머무르지는 않는다. 소설은 묻는다. ‘가치’와 ‘과정’이 시민 개개인에 의해 내팽개쳐진 사회는 안전하고 평온한 사회인가? ‘목적의 왕국’에서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악당이 된 총잡이들. 그들은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 하지만 그들이라고 최고의 총잡이를 꿈꾸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비겁한 악당이 되고 싶었을까. 천만의 말씀일 것이다. 단지 그들은 가난에, 삶에 패배한 자들일 뿐이었다.’(145-146)

 

  공노명은 공모전 제출용 소설의 속 이야기를 쓰며, 속 이야기의 배경인 미국 서부 시대에 자신의 상황을 대입하다 악당들에 대해 이와 같이 생각한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타고난 악당’은 없다. 악당은 ‘패배자’, 그것도 비자발적 패배자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각자의 주판알을 굴렸던 최보희와 소정훈, 소설가인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는 ‘총질 권하는 사회’에서 마지못해 총을 들었을 뿐이다. 공노명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삼류 총잡이들, 조금은 악당인 그들을 같은 눈높이에서 쳐다본다. 그 시선에는 순수한 미움이 없다.

  3인조 개개인에게서 비치는 낭만주의적 문학관은 이 소설의 조준점이 어디인지 의구심을 품게 할 수도 있겠다. 완전한 전복을 꿈꾸었던 독자들로서는 김이 새는 부분도 있겠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소설가 소설’이라는 익숙한 해석의 틀을 들어내고 나면, 이 소설은 이제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가? 아니, 그 전에 총은 왜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총을 내려놓고 옆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는가? 한국 사회의 축도인 노량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서부극의 배경음악처럼 대혈투를 암시한다. 대혈투를 실제로 맞이하기 전에, 우리는 이 소설을 매개 삼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나는, 얼마나 안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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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찾아 헤맨 나날들 - 제1회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 당선작
최재원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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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시간은 직선적이고 비가역적이다. 시간의 절대적인 질서 앞에서는 모든 인간의 조건이 구차할 정도로 평등해진다. 그렇기에 인간은 후회와 미련으로 채색된 과거를 떠올릴 때면 어느 가요의 노랫말을 빌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이라고 한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시간여행’을 모티프로 한 타임리프 서사물이 끊임없이 창작되는 이유이다.

  시간여행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가장 먼저 하고자 할까? 과거의 어리석음과 미숙함 때문에 생겨나 결과적으로 현재의 불행과 불만족을 불러온 ‘하나의 계기’를 시정하고자 할 것이다. 단 한 번의 계기(또는 기회)로 인해 어긋나버리는 인간사의 영역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랑, 그 중에서도 특히 지나가 버린 사랑, 이루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이다.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찾아 헤맨 나날들』(이하 『스테파네트』)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시간여행 서사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주인공인 ‘나(이민혁)’는 전처와 이혼한다. 이혼 수속에 마침표를 찍던 날, 13년 동안 연락이 없던 옛 연인 ‘세은’의 편지가 ‘나’에게 도착한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편지. ‘나’는 어머니가 예전부터 간직하고 있던 부적을 건네받고, 한 노파를 찾아간다. ‘나’는 옛 사랑을 현재의 사랑으로 복원하기 위해 노파로부터 제안 받은 방법, 즉 시간여행을 선택해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시간여행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기계장치의 신’처럼 여겨진다.

  『스테파네트』는 바로 이 지점, 독자가 ‘이제 과거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군’이라고 예상하는 지점에서부터 서사 전통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노파가 제시하는 시간여행의 (양자택일해야 하는) ‘옵션’이라든지, ‘나’가 과거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적’인 문제라든지 하는 것들은 ‘시간여행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시간여행은 문제에 대한 열쇠라기보다는 오히려 문제 그 자체이다. 시간여행이 상상계에서 현실계로 내려오면서 ‘나’는, 그리고 ‘나’의 행적을 따라가는 독자는 이전에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문제들을 생각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나’와 독자는 한 가지 다짐을 얻는다. ‘일단 2000년에 머무는 동안에는 2000년에 충실하자’(78)라는 다짐.

  『스테파네트』는 시간여행이라는 현상의 기이함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저 ‘나’와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현실을 겪게 할 뿐이다. ‘잘 쓴 소설’을 판별하는 기준 중 하나로 ‘소설 속 현실이 소설 밖 현실에 얼마나 울림을 주는가’를 든다면, 『스테파네트』는 충분히 ‘잘 쓴 소설’이다. 독자는 ‘이민혁’이 시간여행을 통해 넘어온 과거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보며 뜻밖에도 인간과 관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감지할 수 있다. ‘이민혁’이라는 캐릭터가, 그와 동반하는 ‘현재로서의 과거’가 가져다주는 ‘현재성’ 때문이다.

  가독성 있는 서사를 결말의 반전까지 모조리 통과하고 나면, 『스테파네트』가 무수히 많은 ‘떡밥’을 남긴, 완결성이 2퍼센트 부족한 소설임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있다. 『스테파네트』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 미처 챙기지 못한 것, 놓친 것, 흘러가 버린 것들의 의미를 ‘지금, 여기’에서 다시 찾도록 도와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민혁’이 ‘시간여행’을 통해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찾았던 것처럼.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이라고 가끔이나마 노래 부르는 이들에게라면 더욱 더 이 소설이 필요하겠다.

  p.s. 그런데 정말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찾았느냐고? ‘이민혁’은 밤하늘의 별을 자의적으로 이름 지어 부르던 전력이 있다. 앞의 문장으로 답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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